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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의 조선사 해설

평양(平壤)에 대한 이설(異說) (1)

작성자문 무|작성시간10.10.17|조회수230 목록 댓글 1

                                           평양(平壤)에 대한 이설(異說)

 

○ 평양(平壤)은 옛 『왕검성(王儉 城) 또는 왕 험 성(王 險 城), 험 독 성(險 凟 城)』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조선(朝鮮)의 최초 도읍지(都邑地 : 서울)로 잘 알려져 있는 곳이다. 또한 이곳은 기마(騎馬)민족의 대명사라 칭할 수 있는 『고구려(高句驪)의 황도(皇都)』였으며, 『신라(新羅)때는 “서경”(西京 : 서쪽의 서울)으로』, 『고려(高麗) 때 역시 “서경(西京 : 서쪽에 있는 서울. 황도)으로, 호경(鎬京)으로, 이곳에 장락궁(長樂宮)이 있어 고려(高麗)의 왕들이 시시때때로 정사(政事)를 보던 곳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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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려사(高麗史)를 보면 ;

 

(1) 高麗史3卷-世家-穆宗

 

〔癸未改西京爲鎬京.是歲鎬京地震.冬十月幸鎬京齋祭.❳

 

(2) 高麗史4卷-世家-顯宗

〔三月癸未幸西京.甲午王宴群臣於長樂宮誅金訓崔質等十九人.築西京皇城.❳

 

(3) 高麗史6卷-世家-靖宗

〔己丑設八關會御靈鳳門受百官賀賜,遂幸興國寺行香移御長樂宮.十一月丙午朔至自鎬京.❳

 

(4) 高麗史9卷-世家-文宗 -

〔冬 十 月. 壬 午 冊 封**平壤侯琇綵棚樂部供張甚盛王率宮嬪太子諸王潛幸觀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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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평양(平壤)”을 “서경(西京)”이라 했고, 다시 “호경(鎬京)”으로 고쳤다』는 이야기다.

 

2)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한참 후대인 근대조선(近代朝鮮)의 지리지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고구려(高句驪)의 평양성(平壤城)은 왕검성(王儉 城)이며, 장안 성(長安城)이며, 호경(鎬京)이요, 유경(柳京)이며, 낙랑군(樂浪郡)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3) 호경(鎬京) : 섬서(陝西)성 장안(長安)현 서남(西南)에 있으며, 서도(西都 : 서쪽의 도읍지)라고도 하며 周(주)나라의 왕도(王都)였다. 원사지리지【元史 地理志 : 원사(元史)는 원나라가 망한 후, 명(明)나라 때 기록된 것임을 감안하면 반도 평양(平壤)은 짝퉁임에 틀림이 없다.】를 보면 『東 寧 路(동 녕 로)는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평양성(平壤城)이다. 이르기를 장안 성(長安城)이라 하며, 낙랑(樂浪)의 땅이다.』라 했으니 후대(後代)의 조선(朝鮮) 후예(後裔)인 현세의 우리들은 당시의 “장안(長安)성”과 “호경(鎬京)”이 있던 장안(長安)현 서남(西南)지역을 고구려(高句驪)의 영토(領土)로, 후국(後國)인 고려(高麗)의 영토로, 이곳에는 고구려(高句驪)와 고려(高麗)의 황성이 별도로 건축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4) 長樂宮(장락궁) ;〔在陝西長安西北故城中.漢書高祖紀.五年.治長樂宮.七年宮城.❳〔雍錄.未央在漢城西隅,而長樂乃其東隅也,漢都長安.兩宮初城,朝諸侯君臣及於長樂,不在未央也.自惠帝以後皆居未央宮,以長樂常奉母后.故凡語及長樂者多曰東朝.❳;〔장락궁(長樂宮)은 섬서(陝西) 성 장안(長安)의 서북(西北)에 있는 옛 성이다. 한 고조기에 의하면 5년에 장락궁에서 다스렸다. 7년에는 궁성이었다.❳ 〔옹 록 (雍 錄)에, 미앙궁(未 央 宮)은 한성(漢城)의 서쪽 모퉁이에 있고, 장락궁은 동쪽 모퉁이에 있었다. 장안은 漢(한)의 도읍지다. 제후 및 신하 그리고 왕등이 장락궁에 있었으며, 당시에는 미앙궁은 없었다. 혜 제 (惠 帝)이후 미앙궁에서 모두 거주했으며, 장락궁은 통상 모후(母 后 : 왕의 어머니)가 거주했던 곳이다. 예전에 무릇 『장 작 궁(長樂宮)은 동조(東朝 : 동쪽에 있는 조정)이다.』라 많은 사람들이 말하였다. ❳ ※ 고려사(高麗史)에서 이후(以後)의 글에는 “장 락 전(長 樂 殿)”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高句驪)의 황도(皇都)인 “장안(長安)”이 전한(前漢)의 황도(皇都)인 “장안(長安)”이 같은 곳에 있었다.』는 말은 수없이 보아온 내용이지만 이렇게 비교, 검토를 하려니 가슴이 떨리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당시 “옹 록 (雍 錄)”에 의하면 ; 『전한(前漢)의 황제(皇帝)들이 있던 곳은 “미앙궁(未央宮)”이며, “한성(漢城)”의 서쪽 모퉁이(西隅)에 있고, “장락궁(長樂宮)”은 “한성(漢城)”의 동쪽 모퉁이(東隅)에 있었는데, 이곳에는 보통 모후(母后 : 황제의 어머니)를 모셨던 곳인데, 이곳을 “동조(東朝 : 동쪽에 있는 조정)이라고 했다.』고 한다.

 

○ 위 장락궁(長樂宮)에 대한 설명(原文)에서 보면 “한성(漢城)”의 서쪽 모퉁이에 있는 것이 “미앙궁”이며, 동쪽 모퉁이에 있는 것이 “장락궁”이라고 하였다. 이런 기록을 놓고 보면 “한성(漢城)”은 “장안(長安)”에 있었던 한(漢)나라의 성(城)으로 볼 수 있고, 이것이 굳혀져 지명(地名) “한성(漢城)”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반도(半島) 서울의 옛 지명(地名)인 한성(漢城)은 또 무엇인가???????????? ※ 반도(半島) 한성(漢城=漢陽)의 유래는 무엇일까?

 

○ 옛 역사서의 기록으로 비교해보면 : 평양(平壤)은 동서(東西)가 넓은 땅에 있었으며, 그 서쪽지방에 있었던 유서(由緖)깊은 도읍지(都邑地)였다는 것이며, 이곳은 장안 성(長安城)이 있었던 곳이며, 고구려(高句驪) 선대인 주(周)나라의 도읍지였던 “호경(鎬京)”의 땅이었으며, 또한 낙랑군(樂浪郡)의 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평양 후(平壤 侯)

 

후(侯)란 무엇인가? 侯(후)는 제후(諸侯) 후(侯)자이다. 곧 제후(諸侯)를 말한다. 이 말은 곧 평양(平壤)주위는 “평양 후 곧 평양왕”이 있었으며, 이곳지방을 통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래 백과사전의 내용을 보면 알듯이 당시 “고려(高麗)”는 황제(皇帝) 아래 각 지역의 제후(諸侯 곧 여러 제후 왕)가 있고, 이러한 제후들을 “제왕(諸王)”이라고 호칭했다고 적고 있다.

 

【백과사전을 보면 ; 고려시대 사용한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 등 5개 등급의 봉작제도. 본래 중국의 주(周)나라에 있었던 것인데, 고려는 주제(周 制)와 당제(唐制)를 참작하여 실정에 맞는 봉작제도를 마련하여 시행했다. 먼저 왕족(王族)과 비 왕족(非 王族)의 2가지로 나누어놓았다. 왕족의 봉작 제는 국초에는 원군(院君)·전군(殿 君)·대군(大君)·낭군(郞 君)·군(君)·태자(太子) 등을 썼다. 문종(文宗 : 1047~83 재위) 때에 이르러 왕족에 관한 제반 체제가 정비되면서 공·후·백만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3등 봉작 제를 시행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사〉 권90 종실열전(宗室列傳) 서문에는 "종실의 친 존자(親 尊者)를 공, 그 다음을 후로, 먼 친척을 백, 어린 자[幼者]를 사도(司徒)·사공(司 空)으로 봉했고, 이들을 총칭해 제왕(諸王)이라고 불렀다"라고 되어 있다. (중략).】

 

6) 동국이상국집의, “개마 대산 고 (盖 馬 大 山 考)”에, : <일 통 지>에서 조선(朝鮮)의 산천(山川)을 기재하면서, 『개마대산이 평양성(平壤城) 서쪽에 있고 그 동쪽은 곧 옛날의 동 옥 저 국 (東 沃 沮 國)이다.』 하였다.

 

<동국이상국집>은 “조선인”이 기록한 것이다. 〔 개마대산(蓋馬大山) 동(東)쪽에 <옥 저 국>이 있고, 그 동(東)쪽에 평양성(平壤城)이 있다.❳는 설명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으로 “후한서열전(後漢書列傳)”이 있다. 곧, <後 漢 書 八 十 五, 東 夷 列 傳, 第 七 十 五>를 보면 ; 〔蓋馬 縣 : 蓋馬縣名,屬玄菟郡,其山在今平壤城西,平壤卽王儉城也. : 개마 현, 개마(蓋馬)는 현의 이름인데, 현토 군에 속하였다. 그 산은 평양성(平壤城)서쪽에 있으며, 평양(平壤)은 곧 왕검성이다.❳

 

○ 後漢書(후한서)는 光武帝(광무제)로 시작되는 後漢(후한)의 역사서로써 송나라 때 “범 엽”이라는 사가(史家)가 저술한 역사서이다. 『반도사관과 식민사관 논리를 적용시키면』; 이 기록대로라면 당시에는 평양(平壤)서쪽지방은 바다(海)가 아니라, 산악지형(山岳地形)과 평야(平野)지대가 혼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 거리는 일천리이상 된다고 보이진다. 결국 반도(半島) 평양(平壤)과 현 대륙의 황하(黃河)주위와 육지로 붙어있었다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 또 하나는, 반도(半島) 평양(平壤)은 현재의 『반도(半島)에 없었다.』는 것이며, 『평양(平壤)은 본시 대륙(大陸)의 요충지인 장안(長安) 또는 천수(天水)를 지칭한다.』고 보아진다.

 

○ 또 하나는, <中國古今地名大辭典>은 1920년대에 編纂(편찬)되었다. 백년도 지니지 않은 시기에 기록된 이 지명사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뒤져보면, 『평양성(平壤城) 서쪽에 州(주), 郡(군), 縣(현) 20여개를 찾을 수 있다.』

 

○ 平壤城(평양성) 서쪽에 沃野地帶(옥야지대)가 펼쳐져 있었고, 그 다음에는 險峻 (험 준)한 山岳地帶(산악지대)도 있었으며, 많은 江(강), 河川(하천)이 흘렀으며, 사시사철 눈에 뒤덮여 있는 白山(백산)=雪山(설산)도 있었다.

 

이러한 地形地勢(지형지세)를 반도(半島)와 대륙(大陸)지방에서 찾아보면, 섬서(陝西)성 장안(長安)의 서(西)쪽 및 서북(西北)쪽지대인 감 숙(甘肅)성 지역의 기련 산맥(祁 連 山 脈)과 영하(寧 夏)지역의 하란산맥(賀 蘭 山 脈)등과 연결해 보면 상식이 통하고, 원문의 역사서를 해설하면 아주 보기 좋은 그림이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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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동사강목(東史綱目) 신라(新羅) 편을 보면 :

 

(1) 병 오 년 헌덕왕 18년 흥덕왕(興德王) 원년 (당 경종 보력 2, 826)

 

〔추(가을) 9월, 장성(長城)을 패강 (浿 江 : 浿水)에 쌓았다. 신라(新羅)는 패강(浿江)을 북쪽 국경(國境)으로 삼고 항상 방어하는 대책을 세웠다. 이때에 이르러 다시 패강(浿江)에 장성(長城) 3백 리를 쌓았는데, <우 잠 태수(牛 岑 太守) 백 영 (白 永)>에게 명하여 한 북 주 (漢 北 州)의 1만 인을 징발(徵發)하여 사역(使役)하였다.❳

 

○ <경상도 구석진 모퉁이에서 시작했다>는 신라(新羅), 『당(唐)나라의 원군(援軍)을 끌어들여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를 멸망(滅亡)시키고, 삼국(三國)을 통일(統一)했다』고 “반도조선사”는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서 원전(原典)에는 당(唐) 조정의 명령으로 신라(新羅)는 원군(援軍)으로 참여했을 뿐이다. 신라(新羅)에 의해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驪)가 멸망(滅亡)당한 것이 아니라 당(唐)나라 군사에 의해 망했다.】이러한 신라(新羅)가 『패강【浿江 : 패수 : 패하 : 대동강】 변에 300 리나 되는 장성(長城)을 축조(築造)했다』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반도 대동강(大同江) 변에서 300 리에 달하는 장성(長城) 유적지라도 발견했다는 이야긴가?????????

○ 한북(漢北)주는 도대체 어느 지방을 말하는 것일까? 분명 한북(漢北)이란 한산(漢山)을 중심으로 그 북쪽지방을 “한북(漢北)주”, 그 남쪽지방을 “한남(漢南)주”라 했다는 설명일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한산(漢山)”은 어디에 있었던 산일까? 누구도 자세한 설명을 할 수 없다. 이러한 산의 이름을 가진 산은 없으니 말이다.

 

○ “漢山. 漢江. 漢水. 漢陽. 漢城. 漢北. 漢南”등의 여러 지명(地名)과 방향(方向)을 나타내는 말은 산(山)이나 하천(河川)을 기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한산(漢山)”이란 이름을 가진 산이 없다는 것은 반도(半島)에는 애시 당초 이러한 산이 없었다는 말과 같다. 또 한남(漢南)과 한북(漢北)의 중간지역에는 분명 “한중(漢中)”지역이 있을 것이나 반도(半島) 그 어디에도 “한중(漢中)”이라 불리는 곳은 없다.

 

○ 패강(浿江)엔 “평양(平壤)”이란 고도(古都)가 수천 년(數千年)을 유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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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오 년 효공왕 2년 (당 소종 광화 (光 化) 원년, 898)

 

〔추(가을) 7월. 궁예가 송악 군(松嶽 郡)에 도읍하였다. 이에 앞서, 양길(梁 吉)이 북원(北 原)에 있으면서 국원(國 原) 등 30여 성을 취하여 차지하였는데, 자기에게 궁예가 두 마음 품은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엄습하려고 하였으나, 궁예가 이를 알고 먼저 공격하여 패배시켰다. 이에 궁예는 병세(兵勢)가 날로 융성하여져서 드디어 패서도 (浿 西 道) 및 한산주 (漢 山 州) 관내의 30여 성을 취하였다.』 (중략).❳

 

〔갑자년 효공왕 8년 . 진 훤 13년. 궁 예 4년 : 웅주 장군 (熊 州 將軍) 홍기 (弘 奇)가 배반하여 궁예에게 항복하고, 패강도(浿 江 道)의 10여 읍도 또한 항복하였다.❳

 

○ 이때의 신라(新羅) 상황은 말기(末期) 증상이 여리 저기에서 나타났던 시기이다. 궁예(弓裔)가 취(取)했다는 『패서(浿西)도와 한산(漢山)주 관내의 30 여 성(城) 』에 대해 <반도(半島) 조선사는 결코 답을 내 놓을 수 없다.>

 

①『패서(浿西)도』는 패수(浿水) 서쪽지방의 여러 <주. 군. 현(州. 郡. 縣)>을 묶어 “도(道)”라는 조직을 만들었으니, 패수(浿水) 서쪽지방에 많은 <주. 군. 현(州. 郡. 縣)>)이 있었다는 것이며,

 

②『한산(漢山)주』는 한산(漢山)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있는 여러 군현(郡縣)을 묶어 “주(州)”라는 조직을 만들었으니, 한산(漢山)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여러 군현(郡縣)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 “평양(平壤)”은 패서(浿西)도의 중심 도회지(都會地)다. 반도조선사 입장에 지형, 지리를 설명한다면 “패수(浿水)”의 서쪽지방은 서해(西海)바다 속에 있어야 하므로 불가능한 지형, 지리다. 결과적으로 패수(浿水) 서쪽지방은 반도에 존재(存在)할 수 없는 땅이다.

 

○ 한산(漢山)주 역시 한산(漢山)이란 산의 이름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반도조선사 입장에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는 말이 된다.

 

1) <패수>가 압록강이라면 <패서도>는 반도 최북단 의주【義州 : 용만(龍灣)】앞 바다 속 용궁(龍宮)에 있어야 하고,

2) <패수>가 대동강이라면 <패서도>는 평양(平壤)의 서쪽 바다 속 용궁(龍宮)에서 찾아야 하고,

3) <패수>가 임진강이라면 <패서도>는 강화도 앞 서해 바다 속 용궁에서 찾아야 하며,

4) <패수>가 반도 북방 심양(瀋陽) 요수(遼水)라면 <패서도>는 요동만 바다 속에서 찾아야 한다.

 

○ 위의 기록을 보면 <효공왕 2 년 기록 (3번)에는 패서도 및 한산주관내 30 여성이 궁예에게 들어갔다고 했다. 그런데 6 년이 지난 뒤에 패강도 관내의 10 여 읍이 또 궁예에게 들어갔다.>는 것이다. 패하(浿河)=패강(浿江)이 흐르는 주위에는 『패강(浿江)도 또는 패서(浿西)도』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패강(浿江)=패하(浿河)는 아주 큰 강이며, 강물이 흐르는 유역(流域)이 굉장히 넓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 반도조선사 입장에서 <패강(浿江)도 또는 패서(浿西)도>를 설명하려면 ; 평양【平壤 : 호경(鎬京)=장안(長安)=유경(柳京)】서쪽 바다 속에 수많은 백성(百姓)들이 살았으며, 이들 백성(百姓)들은 돌연변이(突然變異)로 인하여 “아가미가 달리고 물갈퀴가 달려 있어 바닷물 속에서 살아 갈 수 있도록 진화된 인간들이었다.”는 설명이 되며, 이는 <다윈>의 진화론(進化論)을 꺼내지 않더라도 불가능한 이야기다. 따라서

 

○ <반도조선(半島朝鮮)사>와 <평양(平壤)>은 함께 할 수 없는 지형(地形), 지리(地理)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함께 존립(存立)할 수 없다.

 

○고려사절요 성종 14년(995)의 내용을 보면 : <曰 浿 西 道, 管 十 四 州 四 縣 七 鎭 : 패서도 관내는 “14 주. 4 현. 7 진”이라는 거대한 행정조직이 있었다는 것이다.> 광활한 면적을 가진 “패서(浿西)도”가 반도(半島)땅 어디에 있었다는 것일까? 이건 불가능하다. 『반도조선(半島朝鮮)사』는 『조선사(朝鮮史)』의 짝퉁의 일부분 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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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신증동국여지승람 / 평안도

 

〔효공왕(孝恭王) 9년(905)에 궁예(弓 裔)가 철원(鐵 原)에 웅거하여 후 고구려왕(後 高句麗 王)이라 일컬으면서 패서(浿 西) 13진(鎭)을 나누어 두었고, 고려 성종(成宗) 14년(995)에 경내(境內)를 나누어 10도(道)로 만들고 서경(西京)이 관할하는 땅을 패서도(浿 西 道)라 하였다가 뒤에 북계(北界)라 일컬었다. 숙종(肅宗) 7년(1102)에 서 북면(西 北 面)이라 일컬었고,(중략).❳

 

○ 패서 13 진(浿 西 十 三 鎭) ; 후(後)고구려(高句麗)를 칭한 궁예(弓裔)가 평양(平壤)도 지방에 설치한 진(鎭)을 말하는 것이다. 분명 위에서 말하는 것으로 보면 “패서(浿西)”란 “패수의 서쪽”이란 뜻이다. 반도조선(半島朝鮮)사에서 이 “패수(浿 水)”를 “대동강(大同江)”이라고 한다. 대동강(大同江)은 현 반도 북방 평안도 평양(平壤) 동북방에서 발원하여 이리 저리로 흘러오다가 평양(平壤)으로 와 서쪽 바다(황해=서해)로 유입되는 하천이다. <패서 13진>이란 말은 이 패수(浿水)의 서쪽지방에 13개의 주요 진(鎭)을 설치했다는 말이 된다.

 

○ 여기서 고려 성종 14년 전 국토를 10도로 나눌 때 서경 즉 현 평양을 관할하는 도(道)의 이름을 “패서도”라 하였다. 이는 궁예가 패수 서쪽지방에 13 진을 둔 것이나 고려 성종이 패수 서쪽지방을 “패서도”라 한 것이나 다를 것이 없다. 패수(浿水)의 서쪽은 “서해바다”이고 서경(西京 : 평양(平壤)을 말한다고 함)의 서쪽에 “도(道)”라는 행정구역을 설치할 만큼 면적도 없다.

 

○ 위의 글은 고려(高麗)시대를 말하고 있는데, 당시 <평안도>지방을 “북계(북면)” 또는 “서북 면”이라 하였다. 반도조선(半島朝鮮)사의 입장에서 볼 때 지형, 지리적으로 보면 합당한 용어선택이다. 그런데 갑자기 “근대조선(近代朝鮮)”시대에는 서관(西關 : 서쪽의 관)이 되고 임진년 왜(倭)들의 반란(반역)사건 때는 선조 대왕이 이곳 즉 평양(平壤)으로, 다시 의주(義州)로 피난을 갔는데도 불구하고 서행【西 幸 : 서쪽으로 어가가 움직이는 것】했다고 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분명한 것은 “고려 때나 근대조선”시절이나 반도의 땅 덩어리는 변함이 없었다. 변함이 있었다면 그 땅의 주인이었던 왕조(王朝)의 성씨가 “왕(王)”씨에서 “이(李)”씨로 바뀌었을 뿐 그 백성(百姓)과 그 땅 땅덩어리는 변함없었다는 것이다.

 

○ 이 말은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의 왕도(王都)가 남북(南北)지역이 아닌 동서(東西)지역 즉 좌우(左右)지역에 넓은 땅을 가진 나라였다』는 말이며, 반도(半島)와는 전혀 어울릴 수 없는 지형, 지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당시 고려(高麗)의 동서(東西)거리는 『일만(一萬)리』였다는 것이 역사서에 말하는 중요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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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신증동국여지승람 / 평양 부

 

〔기성(箕 城)ㆍ낙랑(樂浪)ㆍ장안(長安) 《당서(唐書)》에, “평양을 또한 장안이라 이른다.” 했다. 서경(西京)ㆍ서도(西都)ㆍ호경(鎬 京)ㆍ유경(柳 京) 최자(崔 滋)의 〈삼 도부(三 都 賦)〉에 있다.❳

 

기성(箕城)은 기자(箕子)가 도읍(都邑)한 곳이며, 낙랑(樂浪)은 옛 조선(朝鮮)의 핵심지역이었으며, 평양(平壤)지방을 아우르는 넓은 지방을 말하는 것이며, 장안(長安)은 대륙의 중국(중원)지방의 핵심지역으로 옛 장안 성(長安 城)이 있는 곳이다.

 

○ 당서(唐書)에 “평양(平壤)을 또한 장안(長安)”이라 했다는 말은 반도조선(半島朝鮮)사에서 말하는 현 평양에 있었다는 “장안 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즉 성(城)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평양(平壤)”을 “장안(長安)”이라 했다는 말이며, “장안(長安)이 평양(平壤)이다.”라는 말이다. 또 재탕 설명하는 내용이나,

 

1) 서경(西京)이란 고려(高麗) 왕도(王都)를 개성(開城)으로 하고, 그곳에 황궁(皇宮)이 있으므로 서쪽의 옛 고구려(高句驪)의 도성(都城)을 서쪽에 있는 왕도(王都)라 해서 “서경(西京)”이라 한 것이요,

 

2)『서도(西都)』란 서쪽의 도읍지(都邑地)라는 말이니 서경(西京)과도 같은 말이며,

 

3)『호경(鎬 京)』이란 『장안(長安) 즉 서경(西京) 즉 서도(西都)』의 서남(西南)지방에 있는 “은(殷)”을 멸하고 “주(周)”를 건국시킨 무왕 “발(發)”의 소도(所 都)를 말하는데, 이 또한 장안(長安)지방에 있었으므로 “장안(長安)은 호경(鎬京)”이란 말이며,

 

4)『유경(柳 京)』이란 장안(長安)의 서쪽지방에서 동쪽으로 흘러 황하에 유입되는 위수【渭 水 또는 위하(渭 河)를 말하며, 이 하천이 패수(浿水) 또는 패하(浿河)이다.】변에 늘어진 버드나무(柳)가 많아서 “유경(柳 京)”이란 별명(別名)이 생긴 것이다. 패수(浿水)는 동쪽으로 흐른다는 말은 “수 경 주(水經注)”에서도 이를 고증(考證)할 수 있으며, 근대조선(近代朝鮮)의 유학자(儒學者)들이 쓴 문집 속에 기록된 패수(浿水) 역시 “동(東)”쪽으로 흐른다고 하였다.

 

○ 이러한 평양(平壤) 곧 장안(長安)을 호경(鎬京)이라 한 이유는, 은(殷)을 멸한 주(周) 무왕 “발(發)”이 도읍한 곳이며, 서도(西都)라고도 하였다. 이러한 연유를 반도에 대입해보면, 은(殷)나라가 오백년 가까운 세월을 지배하다가 <주 무왕 발>에게 반도의 땅을 넘겨줬다는 이야기되며, 이는 주 무왕 “發발”이 반도에 있었다는 이야기로 전개된다.

 

○또한 “장안(長安) 황성(皇城)”에 있었던 “장락궁(長樂宮)”을 반도 고려(高麗)왕들이 시도 때도 없이 오가면서 사용하고, 西都(서도)가 鎬 京(호경)이라면 동도(東都)는 “원산이나 함흥”을 말하는 말인가? 이건 결코 답이 될 수 없다. 고려왕들이 시시 때때로 오갔다던 <호경(鎬京)>!!!!!!!!!!!! 고려(高麗)의 황도(皇都)가 반도(半島) 개성(開成)이라고 한다면 고려(高麗) 왕들은 인간(人間)이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며, 당시의 사회상이나 문명의 발달사로 보아도, 시시 때때로 장안(長安)의 호경(鎬京)까지 왔다, 갔다 했다는 말은 차라리 일장춘몽(一場春夢)이었으리라!!!!!!!!!!!!!!!!!!!!!!!!!!!!!!!!!

 

○【궁실 : 고려의 숙종(肅宗)과 예종(睿宗)이 매번 서경에 행행(行幸)할 때마다 장락궁에서 뭇 신하들과 잔치하였다. 이 지저(李 之 氐)의 시에, “대동강 물은 유리처럼 푸르고, 장락궁 꽃은 비단마냥 붉구나.】하였다. 평양 부에서 설명하기를, 형승 ; 서거정(徐 居 正)의 〈중 신 기(重 新 記)〉에, “평양은 삼조선(三 朝鮮)과 고구려의 옛 도읍인데, 고려가 서경(西京)을 두었고 또 호경(鎬 京)이라 일컬었으며, 뒤에 만호부(萬 戶 府)를 설치했다가 또 고쳐 평양 부라 하였고, 본조(本朝)에 들어와 이름을 그대로 썼다, 고 하였다. <무엇을 더 어떻게 설명해야 되겠는가.> 반도조선(半島朝鮮)사는 조선사 일부의 짝퉁일 뿐이다.

 

5)〔개마대산(蓋 馬 大 山) :《대명일통지(大 明 一 統 志)》에, “평양성 서쪽에 있는데, 그 동편은 곧 옛날 동 옥 저 국(東 沃 沮 國) 땅이다.” 했다. 살펴보건대, 《자치통감(自 治 通 鑑)》에, “수양제(隋煬帝)가 고려를 칠 때 좌(左) 12군(軍)이 개마(蓋 馬) 등 길로 나와 압 록 수(鴨 綠 水) 서편에 모였다.” 하였는데, 그 주(註)에, “개마는 현도군(玄 菟 郡)에 속하며 개마대산이 있다.” 하였고, 《한서(漢書)》에는 “현도군 서편 개마 현에 마자수(馬 訾 水)가 있다.” 하였고, 《당서(唐書)》에는 마자수를 압록강이라 하였다. 고려 임언(林 彦)의 〈구 성기(九 城 記)〉에, “동으로는 바다에 이르며, 남으로는 장주(長 州)ㆍ정주(定州) 두 고을에 이르며, 서북은 개마 산에 끼어 있다.” 하였는데, 구성은 지금 함경도에 속하고 그 서북은 여진(女眞)의 땅이니, 개마 산이 평양의 지경이 아니다. 또 수(隋)의 군사가 개마 길을 나와 압 록 수 서편에 모였다 하였으니, 이 산은 아마 압록강 밖 서북 경계에 있는 듯하다. 고구려가 한창 성했을 때 요하(遼 河)를 걸쳐 소유하였으니, 이 산이 그 경계 안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일 통지》는 평양이 고려의 옛 도읍이므로 그대로 적었을 뿐이다. 그러나 개마 산이 확실하게 어느 곳에 있는지 자세하지 않으므로 우선 그대로 두어 의심되는 대로 전한다.❳

 

○『“평양(平壤)”의 서쪽지방에 “개마대산(蓋馬大山)”이 있다.』 이 말은 대륙의 원전에 수없이 기록된 내용과 똑같다. “대명일통지”라면 명(明)나라의 지리지이며, 이 “대명일통지”를 인용했다는 말은 그만큼 당시에 믿을 수 있으니 참고하여 기록했을 것이다. 현재 우리가 이해(理解)하기 어려운 점은 『자신들의 나라, 자신들의 영토에 대한 “왕조 지리지”를 편찬하는데 남의 나라 지리지를 참고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며, 이해하기도 어렵다.』 <대명일통지는 평양(平壤)이 고려(高麗 : 고구려)의 옛 도읍지이므로 그대로 적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 반도조선(半島朝鮮)사에서 평양(平壤)서쪽지방은 육지(陸地)가 아닌 바다(海)이므로, 이곳에 “개마대산(蓋馬大山)”이란 커다란 산(山)과 산맥(山脈)이 존재할 수 없다.

 

○ 한 가지 가능한 추정(推定)은 있다. 곧 수만 년 전 해수면이 낮았을 때 현재의 황해(黃海) 바다 전체가 습과 호수(湖水)가 어우러진 육지(陸地)였으며, 황하(黃河)가 이곳으로 흘렀다는 것이며, 그 뒤 해수면이 올라가 바다가 되었다는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다. 만약 그랬다 하더라도 개마대산(蓋馬大山)과 산맥은 해발고도가 높았을 것이므로 현재 개마대산(蓋馬大山)과 그 산맥(山脈)은 섬과 섬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그 설명을 뒷받침할 수 있으나,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 여러 가지 가능한 가설을 대입해 봐도 반도조선(半島朝鮮)사로 “평양(平壤)”을 이야기 할 수 없다. 이것은 “평양(平壤)”이 반도(半島)가 아닌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곧 대륙의 옛 중심지요, 수천 년 황도(皇都) 역할을 수행했던 “섬서 장안”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2010년 10월 17일 <문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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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Юрий(유리) | 작성시간 11.04.28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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