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문무의 조선사 해설

Re:자 비 령 (慈 悲 嶺)

작성자현상태|작성시간11.07.13|조회수323 목록 댓글 2

<慈悲嶺에 관한 부연>

 

자비령은 고려와 원의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지형입니다. 원조가 세워지고 자비령 이북과 평양을 東寧府 로 예속시킵니다. 그리고 이 지역은 저의 가문의 시조와 매우 관련이 많은 지역입니다.

 

<한국 고전번역원 참조>

 

高麗史節要 卷之十二

明宗光孝大王[一]

 

○西京留守,兵部尙書趙位寵,起兵,謀討鄭仲夫,李義方,檄召東北兩界諸城曰,側聞上京重房,議曰,近北界諸城,率多桀驁,宜往攻討,兵已大發,其可安坐自就誅戮,宜各糾合兵馬,速赴西京,於是岊嶺以北四十餘城,皆應之,獨延州都領玄覃胤,及子德秀,謂州軍將曰,昔,契丹蕭遜寧,侵我,列城,竝降,而獨我州,屹然固守,功載王府.. 하략

 

○ 서경유수병부상서(西京留守兵部尙書) 조위총(趙位寵)이 군사를 일으켜 정중부ㆍ이의방을 토벌하기를 꾀하고, 동북 양계(東北兩界)의 여러 성(城)에 격문을 보내어 소집하기를, “소문을 들으니 서울서는 중방(重房)에서 결의하기를, '근래 북계(北界)의 여러 성에는 대체로 거세고 나쁜 사람들이 많으니 마땅히 가서 토벌해야 한다' 하고, 군사를 이미 크게 동원하였으니, 어찌 가만히 앉아 있다가 스스로 주륙을 당하겠는가. 마땅히 각각 병마를 규합하여 속히 서경(西京)으로 나오라." 하였다. 이에 절령(岊嶺 자비령(慈悲嶺)) 이북의 40여 성이 다 호응했으나, 유독 연주(延州) 도령(都嶺) 현담윤(玄覃胤)과 그 아들 덕수(德秀)는 주군(州軍)의 장수에게 말하기를, “옛날 거란의 소손녕(蕭遜寧)이 우리나라를 침범하였을 때, 모든 성들이 다 항복하였으나 유독 우리 연주만은 의젓이 굳게 지켜서 공적이 왕부(王府)에 기록되었다..... 하략

 

*무신 정변 이후에 대한 항거의 명분으로 조위총이 란을 일으키는데 자비령 이북 40성이 항복하고 있습니다. 이로 보아서는 자비령 이북은 서경유수의 힘이 미치는 지역이라는 것인데, 연주는 현재의 북한 寧邊지역으로 통상적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 연주는 영주(迎州)와 무주(撫州)를 합한 명칭이며, 고려 때 密雲君이었는데, 延州 玄氏의 시조 玄覃胤 公은 고려의종때의 장군으로 후에 조위총 토벌의 공으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라 연산군(燕山君)에 봉해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면, 밀운군은 반도에 있을 수 없는 지형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 제54권

평안도(平安道)

영변대도호부(寧邊大都護府)

 

【형승】 모양이 쇠독[鐵甕]과 같다. 옛 기록에 이르기를, “약산(藥山)의 험준함은 동방에서 으뜸간다. 겹겹이 싸인 멧부리가 서로 사면을 에워싸 그 모양이 쇠독과 같다.” 하였다. 하늘이 만든 성이다. 부의 기록에, “약산은 하늘이 만든 성이다.” 하였다. 군사를 모으는 곳 최치운(崔致雲)의 기문에 있다.

 

【산천】 약산(藥山) 부의 서쪽 8리에 있는 진산이다. 묘향산(妙香山) 부의 동쪽 1백 30리에 있다. 태백산(太伯山)이라고도 하며, 옛 기록에, “그 산에 3백 60채의 암자가 있다.” 하였다. ○ 이색(李穡)의 기문에, “향산(香山)은 압록강 남쪽 기슭 평양부(平壤府)의 북쪽에 있어 요양(遼陽)과 경계하고 있으니 산의 크기가 비길 것이 없으며 장백산에서 갈라진 것이다.

동방에서 가장 험준한“약산은 하늘이 만든 성이다.”

 

표현하였고 쇠독같은 형승지지를 가지고 있으며 병마 절도사를 건치해 놓고 있습니다. 조선조 의 세조도 이 지역을 매우 중시 했다는 것은 북벌의 전초기지 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도사관에 아무리 양보를 해도 이지역이 요양과 경계하고 있다는 것은 말이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지형입니다.

 

영변은 현재의 반도로 설명이 되지 않으며, 현재의 자비령 비정지 또한 현재 북한의 사리원/서흥군 일대로 해발 330 고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비령이 고려 개경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관문이라는 것인데 현재의 함경북도 동부 쪽은 산으로 막혀있고, 서쪽은 평원이어서, 서로 돌아가면 그만입니다. (구글어스로 확인해보니 현재의 반도 개성시로 군대를 이끌고 들어가려면, 평산을 뚫어야 가능합니다. 자비령에서 남쪽으로 대략 25~30km 남방입니다.)

따라서 밀운은 최소한 현 대륙지명과 관련이 있습니다.

 

庾子山集 巻十四 유자산집 권14

朝鮮建國, 孤竹為君, 地稱高柳, 山名密雲, 遼陽趙裂, 武遂秦分

【朝鮮孤竹注見本序 漢書地理志曰 代郡高柳西部都尉治 隋書地志云 安樂郡宻雲縣後魏置 宻雲郡領白檀要陽宻雲三縣 遼陽疑作漁陽 史記趙世家悼襄王九年 趙攻燕取貍陽城 正義曰 燕無貍陽 疑貍字誤當作漁陽 故城在檀州宻雲縣南十八里 燕漁陽郡城也 趙東界至瀛州 則檀州在北 趙攻燕取漁陽城也 地理志云 遼陽屬遼東郡 按武遂有二其 一在韓 其一在燕 史記韓世家 襄王六年 秦復與我武遂 九年秦復取我武遂 釐王六年 與秦武遂二百里 正義曰 上武遂及此武遂皆宜陽近地 又趙世家 悼襄王二年 李牧將攻燕拔武遂方城 徐廣曰 武遂屬安平 正義曰 括地志云 易州遂城戰國時武遂城也 隋志云 上谷郡遂城舊曰 武遂 今云慕容氏本都 燕國蓋謂燕武遂城 與韓為異也 戰國時燕為秦所滅 故云武遂秦分】

출처http://cafe.daum.net/radioproject/88dS/665?docid=bluw|88dS|665|20080910220330&q=%B9%D0%BF%EE%B1%BA

 

조선(朝鮮)이 나라를 건설하고 고죽(孤竹)을 제후(君)로 삼았다. 그 지역을 고류(高柳)라 하였고 산의 이름은 밀운(密雲)이라 하였다. , 요양(遼陽)은 조(趙) 나라가 찢었고, 무수(武遂)는 진(秦) 나라가 나누었다.

【조선(朝鮮)과 고죽(孤竹)에 대한 주석은 책의 서론에 보였다. 한서지리지에서 말하기를 대군(代郡) 고류(高柳)는 서부도위(西部都尉)가 다스린다고 하였다. 수서지리지에서 말하기를 안악군(安樂郡) 밀운현(密雲縣)은 후위(後魏)에서 두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후위의) 밀운군은 백단(白檀), 요양(要陽), 밀운(密雲) 3개의 현을 다스린다고 하였다. 요양(遼陽)은 어양(漁陽)으로 의심된다. 사기조세가(史記趙世家) 도양왕(悼襄王) 9년, 조(趙) 나라가 연(燕)나라를 공격하여 리양성(貍陽城)을 취하였다고 하였다. 정의(正義)에서 말하기를 연(燕) 나라는 리양(貍陽)이 없으므로, 리(貍)자는 당연히 어양(漁陽)의 옛 성이다라고 하였는데 단주(檀州) 밀운현(密雲縣) 남쪽 18리에 있는 연(燕) 나라 어양군성(漁陽郡城)이다. 조(趙) 나라의 동쪽 국경은 영주(瀛州)에 이르는데 즉 단주(檀州)가 북쪽에 있다. 조(趙) 나라가 연(燕) 나라을 공격하여 어양성(漁陽城)을 취한 것이다. 지리지(地理志)에서 말하기를 요양(遼陽)은 요동군(遼東郡)에 속한다고 하였다. 안: 무수(武遂)는 2개가 있다. 하나는 한(韓)에 있고, 또 하나는 연(燕)에 있다. 사기(史記) 한세가(韓世家)는 말하기를 양왕(襄王) 6년 진(秦) 나라가 다시 우리?에게 무수(武遂)를 주었다고 하였다. 9년에 진(秦)은 다시 우리의 무수(武遂)를 취하였다. 리왕(釐王) 6년 진(秦)에게 무수(武遂) 땅 200리를 주었다. 정의(正義)는 말하기를, 위의 무수(武遂)와 이곳 무수(武遂)는 모두 의양(宜陽)의 근지(近地)이다. 또한 조세가(趙世家)는 말하기를 도양왕(悼襄王) 2년, 리목장(李牧將)이 연(燕)을 공격하여 무수(武遂)의 방성(方城)을 빼앗았다고 하였다. 서광(徐廣)이 말하기를 무수(武遂)는 안평(安平)에 속하였다고 하였다. 정의(正義)는 말하기를 괄지지(括地志)는 역주(易州) 수성(遂城)은 전국(戰國)시대에 무수성(武遂城)이라 말한다고 한다. 수서지리지가 말하기를, 상곡군(上谷郡) 수성(遂城)은 옛날에는 무수(武遂)라 하였고, 지금은 모용씨(慕容氏)의 本都라 말한다. 연국(燕國)은 대개 연무수성(燕武遂城)이라 하였으므로 한(韓)과는 다르다. 전국(戰國)시대에 연(燕) 나라가 진(秦) 나라에게 멸망당하였기 때문에, 무수(武遂)는 진(秦)나라가 나누었다고 말한다. 】

 

 

*윗 인용 글에 밀운군은 북위 때 건치한 곳으로 사기 한서에는 어양 수서에는 우북평/백단 지역 이라고 하고 고죽국이라고 하고 있습니다..고죽을 제후로 두었으니 이 지역은 주나라의 고향인 豳/燕이요 遼東 지방입니다. 新唐書 河北道를 보면 幽州范陽郡,大都督府。本涿郡 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유주의 범양 절도사 안록산을 막으려고 파견된 고선지가 밀운군입니다. 밀운이 유주이고 북평,운중,상곡,롱서를 포함하는 중심지, 즉 북방오군 지역이 됩니다. 후에 고려조에 연주 현씨의 시조인 현담윤은 조위총의 난 평정의 공으로 侍郞公 燕山君으로 봉해집니다. 따라서 고려의 延州는 幽州지역이고 연/북방오군의 중심지입니다. 안록산이 이 지역에 흥기해서 북방을 점거하고, 장안을 치려하니 현종이 파촉으로 피난을 가는 고사는 유명합니다. 이 지역을 다시 元이 장악하고 고려는 남경으로 피난을 갑니다. 이 지역을 빼앗는 자가 천하의 군권을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자비령은 동녕총관부가 있던 곳이고, 고구려의 단단대령/개마대산이므로 평양지역이며, 송악은 그 동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본인은 고려의 개마대산을 파미르를 중심으로 서쪽으로 뻗어있는 현 우즈벡 페르가나 지역과 타지키스탄/키르키스스탄 방면을 에워싸고 있는 천산으로 보고 있습니다. 몽골은 우랄산맥이 본거지이고 고려 침공로는 남부 카자흐평원에서 출발하여 동쪽/고려의 서쪽에 있는 여진을 깨뜨리고 현 중앙아시아의 중요 도시 우르겐치, 히바, 케시, 발흐 사마르칸트, 코칸트 등의 경제적,군사적 요충지를 점령하고 동으로 파미르를 넘어 현 신강에 있는 쿠차, 카라샤르를 점령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철령은 현 우즈백의 테르메즈와 사마르칸드에 있는 데르벤트(러시아령 데르벤트와는 同名異地) 자비령은 현 신강 쿠얼러 철문으로 비정합니다.

 

태조 이성계는 결국 현 아프칸 발흐(豳/全州)에서 고려조정으로부터 동북면병마사를 제수 받고 동녕로 즉 자비령 이서, 카라샤르(언기)에서 서쪽 방향으로 현 투르크메니스탄 쿤야 우르겐치를 장악하고 벼랑 끝에 몰린 나합출/북원세력과 카자흐 평원에서 최종대결을 승리로 이끌고,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받아 이미 기운이 쇠잔해진 고려조를 점거하는 것으로 봅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텔레트론 | 작성시간 11.07.13 글 잘 읽었습니다. 君의 뜻에 임금뿐만 아니라 제후라는 뜻도 있나 봅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문 무 | 작성시간 11.07.13 님의 가문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니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단단대령=개마대산=자비령은 아마도 거대한 산맥군을 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개마와 고려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구요. 후한서는 조선의 여러나라에 대해 자세한 지형지리까지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참고가 많이 됩니다. 북사 역시 같습니다. 조선사의 진실된 전개과정을 찾는데 서로 노력해야지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기대하면서, 건강하시길.......!!!!!!!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