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가 행 (燕 歌 行)〉
● 고적(高適 : 당의 변새시인) : 開元二十六年.客有從御史大夫張公出塞而還者.作燕歌行以示適.感征戍之事.因而和焉. : 개원 26년(738), ‘어사대부’인 ‘장’공을 따라 변새로 출정하였다가 돌아온 객이 있어 〈연가 행〉을 지어 나에게 보였는데, 출정하여 수자리 살던 일에 느낀 바가 있어 화답한다.
1) 漢 家 煙 塵 在 東 北 / 한(漢)의 동북지방에서 연기와 흙먼지가 이니(전쟁이 일어났다는 뜻)
漢 將 辭 家 破 殘 賊 / 한나라 장군은 집 떠나 잔악한 적 물리쳤네.
男 兒 本 自 重 橫 行 / 남자는 본래 전장에서 종횡 무진하는 것 중시하니
天 子 非 常 賜 顔 色 / 천자가 특별히 총애함에 있어서랴.
2) 摐 金 伐 鼓 下 楡 關 / 징을 치고 북 두드려 유관(楡關)으로 내려가니
旌 旆 逶 迤 碣 石 間 / 깃발들은 갈 석 산 사이에 연이어져 있네.
3) 校 尉 羽 書 飛 瀚 海 / 교위의 우서는 사막(본인 주 : 한해)을 날듯이 건너오고
單 于 獵 火 照 狼 山 / 선우의 사냥하는 불빛은 ‘낭 산’을 비추는구나.
山 川 蕭 條 極 邊 土 / 산천은 황량하여 변방 끝에 달했으니
胡 騎 憑 陵 雜 風 雨 / 오랑캐의 기병들은 비바람 몰아치듯 침범한다.
戰 士 軍 前 半 死 生 / 병사들은 군진 앞에서 절반이 죽는데,
美 人 帳 下 猶 歌 舞 / 미인들은 장막 안에서 지금도 가무한다.(춤을 추며 노래한다.)
4) 大 漠 窮 秋 塞 草 腓 / 큰 사막은 가을이 깊어 변새의 풀들 시들어지고,
孤 城 落 日 鬭 兵 稀 / 외로운 성에 해 지는데 싸우는 병사 드물다
身 當 恩 遇 常 輕 敵 / 몸은 나라의 은혜 입어 항상 적을 경시하지만
力 盡 關 山 未 解 圍 / 병사는 온 힘 다해 ‘관산’에서 싸워도 포위를 풀지 못한다.
鐵 衣 遠 戍 辛 勤 久 / 철갑옷 입고 멀리 수자리 사니 고통과 수고가 오래되었고
玉 筯 應 啼 別 離 後 / 아내는 옥 같은 두 줄기 눈물 이별 후에 응당 흘렸으리라
少 婦 城 南 欲 斷 腸 / 어린 아내는 성의 남쪽에서 애간장 끊어지려 하는데
征 人 薊 北 空 回 首 / 원정 간 남편은 ‘계 북’에서 공연히 고개만 돌려보네.
邊 庭 飄 颻 那 可 度 / 변방은 아득하니 어찌 건널 수 있으랴
絶 域 蒼 茫 更 何 有 / 넓고 먼 외딴 땅에 무엇이 있으리오.
殺 氣 三 時 作 陣 雲 /살기는 하루 종일 서려 전운을 만들고
寒 聲 一 夜 傳 刁 斗 / 밤새도록 차가운 조두 소리 전해오네
相 看 白 刃 血 紛 (紛) / 바라보니 흰 칼날에 혈흔이 군데군데
死 節 從 來 豈 顧 勳 / 예로부터 절개에 죽지 어찌 공훈을 돌아보랴
5) 君 不 見 沙 場 征 戰 苦 /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사막에서 싸움하는 고통을,
6) 至 今 猶 憶 李 將 軍 / 지금도 여전히 이 장군을 그리워하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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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고적(高適)”의 <연가(燕歌) 행>은 전에 한 번 소개한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또 이 시(詩) 한 편을 소개하는 것은 어제의 “장백산과 백두산”에 관한 것과 관계가 있다 생각하여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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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의 표현을 빌리면 ; 현대의 역사해설과 똑같은 지리(地理), 지형(地形), 방향(方向)등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당(漢)나라는 장안(長安)에 황도(皇都)를 두었으며, 유주(幽州)지방은 현 “하 북 성”쪽이니 방향(方向)으로 보면 “동북(東北)”지방이 맞는 말이다.
2)의 표현을 빌리면 ; 현대의 역사 해설과 같이 유관(楡關)은 산해 관(山海關)으로 갈 석(碣石)산과 함께 있었으며, 그곳은 현 ‘하 북 성’ 바닷가를 말하고 있다.
※ 그러나 역사서는 현대의 역사해설과는 전혀 다르게 기록하고 있음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➊ 곧 유주(幽州) : <유도(幽都)이며, 유릉(幽陵)이다. 북해(北海)안에 유도(幽都)산이 있으며, 이는 곧 “유주(幽州)”이다.>라고 정의(正義)할 수 있다.
➋ 구오대사(舊五代史) 137권 외국열전 1 (外國列傳第一)편을 보면, <契 丹 者, 古 匈 奴 之 種 也. 代 居 遼 澤 之 中, 潢 水 南 岸, 南 距 榆 關 一 千 一 百 里, 榆 關 南 距 幽 州 七 百 里, 本 鮮 卑 之 舊 地 也. 其 風 土 人 物, 世 代 君 長, 前 史 載 之 詳 矣. : 글란(契丹)은 옛 흉노의 별종이다. 요 택(遼澤)의 가운데에서 살았는데, 황수 남안(南岸)이다. 남쪽으로 유관(楡關)이 1,100 리 가야하고, 유관(楡關)에서 남쪽으로 유주까지 700 리인데, 그 풍토인물은 대대손손 군장으로 이어왔다. 전사(前史)에 자세하게 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 글란(契丹)편을 보면, 유주(幽州)를 기준으로 북쪽 700 리 떨어진 곳에 유관(楡關) 곧 산해 관(山海關)이 있었다는 것이며, 그곳 유관(楡關) 곧 산해 관(山海關)에서 북쪽으로 1,100 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글란(契丹 : 거란)들이 살아왔다는 기록이다. 이는 바다가 아닌 육지(땅)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런데 유관(楡關)을 산해 관(山海關)이라 하고, <하 북 성 북경(北京)의 동쪽 바닷가에 있다.>고 한다면 제정신이 아닌 자들이다. 오대(五代)사 기록이 잘못되었든지, 현대의 역사해설이 조작되었든지 둘 중의 하나는 분명 조작된 것임을 알려준다. 갈 석(碣石)산 역시 바닷가가 아닌 육지(陸地)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옛 역사서 기록과는 전혀 다른 지방을 유관(楡關)이라 한다거나, 산해 관(山海關)이라 한다면 이는 역사를 조작한 자들에게 꼭두각시처럼 놀아나는 것이다.
3)의 표현을 빌리면, <校 尉 羽 書 飛 瀚 海 / 교위의 우서는 사막(본인 주 : 한해)을 날듯이 건너오고>라 했으니, 당시 전운(戰運)이 감돌던 전쟁(戰爭)터는 한해(瀚海) 가까운 곳임을 알 수 있으며, 2)에서 말하는 유관(楡關) 곧 산해 관(山海關) 역시 이 한해(瀚海) 가까이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한해(瀚海)”는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현재의 지형도로 보면 “고비사막”을 말하는 것이며, 역사서에 기록된 “한해(瀚海)”는 신강(新疆)의 북쪽 사막(沙漠)지대이다.
한해(瀚海)가 어디를 지칭하던 간에, 현재의 “하 북 성”지방과는 전혀 관련 없는 곳이기 때문에 『현대의 조선(朝鮮)사 역사(歷史)해설은 사기극에 불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4)의 표현을 빌리면 ; <大 漠 窮 秋 塞 草 腓 / 큰 사막은 가을이 깊어 변새의 풀들 시들어지고>라고 하였으니, 당시 흉노(匈奴) 선우(單于)와 당군(唐軍)과의 치열(熾烈)한 싸움을 벌였던 곳은 “대 사막(大漠)”지대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1,270년> 전, 현 “하 북 성”지방이 대 사막(沙漠)지였을까? 본인은 그 당시에 없었으므로 알 수 없다. 그러나 “사막(沙漠)”이란 특이한 “지형(地形)”은 수천(數千)년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단언하건데, 현 “하 북 성”지방은 대막(大漠)지대를 형성할 수 없는 지형, 지리, 기후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당시의 당(唐)나라 군사와 선우 흉노(匈奴)군이 접전(接戰)을 벌이던 곳은 사막(沙漠)지대였으며, 그곳은 “대 사막”지대였음을 알려준다.
5)의 표현을 빌리면 ; <君 不 見 沙 場 征 戰 苦 /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사막에서 싸움하는 고통을> 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바로 위의 “사막(沙漠)”지대에서의 전투(戰鬪)장면을 확인시켜 주는 대목으로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상세한 내용이다.
6)의 표현을 빌리면 ; <至 今 猶 憶 李 將 軍 / 지금도 여전히 이 장군을 그리워하고 한다.>고 하였으니, 전한(前漢)의 농서(隴西) 사대부(士大夫) 집안의 비장군(飛將軍) “이광(李廣)”이 “태수(太守)”로 있었다는 “우 북 평(右北平)” 역시 현 “하 북 성”지방이 아닌 수천(數千)리 서쪽지방의 사막(沙漠)지대에 있었음을 확인시켜 주는 대목이다.
지명(地名)의 본래 지리적 위치에 관한 것은 본 카페에서 주장한 내용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는 것에 안도한다.
● 여기에서 중요한 점 하나는, 당(唐)나라의 지리적 위치는 『현 돈 황(燉煌)으로부터 신강(新疆)의 서남(西南)지방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본 카페의 주된 내용이기도 하다.
2011년 06월 10일 <글쓴이 : 문 무>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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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Юрий(유리) 작성시간 11.06.10 글 잘 읽었습니다. 님의 글 <북해의 나라들> 1, 2편 시리즈의 글에서 북해는 한해이며 광활한 사막의 북쪽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북해 나라 중 박마국이 장안에서 16900리 떨어졌다고 쓰신 것 같으신대요(아이고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그로서 북해가 현재 카자흐스탄의 키질꿈 사막 북쪽에 있는 황량하고 추운 곳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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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Юрий(유리) 작성시간 11.06.10 위에서는 다시 북해(=한해)를 고비사막 부근으로 표현하셨네요. 지명이 조작되고 역사가 왜곡되니 참된 역사적 장소를 찾기가 힘든가 봅니다. 혹시 박마국이나 유귀국 등의 북해의 나라가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쪽 넓은 곳에 위치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혹은 고비 사막에서 북쪽 멀리 있는 곳에 위치할 수도 있겠군요. 확실한 것을 모르니 답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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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Юрий(유리) 작성시간 11.06.10 아마 북해에 살던 사람들의 나라는 님의 말씀대로라면 고비사막 북쪽에서 현 러시아 영토 내에 있었을 것 같습니다. 고비사막에서 계속 북으로 올라가다보면 예니쎼이라는 강이 있습니다. 이 강이 북해 내에 있었던 큰 강이며 북해 나라의 사람들에게 식수 공급원으로서 중요한 역활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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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1.06.10 유리님!
위에 나오는 "한해"의 위치 비정은 최소한 동쪽 위치를 말씀드린 것입니다. 역사서에는 한해를 대막의 북쪽에 있다하였고, 현대의 해설은 고비사막을 한해라고 합니다. 위의 글은 고비사막을 한해라고 한다하여도 연나라 및 우북평, 유주 등의 위치는 결코 현 하북성지방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한 글입니다. 또한 유관이 산해관이라면 역사서에서 말하는 유관과는 너무나 동 떨어진 것이기 때문에 설명한 글입니다.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