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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자/ 소설에 나타난 양가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작성자일주|작성시간10.05.06|조회수196 목록 댓글 0

소설에 나타난 양가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소설의 전통성 와해와 현대소설의 양가성


金 亭 子


1. 이원성의 몰락과 양가성의 방황시대

태초에 우주는 무한한 평화와 통합의 문을 열었다. 세계는 하나의 질서, 하나의 수레바퀴를 운행하며 해와 달의 궤적에 순응하는 평화로운 행진을 거듭하였다. 만상의 위대한 힘은 세계를 온유하게 껴안고 햇빛은 그늘을 함섭浛攝하며 생명은 죽음을 함께 공유하였다. 세계는 갈등의 논리로 다스려지지 않았고 성스러운 화합의 제단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평화로운 대낮은 반란의 밤을 꿈꾸고, 단일과 통합의 세계는 혼돈과 분열을 동경하게 된다. 오랜 동안 지속되는 평온의 세계가 인간을 나태하게 만들고 쇠진하게 하였으며 통합의 질서는 붕괴되기 시작한다.
자연과 인간은 분열되고, 죽음과 삶은 등을 돌렸으며, 권력과 부요함은 빈궁과 무력함을 지배의 이데올로기로 밀어붙였다. 사랑과 미움, 빛과 어둠, 자유의지와 결정론, 선과 악은 두 개의 치열한 극으로 분리되어 버렸다. 이원성의 행진은 동일자, 힘있는 자의 성전을 마련하고 타자의 영역을 박탈하였으며 그들을 국외자로 소외시키려 했다. 절망과 죽음, 어둠과 악마성, 가난과 무력함의 영토로 밀려난 타자들은 그것이 그들이 처한 운명의 절대성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근대성의 물결이 도도하게 일기 시작할 때까지 세계의 절대논리로 군림했다. 그러나 이원성의 빗금에 의한 힘의 구도는 의혹의 강한 정서에 휘말리게 되고 타자들의 반란에 부딪치게 된다. 도대체 삶과 죽음의 경계는 무엇이며 선과 악, 사랑과 미움의 빗금은 그어지는 것인가? 동일자의 개념은 절대적이며, 그들의 가치우위성이란 것은 어떠한 잣대로 그 적실성을 확증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러한 의문의 물결이 구체화되기 시작한 접점에서 마침내 ‘양가성’의 논리가 전개되기 시작한다. 이원의 논리는 해체되고 동일자와 타자의 구분은 그 의미를 상실한다. 양질의 생산품은 불량성의 생산품과 나란히 배열되고, 불량성의 상품들이 불현듯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날개 돋친 듯 구매력을 얻게 된다. 탈식민주의의 욕구가 불길같이 일어나며, 문학작품 속에서 악마는 천사가 되고, 어느 날 갑자기 다시 악마가 된다. 죽은자는 산자가 되어서 다시 나타나고, 만남의 기쁨은 불현듯 이별의 아픔으로 다가선다. 소설 속 주인공은 악의 대행과 선의 대행 사이를 자유롭게 왕래하며 이드와 초자아의 구분이 불가능해 진다.
바야흐로 양가성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2. 전통성 와해와 현대소설

소설은 부르주아 시대의 특수한 문학적 형식이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현대소설은 소설의 정통성 내지 전통성에 대한 가치를 상실해 버렸다. 흔히 부르주아 시대의 소설들은 서구의 경우 18세기말과 19세기 전반기의 소설들을 일컬음이다. 현대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소위 20세기 소설들은 카프카나 무질, 프루스트 등으로 비롯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 소설들은 서구의 경우 18세기 말과 20세기 전반기의 소설들을 이름이다. 현대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소위 20세기 소설들은 카프카나 무질, 프루스트 등으로 비롯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 소설들은 등장인물 및 행위체들의 진정한 모습과 가면으로서의 모습을 극명하게 대립시키고 변별하기를 좋아한다. 가면은 가상이나 기만이라고 생각하고 이 기만적 가상세계를 넘어서 진리와 본질을 발견해야 하는 것이 소설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20세기의 소설들은 더 이상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작가들은 진리나 정직성, 자유와 진정성 등에 대한 가치를 부여하려고 하지 않는다. 소설 속의 캐릭터나 줄거리, 사유 등은 이원론적인 흑백논리를 거부하고 양자의 무차별성 내지 양가성을 드러냄으로써 어느 것이 진정한 의미로서의 정의인지, 또는 진리인지를 구별할 수 없도록 한다. 그들은 19세기적 전통소설 내지 부르주아 시대 소설이 무가치한 의미론적 대립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진리와 허위, 정의와 불의, 도덕과 비도덕, 성스러움과 비속함, 이런 것들이 서로 뒤섞여 있을 뿐 그것들의 변별성을 자리 매김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며 도식적이고 체제 유지적인 목적론에 불과하다는 것이 20세기 소설로서의 현대소설이 지켜야 할 기본이라고 생각했으며, 그것들은 21세기의 초엽으로 넘어선 지금에 와서도 마찬가지의 현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현대소설의 이러한 흐름은 한국의 경우에는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한국소설의 전통성 와해는 1930․40년대의 이상이나 허준 등에서 비롯하여 50년대의 장용학, 김성한 등을 거쳐 60․70년대의 김승옥이나 최인호 등의 소설에서 적극성을 띠기 시작한다. 그들은 대체로 캐릭터의 양가성을 드러냄으로써 세계의 이론적인 대립과 변별성을 부정하고자 하였다. 특히 90년대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물결을 타고 세계의 무차별성 내지는 양가성의 문제를 심각하게 노출시키려 하고 있다. 90년대의 전반기 작가들은 주로 ‘성의 전통성 와해’를 통해 진리와 비진실, 성과 비속성의 개념을 양가성의 무차별성으로 문제화하고자 했다. 90년대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전통성 와해는 소설의 구성이나 문체, 캐릭터의 설정에서, 그리고 주체나 화자의 해체, 소설액자성의 와해 등의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났으며, 세기말을 거쳐 21세기의 초입으로 들어서고 있다.


3. 소설의 이원성과 양가성의 문제

1) 이원성과 그 극렬한 대결

소설의 전통성이 와해되는 것을 양가성의 문제로 해명하려고 할 때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야 할 것은 루카치 소설이론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는 ‘이원성’의 문제이다.
루카치는 개인과 사회적 환경세계가 서로 치열한 적대성을 이루고, 그 결과 개인은 완전한 소외의 늪으로 빠져들게 된다고 했다. 이 이원성은 소설 장르에서 모든 현상을 이원성으로서의 적대관계에 놓이게 한다. 인식과 행위, 영혼과 형상, 자아와 외부세계 사이에는 화해할 수 없는 심연이 가로놓이고, 인간은 외부세계의 냉혹함과 대결하려는 내적 생동성으로 가열한 투쟁을 벌인다. 여기서 외부세계라고 하는 개념은 루카치의 ‘제 2의 자연(Zweite Natur)을 말함이다. 제 2의 자연은 자기법칙으로 굳어지고 낯설게 되어버린 세계로서, 어떠한 개인의 의미도 더 이상 접근 불가능한 세계이며 객관적 조직의 세계, 인습의 세계를 뜻한다. 제 2의 자연으로서의 외부세계는, 외부세계가 삶의 객관화에 함몰됨으로써 무미건조한 세계가 되어 초권력적으로 군림할 때, 그것과 치열하게 대결하고자 하는 영혼의 세계 또한 무의미하게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항목의 극렬한 대립은 어느 지점에 가서는 상호간에 그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외부세계는 아무 것과도 관계없는 익명적인 사물로 전락하고 영혼 또한 그 실체가 변질되면서 확고한 윤곽을 상실하고 부유하게 된다. 외부세계와의 대립을 극복하려는 자아세계의 내면성 내지는 영혼의 세계가 너무나 강렬하게 제한되어서 마침내 붕괴되기 때문이다.
「타인의 방」(최인호, 1971)에서 우리는 이러한 현상이 현저하게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외부세계와 극렬히 맞대결하던 인간이라는 개체는 탈인격화되어서 사물화한다. 뿐만 아니라 외부세계는 인격화되어 주인공을 여기저기서 비웃고 비아냥거린다. 자신의 방에 들어온 주인공은 그것이 자신의 방인지 타인의 방인지를 구별할 수 없다. 낯이 선 방에 들어온 주인공은 거울 속에 있는 한 사나이가 자기 자신인지 혹은 낯선 사람인지를 분간하기 어렵다. 불붙는 석유곤로의 소리, 수도꼭지의 쐐쐐거리는 비웃음 소리, 전기 코드의 해괴한 비아냥댐을 느끼며 어둠이라는 실체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공포와 폭력의 주체로 변함을 감지한다. 외부세계의 모든 것에서 소외된 주인공은 자아세계의 내면성 확보를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그것은 의미 없는 허상으로 부유한다. 외부세계가 인격화함도 그것의 무의미성을 뜻함이고, 자아의 세계에서 추방당하는 주체 역시 고유한 의미성을 상실하고 마는 것이다.

2) 양가성과 이원성의 접점과 현대소설

양가성의 문제는 앞에서도 잠깐 서술하였듯이 모든 현상들의 가치를 무차별성으로 몰고 감으로써 질적 차이 내지는 대립을 와해시키려는 것을 의미함이다. 이는 바흐친이 소설 속에서 문화의 카니발화 현상을 해명한 데서도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모든 사물들은 교환가치를 가지고 있어서 상호간에 그 자리를 교환할 수 있다. 양가성은, 질은 양으로 환원될 수 있고 그럼으로써 모든 사물은 그 질적 차이를 없앨 수 있다는 ‘시장문화의 양가성’과 모든 고유한 성질들이 그 반대의 것으로 바뀌어 버리고 대립물들이 지양되며 마침내 ‘가치들의 무차별성’을 가지고 온다는 ‘문화적 상징의 양가성’으로 양대별하여 설명된다.
현대소설 속에서 이러한 양가성의 문제들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현대소설가들은 소설에서의 이데올로기적 도식주의를 부정하고 양가성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소설의 이분법적인 행위체 도식을 체제적으로 와해시켜 버린다. 소설 속에서 서사의 주체나 객체의 이분법을 와해시켜 버리고 작중인물의 가치를 측정할 수 없도록 하며 인물 상호간의 변별력을 와해시켜 버린다. 서로 극단적으로 대별되는 이데올로기를 동일한 진열대 위에 올려놓고 이들의 무차별성을 주장하며 비동일자와 동일자를 교환가치의 잣대를 활용하여 무차별성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원성의 문제에서는 세계를 자아의 내면세계와 외부세계와의 극렬한 대립으로 거론하였다. 그러나 그 극렬한 대립의 종국에서는 마침내 그 대립의 양극심급들이 의미를 상실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이원성의 양극점이 의미를 상실하고 와해되는 그 종국점에서 마침내 양가성의 문제와 이원성의 문제가 만나게 되는 기이한 인연을 맞이해야 된다.
이원성의 치열한 대결과 대립은 세계를 두 개의 논리로 양분화 한다.
반면에 양가성이란, 두 개의 논리 또는 이데올로기가 변별력을 가지고 구분되는 것을 부정하고 이들의 가치를 무차별성으로 주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원성과 양가성은 서로 반대의 출발점에서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종국에는 이들이 다시 만나게 되고, 최종적인 접점을 이루며 화해하게 된다는 묘한 관계의 숙명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4. 90년대 후반기의 소설들과 양가성의 문제

1) 다성적 인물과 캐릭터의 양가성

이승우의 「내 안에 누가 있나」를 예로 들어 본다면, 이 소설은 제목 자체부터가 작중인물의 다성적인 양가성을 설명하고 있다. 사형수의 판결을 받은 손철희라는 인물과, 그의 일대기를 쓰기 위해 출판사로부터 하청을 받은 임혁이라는 인물과, 장변호사의 심장에 화살을 꽂은 익명의 범죄자가 결코 각기 다른 인물들이 아니고 하나의 궤로 연결될 수 있는 동일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임혁이라는 인물의 일기를 통해 이야기들이 전개되고 있는 셈이지만 그도 또한 이 소설의 공식적인 서술자도 아니다.
임혁의 일기에서 독자는 우선 써늘한 감각을 느끼게 된다.

작자는 무엇 때문에 화살을 남기는 것일까. 나는 조금 기분이 유쾌해진다. 세상에 이런 작자가 있어서,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사실이 반갑게 여겨진다. 일을 벌이고,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희생자 곁에 무슨 징표처럼, 또는 암호처럼 화살을 남긴다. (…) 이자는 얼마나 뛰어난 유머감각을 소유하고 있는 자인가. (…) 아, 나는 그를 향해 형언하기 어려운 친밀감을 느낀다.
- 이승우, 「내 안에 누가 있나」

죽은 이의 심장에 화살을 꽂을 수 있었던 범죄자의 행위는 ‘유쾌’한 기분을 가져오게 하는 행위였다. 심지어 그의 범죄 방법은 뛰어난 유머감각을 소지하고 있는 것이라고 임혁은 말한다. 살인을 유머감각으로 받아들이는 임혁이야 말로 까뮈의 「이방인」이 그리고 있는 ‘뮈르쏘’를 능가한다. 임혁이 감지하고 있는 형언할 수 없는 친밀감이야말로 익명의 범죄자에게 느끼는 놀라운 동질감이다.
임혁이 가지고 있는 동질의식은 이들에서뿐만 아니라 소설의 군데군데에서 나타난다. 출판사 사장 ‘홍’의 ‘축축하고 음흉한 눈빛’을 증오하면서도 어쩌면 그것 역시 자신의 눈빛을 닮았으리라는 것을 느낀다.
‘홍’이 자신과 다른 점을 제외한다면 자신과는 너무나 닮은꼴이라는 것을 임혁은 시인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살인을 행하게 되는 대상인 ‘민초희’라는 여자마저도 동질의식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민초희의 내부에 있는 것은 자신의 내부에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수많은 동질의식에도 불구하고, 막상 자기 자신과 맞설 때, 그는 자신에게 낯이 섦을 느낀다.

거울 속에 비친 나의 얼굴은 나에게 낯이 설다. 어떨 때는 슬프고 어떨 때는 무섭다. 어떨 때는 우스꽝스럽고 어떨 때는 혐오스럽다. 그 각각 다른 얼굴들의 주인이 그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쉽게 이해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 더구나 그 한 사람이 바로 나라니. 나는 그 많은 얼굴들 가운데 어느 것이 나의 얼굴인지 모르겠다. 그 많은 얼굴들에 어떤 일관성이 있는지 정말 모르겠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 이승우, 「내 안에 …」

나는 나이기도 하고 내가 아니기도 하다. 나는 수많은 나를 가졌고 나는 ‘홍’과도 ‘손철희’와도 ‘민초희’와도 그 익명의 범죄자와도 얼마든지 교환이 가능한 ‘교환가치’로서의 사물에 불과하다. 그는 ‘어떨 땐 내 몸 위에 엉뚱한 사람의 대가리가 달라붙어 있는 것 같음’을 느끼기도 한다. “어떨 땐 내 몸 위에 다른 누군가의 대가리가 붙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다. 나는 진정으로 내가 아니었으면 한다.”고 임혁은 말한다.
그는 나중에 죽이게 되는 아버지에게 독한 혐오감을 느끼지만 아버지의 인간답지 않은 인상마저 자신에게 담겨 있음을 느낀다.
이처럼 소설 속의 인물들은 변별력을 가지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를 닮고 선과 악, 속되고 음흉한 것과 성스러운 것이 끝없는 교환가치 속에서 자리바꿈을 한다. 임혁은 자신에게 전령사처럼 다가오는 ‘화살’들을 의식하며 그 화살의 주체자인 범죄 집단과 자신이 하나임을 감지한다. ‘그들은 나다. 나는 우리다. 우리는 있으면서 없다. 있지만 없고, 없지만 있다. 그것이 비밀 결사의 정체임을 나는 안다./ 나는 살겠다. 나는 죽지 않고 살아 있겠다. 물론 나는 내가 멀지 않아 죽으리라는 걸 예감하고 있다. (…)’ 임혁에게 있어서는 죽음과 삶이라는 것마저도 별개의 현상이 아니다. 죽음과 삶의 문제가 양가성 속으로 뒤범벅되어서,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망설임마저 느낄 수 없게 된다. 또한 굳이 삶에 대한 애착이나 삶에 대한 희망, 절망감을 따로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임혁은 편의상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되어 있으나 사실은 주인공도 저변인물도 아니다. 작중의 인물들은 하나의 시퀀스로 꿰어져 있어서 어느 인물도 더 중요한 인물이거나 덜 중요한 인물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이처럼 이승우의 「내 안에 또 누가 있나」에서는 작중의 인물들이 이른바 괴테의 ‘이중적 행위자Doppelgaenger’의 모습을 다양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행위 및 행위자의 양가성이 소설 전체를 점철하고 있는 것이다.

2) 아버지의 존재적 양가성과 ‘눈물’의 의미

임혁이 아버지에 대해 가지는 증오심은 극렬한 상태이다. 아버지는 부조리하고 역겨운 존재이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의 90년대 신예 작가들의 소설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역겨운 사물이었고, 돌연한 재앙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혐오감이나 증오심은 근원적이고 신화적인 잠재의식이다. 임혁은, 아버지는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어야 할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 누군가는 자신일 수도 있고, ‘손에 힘을 넣어라. 세게 누를 필요는 없다.’고 그를 유혹하는 그 누구일 수도 있다.

나는 내부로부터 누군가의 낯선-낯익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나는 안다. 그는 나이고, 나는 그이다. 나는 그에게 연결되어 있다. 목소리가 지시하는 대로 손에 조금 힘을 준다. 아무런 저항도 느끼지 않는다. (…) 온기마저 없었다면 나는 이미 오래 전에 그의 숨이 끊어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내부의 목소리가 다시 속삭인다. 그 목소리는 방안에 공기처럼 충만하다. 나는 나다. 동시에 나는 내가 아니다. 나는 노인의 몸이 침대로 축 늘어지는 걸 확인하고 손을 뗀다. (…) 침대로부터 떨어져 나오는데 달빛을 받고 있는 노인의 얼굴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게 보인다. 느낌이 이상해서 그의 볼에 손을 대본다. 물기가 묻어난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내 손을 받아들이던 노인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는 뜻밖의 사실이 나를 좀 야릇한 기분에 빠지게 한다. 그 기분은 일종의 불쾌감이다. 그는 왜 울었을까. 그 눈물의 뜻은 무엇일까. 그는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고 했다. (…) 내가 울 때까지는 눈을 감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버텨 온 것일까. 그렇다면 이곳으로 부른 것은 결국 그일까. 나는 몸을 움츠리며 그의 얼굴에서 얼른 손을 뗀다. 나는 내가 감상적으로 되는 게 가장 싫다.
- 이승우, 「내 안에 …」

임혁은 누군가 자신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그를 조종하고, 이끌고, 종용하는 것을 느낀다. ‘내 안에 나’는 친부살해를 종용하고 유혹하는 나의 악마성이다. 나는 악마성과 선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것은 ‘교환가치’로서의 동가성이나 무차별성을 가지고 있어서 프로이트나 융의 이론과 그 본질에 있어서는 같을지 모르나 프로이트나 융의 경우에는 악마성이 선성에 패배할 때 그것을 공유하고 있었던 주체는 괴로워하거나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악마성에 스스로가 지배당했다는 깨달음이 올 때 주체는 그 악마성을 자신 속에서 몰아 내려고 괴로워하며 악마성의 ‘그늘’ 속에 있는 스스로를 선성의 ‘밝음’ 쪽으로 데리고 나오려고 애를 쓴다. 그리하여 선성 쪽으로 자신을 끌고 나왔을 때 구원의 기쁨과 안식의 평화를 느낀다. 그래서 그러한 자아의 승리를 그들은 ‘자기 실현Selbstverwirklichung’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교환가치로서의 양가성에서는 이러한 가책이거나 노력이 의미가 없는 행위가 된다. 선과 악은 언제든지 필요에 의해 교체되고 교환될 수 있다는 것이 교환가치로서의 양가성 문제이다.
아버지를 ‘역겨운 사물’이나 ‘재앙’으로 간주하는 아들의 혐오감은 인간의 보편적 잠재의식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승우의 「내 안에」에서 등장하는 증오심은 특별히 부정적인 가치개념을 부여받지 않는다.
이 증오심은 아버지에 대한 ‘경외감’내지는 ‘친밀감’으로 얼마든지 교환될 수 있는 정서이기 때문이다. 이는 아들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 노인(아버지)의 ‘눈물’로 인해 증명된다. 아무런 저항도 없이 아들의 교살을 받아들이는 노인의 마른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 그 눈물의 의미성을 포착할 때 독자는 돌발적으로 가슴이 아파옴을 느낀다. 목이 졸려 교살되는 아버지의 눈물 속에는 자식에 대한 원천적인 애정과 연민, 그것으로 인한 죄스러움뿐만 아니라 그가 젊었을 시절 학대하고 버렸던 아내에 대한 연민과 죄의식마저 함께 침윤되어 있는 것이다. 그 눈물을 손으로 받아들인 아들은 ‘야릇한 기분’에 빠졌다든지 또는 ‘그 기분은 일종의 불쾌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아들은 자신이 ‘감상적’으로 되는 게 가장 싫다고 말한다. 가장 싫다는 것은 가장 좋아할 수 있는 소지를 얼마든지 가지고 있다. 그는 이 야릇한 기분을 ‘감상’이라고 믿고 있는데 그 야릇함이 ‘불쾌감’으로 넘어오도록 안간힘하는 일종의 위악적인 자세가 보인다. 더구나 임혁은 선과 악이란 것이 얼마든지 필요에 의해 교체될 수 있다는 신념과 확신을 가지고 있다. 부친 살해에 대한 잠깐 동안의 감상이 순간적으로 다시 위악적인 악마의 모습으로 드러나지만 독자는 이 순간을 놓지지 않고 아버지의 눈물에 대한 그의 감상에서 일말의 인간적인 위안을 받으려 한다. 독자의 가슴은 터지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주인공인 임혁 자신은 막상 양가성의 무차별성을 교활하게 즐기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인공에게 있어서 연민(인간의 선성)이라든가 불쾌감(인간의 악마성)은 두 가지가 모두 의미가 없거나 차별성이 없는 양가성으로서의 정서이기 때문이다.


5. 2000년대로 들어 선 소설 속 인물들 - 양가성의 턱을 넘어

1) 집을 떠나는 여자들, 무능한 남자들

90년대의 여자들은 가부장의 울타리를 박차고 집을 떠났다. 그들은 여성으로서의 존재찾기에 집착한다. 신경증의 환자거나(김형경), 성으로써 존재를 해명하고자 하거나(전경린) 신파조의 결말을 택하거나(공지영) 하여 그들은 가부장 세계에 대한 일탈을 시도했다. 2000년대의 초입으로 들어선 소설 속에서도 아버지는 역시 그 위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더욱 그 존재의 의미가 미미해 진다.
전경린의 󰡔엄마의 집󰡕에서는 외도와 무능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아버지가 이혼을 당하게 되며, 아내는 딸을 데리고 집을 나간다. 엄마는 스스로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집을 나서고, 끈질긴 노력 끝에 자신의 집을 장만한다. 엄마는 새로운 연인을 만나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방황을 끝내지 못하고 떠돌아 다닌다. 심지어 외도로 인해 얻은 딸을 이혼한 아내에게 맡기고 방황을 계속할 뿐이다. 엄마는 그러한 딸아이를 차마 박절하게 내치지도 못하고 돌보아준다.
무능한 가부장의 울타리를 벗어나서도, 남자에 대한 연민을 버리지 못하는 여자, 성장하는 딸의 성적정체성을 인정해 주는 여자. 남편이 팽개치는 딸아이를 포용해 주는 여자는,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면서도 타인의 삶을 따뜻하게 바라볼 줄 아는 여자이다. 2000년대의 여자는 바야흐로 초능력의 여자로 구축될 것인가.
박완서의 󰡔친절한 복희씨󰡕에서는, 성적 폭력과 금력을 휘두르던 가장이 병이 들어 힘없고 무능한 남자로 변모한다.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으면서도 약국에서 비아그라를 사오는 남편에게 극도의 수치와 모멸감을 느낀 복희씨는 평소에 숨겨 두었던 비상주머니를 간직하고 집을 나선다. 한강교 위에서 비상주머니를 힘껏 집어 던진다. 그것은 병든 남편에게 비상을 먹이고, 공중에서 깍지를 낀 채 그도 죽고 나도 함께 죽어야 한다는 처절한 환상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정이현의 󰡔트렁크󰡕에 등장하는 여자는 스스로에게나 타인에게나 모두 뻔뻔스러울 정도로 당당하다. 성관계를 가졌던 남자에게서 지극한 모멸을 당한 여자는 남자를 죽이고, 트렁크에 싣고 다니며 유유히 도로를 활주하는 캐리어 우먼으로 등장한다.
이들 2000년대의 소설 속 여자들은, 90년대의 여성들이 여성주의의 물결을 타고 여성의 자아의식이나 정체성 회복에 혈안이 되어있던 시대와는 사뭇 다르게 변모하고 있다. 이들은 남성들의 앞에서 그들과 특별히 대립하고자 하거나 열등의식이나 패배의식을 가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들은 인간으로서 당당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원성의 세계에서 가지던 우열의식이 의미를 상실함으로써 ‘양가성’의 혼미 속으로 빠져들었다는 이야기다.


2) 무의미와 허망한 희망의 세계를 향해

2000년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특성은, 그들이 성의 문제에 과도하게 노출되어 있다는 것은 기정사실로 설정된다. 90년대 소설들이 세기말적인 성의 과소비 현상으로 나타나, 까발려진 성을 노래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경악과 슬픔을 던져 주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차라리 새로운 감각으로 독서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있었다. 그러나, 21세기의 소설들에서 노출되는 성의 문제는 이미 신선함조차 없는 진부한 것으로 퇴색하였다.
그들에게는 생에 대한 특별한 목적이나 희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조경란의 󰡔풍선을 샀어󰡕에 등장하는 인물은 독일유학을 다녀오고, 니체를 전공한 철학도이면서도, 귀국해서 특별히 할 일도 없다. 집의 자기방은 장가든 오빠의 식구들이 거처하는 방으로 바뀌었다. 유학시절에 파리에서 용돈을 다 털어 샀던 명품가방을 한국에 와서 헐값으로 판다. 그리고, 그 돈으로 앵무새(한스)를 사서 새장에 넣어 집으로 온다. 앵무새가 싫증이 난 여자(나)는 다시 앵무새를 판다. 새를 판 돈으로 ‘나’는 마침내 ‘풍선’을 사고, 그것을 자주 만나던 청년(J)과 함께 하늘로 날려 보낸다.

두 손으로 J의 팔뚝을 붙잡고 마주섰다. J가 약간 긴장하는 것 같다. 수를레이 바위에서 니체가 울었을 때 그것은 단지 발견의 기쁨이 아니라 그 이론의 실존적인 작용에 대한 확신의 울음이었다. 확신의 탄성이었다. 만약 내가 고립적으로 살아갈 운명이라면 바로 그것 때문에 나에게는 독자성이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은 내부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일 테니까. 풍선은 자꾸 자꾸 먼 하늘로 날아가고 있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거다, J. 그것은 변화를 뜻하는 것일지도 몰라. 스스로 깨닫지 못했던 삶의 특별한 의지가 있다면 그건 아마 풍선처럼 둥글고 부풀어 있을 것 같다. 내 이마가 그의 턱에 닿도록, 나는 살짝 발뒤꿈치를 들어 올린다.
- 조경란, 󰡔풍선을 샀어󰡕, 끝 문장, 문학과 지성사, 2008.

하늘로 풍선을 날리면서, 자신의 실존적 이론이 실존적 작용으로 이루어질 것을 희망하며 수를레이 언덕에서 울었던 니체처럼 ‘나’는 고립적으로 인생을 삶으로써 깨달을 수 있는 ‘독자성’을 생각한다. ‘나’는 삶의 특별한 의지는 견고하고 확실한 그 어떤 것이 아니라, 풍선처럼 둥글고 부풀어 있을것 같다고 생각한다.
이 깨달음에서 독자는 마치 20세기의 이상李霜이 ‘날개’를 펼치고 나타나서, 미쓰꼬시 옥상 위를 날아오를 것 같은 환상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 황당하고 허망한 희망의 날개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미션은 과연 무엇일까. 이상의 날개가 미쓰꼬시 옥상에서 추락하였을지라도 그것이 단지 부질없는 부정성의 날개만이 아니라, 희망의 세계, 베타의 세계로 향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날갯짓이었다는 것을 나는 이미 강조한 바 있다.
21세기의 초입에 들어서서도, 20세기의 ‘혼미한 희망’의 갈증을 벗어나지 못하고 인간은 여전히 허망한 희망의 손사래를 거듭하고 있다.
이 허망한 희망은, 20세기의 산물인 ‘양가성’이라는 혼효적 존재가 오랜 침전의 과정을 거치면서 발효되지도 정화되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보이지 않는 희망’ 내지는 ‘허망한 손사래’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희망’과 ‘절망’은 그 변별성을 상실하고 양가성의 비빔밥으로 침전되어 있다는 것이다.


6. 이원성과 양가성의 줄다리기에서 우리가 사는 길은 무엇인가?

20세기 말의 소설과 21세기 초입의 소설들을 중심으로 이원성과 양가성의 문제를 살펴보았다.
이원성이 근대소설의 핵심이라면, 근대의 ‘거대한 서사기획’을 거부하고 이를 해체하고자 하는 위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놓였었다. 또한 극렬한 이원성의 거부가 해체의 운명을 맞이하여 또다시 양가성의 문제와 만나게 되는 것을 인식해야 했다.
가치우열의식의 모순과 부당함을 해체하려던 근대성의 욕구는 이처럼 그 궁극적인 상한선에 도달하게 되면서 양가성의 모순과 부딪친다. 해체의 가속도에서 양가성은 분열과 파편화의 부당성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20세기는 계몽이성이 표방했던 위대한 통합에 대한 의심이 확산되던 시대였다. 이성중심주의의 배후에 자리잡은 이원적 지배논리를 해체하고자 했으나, 20세기말을 거쳐 21세기의 초입에 들어선 우리가 직면한 것은 ‘양가성’이란 극렬한 속도에 의해 영혼이 황폐해지고 인간의 의식은 분열과 파편화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21세기 초입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해체의 파편화가 무한분열로 가지 않는 길을 탐구하고 모색해야 하는 위험한 분기점에 서게 되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새로운 시대로 전진하면서 우리가 가야할 길은, 해체와 연대가 공존할 수 있는 아름답고 따뜻한 영토로 가는 곳에 놓여 있음을 깊이 깨닫게 된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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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병철, 󰡔근대성과 근대문학󰡕, 문예출판사, 1997
루카치, 반성완 역, 󰡔소설의 이론󰡕, 심설당, 1997
바흐찐, 문희경 역, 󰡔대화적 상상력󰡕, 까치, 1990
Adorno, Noten zur Literatur 1, Ffm, 1958
Emmanuel Levinas, Le temps et L'autre, 강영환 역, 문예출판사, 1996
Jurgen Schramke, 원당희․박병화 역, 현대소설의 이론, 문예출판사, 1995
Peter Zima, 서영상․김창주 역, 소설과 이데올로기 - 현대소설의 사회사, 문예출판사, 1996|金亭子|문학평론가․시인.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부산시 문화상 문학부문 수상(2002), 제7회 일맥문화대상 수상(2004), 제1회 한국여성문학상 수상(2010). 저서 󰡔한국근대소설의 문체론적 연구󰡕,태학사,1995. 외 10권의 저서. 시집 󰡔모짜르트를 들을 수 없는 날들󰡕 외 4권. 장편소설 󰡔내 시간의 푸른 현(絃)󰡕. 에세이집 󰡔내 생에 아다지오 논 몰토󰡕. 현) 부산대학교 명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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