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을은 그리 될 것이란 것을 알면서도 기울어진 가을 그 비탈에 서있는 생이기에 바람만 불어도 그저 말없이 떠오르는 것은 그리움이다 사랑은 가을처럼 붉은 안토시아닌 고통의 눈빛으로 시작되더니 노란 카로티노이드 미소로 영원히 남겨질 것처럼 다가서 왔다가는 이내 그 끝은 항상 어둠의 절벽에 서성이는 암갈색 그림자로 겨우 버티다 회색 빛 절망과 죽음으로 늘 멈추었다 그 추상이 아니라 해도 고운 가을이 참혹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사랑을 소리쳐 부르면 사랑은 없고 상처투성이 그리움만이 낙엽처럼 떼구르르 굴러 눈물이 되고 서러움이 되었다 그래서 이 가을 낙엽 하나 그리움 낙엽 하나 그리움 또 죽음 암영 깊은 그 그림자 습관처럼 세월에 기대어 고독으로 우는 것인데 그래도 떠오르는 것은 색 바랜 그리움이다. 어제까지 돌아온 계절에 대한 제 허망은 바로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이런 글을 남기고 싶습니다. 때가 되니 달라지는 모습입니다. 나뭇잎에 이런 색깔이? 생각만 해도 향기롭습니다. 하나하나 달라지니 전체가 달라집니다. 올해 단풍도 역시 아름다울 것 같습니다. 해가 짧아지고 기온은 하루가 다르게 내려갑니다. 나무들은 빛 신호의 변화를 감지해 여름 내내 가동했던 공장시설을 하나둘 폐쇄하고 움츠리고 말겠지요. 공장 철수명령은 곧바로 자신의 잎을 스스로 파괴하고 떨쳐내는 구조조정입니다. 영양소는 줄기와 뿌리 쪽으로 거둬들여 겨울 내내 저장됩니다. 마치 IMF를 대비한 외화축적과도 같이 게으름이 없는 것입니다. 광합성을 일으키는 초록빛 엽록소마저 엽록소 분해효소에 의해 모두 분해 되는 이 무렵 나뭇잎은 초록빛 엽록소에 가려졌던 다른 색을 뿜어내며 충만한 삶의 결과를 노래합니다. 가을 단풍입니다. 노랑·주황색으로 나타나는 카로티노이드, 붉은 안토시아닌 버리는 것 없이 알뜰하게 빛을 모으고 모은 맑은 가을날엔 얻은 포도당만큼 맑은 단풍 빛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자연변화에 순응하는 나무의 의미 속에 저를 두고 싶습니다. 그 의미란 것은 크나큰 결실과 풍만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여백없는 삶의 진실입니다. 대비하여 남겨두고 알아차려 버리는 과감입니다. 과욕은 없습니다. 가을 속 동화처럼 사는 사람들 곁에 제가 또 그렇게 서있다고 느끼고 싶은 가을이기도 하여 단풍든 가을 산을 찾아 그냥 넋 놓고 바라만 보아도 좋을 듯싶기도 하겠지만 자칫하다간 그런 서정에 도취되어 그 계절은 이내 그 눈빛을 거두고 차가운 빛을 남겨 놓는 다는 것을 잊을 수 있습니다. 여느 때 보다 더 강렬한 삶의 자세가 필요로 하는 것이 또 가을일 것입니다. 나무의 변화는 자연에 순응하는 삶의 변곡을 일깨워 줍니다. 삶은 꾸준히 숙명처럼 지속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오랫동안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아왔던 아름다운 이효석님의 글이 떠오릅니다. 음영(陰影)과 윤택(潤澤)과 색채(色彩)가 빈곤해지고 초록이 전혀 그 자취를 감추어 버린, 꿈을 잃은 허전한 뜰 한 복판에 서서, 꿈의 껍질인 낙엽을 태우면서 오로지 생활의 상념(想念)에 잠기는 것이다. 가난한 벌거숭이의 뜰은 벌써 꿈을 꾸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탓일까? 화려한 초록의 기억은 참으로 멀리 까마득하게 사라져 버렸다. 벌써 추억에 잠기고 감상(感傷)에 젖어서는 안 된다. 가을이다! 가을은 생활의 계절이다. 나는 화단의 뒷자리에를 깊게 파고, 다 타 버린 낙엽의 재를---죽어 버린 꿈의 시체를---땅 속에 깊이 파묻고, 엄연(儼然)한 생활의 자세로 돌아서지 않으면 안 된다. 이야기 속의 소년같이 용감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뜰의 낙엽을 끌어 모으면서 느끼는 상념과 목욕물을 데우면서 느끼는 행복감이 조용하면서 충만하게 묘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이 글은 다들 알다시피 이 계절에 흔히 갖게 되는 센티멘탈한 감상에 빠진 글이 아닙니다. 이효석에게 가을은 차라리 생활의 활력을 느끼게 하는 계절입니다. 추억에 잠기고 애상에 빠지기는 너무 이르니 이야기 속의 소년같이 용감하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계절이 바로 이효석의 가을입니다. 낙엽 태우는 내음이 맹렬한 생활의 의욕을 가져온다는 정서는 확실히 일반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만 어느 날 냉랭한 한기가 저돌적으로 다가와 코끝을 자극하게 되면 낙엽 태우는 활력 있는 마음으로 돌연 변하고 마는 것이 또 일상입니다. 가을처럼 활동적인 계절은 없습니다. 주위를 살펴보면 해야 할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기억해 두고 거두고 보살펴야 할 것들이 나날이 더해지는 찬 기운에 점점 오그라듭니다. 괜스레 사색에 취해 소홀히 할 겨를이 없습니다. 감 익는 시골길 마을을 매운 고추 냄새 맡으며 열심히 헤집고 달리는 경운기 소음이 가을의 정겨운 노래입니다. 자 모두 푸른 하늘같은 싱그러운 마음으로 가을을 준비합시다. 이효석의 소년 같은 용맹이 이 가을 삶을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 삶의 진한 향기를 위해 저는 마음에 아롱지는 색색의 물결 훌훌 벗어버린 벌거숭이 몸으로 도시의 거리를 향해 뛰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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