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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마음의 향기 隨筆

죽령루기 / 김태환

작성자큰곰|작성시간19.09.01|조회수114 목록 댓글 1

                                  竹嶺樓記

 

榮州山水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鄒魯之鄕이요 선비의 고장이다. 小白山嶺南鎭山으로 에서 내려오다 서쪽에서 솟구쳐 그 凝結된 것이 매우 雄大하고 봉우리들 또한 秀麗하여 마치 푸른 물결이 다투는 듯하고 凝縮한 것이 無窮하다. 竹嶺이 서려 있는 듯한 小白鞍部位置해 있는데 蓮花峯兜率峰이 이어지는 잘록한 곳에 호랑이가 걸터 앉은 듯 하늘을 으로 가로지르고 있다. 竹嶺漢江洛東江 水系分水嶺으로 아름다운 景觀形成하고 柔順하면서도 莊重하고 端雅한 선비의 氣品風貌를 갖추고 있다. 嶺南湖西를 연결하는 689m 竹嶺東南으로는 1300里 嶺南의 젖줄인 洛東江을 열고, 儒彿文化忠節歷史를 펼쳐 놓았으며 西北으로 南漢江을 열어 漢江文化를 꽃피웠다. 일찍이 李重煥擇里志에서 竹嶺大嶺이라 했는데, 옛부터 竹嶺聞慶새재와 秋風嶺과 함께 嶺南3關門중 으뜸으로 손꼽혀 왔다. 竹嶺三國史記阿達羅王 5(158)戊戌年 3竹竹에 의해 開通되었는데 竹竹은 고개를 開拓하고 지쳐 殉死하였는데 이로 하여 고개 이름을 竹嶺이라 했다. 그 후 高句麗新羅激戰地溫達 將軍의 자취가 서린 곳으로 高句麗 군사들이 넘어다녔고, 잃었던 땅을 되찾은 新羅軍甄萱을 물리친 高麗王建, 亡國을 품은 麻衣太子가 눈물로 넘던 歷史現場이었다. 朝鮮初 世宗·成宗 年間에는 使臣들의 行路, 壬辰倭亂때는 關防으로 役割을 하였으며, 1907年 高宗强制退位大韓帝國 軍隊解散으로 閔肯鎬李康秊 義陣8日間 戰鬪를 한 義兵戰爭韓國戰爭時 竹嶺戰鬪激戰地이기도 했다. 또한 花郞 竹旨郞上元寺 銅鐘傳說이 서려있고, 退溪 先生仲兄溫溪 先生을 배웅하던 곳이었으며, 豊基 郡守 周世鵬聾巖 李賢輔懷抱를 풀던 곳이기도 하였다. 특히 耘谷 元天錫, 梅月堂 金時習, 孤山 尹善道, 眉叟 許穆, 茶山 丁若鏞 詩人墨客文學現場이기도 했다. 竹嶺1930까지 慶尙道 東北地方 여러 고을 사람들이 서울 往來에 이용하던 길로 靑雲의 뜻을 품은 科擧 선비, 公務를 띤 官員들이며, 赴任·退任길의 고을 守令이며, 海陸의 온갖 物産流通하는 장사꾼들로 四時장철 煩雜했다. 이렇듯 竹嶺은 우리 歷史政治, 經濟, 軍事, 文化發展시켜온 중요한 分岐點으로 약 2千年 동안 그 役割을 해왔다. 悠久歲月에 걸쳐 嶺南 內陸을 잇는 動脈이었던 竹嶺에도 1934新作路가 열리고, 1942年 竹嶺 아래로 4,500m의 터널이 뚫려 中央線鐵道開通되고, 1971國道 5號線開通되었다. 2001年 中央高速道路開通되고, 竹嶺옛길이 2007年 名勝 第30指定되면서 이제는 호젓한 옛 모습을 되찾았다. 由緖 깊은 歷史現場 竹嶺榮州市201112建立하고 前面竹嶺樓’, 後面嶠南第一關이라는 懸板을 걸었다. 建立되고 數年이 지났으나 記文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던 榮州地域 鄕校儒林에서 積極 發意하여 삼가 記文을 새겨 걸게되었다. 竹嶺樓의 아름다운 景致와 드넓고 탁 트인 모습은 嶺南의 으뜸이고, 푸른 물과 맑은 으로 하여금 아름다움을 더욱 빛나게 하였으니 그 歷史를 역시 記錄할 만하다. 또한 오고 가는 길손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땀을 씻고 잠시 쉬어 갈수 있는 空間으로 竹嶺樓永遠히 남겨지길 하면서 이 에 오르는 모든 이들에게 늘 지극한 즐거움이 이어지기를 바라노라.

 

                                               2017丁酉 孟夏節   김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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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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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성인봉 | 작성시간 23.05.07 죽령루기에는 죽령이름의 유래 죽령의역사 문회등 알찬자료가 게재되어있어 매우 유익한자료일 뿐만아니라 루각에서 읽기 힘든 자료를 안방에서도 읽을 수 있게해 주셔서 대단히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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