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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의 조선사 해설

연경(燕京)이 정말 현(現) 북경(北京)일까?

작성자문 무|작성시간13.10.05|조회수686 목록 댓글 30

 

                                연경(燕京)이 정말 현() 북경(北京)일까?

 

   ○ 연경(燕京)! 조선사(朝鮮史)에 관심(關心)을 갖고 있는 사람 중에서, 아마도 연경(燕京)”을 모르는 분은 없을 것 같은, 수없이 등장(登場)하는 단어(單語)이며, 지명(地名)이며, 옛 연()나라의 왕도(王都)였다.

 

     그렇다면 연()나라는 언제, 어떻게 생겨난 나라일까? 부터 거슬러 올라가 봐야 할 것 같다. ()나라는 주 무왕(周武王)이 제후국(諸侯國)으로 봉()한 나라로, 제후국(諸侯國)의 왕도(王都)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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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기(史記) 주 본기(周本紀) 서두(序頭) 원전(原典) 기록(記錄)을 보자.

 

     〔周 后 稷 名 棄 其 母 有 邰 氏 女 曰 姜 原 姜 原 為 帝 嚳 元 妃. 中略. : () 후 직(后稷), 이름은 기()이다. 그의 어머니는 유 태 씨(有邰氏)인데, 강원(姜原)이라 한다. 강원(姜原)은 제곡고신帝嚳高辛 : 고구려(高句驪)의 선조(先祖).의 원비元妃 : 정실(正室) 곧 정처(正妻)를 말한다.이다. 중략. 帝 舜 曰 黎 民 始 飢 爾 后 稷 播 時 百 穀 封 棄 於 邰 號 曰 后 稷 別 姓 姬 氏 后 稷 之 興 在 陶 唐 夏 之 際 皆 有 令 德 : ()임금이 이르기를 : (: 후 직(后稷)이다.)는 여민(黎民)으로 기()를 태()에 봉하고, 호칭을 후 직(后稷)’이라 하고, ()희 씨(姬氏)”로 하였다. 후 직(后稷)이 일어나, 도당(陶唐), (), ()사이에 있었으며, 모두 어진 덕이 있었다.

 

   ※ ()는 제곡고신(帝嚳高辛)의 아들 후 직(后稷)”이 선조(先祖), 고구려(高句驪) 역시 제곡고신(帝嚳高辛)씨로부터 유래(由來)한다. 같은 ()”성으로 같은 아버지() 자손(子孫)이다.

 

     〔武 王 即 位 太 公 望 為 師 周 公 旦 為 輔 召 公 畢 公 之 徒 左 右 王 師 脩 文 王 緒 業. : 무왕(武王)이 즉위(卽位)하여, 태공 망을 스승()으로, 주공(周公) ()을 보(), 소공(召公)과 필공(畢公)을 도() 좌우 왕으로 하고, ()는 문왕(文王)이 시작한 일을 맞도록 하였다. 중략. 封 召 公 奭 於 燕 : 소공석(召公奭)을 연에 봉하였다.하였는데,

     그 주석(註釋)편에 설명(說明)하기를,

    〔正 義 封 帝 堯 之 後 於 薊 封 召 公 奭 於 燕 : 정의(正義) : 제요(帝堯)의 뒤에 계()를 봉했는데, 소공석(召公奭)을 연()에 봉했다. 水 經 注 云 薊 城 內 西 北 隅 有 薊 丘 因 取 名 焉 : 수경 주(水經注), 계성(薊城)의 서북(西北)쪽 모퉁이 언덕에 계구(薊丘)가 있어, 이를 취하여 이름이 되었다고 하였다. 括 地 志 云 : 「燕 山 在 幽 州 漁 陽 縣 東 南 六 十 里 徐 才 宗 國 都 城 記 云 周 武 王 封 召 公 奭 於 燕 地 在 燕 山 之 野 故 國 取 名 焉: 괄지 지(括地志)에서 이르기를 : 연산(燕山)은 유주(幽州) 어 양(漁陽)현 동남(東南) 60리에 있다. 서 재종(徐才宗)의 국()도성(都城)기에서 이르기를, () 무왕(武王)이 소공석(召公奭)을 연()에 봉했는데, 땅이 연산(燕山)의 들()에 있어, 고로 이것을 취하여 나라이름이 되었다.周 封 以 五 等 之 爵 燕 二 國 俱 武 王 立 因 燕 山 薊 丘 為 名 其 地 足 自 立 國 : () : ()나라에서 5 등급의 작위가 있어 봉하였는데, ()와 연()은 함께 주 무왕(周武王)이 세웠으며, 연산(燕山), 계구(薊丘)로 인해 이름이 되었고, 그 땅을 뿌리로 자립하여 나라가 되었다. 薊 微 燕 盛 乃 并 薊 居 之 薊 名 遂 絕 焉 : ()는 쇠하고, ()은 성하여, 이에 계()는 어울려 살아, ()의 이름은 끊어지기에 이르렀다. 今 幽 州 薊 縣 古 燕 國 也 : 유주(幽州) 계 현(薊縣), 옛 연 국(燕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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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라는 기원전 1046년부터 기원전 222년까지 존재했던, 나라로 시황제(始皇帝)에 의해 문을 닫게 된다.

      백과사전(百科事典)에서는 : 이 연()나라의 왕성(王城)이 바로 연경(燕京)’이며, 오늘날의 북경北京 : 베이징) 이라고 한다. 연경(燕京), ()나라 시대에 남경(南京)으로 개명(改名)하였으며, ()나라의 남쪽 수도가 되었다. ()나라 시대에 이름을 중도(中都)로 고쳤으며, ()나라의 중앙 수도로 결정되었다. ()나라에 점령(占領)된 이후에는 연경(燕京)으로 회귀(回歸)하였으며, 북쪽 자리에 대도(大都)가 세워진 이후(以後)에는 이 명칭(名稱)으로 불렸다. ()나라 시대에 북경(北京)으로 개명(改名)하였으며, 이후 현재(現在)까지 이름을 유지(維持)하였다.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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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렇다면 아래의 조선사(朝鮮史) 기록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위에서 설명(說明)연경(燕京)”이 될 수 없는 자격미달(資格未達)연경(燕京)”이 탄생(誕生)된 것이며, 이는 본래(本來)의 연경(燕京)과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것이다. (), (), (), (), ()의 왕도(王都)라는 연경(燕京)은 옛 유서(由緖)깊은 연경(燕京)”이 될 수 없는, “짝퉁일 뿐이다.

 

   ※ 자 금 쇄 술(紫 禁 瑣 述) / 을묘 년(1855, 철종 6) 1222(경술) 서 경순(徐 慶 淳 : 1804 -미상)

 

      〔燕京不過北方一隅之地.山川則醫閭,渤海亦是支流餘脈而已. : 연경(燕京)은 북방(北方) 한 모퉁이 땅에 불과하고, 산천은 의무려산, 발해(渤海)로서 역시 지류(支流)와 여맥(餘脈)일 뿐이다.人物則雖有堯湯之聖.契之佐.一着黑毳帽馬蹄袖.則餘無足觀矣. : 인물로 말하면 요()()()() 같은 성군(聖君)과 고()()()() 같은 현신(賢臣)이 있었지만, 한번 흑취모(黑毳帽)와 마제수(馬蹄袖)를 착용하였으니, 그 나머지는 더 볼 것이 없다.하였으며,

 

      〔荒沙白磧千里曠野之中.仞築甓垣而周圍之.曰城堞也.高起亭閣殿宇而雕彩之.曰宮闕. : 황 막(荒 邈)한 사막, 흰 자갈뿐인 천리(千里) 광야(曠野) 가운데에, 높직이 벽돌담을 쌓아서 빙 둘러 놓고는, 성첩(城堞)이라 하고, 높다랗게 정각(亭閣)전우(殿宇)를 세워 조각과 단청을 하여, 궁궐이라 한다. 尊者卑者.難辨等威.幼者長者.莫分冠童.飮食必以豬油爲味.臭惡不堪嚥.衣服必以氈裘反着.貌惡不堪視. : 관리(官吏)는 높은 자인지 낮은 자인지, 등위를 분변하기 어렵고, 민간의 아이와 어른은 관동(冠童)을 분별할 수 없으며, 음식은 반드시 돼지기름으로 조미를 하므로, 냄새가 고약해서 먹을 수 없고, 의복은 반드시 털 갖옷으로, 입은 모양이 흉해서 볼 수가 없다. 婚喪之用樂.先王之禮.掃地無餘.語音之侏.蠻夷之俗.根於天性. : 혼사와 상사에 풍악을 사용하니, 선왕(先王)의 예는, 쓸어버린 듯 남은 것이 없고, 알아들기 어려운 웅얼거리는 말소리는, 만이(蠻夷)의 풍속에, 천성(天性)이 박혔기 때문이다.

 

   ○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기원전(紀元前) 1046년부터 계산(計算)해 본다면, 1500 여년을 나라의 서울로 있었던 곳이 연경(燕京)”이다. 그런데 말이다. 위의 설명(說明)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 천리(千里)나 되는 광야(曠野) 한 복판에, 벽돌담을 길게 쌓아놓고, 성첩(城堞)이라 하고,

 

      ㉯ 정각(亭閣)전우(殿宇)를 쌓아 놓고는 궁궐(宮闕)이라 하였다는 이러한 설명(說明)들은 가소로운 것이다. 어찌 이러한 곳이 유서(由緖)깊은 연경(燕京)”이 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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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연경(燕京)은 곧 북경(北京)이다. 그러나 짝퉁이다.나는 이렇게 주장(主張)한다.

 

      물론 현재(現在)의 북경(北京)을 말하는 것이다. 이 북경(北京)은 조선왕조(朝鮮王朝 : 통칭)북경(北京)”이며, “연경(燕京)”은 결코 될 수 없다는 점을 주장(主張)하는 것이다.

 

     위 글 (1)에서 조선사(朝鮮史)에 포함(包含)될 수 있는 유학자(儒學者)의 문집(文集)속의 기록(記錄)을 보았다. 이번에는 청()나라의 백성(百姓)이었던 장문도(張問陶)”, 자신의 나라 수도(首都)를 읊은 노래를 보면서, “북경(北京)”은 어디에 있어야 하며, 위 글(1)에서 말한 설명(說明)과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를 판단(判斷)해보자. 특히 지형적(地形的)인 특색(特色)...........!

 

   ○ <蘆 溝 (노구) / 장문도(張問陶)> 1,784년 장문도(張問陶)22살 때 처음 북경(北京)에 왔을 때 지었다고 전하고 있다.

 

      蘆 溝 南 望 盡 塵 埃 : 노구에서 남쪽을 보니 먼지가 가득하네.

      木 脫 霜 寒 大 漠 開 : 차가운 서리 내려 나뭇잎 떨어지니 대막(大漠)이 열린다(펼쳐진다).

      天 海 詩 情 驪 背 得 : 천해를 돌아다니며 나귀 등에서 시를 얻는다.

      關 山 秋 色 雨 中 來 : 관산의 가을 색깔, 빗속에서 오는데. (中略)

 

  【노 구 교(盧溝橋) : 북경(北京) 교외에 있으며, ‘광안 문서남(西南) 15-16km에 있다고 함. 영정(永定)하의 양안(兩岸)을 가로 질러 세워 놓았다고 한다.

 

     장문도(張問陶)가 처음 북경(北京)을 온 때가 서력(西曆) 1,784년이라고 한다. 당시(當時) 장문도(張問陶)가 북경(北京) 주위를 둘러보면서 쓴 글이라고 할 때, 노구(蘆 溝)교 다리 위에서 남()쪽을 바라보니, 차가운 서리가 내려서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고, 대 사막(沙漠)이 펼쳐진다.고 표현(表現)을 했다는 것은, 그의 눈으로 봤다는 것이며, 그가 있던 북경(北京)은 대막(大漠)의 한 가운데 이거나, 대막(大漠)의 북()쪽 막북(漠北)이었거나, 둘 중의 하나였을 것이니, ()쪽으로 대막(大漠)이 펼쳐져 있다고 하였으니 말이다.

 

      이것은 ()”나라 백성(百姓)이 직접(直接) 쓴 글이다. 더 무엇을 말해야 할까? 조선사(朝鮮史)는 누군가에 의해, 고의적(故意的)으로 조작(造作)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며, 당시(當時)북경(北京)”은 현재(現在)의 북경(北京)이 될 수 없다는 명명백백(明明白白)한 증거(證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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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잃어버린 역사(歷史)!

       잊혀 진 역사(歷史)!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으로 얼룩진 역사(歷史)!

       후손(後孫)들에 의해 비참(悲慘)하게 짓 밟혀진 역사(歷史)!

       스스로에 의해,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지 못한 역사!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준 역사(歷史)!

       이것이 바로 조선사(朝鮮史)!

 

   지금도 후손(後孫)들에 의해 밟히고, 밟히는 것은 진행(進行)형이다. “를 부정(否定)하고, “나의 부모(父母), 증조(曾祖), 고조(高祖)”를 부정(否定)하는 나의 역사(歷史)”가 존재할 수 있을까? 나는 이것이 못내, 못 마땅한 것이다.

 

   내 조상(祖上)은 분명 조선인(朝鮮人)이라고 한다. 나는 당연(當然)히 조선인(朝鮮人)의 후예(後裔).”백인(白人)계열(系列)이나, 중아(中亞)지방의 코크고, 눈은 움푹 들어가고, 수염이 많은 자()가 내 조상(祖上)일 수는, 유전학(遺傳學)적인 면()으로도 보아도 해당(該當)사항(事項)이 없다. 그렇다면, 그들이 조선(朝鮮)의 후예(後裔)라는 것은, 무엇으로 증명(證明)을 할 건가?

 

   단, 가능성(可能性)은 열어 놓는다. 즉 조선왕조(朝鮮王朝) 영역(領域)의 변두리 곧 변경(邊境)지방을 복속(服屬)시키니, 당연(當然)히 그곳에 살고 있던 이민족(異民族)들은, 조선인(朝鮮人)이 되었을 것이며, 조선인(朝鮮人)속에서 함께 살았을 것이다. 그 중에서 기득권자(旣得權者)나 호족(豪族)이나, 관리(官吏)출신(出身)등은 중앙(中央)조정(朝廷)으로 등용(登用)될 수 있으며, 인질(人質=불모)로 경성(京城)에서 살았을 것임은 부인(否認)하지 못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특별(特別)한 예라고 볼 수 있으며, 조선(朝鮮)의 주류(主流)인 대부분(大部分)의 백성(百姓)이나 관리(官吏), 그리고 주인(主人)이었던 군주(君主)”는 조선인(朝鮮人)일 수밖에 없다.

 

   단, 왕비(王妃)나 후궁(後宮), 시녀(侍女)등은 이민족(異民族)의 여인네들이 넘쳐났을 것이며, 사대부가(士大夫家)들 중에서 아마도(?), 이민족(異民族)의 여인네가 후처(後妻)로 있었을 경우는 쾌 있었으리라 추측(推測)이 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부(一部)에 해당(該當)되는 이야기다. 조선(朝鮮)은 결코 이민족(異民族)의 나라가 될 수 없으며, 더더구나 백인(白人) 계열(系列)이나, 중아(中亞)지방의 이민족(異民族)이 될 확률(確率)은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西)쪽에 사는 서융(西戎)의 한 종족(種族)일 뿐이니 말이다.

 

   “를 부정(否定)하는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말자. “내가 없는데 누가 존재(存在)할 수 있겠는가?”이것은 인간(人間)무리의 철칙(鐵則)이요, 숙명적(宿命的)인 이야기다. 냉정(冷靜)하게, 객관적(客觀的)인 시각(視覺)을 갖도록 노력(努力)해 보자.

 

                    20131005<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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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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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삭제된 댓글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궐한 | 작성시간 13.10.06 능지처참...고개를 넘듯 천천히...살을 수천번 발라 죽이는 잔인한 형벌...
    주로 중국(중앙아)왕조들이 행한 형벌로...고려 공민왕때 보이고...조선 초기에 보이나...
    이후의 조선기록에선...드물어지며...인조시대의 홍익한의 실록증언으로도...
    조선은 청나라같은 살을 바르는 형벌은 없었단게 반증돼는 고로...조선의 능지형은...언어만 살벌하지...
    실상은 대부분 목을 치고 사지를 절단해 조리돌리는 형식이 대분이였다.
    수 백 번 써야 알아 들이시렵니까...?
  • 답댓글 작성자궐한 | 작성시간 13.10.06 처음부터 본문글에 그렇게 썼는데...
    해무님 혼자 한글을 제대로 해석못해 혼자 맘대로 해석하고...혼자 그걸 근거로 비판하고...
    혼자 난리신 것이지...뭘 실토했단 건지...어이가 없습니다.
  • 작성자마포대사 | 작성시간 13.10.06 하하하 코메디인지 아니면 착각의 늪에서 못 벗어나시는 것인지 참 궐한님 글 보니
    충격도 되고 어이도 없네요. 그 내용이 사실이라면 그 사람들은 코메디 아니면 공주병 말기 입니다.
    정신 차려야 하는데 마치 사이비 종교에서 허우적 대던 때의 교훈 담 같이 들리기도 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궐한 | 작성시간 13.10.06 저도 당시 천만원 대 줬던 동생늠 볼 때마다...할말이 없습니다.
    전엔 이늠에게 말발이 통했는데...이후로 제 말은 대남방송 취급합니다...ㅡ.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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