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과 싸웠던 화가, 이중섭의 삶과 그림
이중섭, 한국 20C 미술을 대표하는 서양화가의 한 사람이다. 호는 대향(大鄕). 현재 그의 작품은 가장 비싸게 팔리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반. 고흐의 경우처럼 그는 생전에 극도의 가난 속에서 불운한 삶을 살았다. 그의 그림이 고가로 팔리는 것은 시대를 장식한 예술가로서의 열정과 해방전후 시대의 화단에서 찾아보기 힘든 예술성에 기인하는 것일 테지만 가난과 병마 속의 불우하기 짝이 없었던 삶에 대한 안타까움도 한 몫을 했다고 보여진다. 1916년 평안남도 평원에서 부유한 농가에서 유복자로 출생했다.



1946년 북조선미술동맹에 가입하여 구상(具常)의 시집 〈응향 凝香〉 표지그림을 그린 후 구상의 사건에 연루되어 고통을 받기도 했다. 그뒤 불우아동들의 무료강습소에서 그림을 가르쳤다. 1950년 겨울 남하하는 국군을 따라 가족과 함께 월남하여 부산·서귀포·통영 등지로 전전하며 피난살이를 했다.
부산·제주·통영 등지를 전전하며 재료가 없어 담뱃갑 은박지를 화폭 대신 쓰기도 했다.

야마모토(山本方子)와의 사이에 2남을 두었다 1946년 일시 원산사범학교에 미술교사로 있었으나 공산치하가 되어 창작활동에 많은 제한을 받게 되자 1951년 북을 떠나 제주도 서귀포에 도착하여 겨우 한 평 남짓한 방한칸에서 일 년여 기간 동안 아내와 함께 피난 생활을 했다.


이시기에 그는 '서귀포의 환상' '섶섬이 보이는 풍경' '바닷가와 아이들' 등의 작품을 그렸고 그 해 12월 부산으로 옮겨간다.


이 무렵 그는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낸다.
전쟁중, 부산 범일동 현재 보림극장뒤의 피난민 판자집에서 노동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노동에 익숙치 않은 그에게는 부두가의 막노동이 여간 힘든게 아니었고 심신이 황폐해 갔다.생활고로 고통스러워 했으나 홀로 남은 그가 가장 괴로와 한 것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결국 1953년 밀항하면서 까지 일본에 찾아간 아내의 반응이 다시 돌아가라는 것이자 귀국한 후 편지를 통해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늘 전했다 한다.

생활고와 가족에 대한 애뜻한 그리움으로 인해 최초로 개인전을 치를 때까지 삼 년여 세월 동안 정신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몸이 쇠약해진다.
1955년 사촌들이 서울로 이중섭을 데리고 왔는데 자신의 머리를 박박 깎거나 엄지손가락을 피가 나도록 문지르는 일을 되풀이 하는 등 격한 행동을 보였다. 사람들이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고 이유를 물으면 아내에 대한 원망이 묻어 있었다고 전한다. 지인들이 문병을 와도 반응은 그러했고 입원중 거식증을 보여 거의 먹지도 않은 탓인지 몸은 야위서 뼈만 남는 지경에 이른다.
1955년 정부의 환도(還都)와 함께 상경하여 미도파(美都波)화랑에서 단 한 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그의 생에서 가장 왕성한 작품활동 시기였다. 그후 일본에 보낸 처자에 대한 그리움과, 생활고가 겹쳐 정신분열병증세를 나타내기 시작, 1956년 적십자병원에서 정신분열과 영양실조 그리고 간염등의 복합적인 병명으로 사망했다.
그가 추구하였던 작품의 소재는 소·닭·어린이〔童子〕·가족 등이 가장 많으며 예외적으로 불상·풍경 등도 몇 점 전하고 있다 . 소재상의 특징은 향토성을 강하게 띠는 요소와 동화적이며 자전적인 가족에 대한 정감의 요소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확실히 알고 있는 것만 그렸던 것이다.
어릴 때 늘 지켜보며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던 '소' 결국은 그가 화가가 되도록 이끌었던 '소'에 관한 그림이나,



이남덕과 결혼후 마당에서 생계를 위해서 집마당에서 닭을 몇마리 키웠는데 그때 매일 지키며 바라보았던 '닭''


그리고 6.25이후 가족이 일본으로 돌아가자 그에게 늘 그리움의 대상이었던 자식들 즉, '아이',




그리고 '가족'에 관한 소재가 그의 그림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싸우는 소〉·〈흰소〉(이상 홍익대학교박물관 소장) 〈움직이는 흰소〉·〈소와 어린이 황소〉(이상 개인 소장)·〈투계〉(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등은 전자의 대표적인 작품이며 <닭과 가족〉〈사내와 아이들〉〈집 떠나는 가족〉(이상 개인 소장)과 은지화 (담배갑 속의 은지에다 송곳으로 눌러 그린 선각화)들은 이중섭을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그의 작품에서 드러난 생시의 많은 인간적인 에피소드와 강한 개성적 작품으로 1970년대 이후에 이르러 회고전과 재평가작업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뛰어난 작품성과 천재적인 화가의 불우한 삶에 대한 안타까움등으로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화가와 작품이 되어버린 탓으로 지금까지 '위작'시비가 끊이기 않는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작풍(作風)은 포비슴(야수파)의 영향을 받았으며 향토적이며 개성적인 것으로서 한국 서구근대화의 화풍을 도입하는 데 공헌했다. 담뱃갑 은박지에 송곳으로 긁어서 그린 선화(線畵)는 표현의 새로운 영역의 탐구로 평가된다. 대표작품으로 《소》(뉴욕현대미술관 소장), 《흰 소》(홍익대학교 소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