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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의 조선사 해설

탐라(耽羅)는 정말 반도(半島)의 제주(濟州)일까?

작성자문 무|작성시간11.01.05|조회수338 목록 댓글 1

 

                                 탐라(耽羅)는 정말 반도(半島)의 제주(濟州)일까?

 

● <소ㆍ말ㆍ낙타ㆍ나귀ㆍ양> 등을 방목한 “탐라(耽羅)”!!!!!!!!! 가능한 일일까?????????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조선(朝鮮)의 지형(地形), 지리(地理)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중복된 내용이 있으나 일부 보충, 보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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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수기언48 / 사방2 / 탐라(耽羅)지(志)

 

○乇羅.南海中小國.幅員四百里.海路九百七十里而遙. : 탁라(乇 羅 제주도)는, 남해 가운데 있는 조그마한 나라로서, 너비가 4백 리쯤 되며, 해로(海路)로 970 리 거리에 멀리 떨어져 있다.

 

○本九夷之一.上古有高乙那,良乙那,夫乙那三人者.化生爲人.始爲生民之祖.三祖之基.謂之上都,中都,下都. : 본래 구이(九夷) 중의 하나로, 상고 시대에 고을나(高乙那)ㆍ양을 나(良 乙 那)ㆍ부을 나(夫乙那) 세 사람이 있었는데, 이들이 화생(化生)하여 사람이 되므로, 비로소 생민들의 시조가 되었다. 이 세 사람이 기반을 닦은 곳을 상도(上都)ㆍ중도(中 都)ㆍ하도(下 都)라 하였다.

 

○高乙那十五世.有高厚,高淸.始通新羅.時有客星見新羅.國君號厚曰星主.淸曰王子.王子者.寵愛之名.初.二高浮海來泊耽津.命國號曰耽羅.後世降百濟.爲耽乇羅.賜爵恩率.後爲佐平.高麗太祖二十年.耽乇羅遣其子末老來朝.至肅宗立.滅爲郡縣.至元宗時.耽乇羅反.遣金方慶討平之.忠烈王元年.元置耽羅摠管.放牛,馬,駱駝,驢,羊.二十年.罷摠管屬高麗. : 고을나의 15대 손자인 고후(高 厚)와 고청(高 淸)이 처음으로 신라와 국교를 맺었다. 그때 신라에 객성(客星)이 나타났으므로, 신라의 임금이 고후를 성주(星主), 고청을 왕자(王子)라고 이름 하였는데, 왕자라는 것은 총애(寵愛)한다는 명칭이다. 처음에 고후와 고청이 배를 타고 탐진(耽 津 강진(康 津))에 도착하였으므로 탐라(耽羅)라는 국호를 명명(命名) 받았다. 그 후세에 백제에 항복하여 탐 탁라(耽 乇 羅)라고 하였으며 은솔(恩率)이라는 벼슬을 하사받았는데 뒤에 좌평(佐平)이 되었다. 고려 태조 20년에 탐 탁라에서 태자 말로(末 老)를 파견하여 조회하였다. 숙종(肅宗)이 즉위하여 그들을 격멸시켜 군현으로 삼았다. 원종(元宗) 때 와서 탐 탁라가 모반하므로 김방경(金方慶)을 파견하여 그들을 쳐서 평정하였다. 충렬왕(忠烈王) 원년에 원 나라가 탐라총관(耽羅摠管)을 설치하여 소ㆍ말ㆍ낙타ㆍ나귀ㆍ양 등을 방목하다가 20년에 총관을 없애고 고려에 귀속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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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 置 耽 羅 摠 管. 放 牛, 馬, 駱 駝, 驢, 羊. : 원 나라가 탐라총관(耽羅摠管)을 설치하여 소ㆍ말ㆍ낙타ㆍ나귀ㆍ양 등을 방목하였다.》

 

이러한 기록(記錄)은 오늘 반도(半島)에 살고 있는 조선(朝鮮)의 후예(後裔)들 이라는 우리들을 난감(難堪)하게 한다. 바다 한 가운데 떠 있는 “제주도(濟州道)!”, 그리고 예전엔 “탐라(耽羅)”였다고 설명한다.

 

원(元)나라가 고려(高麗)를 정벌(征伐)한 후, 다른 땅에서처럼 자신의 아들이나, 대신을 보내 통치한 대신, 고려(高麗)엔 원(元) 황제(皇帝)의 딸인 공주(公主)를 고려(高麗)왕(王)에게 출가(出嫁)시켜, 부마국(鮒馬國)으로 하였다고 해설하고 있다. 또 제주도(濟州道)엔 원(元) 황실(皇室)에 사용할 수 있는 말(馬)을 보내 대규모로 사육(飼育)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 해설이 “사기(詐欺)극”인 것이, 대륙(大陸)의 넓은 땅, 말(馬)로 유명(有名)한 농우(隴 右)지방과 하투(河 套)지방, 유주(幽 州)지방 등의 많은 넓고, 넓은 목초(牧草)지와 방목(放牧)지를 놔두고, 천리 길을 항해(航海)하여 도달할 수 있는 곳, 남쪽에 위치해 있어 말(馬)이 생태적으로 거부하는 습도(濕度)많은 기후대에 있었던 “제주도(濟州道)”에 대규모(大規模) 말을 사육했다는 기록은 사실이나, 그 위치(位置)가, 그 땅이 바다(海) 가운데 있는 섬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卽) 제주(濟州) 또는 탐라(耽羅)라는 지명(地名)은 맞을 지라도 그 땅은 반도(半島) 남쪽 바다 한 가운데 떠 있는 섬(島)이 아니란 사실(事實)이다.

 

더더욱 중요한 것은 유목(遊牧)족 또는 이목(移牧)종족들은 수초(水草)를 따라 이동(移動)하며 살았다. 그 이유는 가축들에게 물과 풀을 먹여야 했고, 이 가축들이 잘 자라줘야 가축들로부터 먹을 것을 제공받아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륙 사 기록을 보면, 『수초(水草)를 따라 이동(移動)했다.』라는 구절이 수없이 반복되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만큼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수초(水草)란 물과 풀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수초(水草)란 늪 또는 강변, 천(川) 변 주위에서 물과 함께 자라는 풀이며, 한글로 “물풀”이라할까.』 이런 종류의 풀이 가축에게 좋은 것이고, 하천의 물 역시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지역을 대륙 사에서는 “하늘이 내려준 천혜의 땅”이라 표현하고 있다. “막남(漠南)지방, 농우(隴右)지방, 청해 호 주변, 유주(幽州)지방”등이 대표적인 곳이다.

 

또 『소(牛). 낙타(駱駝). 양(羊)등을 방목(放牧)했다.』는 것에 경악(驚愕)을 금치 못한다. 낙타(駱駝)란 동물은 생태학적으로 반도(半島)와 같은, 제주도(濟州道)와 같은 습도(濕度)가 높고, 우기(雨期)가 많은 곳에서는 질병(疾病)으로 살아남지 못한다. 양(羊) 역시 비슷한 동물(動物)이다. 원(元)! 그들이 누구인가? 그들은 엄마 젖을 먹을 때만을 빼고는 『말(馬)과 함께 살고, 죽을 때까지 말(馬)을 빼고는 할 말이 없는 자들이다.』 낙타(駱駝)! 그들에게 낙타(駱駝)를 빼면 시세말로 죽은 목숨이다. 왜냐 구!!!!!!!! 그들의 밥줄이니 그렇다. 그들은 소(牛)는 잘 모른다. 그러나 말(馬)과 양(羊)과 낙타(駱駝)는 그들의 생명(生命)이요, 그들의 밥줄이기 때문에 어떤 종족(種族)보다도 그 동물(動物)들에 대해서는 “일인자(一人者)”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자(者)들이 반도(半島) 제주도(濟州道) 땅에 “放 牛, 馬, 駱 駝, 驢, 羊” 했다고 한다면 그들의 지도자는 성길사한(成吉思汗 : 철 목 진)이 될 수 없으며, 원(元)나라가 고려(高麗)를 부마국(鮒馬國)으로 했다는 기록 역시 거짓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어리석은 자들이 공포(恐怖)의 기마군단(騎馬軍團)으로 대륙(大陸)과 중앙(中央)아세아와 동(東)유럽을 휩쓸어 두려움에 덜덜 떨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반도사관(半島史觀)과 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나온 망국(亡國)의 역사(歷史) 해설(解說)이다.』이러한 옛 기록이 사실일 때 탐라(耽羅) 곧 제주(濟州)는 『왜(倭)와 송(宋)과 고려(高麗)가 접(接)하고 있었던 요충지(要衝地) 땅, 그곳으로 제자리를 찾아줘야 하는 것이다.』

 

이제는 반도사관(半島史觀)과 식민사관(植民史觀)의 농간(弄奸)에 놀아날 수 없기 때문이다.

 

● 아래의 것은 전회(前回)에 이미 올려놓은 자료이나 수정, 보충한 것을 더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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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 麗 史 / 忠 烈 王 5. 1301 : < 耽 羅 接 于 倭 國 : 탐라는 왜국과 접(接)하였다.>

 

○ 高 麗 史 / 忠 肅 王 2. 1333 : 《三 月 右 丞 相 燕 帖 木 兒 奏 于 皇 太 后 皇 太 子 曰 : 『 高 麗 隣 于 倭 境 』今 其 王 久 在 都 下 請 令 還 國." 制 可. : 3 월, 원나라의 우승상 <연 첩 목 아>가 황태후 및 황태자에게 아뢰기를 “고려(高麗)는 왜(倭)와 경계를 인접(隣接)하고 있는데, 지금 왕이 오래도록 도성(都城)에 있으니, 돌아가도록 해 주십시오”, 하여 그렇게 해 주었다.》

 

위 기록 - <耽 羅 隣 于 倭 境> 과 <高 麗 接 于 倭 國>을 비교해보면 ; 【 隣은 이웃 린(인)이며, 接은 “連 也”이다. 즉 “연 이어져 있다.” 라는 뜻이다.】 이는 곧 『탐라(耽羅 : 제주도)와 왜(倭)는 땅으로 경계를 하고 있고,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는 뜻이다. 이는 탐라(耽羅)를 현 반도(半島)의 제주도(濟州道)라 할 수 있으려면 우선, 왜(倭)의 경계와 가까이(이웃하고)있어야 하며, 또 고려(高麗) 땅과 왜(倭)의 땅이 접(接)해 있어야 한다.

 

○ 원사(元 史) 열전 “탐라(耽羅)” 을 보면 ; <耽 羅 ,高 麗 與 國 也 。世 祖 既 臣 服 高 麗 ,以 耽 羅 為 南 宋 、日 本 衝 要 ,亦 注 意 焉 : 탐라(耽羅)는 고려와 같은 나라이다. 세조때 이미 고려를 복속시켜 신하로 하였다. 이 탐라는 남송(南宋)과 일본(日本)이 충돌하는 요충지이니, 이에 모두 정신을 차려 조심하여야 한다.>

 

● 『남송(南宋)과 일본(日本)과 탐라(耽羅)』가 아주 가깝게 근접(近接)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기록이다. 이에 따르면 『남송(南宋)과 일본(日本)사이에 고려(高麗) 땅인 탐라(耽羅)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남송(南宋). 고려(高麗). 일본(日本)등의 3국은 근접(近接)해 있었으며, 고려(高麗) 땅인 탐라(耽羅)는 지정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요충지였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려주는 대목이다.

 

본래 고려(高麗)땅인 탐라(耽羅)는 원(元)의 지배를 받다가, 고려(高麗) 조정(朝廷)의 요청에 의해 다시 돌려받은 땅이다. 따라서 원사(元史) 열전에 기록되어 있는 남송(南宋)과 일본(日本)과 고려(高麗)가 함께 있었던 요충지(要衝地) 땅 “탐라(제주)”는 현 반도(半島)의 제주도(濟州道)가 될 수 없음은 너무도 명 백(明白)하게 고증(考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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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기록 몇 개를 보면서, 조선 사(朝鮮 史)속에 기록된 탐라(耽羅 : 제주)에 대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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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 명 집(東 溟 集) 중에서 : <觀 濟 州 貢 物 (제주에서 바친 공물을 보다)> 의 서두(書頭)에 : 《 濟 州 風 壤 近 三 吳. 滄 海 東 南 接 五 湖.》라 기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濟 州 風 壤 近 三 吳. : 제주의 풍물(습)과 토양은 세 오(吳)와 가깝다라는 내용은 제주도(濟州道)의 지리적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제주도(濟州道)”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고, “제주도(濟州道)”의 풍속이나 기후(氣候) 등에 대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제주(濟州)의 풍물(風物)과 땅이 “세(三) 오(吳)”나라와 가깝다.》고 했으니, 일단 《반도(半島)와는 전혀 관계없는 땅》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세 오(吳)나라”에 대해서 우선 알아보자. “오(吳)란 국호(國號)”를 가진 나라는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와 삼국(三國)시대 및 오대(五代)십국(十國)시대에 있었는데, 장강(長江)유역을 영토(領土)로 했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가)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의 “吳(오)”나라 :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에, 12 개 나라 가운데 주(周) 문왕(文王)의 백부 태백【본인 주 : 太白 : 국어에서 이르기를, 주 태왕의 장자이며, 희성 (姬 姓)이며, 자작이다. 강소 성 무석 현에 살았다고 한다. 월(越)나라의 구천에 망하기 전의 영토는 회수 및 사수의 남쪽과 절강 성의 가호 (嘉 湖)등지였다.】 이 세운 나라로 장강(長江) 하류 지역을 영토로 하였고, 황하(黃河) 중류 유역의 주민과 풍속이 달라 만이(蠻夷)로 취급받았는데 기원전 473년에 월(越)나라의 구천(句踐)에게 멸망하였다. 【본인 주 참고 : 왜(倭)는 태백(太白)이후라 했음. 여기서 희(姬)성은 ‘황 제 헌 원’의 본래 성씨이며, 조선(통칭)의 성씨이다. 이로 보면 “왜(倭)”는 결국 조선(朝鮮)의 영토 변방에서 살았던 부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열도(列島)는 역사서에 기록된 “왜(倭)”의 영토가 될 수 없다. 】

 

(나) 삼국(三國)시의 “吳(오)”나라 : 삼국(三國)시대 “손권”이 222년에 “건업(建業)”에 도읍하고 강남(江南)에 세운 나라이다. 280년 서진(西晉)에게 멸망하였다.

 

(다) 오대십국(五代十國)시대의 “吳(오)” : 오대십국 가운데 902년에 양 행 밀(楊 行 密)이 양주(揚 州)에 도읍하고, 회 남(淮 南), 강동(江 東 = 江 左 : 장강의 동쪽)에 세운 나라이다. 937년에 남당(南唐)에게 멸망하였다.

 

● 요약(要約)해 보면 위와 같다. 『풍양 (風 壤) 곧 풍습과 토양이 세 나라의 오(吳)와 가깝다(近 : 또는 닮다)』는 말은 이곳 주위에 탐라(耽羅)가 있었다는 말이며, 왜(倭)와 송(宋)과 고려(高麗) 세 나라의 접경(接境)지역에 있었다는 설명이다. 근(近)을 찾아보면 ; <가깝다. 닮다. 비슷하다. 가까이하다. 친하게 지내다. 알다. 근처(近處). 곁. 가까운 곳. 가까이 지내는 사람. 근친(近親). 일가(一家)> 등으로 사물이 가까이 있음을 나타낼 때 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가까움을 나타내는 의미로 쓰이는 글자다.>

 

또한 현 제주도(濟州道)와 장강(長江)유역의 풍습(風習)과 토양(土壤)이 같을 수는 결코 없는 일이다. 제주도(濟州道)는 화산(火山)활동으로 인해 생겨난 토양(土壤)으로 농작물의 재배에 적합하지 않을 뿐더러 광물자원이나 생물(동, 식물 망라) 등이 자라는데 적합지 않은 곳이다. 그러나 장강(長江)유역은 농작물(農作物)과 생물(生物)자원 및 광물(鑛物)자원이 아주 풍부하고, 회귀한 동, 식물이 많이 살아가는 지방으로 반도(半島) 제주도(濟州道)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곳이다.

 

● 따라서 당시 조선왕조(朝鮮王朝)의 탐라(耽羅) 곧 제주(濟州)는 현 반도(半島)의 남서(南西)쪽 바다 한 가운데에 있는 섬이 될 수 없다. 탐라(耽羅)는 대륙의 장강(長江) 이남(以南)지방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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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滄 海 東 南 接 五 湖』란 말은 : <창해(滄海)의 동남에(으로) 5 호(湖)와 접하였다>라는 설명이다.

 

오호 (五 湖)는 다섯 개의 호수를 말하는 것이므로, 다섯 개의 호수는 어디에 있는 어느 어느 호수를 말하는 것인지를 알아보자.

 

주례직방에는 “양주기침오호(揚 州 其 浸 五 湖)”라 했는데, 이 오호 (五 湖)에 대해서는 설명이 조금씩 다르다.

 

➊ 일설에는 태 호 (太 湖)를 오호 (五 湖)라 했고,

 

➋ 일설에는 ‘주례직방 鄭 注(정주)’에서는 “五 湖는 오(吳)의 남쪽에 있다.”고 했으며,

 

➌ 국어(國語)를 주한 위소 (韋 昭) 注에서는 오호 (五 湖)는 태 호 (太 湖)라고 했다.

 

➍ 장발(張 勃)의 오록(吳 錄)에는 “오호 자(五 湖 者)는 태 호(太 湖)의 별명”이라 했고, 태 호(太 湖)는 주위가 500리라고 했다.

 

➎ 후한서 풍연(馮 衍)전의 주에는, 태 호(太 湖)에는 다섯 개의 호수가 있어 오호라 하며, 滆 湖 (滆: 호수이름 격). 洮 湖(조호). 사호(射 湖). 貴 湖(귀 호). 태 호(太 湖)를 합해 오호(五 湖)라 했다.

 

➏ 또 동정호를 오호(五 湖)라 칭했다.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대체적인 오호 (五 湖)의 설명대로 태 호(太 湖)가 가장 유력시 되는데,『태 호(太 湖)이든 또는 동정호(洞庭湖)』든 간에 장강(長江)주위를 말하며, 태 호(太 湖)는 장강의 북(北)쪽에 있고, 동정호는 장강의 남(南)쪽에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특히 “태 호 (太 湖)”는 남경(南京)이 주위에 있고, 상해(上海)가 있으며, 항주가 있다.

 

●『滄 海 東 南 接 五 湖 』란 말을 보자. 『창해(滄海) 동남(東南)으로 오호(五 湖)와 접(接)하고 있다.』는 말에서, 『창해(滄海)의 동남(東南)』이란 어느 곳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 "창해(滄海)"의 일반적인 뜻은 “넓고 큰 바다. 대해(大海) 또는 푸른 바다”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나 "창(滄)"을 놓고 보면, “강 이름 창”이다. 강의 이름으로 보면 이는 "하수(夏 水)"를 말한다. 이는 "창랑 수(滄 浪 水)"를 말함이며, 이 "창랑의 땅"은 "호 북 성 균현의 땅"을 말한다고 한다. 또 "창랑 수는 한수(漢 水)를 말한다."고 한다.

 

『창해의 동남』에서 “창해”를 『태 호나 그 앞 바다가 될 수 없는 이유는 그 동남지방은 망망대해(茫茫大海)이기 때문이다.』 또 반대로 제주(濟州)의 동남쪽은 열도의 구주(큐슈우)의 최남단지방과 바다이기 때문에 오호(五 湖)가 존재할 수 없다. 또 역(반대)으로 제주(濟州 : 반도)의 서북(西北)방향은 산동(山東)성의 ‘밀주 또는 래 주’ 방향이기 때문에 “오호(五 湖)”와는 전혀 관계없는 곳이다.

 

『오호 (五 湖)가 동남(東南)지방에 있다.』고 한다면, 『창해(滄海)는 서북(西北)방에 있었다.』는 결론이 된다. 그러나 이곳은 바다(海)가 아닌 내륙(內陸)의 땅이기 때문에 결국 “해(海)”는 현재의 의미인 “바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 濟 州 風 壤 近 三 吳. 滄 海 東 南 接 五 湖.》란 곳은 결국 『오(吳)나라가 있었던 장강(長江) 유역의 오호(五湖)가 있는 곳에 “탐라(耽羅)”가 있었다.』는 것이다.

 

● 특히 이곳 “탐라(耽羅) 곧 제주(濟州)”는 “고려(高麗). 송(宋). 왜(倭)”의 요충지(要衝地)에 있었다는 고려사 및 원사의 기록이 뒷받침하고 있다. 남송(南宋)과 일본(日本: 倭)과 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어 항상 남송과 일본과 고려의 이해관계가 상충되었다는 것이며, 이로 인해 아주 중요한 지역이었다는 의미다.

 

● 이러한 지리적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탐라(耽羅)가 현 제주가 될 수 없는 사유 『임하필기(林 下 筆 記) 해동악부(海 東 樂 府)를 보면 “서 호 곡(西 湖 曲)”』속에 【景 炎 之 族 傷 於 貧 / 송(宋)나라 말기의 백성들은 가난에 쪼들려 / 畫 舫 輕 裝 自 買 春 / 화방에서 가벼운 치장으로 매춘을 하네. / 壯 士 千 金 誰 肯 擲 / 어떤 장사가 선뜻 천금을 버리겠는가. / 一 朝 難 滌 耽 羅 塵 / 일조에 탐라의 먼지를 씻기 어려워라. 】 “탐라(耽羅)”가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위의 가사를 보면 ; 제목이 “서 호 곡(西 湖 曲 : 서호에 대한 악곡(가락)”이다. 이는 당연히 “서호(西 湖)”가 있는 대륙(大陸)의 장강(長江)주위에서 일어났던 사건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해동악부”에 실려 있다. 위의 것은 해동악부에 기록된 것이나 『선우 추(鮮 于 樞)가 지은 것인데, 그 가사에, 〔서호의 유람선에 있는 건 뉘 집 딸인가, 행하(行下)를 탐내어 억지로 가무를 하네. 어떻게 해야 천금을 던져 주는 사나이를 만나 기생 노릇 하다가 한 지아비를 섬길 수 있을는지. - 西 湖 畫 舫 誰 家 女. 貪 得 纏 頭 强 歌 舞. 安 得 壯 士 擲 千 金. 坐 令 桑 濮 歌 行 露〕하였다.

 

이에 대해 이 익 재(李 益 齋)가 말하기를, “송나라가 망하자 사족(士族)들이 이런 식으로 생활을 하기 때문에 상심한 것이다. 탐라(耽羅)의 이 가곡은 극히 비루하지만 그래도 민간 풍속을 보고 시대의 변화를 알 수 있다.” 하였다.』위 “서호(西湖)곡”은,

 

●송(宋)나라 말기(末期)의 어지러운 사회상 즉 관리(官吏)들의 부정부패(不正腐敗), 권력싸움, 우국지사(憂國之士)들의 충정, 그 충정을 반역(叛逆)으로 매도하는 송(宋) 황실(皇室), 백성(百姓)들의 고통스런 삶을 간접적(間接的)으로 알 수 있다.

 

●서 호 (西 湖)는, 【대륙의 동남지방 절강 성 ‘항주’의 서남지역에 있는 호수이며, 중국 4대 호수 중 가장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호수로, 호수 주변에 많은 산과 차밭(용정 차), 절(寺)들이 자리 잡고 있어 서호(西 湖)와 어울려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갖추고 있는 곳으로, 중국 4대 미인을 말함에 있어 <양귀비, 왕소군, 초선, 서시>등을 칭하고 있는데, 이들 중에서 도 “서시”를 가장 아름다운 미인으로 꼽는데, 어떤 이들은 “서시”를 “미의 화신”이라 칭하기도 한다. 이곳 서호(西 湖)는 서시(西施)가 태어난 곳이며 서시(西施)를 닮았다 하여 서호(西 湖)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나 이것은 전해오는 이야기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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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라(耽羅)는 ; 탐모라 ,탐라, 제주, 섭라, 탁라 등 많은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1)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주왕 2 년 여름, 4월에 ; 【 탐라국에서 토산물을 헌상, 왕이 기뻐서 파견사를 은솔(달솔)로 임명 했다. 동성왕 20년 8 월 조공을 받치지 않으므로 친정 (왕이 직접 정복) 하려고 무진주에 다다르니 그 소식을 듣고, 파견사를 보내 죄를 청하자 중단하였다. 탐라는 또 탐모라이다.】라 하였고,

(2)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2 년에 ; 【탐라국주 좌평 도동음률이 항복했다. 본시 탐라국은 백제의 속국으로 좌평이라는 벼슬을 받았으나, 이때 신라의 속국이 되었다. 문무왕 19 년 2 월에 파견사를 보내 탐라국을 순시했다.】고 하였으며,

(3) 백제 위덕왕 때 ;【수나라의 병선이 진 (陳: 남경 즉 양자강 하류에 도읍) 나라와 전쟁을 할 시에 탐라까지 표류하다가 백제의 왕이 친절하게도 수나라로 안전하게 갈수 있도록 조치를 해주니 백제를 수나라가 충성스런 번국으로 인정하겠다는 교지를 내렸다.】고 하며,

(4) 고려사를 보면 ; 【탐라의 진산은 한라산이다. 현의 남쪽에 있다. 다른 명칭으로 두무 악 또는 원산(圓山)이라 하며, 산 정상(꼭대기)에는 못이 있다.】하였으며,

(5) 세종시록지리지를 보면 ; 【고려 목종 5년 (1002년) 6 월에 탐라 산이 폭발, 4개의 분화구에서 불을 뿜었다.】고 했으며,

(6) 신증동국여지승람 및 문헌비고에는 【제주는 고려 때 번창 한 포구라 했으며, 현이 14개나 있었으며, 또한 탐라가 제주로 명칭이 바뀐 것은 고려 충렬왕 20년 (1283년) 이며, “최 서”를 제주목사로 임명하였다. 】라 했다.

(7) 고려사(高 麗 史)를 보면 ; 【제주를 가려면 나주에서 출발한다.】고 하였다. 또한 고려 충렬왕 3년 (1277) ; 【원에서 제주에 빼앗아 목마장을 설치했다. 20년(1294년) 에 왕이 원(元)에게 제주를 돌려 달라 했고, 26년에 원(元)의 황실(皇室)에서 황태후가 제주에 방목장을 세웠다】고 했으며, 또한 【탐라 즉 제주에서 소를 방목하여 품질 좋은 고기를 생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8) 조선(근대조선) 정조 13년의 인구조사 기록을 보면 ; 【전라도 편에 제주는 남녀 합계 39,762명으로 조사되어 있다.】 당시의 전라도 “광주”의 인구는 합계 32,690 명이었다.

(9) 근대 조선 말기 1,868 년의 인구 조사서에는 ; 【호남 편에 제주목이 7,200 호였다.】

(10) 인구조사와 현(縣)의 수를 보면 ; 【 고려(高麗) 때 14 개현이 있었다 하였음으로 최소 구성원으로 계산하여, 1 개현의 평균 호 수를 1천호로 잡고, 1 호당 가족 수를 5명으로 추산해 보면, 1 개현의 인구는 5000 명이 되며, 14개 현이라면 7만 여명의 인구가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문제는 4, 5백년이 지난 후 근대조선의 정조 13년 인구조사에는 총 39,762명이라고 하였으니 절반가까이 줄어든 숫자다. 대해 중에 있는 섬이라는 한정된 지역이기 때문에 전염병이나 기근, 기타의 전란 등으로 인구가 크게 감소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한다 해도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11) 근대조선 세종시대의 인구 현황을 보면 ; 【제주 목. 정의 현. 대정 현 등만이 있을 뿐 고려 때 14개 현 중 11개현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으며, 인구는 18,897 명이었다. 】고 기록하고 있는데 당시 동경(東京) 또는 계림(鷄林), 또는 경주 부(慶州 府)라 했던 신라의 천년 황도(皇都)는1,552 호. 인구 5,894 명이었다.

(13) 高 麗 史 世 家 2 7 - 元 宗 : 【元 置 達 魯 花 赤 于 耽 羅. 원나라에서 탐라에 달로화적을 임명, 주둔케 했다.】

(14) 高 麗 史 忠 烈 王 2. 1282 : 【元 遣 蒙 漢 軍 一 千 四 百 來 戍 耽 羅. 원에서 보낸 몽. 한 군 1,400 명이 탐라에 와 지켰다.】

(15) 高 麗 史 忠 烈 王 2. 1283 ; 【乙 丑 耽 羅 達 魯 花 赤 塔 刺 赤 還 自 元. 탐라의 달로화적 <탑 자 적>이 원으로 돌아갔다.

(16) 高 麗 史 忠 烈 王 4. 1298 ; 【十 一 月 甲 申 朔 遣 將 軍 李 白 超 如 元 獻 耽 羅 牛 肉. 11월 갑신, 초하루, 파견장군 “이백초여”가 탐라의 소고기를 원에 바쳤다.】당시에 제주 또는 탐라에서 생산되는 소고기가 아주 맛이 좋았던 것 같다. 고려사 기록에 여러 번 등장하는 것을 보니 말이다.

(17) 高 麗 史 忠 烈 王 5. 1301 ; 【 元 置 耽 羅 軍 民 萬 戶 府. 원나라에서 탐라에 군민만호부를 설치했다. 】

(18) 高麗寘濟州牧.後六年.元更置軍民萬戶.放廏馬.旋棄之.恭愍王二十一年.元復置萬戶府.元亡.復屬高麗. ; 고려가 제주 목(濟州 牧)을 설치하였는데 그 뒤 6년에 원 나라가 다시 군민 만호(軍民萬戶)를 설치하여 말을 방목하다가 곧 폐기하였다. 공민왕(恭愍王) 21년에 원 나라가 다시 만호부(萬戶 府)를 설치하였다가, 원 나라가 망하자 다시 고려에 예속되었다.

 

(19) 洪武七年.元牧子作亂.自稱東西哈赤.殺長吏.高麗遣崔瑩伐之.盡殺之我.太祖五年.置州牧判官. ; 홍무(洪武) 7년 원 나라의 목자(牧子)가 난을 일으켜 자칭 동서하치(東西 哈 赤)라 하면서 장관을 죽이므로 고려에서 최영(崔 瑩)을 파견하여 그들을 토벌하여 모두 죽였고, 우리 태조 5년에 주(州)ㆍ목(牧)에 판관(判官)을 설치하였다.

 

(20) 太宗二年.革星主王子.爲左右都知管.置旌義,大靜二縣. ; 태종(太宗) 2년에 성주와 왕자를 고쳐서 좌우 도 지 관(左 右 都 知 管)을 삼고 정의(旌 義)와 대정(大 靜) 두 고을을 설치하였다.

 

(21) 世宗二十七年.罷左右都知管.選邑俊.置上鎭撫. : 세종 27년에 “좌우도지관”을 없애고 읍에서 준수한 인물을 뽑아 상진무(上 鎭 撫)를 두었다.

 

(22) 州在頭無嶽北.北地常多北風.樹木之植.皆偃向南.旌義,大靜二縣.在嶽南.南地無風多瘴霧.晝晦.頭無嶽.漢挐別名.亦曰釜嶽.在州南二十里.衆峯.峯皆上有泓.地勢寬平.稱頭無嶽.其絶頂.有白鹿泓.春秋二分.夕見南極老人星. : 주(州)는 두무 악(頭 無 嶽) 북쪽에 있는데, 북쪽 지역은 늘 북풍이 심하게 불어 나무를 심어 놓으면 모두 남쪽을 향하여 쓰러진다. 정의ㆍ대정 두 고을은 두무악의 남쪽에 있는데 그곳에는 심한 바람은 불지 않으나, 장기(瘴氣)를 품은 안개가 많아 낮에도 어두울 정도이다. 두무악은 한라산의 별명이며 부 악(釜 嶽)이라고도 한다. 주의 남쪽 20 리에는 여러 개의 산봉우리가 있으며 봉 위에는 깊은 못이 있는데 지세가 넓고 평평하다. 그래서 두무 악이라 한 것이다. 그곳 꼭대기에 백록 홍(白 鹿 泓)이 있는데 춘분과 추분의 초저녁에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이 보인다.

 

(23) 釜嶽東.爲長兀嶽.高與釜嶽齊.上有深淵.水旱行禱.山高.五月積雪.八月襲裘.州東五十里.長沙堆. : 부 악의 동쪽이 장 올 악(長 兀 嶽)인데 그 높이는 부 악과 같다. 그 위에는 깊은 못이 있어 장마가 지거나 가뭄이 들 때 거기서 기도를 올렸다. 또한 산이 높아서 5월에도 눈이 쌓여 있으며 8월에는 털옷을 입어야 한다. 주의 동쪽으로 50 리에는 장사 퇴(長 沙 堆)가 있다.

 

(24) 州縣之居.皆山麓海上.其土皆沙礫.唯州旁廣壤赤埴. : 주ㆍ현의 거주지가 모두 산기슭과 바닷가이다. 그러므로 그곳의 토지는 모두 모래와 자갈뿐이지만, 주의 곁에 있는 광양(廣 壤) 땅만은 붉은 진흙이다.

 

(25) 其地多壽考.其俗好淫祠.男少女多.女執男役.有女丁之號. : 장수(長壽)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곳의 풍속을 고찰하여 보면 부정한 귀신 모시기를 좋아하였고, 남자는 적고 여자는 많아 여자가 남자의 사역(使役)을 맡아서 하므로 ‘여자장정’이라고 하였다.

 

(26) 島 人 皮 服. 海 妻 無 裙. 布 繫 一 尺. : 섬사람들은 가죽으로 의복을 만들어 입고 바닷가 아낙네들은 치마를 입지 않고 한 자쯤 되는 천으로 몸을 가렸다.

 

(27) 其穀宜黍,稷,菽,麥.其貨.璸珠,玳瑁,螺.其.鰒魚,鮫魚,望魚.胎化無卵育.其果.橘,柚,橙,柑,梔,榧.產良馬. : 그곳의 곡식으로 알 맞는 것은 기장ㆍ피ㆍ콩ㆍ보리이며 재화로는 빈주(璸 珠)ㆍ대모(玳瑁)ㆍ나패(螺貝)이고 고기는 복어(鰒 魚)ㆍ교어(鮫魚)ㆍ망어(望魚)인데 태생(胎生)이고, 알에서 부화(孵化)된 것은 없다. 과일은 귤(橘)ㆍ유자(柚子)ㆍ등자(橙子)ㆍ감자(柑子)ㆍ치자(梔 子)ㆍ비자(榧子)이며, 좋은 말이 생산된다.

 

(28) 山 高 海 惡. 其 人 業 射 獵 漁 釣. 不 用 網 罟. ; 산이 높고 바다가 험하므로 그곳 사람들은 사냥하고 낚시하는 것을 생업으로 여겼으며 그물은 사용하지 않았다.

 

(29) 山麓之地.多石少土.耕種者踏田.多蟲蛇.蝍蛆尺餘.出香鼠. ; 산기슭의 토지는 돌이 많고 흙이 적어서 경작을 할 때 씨를 뿌린 이는 그 밭을 밟아 놓아야 된다. 벌레와 뱀이 많고 지네[蝍蛆]는 1자 넘는 것이 있으며, 향서(香鼠)도 그곳의 특산물이다.

 

(30) 山無虎,豹,熊,羆,豺,狼,惡獸.無狐,兔,鳥.無鸛無鵲.無鵂鶹.山中見奇禽怪鳥.有貢鳥,獸,麋,鹿,豕,海獺. ; 산에는 호표(虎豹)ㆍ웅비(熊 羆)ㆍ시랑(豺狼) 등 사나운 짐승과 여우ㆍ토끼ㆍ새가 없으며, 까마귀ㆍ까치ㆍ부엉이ㆍ올빼미도 없다. 그러나 산중에는 기이하고 괴상한 새와 짐승들이 보이며 공물로 바치는 새 짐승에는 사슴과 돼지와 해달이 있다.

 

(31) 乇羅火脫餘鼠.其間海水深黝.多烈風高浪.每春夏南望水宗外.高檣,大䭵過者無數.此黑齒之夷.通中國之路.亦海外諸蠻夷物貨所通.西南望白海.崔溥漂海東風七晝夜.至白海.其外大琉球. ; 탁라ㆍ화탈(火 脫)ㆍ여서(餘 鼠) 사이에는 바다가 깊고 검푸르며 매서운 바람과 높은 파도가 많다. 매양 봄과 여름에 남쪽 수종(水宗) 밖을 바라보면 높은 돛을 단 큰 선박들이 무수히 지나간다. 여기는 흑치(黑 齒)의 오랑캐들이 중국과 통상하는 길목이며, 또한 해외 여러 만이(蠻夷)들의 물화가 유통되는 곳이다. 서남쪽으로는 백해(白 海)와 마주하고 있는데 최 부(崔 溥)가 바다에서 표류(漂流)하다 동풍을 타고 7일 만에 백해에 도착하였다 한다. 그 밖으로 대 유구(大 琉 球)가 있다.

 

● 이러한 곳이 반도(半島) 제주(濟州) 땅!!!!!!!!!!! 광활한 땅, 각 국이 통행하는 요충지의 땅! 각국의 물화가 유통되는 땅! 산봉우리엔 5월에도 백설(白雪)이 쌓여 있고, 8월에는 털옷을 입고 살아야 하는 땅! 장기(瘴氣)를 품은 안개에 대낮에도 어두운 곳! 이런 땅이 반도(半島)의 제주(濟州) 땅일까? 결론은 여러분들이 판단해 주시기 바랍니다.

 

                                                          2011년 01월 05일 <글쓴이 : 문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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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Юрий(유리) | 작성시간 11.04.25 원래의 제주가 우리가 알고 있는 제주가 아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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