烏桓討伐의 一等功臣 전주(田疇), 돈황(燉煌)에 있었다 [제5편]
옛 조선(朝鮮) 강역(疆域), 유라시아(Eurasia)를 넘나들다.
2022년 01월 01일
○ 오환(烏桓)은,
옛날 옛적, 어느 날 출현(出現)하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世上)의 역사(歷史)속에서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들의 후손(後孫)이라는 부족(部族)이나 종족(種族) 또한 없다. 존재(存在)하고 있는 것은, 오직 기록(記錄)만이 우리들 곁에 놓여있을 뿐이다.
그들이 요서(遼西)의 동북(東北), 요동(遼東)의 서북(西北) 땅에서 할거(割據)하다가, 점점 강성(强盛)해지자 남(南)쪽으로 이동(移動), 변경(邊境)을 침탈(侵奪), 약탈(掠奪)을 일삼자, 〈후한(後漢) 말(末), 조조(曹操)가 수십만(數十萬) 대군(大軍)을 이끌고 출정(出征)하여, 생고생하다가 ‘전주(田疇)’라는 향도(嚮導)를 자처한 인물(人物)을 만나 겨우 이들을 격파(擊破)하고, 많은 포로(捕虜)들을 획득했다.〉는, 기록(記錄)만을 남기고 있다.
오환(烏桓)들이 요동요서(遼東遼西) 주변(周邊)에 세력(勢力)을 확장(擴張)하고 있을 때, 고구려(高駒驪)는 요동(遼東) 땅에 있으면서, “요서(遼西) 땅【심양(瀋陽) 서(西)쪽으로 하북성(河北省)까지도 포함(包含)된다.】을 침략(侵略)했다.”고 하였으며, 이후(以後) 백제(百濟)는, 요서(遼西) 땅에 “진평(晉平) 2군(郡)”을 설치하고, “요서(遼西) 땅을 경략(經略)했다.” 한 것이다.
『요동요서(遼東遼西) 땅에는, 고구려(高駒驪)와 오환(烏桓)이 접경(接境)하고 있었으며, 요서(遼西), 그 땅에 오환(烏桓)이 사라지자 백제(百濟)가 걸터앉아 있었다.』는 것이다.
한(漢) 또는 후한(後漢)의 변경(邊境)을 서로 침탈(侵奪)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오환(烏桓)과 고구려(高駒驪)가 대치(對峙)하고, 서로 침탈(侵奪)했다는 기록(記錄)은 없다.”
이게 무슨 뜻일까? 즉(卽) 당시(當時)의 오환(烏桓)은, 고구려(高駒驪)에 의탁(依託), 의지(依支)하여 살아가던 부족(部族)이었다는 뜻일 게다.
○ ‘오환(烏桓)과 후한(後漢)’의 전쟁(戰爭)터를 찾아보자. 즉(卽) 그 지리적(地理的), 환경적(環境的) 요인(要因)까지를 감안(勘案)하여, 당시(當時)의 전쟁(戰爭)터를 찾아보자는 거다.
즉(卽) 후한(後漢) 말(末), ‘조조(曹操)의 오환(烏桓) 토벌(討伐)’ 과정(過程)과 그 지리적(地理的) 특징(特徵), 위치(位置), 또 조조(曹操)가 오환(烏桓)을 토벌(討伐)하기 위해 출정(出征)하여, 고전(苦戰)하고 있을 때, 향도(嚮導)를 자청(自請), 조조(曹操)가 오환(烏桓)을 토벌(討伐)하는데, 일등공신(一等功臣)이 된 ‘전주(田疇)’라는 인물(人物) 또한 함께 연구(硏究), 고찰(考察)해 보기로 하자.
(1) 조조(曹操)의 출정(出征)과 오환(烏桓) 토벌(討伐) 과정(過程)
후한(後漢) 말(末), 조조(曹操)의 오환(烏桓) 토벌(討伐)과 관계(關係)되는 원전(原典) 기록(記錄)을 찾아보기로 하자.
➊ 《後漢書列傳烏桓 :烏桓者,本東胡也.中略.其在上谷塞外白山者,最為強富.其土多蝮蛇,在丁令西南,烏孫東北焉.建安十二年,曹操自征烏桓,大破蹋頓於柳城,斬之,首虜二十餘萬人. : 오환(烏丸)은 본래 동호(東胡)이다. 그들은 상곡(上谷) 새외(塞外)의 백산(白山)에 있는 자들로, 가장 강한 자들이다. 그 땅에는 살모사 뱀이 많은데, 정령(丁令)의 서남(西南), 오손(烏孫) 동북(東北)이다. 건안(建安) 12년, 조조(曹操)가 친히 오환(烏桓)을 정벌, 답돈(蹋頓)을 유성(柳城)에서 크게 깨뜨리고, 참하고, 20여만 인을 사로잡았다.》고 하였다.
➋ 《三國志 魏書武帝紀[太祖武皇帝] : 將北征三郡烏丸.中略.夏五月,至無終.秋七月,大水,傍海道不通,田疇請為鄉導,公從之.引軍出盧龍塞,塞外道絕不通,乃塹山堙谷五百餘里,經白檀,歷平岡,涉鮮卑庭,東指柳城,未至二百里,虜乃知之. : 장군이 북쪽 삼군의 오환을 토벌할 때, 중략. 여름 5월에 무종(無終)에 이르렀다. 가을 7월에 큰비가 내려, 바다(海)길이 통하지 않았다. “전주(田疇)”가 길잡이(向導)를 자청하자 공(曹操)도 따랐다. 군사를 인도해 노룡새를 나왔는데, 새외의 길이 막혀 통하지 않자, 이에 산을 파고, 골짜기를 메워 5백여 리를 가, “백단”을 지나서, “평강(平岡)”을 지나 선비(鮮卑)의 뜰(庭)을 지났는데, 동(東)쪽으로 유성(柳城)을 가리켰는데, 아직도 2백 리나 남아있는데, 오랑캐(虜)도 이를 알았다.》고 하였다.
➌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第 30: 烏桓 : 建安十一年,太祖自征蹋頓於柳城,潛軍詭道,未至百餘里,虜乃覺.尚與蹋頓將眾逆戰於凡城,兵馬甚盛.太祖登高望虜陳,柳抑軍未進,觀其小動,乃擊破其眾,臨陳斬蹋頓首,死者被野. : 건안 11년, 태조(太祖)가 친히 유성(柳城)의 답돈을 정벌하는데, 은밀히 군을 움직여 속이고는, 백리(百里) 되는 곳에 이르렀을 때, 적에게 발각되었다. 원상은 답돈과 그 무리들의 공격을 받다가 범성(凡城)에서 역습하였는데, 그 병사와 군마가 매우 많았다. 태조(太祖)가 고지에 올라 적진을 살펴보며, 군이 진격하지 못하게 억누르고, 적의 조그만 움직임까지 관찰하고는, 이에 그 무리들을 격파(擊破)하고, 적진에 임해 답돈을 참수하니, 죽은 자가 들판을 뒤덮었다.》고 하였다.
➍ 《後漢書 卷九孝獻帝紀第九:十二年秋八月,曹操大破烏桓於柳城,斬其蹋頓.註釋:蹋頓,匈奴王號.柳城,縣名,屬遼西郡,今營州縣.: 12년 가을 8월, 조조(曹操)가 유성(柳城)에서 오환을 크게 깨뜨리고, 답돈(蹋頓)을 베었다. 주석(註釋) : 답돈(蹋頓)은 흉노(匈奴) 왕의 명칭이다. 유성(柳城)은, 현의 이름으로, 요서(遼西)군에 속했는데, 지금의 영주(營州)현이다.》라고 하였다.
위의 글 ‘➊+➋+➌+➍’에서 모두 등장(登場)하는 지명(地名)이 “유성(柳城)”이며, “유성(柳城)”은 ‘영주(營州)’였다고 하였다.
건안(建安) ‘11년이니 12년’이니 하는 시차(時差)는. 무시(無視)해도 좋다. 다만 여기서 중요(重要)하게 여기는 것은, “유성(柳城) 또는 영주(營州)라는 지명(地名)”이다.
역사서(歷史書)에서는 『유성(柳城)은, “호(胡)”』 【호(胡)는 오랑캐, 되놈으로 서방(西方)족을 일컫는 말이다.】가 살던 곳으로, 〈유성(柳城) 호(胡) 또는 영주(營州) 호(胡)〉들이 살던 곳이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즉(卽)
‘舊唐書 列傳 安祿山’편을 보면 :《安祿山,營州柳城雜種胡人也,本無姓氏,名軋犖山.母阿史德氏,亦突厥巫師,以卜為業.中略.解六蕃語,為互市牙郎. : 안록산(安祿山)은, 영주(營州) 유성(柳城)의 잡종(雜種) 호인(胡人)인데, 본시(本是) 성(城)은 없고, 알락산(軋犖山)이란 이름만 있었다. 어머니는 아사덕(阿史德)씨로, 돌궐(突厥)의 무당으로, 점치는 것을 업으로 하였다. 중략. 6개 번족(蕃族) 말을 해, 호시아랑(互市牙郞)이 되었다. 史思明,本名窣干.營州寧夷州突厥雜種胡人也.又解六蕃語,與祿山同,為互市郎. : 사사명(史思明)은, 본명(本名)이 솔간(窣干)으로, 영주(營州) 녕이주 돌궐(突厥) 잡종(雜種) 호인(胡人)이다. 또 6개 번족(蕃族) 말을 해, 안록산(安祿山)과 같이, 호시랑(互市郞)이 되었다.》고 하였음에 비춰보면,
〈유성(柳城), 영주(營州)〉이라는 지명(地名)은, “서방(西方) 땅”에 있었던 이름이다. 호(胡)는, 서방(西方) 종족(種族) 즉 서이(西夷)를 말하는 것이고, 서쪽 오랑캐【되놈 : 胡】를 뜻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의 말대로라면 :
㈠ 〈하북성(河北省) 동(東)쪽의 “영주(營州) 또는 유성(柳城) 땅”은, 서호(西胡)【서방(西方) 오랑캐[胡]】들이 살던 곳이며,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카스피해[Caspi, Sea] 동(東)쪽 땅이었다는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㈡ 그렇다면 “중원대륙(中原大陸)의 땅은, 열도(列島)의 동(東)쪽 태평양(太平洋) 한가운데에 있었다.”는 것인가?
이게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의 해설(解說) 한계(限界)다. 더 이상(以上)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은 존재(存在)할 수 없게 된다는 뜻이다.
㈢ “안록산(安祿山)·사사명(史思明)”은 소그드인【Sogd人 : 粟特人】이다. 그가 절도사(節度使)로 있었던 범양(范陽)은, 범양군(范陽郡)으로, 범양국(范陽國)과 같은데, 범양국(范陽國)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의 아랄해[Aral, 海]로 흘러드는, ‘아무다리아강과 시르다리아강’ 상류(上流) 중간 사이를 동서(東西)로 흐르는 ‘추강(제라흐샨 강)’ 주변의 땅을 말한다.
즉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Uzbekistan)·타지키스탄(Tajikistan)·키르기스스탄(Kyrgyzstan)·카자흐스탄(Kazakhstan)의 접경지대(接境地帶)’를 말한다. 특히 ‘부하라(Bukhara)’를 지칭(指稱)하기도 한다.
“안록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의 범양군(范陽郡)에 있었던 인물(人物)이다. 이곳은 ‘소그드인【Sogd人 : 粟特人】’들이 살던 곳이다.
㈣ 혁연발발(赫連勃勃)도 ‘소그드인’이다. 즉 호인(胡人)이란 이야기다. 통만성(統萬城)에서 발굴(發掘)된 벽화(壁畫)속에 ‘소그드인’들의 종교의식(宗敎儀式) 모습이 그려져 있다고 하였으니 말이다.【현재(現在)로써는, 벽화(壁畫)의 진위(眞僞) 여부(與否)는 알 수 없다.】
㈤ 평노절도사(平盧節度使) 겸 유성태수(柳城太守) 안록산(安祿山)
당서(唐書)에서는 말하기를 : 《天寶元年,以平廬為節度,祿山為之使,兼柳城太守,押兩蕃,渤海,黑水四府經略使 : 천보(天寶) 원년(元年)에, ‘평노절도사(平盧節度使)가 되었으며, 유성태수(柳城太守)를 겸임(兼任)’하였는데, “양번(兩蕃)과 발해(渤海)와 흑수(黑水)4부의 경략사(經略使)”로 이들을 관리하기 위한 것이었다.》하였는데,
발해(勃海)니, 흑수(黑水)니 하는 곳은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동(東)쪽에 없었다. 또
안록산(安綠山)이란 인물(人物)은 : "안(安)"은 성(姓)으로 ‘소그디아나’【Sogdiana:스키타이 : '소그드'(Sogd)의 '땅'(ia)이라는 의미(意味)로,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의 아무다리야 강과 시르다리야 강 상류의 중간을 동서(東西)로 흐르는 ‘제라흐샨강’의 옛 이름이며, 그곳 땅을 일컫는 말이다.】의 우즈베키스탄(Uzbekistan)의 ‘부카라=부하라’를 가리키는 이름에서 유래(由來)했다고 한다. 또한 안록산(安綠山)이란 이름에서 “록산(綠山)”은 “록샨”으로 “빛나는”이라는 뜻의 소그드어(語)이며, 그의 반란(叛亂)은 소그드(Sogd)인으로부터 지원(支援)을 받은 소그드(Sogd)인의 반란(叛亂)이며, 안록산(安綠山)의 옥새(玉璽)에, “황제(皇帝)”와 소그드(Sogd)왕(王)의 호칭인 “자묵”이 함께 새겨져 있었다는 것에, 그가 “범양절도사(范陽節度使)”로 있었던 곳은 ‘소그디아나(Sogdiana)’일 수밖에 없다.
㈥ 《晉書地理志 / 幽州:范陽國漢置涿郡.魏文更名范陽郡.武帝置國,封宣帝弟子綏為王.統縣八,戶一萬一千. : 범양국(范陽國)은, 한(漢)의 탁군(涿郡)에 두었다. 위(魏)의 문제(文帝)가 이름을 바꿔 ‘범양군(范陽郡)’이라 했다. 무제(武帝)가 ‘범양국(范國)’을 두었다. 선제(宣帝)의 동생 아들을 왕으로 봉했다. 통현(統縣)이 8, 호(戶)가 일만(一萬) 일천(一千)이었다.》
《新唐書地理志 幽州范陽郡 : 대도독부이며, 본래 탁군(涿郡)인데, 호(戶) 67,243호이며, 인구는 371,312인이다. 주석(註釋) - 부(府)가 14 개【有府十四,曰呂平,涿城,德聞,潞城,樂上,清化,洪源,良鄉,開福,政和,停驂,柘河,良杜,咸寧】이며, 성내(城內)에 경략(經略)군이 있으며, 또 납항(納降)군이 있다. 본시(本是) 납항수착성인데, 옛 정령천(丁零川)이다. 서남에 안새군(安塞軍)이 있고, 혁련성(赫連城)이 있다.【城內有經略軍,又有納降軍,本納降守捉城,故丁零川也.西南有安塞軍,有赫連城.】
“정령천(丁零川)”은 서북방(西北方) 러시아(Russia) 땅에 있었던 ‘정령(丁零)’ 땅 안에 있는 것이며, ‘혁련성(赫連城)’ 역시 ‘혁련(赫連)씨’가 있었던 곳에 있어야 옳은 것이며, “혁련(赫連)씨는 흉노(匈奴) 철불부 출신(出身)”이란 점이다. 즉(卽) 하북성(河北省) 또는 그 동(東)쪽 땅에 있을 수 없다.
《營州柳城郡 : 西四百八十里有渝關守捉城.又有汝羅,懷遠,巫閭,襄平四守捉城. 柳城.中.西北接奚,北接契丹,有東北鎮醫巫閭山祠.又東有碣石山. : 서(西)쪽 480리에 유관수착성(渝關守捉城)이 있다. 또 여라(汝羅). 회원(懷遠). 무려(巫閭). 양평(襄平) 등 4 개의 수착성(守捉城)이 있다. 유성(柳城)은 서북(西北)으로 해(奚)와 접하고, 북(北)쪽으로는 글란(契丹)과 접하고, 동북(東北)진(鎭)에 ‘의무려산(醫巫閭山) 사당이 있다. 또 동(東)쪽에는 갈석산(碣石山)이 있다.》고 하였다.
㈦ 《北史 西域傳 吐呼羅國 : 吐呼羅國,去代一萬二千里.東至范陽國,西至悉萬斤國,中間相去二千里;南至連山,不知名.中略. : 토호라국(吐呼羅國)은 대【代 : 후위(後魏)】까지 일만(一萬)이천(二千)리 떨어져 있다. 동(東)쪽으로 『범양국(范陽國)』까지, 서쪽으로 실만근국(悉萬斤國)까지이며, 중간은 서로 2천리 떨어져 있다. 남쪽으로는 연달아 산이 있는데, 이름을 알 수 없다.》고 하였는데,
“대(代)에서 12,000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동(東)쪽은 범양국(范陽國)’이고, ‘서(西)쪽 끝은 실만근국(悉萬斤國)’이었는데, 서로 떨어져 있는 중간 거리(距離)가 2천 리(千里)였다고 하였으니, 가운데를 계산해도 “대(代)로부터 ‘범양국(范陽國)=범양군(范陽郡)’까지 11,000리 떨어져 있었다.”는 말이 된다.
‘범양국(范陽國)=범양군(范陽郡)’이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동(東)쪽에 있을 수 없다. ‘조선(朝鮮)’을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동(東)쪽 땅에 만들어 놓기 위해 조작(造作), 이동(移動)시켜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不過)하다.
➤ ‘토호라국(吐呼羅國)’은 ‘토화라국(吐火羅國)’을 말하는 것으로 후위(後魏) 때의 이름으로, 당(唐)나라 때는 토화라국(吐火羅國)이다. 이 나라는 『오호하(烏滸河) 또는 오호수(烏滸水)라는 규수(嬀水)』남쪽에 있었으며, 오늘날의 “아무강”으로 “아무다리아강”이다.【규수(嬀水)는 조선(朝鮮)의 본시(本是) 상곡군(上谷郡)이 있었던 곳이다.】
➎ 淸史考 51 地理 23 : 유성(柳城)은, 신강성(新疆省)에도 있다. 청사고(淸史考)에, 〈선선(鄯善)은 포창해(蒲昌海) 서(西)쪽 지점에 있으며, 이곳에 “유성(柳城)”이 있다.〉【선선(鄯善-樓欄)이 곧 유성(柳城)이다.】고 하였다. 특히 이곳 가까운 곳에 백용퇴(白龍堆)가 있다는 사실(事實)이 매우 중요(重要)한 포인트(Point)가 된다. 【淸史考23 新彊 : 鄯善,漢,車師前國東境樓蘭.元魏後為高昌白棘城.唐,柳中縣,屬西州交河郡地.宋,六種,屬高昌,後入遼.元,魯克察魯地.明,柳城.中略.】
청사고(淸史考)를 보면 : ‘유성(柳城)이란 지명(地名) 역시(亦是), “사가(史家)들에 의해 여기저기로 옮겨져 심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중요(重要)한 것은 “범양(范陽)·노룡(盧龍)·유성(柳城)”등의 지명(地名)은, “본시(本是)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의 아무다리아(AmuDarya)강과 시르다리아(Syrdarya)강 사이의 동쪽 땅에 있었다.”는 것이다.
※ 이미지(1) 아무다리아강·시르다리아강 주변도[출처 : 두산백과]
※ 이미지(2) 시르다리아(Syrdarya)강 주변도(출처 : 나무위키)
그러나 이러한 지명(地名)이 오늘날의 타클라마칸사막[Taklamakan Desert : 塔里木盆地] 과 백룡퇴(白龍堆) 사이로 이동(移動)되어 정착(定着)되었는데,
➏ 건안(建安) 12년【AD 207년】, 조조(曹操)가 수십만(數十萬) 대군(大軍)을 출정(出征)시켜 오환(烏桓)을 토벌(討伐)한 곳이 바로 오늘날의 『신강성(新疆省)의 포창해(蒲昌海)와 백룡퇴(白龍堆) 주변일대(周邊一帶)였다.』는 것이다.
이게 중요(重要)한 것이다.
(2) 향도(嚮導) 전주(田疇)
그가 역사서(歷史書)속에 등장(登場)하게 된 것은, 후한(後漢) 말, 조조(曹操)의 오환(烏桓) 토벌(討伐)【建安 12, AD 207】때 향도(嚮導)를 자청(自請), 조조(曹操)의 출정군(出征軍)에게 승리(勝利)에 일등공신(一等功臣)이 되었다는 것 때문이다.
전주(田疇)는, 사람의 이름이다. 그는 본시 우북평(右北平) 무종(無終)인인데【田 疇 字 子 泰, 右 北 平 無 終 人 也.】세상(世上)이 소란하니, 가족(家族)과 친지(親知), 동료(同僚)들과 함께 서무산(徐無山)속으로 들어가 살았는데, 수년(數年) 사이에 그를 따르는 무리가 5천여(千餘) 호(戶)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➊ 後漢書卷73.劉虞.公孫瓚.陶謙列傳第 63 : 《注 : 魏志曰:疇字子春,右北平無終人.好讀書,善擊劍.劉虞署為從事.太祖北征烏桓,令疇將眾上徐無,出盧龍,歷平剛,登白狼堆,去柳城二百餘里,虜乃驚,太祖與戰,大斬獲,論功封疇. : 후한서73. 유우. 공손찬. 도겸 열전63 : 주석(註釋) : 위지에서 말하기를, 전주(田疇)는 ‘자춘’이며, 우북평(右北平) 무종(無終)인이다. 유우(劉虞) 휘하의 관리로 그를 따랐다. 태조(曹操)가 오환(烏桓)을 토벌할 때 전주(田疇)도 명을 받고 무리들과 서무산(徐無山)에 올라, 노룡(盧龍)을 나와, 평강(平岡)을 지나, “백랑퇴(白狼堆)”에 올랐는데, 유성(柳城)과 2백 여리 떨어져 있었다. 노(虜: 오환)들이 놀랐다. 태조(조조)가 전쟁에서 크게 참획(斬獲)하자, 그 공으로 ‘전주(田疇)’를 봉(封)하였다.》고 하였다.
➋ 三國志 卷11 魏書 11 列傳 田疇 : 田疇字子泰,右北平無終人也.中略.遂人徐無山中,營深險平敞地而居,躬耕以養父母.百姓歸之,數年閒至五千餘家. : 전주(田疇)는 자(字)가 자태이며, 우북평(右北平) 무종(無終)인다. 중략. 서무산(徐無山)중으로 들어가, 깊고 험한 곳을 평평하게 땅을 고르고 살면서, 스스로 논밭을 갈면서 부모(父母)를 공양하였다. 백성들이 돌아와, 수년(數年)사이에 이르러 5천여가가 되었다. 建安十二年,太祖北征烏丸.中略.太祖令疇將其眾為鄉,上徐無山,出盧龍,歷平岡,登白狼堆,去柳城二百餘里,虜乃驚覺. : 건안 12년에, 태조(太祖)가 북쪽의 오환(烏丸)을 토벌할 때 중략, 태조(太祖)의 명으로 전주(田疇)는 무리의 향도(嚮導)가 되어, 서무산(徐無山)위에서, 노룡을 나와, 평강을 지나, 백랑퇴(白狼堆)에 오르니, 유성(柳城) 200 리였으니, 오랑캐가 놀라서 깨달았다고 한다. 單于身自臨陳,太祖與交戰,遂大斬獲,追奔逐北,至柳城.軍還入塞,論功行封,封疇亭侯,邑五百戶. : 선우(單于)가 넓게 늘어져 태조(太祖)가 교전하여, 크게 참획(斬獲)하고, 쫓으니 북쪽으로 달아나니, 유성(柳城)에 이르러, 환군(還軍)하여 요새로 들어와, 논공(論功)을 논하여 봉하였는데, 전주(田疇)를 후(侯)로 봉하고, 식읍 5백호로 하였다.》고 하였다.
전주(田疇)가 서무산(徐無山) 속으로 들어가 사는 동안, 「그 무리가 5천여가(餘家)나 되었다」는 사실(事實)에 주목(注目)하자. 오늘의 주제(主題)이니 말이다.
조조(曹操)가 올랐다는 곳을 말하기를: 「유성(柳城)은 영주(營州)이며, 백랑퇴(白狼堆)에 올랐다.」 라고 하였는데, ‘백랑퇴(白狼堆)’라는 지명(地名) 또는 특이지형(特異地形)등의 이름으로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즉(卽) ‘백랑퇴(白狼堆)’는 ‘백룡퇴(白龍堆)’의 오기(誤記) 또는 백용퇴(白龍堆)를 숨기기 위한 왜곡(歪曲), 개작(改作)으로 밖에 볼 수 없다.
특히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사행(使行) 기록(記錄)을 살펴보면, 모두가 “백룡퇴(白龍堆)”라고 한 것을 보면, “백랑퇴(白狼堆)”는 “백용퇴(白龍堆)”의 오기(誤記) 또는 개작(改作)임이 분명한 것이 된다.
이는 매우 중요(重要)한 사실(事實)로, 대륙조선(大陸朝鮮)을 증거(證據)할 수 있는, 고증(考證)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논거(論據)가 되기 때문이다.
(3) 조선사(朝鮮史)의 전주(田疇)와 관련지명(關聯地名)
➊ 燕行錄 心田稿一/十二月十八日 :《操以疇爲鄕導.上徐無山.登白龍堆.去柳城二百餘里.虜乃驚覺云. : 조조(曹操)는 전주(田疇)를 향도(鄕 導)로 삼아, 서무산(徐無山)에 올라, “백룡퇴(白龍堆)”에 오르니, 유성(柳城)과 200여 리 떨어진 곳이었다. 오랑캐(烏桓)들이 놀라 각성했다고 한다고 전해진다.》
➋ 燕行錄 燕轅直指 二 / 十二月 十三 日 / 十八里堡記 : 〈十八里堡.古盧龍塞.唐詩所謂,盧龍塞上草初肥.雁乳平蕪曉不飛.鄕國近來音信斷.至今猶自着寒衣者.卽此地也. :십팔리보는 옛날의 노룡새(盧龍塞)이다. 당시(唐詩)에, 『노룡새 위에 풀 처음 돋아나니, 기러기 풀밭에서 새벽에 날지 않네. 고향에 요사이는 소식이 끊겨, 아직도 겨울옷을 입고 있다네.』 라고 한 것이 바로 이곳이다. 중략. 操乃引軍還.令疇爲鄕導.上徐無山.出盧龍.歷平岡.登白龍堆.去柳城二百餘里.虜乃驚覺云. 그러자 조조는 곧 군사를 이끌고 돌아와, 전주를 향도(鄕導)로 삼아, 서무산(徐無山)을 올라, 노룡을 나와, 평강을 지나, ‘백룡퇴(白龍堆)’에 오르니, 이곳은 유성(柳城)과 200여 리의 거리였다. 그제서야 오랑캐가 놀라 깨달았다고 한다.〉
➌ 燕行錄 燕薊紀程 무자년(1828, 순조 28) 12월 18일 : 《十八里堡.卽古之盧龍塞也.昔曹操北征烏桓.軍次无終.時方下雨.灣滯不通. : 십팔리보(十八里堡)는, 곧 옛 노룡새(盧龍塞)이다. 옛날 조조(曹操)가 북쪽으로 오환군(烏桓軍)을 치면서, 무종(无終)에 머물 때에, 바야흐로 비가 내려, 물이 막혀 통하지가 않았다. 操患之.以問田疇.疇曰.舊右北平治.在平剛.途出盧龍.達于柳城.今尙有微逕. : 조조가 걱정하여, 전주(田疇)에게 물었더니, 전주가 말하기를, “구우북평(舊右北平)의 읍치가 평강(平剛)에 있는데, 길이 노룡(盧龍)으로 나와 유성(柳城)에 이르며, 지금도 아직 오솔길이 있습니다.” 하였다. 遂回軍從盧龍口.越白檀之險.出空虛之地.操以疇爲鄕導.上徐無山.登白龍堆.去柳城二百餘里.虜乃驚覺云 : 드디어, 군대를 돌려 노룡 어귀에서, 백단(白檀)의 요새를 넘어, 빈 땅으로 나왔다. 조조가 전주를 길잡이로 삼아, 서무산(徐無山)에서, 백룡퇴(白龍堆)에 오르니, 유성(柳城)까지 200 리가 떨어져 있어, 적들이 깜짝 놀라 깨우쳤다고 한다.》
➤ 조선사(朝鮮史)의 연행록(燕行錄)에서 말하는 중요(重要)한 대목은 : 『전주(田疇)가 향도(嚮導)가 되어, 고전(苦戰)을 면치 못하고 있던 조조(曹操)가 이끄는 북정(北征)군에게, 상세(詳細)한 지세(地勢)를 알려주고, 인도(引導)한 까닭으로 승리(勝利)를 할 수 있었는데, 공통점(共通點)은, “백용퇴(白龍堆)”에 오르니, 유성(柳城)이 200 리 정도(程度)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청사고(淸史考)’에서 말하는 『유성(柳城)과 백용퇴(白龍堆)』와 한 치의 차이(差異)도 없는, 지형지세(地形地勢)를 말해주고 있는데, 즉(卽) “백룡퇴(白龍堆)에 오르니, 「유성(柳城) 곧 선선(鄯善:樓蘭)이 2백여(百餘)리 떨어져 있었다.」”고 한 대목이다.
(4) 전주(田疇)와 그를 따르는 무리(衆)들은 돈황(燉煌)으로 옮겨졌다.
전주(田疇)는, 우북평(右北平) 무종(無終)인이라고 하였다. 또한 조조(曹操)가 수십만(數十萬) 대군을 출정시켜 오환(烏桓)을 토벌(討伐)코자 한 곳이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땅이었다고 전해진다.
21세기(世紀) 역사통설【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의 주장(主張)이 올바른 것일까? 자! 아래의 기록(記錄)을 따라가 보자.
➊ 通典 州郡傳 安西府 : 《‘晉昌郡 瓜州’편을 보면 : 瓜州今理晉昌縣.古西戎地.戰國時,為月支所居.秦末漢初,屬匈奴,武帝以後為燉煌郡地.後漢,魏,晉皆因之.後魏屬常樂,會稽二郡.後周屬會稽郡.中略 : 과주는 진창(晉昌)현에서 다스리는데, 옛 서융(西戎)의 땅이다. 전국(戰國)시대엔 월지(月支)가 살았고, 진(秦)말 한(漢)초에는 흉노(匈奴)에 속했다. 무제(武帝) 이후(以後) 돈황(燉煌)군의 땅이다. 후한(後漢)과 위(魏), 진(晉) 모두 이와 같다. 후위(後魏)때는 상락(常樂), 회계(會稽) 두군(郡)에 속했고, 후주(後周)때는 회계(會稽)군에 속했다. 苻堅徙江漢之人萬餘戶於燉煌,中州人有田疇不闢者亦徙七千餘戶. : 부견(符堅)이 강한(江漢)사람들 만(萬) 여호(餘戶)를 돈황(燉煌)으로 옮겼는데, 중주(中州)사람 전주(田疇)와 피하지 않는 자 또한 7천(千) 여호(餘戶)도 옮겼다. 중략.》라고 하였다.
통전(通典) 북적(北狄) 원문(原文)에 따르면 :
➋ ‘오환(烏桓)=오환(烏丸)’은, 오손(烏孫)과 강거(康居)사이에 있던 소국(小國)을 누차(屢次)에 걸쳐, 침탈(侵奪)하니, 이를 두려워한 왕(王)은, 아예 흉노(匈奴)에게 항복해 버렸다고 전회(前回)에 설명하였다.
오손(烏孫)과 강거(康居)사이의 소국(小國)의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를 찾아보면 : 「카스피해(Caspi, Sea) + 아랄해(Aral, Sea)가 있는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에 있었다.」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으며,
이러한 곳에 있던 소국(小國)을 누차(屢次)에 걸쳐 침탈(侵奪)할 수 있었던 오환(烏丸)은, 〈그곳의 주변(周邊)에 있었다.〉는 결론(結論)밖에 나올 수 없다.
➌ 위의 글 ➋의 통전(通典) 원문(原文)에 따르면 : 조조(曹操)의 오환토벌(烏丸討伐)은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동(東)쪽에 없었다는 것이고, 당시(當時) 조조(曹操)의 오환토벌(烏丸討伐) 및 향도(向導) 전주(田疇)가 활동(活動)한 곳은, 〈과주(瓜州) 돈황(燉煌) 서(西)쪽 땅〉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원전(原典) 기록(記錄)은, 오늘날의 우리들은 아연실색(啞然失色)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즉(卽) 후한(後漢) 말(末), 조조(曹操)가 수십만(數十萬) 보기(步騎)와 함께 출정(出征)하여, 전주(田疇)의 도움을 받아, 오환(烏丸)을 토벌(討伐)했다는 곳은, “오늘날의 신강성(新疆省) 백용퇴(白龍堆) 서(西)쪽 땅이었다.”는 것을 확인(確認)해주는 원문(原文)이다.
이러한 말에서, “조조(曹操)은, 결국(結局)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신하(臣下)였다.”는 말과 같다.
➍ 위의 통전(通典) 내용(內容)을 보면 : 역사적(歷史的)으로, 시대적(時代的)으로 “일백(一百)년 이상(以上)의 시차(時差)가 존재(存在)하기 때문에, 이를 어떻게 증명(證明)할 수 있는가는 난감(難堪)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비록 시차(時差)가 있다하더라도,
어떻게 똑같은 인물(人物)과 그를 따르는 5-7천여 무리들과 함께, 일백(一百)년 시차(時差)를 두고, 직선거리(直線距離)로 일만(一萬)리를 뛰어넘어 벌어질 수 있었는가?
위의 기록을 살펴보면 : 참 이해(理解)하기 어려운 이야기다.「전주(田疇)가 누군가?」 조조(曹操)가 오환(烏桓)을 토벌(討伐)할 때, 향도(嚮導)가 되어 오환(烏桓)을 대패(大敗)시켰다는 것에 등장(登場)하는 인물(人物)이다. 조조(曹操)가 오환(烏桓)을 토벌한 곳이 요서(遼西)지방으로,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과 요녕성(遼寧省)지방이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이때 향도(嚮導)였던 전주(田疇) 역시 서무산(徐無山)이란 곳에서 5천 여호와 함께 살던 자(者)였는데,
이 자(者)와 똑같은 이름을 가지고, 또 백성(百姓)들 7천 여호와 함께 과주(瓜州) 돈황(燉煌)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시차(時差)는 있다하더라도,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후한(後漢) 말 ‘조조(曹操)’가 출정(出征)할 때가, 건안(建安) 12년 즉(卽) “서력(西曆) 207년”이다.
부견(符堅)은 서력(西曆) 351년 참칭(僭稱)했다하였으니, “시차(時差)가 140년(年) 이상(以上)”이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는 5천여가(餘家)이고, 통전(通典)은 7천여가(餘家)일 뿐, 그 우두머리는 “전주(田疇)”다. 이게 가능(可能)한 일일까?
전주(田疇)와 그를 추종(追從)하는 무리들은 죽지 않는 불사(不死)인들이었다는 이야기다. 이게 가능한 이야긴가? 이미 죽어 백골(白骨)이 진토(塵土)되었을 것을!!!!!!!!!!!!
➎ 〈오환(烏桓)이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에 있었다.〉는 것을 고증(考證)해주는 원전(原典)도 통전(通典)이요, 〈오환토벌(烏桓討伐)의 향도(嚮導) 전주(田疇)가 돈황(燉煌)에서 활동했다.〉는 것 역시(亦是) 〈통전(通典) 원전(原典)에서 말해주고 있다.〉는 사실(事實)이다.
이게 중요(重要)한 포인트(Point)다.
(5) 백랑퇴(白狼堆)와 백룡퇴(白龍堆)
‘유성(柳城)과 백룡퇴(白龍堆)’를 함께 연결(連結)시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조조(曹操)가 오환(烏桓)을 토벌(討伐)키 위해 출정(出征)했던 곳이 바로 오늘날의 신강성(新疆省) 백룡퇴(白龍堆)와 선선(鄯善:樓蘭)의 땅에 있었던 곳이다.』 라는 이야기가 된다.
후한(後漢) 건안(建安) 12년【AD 207】조조(曹操)의 출정군(出征軍)과 오환(烏桓) 기마(騎馬)가 격돌(激突)한 격전지(激戰地)는 “백용퇴(白龍堆)와 선선(鄯善)=누란(樓蘭)” 주변이었다는 이야기다. 즉(卽) 조조(曹操)의 출정군(出征軍)이 백룡퇴(白龍堆)에 다다르니, 유성(柳城) 즉(卽) 선선(鄯善)이 2백여(百餘)리 떨어져 있었다고 하였으니 말이다. 【樓蘭,樓蘭國是西域古國名[遺址在今新疆羅布泊西北岸]公元前77年樓蘭國王尉屠耆更名鄯善國,並遷都伊循城,西南通且末,精絕,拘彌,于闐.北通車師,西北通焉耆,東當白龍堆,通敦煌,扼絲綢之路的要衝.】
➤ 또 다른 기록(記錄)을 살펴보자.
삼국(三國)시 ‘오(吳)나라 사람이 편찬(編纂)했었다.’는 조만전(曹瞞傳)의 원문(原文)을 찾아보면 : 「이때 조조(曹操)의 출정군(出征軍)은, 날은 춥고, 수백(數百)리에 걸쳐 물(水)이 없고, 군량(軍糧)이 떨어져 아사(餓死) 직전(直前)에, 자신(自身)들의 생명(生命)괴도 같았던 말(馬) 수천(數千) 필(匹)을 죽여 군량미(軍糧米)를 대신하고, 30여장을 깊게 파, 겨우 물을 얻었다.」 고 기록(記錄)한 것을 보면, 전형적(典型的)인 사막지대(沙漠地帶)를 지칭(指稱)해 놓고 있다는 사실(事實)이다.
‘조만(曹瞞)’이란 ‘조조(曹操)’를 일컫는 말이다.
이러한 원전(原典)의 내용(內容)으로 보면 : 조조(曹操)의 오환토벌(烏桓討伐)은,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일까? 의심(疑心)이 들 수밖에 없다.
➊ 한쪽에서는 큰 비가 내려(大水), 온통 바다와 같아서, 산(山)을 깎고, 계곡(谿谷)을 메워 500 리를 전진(前進)했다고 하였지만, 이 말을 믿기 어렵다는 것이고,[즉(卽) 산(山)을 깎고, 계곡(溪谷)을 메우며 500 리를 전진(前進)했다는 이야기를 믿기 어렵다는 뜻이다.]
➋ 또 다른 쪽의 기록(記錄)에서는 전형적(典型的)인 “사막지대(沙漠地帶)를 설명(說明)해주고 있다.”는 사실(事實)이, 이를 증명(證明)하고 있다.
➌ 지금까지의 조선사(朝鮮史) 해설(解說)에서, 『후한(後漢) 말(末), 조조(曹操)의 오환(烏桓) 토벌(討伐)의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는, 사막지대(沙漠地帶)였다.』 는 것을, 원전(原典) 내용(內容)을 근거(根據), 논거(論據)로 자신(自身)에게 독자(讀者)들에게 주장(主張)할 수 있다.
“오환(烏桓)은 사막지중(沙漠之中)에 산다.”고 하였다. “이들의 본거지(本據地)를 소탕(掃蕩)하려면 사막지대로 출정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이게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다.
➤ ‘제7편’을 보면 : 이 글을 읽는 독자(讀者)들께서도 “아! 그랬구나.” 이해(理解)하실 수 있을 것이다.
○ 「조선왕조(朝鮮王朝)는 한반도(韓半島)에 없었다. 조선왕조(朝鮮王朝)의 터전은 중원대륙(中原大陸)이었으며, 유라시아(Eurasia)를 통치(統治), 지배(支配)하였던 거대(巨大) 제국(帝國)이었다.」 자부심(自負心)을 가져도 좋다.
다만 오늘날 한반도(韓半島)에 갇혀 막막한 현실을 감안(勘案), 비상(飛上)할 수 있는 용기(勇氣), 발전(發展)할 수 있는 원동력(原動力)을 확보(確保), 힘차게 뻗어나갈 수 있는 자신감(自信感)을 갖춰야 한다.
〈‘모(某) 야당(野堂)’의 ‘대통령(大統領) 후보(候補)’처럼 ‘자신(自身)과 자신(自身)의 가내(家內)조차도 제대로 관리(管理)하지 못하면서, 대한민국(大韓民國)을 다스릴 수 있는 대통령(大統領)이 되겠다는 식의 무모(無謀)하고 무식(無識)한 용기(勇氣)는, 용기(勇氣)가 아니라 만용(蠻勇)일 뿐으로, 이런 것들을 항상 눈여겨보면서,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앞길을 막는 쓰레기들은, 과감(果敢)하게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6편]으로 계속됩니다.
2022년 01월 01일 [글쓴이 : 문무(文武)]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로터스 작성시간 22.01.02 원단에 귀한 글을 올려주신 문무님께 감사드리며
올 한해도 호랑이의 기상으로 건승하시길 기원합니다(!) -
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2.01.02 안녕하세요. "로터스"님!
감사합니다.
올해에도 "로터스"님 댁내에, 무한한 행복과 평안이 깃들길 기원합니다.
좋은 글로,
여러분들의 성원에 보답하겠습니다.
늘 건강하십시요. -
작성자김영주 작성시간 22.01.02 새해 인사가 늦었습니다. 항상 올바른 우리역사의 진실을 추구하시는
문무님께 감사드립니다.
임인년 새해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
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2.01.02 안녕하세요. "김영주"님!
감사합니다.
올해도 댁내 두루 평안하시고,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늘 건강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