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姓氏)란 무엇이며, 무슨 의미(意味)를 갖는 걸까?
신라(新羅)ㆍ고구려(高句麗)ㆍ백제(百濟)ㆍ고려(高麗)의 기이한 성(姓)
○ 성씨(姓氏)란 무엇일까?
성(姓) - 아버지의 출신(出身) : 부계(父系) 혈통(血統)
씨(氏) - 어머니의 출신(出身) : 모계(母系) 혈통(血統)
○ 다음백과 / 지금까지는 성씨(姓氏)의 의미(意味)가 부계(父系) 성(姓)을 가리키는 것이다. 《강태공의 원래 이름은 강여상(姜呂尙)인데, 성은 강, 씨는 여, 이름은 상이다. 나중에는 여를 빼고 강상이라고도 불렀다. 진시황의 이름은 영조정(贏趙政)인데, 성은 영, 씨는 조, 이름은 정이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씨는 사라지고 성과 이름만 남아 성명(姓名)이 되어 중국의 경우 두 자 이름이 많아지게 된다. 한나라 이후에는 씨(氏)가 사라지고 성(姓)과 동일하게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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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本來)의 성씨(姓氏)는 <부(父)+모(母)+이름(名)의 조합(組合)>이다. 그러나 이러한 체제(體制)는, 한(漢)나라 때부터 바뀌기 시작(始作)해, 씨(氏)를 없애고, 성(姓)만을 쓰게 되었으며, 이는 부계(父系)혈통(血統)을 말하는 것이며, 모계(母系)혈통(血統)은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모계사회(母系社會)가 부계사회(父系社會)로 넘어온 것을 의미(意味)한다고 보아진다. 우리나라 성씨(姓氏)를 보면 :
① 서력(西曆) 1481년(성종12년)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성씨(姓氏) 277 개
② 영조(英祖) 도곡총설(陶谷叢說) : 성씨(姓氏) 298 개
③ 서력(西曆) 1908년 고종(高宗) 증보비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성씨(姓氏) 496 개
④ 서력(西曆) 1930년 조사 : 성씨(姓氏) 250 개
⑤ 서력(西曆) 1960년 국세조사 : 성씨(姓氏) 258 개
⑥ 서력(西曆) 1985년 인구, 주택 센서스 : 성씨(姓氏) 274 개
➠ <서력(西曆) 1,481년 277개 : 서력(西曆) 1,985년 274개> 이 현상(現狀)을 누가 이해(理解)할 수 있을까?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이야기일 뿐이다. 무려 5백년(百年)이 지난 뒤의 성씨(姓氏) 수(數)가 줄어들었다? 그런데 서력(西曆) 1,908년도 고종(高宗)때는 496개의 성씨(姓氏)가 있었다?
- 2016년 통계청에서 발표(發表)【2015년 조사】한 것을 보면 -
① 전체 성씨(姓氏) 5,582개 【2000년 : 漢字 有 : 283개 / 調査(총) : 430개】
② 한자(漢字)무(無) / 한글 성씨(姓氏) 4,075 개 – 대부분(大部分) 귀화인(歸化人)
③ 대한민국(大韓民國) 성씨본관(姓氏本貫) : 총 3만 6744 개
○ 귀화인(歸化人)들의 숫자가 늘고, 이들이 모국(母國)의 지명(地名)이나 이름 등을 사용(使用)하여 창씨(創氏)하고, 본관(本貫)을 창관(創貫)하기 때문에, 기하급수적(幾何級數的)으로 늘었다고 보아진다. 한자(漢字)를 갖고, 관향(貫鄕)이 있는 우리나라 성씨(姓氏)는, 2,000년도에도 403개로 조사됐으나, 이 중에는 한자(漢字)로 만든 귀화인(歸化人)들이 포함(包含)되어 있으니, 「순수(純粹)한 우리나라 성씨(姓氏)는, 283개에 불과(不過)하다」고 한다.
○ 봉건왕조(封建王朝)시절의 사대부가(士大夫家) 양반층(兩班層)은, 전체(全體)가구(家口)의 5% 정도(程度)로 추산(推算)되는데, 이는 근세(近世)로 접어들면서 늘어나기 시작해, 갑오경장(甲午更張) 이전(以前)에는 5-10% 정도(程度)로 추산(推算)하기도 한다.
사실 유교(儒敎)의 오랜 전통(傳統)을 이어오던 사대부가(士大夫家) 양반가(兩班家)들이 아니면, 일반 백성(百姓)들은, 제사(祭祀)조차 지내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인데, 일제(日帝)가 조사(調査)한 사대부가(士大夫家) 양반가(兩班家)를 보면 : 5% 정도(程度)도 미치지 못했다.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以後), 신분제(身分制)가 타파(打破)되고, 식민지(植民地)때는 일제(日帝)가 이를 이용(利用), 내부분열(內部分裂)을 유도(誘導)하고, 수탈을 체계화(體系化)하기 위한 호적법(戶籍法)을 만들면서, 모든 백성(百姓)들에게 성씨(姓氏)를 부여, 장려(獎勵)하여, 일반(一般)백성(百姓)들과 천인(賤人)들도 신분(身分)세탁(洗濯)을 하여, 양반(兩班)이 되고, 이를 증명(證明)하듯이, 양반(兩班)들의 특권(特權)아닌 특권(特權), 제사(祭祀)를 지내게 되었다. 오늘날 특정(特定) 성씨(姓氏)가 유난히 많은 것도, 신분제도(身分制度)가 무너진 것과 무관치 않은 것이다.
○ 덧붙인다면 : 가정(家庭)에서 지키는 유교(儒敎)예법(禮法)이 가례(家禮)라는 것이고, 또 ‘가가례(家家禮)’라는 말이 있는데, 「집안에 따라 저마다 다른 그 집안 고유(固有)의 풍습(風習), 예법(禮法)이 있다」는 말에 따르면, 제사(祭祀)를 지내는 풍속(風俗)에서, 「조율이시(棗栗梨柿), 홍동백서(紅東白西), 좌포우혜(左脯右醯), 어동육서(魚東肉西), 두동미서(頭東尾西)」등의 이야기는 옛 문헌(文獻) 어디에도 근거(根據)가 없다고 하는데, 유독(惟獨) 대한민국(大韓民國)에서는, 사대부가(士大夫家)양반가(兩班家) 후예(後裔)답게, 그것이 무슨 철칙(鐵則)인 냥 한다.
간혹(間或), 때마다 감초(甘草)처럼 회자(膾炙)되는 : 수백(數百)년을 이어온 ‘아무개’ 종가(宗家)의 전통(傳統)의식(儀式)… …하는데, 그 ‘차례상’을 보면, 이곳이나 저곳이나 같고, 푸짐하기가 상다리가 부러질 질듯하다. 과연 수백(數百)년 전(前)에도 그랬을까? 또 그 종가(宗家)가 반도(半島) 땅에서 수백(數百)년을 이어왔다는 증거(證據)는 또 뭔가? 말로만 수백(數百)년을 이어왔다고 해서 증거(證據)되고, 고증(考證)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萬若), 반도(半島) 땅에서 수백(數百)년을 이어온 종가(宗家)라고 한다면 : 그에 대한 수많은 증거(證據)자료(資料)를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임란(壬亂)이나 호란(胡亂) 또는 화재(火災)로 소실(消失)되었다거나, 소실(燒失)되었다는 그런 이야기는 하지말자. 없음에도 수백(數百)년 운운하는 것은 상식적(常識的)이지 못하다.
남평(南平) 문씨(文氏)도, 전라도(全羅道) 남평(南平)에서 시원(始原)하며, 이는 신라(新羅) 472년(신라 자비왕 15)에 남평(南平) 문씨(文氏)의 시조(始祖) 문다성(文多省)이 태어났다고 하는데, 이에 따르면 무려 “1,544”년 전(前)의 일이다. 이렇게 일천(一千)오백(五百)년 동안 변하지 않고, 오직 그 남평(南平) 땅에 세거지(世居地)가 있다고 했을 때, 그곳에 어떤 증거물(證據物)과 고증(考證)자료(資料)가 남아 있느냐? 하는 거다.
일천(一千)오백(五百)년을 이어온 남평(南平)문씨(文氏)는 대한민국(大韓民國)에서 몇 번째 성씨(姓氏) 인구(人口)를 가졌는가? 2015년 조사(調査)때, 문씨(文氏) 총(總)인구(人口)는, 464,040인이며, 이 중에서 남평(南平)문씨(文氏)는 445,946 인(人)이라고 한다. 이게 과연 타당성(妥當性)이 있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문제(問題)는 : 성씨(姓氏)와 관련(關聯)된 많은 것들과 풍속(風俗)들이,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와 해방(解放)이후(以後), 그리고 1950-70년대에 확고(確固)하게 자리 잡았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이러한 것들은 이때 족보(族譜) 만들기가 유행(流行)했다는 말과 딱 어울리는 말이다.
국가(國家)에서, 관혼상제(冠婚喪祭)에 대한 일률적(一律的)인 방식(方式)으로 규격화(規格化)한 일은 일찍이 없었으리라 생각되는데,「의식(儀式)의 번거로운 절차(節次)를 간소(簡素)하게 고쳐, 낭비(浪費)를 막고 건전(健全)한 생활(生活)자세(姿勢)를 기르는 데 목적(目的)을 두고, 정부(政府)가 1973년 5월 17일에 제정(制定), 공포(公布)한 규칙(規則)으로 정식(正式) 이름은 ‘건전가정의례준칙’이다.」라고 하는데, 좋은 뜻으로 만든 것은 이해(理解)가 되지만, 가가례(家家禮)인 것을, 국가(國家)가 나서서 규격(規格) 통일(統一)된 하나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좋은 뜻을 바래게 하는, 국민(國民)들을 순응(順應)하게 만들기 위한, 목적(目的)을 위한, 의도적(意圖的)인 통치(統治)행위(行爲)(?)였다고 본다. 이렇게 주장(主張)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의도(意圖)된 국가(國家)의 국민(國民)들에 대한 선도(先導)는, 오늘날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어두운 면(面)을 부각(浮刻)시키게 하는, 세뇌(洗腦)에 불과(不過)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현대사(現代史)의 어두운 면(面)들…손바닥으로 해(太陽)를 가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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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新羅)ㆍ고구려(高句麗)ㆍ백제(百濟)ㆍ고려(高麗)의 기이한 성(姓)
○ 신라(新羅)·고구려(高句麗)·백제(百濟)·고려(高麗)의 기이한 성(姓) / 청장관전서 제57권 앙엽기 4(盎葉記四)【출처 : 한국고전종합DB】
(1) 숙씨(叔氏)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신라 애장왕(哀莊王)의 어머니 숙씨(叔氏)는 내물왕(奈勿王) 13세손 김숙명(金叔明)의 딸인데, 동성(同姓)임을 혐의쩍게 여겨, 아버지의 이름 ‘숙(叔)’자를 따서 씨(氏)로 삼았다.” 하였다.
(2) 정씨(貞氏) 《동국통감》에 “신라(新羅) 애장왕비(哀莊王妃)는 정씨(貞氏)다.” 하였다.
(3) 대실씨(大室氏) 《동국통감》에 “고구려(高句麗) 대무신왕(大武神王) 15년에 비류부장(沸流部長) 추발소(鄒勃素)에게 성(姓) 대실씨(大室氏)를 내려주었다.” 하였다.
(4) 송씨(松氏) 《동국통감》에 “고구려 유리왕비(瑠璃王妃)는 다물후(多勿侯) 송 양(松讓)의 딸이다.” 하였다.
(5) 극씨(克氏) 《동국통감》에 “고구려 주몽(朱蒙)이 마의 재사(麻衣再思)에게 성(姓) 극씨를 내려주었다.” 하였다.
(6) 중실씨(仲室氏) 《동국통감》에 “고구려 주몽이 납의 무골(衲衣武骨)에게 성 중실씨를 내려주었다.” 하였다.
(7) 소실씨(少室氏) 《동국통감》에 “고구려 주몽이 조의 묵거(藻衣黙居)에게 성(姓) 소실씨를 내려주었다.” 하였다.
(8) 낙씨(絡氏) 《동국통감》에 “고구려 대신무왕(大神武王) 5년에 부여왕(扶餘王) 대소(帶素)의 종제(從弟)가 항복하자 봉하여 왕(王)을 삼아 연부(椽部)에 두고, 그의 등에 낙(絡)자가 있으므로 성을 낙씨(絡氏)라 내려주었다.” 하였다.
(9) 예씨(禮氏) 《동국통감》에 “고구려 시조(始祖)가 부여에 있을 때에 예씨에게 장가들어 유리(類利)를 낳았다.” 하였다.
(10) 을지씨(乙支氏) 《동국통감》에 “고구려 영양왕(嬰陽王) 때에 을지 문덕(乙支文德)이 있었다.” 하였다.
(11) 천씨(泉氏) 《동국통감》에 “고구려 천개소문(泉蓋蘇文)이 영류왕(榮留王)을 시해(弑害)했다.” 하였다.
(12) 그리고 화씨(禾氏)와 치씨(雉氏) 《동국통감》에 “고구려 유리왕(瑠璃王)에 두 여희(女姬)가 있었는데 화희(禾姬)와 치희(雉姬)였다.” 하였다.
(13) 북씨(北氏) 《만성통보(萬姓統譜)》에 “북(北)은 고려(高麗)의 성(姓)이다.” 하였고, 《정자통(正字通)》에 또한 인용되었다. ○ 중국 사람들은 고구려를 고려라고 한다.
(14) 사선씨(似先氏) 《만성통보》에 “사선씨는 본래 고려의 유종(遺種)인데 당(唐) 나라 무덕(武德) 중엽에 사선 영문(似先英問)으로 우효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을 삼았다.” 하였다.
(15) 부여씨(扶餘氏) 《동국통감》에 “부여씨는 백제(百濟)의 성(姓)인데 계통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씨(氏)를 삼았다.” 하였고, 《만성통보》에 “백제의 부여씨는 음(音)이 변전되어 부유(鳧臾)로 되었다.” 하였다.
(16) 흑치씨(黑齒氏) 《만성통보》에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백제의 서부(西部) 사람이다.” 하였다.
(17) 사씨(沙氏)
(18) 연씨(燕氏)
(19) 협씨(劦氏)
(20) 진씨(眞氏)
(21) 해씨(解氏)
(22) 골씨(骨氏)
(23) 목씨(木氏)
(24) 구씨(苩氏)
《북사(北史)》에 “백제(百濟)의 대성(大姓)이 8족(族)이 있으니, 사(沙)ㆍ연(燕)ㆍ협(劦)ㆍ진(眞)ㆍ해(解)ㆍ골(骨)ㆍ목(木)ㆍ이다.” 하였다. 《만성통보》에 “상곡(上谷)에 백제(百濟)의 8성 중에 그 하나는 진(眞)인데, 한(漢) 나라의 진우(眞祐)는 태위장사(太尉長史)였고, 진흠(眞欽)은 태의령(太醫令)이었으며, 진현토(眞玄菟)는 산(筭)을 잘했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협(劦)은 《북사(北史)》에 “힘력자[力] 셋을 붙여 협(劦)을 만들었는데 음(音)은 협(協)이다.” 하였고,
《만성통보》에는 “칼 도자[刀] 셋을 합해 여(刕)자를 만들었는데 음(音)은 여(黎)다.”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알지 못하겠다. 그러나 자서(字書)를 상고해 보면 세 개의 도(刀)자로 이루어진 여(刕)자가 있고 세 개의 조(刁)로 된 여(刕)는 없으니, 세 개의 도(刀)로 된 것이 음이 여(黎)라면 아마도 세 개의 조(刁)로 된 것은 와전인 듯하다.
그리고 구(苩)는 음(音)이 구(臼)인데 《북사(北史)》에 “초두[艸] 아래에 구(臼)를 붙여 만들었다.” 하였으며, 《만성통보》에는 “초두[艸] 아래에 구(臼)를 붙여 백(苩)을 만들었는데, 구(苩)의 음은 구(舊)고, 백(苩)의 음은 백(白)이다.” 하였다. 《운회(韻會)》에 “백제에 백씨(苩氏)가 있다.” 하였으니, 의당 초두[艸] 아래에 백(白)을 붙인 글자를 따라야 한다.
(25) 문씨(門氏) 《씨족서(氏族書)》에 “문사명(門思明)은 인천(仁川) 사람으로 정종(靖宗) 때에 어사중승(御史中丞)이었다.” 하였다.
(26) 아씨(牙氏) 《씨족서》에 “아응시(牙應時)는 명종(明宗) 때에 중랑장(中郞將)이었다.” 하였다.
(27) 빈씨(賓氏) 《씨족서》에 “빈우광(賓于光)은 수성(壽城) 사람으로 과거에 장원하였으며 또 제과(制科)에 합격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고, 필법(筆法)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었다.” 하였다.
(28) 풍씨(酆氏) 《씨족서》에 “풍순지(酆順之)는 정종(靖宗) 때에 감찰어사(監察御使)였다.” 하였다.
(29) 이씨(異氏) 《씨족서》에 “이응보(異應甫)는 현종(顯宗) 때에 좌복야(左僕射)였다.” 하였다.
(30) 승씨(僧氏) 《씨족서》에 “승우본(僧牛本)은 고종(高宗) 때에 도령령사(都領令史)였다.” 하였다.
(31) 태씨(太氏) 《씨족서》에 “태집성(太集成)은 고종(高宗) 때에 사공(司空)에 수직(守職)하였다.” 하였다.
(32) 간씨(簡氏) 《씨족서》에 “간유지(簡有之)는 충렬왕(忠烈王) 때에 중랑장(中郞將)이었다.” 하였다.
(33) 추씨(秋氏) 《씨족서》에 “추적(秋適)은 충렬왕 때에 좌사간(左司諫)이었다.” 하였다.
(34) 범씨(凡氏) 《씨족서》에 “범영부(凡永富)는 신우(辛禑) 때에 문화안집사(文化安集使)였다.” 하였다.
(35) 지씨(智氏) 《씨족서》에 “지채문(智蔡文)은 봉주(鳳州) 사람인데 현종(顯宗) 때에 우복야(右僕射)였다.” 하였다.
(36) 야씨(夜氏) 《씨족서》에 “야선단(夜先旦)은 충렬왕 때에 좌부승지(左副承旨)였다.” 하였다.
(37) 흔씨(昕氏) 《씨족서》에 “흔 적신(昕迪臣)은 풍천(豐川) 사람으로 고려 호장(高麗戶長)에 보승별장(保勝別將)이었는데 5세손(世孫) 섬(暹)이 충목왕(忠穆王)의 휘(諱)를 피하여 어머니의 성(姓)을 따라 권씨(權氏)가 되었으며, 벼슬은 검교예빈랑(檢校禮賓郞)이었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섬(暹)은 바로 수헌(睡軒) 권오복(權五福)의 5세조(祖)이다.
청장관전서 제55권 앙엽기 2(盎葉記二)
뉴(妞)ㆍ왁(
우리나라의 기이(奇異)한 성(姓) 중에 가장 기이(奇異)한 것들을 지금 적기로 한다.
(38) 자휘(字彙)에, “妞의 음은 뉴(紐)로 사람의 성(姓)인데, 고려(高麗)에 있다.” 하였다. 그러나 상고해 보면《자휘》에 비록 妞자의 성(姓)이 실려 있지만, 본관(本貫)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없다.
(39) 광주(廣州)에 왁(
(40) 연안(延安)에 遤자의 성이 있는데, 그 음은 훤응절(暄應切) 언문의 음은 ‘훵’이다. 이나 자서(字書)에는 없다.
(41) 강화지(江華志)에, 㔛자의 성(姓)이 실려 있다. 상고하건대 자서에는 劼자가 있는데, 음은 할(轄)이고《설문(說文)》에는 삼간다는 뜻으로 되어 있고, 상서(商書) 주고(酒誥)에는, 여할비은헌신(汝劼毖殷獻臣 너는 은의 좋은 신하들을 힘써 삼가라는 뜻)이라는 구절이 있으니, 㔛자는 혹 할(劼)자를 세로 쓴 것이 아닌지.
(42) 흥양(興陽)의 목동(牧童)에 乀자의 성이 있는데,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음은 ‘뼘’이다. 이후암(李厚菴) 만운(萬運) 이 지금《문헌비고(文獻備考)》를 증수하면서 나에게 기이한 성을 물어왔기에 이것으로 답하였다.【출처 : 한국고전종합DB】<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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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조선사(朝鮮史)에서는 많은 성씨(姓氏)들을 이야기하고, 설명(說明)하고 있지만 그것을 증거(證據)한다거나 고증(考證)해 줄 수 있는 것들은 없다. 왜 이런 현상(現狀)이 생기는 것일까?
2016년 09월 21일 <글쓴이 : 문무(文武)>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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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6.09.21 위에서 예를 든 "남평 문씨" 시조 이야기와 인구 수에 대한 언급은 그 시원과 변천과정과 증가한 인구 수를 예로 든 것일 뿐입니다.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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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단구리 작성시간 16.09.22 한번 가문의 족보를 가지고 비교 토론도 해봄이 좋을듯 싶습니다. 1927년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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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6.09.24 안년하세요!
"단구리"님 말씀대로 각 자 가지고 있는 족보를 가지고 서로 논의를 해보는 것도 좋은 생각이라고 봅니다.
그런 기회가 있을 수 있다면........많은 여러가지 의문점을 해소할 수 있는 기회도 될 수 있다고 보여지네요.
관심과 성원,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시길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