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마르고 답답한 현실에 깊은 한숨
- 국제신문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2014-04-19: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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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랑의 '물보고 흐르면'에 실린 정서는 역설적이다. 흐르는 물, 하늘의 별을 느끼는 마음이 차라리 늙어 버렸으면 좋겠다며 자신의 비애를 노래한다. |
김영랑은 단기 4235년(서기 1902년) 음력 12월 18일 전남 강진의 500석 지기 지주 김종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윤식. 그해 8월 6일 평북 구성에서 태어난 김소월과 동갑이다. 시인은 14세에 휘문의숙에 입학했는데 재학 중 부인과 사별했다. 3·1운동 때는 '독립선언문'을 감춰 강진으로 가다가 잡혀 옥고를 치렀다. 일본 청산학원 영문과에 다닐 때 관동지진 때문에 귀국해 김귀련과 재혼했는데 9·28수복 때 유탄에 맞아 절명했다. 그때 나이 48세였다.
그는 음악에도 정통했다. 동·서양 음악은 물론 북과 거문고 등 악기에도 심취했다. 그러한 음악적 재능이 영랑 특유의 아름답고 섬세한 언어 감각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운 봄길 위에'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 주옥같은 시를 발표했다. 영랑의 시는 화사하면서도 애수에 찬 서정성을 바탕에 깔고 있다. 정서를 순화해 순수함 위에 섬세한 상상의 세계를 그려낸다.
'물보면 흐르고/ 별보면 또렷한/ 마음이 어이면 늙으뇨'. 이 첫 연은 정서적 인식작용을 시화하면서 시인의 의중을 투입한다. 흐르는 물을 바라볼 때 물이 흐르는대로 마음도 따라 흐르고, 별의 반짝임 따라 마음도 반짝이는 모습을 그린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느낌을 유발하는 그 마음이 어찌하면 늙을 것이냐 하며 마음에 대한 부정적인 바람을 토로하고 있다. '마음도 어서 늙어버렸으면 좋겠다'라며 비애를 표출한다. '물보면' 따라 '흐르고' '별보면 또렷한'이라는 표현은 심미적이다. 그 정서를 유발하는 마음이 늙기 바라는 것은 비애의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음을 반영한다. 그 이유는 다음 연에서 살펴볼 수 있다.
'흰날에 한숨만 끝없이 떠돌던' 가여운 시절에서 '흰날'이란 순수했던 시기를 말한다. 순수하고 청순하여 정서가 때 묻지 않았기에 감정을 토로함에 있어 망설임이 앞서지 않았을 것이다. '한숨'이란 슬픈 감정에 억눌린 고비를 만나거나 희망이 없다고 느낄 때 나오는 현상이다. 정서의 정착에 실패하고 '떠돌아' '가엽고' 아득한 시절을 둘째 연에서 회상하고 있다. 소년 시절에 일찍 아내를 잃었던 일 때문이었을까? '한숨만' '떠돌던' 현실은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다만 메마르고 답답한 시절이 있었기에 포기하는 마음으로 늙기만을 바랐다고 보인다.
'한숨'의 시절 지나 지금은 '안쓰런 눈물에 안겨' 후줄근이 젖어 흘러가고 있지만 '가여운 그 옛 시절' 회상하며 홀로 앉으면 '무심코 늙어 야윈 볼도 만져 보느니' 피지 못하고 시든 꽃 어서 떨어지라고 탄식한다. 물보고 별본 느낌, 한숨 쉬며 가엾다고 느끼는 감정, 눈물 젖어 후줄근이 흘러내리는 감정, 못 핀 꽃 어서 떨어지고 싶다는 상념 등은 마음의 그림자다.
마음은 화가 같아서 그리지 못할 것이 없다. 서산대사가 봉성이란 곳을 지나며 닭 울음소리 듣고 깨달아 대장부 할 일 다했노라는 시가 있다. ('한국불교전서' 7쪽) 영랑의 이 시에 담긴 마음은 시정의 순화에 있고 서산대사의 시에 나오는 마음은 완연한 대장부의 기개다. 대오각성의 마음인 것이다.
천룡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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