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문무의 조선사 해설

요동(遼東)은 어디일까?

작성자문 무|작성시간12.03.05|조회수347 목록 댓글 0

                                       요동(遼東)은 어디일까?

 

  요동(遼東)조선(朝鮮)의 근간지지(根幹之地)였다고 한다. 요동(遼東)기자(箕子)의 땅이었다.고 하고, 고구려(高句驪)는 요동(遼東)()을 역임했다.

 

연행록(燕行錄) ‘계산 기정편의 주류 하(周 流 河)설명을 보면, :기자(箕 子)가 주() 나라에서 봉지(封地)를 받았는데 주류 하를 경계로 획정했다.고 하였다.】 <요동지방에 대한 설명은 이미 여러차례에 걸쳐 설명한 내용이다.>

 

진서(晉書) 재기 편을 보면, “모용(慕容)”씨들이 요동(遼東), 조선(朝鮮)을 호칭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조선(朝鮮)의 해체과정에서 나온 부산물(副産物)이다. 이 모두는 조선(朝鮮)내에서 일어난 사건이며, 당시 주체(主體)는 고구려(高句驪)일 뿐이다.

 

고구려(高句驪)의 대왕(大王)들은 이 요동(遼東)과 요서(遼西)”지방을 찾기 위해 자주 군대(軍隊)를 동원했으며, 이곳을 수복(收復)한 후에는 이곳에 성()을 찾아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要塞)를 만들기도 했다. 다섯 번째 왕인 모본왕(慕本王)’은 또한 요서(遼西)지방과 태 행(太行)산맥현재의 태 행(太行)산맥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넘어 태 원太原 : 현재의 산서 성(山西省) 태 원(太原)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까지도 군대를 동원, 침략하였다고 전하며,

 

더하여 백제(百濟) 무왕(武王)은 수양제(隋煬帝)가 고구려(高句驪)를 침략할 때, 이곳 국경(國境) 요수(遼水)가에 정예(精銳)군대(軍隊)를 사열(査閱)하면서 수양제(隋煬帝)에게 당신을 돕겠다.” 해 놓고는 속으론 딴 마음을 품고 있었다고 역사서는 기록(記錄)하고 있다.

 

대륙 사(大陸史)와 조선사(朝鮮史)에서 요동(遼東)요서(遼西)”를 빼버린다면 역사서(歷史書)의 절반(折半)은 없어도 될 정도(程度)로 빈번히 등장한다. 통상적(通常的) 역사해설에서, 고려(高麗) (), 이 요동(遼東)을 다시 찾기 위해 주군(主君)의 명으로 출전(出戰)했던 출정군(出征軍)이 창, 칼을 거꾸로 겨누고 반정(反正)을 일으킨 사건(事件)도 있다.

 

요동요서(遼東遼西)지방에 대해 그 지세(地勢)를 알아보기로 하자. 중요(重要)한 점은 : 전한(前漢)과 후한(後漢)과 오대(五代)”시 까지도 그 유명한 도요장군(度遼將軍)이 있었으며, 이것은 자치통감(資治通鑑), 통전(通典), 한서漢書 : . (前後)한서등 여러 역사서(歷史書)에 기록(記錄)되어 있는 것으로 누구도 부인(否認)하지 못할 것이다.

 

최소한 역사서(歷史書)에 기록(記錄)요수(遼水) 또는 요하(遼河)”는 중원(中原)서북(西北)방을 흐르는 하() 이외(以外)엔 존재(存在)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곳을 흐르는 하천(河川)을 도하(渡河)하여 북방(北方)과 서북방(西北方)의 이민족(異民族)침략군의 침탈(侵奪)로부터 관내(關內)를 보호(保護)해야 했기 때문이다. 중원(中原) 왕조(王朝)의 흥망성쇠(興亡盛衰)는 대부분(大部分) 이곳지방으로 부터의 이민족(異民族)들의 침략(侵略)과 또는 안정(安定)에 좌우(左右)되었다고 해도 과언(誇言)이 아니다.

 

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이나, 일부 재야 카페에서는 반도(半島) 북방(北方)의 심양(瀋陽)주위의 하천(河川), 또는 하 북 성(河北省)의 난 하(灤河), 산서 성(山西省)의 영정(永定)하 등을 요수(遼水)”라고 하나, 이는 전혀 잘못된 역사해설(歷史解說)이다. 근거(根據), 고증(考證)이 전혀 없는 현대(現代)의 지명에 맞춘 결과일 뿐이다.

 

조선사(朝鮮史)에서 연경(燕京) 곧 북경(北京)을 왕래(往來)하는 사신(使臣)단들이 수없이 들락거렸기 때문에 이들이 직접(直接), 보고 들은 내용을 기록한 많은 연행(燕行)기가 존재(存在)한다. 이 기록(記錄)은 사신(使臣)단의 일행(一行)이었던 관리(官吏) 혹은 수행원들이 기록(記錄)한 것이다.

 

연행록(燕行錄)의 설명(說明)반도 사(半島史)와 흡사(恰似)한 지형지리(地形地理)도 많이 등장(登場)하고 있으나, 반도(半島)에서 하 북 성(河北省) 북경(北京)으로 가는 여정(旅程)의 지형지리(地形地理)가 이곳압록강(鴨綠江) 북방으로부터 요 녕 성(遼寧省) 및 하 북 성(河北省) 북경(北京)으로 가는 여정(旅程) 지방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異質的)인 지대(地帶)를 설명(說明)하고 있다.

 

특이(特異)한 지세(地勢)인 사막(沙漠)과 광야(廣野)지대, 하천(河川)과 산()등은 이것들이 형성(形成)된 것은 억겁(億劫)의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변함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하천(河川)에서 변함이 있는 것은 그 물줄기의 흐름 유역이 약간 바뀌는 정도이다. 결국 조선(朝鮮)의 사신(使臣)단들이 왕래(往來)했던 연행(燕行)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곳현 하북성(河北省) 북경(北京) 곧 연경(燕京)이 아니었다.는 결론(結論)으로 밖에 볼 수 없다.

 

더하여 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말하는 요동(遼東)”과 일부 재야 카페에서 말하는 요동(遼東)”지방이 이러한 기록들과 부합(符合)되는 곳에 위치(位置)해 있었는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

 

[1] ()지방은, <고전번역원의 연행록(燕行錄) / 심전 고(心田稿)

 

대개 요()는 조선(朝鮮)의 옛 땅이다. 蓋 遼 是 朝 鮮 古 地 也.

()나라 때에는 요동(遼東)이라 하였고 秦 曰 遼 東

() 나라 때에는 양평(襄 平), 漢 曰 襄 平

당 나라 때에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唐 曰 安 東 都 護 府

() 때에는 동 평(東 平), 遼 曰 東 平

() 나라 때에는 요양(遼 陽), 元 曰 遼 陽.

()때에는 정료 위(定 遼 衛)라 하였으며, 明 曰 定 遼 衛

()때에는 성경(盛 京)에 속淸 屬 盛 京, 혹은 동경(東京)’或曰東京이라 했다.

 

=========================================================================

 

[2] 요동 벌 (遼 野) <심전 고 /燕 薊 紀 程 무자년(1828, 순조 28) 128> /一出遼野.風沙撲人.眯目噤口.殆不可堪.而此地尤甚.唐太宗征遼時.馬尾曳柴.攀援以過云 : 한번 요동 벌로 나오니, 바람에 날리는 모래가 사람을 갈기어, 눈은 어둡고 입은 벌리지를 못하여, 거의 견딜 수가 없는데, 이곳이 더욱 심하다. ()태종(太宗)이 요동(遼東)을 정벌할 때 말꼬리에 섶을 끌리어, 그것을 붙잡고 의지하여 지나갔다고 한다.

 

위 연행기록은 <서기 1,82812>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요동(遼東)지방은 광활(廣闊)한 들판이었으며, 작자(作者)마다 그 거리는 조금 차이는 있으나, 700 리에서 1,000 리 광야(廣野)라고 표현(表現)하였다. 아직 요수(遼水)를 건너지 못했으므로, 요수(遼水)의 동()쪽이므로 요동(遼東)지방이다.

 

특이한 지형지리(地形地理)는 이곳의 모래바람이 얼마나 심한지, 바람에 날리는 모래가 사람을 갈기어, 눈은 어둡고, 입은 벌리지를 못하여, 거의 견딜 수가 없는데, 이곳이 더욱 심하다.고 설명(說明)하고 있으며, 그 옛날 당() 태종(太宗)말꼬리를 잡고, 요동벌판을 지나갔다.”는 이야기다. “천책상장 또는 현무문(玄武門)의 승자라고 자부(自負)했다는 당 태종(太宗)말꼬리에 섶을 묶고, 그 섶을 놓칠세라 꽉 잡고, 모래바람에 보이지 않는 길을, 패자(敗者)의 우두머리로, 패잔병(敗殘兵)들을 앞세우고 퇴각(退却)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사막(沙漠)지대에서 큰 바람이 한 번 불어올 때, 이때의 상황(狀況)은 직접(直接)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잘 이해(理解)가 안 될 것이나, 본인(本人)은 여러 차례 체험(體驗)을 했기 때문에 수백(數百)년전 이 분들의 당시 심정(心情)을 누구보다도 더 잘 이해(理解)할 수 있다.

 

현재(現在) 반도(半島) 압록강(鴨綠江) 북방으로부터 심양(瀋陽)에 이르는 지세(地勢)위에서 설명(說明)하는 그런 곳과는 전혀 다른 야산(野山)과 초원(草原)과 평야(平野)지대가 펼쳐진 곳이다.”

 

이런 글을 읽으면서, 연경(燕京), 북경(北京)이 하북성(河北省) 현 북경(北京)이라고 둘러대는 사람들은, ()을 저당(抵當)잡히고 사는 사람과 다를 바 없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

 

[3] 山海關頭萬里長城外大漠中.又有二條長城舊墟.五里置一墩.是分限華夷界. : 산해 관(山海關) 머리 만리장성(萬里長城) 밖에 있는 큰 사막(沙漠) 가운데 또 두 줄기 장성(長城)의 옛터가 있고, 5리마다 돈대(墩臺) 하나씩을 두었으니, 이는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의 경계를 나눈 것이다.

 

산해 관(山海關) 북쪽의 만리장성(萬里長城) 밖은 비록 황폐(荒廢)한 곳이긴 하나, 그곳의 지형도(地形圖)’를 보면, 내몽고(內蒙古)고원(高原)지대라고 하여, 대막(大漠)지대와는 전혀 다른 지세(地勢)로 되어있다.

 

또 하나 지적(指摘)하고 싶은 것은,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을 나눈 것이라면, 그것은 중앙(中央) 또는 중화(中華)의 본거지(本據地)의 북방(北方)을 말하는 것이지, 저 수천(數千)리 떨어져 있는 변방(邊方)지대에서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의 경계(境界)를 나눴다는 말은 웃기는 이야기다.

 

남쪽지방은 중화(中華), 북쪽지방은 이적(夷狄)이다.” 라고 나눌 수 있는 어떤 기준(基準)이 되는 산()이나 하천(河川), 장성(長城)이 중화(中華)의 본거지(本據地) 북쪽에 있으니, 그 남쪽은 중화(中華)”가 될 수 있는 것이지, 수천(數千)리 머나 먼 변방(邊方)의 동북(東北)지방 한 모퉁이에서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을 경계한다.’는 말은 존재(存在)할 수 없다.

 

()본기 또는 열전(列傳), “양산(陽山) 북쪽으로 꾸불꾸불 이어졌다라는 말과 대동소이(大同小異)한 것이며, 양산(陽山)이 현대 역사해설의 양산(陽山)인가? 하는 문제와 별개(別個), 현 하 북 성(河北省)지방이나 그 북쪽 내몽고(內蒙古)의 지형(地形)지세(地勢)가 아니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

 

[4] 요동대야기(遼東 大 野 記) : 연원 직지/ 出 疆 錄 임진년(1832, 순조 32) 1128/ 遼東大野.於焉入望.荒荒漠漠.眼無障礙.中略.今臨遼野.自此至山海關千二百里間.四面都無一點山.如黏膠線縫. : 요동의 큰 들판이 어느덧 바라보인다. 황황막막(荒荒漠漠)하여 눈앞에 막히거나 가리는 것이 없었다. 지금 요동(遼東)들에 이르니, 여기에서부터 산해 관까지 1200 리 사이가 사방으로 도무지 한 점의 산도 없어 아교(阿膠)로 붙이고 실로 꿰매 놓은 것 같다.

 

위 설명은 요동(遼東)지방의 넓은 들판으로부터 산해 관(山海關)까지 무려 1,200 리가 들판으로 되어있다.는 것으로 오늘날의 하 북 성(河北省)과 요 녕 성(遼寧省)지방을 지칭(指稱)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계산 기정 : 천 리에 동서로 뻗은 요 땅 들판 길 / 千 里 東 西 遼 野 路

 

따라서 당시의 연경(燕京) 또는 북경(北京)”중원(中原) 서북(西北)쪽에 있었다.” 는 것이 확실한 것이다. 연행(燕行)사신단의 일원이었던 이 분들은 직접 보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 놓은 것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정확(正確)하다고 볼 수 있다.

 

=========================================================================

 

[5] 요동이서(遼東以西) : (연 원 직 지6. 인물과 요속) /自遼至西.地皆平衍.一風一雨.沙移失路.故往往植柳以識路 : 요동(遼東)에서부터 서(西)쪽에 이르기까지는 땅이 모두 평탄하고 넓다. 그래서 바람이 한번 불거나 비가 한번 오면 모래가 이리저리 옮겨져서 길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이따금 버드나무를 심어서 길을 식별하게 했다.

 

위 내용도 [4]와 똑같은 맥락(脈絡)의 글인데, 이곳에서는 그 평탄한 들판이 모래()로 되어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러한 말은 진시황제(秦始皇帝) 때 몽 념(蒙恬)이 장성(長城)을 쌓으면서, 느릅나무()를 심어, 성채(城砦)를 만들고, 전령(傳令)과 백성(百姓)들이 혹시나 길을 잃을까, 길 안내 역할도 하였다.” 는 옛 기록과 부합(符合)되는 내용(內容)으로, 이러한 곳은 사막(沙漠)지대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연계기정(燕 薊 紀 程) : 楡 關. 卽 秦 將 蒙 恬 種 楡 爲 塞 處. 居 民 極 繁 富. : 유관(楡 關)은 곧 진 나라 장수 몽 염(蒙 恬)느릅나무를 심어, 울타리로 삼은 곳으로 주민들이 매우 번성하고 부유하다. 라고 말한다.

 

계산 기정 / 삼 도 파(三 道 把) : 영락(永樂) 연간에 요동(遼東)의 들판이 광활하여 가리는 곳이 없으므로, 마침내 길 좌우에 갯버들을 심어서 경계를 정했다. 그리고 강희 황제(康煕皇帝), 또 길 가는 사람이 더위를 피하게 하기 위해, 영을 내려 버들을 심도록 하였기 때문에 지금은 모지라진 나무가 많다.

 

계산 기정 / 次 韻 秋 陽 坐 車 詩(추양의 좌차 시에 차운함) : 의주의 강을 건너온 후에는, 서장관은 예에 따라 좌거(坐 車)를 탄다. 수레의 구조는 대략 쌍교(雙轎)와 같은데 약간 작다. 차체는 무겁고 바퀴는 넓어 모래자갈 길을 삐그덕거리고 가는데 그 속에 타면 자기도 모르게 이쪽저쪽으로 굴러서 쓰러진다. 나도 시험 삼아 타 보았더니 편안히 앉을 수가 없었다.

 

연행기사(燕行記事) / 이 갑(당시 이조판서) 정유년(1777, 정조 1) 1211/ 하루 종일 황량한 변방(邊方)에 티끌 모래가 걷히지 않았다.

 

지금도 사막(沙漠)지대에서는 바람이 불어 모래가 도로(道路)에 쌓이는 것을 방지(防止)하기 위해 도로(道路) 양측 넓은 구간에 나무를 심고, 콜타르를 뿌리는 등 여러 방지책(防止策)을 만들고 있다.

 

이러한 특이(特異) 지형(地形)지대는 현 하북성(河北省)이나 요녕성(遼寧省)지대와는 전혀 다른 곳의 이야기다. 당시(當時) 연행(燕行)사신(使臣)들은 현 하북성(河北省)이나 요녕성(遼寧省)을 거쳐 연경(燕京)으로 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證明)하고 있는 것이다.

 

=========================================================================

 

[6] 의무려산(醫巫閭山) / 醫巫一山之後.盡屬蒙古之地.茫茫大漠.北海環之.五年一氷.而自古不通中國.故海以外.不知有何許物怪. : 의무려산(醫巫閭山) 뒤는 모두 몽고(蒙古) 땅에 속하며 망망한 큰 사막(沙漠)인데, 북해(北海)가 둘러 있다. 5년에 한 번 얼음이 얼고 자고로 중국에 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바다 밖은 무슨 괴물이 있는지 모른다.

 

여러 번 설명(說明)하고, 해설(解說)한 내용이다. 현 요녕성(遼寧省) 의무려산(醫巫閭山)의 밖은 망망한 대 사막(沙漠)지대도 아니요, 더더구나 북해(北海)는 그 그림자도 찾을 수 없는 곳이다. 전혀 다른 지방을 설명하고 있다.

 

=========================================================================

 

[7] 김 정중(金 正中)의 연행 기 <조선 정조 15(1791)> / 自崑崙落脈.連延橫亘.經遼薊千里之野.爲此山一支.東走爲我東之白頭.蓋崑崙,白頭爲東西祖宗.而此山倔强北方.中立若不庭者.自周,漢以來.其下種落太盛.或抗衡中國.良以是山之氣也. : 곤륜산(崑崙山)으로부터 내려온 줄기가 이어가서, 가로 뻗어 요주(遼州)계주(薊州)의 천 리 들을 지나서 이 산이 되고, 한 곁줄기가 동으로 달려서 우리나라의 백두산이 된다. 대개 곤륜산과 백두산이 동서의 조종인데, 이 산은 북녘 한가운데 뻣뻣하게 서 있어서 조회(朝會)하지 않는 듯하니, ()() 이래로 그 밑의 부족이 크게 번성하여 중국에 맞서기도 하였던 것은 진실로 이 산의 기운 때문이었다.

 

곤륜산(崑崙山)으로부터 내려온 산줄기가 요동(遼東), 요서(遼西) 땅도 될 수 없거니와, 백두산(白頭山)이 곤륜산(崑崙山)으로부터 뻗어온 산맥(山脈)이나, ()이라 한다면 여러 학자(學者)들의 비웃음만을 살 것이다.

 

지형도(地形圖)를 보면, 백두산(白頭山)은 대륙(大陸)에서 뻗어온 줄기와는 전혀 다른 지맥(支脈)으로 형성(形成)되어 있다. 이러한 설명은 역사서(歷史書)에 기록된 백두산(白頭山)”과 현세(現世)의 백두산과는 전혀 다른 산이며, 이름만 같은 짝퉁 산이란 것을 증거(證據)하고, 고증(考證)해 주는 것이다.

 

더하여 백두산(白頭山)”에서 한 줄기 지맥(支脈)이 뻗어 의무려산(醫巫閭山)”을 만든다.는 말은 반도(半島) 백두산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산이며, 의무려산(醫巫閭山)은 그저 평범한 산이다.

 

지형지리(地形地理)를 대입(代入)해 보면, 기록(記錄)은 기록(記錄)대로 놀고, 반도 사(半島史)의 역사해설 역시 따로 따로 놀고 있으니, 이런 것을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

 

[8] 상촌 집 제12/ <동고의 영 평 부운을 차하다> 글 중에서 / 중략. 요동 변방 끝이 없는 차가운 사막 실컷 보고 : 厭 看 遼 塞 聯 寒 磧 / 또 다시 난 하 향해 끊긴 다리 건너가네. : 又 向 灤 河 渡 斷 橋 / 예로부터 노 룡 사막 험난하다 불렸나니 : 從 古 盧 龍 稱 絶 漠. 중략.

 

요동(遼東)과 요서(遼西)지방의 설명(說明)을 보면, 현세(現世)의 반도인(半島人)들을 가슴 아프게 할 것 같다. 요동(遼東) 변방의 사막(沙漠), 노 룡(盧龍)의 사막(沙漠)지대!

 

어떻게 설명(說明)을 하든, 이러한 특이 지형(地形)은 특별(特別)한 지대(地帶)에 존재(存在)하고 있기 때문에, 이곳이 현재의 하북성(河北省)이나 요녕성(遼寧省) 땅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當然)한 이야기다.

 

반도 사(半島史)는 이렇게 상식적(常識的)이지 못한, ()들의 이야기만을 엮어 만들어 놓은 곳이다. 조선인(朝鮮人)들의 인간사(人間事)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

 

[9] 연계기정(燕 薊 紀 程) 무자년(1828, 순조 28) 1115일 맑음. / 登嶺而望.鴨江以北.胡山慘憺.朔漠之氣.凜然逼人. : 고개에 올라 압록강 이북을 바라보니, 되 땅의 산들이 몹시 쓸쓸하게 보이고, 북쪽 사막의 차가운 기운이 오싹 몸에 사무친다. 內 城 南 門. 扁 以 東 海 第 一 關. : 내성 남문에는 동해제일관(東 海 第 一 關)’의 편액이 걸려 있다.

 

<고개에 올라 압록강(鴨綠江) 이북(以北)을 바라보니, 호산(胡 山: 오랑캐 산)이 참담(慘憺 : 비참하고 쓸쓸한)하고, 삭막(朔漠: 북쪽의 沙漠)의 서늘한 기운이 몸을 오싹하게 한다.> : 위의 기록으로 미뤄보아 압록강(鴨綠江)을 건너면 바로 朔漠地帶(북쪽사막지대)라는 설명이다. 과연 반도(半島)의 압록강(鴨綠江) 이북(以北)지방이 차가운 북쪽의 사막(沙漠)지대라고 할 수 있을까?

 

<내성 남문에는 동해제일관(東 海 第 一 關)’의 편액이 걸려 있다. ()안에는 상점(商店)과 민가, 관청(官廳)과 누각(樓閣)들이 고기비늘같이 섞여 있고 바둑판같이 퍼져서 그 정연한 규모가 참으로 국경(國境)의 관문(關門)이다. > 라는 설명(說明)이 압록강(鴨綠江)변의 용만(龍灣=義州)의 설명(說明)으로 맞는 말일까?

 

또 용만(龍灣)의 성() 안엔 상점과 민가, 관청과 누각이 고기비늘처럼 수없이 많고, 바둑판 같이 정연하게 그 규모가 대단히 컸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또 다른 연행(燕行)기록엔 용만(龍灣)은 약 10,000 가의 민가(民家)가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거대(巨大)한 도시(都市)가 정말 반도(半島) 북방(北方)의 압록강(鴨綠江) 변에 있었던 변경도시 용만(龍灣)이 될 수 있을까? 민가(民家) 만호(萬戶)라면, 최소한 4-5만의 백성과 그곳에 주둔한 병사들과 합한다면 7-10만의 대도회지(大都會地)였다는 것인데.........? 반도(半島) 용만(龍灣)이 될 수 없는 증거(證據).

 

<남문(南門)동해제일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라는 말인데, 요게 참으로 묘한 것이다.

 

산해 관(山 海 關)천하제일관(天 下 第 一 關)!

용만(龍灣=義州)에는 동해제일관(東 海 第 一 關)!

감 숙 고평(高平)천하제일성(天 下 第 一 城)!

 

반도(半島) 북방(北方) 모퉁이 용만(龍灣)”이 어떻게 동해(東海)”가 될 수 있으며, 또 이곳 관문(關門)東 海 第 一 關이 될 수 있겠는가? 동해(東海)는 동이(東夷) 곧 구이(九夷)가 살고 있던 땅이며, 그곳은 반도(半島)가 될 수 없음은 너무 자명(自明)하다.

 

  =========================================================================

 

[10] 계산 기정 / 왕 팔 석 야 (王 八 石 野) : <自 魚 龍 堆 以 往. 山 益 高 水 益 駛. 頓 無 沙 漠 氣 : 어룡 퇴(魚 龍 堆)부터는 산이 더욱 높아지고 물이 더욱 빨리 흘러 조금도 사막 같은 느낌이 없었다.

 

어룡 퇴(魚 龍 堆)부터는 산은 더욱 높아지고, 물이 더욱 빨리 흘러 조금도 사막(沙漠) 같은 느낌이 없었다.>는 말은 이곳 지방은 본시(本是) 사막(沙漠)지방인데, 이곳만큼은 사막(沙漠)같지 않은 곳이란 이야기다.>

 

=========================================================================

 

[11] 연도기행 (燕 途 紀 行) 인평대군(麟坪大君 : ‘이 요를 말함

 

10월에 나는 금상(今上) 효종이 잠저에 있을 때임. 과 소현세자(昭顯世子 인조의 장남)를 호종, 從淸人獵於建州之牛毛嶺.嶺卽渡遼時吾東營將金應河死節地.陰山大獵.縱云壯觀. : 청인(淸人)을 좇아 건주(建 州) 우모 령(牛 毛 嶺)에 가서 사냥을 했다. 이 고개는 곧 요동(遼東)을 건너갈 때 우리나라 영장(營 將) 김응하(金 應 河)가 절사(節 死)한 곳이다. 음산(陰山)에서 하는 큰 사냥이 비록 장관이라고는 하나, 서리와 눈 위에서 노숙(露宿)하며 얼음길을 달려 다니노라니 고생이 심하였다. 八月.昭顯及今上.復從淸主.轉向燕山.余則惆悵東歸. : 8월에 소현세자와 금상은 다시 청주(淸 主)를 좇아서 다시 연산(燕山)으로 향했고, 나는 쓸쓸하게 본국으로 돌아왔다.

 

《 ㉡ 연도기행 (燕 途 紀 行) / 일록(日錄) () : 정축년(1637, 인조 15) 병란(兵亂) / 及夫南漢議和.靑丘賴安.而今上曁昭顯世子.竟未免沙磧之行.余獨扈駕還都.北望遼山.只切飮泣之情. : 남한산성에서 화친이 맺어짐에 이르러는 우리나라가 편안할 수 있었으나, 금상과 소현세자(昭顯世子)마침내 청나라 사막(沙漠)에 가는 것을 면치 못했다. 나는 홀로 임금을 모시고 서울로 돌아와서, 북쪽으로 요동(遼東) 산을 바라보니, 오직 눈물 흘리는 정이 간절할 뿐이었다. 중략. 13(무오) 東臨大漠.西望居庸.氣象浩蕩.令人有憑虛御風.不知其所止之思. : 동쪽으로 대막(大漠)에 임하고 서쪽으로 거용(居 庸)을 바라보니 그 기상이 호탕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허공에서 바람을 타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과 같은 생각을 갖게 하였다.

 

()나라 사막(沙漠)지대! 사적(沙磧)지대에 가는 것을 면치 못했다.는 말은 당시 ()”나라는 사적(沙磧)지대에 있었다.는 말이며, 이러한 지세(地勢)는 최소한(最小限) 중원(中原) 서북(西北)방 지대에 있으며, 그 동쪽지방엔 이러한 특이(特異) 지형(地形)은 없다.

 

특히 동쪽으로 대막(大漠)에 임하고, 서쪽으로 거용(居庸)을 바라보니라는 말은, 지금 글을 쓴 저자(著者)는 중원(中原) 서북방(西北方)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현 거용(居庸)은 하북성(河北省) 북쪽지방에 있다고 하는데, 이곳의 동()쪽 지방에는 그 어디에도 대 사막(沙漠)”지대가 없기 때문이다.

 

전회(前回)에 거용 관(居庸關)에 대한 설명(說明)을 하였다. 거용 관(居庸關)은 시황제(始皇帝) 때 장성(長城)을 쌓던 용공(庸工)들의 집단이주(集團移住)하여, 살던 곳이므로, 장성(長城)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하며, 시황제(始皇帝)의 당시 장성(長城)은 중원(中原)의 황하(黃河) 북안(北岸) 양산(陽山)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다가 끊어졌다.고 설명하기 때문에 산서 성(山西省) 북쪽이나, 더구나 하 북 성(河北省) , 또는 그 북방(北方)지대엔 존재할 수 없다.

 

산서(山西)와 하 북(河北)에서 보이는 소위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고 하는 것들은 후대(後代)고구려(高句驪)와 고려(高麗) 및 근대조선(近代朝鮮) 시절에 쌓은 장성(長城)이다.특히 고려(高麗)시대엔 장성(長城)3 ()이나 증축(增築)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朝鮮)은 그 사막(沙漠)의 남쪽과 동쪽지대에 있었으며, ()나라는 사막(沙漠)지대에서 발흥(發興)하였다는 것이 올바른 역사 해설이다.

 

                                      20120305<글쓴이 : 문 무>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