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추천 안종인 당선수필
하루한끼 줄이기
/안종인
머릿속이 시끄럽다. 매미 몇 마리가 마구 울어대는 것 같다. 밤이 되면 더 크게 울어댄다. 낮에는 그럭저럭 잊어버리고 지내다가도 한가한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울어댄다. 이것이 이명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인터넷을 찾아보았으나 치료가 가능하다는 정보를 찾을 수 없었다. 얼마 전까지는 차일피일 병원 가기를 미룰 정도로 심하지 않았다. 춘분이 가까운 어느 날부터인가 한여름을 만난 것처럼 울어대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보청기를 사용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과 소통이 되지 않아 혼자 멍하니 앉아 있는 모습을 그려보니 점점 더 우울해진다.
할 수 없이 병원에 가기로 했다. 집 근처에는 이비인후과가 두 곳이 있다. 한 곳은 연세가 지긋하고 노련한 할머니 의사이고 다른 한 곳은 30대 후반의 젊은 남자 의사가 있다. 경험을 생각하면 전자가 좋고 새로운 의학 지식을 고려해 본다면 젊은 의사가 좋을 것 같았다. 최근에 개업하여 깨끗한 젊은 의사가 있는 병원에서 최신 장비로 청력 검사를 하였다. 검사결과지를 놓고 의사가 판독하여 처방하는 것인데 이 부분이 경험이 필요한 걱정스런 부분이었다. 역시 대책 없는 처방이 나왔다. 젊은 의사는 '눈에도 노화현상이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없듯이 귀에도 노화현상이 생기는 것'을 어쩔 수 없단다. 그리고 내 나이 정도면 노화현상이 나타날 때가 되었단다. 자기가 실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재차 강조하며 노화에는 약이 없으니 처방도 없단다. 노화야 어쩔 수 없다지만 이대로 마냥 있을 수는 없었다.
한의학에서는 이명 치료가 가능하다는 말이 생각나서 한의사를 찾았다. 한의사는 진맥 후 신장에서 기인한 이명이라고 진단하였다. 내게는 두 가지 문제가 있는데 하나는 장에 음기가 많이 쌓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가 소통이 잘 안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원인으로 이명이 생겼는데 치료가 쉽지 않지만 한약으로 치료가 가능하다고 하였다. 일찍 자고 찬 음식 안 먹고 등등 지켜야 할 일들이 제법 있었지만 대부분은 지키는데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식사 시간이었다. 아침 식사는 거의 모두 소화가 되고 점심 식사는 칠, 팔할 정도가 소화되며 저녁 식사는 반 정도도 소화되지 않는 채장에 머물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7시가 넘어서 식사를 하면 몸에 독소가 쌓일 수밖에 없단다. 젊어서는 잘 모르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소화기관도 노화되니 늙어가며 건강을 유지하려면 '저녁 식사를 5시 이전에 마치고 식사량도 줄이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물론 아침과 점심은 제대로 먹고 저녁을 아예 먹지 않는 것이 건강에는 가장 좋단다. 우리집은 7시가 넘어서 가족이 모두 모여 저녁을 먹는다. 혼자 저녁을 안 먹고 있기도 쉬운 일은 아니라서 그동안 함께 먹고 있었는데 이제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젊은 의사의 말을 듣고 보청기를 끼고 답답하게 여생을 보낼 생각으로 우울하였는데 그에 비하면 저녁을 좀 줄이거나 안먹는 것이 무슨 큰일일까 싶었다.
사실 하루 한 끼나 두 끼만 먹고 사는 것은 은근히 내 로망이기도 하였다. 명상을 배우러 천안 근처에 있는 '호두마을 명상센터'에 몇 번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미얀마의 불교 명상을 배우며 생활할 때는 오후에 식사하지 않아도 편하고 좋았다. 집에서도 그렇게 하리라고 결심하고 돌아와도 막상 돌아오면 지킬 수가 없었는데 이참에 아예 저녁을 먹지 않기로 하였다.
이명을 벗어나고 건강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지금까지의 습관을 버리지 못해 끌려갈 것인가 선택의 기로였다. 저녁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그저 먹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 일어났다. 하루하루 잘 버텼다. 삼사일 지나니 한약은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는데도 시끄러운 소리는 반 이하로 줄어든 것 같았다. 늘 좀 불편하던 아랫배도 편안해진 것이 '하루 한 끼' 식사를 줄인 효과가 나타나는 것 같았다. 이대로 쭉 가면 될 것 같았다.
일찍이 붓다는 제자들에게 '오후 불식'을 하도록 하였다. 음식은 몸을 지탱하여 수행에 지장 없으면 족하니 '오후에는 음식을 먹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어떤 제자 비구들은 붓다의 가르침에 반기를 들었다. 하루 세 끼를 먹어도 수행에 지장이 없는데 '왜 굳이 먹는 즐거움을 포기하고 고통스러운 길을 가야 하는가' 하며 반발하였다. 붓다는 반발하는 제자들을 불러 훈계하였지만 받아들이지 못한 제자들은 붓다를 떠나갔다. 하루 두 끼만 먹는 것은 번뇌를 벗어나고자 큰 뜻을 품고 출가한 비구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내가 저녁을 먹지 않는 습관을 만드는 것이 쉽지는 않겠다. 작심삼일로 끝날지도 모른다.
사람의 감각기관은 모두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이는 역할을 한다. 이명은 청각기관이 노화되어 일정 주파수대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면 뇌가 스스로 그 영역의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한다. 아직도 칭찬 듣기를 좋아하고 돈을 좋아하며 얻고자 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아무리 '식과 색'이 인간이 가진 최후의 욕망이라 하지만 결핍의 마음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되었다. 이명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달려가던 마음을 그만 멈출 때가 되었다고 가만히 속삭이는 신의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이제 더 이상 미룰 수는 없다. 하루 한 끼 줄이기는 쉽지 않겠지만 이명을 계기로 욕망을 더 내려놓아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알겠다. '비움'이 집안 세간살이 줄이기만은 아닐 것이다. 이번 기회에 마음의 욕망도 조금씩 더 내려놓는 비움을 실천해 보아야 하겠다.
알레르기
/안종인
연분홍 진달래꽃은 잎에 밀려 떨어지고 귀룽나무꽃은 하얗게 구름처럼 피어오른다. 온갖 식물들이 생생한 기운을 뿜어낸다. 새들도 동물들도 봄기운에 잔뜩 들떠 있는 것 같다. 참나무 형제 나무들도 제각기 다른 환경에서 다른 모습으로 용트림하며 일어나고 있다. 나는 신갈나무와 굴참나무를 겨우 구분하는 정도지만 참나무를 무척 좋아한다. 참나무는 산에서 흔히 보는 가장 큰 나무이기도 하고 하늘 향해 쭉쭉 뻗어가는 가지들은 볼수록 활기차다. 보기만 해도 튼튼하고 시원스러운 느낌이 절로드는 나무다.
우리 집 앞산에는 두 종류의 딱따구리가 자주 눈에 띈다. 오색딱따구리와 쇠딱따구리이다. 딱따구리 숲으로 이름 붙여준 골짜기로 접어들자 '드드득', '다다다닥' 하고 아주 빠른 속도로 나무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저건 쇠딱따구리 소리다. 딱따구리 중 가장 작아 참새보다 조금 큰 정도여서 나무를 깊게 파기보다는 표면을 빠르게 두드려 소리를 울리게 해서 벌레를 잡는다고 한다. 참새만 한 몸집에 등 쪽에 흰색 가로줄 무늬가 있다. 가만히 서서 새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3미터 정도 앞쪽에 오색딱따구리 두 마리가 나타났다. 이 새는 쇠딱따구리보다 조금 더 커서 나무를 쪼는 박자가 조금 느리다. '딱딱 톡톡', '따닥 따닥' 하고 나무 찍는 소리를 내며 입으로 나무껍질을 물어서 주변으로 휙휙 던지기도 한다.
아마도 딱따구리 소리를 '뚝딱뚝딱'하고 흉내 낸 것은 이 딱따구리나 큰 오색딱따구리 소리였을 것 같다. 새들이 크게 울며 날아다니고 먹이 활동과 구애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십년 넘게 다니던 산에서 처음으로 고라니를 두 마리나 보았다. 얼마전에는 한 마리가 나뭇잎을 뜯고 있는 것을 보고, 저렇게 큰 동물이 동네 가까이에 살고 있어 놀랐는데 오늘은 두 마리나 본 것이다. 숲에 떨어진 나뭇잎들이 와사삭 비명을 지르고 뭔가 분위기가 갑자기 변하는 느낌이 들어 살펴보니 고라니 두 마리가 나무 밑에 숨어 있다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 뛰어가고 있었다. 저것이 '고라니일까 노루일까 궁금하여 숲에 숨어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제미나이'에게 물어보니 이런저런 특징으로 보아 고라니란다. 새싹이 움트고 새들이 날며 고라니가 뛰어다니니 숲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물오르는 봄이다.
살아 움직이는 봄의 숲을 즐기고 있는데 집사람은 재채기와 콧물을 주체하지 못하여 어쩔 줄 모른다. 집 안에 따뜻하게 있다가 밖으로 갑자기 나와 기온이 변해서 알레르기 반응이 생긴 것 같다며 얼른 집에 돌아가자고 한다. 산은 좋은데 산을 즐기는 사람이 준비가 덜 된 것 같았다. 얼른 집으로 돌아와서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원인을 찾아보았다. 아름다운 봄날을 맘껏 즐기지 못하게 하는 원인을 알고 싶었다. 집사람은 기온 변화를 원인이라 했지만 나는 풍매화가 의심스러웠다. 검색해 보니 놀랍게도 그렇게 멋지고 아름답다고 좋아했던 참나무가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하였다.
봄철 숲에서 알레르기의 주범은 참나무가 70% 이상을 차지한다고 한다. 4월부터 5월 초까지는 풍매화가 꽃가루를 날리는 시기인데 참나무, 자작나무, 오리나무, 밤나무 등이 특히 비염 증상을 유발한다고 한다. 이 나무의 꽃들은 일반적인 꽃과 달리 초록색 벌레 모양으로 길쭉하게 늘어져 있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벌레도 모여들지 않는다. 꽃가루들이 아주 작고 바람에 잘 날려 공기 중에 떠다니기 쉽다. 그에 비해 소나무나 은행나무도 풍매화이지만 꽃가루가 크고 무거워 봄철 알레르기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참나무를 보고 멋진 모습에 감탄하며 그 밑에 앉아 있었으니 알레르기 반응이 심하게 일어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생각났다. 참나무가 갑자기 피해야 할 나무가 되었다. 나는 옻나무 알레르기가 있다. 어릴 때 산속을 쏘다니다 보면 나무에 스친 곳들이 죽죽 빨갛게 변하며 가려운 경우는 개옻나무에 스친 것이었다. 긁힌 자국이 줄지어 있지 않고 무작위로 퍼져서 빨갛게 되고 가려우면 참옻나무 알레르기였는데 보통은 산골짜기의 차가운 물로 씻어주면 큰 고통 없이 가라앉았다. 옻닭을 먹는 것은 생각할 여지도 없이 죽음이다. 몸이 조금이라도 안 좋은 상태에서 땅콩과 곶감을 많이 먹으면 몸의 연약한 부위가 가려운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나기도 해서 조심해야 한다.
몸만이 아니라 마음에도 알레르기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 있는데 나는 혼자 있는 것과 귀신을 무척 무서워한다. 이상하게도 생생한 어린 시절의 기억이 몇 가지 있는데 썰렁한 큰 집안에 혼자 있었던 순간이 그중 하나이다. 아직 기어다니지도 못할 적에 낮이지만 잠에서 깨었을 때 아무도 없이 텅 빈방 안에 혼자 있는 것은 무척 무서운 일이었다. 그런 상황이 되면 다시 눈을 감고 움직이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 바쁘던 현역 시절에도 텅 빈 건물 사무실에 혼자 남아 일을 해 본 기억은 거의 없다. 일을 들고 집에 가서 밤을 새우더라도 혼자 사무실에 남아 있지는 못했다. 그러다 보니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전원주택에서 살 생각은 하지도 못한다. 혼자가 두려운 내게는 도시의 아파트가 딱 어울린다.
또 하나 생생한 기억은 큰 누나 등에 업혀 이웃 어른의 장사 지내는 모습을 본 것이다. 호기심 많은 큰누나가 어른들의 틈을 뚫고 보여준 모습은 사람을 꽁꽁 묶어서 땅속 깊이 넣고 흙을 덮는 장면이었다. 얼마나 무서웠던지 길옆에 있는 그 무덤이 무서워 밤에는커녕 낮에도 그 길을 피해 다녔다. 지금도 산길 옆에 무덤이 있으면 멀리 돌아가거나 다른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린다. 혼자 있음과 귀신에 대한 두려움은 잊히지 않는 내 마음의 알레르기일 것이다.
몸과 마음의 알레르기가 있어 꺼리고 삼가는 마음이 어쩌면 나의 오늘을 만들어 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생존밈
/안종인
우연히 TV를 스쳐 지나가며 5만 원권 돈다발 수십 개로 컵라면을 눌러놓은 화면을 보았다. 컵라면은 당연히 두꺼운 책이나 무겁고 바닥이 평평한 물체로 눌러 놓는 게 당연했던 나는 그 장면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보다는 TV를 자주 보며 세상일을 잘 알고 있는 집사람에게 그 화면을 이야기하며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물어보았다. 집사람은 그런 게 요즘 유행하는 밈(meme)이라고 즉각 대답해 주었다. 밈이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다시 물어보았다. 매일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그것도 모르느냐는 듯 반응이 영 시답지 않다. 아마도 나만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아 AI를 찾아보니 과시용 밈'이란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이런저런 밈들을 예로 설명해 주었다. 사전적 의미는 밈이란 온라인에서 세계적으로 퍼지고 있는 문화적 요소인데, 그 자체가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보여주는 장면 너머에 감춰진 진정한 의미가 숨어 있다고 하였다. 나만 '문화적 지체자'가 된 느낌이었다. 세상에 저런 것도 다 있구나 싶었다.
인터넷을 통한 자기과시 욕구는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것인데 아시아쪽에서는 돈 자랑을 하는 '과시형 밈'이 많다고 한다. 끼니를 겨우 때우는 듯 '컵라면 먹는 모습을 연출하면서 수천만 원 상당의 돈뭉치로 라면 뚜껑을 눌러두어 밥은 대충 먹어도 돈은 이만큼 많다'고 자랑하는 것이
란다. 이런 것들을 보는 이에게 놀람과 부러움을 동시에 유발하는 전형적인 과시형 밈이란다. 헬스장의 거울에 비친 모습을 찍은 셀카는 운동하는 건강한 삶을 인증하는 연출을 하면서 '자기 생활 수준과 멋진 몸매를 과시하는 것이란다. 그런가 하면 부지런하고 건전한 삶을 사는 것을 과시하는 밈도 있다. 새벽 5시에 일어나기, 독서하기, 명상하기 등을 인증하며 '나는 이렇게 성실하게 열심히 산다'라는 도덕적이고 성실한 삶의 우월감을 드러내는 것은 차라리 귀여운 편이다.
살아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어느 정도 허세를 부리고 과시하며 살기 마련이다. 우리나라는 성형 수술하는 실력이 세계 최강이라고 한다. 성형수술은 자신을 더 멋지고 아름답게 보이고 싶어 하는 욕망의 표현이니 나무랄 일도 아니다. 우리나라에 미인이 많은 것은 그 덕분인지도 모른다.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들도 먹이 활동이나 짝짓기를 위해서 과시나 위장을 한다. 다른 동물의 위협을 벗어나기 위해서 더 크고 무섭게 보이도록 위장하기도 한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거나 독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과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필수 능력이라 해야 할 것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포식자나 경쟁자를 속이거나 자신을 과시해야 살아남는 데 유리하다. 공작새는 구애할 때 꼬리를 활짝 펴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이 암컷에게는 아름답게 보이는지 힘의 상징으로 보이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크고 화려한 수컷이 구애에 성공한다고 한다.
8월 열대야 속에 한밤중에 귀뚜라미를 잡으러 뛰어다닌 적이 있었다. 계절제 대학원에서 과학교육을 전공할 때였는데 생물교육 시간의 과제가 귀뚜라미 울음소리의 의미를 조사하고 생태를 직접 관찰하여 잡아 오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귀뚜라미를 잡아오라'는 말에만 꽂혔다. 막상 잡으려니 낮에는 귀뚜라미가 보이지 않았고 울지도 않았다. 밤이 되어 풀
밭 근처에 조용히 하고 있으면 한 마리가 울기 시작했다. 그러면 여기저기 울음소리가 들리며 귀뚜라미들이 뛰어다녔지만 잡기는 어려웠다. 가까이 다가가서 찾아보면 울음소리는 그친 지 오래고 어쩌다 펄쩍거리며 뛰어 도망가는 귀뚜라미를 잡으려 함께 펄쩍펄쩍 뛰어도 밤중에 풀숲에서 귀뚜라미 잡는 일은 쉽지 않았다. 몇 시간씩 풀밭 근처에 숨어 있다가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다닌 끝에 어찌어찌 겨우 몇 마리를 붙잡았을 때는 이미 밤이 깊었었다. 수업 시간이 되어 잡아 온 귀뚜라미를 꺼내놓으며 경험담을 의기양양하게 발표하였지만 '제일 크게 울던 녀석이 어느 것이냐'는 교수의 질문은 우리를 당황하게 하였다. 가장 크게 우는 수컷 귀뚜라미 소리를 찾아 주변의 암컷 귀뚜라미가 몰려드는데 소리가 비교적 작은 녀석들은 근처에 숨어 있다가 짝짓기에 성공하는 사례가 많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잡은 귀뚜라미를 다시 풀밭에 풀어주고 그날 밤 다시 귀뚜라미와 함께 펄쩍거리며 뛰어다녔다. 크게 우는 수컷 귀뚜라미를 쫓아가 잡으려 하지 않고 가만히 숨어 있다가 근처로 몰려드는 귀뚜라미를 잡으니 훨씬 쉽게 잡을 수 있었다. 어두운 곳에서 큰 소리로 울어대는 수컷 귀뚜라미의 짝짓기 모습은 끝내 직접 관찰할 수 없었지만 근처에 펄쩍거리는 귀뚜라미가 많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어렵지 않게 몇 마리를 잡을 수 있었는데 이미 그것은 큰 관심이 없었다. 큰 수컷 귀뚜라미야 큰소리로 암컷 귀뚜라미들을 유혹하여 끌어모으니 성공률이 가장 높겠지만 그만 못한 작은 수컷들도 머리를 써서 종족 보존에 성공한다는 사실은 차라리 엄숙했다. 귀뚜라미도 천적의 눈을 피해 짝짓기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남다른 지혜를 발휘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어쩌면 우리 인간들도 다를 바가 없었다. 치열한 귀뚜라미의 세계에서 삶의 지혜를 배운 열대야였다. 식물들도 가루받이를 위해 도움이 될 곤충이나 새들을 유혹하기 위
해 진화한다. 특별한 향기를 풍기는 것도 화려한 색깔을 띠는 것도 자신이 유혹하고 싶은 곤충들이 좋아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곤충들을 끌어들일 수단이 없는 식물들은 물이나 바람의 힘을 빌려 종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진화해 왔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번식과 먹이 활동을 위해 자신을 과시하고 적응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과시와 허세는 나무랄 것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동식물에 비해 너무도 안일하게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항구를 떠나는 배들은 향하는 곳이 다르나 모두가 자신의 명리체를 찾아 떠난다. 같은 목적지로 향하는 것이다. 치열한 '생존 밈'을 보면서 새삼 세상의 변화와 변하지 않음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