나무아미타불...()....
순야착지님의 '신심명 강설'을
몇 차례에 걸쳐 싣도록 하겠습니다....고맙습니다..()..
그 첫 순서로 순야님이 정리하신
<신심명>을 쓰신 3조 승찬대사의 기록을 먼저 싣습니다.
삼조 승찬 (三祖 僧璨) 대사: '순야<신심명>강설'에서
중국 선종의 제3대 조사이신 승찬대사에 관한 기록은 중국의 선종관계 기록의 몇 곳에서 보이고 있지만, 아주 간략한 내용뿐이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제3권의 혜가선사와 승찬대사에 대한 기록을 보면,
중국 수대(隨代)의 선승인 승찬 대사(?~606)는 서주(徐州)출신으로 출사 전의 성명도 알려져 있지 않다. 여러 기록을 종합해 본다면 젊은 시절 풍질(風疾-문둥병)에 결려 여러 지역을 방랑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달마(達磨,達摩) 대사께서 소림(少林)에서 혜가(慧可)대사에게 교화를 부탁하고 서쪽으로 돌아가신 뒤에, 혜가가 대사가 이어서 현풍(玄風-심오한 가르침,불법)을 드날릴 법제자를 널리 구하였다.
북제(北齊)의 천평(天平) 2년(송원주宋元注에 따르면 천보天保 2년 辛未年 신미년 즉 551년이어야 맞다 하였음)에 이르자 마흔 살이 넘어 보이는 한 거사가 자기 이름도 밝히지 않은 채로 불쑥 찾아와서 대사께 여쭈었다.
“제자의 몸이 풍질에 걸렸습니다. 청하건대 저의 죄를 참회시켜 주십시오.”
대사가 말씀하셨다.
“뇌를 찾아온다면 자네를 참회시켜 주겠네.”
거사가 묵묵히 있다가 말씀드렸다.
“죄를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그대의 죄를 참회시켜 마쳤다. 마땅히 불법승(佛法僧)에 의지하여 살아야 하느니라.”
“지금 스님을 뵙고 이미 승보(僧)는 알았습니다만, 무엇을 불보(佛)라 하고 법보(法)라고 하는지를 모르겠습니다.”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이 마음이 곧 불보이고 이 마음이 곧 법보이다. 법과 불이 둘이 아니며, 승보도 또한 그러하느니라.”
“오늘에야 비로소 죄의 성품이 안에도 있지 않고 밖에도 있지 않으며 중간에도 있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마음이 그러하듯이 불보와 법보도 둘이 아닙니다.”
대사께서 깊이 법기(法器)라고 여겨 곧 머리를 깎게 하고 말씀하셨다.
“그대는 나의 보배이니, 이름을 승찬(僧璨-승가의 옥구슬)이라 하라.”
그해 3월 광복사(光福寺)에서 구족계를 받으니, 그로부터 점차 병이 나아져서 2년 동안 대사를 곁에서 모셨다. 대사께서 이윽고 당부해 말씀하셨다.
“보리달마 대사께서 멀리 천축으로부터 오셔서 정법안장(正法眼藏-깨달음의 본체)을 은밀히 내게 맡기셨다. 내가 이제 그대에게 정법안장과 아울러 달마 대사께서 믿음의 표시로 주신 가사를 주노니, 그대는 마땅히 잘 지키고 보호하여 단절되지 않도록 하여라. 나의 게송을 들어라
본래연유지本來緣有地하야
인지종화생因地種華生하나
본래무유종本來無有種이면
화역부증생華亦不曾生이리
본래 땅이 있음을 만연하여
땅으로부터 씨앗이 꽃을 피우나
본래 씨앗이 있지 않았다면
꽃도 또한 일찍이 피지 않았으리.”
대사께서 가사와 법을 전하시고는 또 말씀하셨다.
“그대가 내 가르침을 받았으나 마땅히 깊은 산속에 들어가 교화에 나서지 말라. 곧 나라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승찬이 여쭈었다.
“스승님께서 이미 미리 아시니, 바라옵건대 가르침을 베푸소서.”
대사가 말씀하셨다.
“내가 아는 것이 아니다. 이미 달마 대사께서 (스승이신)반야다라 존자의 예언인 ‘마음속에 두면 길하나 밖으로 드러나면 흉하다’는 것을 전하신 것이다. 내가 연대(年代)를 따져 보니 바로 지금이다. 마땅히 앞의 말을 자세히 생각하여 세상의 재난에 걸려들지 말라. 그러나 나는 또한 과거생의 허물이 있어서 지금 갚아야 한다. 잘 가고 잘 행하다가 때가 되면 전하도록 하라.”
승찬대사는 법을 전해 받고는 서주(舒州)의 환공산(晥公山)에 은둔하셨다. 그러다가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불법을 파멸시키려 하자 대사께서는 태호현(太湖縣) 사공산(司空山)을 오가시며 일정한 거처없이 10년을 지내셨다. 당시 사람 중에 승찬 대사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수(隨)나라 개황(開皇) 12년 임자년(壬子年, 592)에 열네 살에 불과한 도신(道信)이라는 사미가 찾아와서 대사께 절하며 말씀드렸다.
“바라옵건대 큰스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해탈의 법문을 말씀해 주옵소서.”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누가 너를 속박했느냐”
“아무도 속박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해탈을 구하는가?”
도신이 이 말 끝에 크게 깨닫고 9년을 힘껏 모셨다.
뒤에 길주(吉州)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더욱 열심히 시봉하였다. 대사께서는 자주 깊고 미묘한 법으로 도신을 시험하다가 인연이 익었음을 알자 곧 가사와 법을 부촉하고서 게송을 읊으셨다.
화종수인지花種雖因地하야
종지종화생從地種花生이나
약무인하종若無人下種이면
화종진무생花種盡無生이니라
꽃과 종자는 비록 땅을 의지하여
땅으로부터 종자와 꽃이 나지만
만일 종자를 뿌리는 사람 없으면
꽃도 땅도 다하여 생겨남 없도다.
대사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옛날 혜가 대사께서는 나에게 법을 전한 후 바로 업도(鄴都)로 가시어 30년 동안 교화하시다가 입적하셨는데, 내가 이제 그대를 만나 법을 전했거늘 어찌 여기 머물겠는가.”
그리고는 곧 나부산(羅浮山)으로 가시어 2년 동안 유행하시다가 다시 옛터로 돌아오셨다. 한 달이 지나자 사대부와 백성들이 모여 크게 단(檀)을 마련하고 공양을 올렸다.
대사께서는 사부대중에게 마음의 요체를 널리 펴시고 나서 법회를 하던 큰 나무 아래에서 합장한 채로 서서 입종하시니, 이때가 수나라 양제(煬帝) 대업(大業) 2년 병인년(丙寅年, 606) 10월 15일이었다. 뒷날 당나라 현종(玄宗)이 잠지(鑑智)선사라 시호를 내렸고, 사리탑의 탑호(塔號)를 각적(覺寂)이라 하였다.
송(宋)나라 경덕(景德) 원년(元年) 갑진년까지는 무릇 4백년이 된다.
마흔이 넘도록 문둥병에 걸려 천대를 받으며 돌아다닌 세월 동안 얼마나 죽음을 많이 생각했을 것이며, 또한 업장(業障)에 대한 의문이 많았겠는가? 이 간절함이 승찬대사의 깨달음에 절대적인 밑거름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가 비록 마음 공부를 한다고 애를 쓰고는 있으나 간절함이 부족하면 불보살이 옆에 계셔도 아무 소용이 없다. 선사들께서 깨달으신 인연이 너무나 간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결과만을 요약한 것일 뿐이다. 마음속 깊이 갈무리한 의심과 정진력은 밖으로 쉽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비록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간절하게 공부하면 반드시 결과가 있게 마련이다.
#신심명: 승찬대사: 성철스님: sunya신심명강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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