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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의 조선사 해설

도요장군(度遼將軍)의 활동범위(活動範圍)

작성자문 무|작성시간14.11.16|조회수657 목록 댓글 7

 

                             도요장군(度遼將軍)의 활동범위(活動範圍) <1>

 

   ●도요장군(度遼將軍)이란 과연(果然) 무엇일까? 이것을 알면 조선사(朝鮮史)의 진실(眞實) 절반(折半)은 찾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程度)로 중차대(重且大)한 대목이랄 수 있다.

 

     왜냐하면, <요수(遼水)의 서(西)쪽은 한()의 나라요, 요수(遼水)의 동()쪽은 조선(朝鮮)의 나라>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해설(解說)에도 문제(問題)는 있다. 고구려(高句驪)의 태왕(太王)들은 유주(幽州)자사(刺史)를 역임(歷任)했고, (). () 이주(二州)도독(都督)도 역임(歷任)했기 때문인데, 유주(幽州)나 영주(營州) 그리고 평주(平州)는 모두 요수(遼水)의 서(西)쪽 지방에 있는 요서(遼西)지방에 있기 때문이다.

 

   ● 이 말은 유주(幽州)는 조선(朝鮮)의 근간지지(根幹之地)라는 원전(原典) 기록(記錄)을 상기(想起)한다면, 요동요서(遼東遼西)는 애초에 모두 조선(朝鮮)의 요충지(要衝地)였다는 말이며, 백제(百濟) 역시(亦是), 요서(遼西)의 진평(晉平)이군(二郡)을 경략(經略)했다고 했기 때문이다.

 

   ○ 도요장군(度遼將軍)의 진정(眞正)한 정체(正體)는 무엇일까? 원전(原典) 기록(記錄)으로 그 정체(正體)를 밝혀보기로 하자. 이것은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에 의한 원전(原典)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 카페에서 추구(追究)하는 조선사(朝鮮史)의 진실(眞實)”과는 조금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양해(諒解)해 주셔야 합니다.

 

     度遼將軍 : 장군(將軍)의 호칭(呼稱)으로, 쉽게 말하면, 북부(北部) 변방(邊方)사령관(司令官)이다. “도요(度遼)”요수(遼水)를 건넌다.”는 뜻이며, 요수(遼水)를 건너 적()을 토벌(討伐)하러 출정(出征)하는 군대(軍隊)의 총사령관(總司令官)을 말하는 것이다. 이 제도(制度)는 전한(前漢)의 소제(昭帝)때 처음 실시(實施)했는데, 범명우(范 朋友)가 도요장군(度遼將軍)에 임명(任命)되었고, 후한(後漢) 역시 이 제도(制度)를 답습(踏襲)하였다.

 

     度遼營 : 요수(遼水)를 건넌 병사들이 주둔(駐屯)하여, 휴식(休息)을 취하고, 병사(兵士)들의 훈련(訓練)과 보급(補給)등을 위해 설치(設置)한 전방(前方)의 군사기지(軍事基地)를 말한다. 역사통설(歷史通說)에서는 현재(現在)의 내몽고(內蒙古) 황하(黃河) 북안(北岸)에 있는 오원(五原)의 서북방(西北方)에 있었다고 전하고 있는데, 장안(長安)에서 정북(正北) 800km 정도 떨어져 있다.

 

      ➠ 「요수(遼水)를 건너, ()을 치러간다는 장군(將軍)의 명칭(名稱), 생길 정도(程度)라면 큰 하천(河川)일 것이며, 그곳에는 많은 적()들의 있었을 것이며, 교통로(交通路)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매국노(賣國奴)들이 말하는 요녕성(遼寧省) 요수(遼水)를 건너, 조선(朝鮮)을 치러오는 총사령관(總司令官)의 이름일까? 매국노(賣國奴)들이 말하는 매국(賣國)사학(史學)과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알아보기로 하자. 매국(賣國)사학(史學), 이제 무덤()속으로 들어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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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資治通鑑 23 漢紀 15 / 孝 昭 皇 帝 上 / 元 鳳 三 年

遼 東 烏 桓 反冒 頓 破 東 胡 東 胡 餘 衆 散 保 烏 桓 及 鮮 卑 山 為 二 族 : 겨울, 요동(遼東) 오환(烏桓)이 반()하였다. 처음, 모돈(冒頓)이 동호(東胡)를 깨뜨리자, 동호(東胡)의 나머지 무리들은 오환산(烏桓山)과 선비산(鮮卑山)에 들어가 보존하였는데 두 부족이다. 註 釋 : 遼 東 郡 屬 幽 州 唐 嘗 置 安 東 都 護 府 於 其 地東 胡 破 見 十 一 卷 高 祖 六 年: 주석(註釋) : 요동군(遼東郡)은 유주(幽州)에 속하였고, ()이 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의 그 땅이다. 동호(東胡)를 깨뜨린 것은 11권 고조6년 조를 보라. 後 漢 書 烏 桓 之 地 在 丁 零 西 南烏 孫 東 北: 후한서(後漢書) : 오환(烏桓)의 땅은, 정령(丁零)의 서남(西南), 오손(烏孫)의 동북(東北)에 있다. 武 帝 遣 霍 去 病 擊 破 匈 奴 左 地 因 徙 烏 桓 於 上 谷 漁 陽右 北 平遼 東遼 西 五 郡 塞 外 為 漢 偵 察 匈 奴 動 靜: 무제(武帝)가 곽거병(霍去病)을 보내어 흉노(匈奴) 좌지(左地 : 동쪽 땅)를 깨뜨리자, 이로 인해 오환(烏桓)은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동(遼東). 요서(遼西)로 옮겨갔는데, ()나라에서는 흉노(匈奴)의 동정(動靜)을 정찰(偵察)하였다. 於 是 始 置 護 烏 桓 校 尉 秩 比 二 千 石鮮 卑 先 遠 竄 於 遼 東 塞 外 與 烏 桓 相 接 未 嘗 通 中 國 至 後 漢 稍 徙 遼 西 塞 外 始 為 中 國 患: 이때 처음으로 호()오환(烏桓)교위(校尉)를 두었는데, 녹봉 2천석이다. 선비(鮮卑)는 먼저 요동(遼東)새외(塞外)의 먼 곳으로 스며들었는데, 오환과는 서로 이어져 있었으며, 중국(中國)과는 아직 통하지 못했다. : 후한(後漢)초까지에 이르러 점점 요서(遼西)새외(塞外)로 옮겨와, 처음으로 중국(中國)의 근심이 되었다. 世 役 屬 匈 奴武 帝 擊 破 匈 奴 左 地 因 徙 烏 桓 於 上 谷漁 陽右 北 平遼 東 塞 外 : 해마다 흉노(匈奴)에게 속해 노역을 하였다. 무제(武帝)가 흉노(匈奴)좌지(左地)를 격파(擊破)하자, 이로 인해 오환(烏桓)은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동(遼東)새외로 옮겨가자,上 谷漁 陽北 平 皆 屬 幽 州上 谷 唐 媯 州漁 陽 唐 檀薊 州北 平 唐 平 州 之 地: 為 漢 偵 察 匈 奴 動 靜置 護 烏 桓 校 尉 監 領 之 使 不 得 與 匈 奴 交 通至 是 部 衆 漸 強 遂 反:()나라에서는 흉노(匈奴) 동정(動靜)을 정찰(偵察)하였다. () 오환(烏桓)교위(校尉)를 두고 이들을 감독(監督)하였는데, 파견사들은 흉노의 정보나 소식을 얻을 수 없었다. 부족(部族)의 무리들은 점점 강해져, 반하기에 이르렀다.

   ● 그렇다면, 여기서 아주 중요(重要)한 기록(記錄)을 발견(發見)하게 되는데, 오환(烏桓)=오환(烏丸)의 거점지(據點地)가 정령(丁零)의 서남(西南)지방이며, 오손(烏孫)의 동북(東北)지방이라면, 요동(遼東)지방 역시 오환(烏桓)이 있었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는 것을 반증(反證)하는 것이다. 대륙사서(大陸史書) 스스로 증명(證明)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사료(史料)들이 있는 한, 조선사(朝鮮史)의 진실(眞實)은 반드시 밝혀질 것이다.

      기록(記錄)대로라면, 요동요서(遼東遼西), () ‘신 강성(新疆省)’ 서북(西北)지방과 카자흐스탄동북(東北)지방이며, 이는 오환(烏桓)이 바로 이곳에 있었으며, 요동요서(遼東遼西) 역시(亦是) 오환(烏桓)과 떨어질 수 없으며, 이때의 오환(烏桓)은 바로 고구려(高句驪)라고 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 오손(烏孫) : 현 카자흐스탄 북부(北部)지방과 우랄산맥(山脈)간에 살던 종족(種族)이며, 이들 종족(種族)은 청안(靑眼)과 콧수염()과 구렛나루()가 붉은 색이며, 형상(形象)이 원숭이(獼猴 : 미후) 종류와 같다고 하였다. 정령(丁零) : 이들은 우랄산맥으로부터 금산(金山)의 북부지방에 이르기까지 분포(分包)했던 부족(部族)이다.

   ● 위 기록(記錄)이 진실(眞實)이라고 한다면, 당시(當時) 전한(前漢)의 효소황제(孝昭皇帝), 현재(現在)의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지방에 있었으며, 그들의 황성(皇城), 더 정확(正確)한 위치(位置), 요수(遼水)가 있었던 곳에서, 서남(西南)쪽으로 4-5천리지역이며, 이곳은 현() ‘이란과 이라크정도가 될 것이다.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는 중국(中國)이 될 수 없으며, 이곳은 조선(朝鮮)의 서부(西部)변경(邊境)지방이었고, 조선(朝鮮)이 성()할 때는 속국(屬國)으로 지배를 당하고 있었다.는 것이, 진실(眞實)된 조선사(朝鮮史)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들만의 중국(中國)은 얼마든지 존재(存在)할 수 있다.

  先 是 匈 奴 三 千 餘 騎 入 五 原 殺 略 數 千 人 後 數 萬 騎 南 旁 塞 獵 漢 復 得 匈 奴 降 者 言 烏 桓 嘗 發 先 單 于 冢 匈 奴 怨 之 方 發 二 萬 騎 擊 烏 桓霍 光 欲 發 兵 邀 擊 之 以 問 護 軍 都 尉 趙 充 國 護 軍 都 尉 秦 官武 帝 以 屬 大 司 馬 此 時 蓋 屬 大 將 軍 也充 國 以 為:「烏 桓 間 數 犯 塞 今 匈 奴 擊 之 於 漢 便又 匈 奴 希 寇 盜 北 邊 幸 無 事 蠻 夷 自 相 攻 擊 而 發 兵 要 之 招 寇 生 事 非 計 也!」光 更 問 中 郎 將 范 明 友 明 友 言 可 擊 , 度 遼 將 軍 蓋 使 之 度 遼 水 以 伐 烏 桓至 後 漢 遂 以 為 將 軍 之 號 以 護 匈 奴於 是 拜 明 友 為 度 遼 將 軍, 將 二 萬 騎 出 遼 東匈 奴 聞 漢 兵 至 引 去光 誡 明 友:「兵 不 空 出即 後 匈 奴 遂 擊 烏 桓。」師 古 曰後 匈 奴 者言 兵 遲 後邀 匈 奴 不 及烏 桓 時 新 中 匈 奴 兵 師 古 曰為 匈 奴 所 中 傷明 友 既 後 匈 奴因 乘 烏 桓 敝擊 之斬 首 六 千 餘 級獲 三 王 首匈 奴 由 是 恐不 能 復 出 兵。》<자치통감(資治通鑑)/인용문(引用文)/>

 

   ● 도요장군(度遼將軍) : 주석(註釋) / 度 遼 將 軍蓋 使 之 度 遼 水 以 伐 烏 桓至 後 漢遂 以 為 將 軍 之 號 以 護 匈 奴: 도요장군(度遼將軍)은 요수(遼水)를 건너, 오환(烏桓)을 토벌(討伐)하는 파견사이다. 후한(後漢)에 까지 미쳤는데, 흉노(匈奴)를 지키는 장군(將軍)의 호칭(呼稱)이다.

      위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말하는 것은, 도요장군(度遼將軍)은 요수(遼水)를 건너가서 오환(烏桓)을 토벌(討伐)하는 파견사이다. 후한(後漢)에 까지 미쳤는데, 흉노(匈奴)를 지키는 장군(將軍)의 호칭(呼稱)이다.라는 이야기며, 이때의 오환(烏桓)=오환(烏丸)은 곧 구려(句驪)=고구려(高句驪)=고려(高驪)를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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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치통감(資治通鑑) 후한 기(後漢 紀)

(1) 顯宗孝明皇帝.永平元年 (공원58) ; 遼東太守祭肜使偏何討赤山烏桓,大破之,斬其魁帥.塞外震讋,西自武威,東盡玄菟,皆來內附,野無風塵,乃悉罷緣邊屯兵. : 요동태수祭肜(채 융)”이 편하(偏何)에게 적산赤山 : 요동 서북 수 천리에 있다고 함오환(烏桓)을 토벌(討伐)하게 하여, 크게 깨뜨리고, 그 괴수(魁帥)의 목을 베었다. 요새 밖에서는(塞外) 놀라고 두려워하여, 서쪽 무위(武威)에서부터, 동쪽 현토(玄菟)까지, 와서 내부(內附)하니, 들에서 먼지와 바람이 일지 않아, 마침내 연변(緣邊)의 주둔(駐屯)병들을 모두 철수 시켰다.

 

   ➥ <오환(烏桓)=오환(烏丸)>의 거점지(據點地) : 적산(赤山)이다. 적산(赤山)은 요동(遼東)서북(西北) 수천(數千)리에 있다.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의 논리(論理) : 심양(瀋陽)주위에서 서북(西北) 수천(數千)리에 적산(赤山)이 있어야 함에도, 적산(赤山)이란 지형(地形)지물(地物) 자체(自體)가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이들이 주장(主張)하는 것은 대국민(大國民)사기극(詐欺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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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顯宗孝明皇帝永平八年乙丑公元六五年: ,大司農耿國上言宜置度遼將軍屯五原,以防南匈奴逃亡.中略.由是始置度遼營,以中郎將吳棠行度遼將軍事,將黎陽虎牙營士屯五原曼柏. : 처음, 대사농 경국(耿國)”이 상언(上言)하기를 마땅히 도요장군(度遼將軍)을 두어 오원(五原)에 주둔(駐屯)케 하여 남()흉노(匈奴)가 도주(逃走)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고 하였다. 중략. 이로 말미암아 처음으로 도요영(度遼營)”을 설치(設置)하고, 중랑장(中郞將) “吳棠(오당)”에게 도요장군의 일을 수행하게 하였다. 려양(黎陽)의 호아영(虎牙營)에 있는 군사들을 거느리고 오원(五原)의 만백(曼柏)에 주둔(駐屯)하게 하였다.

 

   ➥ 위 글을 보면 : 이해(理解)하기 어려운 측면(側面)이 있다. 이래서 이 글을 쓰는 본인(本人)은 전한(前漢)이나 후한(後漢)이 고구려(高句驪)의 이칭(異稱 : 다른 이름 )이라고 하는 것이다.

 

   ➀ 요수(遼水)를 경계(境界)로 두 나라가 대치하고 있었다는 것이 조선사(朝鮮史)나 대륙사(大陸史)에서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朝鮮)의 고구려(高句驪)나 백제(百濟)는 요서(遼西)지방을 경략(經略)했다. 그렇다면 요수(遼水)의 서(西)쪽 지방도 조선(朝鮮)의 것이었다는 이야기며, 당연(當然)하게도 유주지방(幽州地方)은 조선(朝鮮)의 토박이 땅이었다.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의 논리(論理)는 도대체 무엇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민족(民族)과 나라를 팔아먹고, 종족(種族)의 혼을 이 매국노(賣國奴).......!

 

   ➁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위의 내용(內容)을 보면 기가 막힌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는데 : 도요장군(度遼將軍)”을 임명(任命)하고, 군사기지(軍事基地)도요 영(度遼營)”을 건설하여, 호아영(虎牙營)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를 이동시켜 오원(五原)의 만백(曼柏)에 있는 군사기지(軍事基地)도요영(度遼營)”에 주둔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호아영(虎牙營)에 주둔(駐屯)하고 있는 군대(軍隊)는 경조(京兆)를 위수(衛戍)하는 군대(軍隊).

 

   ➂ 도요장군(度遼將軍)’요수(遼水)’의 동쪽에 있던 고구려(高句驪)나 백제(百濟)’의 침략(侵略)에 맞서, 주둔(駐屯)하고 있던 군대(軍隊)가 아니라, 흉노(匈奴) 오랑캐의 침구(侵寇)나 약탈(掠奪)때문에 이들을 토벌(討伐)키 위해 만들어진, 토벌군(討伐軍)사령관(司令官)의 직책(職責)이며, 호아영(虎牙營)이란 경조(京兆)를 지키는 특별(特別)부대(部隊)를 특별(特別)히 편성(編成)한 군대(軍隊)란 이야기다. 그렇다면 고구려(高句驪)와 백제(百濟)가 현재(現在)의 내몽고(內蒙古) 일부와 외몽고(外蒙古) 및 그 서쪽지방과 또 러시아 땅에 있었던 흉노(匈奴)였는가?

 

   ➃ 전한(前漢)이나 후한(後漢)이란 왕조(王朝)는 한족(漢族)의 대표적(代表的) 왕조(王朝)라고, 입이 아프게 말하는 자()들은, 이제 설명(說明)을 해주길 바란다. 이 말은 대륙(大陸) 땅에는 이런 왕조(王朝)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나 구라파(歐羅巴)등에 두 나라전한(前漢)이니 후한(後漢)이니 하는 한족(漢族)의 나라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완전(完全) 별개(別個)의 이야기다. 중국(中國)이라고 말하는 대륙(大陸)의 요충지(要衝地)을 포함(包含)한 일만(一萬)리 땅은, 조선(朝鮮)의 것이었다.는 명백(明白)한 증거(證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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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顯宗孝明皇帝 永平十六年癸酉公元七三年: ,二月,遣肜與度遼將軍吳棠將河東,西河羌,胡及南單于兵萬一千騎出高闕塞 : 2월에, 채융(祭肜)도요장군(度遼將軍) 오당(吳棠)을 파견하여 하동(河東), 서하(西河)의 강(), ()와 남선우의 병사 일만(一萬) 일천(一千)여 기()을 거느리고 고궐(高闕()를 나왔다. 竇固,耿忠率酒泉,敦煌,張掖甲卒及盧水羌,胡萬二千騎出酒泉塞,耿秉,秦彭率武威,隴西,天水募士及羌,胡萬騎出張掖居延塞 : 두고(竇固)와 경충(耿忠)은 주천(酒泉). 돈황(燉煌). 장액(張掖)의 갑졸(甲卒)과 노수(盧水 : 청해부근)의 강족(羌族)과 호() 12,000 ()를 인솔하여 주천(酒泉)의 요새(要塞)로 나갔다. 경병(耿秉)과 진팽(秦彭)은 무위(武威). 롱서(隴西). 천수(天水)에서 모집한 병사와 강족(羌族)과 호() 일만(一萬)()를 인솔하여 장액(張掖)의 거연새(居延塞)를 나갔다. 騎都尉來苗,護烏桓校尉文穆將太原,雁門,代郡,上谷,漁陽,右北平,定襄郡兵及烏桓,鮮卑萬一千騎出平城塞,伐北匈奴. : 기도위(騎都尉) 래묘(來苗)와 호오환교위(護烏桓校尉) 문목(文穆)은 태원.안문.대군.상곡.어양.우북평.정양군의 병사 및 오환, 선비 11,000 기병을 거느리고 평성(平城)의 요새로 나아가서 북 흉노를 쳤다. 竇固,耿忠至天山,擊呼衍王,斬首千餘級追至蒲類海,取伊吾盧地,置宜禾都尉,留吏士屯田伊吾盧城. : 두고(竇固)와 경충(耿忠)은 천산(天山)에 이르러, 호연왕(呼衍王)을 치고, 목을 벤 것이 1천 여급이었다. 뒤 쫒아 포류해(蒲 類 海)에 이르러 이오노(伊吾盧)의 땅을 뺏고, 의화(宜 禾)도위를 설치하고, 이오노(伊吾盧)()에 관리와 병사들을 머무르게 하고 둔전(屯田)하였다. 耿秉,秦彭擊匈林王,絕幕六百餘里,至三木樓山而還.來苗,文穆至匈河水上,虜皆奔走,無所獲. : 경병(耿秉)과 진팽(秦彭)은 흉림왕(匈林王)을 공격, 사막(沙漠) 6백 여리를 건너, 삼목루산(三木樓山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래묘(來苗)와 문목(文穆)이 흉하수(匈河水)에 도달했으나, 포로들이 모두 도주하여, 수확을 얻지 못했다.

 

   ➥ 위의 내용(內容) 역시(亦是), 같은 내용(內容)인데, 도요장군(度遼將軍) 오당(吳棠), 강족(羌族)으로 편성(編成)된 토벌군(討伐軍)을 거느리고, 고궐(高闕)의 요새(要塞)를 나왔다는 것은, 영하성(寧夏省)을 흐르는 황하(黃河)를 건너, 서북(西北)지방으로 출정(出征)했다는 이야기다.

 

   ➥ 이들 모두는 흉노(匈奴)를 치기 위함이다. 이러고도 요수(遼水)”가 현재(現在)의 요녕성(遼寧省)을 흐르는 하천(河川)이라고 한다면, 하북성(河北省)을 흐르는 하천(河川)이라고 한다면, 이들은 정신(精神)나간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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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肅宗孝章皇帝下永元元年己丑公元八九年: 六月竇憲耿秉出朔方雞鹿塞南單于出滿夷谷度遼將軍鄧鴻出固陽塞皆會涿邪山: 여름 6, 두헌(竇憲), 경병(耿秉)이 삭방(朔方)에 있는 계록새(雞鹿塞)의 요새(要塞)밖으로 나가니, 남흉노의 선우가 만이곡을 나왔고, 도요장군(度遼將軍) 등홍(鄧鴻)이 고양(固陽)의 요새(要塞)를 나왔는데, 모두 탁사산(涿邪山)에서 만났다. 憲分遣副校尉閻盤司馬耿夔耿譚將南匈奴精騎萬餘與北單于戰於稽洛山大破之單于遁走: 두헌이 부교위 염반(閻盤). 사마 경기(耿夔), 경담(耿譚)을 나누어 보내 남흉노의 정예(精銳)기병(騎兵) 일만(一萬)여명을 거느리고, ()선우와 계락산(稽落山)에서 싸워, 크게 깨뜨리니, 선우는 숨어 달아났다. 追擊諸部遂臨私渠北鞮海斬名王以下萬三千級獲生口甚眾雜畜百餘萬頭諸裨小王率眾降者前後八十一部二十餘萬人: 여러 부를 추격하여, 드디어 사거북제해(私渠北鞮海)에 도착하여, 명왕이하 13천 급()의 목을 베고, 산채로 획득한 것이 아주 많았으며, 여러 종류의 가축 일백(一百)여만 두()를 노획하고, 여러 소왕들이 많은 사람들을 인솔하여 항복했는데, 전후(前後) 8120여만 명이었다. 秉出塞三千餘里登燕然山命中護軍班固刻石勒功紀漢威德而還: 두헌(竇憲)과 경병(耿秉)은 요새(要塞)밖으로 삼천(三千)여리나 나가서, 연연산(燕然山)에 올라, 중호군 반고(班固)에게 명하여 공로(功勞)를 새기게 하였는데, 한나라의 위덕(威德)을 기록하고 돌아왔다.

 

   ➥ 위 내용 역시 똑같은 내용(內容)으로 되어있다. 도요장군(度遼將軍)은 현재(現在)의 요녕성(遼寧省)이나 하북성(河北省)등지에 있었던 군대(軍隊)수장(首將)이 아니며, 그가 지휘(指揮)하는 일만(一萬) 또는 이만(二萬)의 기병대(騎兵隊)는 최소한(最小限) 영하성(寧夏省)을 흐르는 황하(黃河) 서북방(西北方)에서 활동(活動)했다.는 것이다.

 

   ➥ 사거북제해(私渠北鞮海)는 어딜까? : 해답은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 있다. 私 渠 北 鞮 海 在 漠 外, 亦 曰 北 海. : 사거북제해(私渠北鞮海)는 막외(漠外)에 있는데, 또한 북해(北海)라 한다.漢元封初,單于留漢使郭吉,遷之北海.天漢初,又徙蘇武於北海,即此. : () 원봉(元封)초에 선우(單于)에게 유하고 있던 한()사신 곽길(郭吉), 북해(北海)로 옮겨갔는데, 천한(天漢)초에 또 소무(蘇武)가 북해(北海)로 옮겨갔는데, 즉 이곳이다.라 하였다.

 

   ● 이러한 여러 기록(記錄)으로 보면 : 당시(當時) 대륙(大陸)의 북변(北邊)과 서북(西北)변에서 활동(活動)했던 흉노(匈奴)들이며, 도요장군(度遼將軍)이나 출정군(出征軍)들이 흉노(匈奴)들을 토벌(討伐)하는 데는 현 신강성(新疆省)까지, ()으로는 금산(金山 : 알타이 산)의 북쪽과 서북(西北)쪽까지, 북해(北海)까지로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요장군(度遼將軍)은 단 한 번도 동()쪽 지방으로 출정(出征)한 예()는 없다. 이것은 요수(遼水)=요하(遼河)”가 현 대륙(大陸)의 서북방(西北方)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證明)하고도 남음이 있다. <2 편으로 계속>

 

                                                20141116<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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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김규형 | 작성시간 14.11.17 아사달이 카자흐에 현존합니다
  • 작성자호호 | 작성시간 14.11.20 문무 선생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매일 눈팅만 하고 있고, 읽어도 잘은 모르겠으나, 읽고 또 읽고 합니다.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글을 읽고 있습니다.
  • 작성자맑은영혼 | 작성시간 14.11.20 한나라의 위치가 현 이란정도란 말씀이신지요... 그리고 고구려의 이칭(異稱)이 한이라면 고구려의 영역이 현 중국과 이란까지란 것인지요...또 오환이 고구려라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죠...?
    흉노와 고구려 사이에 선비오환, 요동, 한(漢)이 있는것 같습니다.
  • 작성자맑은영혼 | 작성시간 14.11.20 흉노, 선비와 오환, 한(漢), 고구려의 관계는
    맨 위쪽 즉 북쪽에 흉노가 있고 그 아래에 선비와 오환이 있으며 그 아래에 한(漢)나라가 있고 (한과 선비오환 사이에 요동이 있고) 그 아래에 고구려가 있는 구도입니다. 그런데 한과 고구려의 위치가 겹치니 한나라가 있을 자리가 거의 없거나, 있어도 일개 소규모의 국가였을 정도라 보이고, 없다면 ‘한=고구려’ 일 것입니다. 저는 흉노에서 고구려의 방향을 북에서 남으로 생각합니다만 북서에서 남동방향으로 생각해도 기본 구도는 위와 같을 것입니다.
  • 작성자맑은영혼 | 작성시간 14.11.20 도요영이 있던 요수는 지금의 어느 강이라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연행록이나 조천록에서 사신들이 그곳을 지나갔다 나오는데, 연행의 여정중에 있다 생각됩니다만...
    皇朝廣寧鎭。漢代渡遼營....知退堂集卷之三 <廣寧紀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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