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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원칙과 원만사이-이재홍-《인간과문학.2026 여름호》

작성자김종혁|작성시간26.06.21|조회수21 목록 댓글 0

<수필>

원칙과 원만사이

/이재홍

삶에서 일어나고, 만나는 일은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시작된다. 무엇을 보고, 듣고 이를 바탕으로 느낌이 생기고, 생각하며 행동한다. 무엇을 인식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예전에는 대상을 또렷하게 보고, 내가 본 것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고 쉽게 확신을 가졌다. 대상을 정확하고 또렷이 인식했다고 여겼기에 나의 생각이나 행동의 바탕은 제법 튼실했다. 만약, 나의 인식에 대한 믿음이 확실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나의 행동은 자신만만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젊은 시절의 당찬 자신감이나 굳건함은 세상에 대한 흔들림 없는 인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자기 확신이 강하면 주장도 강하고, 상대에게 선명한 자신을 드러내보일 수 있다. 젊었을 때 나의 세상을 보는 안목이 지금보다 깊고, 사고는 더 반듯했을까? 세월이 지난 후 그때를 되돌아보니 매사 인식과 주장에 대한 믿음은 있었으나 사고는 경직되기 일쑤였다. 그때, 나는 비교적

순수한 반면, 다양한 경험을 겪지 않아 생각이 부드럽지도 여유롭지도 못하고 행동은 서툴기 일쑤였다.

살아가며 보니 일을 하며 만난 상대나 사회는 내 생각보다 더 복잡하고, 다양했다. 내가 아는 것들의 대부분은 인식 대상의 얕고 좁은 일부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세상에 대한 나의 인식이 맞는지, 이 세상에 확실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세월이 지난 일은 기억이 완전하지 않았고, 사람 간의 관계는 점점 복잡해져 진의를 알기 어렵고, 세상은 정신 차릴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변하니 나의 인식들은 그 뿌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 생각에 틈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내 주장이 틀릴 수도 있고 내가 아는 것이 다를 수도 있고, 상대에 대한 인식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혼란스러웠으나, 세상 이치라는 것이 원래 많은 변화가 있고, 겉모습과 본질이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무거웠던 마음이 가벼워지기도 했다. 나름대로 주도면밀하게 살기 위해 이 생각 저 생각을 했던 것들도 시간이 지나니 무의미해진 것이 적지 않았다. 어려움에 대비하기 위해 미리 걱정했던 일은 발생하지 않거나, 내 염려와 무관하게 생겼다사라져 갔다. 그런 중에도 살면서 원칙을 세우고, 원칙에 충실하려는 마음을 가졌으나 쉽지 않았다. 삶의 원칙이 흐릿해진 태도는 사회와의 접점에서 삐걱거림이 생기고, 그런 때의 삶은 길 없는 숲을 헤치듯 힘들기도 했다.

강하고 저돌적인 행동은 젊은이에게는 멋이고 용기다. 세월이 흘러 경륜이 쌓이면 일의 전후, 좌우와 깊이까지 보여 상황을 다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겉에 드러나지 않는 부분까지 생각이 넓어지면 상황을 명료하게 정리하기 힘들다. 보이는 것과 그 이면까지 고려하고 인정이 끼어들어 유연하게 대하다 보면 일관된 원칙을 지키기 어렵다. 겉으로 드러난 상대의 과오를 비난하기는 쉽다. 그러나 더 큰 잘못을 피하기 위해 작은 잘못을 저질렀다면 비난하기 쉽지 않다. 법에는 죄를 정하고 있으나 오래 굶주린 자가 살기 위해 양식을 훔친 죄를 엄격히 묻기는 쉽지 않다. 겉으로 드러난 일에 쉽게 원칙을 논할 수 있지만, 넓은 범위에서 인과果를 따지고, 크고 넓은 이상에 비추어 볼 때 눈앞의 원칙만 얘기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역사도 나라를 훔친 자는 도둑이 아니라고 하는가 보다.

이제 원칙보다 원만한 것이 더 편하다. 오랜 기간 나와 어울린 이는 내가 변했다고 한다. 용기도 안보이고, 행동은 느려지고, 명석한 판단력도 흐려졌다고 한다. 이제 하는 일에 완벽이나 최고를 지향하지 않고 둥글둥글한 것이 좋다. 옳은 것을 위해 뜻을 굽히지 않던 생각도 무디어졌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무엇이 의미 있는지 애매한 부분이 보이니 판단이 어렵고, 판단이 어려우니 행동은 느려진 것이다. 상대를 배려하려니 야박한 말은 삼간다. 원칙이 무너진 것인지 원숙해진 것인지 판단이 어렵다. 모든 것이 흐리멍텅해진 것이 세월 탓일까? 빠르게 줄어가는 뇌세포 때문일까?

세월은 시력을 약화시켜 아름다운 것만 대강대강 보게 하고, 청력을 약하게 해 듣기 거북한 말은 그냥 귓전을 타고 흘러가게 한다. 아름다운 것만 보고, 듣기 좋은 말만하고, 듣고 살고 싶다. 염라대왕이 내 생각을 읽고 원하는 것도 많은 욕심꾸러기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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