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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서평>-예술적 평전 에세이와 감각적 사유의 깊이-유한근~《인간과문학.2026여름》

작성자김종혁|작성시간26.06.21|조회수36 목록 댓글 0

ㅣ리뷰 서평 |

예술적 평전 에세이와 감각적 사유의 깊이 -이혜연 수필선집 《파리의 우울》에 대하여

/유한근

파리는 우울하다. 필자의 첫 기억도 그렇다. 오다가다 여러 차례 파리에 발을 내디뎠지만, 첫걸음이 추적 추적 내리는 비 오는 날이었기 때문인지 혹은 안개 때문인지 아니면 새벽에 도로를 청소하던 흑인들 때문인지 아니면 묘지공원 때문인지 일수 없지만, 내 기억 속의 파리는 우울한데 그래도 낭만이 있었다. 그래서 더욱더 관심이 가는 작품들이다.

이혜연의 <파리의 우울>은 계간 <수필공원》(현《에세이문학》 1998년)으로 등단한 후 30여년 가까이 써서 묶은 수필집 3권에서 선한 작품을 묶은 수필선집이다. 그런 만큼 그의 수필세계가 총체적으로 담긴 책이다. 따라서 필자의 이 서평은 수필가로서의 이혜연의 삶과 그의 작품의 모티프가 되는 자연인으로서 삶을 엿볼 수 있는 글이어야 한다는 부담감에 숨이 가쁘다.

또한 기존의 이혜연 작가의 평인 "예리한 관찰과 창의적 상상력 및 언어 감각으로 아름다운 서정적 수필로서의 예술성을 형상화하는 작가"라는 평과 "가을 물처럼 소명明한 문장으로, 차원을 달리하는 이혜연의 작품들은 수필의 품격이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어느 날, 그리고 문득>에서 아버지가 '어느 날 문득 가셨다.'며 임종의 시간은 '어느 날'이었고 숨을 멈춘 건 '문득'이었다며 베케트의 작중 인물을 통해 '언제'라는 시간의 무의미를 천착한다. (...) 허공에 떠 있던 구름 한 점. 다시 텅 빈 하늘. 지나간 자리의 자취 없음이여!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구름은 본디 실체가 없는 것, 거기에 이혜연 작가는 생사의 본질과 현상을 목도한다"는 맹난자의 평문을 잊고 문학적 가치와 이혜연 작가가 우리 수필사에 어떤 위상을 점하고 있는가를 가늠해 봐야 한다.

수필 <파리의 우울>의 우울은 작가의 '지독한 염세주의' 때문이 아니라, A화백의 죽음으로 인한 “생성과 소멸” 즉 삶과 죽음의 세계를 넘나

드는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한 화두 때문이다. 이에 따라 작가는 이 수필의 서두에서 이를 암시한다.

앞산이 부옇다. 올 들어 처음 찾아온 황사 현상 때문이다. 사막으로부터 일어나 쉼 없이 달려왔을 저 모래알들의 끝 간 데는 어디일까. 더러는 이곳에서 지친 걸음을 멈추기도 했으리라. 길 위에 내려앉은 누런 모래알들을 보며 흙에서 일어나 다시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그 길었던 여정이 참으로 가뭇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봄 들어 나는 심한 상실감에 시달리고 있다. 꽃 피고 새순 돋는 생명들의 잔칫날에 우울함을 느끼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생성은 곧 소멸을 예고하는 것이기에 그 현란함이 부질없어 서글프고, 생성이 곧 소생일 수 없는 윤회의 허망함이 가슴 아파서이다.

그중에도 이 봄이 내게 유난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아픔이 있기 때문이다. 수필가 P선생님과 화가 한 분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 봄에 떠나보낸 분은 P선생님에 불과하다.

오랜 투병 생활을 하던 그분의 죽음은 예견된 것이었기에 그래도 비교적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A화백의 죽음은 충격과 함께 나를 걷잡을 수 없는 허탈감에 빠지게 하고 말았다. 그는 이미 4년 전에 세상을 뜨고 없었던 것이다.

-<파리의 우울> 서두

윤회의 허망함, P선생님의 예견된 죽음과 A화백의 죽음, 그리고 그로 인한 작가의 '걷잡을 수 없는 허탈감이 이 수필 <파리의 우울>을 쓰게 한다. 학교 재단과의 갈등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A교수의 이야기와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해 심도있게 언급한다. "죽음을 삶의 연장선에 두었던 그는 생명의 근원인 난자들로 화폭을 빼곡히 채우는가 하면 사후의 세계에 몰입했고, 무속이나 신화를 극사실적인 기법으로 묘사함으로써 두 세계를 넘나들이했다”는 한 화가에 대한 작가론과 작품론을 같이 쓰는 평설적인 에세이라는 점에서 이 수필은 다분히 미술 비평적 에세이

혹은 예술 비평적인 에세이로서 면모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수필의 결말 부분에서 김소운의 글 <도마소리>를 환기시켜 이 글이 수필임을 환기시켜주고 있다.

1.

이런 점에서 이혜연 작가의 글쓰기에 관한 생각에 궁금증이 생기게 된다.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모티프를 비교적 진솔하게 밝힌 수필 <나의 글쓰기>의 서두에서는 "와장창, 현관 유리창을 깨뜨리고 싶었다”로 시작한다. 작가도 "속이 후련해진다고 표현하고 있지만 관념적인 문장이 나올 것이라는 지레짐작한 독자도 속이 후련해진다. 그러나 그 뒤 문장을 읽으면 파편화될 유리창과 시끄러워지는 가족과 주위 사람들이 걱정되어 작가는 “조금 전의 폭력적인" 또 다른 자신을 가슴 깊숙이 밀어 넣“는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리고 자연인으로서 직업인 약사 시절의 넋두리를 조금 토로한다. "나'안에는 그렇게 욱여넣어 둔 무수히 많은 날것의 '나와, 그 나들이 감각하고 경험했던 것들이 숨어 살고 있다. 그 사이사이 선천적 감수성과, 습득 혹은 학습된 언어와 지식들이 더부살이하고 있기도 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내 안 갈피갈피에 숨어 살고 있는 그것들을 끌어내 문자화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고 칸트가 언급한 상상력 이론의 시작인 재생적 상상력의 층위를 이야기한다. 작가 자신의 체험한 과거의 기억 그 파편들을 끌어내는 작가의 상상력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 재생적 상상력을 생산적 상상력과 미학적 상상력의 도움을 받아"그것들을 컴퓨터 화면으로 끌어내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된다. 부정확하고 부스러기처럼 존재하는 기억을 찾아내는 맥락이 같은 그 밖의 동거지들과 조합, 조화시키는 과정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 머릿속에서 공글리다 보면 그들 스스로 질서를 찾아가며 얼개를 형성한다. 그런 뒤 "내 안에서 치고 나올 준비가 된 것이다. 이제 치고 나오는 그들을 받아적으면 된다. 묵히고 공글리는 과정 없이 번뜩이는 순간 생각의 파편만으로 글을 쓰려하면, 아니 지어내려 하면 진도도나가지 않을뿐더러 부자연스럽거나 어설퍼진다./그렇게 받아쓰기가 끝나고 나면 정체의 과정에 들어간다. 그리고 퇴고과정인 “모자란 부분을 보태고 부적합한 것들을 솎아내거나 교체한다. 저들 나름 질서를 잡았다고는 하지만 문자화하고 보면 어색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라고 글쓰기 과정을 체험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권택영의 <생각의 속임수》에서 언급한 언어로서의 형상화과정에서 겪게 되는 언어와 표현의 굴절성과 왜곡성으로 언어의 한계를 언급한다. 그리고 결말 부분에 이르러 사진 찍기의 체험을 환기하기도 한다.

언젠가 방안에서 본 바깥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그런데 찍힌 사진을 보니 그 풍경 위로 창문 방충망의 촘촘한 올과 어지럽게 얽힌 전선줄이 보였다. 필요한 것만 보려는 내 마음이 내 눈을 속인 것이다. 권택영은 같은 책에서 “내가 본 것, 기억하는 모든 것,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것들도 이처럼 속임수를 품고 있다. 눈은 순간마다 보이는 것만 보기 때문이다. 내 마음은 어떨까? 눈처럼 보이는 것만 볼까? 아니다. 마음은 다른 방식으로 진실을 은폐한다."고 했다. 내가 찍은 사진처럼 내가 쓴 글들도 그렇듯 속임수를 품고 있다.

-수필 <나의 글쓰기> 결말부분

사진 찍기의 체험을 통해 "필요한 것만 보려는 내 마음이 내 눈을 속인다는 사실처럼, “내가 쓴 글들도 그렇듯 속임수를 품고 있다”는 글쓰기 체험에서 얻은 이 지혜는 문학의 정직성 혹은 진실성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 우리는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내게 보이는 것, 내가보고 싶은 것만 표현하게 된다. 그래서 "경험이 다른 나와 너를 이어주는 것은 언어인데 그 유일한 수단은 몸의 경험만큼 정확하지 않기에 나는 아무에게도 수필 쓰는 법을 설파하거나 조언을 해줄 수가 없다."고 겸손하게 토로한다. "다만 내 안에서 넘칠 듯 쏟아져 나온 것들을 정제하듯이, 내 언어와 사고의 한계 안에서 부적절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만 짚어줄 수 있을 뿐이”며, “오늘도 나는 내 안의 수많은 '나'와 더부살이하고 있는 것들을 공글리며 굼뜬 걸음을 옮기고 있다."고 진정성 있게 토로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수필 <창조적 광기-달리 컬렉션을 관람하고>의 서두에서도 이혜연 작가는 글쓰기에 대한 상념을 끌어낸다. "가끔, 글을 쓰다가 상념에 빠져들 때가 있다. 어떤 소재가 불러일으키는 연상 작용 때문이다. 그런데 끝말잇기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기억이나 상상들을 좇아가다 보면, 종국에는 발단이 되었던 소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엉뚱한 생각에 이르러 있어 다시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느라 애를 먹곤 한다”(서두)고토로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연상 작용, 즉 하나의 상상력이 또다른 상상력을 낳는 상상력의 확대를 의미한다. 이미지를 중시하는 현대시에서는 그 하나의 창작방법론으로 이미지의 확장 혹은 무제한적인 상상력의 확대를 요구하기로 한다.

이 수필은 이 서두 부분만 보아도 살바도르 달리의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열린 달리 탄생 백주년 기념전, 달리 컬렉션'을 관람한 예술적 체험을 미술평전적인 에세이로 쓴 수필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작가의 미술 비평적 관점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달리의 상상력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았는가이다.

그의 상상력을 또 다른 방식으로 마음껏 펼쳐 보인 문학작품의 삽화들


단테의 <신곡>, 밀튼의 <실락원>, 오비디우스의 <사랑의 기술> 등 - 과동판화들을 둘러보고 다시 발길을 돌려 한 작품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우주비너스>라는, 검은빛이 도는 청동 조각품이다. 달리는 이 비너스의 토르소 안에 그의 모든 사고를 합축시켜 놓은 듯했다. 얼굴 없는 목에 걸린 늘어진 시계, 배 위를 기어가는 두 마리의 개미, 상반신과 하반신이 나뉘어 엇갈린 바로 그 지점에 놓인 금빛 달걀, 시계는 목숨의 한계성과 기억의 영속성을, 그리고 그의 기억 속에 곤충의 살을 뜯어먹고 빈 껍질만을 남겨놓곤 하던 개미는 육신의 덧없음을, 둘로 나뉜 신체는 에로틱한 서랍의 의미를, 금빛 찬란한 달걀은 음양의 논리와 생명의 숭고함을 상징하며 우주의 생성과 소멸의 신비를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수필 <창조적 광기-달리 컬렉션을 관람하고> 등에서

이 인용문에 앞서 이혜연 작가는 달리의 에로티시즘 예술관을 일별했고, 위의 인용문에서 문학작품에서 모티브를 차용하여 창작한 달리의 작품들에 대한 비평적 견해를 서술한다. 특히 <우주비너스>라는, 청동 조각품에서 달리는 “이 비너스의 토르소 안에 그의 모든 사고를 함축시켜 놓은 듯”하다고 지적하면서, "얼굴 없는 목에 걸린 늘어진 시계, 배 위를 기어가는 두 마리의 개미, 상반신과 하반신이 나뉘어 엇갈린 바로 그 지점에 놓인 금빛 달걀에 주목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시는 "목숨의 한계성과 기억의 영속성"을, 그리고 '개미'는 “육신의 덧없음을, 둘로 나뉜 신체는 에로틱한 서랍의 의미를, 금빛 찬란한 달걀은 음양의 논리와 생명의 숭고함을 상징하며 우주의 생성과 소멸의 신비를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 같다고 언급하기도 한다. 그리고 결말 부분에 이르러 달리의 예술관을 “지독한 자기중심적이고 오만한 예술관"을 지닌 것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평소 성게나 게처럼 연약하기 이를 데 없는 살덩이를 단단한 껍질로 감싸고 있는 갑각류에 열광하던 점으로 미루어보면, 돌발적이고 공격적인, 혹은 광기 어린 그의 행동들은 어쩌면 실은 너무나 예민하고 섬

세해서 상처 입기 쉬운 감성을, 또는 고독이나 공포를 감추기 위함이 아니었을까"라고 조심스럽게 의혹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달리에게 '구원의 여인'이었던 '갈라'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시인 '폴 엘뤼아르의 아내이자 화가 막스 에른스트'의 공공연한 연인이기도 했던 갈라". 도덕성과는 거리가 멀지만 "천재적 재능을 감지하는 탁월한 감각과 통찰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갈라. "정신분열증으로 치달을 수도 있었던 달리의 상상력을 창조로 승화시켰던 여인, 비정상적인 그의 사고를 정상으로 끌어내리거나, 철저한 그의 에고이즘을 집단에 융화시키려 하지 않고 독특한 개성으로 발전시켰던 갈라". 그 여인은 달리에게는 "운명의 여인이었고 뮤즈였음을 인식하며 결말 부분에서 "광기 같은 열정도, 갈라처럼 창조적 광기를 감지해 내는 혜안도 없으면서 주어진 삶마저 치열하게 살지 못하고 있는 부끄러움에 8월의 햇살이 한층 뜨겁게 느껴졌다" 그 달리 컬렉션 관람의 소감을 평전적으로 마무리한다.

2.

기존의 이혜연 수필의 평은 "예리한 관찰과 창의적 상상력 및 언어 감각으로 아름다운 서정적 수필로서의 예술성을 형상화하는 작가"라고 다소포괄적인 언급을 하고 있다. 하지만 문단에서는 이혜연 수필이 감각적이라는 감성적인 평가는 유보하는 것 같다. 그 이유는 그 평가가 중후하지 않고 가볍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감각적인 수필이 우아한 면모를 훼손시킬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일까?

이혜연 수필 중 가장 짧은 수필 <손톱 깎기>를 보면서 필자는 그 수필의 경쾌함에 혹은 산뜻함에 나의 중후감(?)을 버리기로 했다. 그의 수필은 로고스적 경향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수필은 파토스적인 수필도 있다. 그래서 그의 수필은 두 경향이 융합된 에토스적인 미학을 지니고 있다. 이 수필의 결말 부분이 이를 입증해 주는 부기가 된다. "내 입에서 떨어져 나온 말들을 생각한다. 예상 범위 안에 머물리라 생각했던 말의 부스러기들이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의미로 탈바꿈하여 나타날 때의 당혹감이라니!"라는 여기까지의 문장은 진정한 의미를 왜곡시키는 말에 대한 속성을 로고스적인 사유로 형상화한 문장이다. 그러나 다음 문장인 "말을 뱉는 일은 손톱을 깎는 일과 같다./말은 유기물이다" (수필 <손톱깍기>결말부분)는 다분히 감각적이다. 이 문장에 대해 굳이 설명이 필요하다면 이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의 문장은 청각적 이미지를 시각적인 이미지로 공감각 전이한 감성적인 문장이며, 뒤의 문장인 '말은 유기물이다'는 '쓰레기 같은 말'이라는 자조적인 아이러니 표현 구조를 차용한 다분히 시적인 감각적 표현이라는 설명이 그것이다. 어떤 때는 깊은 사유의 관념적인 언어보다는 감각적인 언어로 표현할 때 그 맛이 상큼하고, 깊게 느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감흥을 느끼게 하는 문장은 그의 수필에서 쉽게 찾아진다. “물새한 무리가 후드득 날아오른다"로 시작하는 수필 <11월은 빈 몸으로 서다>에서는 제목이 감성적인 것처럼 감각적 표현은 본문에서도 쉽게 찾아진다. "휘모리처럼 사위를 온통 붉은 빛으로 휘몰아 넣던 노을이 스러지고 나자, 한지에 먹물 스미듯 시나브로 어둠이 밀려오기 시작한다"라든지, “11월은 바로 이런 저녁 빛을 닮았다. 가을이라기엔 너무 늦고 겨울이라기엔 다소 이른 가을과 겨울이 몸을 섞는 달이다"라는 11월이라는 시간에 대한 감성적 인식은 감성적인 시인조차도 배워야 할 세련된 감성이다.

이러한 이혜연 작가의 감성은 유년의 정서 혹은 감성의 연계 선상에서 표출되는 것으로 보인다. 수필 <분꽃>에서 작가는 서두에 "가슴에 묻어
둔 그리움들이 있다. 질화로 속에 담긴 불씨처럼 그렇게 가슴 깊숙한 곳에 들어앉아 자칫 냉랭해지려는 내 삶에 온기를 불어넣어 주곤 하는 내 인생의 동반자이다. 때론 선명한 윤곽을 지닌 실체로, 때로는 안개처럼 모호한 모습으로 불현듯 그리움은 다가온다"라는 진솔한 내적 성찰을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런데 요즈음 들어 그리움의 대상들이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새로 밝는 날에 대한 기대감이 줄어져 가기 때문일까. 귀소본능처럼 세월을 거슬러 오르려고만 한다. 화사한 봄보다는 까칠해진 가을에, 빛을 여는 아침보다 빛을 거두어들이는 어스름 저녁에 편안함을 느끼는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닌가 싶다."는 토로도 그것이다. 가슴에 묻어 둔 그리움이 오랜 세월 속에 변화되었다 해도 그 그리움의 핵은 천형처럼 원형으로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에게 있어 유년의 분꽃이 지금의 분꽃이기 때문이다. 작가에 있어 분꽃은 “그 어스름 녘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와도 같은 그리움을 주는 꽃"이다. 그리고 작가는 “목을 뽑아 올린 긴 기다림 끝에 저녁 이내를 머금고 피어나는 꽃, 이제는 세월의 뒤안길로 밀려나 버린 내 유년의 꽃, 분꽃이다”라고 인식하고 있다고도 토로한다. 분꽃은 "해바라기 같은 열정도, 장미꽃같은 요염함도, 달맞이꽃과 같은 처연함도, 코스모스나 들국화와 같은 청초함도 없다. 그저 소박하고 편안한 모습일 뿐. 그러나 봉숭아, 맨드라미, 채송화 같은 꽃들이 주는 소박함과는 다른 멋이 분꽃에게는 있다."고 말하면서 분꽃의 이미지를 특별한 시각으로 바라본다.

바람처럼 떠돌다가 어느 날엔가는 찾아들 지아비를 그리며 저물녘이면 살며시 매무새를 다듬어 보는 아낙 긴 밤 별을 우러르며 기다림에 애를 태우다, 쏟아지는 아침 햇살에 그만 그리움을 접어 가슴에 묻고 마음 추슬러보는 여인. 그러나 체념과 기다림의 되풀이 끝에 그리던 임 돌아와도 원망한마디 하지 못하고 슬며시 돌아서 눈물 글썽이는 순박한 여인네 같은 꽃.

그 돌아서는 옷깃에서 얼핏 풍기는 은은한 향내....

분꽃에서는 어쩐지 시집간 언니 혹은 젊은 날의 우리네 어머니와 같은 이미지가 느껴진다. 당차고 검박한 살림꾼이면서도 저녁이면 어쩔 수 없이 거울 앞에 다가앉는 여인일 수밖에 없는 꽃, 살포시 내민 꽃술은 그리움에 애태우는 여인의 속눈썹에 맺힌 이슬방울처럼 애잔한 느낌을 준다.

-<분꽃> 중에서

어쩌면 앙징스럽고 똑순이(?) 같은 분꽃을 이혜연 작가는 역마살이 낀지아비를 기다리는 아낙으로, 시집간 언니 혹은 살림꾼인 어머니와 같은 꽃으로 그리고 “거울 앞에 다가앉는 여인일 수밖에 없는 꽃. 살포시 내민꽃술은 그리움에 애태우는 여인의 속눈썹에 맺힌 이슬방울처럼 애잔한 느낌을 주는 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 여인의 유년 때부터 기다림과 체념의 미학을 배운 그 정서 때문일 것이다. 그로 인해 작가는 이 수필의 결말 부분에서 "어린 시절 칭얼거리며 휘감고 돌던 어머니의 치마폭에서 풍기던 은은한 향내”로 가슴이 훈훈해지며 “분꽃 하나를 따 든 채, 어둠이 내리고 있는 골목길로 내 아이를 찾아 나선다”고 마무리한다.

수필 <숨은 길>의 서두는 "나는 지금 아버지의 그림을 보고 있다”로 시작해서 결말 부분에서 "아버지 역시 이 그림을 통해 온전한 자유를 맛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 다만 정지된 화면 속의 숨은 길에서나 자유를 맛보며"로 끝난다. 이 수필은 영원한 자유인인 아버지를 모티프로 한다.

바랑 하나 달랑 걸머지고 굽은 길을 가는 수행승의 뒷모습을 담은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그 가뿐한 뒷모습에서 배어 나오는 자유가 가슴을 저리게 했다. 실제로 그에게 그 길은 그렇게 홀가분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진이라는 정지된 화면과 휘돌아 숨어버린 길, 그리고 출가자라는 신분과 뒷모습은 무한한 상상의 세계를 제공함으로써 나를 자유롭게 해 주었던 것이다.

(...) 그 길은 언제나 숨은 길이다. 게다가 수많은 가닥으로 갈라져 나타나 끊임없이 선택을 요구하곤 한다. 그중 한 길을 택할 수밖에 없는 우리는 그래서 늘 선택한 길에 대한 불안과 나머지 길들에 대한 미련을 안고 사는 게 아닌가 싶다. 얽히고설킨 인연의 줄을 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길들을 쉼 없이 더듬어 가야 하는 삶의 여정은 그래서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수필 <숨은 길> 중에서

그러나 위의 인용문을 보면 이 수필은 예술가의 감성을 갖고 자유분방하게 살았던 아버지의 자유로운 영혼을 통해 언제나 '숨은 길’에는 얽히고 설킨 인연 때문에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삶임을 이야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느 때처럼 그림을 바라보고 있던 어느 날, 문득 아버지도 그렇게 삶이 자유로웠던 것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유가 선택에 이르면 오롯이 자유일 수 없을 터. 아버지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나름대로 얽매어 힘들었을 수도 있겠다. 싶은 것이다. 예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체험이기도 하지만 자기 안에 잠재된 욕구이기도 하다. 내가 이 그림 위에 나를 올려놓고 시름없는 방랑을 꿈꾸어보듯이, 아버지 역시 이 그림을 통해 온전한 자유를 맛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결말 부분의 토로가 그것이다. 또한 이혜연 작가는 “기실 자유만큼 두려운 것이 있을까? 그 두려움 때문에 나는 내 삶을 스스로 굴레를 쓰고 등 떠밀려 가는 비겁함으로 일관해 왔던 것 같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인생이기에 한편 희망을 가질 수 있고 의욕도 생기는 것이겠지만, 그 은밀함이 두려워 이 나이 먹도록 아직도 나는 쭈뼛거리며 살고 있다. 다만 정지된 화면 속의 숨은 길에서나 자유를 맛보며"라는 마지막 단락을 통해서 '숨은 길'에서라도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속셈을 드러낸다.

서두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아버지를 모티프로 쓴 또 다른 짧은 수필은 <어느 날, 그리고 문득>이다. 이 수필은 어느 날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 삶

을 통해 "시간은 그렇게 어느 날 문득 열렸다가, 어느 날 문득 닫혔다. 내가 존재해야 모든 것이 존재하는 것. 내가 사라지면 모든 것도 없어진다. 남아 있는 것은 남의 세상, 남의 시간일 뿐"이라는 잠언적인 인식과 태어남이 그러하듯이 숨을 멈춘 순간도 '문득'이라는 작은 깨달음을 전언하는 수필이다.

또 다른 짧은 수필 <시간의 길이>는 "파란 하늘을 가르며 제트기 한 대가 날아간 그 자리에 "하얀 구름 같은 한 줄기 궤적만이 남은 것을 보고, 작가는 '지금'이라는 시간의 길이가 찰나임을 깨닫게 된다. 그 순간을 포착하여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시간"의 길이를 환기한다. 이러한 깨달음은 감성과 지성의 합일로 이루어진다. 위트나 유어처럼 감성이 먼저 앞서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는 인식이다. 이 수필의 마지막 문장인 “지금’의 흔적, 시간의 실체를 한순간의 꿈처럼 잠깐 다가온 감성이라도 그것 없는 가능하지 않은 인식이다.

이렇게 '지금 시간의 길이'처럼 이혜연 수필의 감성을 수필계는 간과했는지도 모른다. 철학적 인식이 깊은 수필가로의 평가 때문에 가려져 감성적인 작가임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이혜연 작가의 철학적 사유는 감성이 먼저 앞서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그의 수필은 '감각적 사유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문학작품으로 인식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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