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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의 조선사 해설

만수지원(萬水之源) 두만강(豆滿江)은, 북해(北海)로 흘러 [1편]

작성자문 무|작성시간24.12.08|조회수520 목록 댓글 2

 

               만수지원(萬水之源) 두만강(豆滿江), 북해(北海)로 흘러 [1편]

                                               고려강(高麗江)’이라는 근거(根據)?

                                                              2024년 12월 08일

 

○  두만강(豆滿江)만수지원(萬水之源)” 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만족(滿族) 언어(言語)’라고 한다. 두만강(豆滿江)은, 「반도(半島) 최(最) 북방지대(北方地帶)를 흐르는 하천(河川)이며, 중국(中國)과 러시아(Russia)와의 경계(境界)를 이루고 있는 하천(河川)이다.」

 

   이 하천(河川)을 ‘두만강(豆滿江)’이라고 부르는 것은, 20세기(世紀) 이후(以後)다. 그렇다면 반만년(半萬年)의 역사(歷史)를 가졌다라는 역사통설(歷史通說)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은 개 거품을 품어대며 반도조선(半島朝鮮)”을 부르짖는다 그럼 반만년(半萬年) 동안 “두만강(豆滿江)”을 조선어(朝鮮語)로 부르지 않고 무엇이라고 불렀을까?

 

   ‘조선(朝鮮) 민족(民族)은, 조선(朝鮮) 종족(種族)’은, 너무도 너무나 무지몽매(無知蒙昧)하여, 글자도 없어, 언어(言語)도 없어, 개돼지처럼 멍멍 짖으며, 꿀꿀대며, 살아왔기 때문에 강(江) 이름조차도 없이 살아왔다는 것인가?

 

   도대체 “이놈”들이 주장(主張)하는 「반도(半島) 조선(朝鮮)」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반도(半島) 조선(朝鮮)을 주장(主張)하며 개 거품을 품어대는 역사통설(歷史通說)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은 조선(朝鮮) 민족(民族)을 한(限)없이 능멸(凌蔑)하고, 능반(凌叛) 능멸(凌蔑)하고 배반(背叛)한 ‘놈’들이다.

 

   【오늘날의 한국인(韓國人)들은 옛 조선(朝鮮)의 후예(後裔)가 아닌 듯 행동(行動)한다. 한(限)없이 관대(款待)한 것인가? 오직 아는 것은 ‘개돼지’처럼 살아가는 것일까? 도대체 한국인(韓國人)들은 마음속에 자리 잡은 진짜 속셈은 뭘까?

 

   허기는 평화(平和)로운 시기(時期)에, 자신(自身)의 ‘권력(權力)을 강화(强化)’하기 위해 전시(戰時) 또는 내란(內亂) 등에 대처(對處)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비상계엄(非常戒嚴)을 선포(宣布)하여 헌법(憲法)을 유린(蹂躪)하고 국회(國會)에 무단(無斷) 침입(侵入), 점령(占領)하려 한 내란(內亂) 수괴(首魁)와 이를 보호(保護)하려는 국민의힘 여당(與黨)”은 이제 묘지(墓地)로 들어가야 한다. 이런 것들을 보면 도대체 한국인(韓國人)들은 뭔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묻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의힘” ‘이놈’들은 한국인(韓國人)일 수 없는 ‘놈’들이다.】

 

   “두만강(豆滿江)”이라는 강(江)의 이름은 ‘만어(滿語)’로 풀이한 것이라고 전(傳)해진다. 도대체 반도(半島) 땅에서 뭔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 연유(緣由)는, 그 이유(理由)는, 그 사유(事由)는… …알아보기로 하자.

 

   ➨ 두만강(豆滿江)”은 곧 그 서(西)쪽의 압록강(鴨綠江)과 더불어 북계(北界)를 이루고 있는데… …“명(明)” 나라 사신(使臣)으로 조선(朝鮮)에 왔던 “동월(董越)”은, 복명(復命) 후(後)에 “조선부(朝鮮賦)”를 지어 받쳤는데, 여기에서 동월(董越)”은 조선(朝鮮)의 영토(領土)에 대해서 이르기를,

 

   「조선(朝鮮)은 동(東)쪽과 남(南)쪽은 바다에 닿아 있고, 서(西)쪽은 압강(鴨江)에 한계(限界)한다. 압강(鴨江 : 鴨綠江), 조선(朝鮮)의 서(西)쪽에 있다.」 라고 한 것에 비춰보면 : 두만강(豆滿江) 역시(亦是) 오늘의 두만강(豆滿江)일 수 없는 것이다.

 

   ➨ 또한 17세기(世紀)1,6661,667북도(北道) 병마평사(兵馬評事)를 역임(歷任)했던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은 시(詩)를 지어 읊기를 :

 

   「무수령(無愁嶺)」에 대해서 말하기를, 「一 身 關 塞 三 千 里 : 삼천리 변방 멀리 와 있는 이내 신세」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삼천리(三千里)’라는 말은 도성(都城)을 중심(中心)으로 말했을 것은 상식(常識)에 속한다. 반도(半島) 땅은 ‘한양(漢陽)=한성(漢城)=도성(都城)’에서 북방(北方) 3 천리(千里)가 되는 곳은 없다.

 

   ➋ 또 행영(行營)에서 초야(初夜)에 이르기를, 「遙烽一點冷雲間, 近磧孤城早閉關 : 저 멀리 찬 구름 속 봉화 한 점 오르니, 사막(沙漠:)과 가까운 외로운 성() 일찌감치 문을 닫네. 畫角悠揚霜月白, 行人淚落海西山 : 화각(畫角) 소리 울려 퍼져라 달빛은 하얀데, 나그네(行人) ‘해서(海西)’의 산에서 눈물 떨구네」라고 하였다.

 

   행영(行營)은 “군대(軍隊)가 진(陣)을 치고 있는 곳”을 말하는 것인데, 이때가 조선왕조(朝鮮王朝) 때임을 감안(勘案)하면 : 도절제사(都節制使)가 있던 큰 진영(陣營)의 영문(營門)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理解)될 수 있을 것이다.

 

   중요(重要)한 것은 함경도(咸境道)는, 사막지대(沙漠地帶)로 들어가는 입구入口 : 初入였다는 것이다. 더불어 이곳은 해서(海西)의 땅이었다라는 것인데,

 

   지형지세(地形地勢)로 보면 : 「사막지대(沙漠地帶)로 들어가는 입구入口 : 初入이자 바다 또는 큰 호수(湖水)의 서(西)쪽 땅이다」라는 조건(條件)이 충족(充足)되어야 한다.

 

   반도(半島) 땅은, 비교(比較)조차 될 수 없는 땅이다.

 

   ➌ 또 아산보(阿山堡)에서 이르기를, 荒城當磧口, 孤戍對江門 : 사막 어귀(磧口) 자리한 황량한 성에서, 홀로 강물 바라보며 수자리를 살고 있네. 隴上初生月, 行人正斷魂 : 언덕 위로 이제 막 초승달이 떠오르매, 나그네 정히 애간장이 끊어져라.」하였다.

 

   ➍ 또 「서수라(西水羅)」 에서 이르기를, 「來經白草黃沙地, 行到天窮海盡頭 : 오면서 흰 풀 누런 모래땅 지나, 가면서 하늘 끝 바다 다한 머리에 이르렀네」라고 하였다.

 

   ➎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國俗(四) 물산(物産) 편을 보면 : 宋㑹要新羅地宜槖駞水牛出人參水銀麝香松子榛子石決明松塔子防風白附子茯苓大小布毛施布草席䑕毛筆 : 송회요(宋會要) : 신라(新羅) 땅에서는 마땅히 탁타(橐駝 : 駱駝). 물소(水牛). 사향(麝香). 송자(松子). 진자(榛子). 석결명(石決明). 송탑자(松塔子). 방풍(防風). 백부자(白附子). 복령(茯苓), 크고 작은 포()와 모시포(毛施布), 초석(草席), 쥐 털로 만든 붓이 나온다.」라고 했고,

 

   ➏「諸蕃志新羅地宜槖駞水牛不用錢以米博易民家器皿悉以銅為之地出人參水銀麝香松子榛子石決明松塔子防風白附子茯苓大小布毛施布銅磬瓷器草席䑕毛筆等商舶用五色纈絹及建本文字博易. : ‘제번지(諸蕃志)’에서 이르기를 : 신라(新羅) 땅은 마땅히 낙타(駱駝)와 물소(水牛)가 난다. 돈은 사용치 않으며, 교역은 쌀로써 한다. 민가(民家)의 그릇(器皿)은 모두 구리(銅)로 만들어져 있으며, 땅에서는 인삼(人參)·수은(水銀)·사향(麝香)·송자(松子)·개암(榛子)·석결명(石決明)·송탑자(松塔子)·방풍(防風)·백부자(白附子)·복령(茯苓)·크고 작은 포(大小布)·모시포(毛施布)·동경(銅磬)·자기(瓷器)·초석(草席)·쥐 털로 만든 붓(䑕毛筆)이 난다. 상인(商人)들은 선박(船舶)을 이용하여 오색(五色) 힐견纈絹 : 무늬있는 비단(緋緞)과 建本文字(?)를 바꾼다.」라고 하였다.

 

   【필자(筆者) 주(注) : “➎+➏”의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를 인용(引用)한 것은 오래전(前)에 게재(揭載)된 바 있어, 카페(Cafe) 내에서 검색(檢索)하면 된다.】

 

   【송회요(宋會要) [출처(出處) : Naver 지식백과(두산백과)] : 저자 : ()의 송수(宋綏) : 17200. 북송 ·남송 시대를 통하여 전후 10회 편찬되었다. 제계(帝系) ·후비(后妃) ·() ·() ·직관(職官) ·선거(選擧) ·도석(道釋) ·식화(食貨) ·형법(刑法) 등으로 되어 있다. 연대에 따라 연혁적으로 집성한 문헌으로 송나라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사료(史料)이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제번지(諸蕃志) [출처(出處) : Naver 한자사전] : 13세기(世紀) 초에 남송(南宋)의 조여괄(趙汝适)이 지은 지리서(地理書)[[필자(筆者) () : AD 1,225]] 상권은 남동아시아(南東Asia)ㆍ인도(印度)ㆍ서아시아(西Asia)ㆍ아프리카(Africa)ㆍ지중해(地中海) 방면(方面)의 지리(地理)ㆍ사회(社會)ㆍ풍속(風俗)ㆍ물산(物產) ()에 관()하여 적었음라고 설명하고 있다.

 

   [出處 / 維基百科, 自由的百科全書] : 卷上志國 : 記述交趾國占城國真臘國賓瞳龍國登留眉國蒲甘國三佛齊國單馬令國凌牙斯加國佛羅安國新拖國監篦國蘭無里國細蘭蘇吉丹南毗國故臨國胡茶辣國麻囉華國注輦國鵬茄羅國南尼華囉國大秦國大食國麻嘉國弼琶囉國層拔國中理國甕蠻國白達國吉慈尼國忽廝離國木蘭皮國遏根陀國茶弼沙國斯伽里野國默伽獵國渤泥國麻逸國三嶼國蒲哩魯國流求國毗舍邪國新羅國倭國等五十八個國其中的斯伽里野國篇記述的是西西里島的地理和島上的活火山這是中文古典典籍中最早記述義大利西西里島和埃特納火山的著作

 

   卷下志物 : 記述腦子乳香沒藥血碣金顏香篤耨香蘇合香油安息香梔子花薔薇水沉香速暫香黃熟香生香檀香丁香肉豆蔻降真香麝香木波羅密檳榔椰子沒食子吉貝椰心簟木香白豆蔻胡椒蓽澄茄阿魏蘆薈珊瑚樹琉璃貓兒睛硨磲象牙犀角膃肭臍鸚鵡蝳瑁龍涎黃蠟等五十四篇

 

   ➨➨ 송회요(宋會要) 및 제번지(諸蕃志)모두 송() 때 기록(記錄)이다를 참고(參考)한다면 : 신라(新羅)와 왜()는 반도(半島) 땅에, 열도(列島) 땅에 없었다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송회요(宋會要) 및 제번지(諸蕃志)와 관계(關係)되는 것은 다음 기회(機會) 정리(整理)하고자 한다. 흥미(興味)로운 내용(內容)이 될 것 같은 예감(豫感)이 든다.

 

   ➨➨➨ 왜냐하면 「탁타(橐駝 : 駱駝)물소(水牛)사향(麝香)」이 나는 곳은 몇 개 나라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곧 남아세아(南亞細亞), 서남아세아(西南亞細亞) 땅이기 때문이다. 곧「서아세아(西亞細亞) 및 서남아세아(西南亞細亞), 남아세아(南亞細亞)」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땅에 있었던 「‘신라(新羅)’를 반도(半島) 동남(東南) 모퉁이에 있었다」라고 하는 사가(史家)들은, 죽어 마땅한 “놈”들이다. “이놈”들이 죽어야 이 나라(國家)와 이 민족(民族)이 살아남을 수 있다.

 

   위의 글 「+➋+➌+➍+➎+➏」모두를 보면 : 북도(北道) 땅은, 사막지대(沙漠地帶)로 들어가는 중요(重要)한 관문(關門)이었다라는 설명(說明)이며, 서수라(西水羅)로 가려면 백초황사(白草黃沙)의 사막지대(沙漠地帶)를 지나야 도달(到達)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또한 그 이전(以前)의 신라(新羅)진한(辰韓)=진한(秦韓)또한 반도(半島) ()쪽에 없었다라는 것은 명백(明白)한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기 때문이다. 결과적(結果的)으로 반도(半島) 땅과는 십 원 한 장도 관련이 없다라는 뜻이다.

 

   ➨➨➨ 많은 대륙조선(大陸朝鮮) 자료(資料)’를 매회(每回)마다 모조리 열거(列擧)할 수 없으므로, 필자(筆者) 임의(任意)대로 그 내용(內容)에 맞는 것을 골라 선택(選擇)’하여 설명(說明)하는 것이니만큼 참고(參考)해 주세요.

 

   그렇다면 두만강(豆滿江)은 서수라(西水羅)를 흐르는데, “서수라(西水羅)”는 어디에 있는가?

 

   ➐ 서수라(西水羅)古芸堂筆記 4 : 「경흥부(慶興府) 남쪽 57리에 있으니 옛 숙신씨(肅愼氏) 지역이다」라고 하였다.

 

   숙신(肅愼)은 산해경(山海經)이나 회남자(淮南子) 등의 옛 고전(古典)에서 숙신(肅愼), 숙신민(肅愼民), 숙신씨(肅愼氏), 숙신국(肅愼國)” 등으로 기록(記錄)되어 있으며, 이들은 서(西)쪽과 북() 사이에 있었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이러한 서방(西方)과 북방(北方) 사이에 있었다라는 “숙신(肅愼)”이 갑자기 수만리(數萬里)를 널 뛰듯이 최(最) 동북방(東北方)인 반도(半島) 동북방(東北方) 땅에 있었다는 이야기는 「그들 숙신(肅愼)을 정복(征服), 흡수(吸收)했던 조선(朝鮮)의 땅을 반도(半島) 땅에 처박기 위해 만들어진 역사조작(歷史造作)이다.」이건 역사적(歷史的) 팩트(Fact : 事實)다.

 

   ➑ 서수라(西水羅)農巖集 2: 「경흥(慶興) 남쪽 60리 지점에 있는데 지세가 외지고 바다속으로 곧장 뻗어 있다. 육진(六鎭)의 막다른 곳이다.」라고 하였다.

 

    서수라(西水羅)農巖集 35/ 附錄 年譜上: 「七月。發鏡城巡列鎭。八月。邊鏡城。: 7월에 경성(鏡城)을 출발하여 여러 진(鎭)을 순찰하고 8월에 경성(鏡城)으로 돌아왔다. 與三淵書曰。歷遍列鎭。直窮西水羅而歸。此是華庚地盡頭也。東臨大海。北睨沙漠。: 삼연(三淵)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여러 진(鎭)을 두루 다니며 순찰하고 저 끄트머리에 있는 서수라(西水羅)에까지 갔다가 돌아왔는데, 그곳 서수라(西水羅)는 ()’고전번역원에서는 : “중국(中國)과 우리나라의 땅이 끝나는 곳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우리나라란 한자(漢字)?의 땅이 끝나는 곳이다. 동(東)쪽으로는 큰 바다와 접해 있고 ()쪽으로는 사막(沙漠)을 바라보고 있다」라고 하였는데… …

 

   【네이버 한자사전’ / : 1. 천간(天干)의 일곱째. 2. 이십사방위(二十四方位)의 하나. 정서(正西)에서 남()으로 15() 방위(方位)를 중심(中心)으로 한 15() 각도(角度) 안의 방향(方向)이다. 3. 이십사시(二十四時)의 열여덟째 시(). 오후(午後) 네 시() ()부터 다섯 시() ()까지이다.

 

 

   ➨➨➨ 이런 지형지세(地形地勢)는,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서북방지대(西北方地帶)에 있으며, ()쪽으로 대해(大海)에 임한다는 말은 내륙해(內陸海)일 수밖에 없다. 반도(半島) 땅일 수 없는 명명백백(明明白白)한 기록(記錄)이다.

 

   ➓ 서수라(西水羅)夢經堂日史 4편 자금쇄술(紫禁瑣述) 乙卯年[1,855 哲宗 6] 1222: 試看豆滿之向穩城者。或東或北而流。到美鐵堡。然後卽南注而入于西水羅。: 두만강이 온성(穩城)으로 향한 것은, 혹은 동으로 혹은 북으로 흘러서, 미철보(美鐵堡)에 다다른 뒤에, 곧 남쪽으로 쏟아져 서수라(西水羅)에 간다. 중략(中略), 荒沙白磧千里曠野之中。仞築甓垣而周圍之。曰城堞也。高起亭閣殿宇而雕彩之。曰宮闕。: 황막(荒邈)한 사막, 흰 자갈뿐인 천 리 광야에 높직이 벽돌담을 쌓아서 빙 둘러 놓고는 성첩(城堞)이라 하고, 높다랗게 정각(亭閣)ㆍ전우(殿宇)를 세워 조각과 단청(丹靑)을 하여 궁궐(宮闕)이라 한다[燕京).」

 

   두만강(豆滿江)이 서수라(西水羅)로 쏟아진다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반도(半島) 서수라(西水羅)는 사막지대(沙漠地帶)도 아니요, 백초황사(白草黃沙) 지대(地帶)도 아니다. 결국(結局) 서수라(西水羅)는 중원대륙(中原大陸) 최(最)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자리잡고 있어야 고전(古典) 기록(記錄)을 충족(充足)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여기서 「오늘날의 북경(北京)을 연경(燕京)이라고 했다」라는 역사해설(歷史解說)은, 십 원 한 장의 관계(關係)도 없다는 헛소리」다.

 

   왜냐하면 19세기(世紀)인 AD 1,855 당시(當時)에도 “연경(燕京)”은, 「荒沙白磧千里曠野之中 : 황막(荒邈)한 사막(沙漠), 흰 자갈뿐인 천 리 광야(曠野 : 아득하게 너른 들판)에 한가운데에 있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 「조선사(朝鮮史)를 왜곡(歪曲), 조작(造作)한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 논자(論者)’들은, 부관참시(剖棺斬屍)를 수백(數百) 번 당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이놈들을 우리는 결코 용서(容恕)해서는 안 된다. 국가(國家)와 민족(民族)을 배신(背信)하고, 얼과 혼(魂)마저 빼앗으려 한 희대(稀代 : 稀世)의 역적(逆賊), 반역도당(叛逆徒黨)이기 때문이다.」

 

   ⓫ 이계집(耳溪集)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 1,724~1,802)제2권 / 가요(歌謠) 북새잡요(北塞雜謠) 두만강豆江: 「豆江四月氷雪消, 松魚始自瑟海至 : 두만강 4월이면 눈과 얼음 녹아내리니, 송어가 비로소 슬해에서 올라오네 江邊家家結大網, 持網赤身入江水 : 강가의 집집마다 큰 그물을 엮어서, 그물 들고 알몸으로 강물 속에 뛰어드네. 嗟爾逐魚愼勿過半江, 半江之外非吾地 : 어허 고기 쫓다가 강 중간은 넘지 말게, 강 저편 절반은 우리 땅이 아니러니.」하였다. 【출처(出處) : 고전번역원 DB】

 

   [-C001] 북새잡요(北塞雜謠) : 이계(耳溪)1,777(정조1) 경흥 부사(慶興府使)에 임명되어 재임 중에 저술한 것으로, 함경도 지방의 산수자연과 그곳 백성들의 풍속 및 생활을 노래한 악부시(樂府詩)들로 구성된다. 성진(城津)백두산(白頭山), 바다의 장사치[海賈], 유란(幽蘭)등은 시조를 한역한 것이고, 귀문관[鬼門], 적지(赤池), 서수라(西水羅), 무이보(撫夷堡), 오갈암(烏曷巖)등은 경흥 일대를 다니며 그 감상을 읊은 작품들이다. 북녘땅[北地], 소를 몰아[叱牛], 삼 기르기[藝麻], 녹용(鹿茸), 아이가 태어나면[兒旣生], 북쪽 사람들[北人], 발구[跋高車], 수레를 빌려[借車]등은 경흥 지역 백성들의 풍속과 실상을 주제로 읊은 작품들이다. 판본에 따라 수록된 작품 수에 차이가 있는데, 본 번역의 저본에는 48수가 실려 있다.

 

   [-D001] 슬해(瑟海) : 두만강이 동해로 흘러드는 경흥 앞쪽의 바다를 일컫는다.

 

   ➨ 슬해(瑟海) : 한자(漢字) 지명(地名)으로 된 지도(地圖)를 보면 : 「러시아(Russia)의 블라디보스토크 앞 해구(海口)를 슬해(瑟海)”로 표기(標記)」되어있으며, 반도(半島) 두만강(豆滿江)과는 수백(數百) 리(里) 떨어져 있다. 「고전번역원의 주(注)」에서는 경흥(慶興) 앞쪽의 바다를 ‘슬해(瑟海)’라고 했다는 설명(說明)은 근거(根據)도 고증(考證)도 없는 사견(私見)을 말하는 건가?

 

   ➨ 슬해(瑟海)가 경흥(慶興) 앞 바다(海)가 되려면 : 오늘날의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가 경흥(慶興)이 되어야 한다.동의(同意)하시겠는가?”

 

   ➨ 「슬해(瑟海)」출처 : 동국대학교 문화학술원 / 동유라시아 물품 문명 문화사: 1,765년 조학민(趙學敏)이 지은 『본초강목습유(本草綱目拾遺)』는 선학의 기록과 식견을 채집해 해삼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하였다. 그중 1,598년에 간행된 두문섭(杜文燮)의 『약감(藥鑒)』을 인용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해삼은 성경(盛京)과 펑톈[奉天] 등에서 나는 것이 제일로, 검은색이며 살은 차지고 돌기가 많다. 요삼(遼蔘) 또는 자삼(刺蔘)이라 부른다. 광둥[廣東]의 바다에서 나는 것은 이름이 광삼(廣參)이고, 색이 노랗다. 푸젠[福建]에서 나는 것은 표피는 희고 육질은 메지며, 많이 거칠고 돌기가 없다. 비조삼(肥皂參)이라 부른다. 광삼(光蔘)은 저장성[浙江省] 닝포[寧波]에서 나는 것으로, 크고 연하고 돌기가 없으며 과피삼(瓜皮蔘)이라 부르는데 품급은 더 떨어진다.

 

   여기서는 중국 연안의 해삼 중 돌기가 많은 보하이만[渤海灣]의 것을 제일로 여기며, 그다음은 광둥과 푸젠 일대, 그리고 가장 낮은 급으로는 닝포에서 채취한 것을 들고 있다. 그리고 산지에 따른 각각의 명칭과 색, 돌기의 유무 등을 설명하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이명(異名)이 해삼위(海蔘威)였듯 과거 슬해라고 불린 아무르만 일대는 해삼의 주요 생산지였다. 여기서는 연해주의 호인들이 해삼을 ‘비단 신발을 붙이는 풀’의 재료로 활용하였기 때문에 북관개시의 금지 품목임에도 암암리에 높은 가치로 거래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슬해의 해삼 채취를 호인들이 독점하고 있으며, 조선의 어선은 출입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출처 : 동국대학교 문화학술원 / 동유라시아 물품 문명 문화사]

 

   ⓬ 肅宗實錄 56권, 肅宗 41년, 7월 1일 갑오(甲午) [1,715년 청 강희(康熙) 54년] : 북병사 조상주가 북방 국경 지역의 호인(胡人)의 일에 대해 논하다

 

   「北兵使趙相周馳啓以爲: "適有胡人, 出來江邊, 呼問以烏羅、寧固塔兩處胡人, 將爲移居後春地, 然耶? 答曰: ‘然。 江邊近處, 雖云土沃, 禁令至嚴, 旣有毁家之擧, 則不敢起耕, 故後春陳荒處, 及瑟海濱空虛之地, 將爲開墾矣。’ 又問瑟海何地? 答曰: ‘自後春東海邊, 而相距一日程, 土且甚沃矣云云。’ 所謂瑟海慶興府東距四五十里許海濱云, 而野廣土沃, 昔日藩胡, 數多居生, 或由陸路, 渡江來犯, 或乘船由海, 掠西水羅、造山等鎭堡, 每被其害。 今此彼人占居瑟海之說, 果是實狀, 則末梢之患, 誠極可慮矣。: 북병사(北兵使) 조상주(趙相周)가 치계(馳啓)하기를, "마침 강변으로 나오는 호인(胡人)이 있기에 불러서 묻기를 ‘오라(烏羅)·영고탑(寧固塔) 두 곳의 호인이 앞으로 후춘(後春)지역으로 옮겨 살려고 한다는데, 그런가?’ 하였더니, 답하기를, ‘그렇다. 강변 근처의 땅이 비록 비옥하다 하나, 금령(禁令)이 지극히 엄하여 이미 집을 헐어 버린 일이 있었으니, 감히 농사를 지을 수 없기 때문에 후춘의 묵혀서 황폐해진 곳과 슬해(瑟海) 가의 빈 땅을 개간(開墾)하려고 한다.’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슬해는 어디에 있는 땅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후춘의 동해(東海) 가에서 하룻길의 거리이며 땅이 또한 매우 비옥하다.…… 하였습니다. 이른바 슬해는 경흥부(慶興府)에서 동쪽으로 4, 50리 쯤 떨어져 있는 바닷가라 하는데, 들이 넓고 땅이 비옥하여 옛날에는 번호(藩胡)가 많이 살았는데, 어떤 때는 육로(陸路)를 따라 강을 건너 침범해 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배를 타고 바닷길을 경유해 와서 서수라(西水羅)·조산(造山) 등의 진보(鎭堡)를 약탈했으므로, 번번이 그 피해를 받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피인(彼人)들이 슬해를 차지하여 살려고 한다는 말이 과연 실상(實狀)이라면 나중의 우환이 진실로 지극히 염려스럽습니다." 하였다.」라고 하였다.

 

   즉(卽) 오늘날의 반도(半島) 땅이 될 수 없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슬해(瑟海)”는, 경흥(慶興) 땅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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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이칼호(Baikal, 湖=貝加爾 湖)”」【長 : 636km, 幅 20~80km, 면적(面積) 31,494km2, 深 1,642m】이다.

 

   “바이칼호(Baikal, 湖=貝加爾 湖)”위키백과: “바이칼(Baikal)”이라는 이름은 타타르(Tatar)어로 "풍요로운 호수"나무위키 : 이름의 유래는 원시 튀르크어로 '고기가 많이 잡히는 호수라는 뜻의 “바이쿨”에서 왔다. 약 2천 5백만~3천만 년 전(前)에 형성된 호수(湖水)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담수호(淡水湖)이다.

 

   ➨ 貝加爾湖【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例如布里亞特人居住在湖泊東側地區,於該地豢養山羊駱駝牛隻及綿羊。另外,貝加爾湖有「西伯利亞明珠」之稱。貝加爾湖為大陸裂谷湖,有逾1,700種動物及植物棲息其中,而且2/3為特有種,聯合國教科文組織於1996年將貝加爾湖登錄為世界自然遺產。

 

   詞源 :,五胡十六國時北朝叫於巳尼大水,隋唐叫「小海」,18世紀初期的《異域錄》稱之為柏海兒湖,大清一統志稱為白哈兒湖,蒙古稱為達賴諾爾,意為似海湖自然之湖[12];一說名稱來源於「貝音嘎 嘎拉」(蒙古語意為不滅之火),古人非常崇拜它而視爲「聖海」,民國時期稱「白海」。

 

   13世紀起,這裡成為成吉思汗建立的蒙古帝國的領土。14世紀晚期的1388年,明軍在捕魚兒海捕魚兒海又名貝爾湖不是貝加爾湖之戰中打敗北元軍隊,隨即北元後主脫古思帖木兒被也速迭兒刺殺,之後裂解為韃靼和瓦剌;貝加爾湖直到1620年代之前都屬於瓦剌的領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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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서 여러 설명을 한 바와 같이 이런 두만강(豆滿江)을 가리켜 만수지원(萬水之源)”이라고 하는데, 역사적(歷史的)으로 증명(證明)되고, 고증(考證)되는 것일까? 한 마디로 “헛소리”다.

 

   무대로, 무작정(無酌定),

 

   「두만강(豆滿江)타문(駝門 : )=고려강(高麗江)=도문강(圖們江)=통문강(統們江)=도문강(徒門江)=토문강(土門江 : 清朝時按滿語讀音譯 : 土門意為萬,色禽意思是河源,意思就是萬水之源)=애지굴하(愛也窟河: 金朝. 元朝)=啊也苦河(明朝稱)=其實土門, 豆滿, 圖們都是一音之轉」을 가리켜 「만수지원(萬水之源)」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수많은 하천(河川)의 물이 나오는 근원(根源)이라는 말이자, 수많은 지류(支流)의 물이 모여 흐르는 하천(河川)이라는 뜻이니, 두만강(豆滿江)은 큰 강(大江)을 말한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문제(問題) 제기(提起) : 그렇다면 한반도(韓半島) 조선왕조(朝鮮王朝)고조선(古朝鮮) 이래(以來)반만년(半萬年) 역사(歷史) 이래(以來)로 ‘두만강(豆滿江)’을 “무슨 강(江)”이라고 불렀느냐? 하는 것이다.

 

   ➨ 상존(尙存)하는 기록(記錄)에 따르면 : “두만강(豆滿江)”을 요(遼) 때에 “타문(駝門)”이라고 불렀다니, 「최대(最大)로 올려 잡아도 요: 契丹 : AD 907-1,125, 218시대(時代)를 벗어날 수 없다」라는 것이다.

 

   또 고려강(高麗江)이 “고려(高麗)의 강(江)”이라는 뜻이라면 : 고려(高麗) 이전(以前)의 기원전(紀元前 : BC) 2,333년(年)부터 기원후(紀元後 : AD) 918년(年) 이전(以前) 곧 3,000년(年) 동안 뭐라고 불렸냐? 하는 것이다. 누구도 모르고 있는 게 현실이다.

 

   웃기지 않는가? 「중원대륙(中原大陸) 땅에서는 당요(唐堯)」가, 「한반도(韓半島) 땅에서 단군(檀君)」이 세워졌는데, 당요(唐堯) 땅의 하천(河川)의 이름은 5,000년 계속(繼續) 이어져 오고 있는데,

 

   한반도(韓半島) 땅에 세워진 단군(檀君) 땅의 하천(河川) 이름이나 땅의 이름(地名)은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것이 태반(太半)이다. 그나마 알고 있는 것조차 추정(推定)이요, 추측(推測)이 또한 대부분(大部分)이다.

   ➥ “두만강(豆滿江)”의 위치(位置)를 보자. 「수많은 지류(支流)가 모이고 모여 “두만강(豆滿江)”을 이루는데, 그래서 ‘만수지원(萬水之源)’이라는 별칭이 태어났다」라고 하였다. 반도(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있는 “두만강(豆滿江)”은 기 지류(支流)가 여타(餘他) 강줄기와 크게 변함이 없는 그저 흔하디흔한 강 줄기일 뿐이다. [이미지 출처(出處) : Naver 두산백과 북한의 평양]

 

   혹자(或者)는, 그곳 주변에서 콩(豆)의 원산지(原産地)이며, 많이 산출(産出)되어 “두만강”이라고 했다는 참 이해불가(理解不可)한 주장(主張)도 펴는데, 이는 고대사(古代史) 기록(記錄)이 한몫한다. 곧 이들은 옛 조선왕조(朝鮮王朝) 또는 함께했던 여러 나라들이 반도(半島)와 그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있었다는 추정(推定) 아래 오늘날의 만주(滿洲)와 두만강(豆滿江) 일대(一帶)를 원산지(原産地)로 보는 것이다.

 

   본래(本來)의 만주(滿洲)가 어떻게 오늘날의 “만주(滿洲)” 땅이 될 수 있겠는가? 일제제국주의자(日帝帝國主義者)들이 만주국(滿洲國)을 만들면서 “만주(滿洲)”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태어난 것이다. 이걸 안다면 그곳이 콩(豆)의 원산지(原産地)라는 말은 미친 헛소리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 “두만강(豆滿江)”은 어디에 있어야 할까?

    ➥ ➋ 위의 러시아(Russia) 지도(地圖)에서 : 「서(西) 시베리아(Siberia) 분지(盆地)」 내(內)에 있는 수많은 지류(支流)가 모여 강(江)을 이루고 북해北海 : 카라 로 물을 쏟아붓고 있는 「예니세이(Enisei, 강(江) : 4,310km」을 말하는 것이다.

 

   ➥ ➌ “예니세이강Enisei, ”이 바로 “두만강(豆滿江)”이다. 수많은 지류(支流)가 “만수지원(萬水之源)”이라는 별칭(別稱)답게 딱히 어울리는 강(江)이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두산백과]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葉尼塞河(俄語:Енисе́й,羅馬化:Yenisey),古稱劍河,謙河,是流入北冰洋最大的河流、世界第五長河流。起源於蒙古國,朝北流向喀拉海,其流域範圍包含了西伯利亞中部大部分地區。從小葉尼塞河河源算起,長4102公里;以大葉尼塞河河源計,長 4092公里。如以色楞格河—安加拉河為源頭計算,全長5,539公里。河口處年平均流量 1.8萬立方公尺/秒,年徑流量 624立方公里,是俄羅斯水量最大的河流。水系明顯不對稱,右岸支流水量為左岸的5倍。

 

   正源 : 葉尼塞河由兩條河流取其源頭:大葉尼塞河及小葉尼塞河。這兩條河流在克孜勒匯合。

 

   貝加爾河源 : 克拉斯諾亞爾斯克附近的葉尼塞河。

 

   上安加拉河流入貝加爾湖北部,處於布里亞特共和國 。但它最大的源頭在色楞格河形成東南面的三角洲。它另一支流土拉河經過烏蘭巴托,而Egiin河流到 庫蘇古爾湖。由馬爾拉下游兩百多公里的薩彥-舒申斯克水電站大壩推動俄羅斯1989建成的最大的6400MW水力發電廠。一百公里下游的阿巴坎河流經阿巴坎,是哈卡斯共和國的首都,鄰近鄂畢河的丘雷姆河直達三百公里後的克拉斯諾亞爾斯克,也是西伯利亞鐵路及葉尼塞河的最大城市。克拉斯諾亞爾斯克港有克拉斯諾亞爾斯克水電站。封閉城市熱列茲諾戈爾斯克在70公里下游,可能是核工業區,有可能是葉尼塞河核污染的源頭。再200公里下游就到了安加拉地區。

 

   安加拉河 : 安加拉河流到貝加爾湖再由伊爾庫茨克會流1840公里直至與葉尼塞河在斯特列爾卡匯合。它已有四處建了水壩,再多建水壩因可能破壞環保而遭到抗議。

 

   上游 : 米努辛斯克以上為上游,長474 公里。從河源,自東向西流經寬闊草原盆地,河床寬 200—400公尺,至赫姆奇克河匯流處,急轉向北流,橫切西薩彥嶺,谷窄、河深、流急、多險灘、跌水。大險灘以下水深20公尺。在出山峽口處的切廖穆什基附近,建有薩彥-舒申斯克水電站,水庫回水已淹沒險灘。

 

   中游 : 米努辛斯克至安加拉河匯流處為中游,長876公里。左岸支流阿巴坎河匯入後,河谷展寬至5公里,河床寬500公尺以上。長達386公里 的克拉斯諾亞爾斯克水庫。

 

   下游 : 從安加拉河匯流處起至河口為下游,長 2137 公里。在葉尼塞斯克以下,又接納石泉通古斯卡河下通古斯卡河、庫列伊卡河等,水量大增,河床展寬,杜金卡寬2500—5000 公尺,圖魯漢斯克處河谷寬40公里。河口處寬達150公里。

 

   歷史 : 古代游牧民族的凱特人及尤格人緣岸而處。今天約有一千的凱特族人還在河流東中部流域生活。但已在十七至十九世紀被俄羅斯佔領。古代突厥生活在葉尼塞河南部曾向土著堅昆人學習冶煉 第二次世界大戰時,納粹德國與大日本帝國預計要在這裡會師,但此計劃因為德日兩軍自1943年起節節敗退,所以導致最後無法實行。[出處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葉尼塞河]

 

   ➥ ➍ “예니세이강”의 수많은 지류(支流)는 “만수지원(萬水之源)”이라는 별칭(別稱)에 딱히 어울리는 강(江)이다. 그 외(外)로 작은 지류(支流)까지를 포함(包含)하면 바로 ‘만수지원(萬水之源)’이 된다. [제1편 / 끝]

                                                                           2024년 12월 08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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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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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대진 | 작성시간 24.12.09 문무선생님 감사합니다
    추운 겨울입니다 건강 조심하시고 행복한 한달 되셔요
  • 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12.09 * 안녕하세요. "대진"님!
    추운 겨울 날씨보다, "윤석열의 비상게엄" 때문에 모든것이 얼어버릴 것 같은 추위를 맛봅니다.
    관심과 성원, 늘 감사합니다.
    댁내 평안하시고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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