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문무의 조선사 해설

무궁화(無窮花)는 장성(長城)을 한계(限界)로

작성자문 무|작성시간12.12.13|조회수289 목록 댓글 2

                                 무궁화(無窮花)는 장성(長城)을 한계(限界)

 

 

()나라와 한()나라의 강역(疆域)은 조선(朝鮮)의 땅이었는가? 하는 문제(問題)에 있어, 대륙조선(大陸朝鮮)을 주장(主張)하는 본인(本人)”의 입장(立場)에서 당연(當然)한 것이다.”

 

홍자옥편(弘字玉篇)에서 槿 이란 자()를 찾아보면, 무궁화(無窮花) (槿)이라 하고, 槿 () : 蕣 也 木 槿 / 무궁화이다. 무궁화 근. (=()) : 무궁화 순, 花 開 朝 而 暮 萎 / 꽃이 아침에 피었다가, 해질 무렵에 시들어진다. () : 시들다.이라 하고는,

 

    一 名 椵 : 일명 나무이름이다. () : 나무이름 가

    一 名 櫬 : 일명 오동나무이다. 널 츤()

    一 名 舜 華 : 일명 무궁화(蕣華=순화(舜華)이다.본인(本人) () / 일명 순임금의 꽃이다.

    一 名 日 及 : 일명 일급이다.

    一 名 王 蒸 : 일명 왕 증(王蒸)이다. 다른 곳에는 옥 증(玉蒸)이라고 하였음

    一 名 無 窮 花 : 일명 무궁화(無窮花)이다.

    一 名 皇 漢 : 일명 황한(皇漢)이다. 본인(本人) () / 일명 진()과 한()나라를 뜻한다.라고 하였는데, 그 밖의 것으로, 목근(木槿, 木菫), 훈화초(薰華草), 근화 초(槿 花 草), 근 황 화(槿 黃 花), 츤 순(櫬 舜), 조 개 모 락 화 (朝 開 暮 落 花), 조 생 모 락 화(朝 生 暮 落 花), 일화 (日華), 주순(朱 蕣), 조근(朝槿), 조화(朝 華), 조순 (朝 蕣), 조생모근(朝 生 暮 槿), 목화 (木 樺), 부상(扶桑)등이 그것이다

 

무궁화(無窮花)조선(朝鮮)’을 칭하는 말로 사용(使用)할 정도(程度)옛 조선(古朝鮮)으로부터 시작(始作)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산해 경(山海經)에도 기록(記錄)된 것을 보면, 최소한(最小限) 4- 5 천년(千年)이전(以前)부터 <무궁화=조선>이란 말이 회자(膾炙)되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무궁화(無窮花)는 일명 순화(舜華)=순화(蕣華)라고 하여, ()자는 ()임금을 뜻하는 말로, 또 무궁화(無窮花)를 뜻하는 말로 사용(使用)되는데, ()임금 역시 조선(朝鮮)의 임금이란 뜻일 것이다. 여기서 관심(關心)을 끄는 것이 무궁화(無窮花)”일명(一名) 황한(皇漢)”이라 했다는 것에 있다. 일명(一名) : 본래(本來)의 이름 외() 따로 부르는 이름

 

    ㉠ () : 임금 황()으로 천자(天子)나 천제(天帝)를 호칭(呼稱)하는데, 역사서(歷史書) 상에서 ()” ()”를 칭한 것은 ()나라의 시황제(始皇帝)”이다.

 

    ㉡ () : 육국(六國)통일(統一)을 이룩한 진시황제(秦始皇帝)의 나라, ()나라 말기(末期), 초 왕(楚王) 항우(項羽)와 함께 천하(天下) 패권(覇權)을 놓고 다툼을 하다가, 북 맥(北貊=北貉)의 용감무쌍(勇敢無雙)한 기병대(騎兵隊)의 지원(支援)에 힘입어, 항우(項羽)를 몰아붙이자, 항우(項羽)B. C 202 년 패전(敗戰)으로 도주(逃走)하다가, 막다른 골목에서 자살(自殺)로 한() 많은 생을 마감하자. 농사(農事)를 짓던 농민(農民)출신(出身) 유방(劉邦) 양한(: BC 206 ~ AD 220)이 건국(建國)한 나라이다.

 

    ㉢ 무궁화(無窮花)황한(皇漢)”이라 지칭했다는 말은,

 

    ➊『 ()과 한()”의 나라꽃과 같다는 말이며, 곧 무궁화는 진한(秦漢)을 뜻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➋ 『고조선(古朝鮮)” 역시 무궁화(無窮花)는 곧 고조선(古朝鮮)을 뜻하며, 동방(東方)의 나라였다.

 

왜 갑자기 무궁화(無窮花)를 설명하는 걸까 궁금할 것이나, 사실(事實)은 사신단(使臣團)의 연행(燕行)기록(記錄) “한 구절(句節)”을 설명(說明)하기 위해서다.

 

==========================================================================

 

연행록(燕行錄) 중에서,

 

고평(高 平)이나 사령(沙 嶺) : 모두 북경(北京)으로 가는 사신(使臣)이 육로(陸路)로 갈 때 지나가는 곳의 지명(地名)이다. ‘우가 장(牛 家 莊)과 반산(盤 山)’의 사이에 있는데, 비가 오면 진흙 수렁이 되어 건너기가 몹시 어려운 곳이다.

 

고 평(高 平) : 정 유 조 천 록(丁 酉 朝 天 錄) <원전/번역/고전번역원의 것을 인용함>

大 野 通 蒲 類 : 큰 들은 포 류(蒲類)와 통하는데 / 長 墻 限 槿 原 : 긴 담장은 근원을 한계선 쳤네. 하였다.

 

이것을 조선사(朝鮮史) 입장에서 다시 번역(飜譯)해 보자.

 

大 野 通 蒲 類 : 큰 들은 포 류 蒲類 :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 현 신 강성(新疆省) 언 기(焉耆)와 이리(伊犁)” 근교(近郊)에 있는박사등호(博斯騰湖)”포 류 해(蒲類海)이다.와 통하는데 / 長 墻 限 槿 原 : 긴 담장(장성 : 長城)은 우리나라(무궁화)의 근원(根源)을 한계 하였네.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勿論), 이견(異見)도 있을 수 있겠으나, 여러모로 생각하고, 찾아보았으나 대륙조선(大陸朝鮮)의 입장(立場)에서 바로 보는 관점(觀點)은 역시 같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고평(高平)”이란 지명(地名)은 현 하 북 성(河北省) 북경(北京)의 동쪽지방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며, 이곳은 하서회랑(河西回廊)의 끝 돈 황(燉煌)’지대를 말하는 것이다.

 

더하여 위의 것을 고증(考證)할 수 있는 연행록(燕行錄) 기록(記錄)이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점을 상기(想起)해야 한다.

 

=========================================================================

 

(1) <연행기사(燕行記事) 상 정유년(1777, 정조 1) 1210> / 거류 하 (巨 流 河) = 주류 하(周流河) : 거류 하(巨流河)는 주류 하(周流河)의 또 다른 이름이다. 주류 하(周流河)에 다다랐다. 옛날에는 일명 거류 하(巨流河)라고 일컬었다. 하수(河水) 서북(西北)에 작은 성이 있는데, 거의 무너지고 옛터만 남았다. () 나라 때 쌓은 것이라고 하나 사실(事實)인지는 알 수가 없다. 수십(數十) 촌사(村舍)가 성()밖에 있고 하수(河水)의 너비는 혼 하(混 河)와 같은데, 하수(河水)가 얼어붙어 수레를 끌고 건널 만하였다. 봄여름에는 배로 간다고 한다. 하수(河水) 전후(前後) 10여 리가, 모두 가는 모래(()여서, 바람이 없는 날에도, 모래가 날아들어, 수레바퀴와 말 발자국 사이에, 안개같이 자욱하다. 흙의 성질이 본래 그러한가? <河之前後十餘里.皆是細沙.無風之日.亦自揚飛.車輪馬蹄之間.濛濛如霧.蓋土性本然耶>하였다.

 

하루 종일 황량한 변방에 티끌 모래가 걷히지 않았다. 교자(轎 子)의 창을 비단 천으로 막았으나, 가는 가루가 날려 쉽게 스며든다. 갈수록 더욱 괴롭다. : 盡日荒塞塵沙.不開遮紗轎窓.而細屑飄揚.自易透入.日覺去去愈苦.

 

(2) <김 정중(金 正 中)의 연행(燕行): 심양(瀋陽)에서 산해 관(山海關)으로>

 

곧 말을 재촉하여 나아가는데, 바람이 매우 사나워, 들판의 모래를 불어다가, 사람의 얼굴을 때리니, 눈 코, 입 속으로, 다 들어가서 지척 사이에 있는, 동행 인마(人馬)도 분간하지 못하겠다. / 卽催馬前進.風勢甚猛.吹野沙.撲人面.入眼中,鼻中,口中.咫尺之間.不辨同行人馬.

 

당시(唐詩)에서 이른바 : 唐詩所謂 / 되놈 땅의 모래가 얼굴에 휭휭 부니 : 胡 沙 獵 獵 吹 人 / 포로로 잡힌 한인들 마주쳐도 몰라보네. : 漢 虜 相 逢 不 相 見 之 句.하였다.

 

조선(朝鮮) 정조(正祖) 15(1791), 정사(正史) 김이소(金 履 素), 부사(副使) 이조원(李祖源), 서장관 심 능 익(沈 能 翼)이 연공(年貢)진하(陳賀)의 목적(目的)으로 연경(燕京)에 사행으로 갔을 때, 벼슬 없이 선비로 따라간 김 정중(金 正中)이 기록(記錄)한 것이다.

 

현재(現在)의 북경(北京)으로부터 산해 관(山海關), 심양(瀋陽)등지가 되놈 땅이고, 모래바람에 휭휭 부는 곳이라면, 이곳의 지세(地勢)는 특이지형(特異地形)으로 사막(沙漠)”지대였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며, 북경(北京 : 燕京)은 사막(沙漠)지대(地帶)를 통과(通過)해야 도달(到達)할 수 있는 곳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당시(唐詩)에서 이른바 : 唐詩所謂 / 되놈 땅의 모래가 얼굴에 휭휭 부니 : 胡 沙 獵 獵 吹 人 / 포로로 잡힌 한인들 마주쳐도 몰라보네. : 漢 虜 相 逢 不 相 見 之 句.라는 설명(說明),

 

오늘날의 사막지대(沙漠地帶) 여행(旅行)을 해보면, 똑같은 경험(經驗)을 할 수 있는데, 위의 시() 내용(內容)100% 이해(理解)할 수 있다.

 

곧 시야(視野)가 어두워지기 시작하면서, 먼 하늘에 새까만 구름과도 같은 것이 몰려오는데, 원주민(原住民)들은 이미 그 기미(幾微)를 알아차리고는 안전(安全)한 곳으로 대피(待避)를 하지만, 이방인(異邦人)들은 한 발 늦어, 피하려고 하지만 이미 늦어, 자신들이 있는 곳에서 몇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 태초(太初)의 어둠과도 같은 암흑(暗黑)이 지배(支配)하고, 얼굴과 머리를 천으로 완전히 밀봉한 것처럼 싸매지만, 모래바람은 조금이라도 틈이 있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들어온다. 그 악몽(惡夢)의 시간(時間)은 피할 수가 없으며, 바람이 자야만이 피할 수 있다.

 

바로 앞에 있던 언덕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멀리에 없었던 큰 모래언덕이 새롭게 만들어져 있다. 이것은 바람으로 인해 모래의 이동(移動)으로 만들어지는 현상이다. 포장(鋪裝)이 잘 된 도로(道路)는 이정표(里程標)만이 그것이 도로(道路)임을 표시할 뿐, 온통 사방(四方)이 모래뿐이다. 바람에 따라 모래는 이리 저리로 이동(移動)을 한다. 경험(經驗)하지 않고서는 이런 현상(現狀)100% 이해(理解)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반 초원(草原)지대나, 자갈이 많이 있는 사막(沙漠)에서도 큰 바람이 불면, 황사(黃沙)가 날리는 모습은 장관(壯觀)을 연출(演出)하는데, 그것은 악몽(惡夢)이다. 바로 옆의 사람도 알아 볼 수 없으며, 얼굴을 때리는 모래는 견딜 수 없다. 귓속, 콧속, 입안, 목 부위, 머리털 속등 등, 취약(脆弱)한 곳으로 스며드는 가는 모래는 정말 견디기 힘들다.

 

이러한 지방(地方)은 특이(特異)한 지형(地形)을 가진 곳으로, 산서(山西)성 북방(北方)이나, 하 북 성(河北省)이나, 요 녕 성(遼寧省), 길림성(吉林省), 흑룡강 성(黑龍江省)등지에서는 이러한 현상(現狀)을 발생(發生)시키는 근원지(根源地)는 없다. 사막(沙漠)”이라는 특이지형(特異地形)을 갖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이것은 역사서(歷史書)로 볼 때, 그 지형지리(地形地理)를 설명(說明)한 것으로 파악(把握)할 수 있으며, 옛 왕조(王朝)시대의 것을, 현재(現在)의 것으로 판단(判斷)치 말라는 것은 기본자세(基本姿勢)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사실(事實) 이러한 것들은 수차례에 걸쳐 소개(紹介)한 것이다. 하나하나의 의문(疑問)점을 파헤치고 나면, 또 의문(疑問).........? 계속되기 때문에 보통 답답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중단(中斷)한다는 것은 너무도 아쉬운 일이다.

 

 

올바른 조선사(朝鮮史)를 위해 무엇인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보면, 그곳에서 위안(慰安)을 찾는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예나 지금이나, 외침(外侵)에 대한 나라의 방비(防備)수단(手段), 다양(多樣)한 형태(形態)와 다양(多樣)한 방법(方法)이 있을 것이나, 근본(根本)이 되는 것은 사람 곧 장정(壯丁)이다.” 옛날 옛 적에도 외침(外侵), 내란(內亂)등의 위험(危險)한 사태(事態)에 대비(對備)하고자, 다양(多樣)한 형태의 모병(募兵)제도가 있었으며, 그것은 강제적(强制的), 강압적(强壓的) 성격(性格)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역사서(歷史書)를 보면,

 

당 고종(高宗) 용삭(龍朔) 2년 무인(戊寅), 좌 효 위(左驍衛)장군이며, 백주(白州)자사(刺史)였으며, 옥저(沃沮)도 총관(總管)으로 임명(任命)방 효 태(龐孝泰)” 는 출정(出征)시 그의 아들 열 셋과 함께 하였는데, 방 효 태(龐孝泰)()과 고구려(高句驪)()”사수(蛇水) 에서 전투(戰鬪)가 벌어져, “방 효 태(龐孝泰)와 함께 출전(出戰)한 그의 열 셋 아들이 모두 함께 전사(戰死)했다.고 적고 있다.

 

나라의 위기(危機)는 곧 종족(種族)의 위기(危機)와 같다. ()에 갔다 오지 못한 젊은 분들은 싫어하겠지만, ()에 입대(入隊)하여, 기본(基本)훈련(訓練)과 전투(戰鬪)훈련(訓練)을 거쳐, ()과의 전투(戰鬪)에서 80% 이상의 기량(技倆)을 유지(維持)하려면, 충분한 훈련(訓練)으로 숙달(熟達)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군()복무(服務)기간(其間)은 최소한 30개월 정도(程度)는 되어야 한다.

 

근대조선(近代朝鮮)시절에도 구분전(口 分 田)”이란 것이 있어,자손(子孫)이 없이 죽은 관원(官員)의 아내와, 부모(父母)가 모두 죽은 출가(出家) ()의 딸이나, 또는 전장(戰場)에 나가서 자손(子孫)이 없이, 죽은 군인(軍人)의 아내에게, 품등(品等)을 따라 나누어 주던 전지(田 地)를 말한다.

 

이렇듯 예나 지금이나 병역(兵役)국가(國家)와 종족(種族)을 지키기 위한 필수적(必須的) 조건이었다.』  

                                 20121213<글쓴이 : 문무(文武)>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러브 선 | 작성시간 12.12.14 결론을 잘 모르겠습니다. 무궁화가 어떻다는 말씀인지 잘 ?
  • 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12.14 당연한 의문입니다. 아직 결론을 맺지 못한 글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진과 한과 무궁화가 관계가 있을 것이란 것입니다. 차 후 결론을 낼 두 번째 글을 준비하겠습니다. 늘 건강하세요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