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해(北海) 땅이 조선(朝鮮) 땅이었다는 증거(證據)는!
○ 이왕지사(已往之事) 말이 나왔으니, “아라사(俄羅斯)”에 관한 ‘글’ 한 편을 더 쓰려한다. 전(前)에 올린 글 중에서 『소무(蘇武)가 억류(抑留)되었던 곳은 조선(朝鮮)이 득(得)한 땅이었다.』는 내용(內容)있는데, 이와 연결(連結)되는 것이며, 이것을 “대륙 사(大陸史)로 확인(確認) 및 고증(考證)”을 하는 것이다.
조선(朝鮮)의 사대부(士大夫)들이 기록(記錄)해 놓은 많은 자료(資料)들이, 『진실(眞實)을 밝혀 놓고 있다』는 것은, 현존(現存)하는 대륙(大陸)의 기록(記錄)들과의 확인(確認), 대조(對照) 결과(結果)에 의한 것이며, 이는 조선(朝鮮) 사대부(士大夫)들이 기록(記錄)을, 어느 정도 확신(確信)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물론(勿論) 이는, 그 기록의 진위(眞僞)여부(與否)와 밀접(密接)한 관계(關係)를 갖는다.
○ 현 대륙(大陸)의 넓고 넓은 땅! 이곳은 『조선의 요충지지(要衝之地)임이 분명(分明)하며, 수당【隋唐 : 조선(朝鮮)사를 왜곡(歪曲), 이동(移動)시킨 후, 그 빈자리에 채워 놓은 가공(架空) 또는 제후(諸侯)의 역사를 말한다. 】이전(以前)엔 황하(黃河)이북(以北)【하(河) 이북(以北)】지방이 대부분의 국세(國勢)를 가늠할 만큼, 풍 족(豊足)한 곳이었다.』는 것은, 엣 기록(記錄)이 확인(確認)해 주고 있다.』【 누누이 말씀드리는 것은, 오늘날의 잣대로 “수백(數百), 수천(數千)년 전(前)의 생활상(生活相)”을 재단(裁斷)하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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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국도지(海國圖志) 권 56 / 北 洋 俄 羅 斯 國 沿 革(原 無 今 補)편을 보면, 우선(于先) “원무금보(原 無 今 補)”라고 해 놓았다. 이는 “해국도지(海國圖志)에 원문(原文)이 없으니, 지금 보태다.”라고 하는 말이다. 【해국도지(海國圖志)를 보면, 이런 곳이 쾌 많다.】
〔아래 원문(原文)은 “해국도지(海國圖志) 56권 / 아라사(俄羅斯)” 편이며, (1),(2).......등으로 단락(段落)한 것은, 관심(關心)부분(部分)만을 발췌(拔萃)한 것이며, 알아보기 쉽게 구분(區分)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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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국도지(海國圖志) 원문(原文)> / 〔皇清四裔考:俄羅斯國,東北至海;南接喀爾喀,準噶爾,哈薩克,土爾扈特;西接西洋諸國. : 황청사예고 : 아라사(俄羅斯)국은, 동북(東北)으로 바다에 다다르고, 남(南)은 객 이객(喀爾喀). 준갈이(準喝爾). 합살 극(哈薩克). 토 이 호 특(土爾扈特)과 접하며, 서쪽은 서양(西洋)의 여러 나라와 접한다. 秦漢為渾庾,屈射,丁靈諸國,匈奴並有其地;唐為骨利幹國,居瀚海北,其地北距海;元時為阿羅思,吉利吉思,昂可新地,元史稱吉利吉思;南去大都萬餘裏.中略.元史謂即唐之骨利幹也;今名俄羅斯,即元阿羅思轉音也. : 진한(秦漢)때는 혼 유(渾庾), 굴 사(屈射), 정령(丁靈)의 여러 나라인데, 흉노(匈奴)가 그 땅을 병합하였다 : 당(唐)때는 골 리 간(骨利幹)국이며, 한해(瀚海)의 북쪽에서 살았고, 그 땅의 북쪽은 바다와 사이가 떨어져 있다. : 원(元)때는 아라사(阿羅思), 길 리 길 사(吉利吉思), 앙 가(昻可)의 새로운 땅인데, 원사(元史)에서 말하는 길 리 길 사(吉利吉思)이다. : 남쪽으로 대도(大都)는 만여(萬餘)리를 가야 한다. (중략). 원사(元史)에서 일컫는 즉 당(唐)의 골 리 간(骨利幹)이다. : 지금의 이름은 아라사(俄羅斯)이며, 곧 원(元)의 아라사(阿羅思)의 전음(轉音)이다.〕
● <南 去 大 都 萬 餘 裏 : 남쪽 대도(大都)는 만여(萬餘)리를 가야 한다.> 는 이 말은 곧 『당시의 대도(大都)가 오늘날의 하 북 성(河北省) 북경(北京) 또는 그 주위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대목이며, 『오늘날의 “북경(北京)을 대도(大都)라 하는 것은 조작(造作)된 것이다.” 』라는 강력(强力)한 증거(證據)다.
반대로『“현 북경(北京)=옛 대도(大都)”에서 북쪽으로 일만(一萬)리에, 아라사(俄羅斯)가 있었다.』는 것이므로, 현 북경(北京)=대도(大都)에서 “북쪽으로 일만(一萬)리”를 따라 볼라가 보면, 그곳은 『북극해(北極海)의 동시베리아 바다 속』이다. 이곳은 모르면 모르되, 인간이 그 추운 바다 속에서 살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신인(神人)들일 것이며, 외계(外界)에서 비행선(飛行船)을 타고 해저(海底)에 캡슐기지(基地)를 건설(建設)한 자(者)들이나 가능(可能)할 것이다.
이런 『인간(人間)의 역사(歷史)이기를 포기(抛棄)한, 반도사학(半島史學)』은 곧 무덤 속으로 하루라도 빨리 들어가야 한다. 현(現) <북경(北京)=베이징=대도(大都)>라는 공식(公式)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의 동쪽 신강 성(新疆省)지방에서나 가능(可能)한 이야기다. ‘모스크바’로부터 ‘일만(一萬)여리’는 신강 성(新疆省)의 준갈이(準喝爾) 분지와 타클라마칸 사막(沙漠)의 서쪽 주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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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一統誌曰:俄羅斯,在喀爾喀楚庫河以北,東南至格爾必齊河,北岸自外興安嶺之陰以東至海,與黑龍江所轄北境接界,西接西洋,西南至土爾扈特舊國及準噶爾界,北至海,去中國京師二萬餘裏,其貢道由恰克都,經喀爾喀地,進張家口,以達於京師,地在極北,古難詳考;秦漢之間,服屬匈奴史記·匈奴傳:冒頓單於,北服渾庾屈射,丁靈,鬲昆,薪梨之國. : 일통지에서 이르기를 : 아라사(俄羅斯), 객 이객(喀爾喀) 초 고 하(楚 庫 河) 이북(以北)에 있으며, 동남(東南)은 격이필제하(格爾必齊河)에 이르고, 북안(北岸)은 외(外)흥 안 령(興安嶺)의 북(陰)으로부터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며, 흑룡강(黑龍江) 북경지경의 접계를 관할하는 바이며, 서쪽은 서양(西洋)과 접하고, 서남(西南)은 토이 호 특(土爾扈特)구국(舊國)과 준갈이(準喝爾) 지경, 북쪽으로 바다에 이르는데, 중국(中國) 경사(京師)는 이만(二萬)여리를 가야 한다. 그 공도(貢道)는 ‘흡 극 도(恰 克 都)’로부터, 객이 객(喀爾喀)을 지나, 장 가구(張家口)로 나아가면, 경사(京師)에 다다르는데, 땅은 최 북쪽이다. 고난세고(古 難 詳 考) : 진한(秦漢)지간에, 흉노(匈奴)에 복속(服屬)되었는데, 사기(史記) 흉노 전(匈奴傳) : 모돈(冒頓 :묵돌) 선우(單于)가, 북쪽의 혼 유(渾庾)굴 사(屈射), 정령(丁零), 격곤(鬲昆), 신이(薪梨)국을 복속시켰다고 하였다〕
● 경사【京師 : 현 북경(北京)】로부터 “2만 여리(구-글 어스 직선거리)”는 현재(現在)의『동유럽의 “오스트리아 비엔나 또는 체코의 프라하, 독일의 베를린 정도며, 또한 세르비아 및 마케도니아 지방』이 된다. 따라서 위에서 설명(說明)하는 지명(地名), 하천(河川), 방위(方位), 산맥(山脈)등의 위치는 재조정(再調整)이 불가피(不可避)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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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直回紇西北三千裏,南依貪漫山地,夏沮洳,冬積雪,人皆長大,赤發,皙麵,綠瞳,以黑發為不祥,黑瞳者必曰陵苗裔也.男少女多,俗趫伉,氣多寒,雖大禾亦半,禾稼有禾粟,大小麥,青稷穄. : 곧바로 회흘(回紇)서북(西北)삼천(三千)리이며, 남(南)쪽 탐 만산(貪漫山)땅에 의지하였는데, 여름(夏)에는 축축하고, 겨울에는 눈이 쌓이며, 사람들은 모두 장대(長大)하고, 붉은 머리에, 윤곽은 확실하고, 초록눈동자(綠瞳)이며, 검정머리털을 가진 자는 자세하지 않은데, 검은 눈동자를 가진 자들은 틀림없이 “이능(李陵)”의 후손들이다. 남자는 적고, 여자는 많은데, 재빠르고 굳세며(趫伉), 기후는 추운 곳이 많아, 큰 벼(嘉禾)는 많을 지라도 또 절반정도며, 큰 벼를 심고 큰 조도 있으며, 크고 작은 보리, 청기장과 검은 기장도 있다.〕
● 『사람들은 모두 장대(長大)하고, 붉은 머리에, 윤곽은 확실하고, 초록눈동자(綠瞳)이며, 회흘(回紇) 서북(西北) 삼천(三千)리는, 우랄산맥 바로 서(西)쪽이며, 타타르(韃靼)지방이다.』
또 백성(百姓)들 중에는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黑瞳)를 가진 자(者)들”이 있었는바, 이들에 대한 것은 자세하지 않으나, 『전한(前漢)의 기 도위(騎都尉)였던 “이릉(李陵)”의 자손들이 틀림없다』는 설명이다. 이것은 당시 이릉(李陵)과 흉노(匈奴)와의 전쟁(戰爭)터를 추적(追跡)할 수 있는 중요(重要)한 단서(端緖)를 준다.
여기서 가정(假定)해 볼 수 있는 것은, 역사서(歷史書)상의 “오손(烏孫)과 본(本) 몽고인(蒙古人)과 달단(韃靼), 아라사(俄羅斯) 종족(種族)의 형상(形相)이 매우 유사(類似)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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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堅昆,本強國也,地與突厥等東至骨利幹,南吐蕃,西南葛邏祿。貞觀二十二年,入朝,帝以其地隸堅昆,麻隸燕,然都護、乾元中,為回訖所破,後語訛為黠戛斯,蓋回紇謂之若曰黃赤麵雲。又雲骨利幹處瀚海北,多百合,產良馬,其地北距海,去京師最遠;又北度海,則晝長夜短,日入烹羊,脾熟,東方已明,蓋近日入處也. : 견곤(堅昆)은, 본래 강국(强國)이다. 땅은 돌궐(突闕)등의 동(東)쪽으로부터 골 리 간(骨利幹)에 이르며, 남쪽은 토번(吐蕃), 서남(西南)은 갈라록(葛邏祿)이다. 정관(貞觀)22년에, 입조(入朝)하자, 제(帝)가 그곳의 땅 견곤(堅昆), 마(麻)를 연연(燕然)도호(都護)에 예속케 하였는데, 건원(乾元)중에, 회흘(回紇)이 소파(所破)되자, 뒤에 말이 변한 것이 ‘할 알 사(黠 戞 斯)’인데, 대개 회흘(回紇)과 같은데, 황적(黃赤)의 모습이다. 또 이르기를 골 리 간(骨利幹)은 있는 곳은 한해(瀚海)의 북쪽인데, 백합(白合)이 많고, 좋은 말이 나오는데, 그 땅의 북쪽은 바다와 떨어져 있으며, 경사(京師)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 또 북쪽 바다를 건너면, 낮은 길고 밤은 짧은데, 해가 떨어진 뒤 양(羊)을 삶으면【팽(烹)】, 지라【비(脾)】가 익을 때쯤이면, 동방(東方)이 이미(已) 밝아오는데, 대략 가까운 곳으로 태양(日)이 들어간다. 〕
(5) 按:唐時堅昆在西,骨利幹在東,皆今俄羅斯南境,今其人多赤發皙麵,綠瞳,蓋堅昆裔也. : 안(按) : 당(唐)나라 때의 견곤(堅昆)은 서(西)쪽에 있고, 골 리 간(骨利幹)은 동(東)쪽에 있었는데, 모두 지금 아라사(俄羅斯)의 남(南)쪽지경이며, 그 사람들은 붉은 머리가 많고 뚜렷한 윤곽과 녹색 눈동자(綠瞳)인데, 대개 견곤(堅昆)의 후손(裔)들이다.〕
(6)〔又按史記.匈奴傳:匈奴留郭吉遷之北海上.漢書.蘇武傳:匈奴徙武北海上無人處,使牧羝,武既至海上,廩食不至,掘野鼠,取草實而食之,仗漢節牧羊.單於弟於靬王弋射海上,王死,後八眾徙去.丁令盜武牛羊,武後窮厄,匈奴使李陵至海上,為武置酒設樂,武終不降. : 또 사기(史記)의 흉노 전(匈奴傳)을 생각해 보면 : 흉노(匈奴)가 머무르던 ‘곽 길(郭吉)’을 북해(北海) 위로 옮겼다. 한서(漢書) 소무(蘇武)전에 의하면 : 흉노(匈奴)가 소무(蘇武)를 사람이 살지 않는 북해(北海)위로 옮기고, 숫양(羝)을 기르도록 하였는데, 소무(蘇武)는 이미 바다위에 이르러, (흉노가 주는 음식을)먹지 않고 쌓아 놓기에 이르고, 구멍을 파 들쥐(野鼠)와 풀 열매를 얻어먹고 살며, 양을 치면서 한(漢)나라의 절개와 지조를 지켰다. 선우(單于)의 동생인 “간왕 익사”가 바다 위에 이르렀는데, 왕이 죽었다. 뒤에 여덟 무리들은 이동해 떠나갔다. 정령(丁令)이 소무(蘇武)의 소와 양을 도적질 하는 바람에, 소무는 뒤에 불행이 닥쳤는데, 흉노(匈奴) 사신(使臣) “이릉(李陵)”이 바다 위에 이르러, 소무(蘇武)를 위해 술과 음악을 주었으나, 소무(蘇武)는 끝내 항복하지 않았다.〕
(7)〔漢書·李陵傳:匈奴立衛律為丁令王,注雲:丁令,匈奴之別種.又蘇武傳註:丁零,即上所謂丁令耳,然則俄羅南境,即丁零故地,而白哈爾湖,即蘇武牧羝之北海上歟. : 한서(漢書) 이릉(李陵)전 : 흉노(匈奴)가 “위률”을 정령(丁令)왕으로 세웠다. 주(注)에서 이르기를 : 정령(丁令)은, 흉노(匈奴)의 별종(別種)이다. 또 소무(蘇武)전의 주(注)에서 이르기를 : 정령(丁零)은, 곧 위에서 이른 정령(丁令)이다. 아라사(俄羅斯)의 남쪽지경인데, 곧 정령(丁零)의 옛 땅이며, 백합이호(白 哈 爾 湖)는, 곧 소무(蘇武)가 숫양을 키우던 북해(北海) 앞이다.〕
※ 위 원문 (3) - (7)의 중요(重要)한 것은 『이릉(李陵)과 소무(蘇武)』에 관한 것이며, 또한 『당시의 아라사(俄羅斯)의 백성(百姓)들은 어떤 인종(人種)이었는가?』 하는 점이며, 더불어 『소무(蘇武)가 억류(抑留)되어 숫양을 기르던 북해(北海)변은 “조선(朝鮮)이 득(得)한 땅이다.』라는 사실(事實)이다. 전회(前回)에 한 번 소개(紹介)한 내용(內容)과 겹치는 것인데, 이번에는 “해국도지(海國圖志)”가 또 그 사실(事實)을 고증(考證)해 주고 있으니, 반가운 일임에 틀림이 없다. 그 강역(疆域)속으로 들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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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碩 齋 稿(석재고) 卷 之 九 / 海 東 外 史 / 飛 鴻 湖 【저자(著者) : 윤행임<尹行恁 : 본관(本貫) 남원(南原) 1762년(영조 38) - 1801년(순조 1)> / 정조(正祖) 6년, 1782 12월, 文科에 합격하다. 정조 7 1783년 4월, 예문관 검열, 규장각 대교가 되다. ○ 正祖가 직접 ‘碩 齋(석재)’라는 號(호)를 하사(下賜). 15년( 1791) 양주목사(楊 州 牧使), 16년 9월, 대사간, 10월, 이조 참의, 19년(1795) 돈녕부 도정(敦寧府 都正), 왕명(王命)으로 「李忠武公全書」를 편찬(編纂), 24년(1800년) 7월, 선혜청 제조, 8월, 이조 참판, 11월, 예조 참판, 홍문관 부제학, 제학, 규장각 직제학, 12월, 이조 판서가 되다. 순조(純祖) 1년 (1801년) 4월, 예조 판서, 5월, 벽파(僻派) 세력에 의해 전라도 관찰사로 밀려나, 부임한 지 5일 만에 강진 현(康 津 縣) 신지도(薪 智 島)로 유배(流配)되었다가, 9월 16일 유배지(流配地)에서 賜死(사사)되었다. 】고 전해지고 있다.
<원문(原文)텍스트> : 飛 鴻 湖(비 홍 호) /〔飛鴻湖在朝鮮鏡城府南九十里.其縱長六十餘里.其深六百餘尺.中有島曰看羊. : 비 홍 호(飛 鴻 湖)는 조선의 경성(鏡 城)부 남(南)쪽 90 리에 있다. 호수의 늘어진 길이(長)는 60 여리이며, 그 깊이는 6백여 척이고, 호수(湖水)의 가운데에 섬이 있는데 왈 “간 양(看 羊)”이라 한다. 洲渚平衍.無草樹之傅焉.沙潔如鋪練.抵北海僅一舍.蘓武者.平陵侯建之中子也.武帝天漢元年.以中郞將. : 물가(洲渚)는 평평하고 물이 넘친다. 그 섬에는 풀과 나무가 없다고 전해진다. 깨끗한 모래(沙 潔)를 익숙하게 편 것과 같다. 북해(北海)에 겨우 한 개의 집이 있을 뿐이다. “소 무(蘇 武)”라는 자는, 평 릉 후 “건”의 가운데 아들로 한(漢) 무제(武帝) 원년에 중랑장(中郞將)이다. 持節使匈奴.匈奴徙武北海上無人處牧羝.傳云匈奴徙武北海上.人不知匈奴彊域.徒指爲坎維之大澤也. : 지절사절로 흉노(匈奴) 땅에 갔으나, 흉노(匈奴)는 “소무”를 아무도 살지 않는 북해(北海) 땅으로 보내어 숫양을 키우게 옮겼다. 전해오는 말로는 흉노(匈奴)가 “소무”를 옮긴 북해(北海)위는 흉노의 땅인지를 아무도 모르는 곳이었다. “소무(蘇武)”를 옮긴 곳은 감유의 큰 못(대 택)이다. 嗟乎.始得之朝鮮.不亦奇哉.湖之名以鴈書也.島因牧羝而稱焉.然其俗鹵樸.不能載之書策.故或有疑之者. :『오호라! 조선(朝鮮)이 처음 얻은 곳이다. 』또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호수의 이름은 “안서(鴈 書)” 에 있다. 섬으로 인하여 숫양을 키우게 된 것이라 말한다. 그 풍습은 황량한 생긴 자연 그대로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司馬氏匈奴傳曰.匈奴東接濊貊朝鮮.於是匈奴北抵朝鮮可知也.遼東志所謂木郞古.卽其墟云. : ‘사마’ 씨의 흉노(匈奴)전에 따르면, 흉노의 동쪽은 예맥(穢貊)조선(朝鮮)과 접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에 있어 흉노(匈奴)의 북쪽엔 조선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동 지(遼 東 志)에서 말하는 소위 “목 랑 고”이며, 곧 그 터이다.〕라 하였다.
● 조선(朝鮮)의 사대부(士大夫)가 기록(記錄)한 이런 사실(事實)이, “210여년 후(後)!” 『조선(朝鮮)땅을 모두 빼앗기고, 조선사(朝鮮史)를 몽땅 잃어버린 우리에게, 조선사(朝鮮史)를 잊어버린 우리들에게, 조상(祖上)의 ‘얼과 혼(魂)’을 잃어버리고 방황(彷徨)하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알려주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➊ 경성(鏡 城)지방은 반도(半島)가 아닌 대륙(大陸)의 북해(北海)지방(地方)에 있었으며, 그곳은 아라사(俄羅斯) 북(北)쪽의 북해(北海)라는 사실(事實)이며,
➋ 북해(北海)의 동(東)쪽은 예맥(穢貊)조선(朝鮮)과 접(接)해 있었다는 사실(事實)이다. 이것은 또 “조선왕조(朝鮮王朝)”안에는 많은 여러 나라(諸國)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중조【中朝 : 조선(朝鮮)천자(天子)의 조정(朝廷)】의 통치(統治)를 받는 ‘제후(諸侯)조선(朝鮮)’국(國)이었다는 것이다.
➌ 근대조선(近代朝鮮)의 유학자(儒學者)들의 많은 문집(文集)속에 등장(登場)하는 『대막(大漠). 막북(漠北). 사적(沙磧). 한적(寒磧). 사장(沙場). 사막(沙漠). 적중(磧中). 북해(北海). 한해(瀚海)』등등에 대해 이해(理解)를 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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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도위(騎都尉) “이릉(李陵)”과 중랑장(中郞將) “소무(蘇武)”』에 대한 것은 “전회(前回)”에 설명(說明)한 것이나, 위에서 이미 나열(羅列)되어 있으니, 참고(參考)해 보면 좋을 것 같아 덧붙입니다.
● 前漢書(전한서) 흉노 전(匈奴傳) 원문(原文)
〔其明年,漢使貳師將軍廣利以三萬騎出酒泉,擊右賢王於天山,得胡首虜萬餘級而還.匈奴大圍貳師將軍,幾不脫.漢兵物故什六七.漢複使因杅將軍敖出西河,與彊弩都尉會涿塗山,毋所得.又使騎都尉李陵將歩騎五千人,出居延北千餘里,與單于會,合戰,陵所殺傷萬餘人,兵及食盡,欲解歸,匈奴圍陵,陵降匈奴,其兵遂沒,得還者四百人.單于乃貴陵,以其女妻之.後二歳,複使貳師將軍將六萬騎,歩兵十萬,出朔方.彊弩都尉路博德將萬餘人,與貳師會.遊擊將軍說將歩騎三萬人,出五原.因杅將軍敖將萬騎歩兵三萬人,出鴈門.匈奴聞,悉遠其累重於余吾水北,而單于以十萬騎待水南.與貳師將軍接戰(중략) : 그 이듬해(B. C 99), 한(漢)에서는 貳 師(이사) 장군(將軍) 이광리(李 廣 利)에게 3만 기를 이끌고 주천(酒泉)을 나가 천산(天山)에서 우현 왕을 공격케 했다. 호(胡)의 수급과 포로 만 여 급을 얻고 돌아오는데, 흉노(匈奴)가 대군(大軍)으로 ‘이사’ 장군을 포위하니, 거의 빠져나오지 못해 한 병(漢 兵)의 열 중 여섯, 일곱이 죽임을 당했다. 한(漢)은 다시 인우장군(因 杅 將 軍) 공 손 오(公 孫 敖)에게 서하(西 河)에서 나오게 하니 강노 도위(彊 弩 都尉)와 탁도 산에서 합류했으나 소득은 없었다. 또 기 도위(騎 都尉) 이릉(李 陵)에게 보기(歩騎) 5천 명을 이끌게 하니 거연(居 延)을 나와 북쪽으로 천여(千餘)리를 갔는데, 선우와 만나 접전(接戰)하여 1만여 명을 살상했다. 병력과 군량이 다하자 흩어져 돌아오고자 했으나, 흉노가 이릉(李陵)을 포위하자 이릉(李陵)은 흉노에 투항했다. 마침내 그 군사(軍士)들은 거의 전멸(全滅)하고 살아서 돌아온 자는 4백 명이었다. 선우는 <이릉>을 귀(貴)하게 여겨 자신의 딸을 처로 주었다. 그 2년 뒤(B. C 97), 다시 이사 장군(貳 師 將軍)에게 6만 기와 보병 10만을 이끌고 삭방(朔方)을 나오게 했다. 강노도위(彊 弩 都尉) 로 박 덕(路 博 德)은 1만여 명을 이끌고 이 사 장군과 합류했다. 유격장군(遊擊將軍) 한열(韓 說)은 보기(歩騎) 3만을 이끌고 오원(五 原)을 나오고, 인우장군(因 杅 將 軍) 공 손 오(公 孫 敖)는 1만 기와 보명 3만을 이끌고 안문(鴈 門)을 나왔다. 흉노(匈奴)는 이 소식을 듣고 그 누 중【累 重-처자식과 재산】을 모두 멀리 여 오 수(余 吾 水) 북쪽으로 옮기고, 선우는 십만 기를 이끌고 여 오 수 남쪽에서 기다렸다가 이 사 장군과 접전했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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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한서(前漢書) 무제(武帝)기(紀) 원문(原文)
〔夏 五 月 , 貳 師 將 軍 三 萬 騎 出 酒 泉 , 與 右 賢 王 戰 于 天 山 , 斬 首 虜 萬 餘 級 。 又 遣 因 杅 將 軍 出 西 河 , 騎 都 尉 李 陵 將 步 兵 五 千 人 出 居 延 北 , 與 單 于 戰 , 斬 首 虜 萬 餘 級 。 陵 兵 敗 , 降 匈 奴 : 여름 5월, 이 사 장군 3 만기가 주천(酒泉)을 나와 우현 왕과 천산(天山)에서 접전을 벌여 흉노(匈奴) 만여 기를 목 베었다. 또 인우(因 杅)장군은 서하(西 河)를 나가고, 기 도위(騎都尉) “이릉(李陵)”은 보기(步騎)오천과 함께 거연(居延)의 북쪽으로 나가 선우와 전투를 벌여 만여 급의 흉노 목을 베었으나 “이릉(李陵)” 군대가 패하여 흉노(匈奴)에게 항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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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漢 書 卷 五 十 四. 李 廣, 蘇 建 傳 第 二 十 四 의 <이릉(李陵)>편을 보면 당시(當時)의 상황(狀況)이 적나라하게 기록(記錄)되어 있는데,
또한 〔於 是 族 陵 家, 母 弟 妻 子 皆 伏 誅 。 隴 西 士 大 夫 以 李 氏 為 愧. : “이릉(李陵)” 집안의 모(母), 제(弟), 처자(妻子 : 아내와 자식)가 모두 엎드려 죽음을 당했다(살해당했다). 롱서(隴 西) 사대부(士大夫) 이(李)씨가 부끄러움이 되었다.〕고 하였는데, 당시(當時)의 사회상(社會相)이란, 출정(出征)한 장군(將軍)이 적(敵)에게 항복(降伏)했다는 것은 곧 온 집안이 폐가(廢家)된다는 의미다. 모두 몰살(沒殺)당을 당했다는 뜻이다. 또한 항복(降伏)치 않고 패주(敗走)하야 돌아온 장군(將軍)은 대부분 하옥(下獄)되고, 재산(財産)은 몰수되었으며, 집안사람들은 노예(奴隸)나 관비(官婢)가 되며, 뒤에 부대를 이끌고 적(敵)을 치라는 기회(機會)를 얻는 것은 그나마 다행(多幸)이었다.
역사(歷史)공부(工夫)! 더하여 조선사(朝鮮史)를 공부(工夫)하고 연구(硏究)할 때, 당시(當時)의 시대상(時代相)과 사회상(社會相)을 아는 것은 필수적(必須的)이다. 현대(現代)의 것으로 인식(認識)한다는 것은 큰 “오류(誤謬)를 100% 품에 안고 간다.”는 사실(事實)이다.
〔陵 在 匈 奴 二 十 餘 年 , 元 平 元 年 病 死 ; 이릉(李陵)은 흉노에게 항복한 후 20 여년, 원 평 원년(元年)에 병으로 죽었다.〕는 것이 말미(末尾)의 기록(記錄)이다.
개인적(個人的)으론 무척 동정(同情)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역시 피눈물 나는 한(恨)많은 인생(人生)이었을 것이다! 롱서(隴 西) 사대부가(士大夫) 이가(李家)!
온 집안의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살해(殺害)되었다. 그 소식은 그대로 “흉노”와 함께 살고 있었던 “이릉(李陵)”에게 전해졌다. 그의 심정(心情)은 어떠했을까?
불행(不幸)중 다행(多幸)으로, 그는 선우(單于)의 여식(女息)을 아내로 맞아 많은 수의 자식(子息)을 낳아, 그 자식이 또 자식을 낳고 하여, 아라사(俄羅斯)지방에 흑발(黑髮)과 흑동【黑瞳 : 검은 눈동자】을 가진 집단(集團)을 이루었다는 사실(事實)에 저승에서나마 위안(慰安)을 삼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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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 소 무 시 與 蘇 武 詩>
〔이릉(李陵)이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실상(實狀)은 후대(後代)인이 썼다는 것이 정설(定說)이다.〕
良時不再至,離別在須臾,屛營衢路側,執手野誠選 : 좋은 시대는 다시 오지 않으니, 이별은 순간에 있다. 네거리(갈림길)에서 망설이다가, 손을 잡고 들판에서 머뭇하네. 仰視浮雲馳,奄忽互相踰,風波一失所,各在天一隅 : 우러러 하늘에 뜬 구름 달려가니, 문득 서로 지나쳐버렸네. 풍파에 한번 장소를 잃어버리니, 각 하늘의 모퉁이에 있게 되었네. 長當從此別,昔復立斯須,欲因晨風發,送子以賤軀 : 마땅히 여기서 헤어져야 할 것인데, 오래 동안 다시금 여기 서있네. 새벽바람(晨風)이 불어올 때 틈을 내어, 이(이릉 자신을 칭) 천한 몸(賤軀)으로, 그대(소무를 칭)를 보냈으면 하네.
嘉會難再遇,三載爲千秋,臨河濯長纓,念子誦悠悠 : 아름다음 재회는 다시 오기 어렵구나. 3년(三 載)이 천추 같으리라. 강변에서 눈물 젖은 갓 끈을 씻고, 그대를 생각하니(念)서글프기 한이 없다. 遠望悲風至,對酒不能酬,行人懷往路,何以慰我愁 : 멀리서 슬픈 바람(悲風)이 오는 것을 바라보며, 함께 술을 권할 수 없으니. 떠나가는 사람도 가는 길을 생각하며, 무엇으로 나의 시름을 위로할까. 獨 有 盈 觴 酒, 與 子 結 綢 繆 : 홀로 여기 잔에 술이 가득 있으니, 그대와 함께 맺음을 오래도록 유지해보세.
旭手上河梁,遊子暮何之,徘徊蹊路側,祇( )祇( )不能辭 : 손을 잡고 강의 다리에 올라, 떠나는 그대는 저녁 무렵 어디로 가는가. 길가를 배회하면서, ( )떠날 수가 없다(不 能 辭). 行人難久留,各言長相思,安知非日月,弦望自有時 : 행인(나그네)오래 머물 수 없으니, 각 자 서로가 오래 생각하자고 말한다. 해와 달이 아니지만 어떻게 알겠는가, 현 망(반달과 보름달)이 스스로 때가 있는 것을 努 力 崇 明 德, 皓 首 以 爲 期 : 노력하여 밝은 덕을 높이면, 머리가 희어도(백발), 만나기를 약속하자(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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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랑장(中郞將) “소무(蘇武)”는?
『소 무 (蘇 武)』는 전한(前漢) 무제(武帝) 때의 중랑장(中郞將)으로, 무제(武帝)의 명(命)으로 부절(符節)을 갖고 흉노(匈奴)에게 사신(使臣)으로 간 인물(人物)이다. 흉노(匈奴)선우는 사신(使臣) “소무(蘇武)”를 항복(降伏)시키고자 가두고, 음식도 주지 않았다고 한다. “소무(蘇武)”는 가죽으로 된 담요를 뜯어 씹어 먹으며, 눈(雪)을 먹으며 항복(降伏)치 않자 선우(單于)는 “소무(蘇武)”를 “북해(北海)”로 보내어 숫양을 키우게 하고는 말하기를 “숫양이 새끼를 낳으면 보내주겠다.”고 하였다. 한(漢) 무제(武帝)가 죽고, 소제(昭 帝)때에 조정(朝廷)에서 흉노(匈奴)와 화해(和解)를 하게 되자, 한(漢)나라 조정(朝廷)에서는 “소무(蘇武)”를 보내라고 사신(使臣)을 보냈으나 흉노(匈奴)는 “소무(蘇武)”는 죽었다고 통보(通報)했는데, 당시 부관(副管)이었던 자가 한(漢)나라 사신(使臣)에게 귀 뜸을 해줘, 결국 “소무(蘇武)”는 석방(釋放)된다.
“소무(蘇武)”는 무려 19년간이나 흉노(匈奴) 땅에서 유배(流配)생활을 한 것이다. 그가 한(漢)나라로 돌아오자 한(漢) 조정(朝廷)에서는 그에게 “전 속 국”으로 임명(任命)하고 많은 은혜(恩惠)를 베풀었으며, 그는 충신(忠信)으로 대변(代辨)되는 인물(人物)이 되었다.
● 여기서 “소무(蘇武)”가 한(漢) 무제(武帝)의 명(命)으로 흉노(匈奴) 땅에 사신(使臣)으로 간지 1년 후(後) 쯤에 “이릉(李陵)”이 접전(接戰) 끝에 항복(降伏)하게 된다. 이후 18년이 지난 후 “소무(蘇武)”가 석방(釋放)될 때, 선우(單于)의 사위로 “우 교 왕(右 校 王)”이었던 “이릉(李陵)”이, 위의 시(詩)를 써 “소무(蘇武)”에게 준 것이라 전해지고 있으니, 후대(後代)인이 쓴 것이란 것이 정설(定說)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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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朝鮮)의 변방(邊方), 경성(鏡城)부 관할(管轄)내에 “북해(北海)”가 있었다거나, 또는 “소무(蘇武)”가 억류(抑留)생활(生活)을 하며, 숫양을 길렀던 곳, 그것은 조선(朝鮮)강역(疆域)의 광범위(廣範圍)함을 다시 일깨워 주는 기록(記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전한서(前漢書)등에서는, 당시(當時) 거연 성(居延城)을 나가 그 북쪽으로 일천여리를 갔다고 했을 때, 그곳은 “고비사막(沙漠)을 지나, 알타이산맥(山脈)과 항 애 산맥(杭愛山脈) 사이의 외몽골 최 서(西)쪽 땅이다.”
흉노(匈奴)선우(單于)는 그곳의 서북(西北)과 북(北)쪽에서 남진(南進) 및 동남 진(東南 進)한 것이며, 패한 “이릉(李陵)”은 이들을 따라 그들의 아장(牙帳)으로 갔을 것이다. 이러한 곳들이 모두 “조선(朝鮮)의 땅이었다.”는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일깨워주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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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전(原典)으로 보는 “조선강역(朝鮮疆域)”은 “대륙(大陸)의 동서남북(東西南北)지대(地帶)를 모두 포용(包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선사(朝鮮史)”를 반도사학(半島史學)이나 식민사학(植民史學)으로부터 “보호(保護)하고, 찾는 일”은, “국수주의자(國粹主義者)나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나 극우주의자(極右主義者)”가 될 수 없는, 오직 “조선인(朝鮮人)의 후예(後裔)”이기 때문에 가능(可能)한 것이다.
이러한 일은 반도(半島)의 토착민(土着民) 또는 이주민(移住民)과는 관련(關聯)이 없는, 오직 “조선인(朝鮮人)의 후예(後裔)라는 믿음과 정신(精神)”이다.
사실 이제 와서 “과거(過去) 조선(朝鮮)의 영역(領域)을 찾는다고 해서 무슨 이득(利得)이 있느냐?” 하는 질문(質問)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국민(國民) 각자(各者)의 자존심(自尊心)과 조상(祖上)의 혼(魂)을 되찾는 일이다. 언제까지 “이등국민(二等國民)”의 모욕적(侮辱的)인 언사(言辭)를 들은 것이며, 깡그리 부숴 진 자존심(自尊心)을 찾을 수 있겠는가? 또 하나 언젠가가 될지는 모르나, 한 번의 기회(機會)는 분명(分明) 우리들 곁으로 다가올 것이며, 그때를 위한 초석(礎石)을 다듬는 일이다.
○ 조선(朝鮮)의 선인(先人)들을 위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時間)을 갖자!
2013년 06월 22일 <글쓴이 : 문무(文武)>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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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러브 선 작성시간 13.06.22 조선은 4해로 둘러쌓여 있으며 북해는 빙해, 북극해를 말합니다. 결코 카스피해, 아랄해, 혹은 시베리아의 바다같은 벌판을 말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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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6.22 그럴 것입니다. 한해의 북쪽에 북해가 있다고 했으니, 북해란 분명 러시아의 북쪽 바다를 뜻한다고 보아집니다. 이곳까지도 조선의 영역이었다는 이야기지요. 조선이 득한 땅이란 이야기입니다. 흑해나 카스피 해 또는 아랄 해는 북해가 결코 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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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망국의 한 작성시간 13.06.22 여기가 말갈, 실위,여진의 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