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중도호(雲中都護)의 실체(實體)는?
○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운중(雲中)”지방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중요(重要)한 것은, 『운중(雲中)지방의 동(東)과 동북(東北)은 유주(幽州)지방(地方)이기 때문이다.』 역설적(逆說的)이긴 하지만, 『운중(雲中)지방을 찾는다면 유주지방(幽州地方)도 찾을 수 있다는 것에 착안(着眼)한 것이다.』
➀ 진시황제(秦始皇帝)가 처음으로 운중군(雲中郡)을 설치하였다.
➁ 전한서(前漢書) 지리지(地理志) : 운중군(雲中郡)은 왕망(王莽)때는 수항(受降)이었는데, 병주(幷州)에 속했다. 당시(當時)에 3만8천3백3호 / 17만3천2백7십 인이 살았으며, 예속(隸屬)된 현(縣)은 11개였다.
➂ 후한서(後漢書) : 11개 성(城)이 있었으며, 5천3백5십1호 / 2만6천4백3십 인이 살았다고 한다. 11개 성(城)중에서 “사남(沙南)은 바로 오환(烏桓)이 난지 성(蘭池城)에서 경 엽(耿曄)이 지휘(指揮)하는 도요장군(度遼將軍)을 포위(包圍)했다고 하는 곳이다.
➃ 구당서(舊唐書) : 운중도독부(雲中都督府)가 되었으며, 삭방(朔方)현의 경계(境界)에서 당항(黨項)이 의탁(依託)했다. 1천4백3십호 / 5천6백8십일 인이 살았다고 하며, 예속된 작은 주(州)가 5개였는데, 「사리주(捨利州), 사벽주(思璧州), 아사나주(阿史那州), 작부주(綽部州), 백등주(白登州)」라고 하는데, 이 작은 주(州)들은 신강성지방에 있었던 주(州)의 이름들이다.
➄ 신당서(新唐書) : 운중도호부【雲中都護府 : 용삭(龍朔) 3년에 설치】인데, 선우대도호부【單于大都護府 : 인덕(麟德) 원년(元年)에 설치(設置)】로 개명(改名)되었다. 이곳의 토산물(土産物)로는 「호녀포(胡女布)와 야마(野馬)과혁(胯革)」이고, 예속(隸屬)된 현(縣)이 1개였는데, 2천1백5십5호 / 6천8백7십7인이 살았다고 한다. 이곳은 후위(後魏)=후위(后魏)를 건국한 도무제(道武帝)의 소도(所都)였다고 전한다.
○ 중요(重要)한 왕조(王朝)의 운중(雲中)지방에 대해서, 원전(原典)속에서 찾아보았는데, 역사통설(歷史通說)에서는, 산서성(山西省) 서북(西北)지방의 내몽고(內蒙古) 오원(五原) 주변(周邊)지방(地方)에 있었다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主張)이 진실(眞實)일까? 결과(結果)를 미리 알면 김이 빠지는 이야기지만, 이러한 곳에 운중도호(雲中都護)니, 운중군(雲中郡)은 없었다. 지명(地名)을 동(東)쪽으로 5천리 쯤 이동(移動)시켰다.
○ 그것을 어떻게 증거(證據)하고, 고증(考證)할 수 있는가? 당연(當然)한 일이다. 고증(考證)이 되지 않는다면, 사기꾼이 되는 일인데..........정당(正當)한 방법(方法)으로, 고증(考證)하여, 그것을 증명(證明)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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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치통감(資治通鑑) / 당기(唐紀) / 고종(高宗) 용삭(龍朔)3년 (서력 663년이다)
〔二月,徙燕然都護府於回紇,更名瀚海都護:徙故瀚海都護於雲中古城,更名雲中都護. : 2월에, 연연도호부(燕然都護府)를 회흘(回紇)로 옮기고, 이름을 바꿔 한해도호(瀚海都護)로 하였다 : 옛 한해(瀚海)도호(都護)는 운중(雲中)의 고성(古城)으로 옮기고, 이름을 바꿔 운중도호(雲中都護)로 하였다. 以磧為境,磧北州府皆隸瀚海,磧南隸雲中. : 이것은 적(磧)지대를 중심으로 하여, 적북(磧北)의 주(州)와 부(府)는 한해(瀚海)도호(都護)에 붙이고, 적남(磧南)지방은 운중(雲中)에 붙였다.〕고 본문(本文)에서 설명(說明)하고 있다.
➠ 여기서 한해도호(瀚海都護)와 운중도호(雲中都護)를 나눈 곳은, 바로 적(磧)지대의 중심(中心)으로 ‘적중(磧中)’지대(地帶)를 말하는 것인데, 이곳이 어딘가를 알면, 운중도호(雲中都護)의 정확(正確)한 위치(位置)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자! 역사(歷史)의 진실(眞實) 한 페이지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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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치통감(資治通鑑) 당기(唐紀) / 현종(玄宗) 선천(先天) 원년(元年)
〔辛酉,沙陀金山遣使入貢.沙陀者,處月之別種也,姓朱邪氏.處月居金娑山之陽,蒲類之東,有大磧,名沙陀,故號沙陀 : 신유(辛酉), 사타(沙陀)금산(金山)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사타(沙陀)는, 처월(處月)씨의 별종(別種)이다. 성(姓)은 주나(朱那)씨이다. 처월(處月)씨는 ➠ 금사산(金娑山)의 북(陽)쪽에서 살았는데, 포류해(蒲類海)의 동(東)쪽으로, 대적(大磧)이 있어, 이름은 사타(沙陀)고, 옛 부터 호칭하기를 “사타(沙陀)”라 하였다. 〕
➠ 위 본문(本文)에서 “대적(大磧)”지대(地帶)를 찾을 수 있는 중요(重要)한 단서(端緖)가 바로 『포류해(蒲類海)』 이다. 이 단서(端緖)를 가지고 “적(磧)”지대(地帶)를 찾는다면, 운중도호(雲中都護)의 땅을 정확(正確)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➀ 포류해(蒲類海) 동(東)쪽에 “대적지대(大磧地帶)가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포류해(蒲類海)”는 어디에 있는 호수(湖水)이냐 하는 문제(問題)만 해결(解決)하면 될 일이다.
➁ 포류해(蒲類海) : 〔在新疆鎭西縣西北.唐人亦名婆悉海.今名巴爾庫勒泊.後漢書.竇固傳;竇固擊呼衍王.迫至蒲類海. : 신강(新疆) 진서(鎭西)현 서북(西北)에 있다. 당인(唐人)들이 또 부르기를 ➠파실호(婆悉海)라 하였고, 지금 이름은 “파이고륵박(巴爾庫勒泊)”이다. 후한서(後漢書) “두고(竇固)”열전(列傳)에 : 두고(竇固)가 호연(呼衍) 왕을 치고 추격하여 ➠포류해(蒲類海) 에 이르렀다. 〕하였다. 이곳 포류해(蒲類海)의 동쪽이 바로 대적(大磧)지대라 하며, 「적(磧)이란 “사타(沙陀)”를 말하며, 사타(沙陀)란 “비탈진 모래언덕”」이란 뜻이다.
➠ 포류해(蒲類海) / 파실해(婆悉海) :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 포택해(蒲澤海) : 〔蒲澤海在土魯番西南.一名婆悉海.周四百里.蒲昌,蒲類兩縣,皆以此名。: 포택해(蒲澤海)는 토노번(吐魯番) 서남(西南)에 있는데, 일명 파실해(婆悉海)이며, 둘레가 4백리이다. 포창(蒲昌)현과 포류(蒲類)현의 양(兩)현 사이에 있어, 모두 이것으로 이름이 되었다. 通典曰:本名蒲類海.後漢永和六年,竇固等破匈奴呼延王於天山,進至蒲類海. : 통전(通典)에서 이르기를 : 본래 이름이 포류해(蒲類海)이다. 후한(後漢) 영화(永和) 6년, 두고(竇固)등이 흉노(匈奴) 호연(呼衍)왕을 천산(天山)에서 깨뜨리고, 진격하여 포류해(蒲類海)에 도달하였다.〕고 하였다.
➠ 천산(天山) /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 〔天山在土魯番西北三百餘里,亙天山,蒲澤兩縣界.交河水源出於此.亦名祁連山,亦謂之白山. : 천산(天山)은, 토노번(吐魯番) 서북(西北) 3백 여리에 있다. 천산(天山)은, 천산(天山)현과 포택(蒲澤) 양(兩)현 지경(地境)에 걸쳐있는데, 교하(交河)수가 이곳에서 발원한다. 또한 이름이 기련산(祁連山)이며, 또한 백산(白山)이라고 한다. 〕
● 『포류해(蒲類海)는 포택해(蒲澤海)이며, 파실해(婆悉海)』를 말하며, 토노번(吐魯番) 서남(西南)에 있다. 지도(地圖)를 보면, 언기(焉耆) 동(東)쪽에 있는 “박사등호(博斯騰湖)”라는 이름이 보이는데 바로 이곳이다. 또한 『천산(天山)=기련산(祁連山)=백산(白山)은 토노번(吐魯番) 서북(西北)에 있는 박격달산(博格達山)』을 말한다.
결국(結局) 대적(大磧)은, 토노번(吐魯番) 남(南)쪽 지방을 말하는 것이다.
➂ 위의 자치통감(資治通鑑) 본문(本文)에 나오는 “금사산(金娑山)”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서역(西域)편 : 금산(金山) : 亦謂之金沙嶺,一名金嶺,金娑山:金山在庭州東南,西州西北.此西域之金山也. : 또한 이르기를 금사령(金沙嶺)이며, 일명 금령(金嶺)이며, 금사산(金娑山)이다. : 금산(金山)은 정주(庭州) 동남(東南)에 있는데,서주(西州)의 서북이다. 이곳은 서역(西域)의 금산(金山)이다. 중략. 又開元中,改西州曰金山都督府,亦以山名,又謂之金娑山.西突厥別部處月種居金娑山之陽,蒲類海之東,有大磧名沙陀,因自號沙陀. : 또 개원(開元)중에, 서주(西州)를 금산도독부로 고쳤는데, 역시 이 산(山)의 이름으로 인한 것인데, 또 이르기를 금사산(金娑山)이라 하였다. 서돌궐(西突闕)의 별부(別部)인 처월(處月)종류가 금사산(金娑山)의 북(北)쪽에서 살았는데, 포류해(蒲類海)의 동(東)쪽에 대적(大磧)이 있어 이름이 사타(沙陀)인데, 비탈진 모래언덕으로 인하여 부르게 된 것이다.〕
※ 또 “화주(火州)”편을 보면 : 화주(火州) : 〔哈密西七百里.至肅州一千七百五十里,至京師八千四百里.西連亦力把力,南距于闐,北接瓦剌,漢車師前王庭之地也。: 화주(火州)는, 합밀(哈密)서 700 리에, 숙주(肅州)로부터 1,750리 있으며, 경사(京師)로부터 8,400리 떨어져 있다. 서쪽으로 역력파력과 연이어져 있으며, 남쪽으로는 우전(于闐), 북쪽에는 와랄(瓦剌)과 접(接)하였는데, 한(漢)나라의 거사전왕정의 땅이다. 謂其國人曰:唐去我七千里,沙磧居其二千里,地無水草,安能致大軍.開元中,改為金山都護府. : 그 나라사람이 이르기를 : 당(唐)나라는 아국(我國)으로부터 7천리 떨어져 있는데, 사적(沙磧)에 사는데 그것은 2천리이며, 땅에는 물과 풀이 없다. 대군(大軍)을 보내도 능히 안심한다. 개원(開元)중에 금산(金山)도독부(都督府)로 이름을 고쳤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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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적(大磧)”은?
『포류해(蒲類海)=포택해(蒲澤海)=박사등호(博斯騰湖)』의 동(東)쪽이며, 토노번(吐魯番)의 남(南)쪽 지대(地帶)이며, 공작하(孔雀河)의 북(北)쪽 지대를 칭하는, 특이지형(特異地形)의 별명(別名)이다.
이곳의 중심(中心)【포류해(蒲類海)의 동(東)쪽, 토노번(吐魯番)의 남(南)쪽, 공작하(孔雀河)의 북(北)쪽 지대】을, 「적중(磧中)의 땅」 이라고 하고, 「서(西)쪽은 적서(磧西)」 라하며, 「북(北)쪽은 적북(磧北)」 이라고 하며, 「남(南)쪽은 적남(磧南)」 이라고 원전(原典)에서 설명(說明)하고 있다. 적동(磧東)이 없는 것은, 이러한 “사적(沙磧)”지대(地帶)가 2천리에 걸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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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다른 사료(史料)를 보충(補充)해 보자.
〔考異曰:薛居正五代史後唐太祖紀曰:中略.太宗平薛延陀,分同羅,僕骨之人,置沙陀都督府,蓋北庭有磧曰沙陀,因以名焉. : 고이(考異)에서 이르기를 : 설거정(薛居正)의 "오대사(五代史)" 후당(後唐) 태조(太祖)기에서 이르기를 : 중략. 태종(太宗)이 설연타(薛延陀)를 평정(平定)하고, 동라(同羅), 복골(僕骨) 인들을 나누어, 사타(沙陀)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하였는데, 북정(北庭)에 적(磧)지대가 있는데 이르기를 “사타(沙陀)”라 하며, 이것으로 인하여 이름이 되었다.〕고 하였다.
〔歐陽修五代史記曰:蓋沙陀者大磧也,在金莎山之陽,蒲類海之東,自處月以來居此磧,號沙陀突厥. : 구양수(歐陽脩)오대사(五代史)기(記)에서 이르기를 : 모든 사타(沙陀)는 대적(大磧)이다. “금사산(金莎山)”의 북(北)쪽, “포 류 해”의 동(東)쪽에 있다. “처월(處月)”이래로 “적(磧)”에 살았으며, 호칭하기를 “사타돌궐‘이라 하였다. 〕〔蓋沙陀者大磧也,在金莎山之陽,蒲 類海之東,自處月以來居此磧,號沙陀突厥. : 사타(沙陀)는 대적(大磧)이다. 금사산(金莎山)의 북쪽(陽), 포류해(蒲類海)의 동쪽에 있다. 처월(處月)이래 이곳 “적(磧)”에서 살았기 때문에, 부르기를 사타(沙陀)돌궐(突闕)이라 하였다.〕
➠ 포류해(蒲類海)의 동(東)쪽이 대적지대(大磧地帶)라는 것은 대륙사(大陸史) 원전(原典)에서 말하는 것이며, 이는 많은 사료(史料)로 고증(考證)이 된다. 그렇다면 “운중도호(雲中都護)”는, 어느 곳에 있었던 것이 진실(眞實)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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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치통감(資治通鑑) 당기(唐紀)고종(高宗) 용삭(龍朔)3년 (서력 663년이다)
〔二月,徙燕然都護府於回紇,更名瀚海都護:徙故瀚海都護於雲中古城,更名雲中都護. : 2월에, 연연도호부(燕然都護府)를 회흘(回紇)로 옮기고, 이름을 바꿔 한해도호(瀚海都護)로 하였다 : 옛 한해(瀚海)도호(都護)는 운중(雲中)의 고성(古城)으로 옮기고, 이름을 바꿔 운중도호(雲中都護)로 하였다. 以磧為境,磧北州府皆隸瀚海,磧南隸雲中. : 이 적(磧)지대를 지경(地境)으로 하여, 적북(磧北)의 주(州)와 부(府)는 한해(瀚海)도호(都護)에 붙이고, ➠적남(磧南)지방은 운중(雲中)에 붙였다.〕고 본문(本文)에서 설명(說明)하고 있다.
➀〔以磧為境,磧北州府皆隸瀚海,磧南隸雲中. : 이 적(磧)지대를 지경(地境)으로 하여, ➠적북(磧北)의 주(州)와 부(府)는 한해(瀚海)도호(都護)에 붙이고, ➠적남(磧南)지방은 운중(雲中)에 붙였다.〕고 하였다면,
➁ 운중도호(雲中都護) 관할(管轄) : 신강성(新疆省)의 공작하(孔雀河) 이남(以南)이, 곧 운중(雲中)도호(都護) 관할이 되며,
➂ 한해도호(瀚海都護) 관할(管轄) : 토노번(吐魯番)북방(北方)지대(地帶) 준갈이(準喝爾) 분지(盆地)가 곧 적북(磧北)이며, 한해도호(瀚海都護)관할(管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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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현(現) 산서성(山西省) 북방(北方)에 있는 “운중(雲中)”이라는 지명(地名)은 무엇이냐 하는 문제(問題)가 대두(擡頭)된다.」 이것은 “짝퉁”이며, 「조선사(朝鮮史)를 왜곡(歪曲), 조작(造作)키 위한, 지명(地名)의 이동(移動)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 만약, 『운중(雲中)의 동쪽지방이 과거(過去), 조선영토(朝鮮領土)와의 접경(接境)지방이라고 하였다.』면, 조선사(朝鮮史)는 새롭게 해설(解說)되어야 하며, 그곳은 현재(現在)의 신강성(新疆省)지방으로부터 그 동(東)쪽의 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조선영토(朝鮮領土)였으나, 연(燕)의 진개(秦開)가 빼앗고, 성(城)을 쌓았다는 “조양(造陽)”은 현재(現在)의 내몽고(內蒙古) 오원(五原)【황하(黃河)인 남하(南河)와 북하(北河)사이에 있다.】지방(地方)으로부터, 북(北)으로 900 리에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오원(五原)과 조양(造陽)』 모두의 지명(地名) 역시(亦是) 「짝퉁」이라는 결과(結果)에 이른다.
그렇다면 운중군(雲中郡)을 처음 설치(設置)한, 대륙(大陸)을 처음으로, 천하통일(天下統一)했다는 ‘시황제(始皇帝)’의 정체(正體)는 무엇이냐? 궁금할 뿐이다.
○ 조선사(朝鮮史)의 모든 것은 이렇게 산개(散開)되어, 여기저기에 필요(必要)로 하는 곳에, 흩어져버렸다. 이것을 바로잡지 못한다면 조선사(朝鮮史)의 진실(眞實) 논의(論議)는 공염불(空念佛)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認識)해야 될 것 같다.
2014년 11월 24일 <글쓴이 : 문무(文武)>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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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맑은영혼 작성시간 14.11.25 운중이 타클라마칸사막 동쪽이란 것인지요...? 그렇다면 연나라의 위치는 그(운중)동쪽이 되는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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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맑은영혼 작성시간 14.11.25 사기 蘇秦列傳第九(소진열전제구)
燕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樓煩 西有雲中九原 南有嘑沱易水 地方二千餘里]
연나라는 동쪽에 조선. 요동이 있으며, 북에는 임호. 누번이 있으며, 서에는 운중. 구원이 있고 남에는 호타. 역수가 흐르며, 영토는 사방 2천여 리이며...
라는 말이 있던데....그렇다면 요동은 현 감숙성 중서부가 되는것입니까..? 아니면 위의 사기의 내용이 잘못된 것인지요.. -
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4.11.26 운중이 타클라마칸 동쪽일부를 포함한 그 서남지방일 수 있다는 것이죠. 역사통설에서 연나라는 유주와 겹치는 땅이 되는데, 당시의 연은 조선이라고 봅니다. 연조선이란 이야기죠. 삼국유사에서 보면 진힌일부인들이 연에서 이동해 말도 연의 것의 잔재가 있었다고 하잖습니까. 다만 연의 정확한 위치는 좀 더 기록을 살펴 볼 필요가 있는데, 신강성 서부와 서북부 및 카자흐스탄 영토에 존재했었지 않았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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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4.11.26 위에서 설명한 것은 자치통감이며, 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사기"기록인데, 무조건 잘못된 기록이라고 하기보다는 기록속의 여러 지명관계를 추적, 재 설정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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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4.11.26 원전의 내용을 소개하는 것이니, 저의 조선사 주장과는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보면 크게 차이나지 않는, 즉 대륙의 땅은 조선의 영토였다는 것입니다. 다만 조선의 변방이 어디였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가능하면 많은 원전속의 내용을 우리 회원님들께 일려드리고 싶습니다. 따라서 저의 주장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것이나, 원전속에서 말하는 내용을 번역과 해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시 운중도호는 작은 면적이 아닙니다. 반도 만한 면적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도호의 영역이 어디까지였는가에 대해서 세세한 것까지는 알기가 어렵다고 봅니다.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