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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의 조선사 해설

여수(旅愁)와 산예(狻猊)

작성자문 무|작성시간17.03.10|조회수576 목록 댓글 0

 

                          여수(旅愁)와 산예(狻猊)

 

여수(旅愁)는 객수(客愁)와 같은 말로, 또 객한(客恨)이라고도 하는데 : 객지(客地)에서 느끼는 쓸쓸한 마음을 말한다. 고향(故鄕) 땅을 떠나 홀로 객지(客地)를 떠돌다 보면, 고향(故鄕)생각이 얼마나 나겠는가!

 

    서력(西曆) 727년쯤에 신라(新羅)의 승려(僧侶) “혜초(慧超)”가 천축(天竺)지방을 여행(旅行)하는 도중에 지은 시()중에 여수(旅愁)”가 있다.

 

             여수(旅愁)혜초(慧超) : 往五天竺國傳(왕오천축국전)

 

         月 夜 瞻 鄕 路 / 달 밝은 밤에 고향 길을 바라보니,

         浮 雲 飄 飄 歸 / 뜬구름은 너울너울 고향으로 돌아가네.   

         緘 書 參 去 便 / 나는 편지를 봉하여 구름 편에 보내려 하나,

         風 急 不 聽 廻 / 바람은 빨라 내 말을 들으려고 돌아보지도 않네.

         我 國 天 岸 北 他 / 내 나라는 하늘 끝 북쪽에 있고,

         邦 地 角 西 / 다른 나라는 땅 끝 서쪽에 있네.

         日 南 無 有 雁 / 더운 곳에는 기러기가 없으니,

         誰 爲 向 林 飛 / 누가 (계림?)을 향해 날아갈까?

 

    라고 하였는데, 사실 혜초(慧超)란 분은, 장안(長安)과 오대산(五臺山)의 사찰(寺刹)에 있었으며, 신라(新羅)로 귀국(歸國)한 흔적(痕迹)이 없다고 한다.

 

    위의 시문(詩文)중에서 몇 가지 이해(理解)곤란(困難)한 부분이 있다. 我 國 天 岸 北 他 : 내 나라는 하늘 끝 북쪽에 있고 / 邦 地 角 西 : 다른 나라는 땅 끝 서쪽에 있네.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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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통설(歷史通說)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 신라시대 승려 혜초(慧超)가 지은 인도 여행기. 필사본. 완질이 남아 있지 않고, 일부분만이 현존한다. 19083월 프랑스의 탐험가였던 펠리오(Pelliot,P.)가 중국 돈황(敦煌)의 천불동(千佛洞)에서 발견하였다. 원래는 3권이었던 듯하나, 현존 본은 그 약본(略本)이며, 앞뒤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1) 현존 본은 동부(東部)인도(印度)기행(紀行)으로부터 비롯되는데, 그곳에 진기한 나체족(裸體族)이 살고 있다고 하였다. 이어 쿠시나가라(Kushināgara)에 대한 견문으로, 이곳은 석가모니가 입멸(入滅)한 곳이며, 다비장(茶毘場)과 열반사(涅槃寺) 등이 있음을 기록하였다.

 

    2) 한 달 동안 다시 남쪽으로 여행하여 바라나시(Varanasi)에 이르렀는데, 이곳은 석가모니가 오비구(五比丘)를 위하여 최초로 설법한 곳이라 하였다.

 

    3) 다시 동쪽으로 여행하여 라자그리하(Rājagrha, 王舍城)에 닿아 불교 역사상 최초의 사원이었던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참배하고, 법화경 法華經의 설법지 영축산(靈鷲山)을 방문하였다.

 

    4) 다시 남쪽으로 길을 잡아 세존이 대각(大覺)을 이룬 부다가야(Buddhagaya)를 참배하여 대각사(大覺寺)와 보리수 등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5) 이어서 서북쪽으로 길을 찾아 중천축국으로 간다. 이곳에 이른바 사대영탑(四大靈塔)이 있다고 하였으며, 각각을 방문하였고, 또 석가의 탄생지인 룸비니(Lumbini)도 방문하였다고 한다. 다음 여행지는 남천축국인데 아잔타·엘로라 등은 방문한 흔적이 없다.

 

    6) 다시 서북으로 방향을 돌려 서천축국을 거쳐 북천축국을 방문하게 되는데, 지금의 파키스탄 남부 일대와 간다라(Gandhara) 문화 중심지를 차례로 방문하였고, 그 서쪽에 있는 현재의 파키스탄 서북 일대를 답사하였다고 한다.

 

    7)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현재의 카슈미르(Kashmir) 지방을 거쳐 대발률(大勃律소발률(小勃律) 등을 방문하였다고 한다.

 

    8) 이번에는 거꾸로 간다라지방을 거슬러 내려오면서 스와트(Swat)·길기트(Gilgit)·페샤와르(Peshawar) 등지를 방문하였고, 그 북쪽에 있는 오장국(烏長國구위국(拘衛國) 등도 답사하였다.

 

    9) 다시 실크로드를 따라 아프가니스탄을 지나 바미안에 이른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현재의 아프가니스탄과 소련의 국경지대인 투카라(吐火羅)로 간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페르시아(Persia)를 지난다. 안국(安國조국(曹國석과국(石騍國페르가나국(跋賀那國) 등은 방문하지 못한 채, 그 일대에서 수집한 이야기만을 기록하였다. 그들은 불교를 모르고 배화교(拜火敎)를 믿으며, 어머니와 자매도 아내로 맞는 등 진기한 풍속을 소개하였다.

 

    10) 또 바미안이나 카피스 등에서는 형제가 몇이건 공동으로 한 아내를 맞이한다고 기록하였다. 그곳에서부터 중국으로의 귀로를 잡아, 동쪽으로 지금의 파미르고원에 있던 호밀국(胡蜜國)을 지나서 식야국(識匿國)을 거친 다음 총령(葱嶺)을 지나 지금의 중국 영토인 갈반단국(渴飯檀國)에 도착한다.

 

    11) 동쪽으로 카시카르를 지나 구주국(龜註國)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때가 727(성덕왕 26) 11월 상순이었으며, 여기서 그의 여행기는 끝난다.

 

    왕오천축국전은 약본이기 때문에 인도의 각 지역은 물론,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들에 관한 서술이 지극히 간략하다. 어떤 곳은 지명이나 나라 이름 등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언어·풍속·정치 등 일반적인 언급도 빈약한 편이다. 따라서 사료적인 가치만 따지면 현장(玄奘)대당서역기 大唐西域記나 법현(法顯)불국기 佛國記등에 비하여 떨어진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면에서 이 책은 매우 중요한 사료적 의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전술한 인도 여행기들은 육로기행과 해로기행(海路紀行)인 데 비하여 이 책은 육로와 해로가 같이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전술한 여행기는 6세기와 7세기의 인도 정세를 말해 주는 자료이지만 이 책은 8세기의 사료라는 점이다. 8세기의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관해서는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인도제국의 제왕들이 코끼리나 병력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었는지, 아랍의 제국이 얼마만큼 인도 쪽으로 세력을 펼쳤는가 하는 점들을 시사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튀르크족이나 한족(漢族)의 지배하에 있던 나라들이 어디이며, 그 생활수준은 어떠하였는가 등도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일반적인 정치 정세 이외에 사회상태에 대한 사료적 가치가 돋보인다는 점이다. 불교의 대승이나 소승이 각각 어느 정도 행해지고 있는지, 또 음식·의상·습속·산물·기후 등도 각 지방마다 기록하고 있다. 중부 인도에서 어머니나 누이를 아내로 삼는다거나, 여러 형제가 아내를 공유하는 풍습이 있다는 등의 기록은 사실과 부합하므로 이 자료의 신빙성을 입증하고 있다.

 

이국적인 풍취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 점이 두드러진다. 인도에는 감옥이나 사형제도가 없고, 죄를 지은 이는 벌금으로 다스린다는 기록, 카슈미르지방에는 여자 노예가 없고, 인신매매가 없다는 등의 기록이 그것이다.

 

    혜초는 당시로 보아 국제적인 승려였음에 틀림없다. 신라에서 태어났고, 어렸을 때 중국으로 건너갔으며, 또 인도를 다녀왔다는 그의 행적은 무척 흥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1909년 중국학자 나진옥(羅振玉)에 의하여 왕오천축국전임이 확인되었고, 1915년 일본의 다카쿠스(高楠順次郎)에 의하여 그 저자가 신라 출신의 승려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1928년 독일학자 푹스(Fuchs,W.)에 의하여 독일어 번역이 나왔고, 1943년 최남선(崔南善)이 이 원문과 해제를 붙임으로써 널리 국내외에 알려지게 되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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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왕오천축국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저술 시기에 대해서는 본문에 開元十五年十一月上旬 至安西, 개원 15(음력) 11월 상순에 안서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개원 15년은 곧 727년이다.

 

    여행 경로 / 신라에서 바닷길로 인도에 다다랐다. 사대령탑(四大靈塔) 등의 모든 성적(聖蹟)을 순례하고 오천축국(五天竺國)의 각지를 두루 다녔다.

 

    인도의 폐사리국(吠舍釐國), 구시나국(拘尸那國, 쿠시나가라), 파라닐사국(波羅痆斯國, 파라날사국, 바라나시), 마게타국(摩揭陁國), 중천축국 갈나급자(中天竺國葛那及, 카나굽자), 중천축 사대탑(中天竺四大塔), 남천축국(南天竺國), 서천축국(西天竺國), 도란달라국(闍蘭達羅國, 사란달라국, 잘란다라), 소발나구달라국(蘇跋那具怛羅國), 탁사국(鐸社國, 탁샤르), 신두고라국(新頭故羅國, 신드구르지나),가섭미라국(迦葉彌羅國, 카슈미르)

 

    그 뒤에 길을 돌려 여러 곳을 다닌 뒤 대식국(니샤푸르)에 도착하여 동쪽으로 향했다.

 

    대발률국(大勃律國), 양동국(楊同國), 사파자국(娑播慈國), 토번국(吐蕃國, 티베트), 소발률국(小勃律國), 건타라국(建馱羅國, 간다라), 오장국(烏長國), 구위국(拘衛國), 람파국(覽波國, 남파국, 람파카), 계빈국(罽賓國, 카피시), 사율국(謝䫻國), 범인국(犯引國, 바미안), 토화라국(吐火羅國, 토카리스탄(발흐)), 파사국(波斯國, 파샤), 대식국(大食國, 니샤푸르), 대불림국(大拂臨國(비잔틴제국)

 

    대식국 동쪽에 여러 나라들이 있었다.

 

    호국(胡國){안국(安國), 조국(曹國), 사국(史國), 석라국(石騾國), 미국(米國), 강국(康國) }, 발하나국(跋賀那國), 골돌국(骨咄國, 골탈국), 돌궐(突厥), 호밀국(胡蜜國), 식닉국(識匿國).

 

    당나라 총령진(葱嶺鎭)에 도착하여 주변을 돌아다니다 둔황에 들렀다가 장안(長安)에 도착한다. 그 중간에 여러 곳을 다녔으며, 그 가운데 소륵, 우전, 언기, 구자는 당나라의 안서 4군이다.

 

    총령진(葱嶺鎮), 소륵국(疏勒國, 카슈가르), 구자국(龜兹國, 쿠차), 우전국(于闐國, 허톈(和闐, 호탄)), 안서(安西,안서도호부), 언기국(焉耆國, 옌치(焉耆)), 둔황, 장안.

 

    이 경로에 나타난 현대 지명은 절대적이지 않고, 학자에 따라 의견이 달라지기도 한다. 당시 중국과 인도와의 여로(旅路) 및 교역로를 아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혜초 이전에 서역을 방문하던 승려들은 해로만을 사용하거나 육로만을 이용했던 데 반해 혜초는 갈 때는 해로, 돌아올 땐 육로를 이용하여 당시의 여로를 모두 담고 있다. 또한 왕오천축국전은 8세기의 인도, 중앙아시아를 기록한 현재까지 유일한 사서라는 점에서도 가치가 크다. 불교적 측면에선 불교의 8대 성지를 모두 기록하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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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Daum백과] 혜초 다음백과, Daum / 혜초(慧超)

 

    출생일 : 미상 / 사망일 : 미상

 

    요약 / 인도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을 지었다. 700년을 전후하여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찍이 중국 광저우[廣州]에서 인도 승려 금강지(金剛智)에게 밀교를 배웠다.

 

    그 후 금강지의 권유로 구법여행에 나서 인도의 불교 유적을 순례하고 카슈미르, 아프가니스탄, 중앙 아시아 일대까지 답사했다. 그가 다시 장안(長安)으로 돌아온 것은 30세 전후로 추정된다. 733년 장안의 천복사(薦福寺)에서 금강지와 함께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 大乘瑜伽金剛性海曼殊室利千臂千鉢大敎王經을 연구했다. 7401월 금강지가 이 경을 번역할 때 필수를 맡았다. 그러나 이듬해 가을 금강지가 죽어 이 사업은 중단되었으며, 금강지의 유언에 따라 이 경의 산스크리트 원문은 742년 다시 인도로 보내졌다.

 

    그 후 773년경 대흥선사(大興善寺)에서 금강지의 제자 불공으로부터 이 경의 강의를 들었다. 불공은 유서에서 자신의 법을 이은 6대 제자 가운데 2번째로 혜초를 꼽았다. 불공이 죽은 후 동료들과 함께 황제에게 글을 올려, 스승의 장례 때 보여준 은혜에 감사하며 아울러 스승이 세웠던 사찰을 존속시켜달라고 청원했다. 그 뒤 수년 동안 장안에 머물다가, 780년 불공이 활동했던 오대산으로 갔다. 그 뒤 건원보리사에 머물면서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의 한역과 한자음사를 시도하여 약 20일 동안 이 한역본을 다시 채록했다. 이후의 기록은 전하지 않으며 신라로 귀국하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왕오천축국전3권 가운데 일부와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서 大乘瑜伽金剛性海曼殊室利千臂千鉢大敎王經序하옥녀담기우표 賀玉女潭祈雨表가 전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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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축국(天竺國)은 어디에 있었는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프랑스 탐험가인 폴 펠리오1,908년 돈황(燉煌)막고굴 장경동석굴(石窟)에서 발견(發見)하였다고 하는데, “신라(新羅)” 고승(高僧)이었던 혜초스님이 천축국(天竺國)을 여행(旅行)한 기록(記錄)이라고 한다.

 

    그러나 천축국(天竺國)은 어디에 있었던 나라였는가?하는 문제(問題)가 해결(解決)되지 않으면 답이 나올 수 없는 사안(事案)이다. 특히 혜초(慧超)의 시()를 보면 :

 

              我 國 天 岸 北 他 / 내 나라는 하늘 끝 북쪽에 있고,

                 邦 地 角 西 / 다른 나라는 땅 끝 서쪽에 있네.

 

    라고 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반도(半島)신라(新羅)가 북()쪽이 되고, 인도(印度)가 서(西)쪽 땅이 될 수 있을까? 한 번 따져보자! 세계지도(世界地圖)를 펼쳐 놓고 보면 : 반도 땅을 북()쪽이라 하고, 인도(印度) 땅을 서(西)쪽으로 표현(表現)한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방향(方向)이 전혀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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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산해경(山海經) 18/ 해내경(海內經) :東海之內,北海之隅,有國名曰朝鮮,天毒,其人水居,偎人愛之. : 동해(東海)의 안쪽, 북해(北海) 모퉁이에, 조선(朝鮮), 천독(天毒)이란 이름을 가진 나라가 있으며, 그 사람들은 물가에서 살며, 사람을 가까이 하며 사랑한다.고 하였다.

 

    郭璞云天毒即天竺國,貴道德,有文書,金銀,錢貨,浮屠出此國中也. : 곽박의 말에 따르면, 천독(天毒)은 곧 천축국(天竺國)이다. 도덕을 귀하게 여기고, 문서(文書)와 금은(金銀), 전화(錢貨)가 있고, 이 나라 안에서 부도(浮屠 : 부처)가 나왔다. 王崇慶云天毒疑別有意義.郭以為即天竺國,天竺在西域,漢明帝遣使迎佛骨之地.此未知是非也. : 왕숭경의 말에 이르면, 천독(天毒)은 의심스러우나 특별한 의미가 있다. 곽박(郭璞)은 곧 천축국(天竺國)이며, 천축(天竺)은 서역(西域)에 있으며, () 명제(明帝)가 사신을 보내 부처의 뼈를 가져온 땅이라고 하나, 이것의 옳고 그름은 알 수 없다. 珂案天竺即今印度,在我國西南,此天毒則在東北,方位迥異,故王氏乃有此疑.或者中有脫文訛字,未可知也.: 원가(袁珂): 천축(天竺) 곧 지금 인도(印度)이며, 아국의 서남(西南)에 있으며, 이 천독(天毒)은 동북(東北)측에 있다고 한 방위는 옳지 않다. 옛 왕씨(王氏)가 있다고 한 이것은 의심스럽다. 혹 이 가운데 빠진 글자가 있다고 한 것은 잘 알 수 없다.

 

(2) 史記 大宛列傳 :大夏在大宛西南二千餘里媯水南.其俗土著,有城屋,與大宛同俗.無大王君長,往往城邑置小長.其兵弱,畏戰.善賈市.及大月氏西徙,攻敗之,皆臣畜大夏.大夏民多,可百餘萬.其都曰藍市城,有市販賈諸物.東南有身毒國. : 대하(大夏) : 대하(大夏)는 대완(大宛)의 서남(西南) 2,000 여리 규수(嬀水) 남쪽에 있다. 그 풍습은 토착하며, ()과 집이 있고, 대완(大宛)과 풍습이 같다. 대 군장()은 없고, 성읍(城邑)에 소군(小君)장을 두었다. 그 병사들은 약해, 전쟁은 두려워하였으나, 시장에서의 장사는 잘했다. 이에 대월씨(大月氏)가 서쪽으로 옮겨가, 쳤으나 패하여 모두 신하가 되었다. 대하(大夏)는 백성들이 많아, 백여만쯤이 되었다. 그 도읍지는 람시성(藍市城)이며, 시장에서는 여러 물건들을 팔고 산다. 그 동남(東南)에 신독국(身毒國)이 있다.

    ⓐ〈大夏在大宛西南二千餘里媯水南.中略.其東南有身毒國. : 대하(大夏)는 대완(大宛) 서남(西南)2천 여리의 규수(嬀水)남쪽에 있다. 중략(中略). 그 동남(東南)신독국(身毒國)”이 있다.고 하였다. 규수(嬀水) 남쪽에 있으며, 그 동남(東南)지방이라 했으니, 현재의 지도로 보면 아프가니스탄 일부, 파키스탄, 인도. 네팔. 부탄등의 땅일 것으로 추측된다.

    身毒國:孟康云即天竺也,所謂浮圖胡也.正義一名身毒,在月氏東南數千里.俗與月氏同,而卑溼暑熱.其國臨大水,乘象以戰.其民弱於月氏.脩浮圖道,不殺伐,遂以成俗. : 신독국(身毒國): 맹강(孟康)의 말에 따르면, 곧 천축(天竺)이며, 소위 부도(浮屠)오랑캐이다. 정의(正義)에서 일명 신독(身毒)이다. 월씨(月氏) 동남(東南) 수천(數千)리에 있으며, 풍습은 월씨(月氏)와 같고, 천하고 축축하고 무덥고 덮다. 그 나라는 큰물에 임해 있고, 코끼리를 타고 싸우며, 그 백성들은 월씨(月氏)에 비해 약하다. 부도(浮圖)의 도를 닦으며, 침범하여 죽이지 않으며, 풍습(浮圖)을 이루려 한다.고 하였다.

 

(3) 구당서(舊唐書) 열전(列傳) :天竺國,即漢之身毒國,或雲婆羅門地也.在蔥嶺西北,周三萬余裡.其中分為五天竺其一曰中天竺,二曰東天竺,三曰南天竺,四曰西天竺,五曰北天竺.地各數千裡,城邑數百. : 천축국(天竺國), 곧 한()시대의 신독국(身毒國)인데, 혹은 파라문의 땅이라고 한다. 총령(葱嶺)서북(西北)에 있으며, 둘레가 3만 여리고, 그 가운데 5천축(天竺)이 나누어져 있다. 그 하나는 중천축이요, 두 번째는 동천축이요, 세 번째는 남천축이요, 네 번째는 서천축이요, 다섯 번째는 북천축이다. 땅이 각각 수천(數千)리이며, 성읍(城邑)이 수백(數百)이다. 중략(中略).이라고 하였다. 천축국(天竺國), 총령(葱嶺)의 서북(西北)쪽에 있다.고 하였다.

 

(4) 신당서(新唐書):天竺國,漢身毒國也,或曰摩伽陀,曰婆羅門.去京師九千六百裏,都護治所二千八百裏.居蔥嶺南,幅圓三萬裏,分東,西,,,中五天竺,皆城邑數百.中略. : 천축국(天竺國), ()나라 때의 신독국(身毒國)인데, 혹 마가타(摩伽陀)라고 이르는데, 파라문(婆羅門)이라고도 한다. 경사(京師)로부터 9,600리 떨어져 있으며, 도호치소로부터 2,800리이다. 총령(葱嶺)의 남()쪽에 살며, 폭원(幅員)3만 리인데, (),(西),(),(),() 다섯 천축(天竺)으로 나누어져 있고, 모두 성읍(城邑)이 수백(數百)잊다. 중략(中略).고 하였다.

 

(5) 해국도지(海國圖志) 22 : 北印度各國 :瀛環誌略曰阿富汗,波斯東境.明時裂波斯數城,自立為國.前此固統於波斯,別無名號也. : 영환지략(瀛環誌略)에서 이르기를 : 아부한(阿富汗), 파사(波斯)동쪽지경이다. ()나라 때 파사(波斯)의 몇 성()이 무너졌는데, 자립하여 나라가 되었다. 이 나라는 전()에 파사(波斯)에 늘 통치를 받아서, 이름이 없었다. 世多傳其兼並溫都斯坦,今考溫都斯坦,乃五印度總名. : 대대로 전해지기를 그 나라를 온도사탄이 겸병(兼倂)하였는데, 고찰해보면 온도사탄인데, 다섯 인도(印度)의 총칭(總稱)이다. 又聞見錄雲,敖罕之人,種類不一,有與內地回子相似者,有與安集延相似者,有與土爾扈特相似者,有毛發拳曲,與峨羅斯相似者. : 또 문견록(聞見錄)에서 전하기를 : 오한(敖罕)인은, 한 종류가 아니다. 내지(內地)의 회자(回者)와 서로 같은 자가 있고, 안집연(安集延)과 서로 같은 자가 있고, 토이호특(土爾扈特)과 같은 자가 있는데, 손과 팔다리에도 털이 있고, 아라사(峨羅斯)와 서로 같은 자도 있다. 又一種人亦回子衣帽,須繞頰如蝟,而赤染以茜,其人多力善用木矛,西域人多畏之. : 또 한 종류의 사람들은 회자(回者)의 의모(衣帽)를 하고, 수염이 뺨을 두르고 있어 고슴도치와 같다. 꼭두서니()로 붉은 색으로 물들이는데, 그 사람들은 힘이 세고 나무로 만든 창을 적절하게 사용하기 때문에, 서역(西域)인들이 다 두려워한다. 又一種人圓領大袖,衣冠類漢唐,貌清奇似朝鮮,人或謂是後漢之遺種雲. : 또 한 종류의 사람들은 옷깃은 둥글고 소매는 넓고 크며, 의관(衣冠)은 한당(漢唐)()이고, 얼굴()이 맑고 선명하고 뛰어난 것이 조선(朝鮮)과 닮았는데, 사람들은 혹 본시 후한(後漢)의 유종(遺種)인가하였다. 又雲敖罕西域之大國,亦西域之亂邦 : 또 전하기를, 오한(敖罕)은 서역(西域)의 대국(大國)인데, 또한 서역(西域)의 어지러운 나라(亂邦)이다. 라고 하였다.


    북인도(北印度)가 어딘가? () 인도(印度) 서울인 뉴델리의 북방(北方)지대(地帶), 파키스탄 북부(北部)지방과 아프가니스탄, 파미르고원지대와 중앙(中央)아세아(亞細亞), 타클라마칸사막지대(沙漠地帶)와 서장(西藏)의 최 서(西)쪽 지방이다. 이 주변(周邊)오한(敖罕)들이 있었다고 해국도지(海國圖志), 영환지략(瀛環誌略)을 인용(引用)하여 설명(說明)하고 있다. () :

 

    ➨《又一種人圓領大袖,衣冠類漢唐,貌清奇似朝鮮,人或謂是後漢之遺種雲. : 또 한 종류의 사람들은 옷깃은 둥글고 소매는 넓고 크며, 의관(衣冠)은 한당(漢唐)과 유사(類似), 얼굴()이 맑고 선명하고 뛰어난 것이 조선(朝鮮)과 닮았는데, 사람들은 혹 본시 후한(後漢)()의 후예 또는 한인(漢人)의 유종(遺種)인가하였다.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의관(衣冠)은 한당(漢唐)과 유사(類似)하고, 얼굴은 맑고 선명하여 뛰어난 것이 조선(朝鮮)과 같다(닮았다). 이러한 사람들이 혹(), ()의 후예(後裔), 또는 한인(漢人)인가 하였다., 이런 내용(內容)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얼굴생김새가, 맑고 선명하고 뛰어나 조선(朝鮮)인을 닮았다면서, 혹시 한()의 유종(遺種)인가하였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한인(漢人)전한(前漢) 또는 후한(後漢) 또는 화인(華人)은 조선인(朝鮮人)이었다는 말과 같지 않은가!

 

    통전(通典) 서역(西域)나라 설명(說明)에서도, 고려인(高麗人)과 같은 족류(族類)들이 살았는데, 그들의 모든 것들이 화하(華夏)와 같다.고 하였다.

 

    조선(朝鮮)이란 하나의 나라를 말하는 것이 아닌, 여러 제후국(諸侯國)을 거느린 왕조(王朝)로써, 천자국(天子國)이었다는 것이며, 괄지지(括地志)에서도 말했듯이 고구려(高句驪). 부여(夫餘). 예맥(穢貊). 옥저(沃沮)등이 단군(檀君)의 통치를 받았다고 한다면 단군(檀君)은 천자(天子). 여기에 ()”를 추가(追加)하여, ‘대조선(大朝鮮)’이란 이야기는 하지말자. 스스로 폄하(貶下)하는 이야기가 되니 말이다.

 

    조선(朝鮮)을 이루는 여러 나라() 중에서 하나의 나라가, 천축(天竺)과 함께 주위에 있었으며, 이들은 물가에서 서로 가깝게 지내며, 서로를 사랑하며 살았다.고 한다면, 뭐가 잘못된 설명(說明)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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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삼국사기(三國史記) 32 ()편을 보면 : 신라오기(新羅五伎)의 하나라는 산예(狻猊)”가 있다. 최치원(崔致遠)의 향악잡영(鄕樂雜詠)에도 있다고 전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32 / / 新羅 / 狻猊

 

    일만(一萬)리 길 걷고 걸어 사막을 지나오니 : 遠 涉 流 沙 萬 里 來

    털가죽은 헤어지고 먼지가 쌓였는데 : 毛 衣 破 盡 着 塵 埃

    흔드는 머리, 흔드는 꼬리에 어진 모습 배었구나. : 搖 頭 掉 尾 馴 仁 德

    웅장한 그의 기상, 모든 짐승이 못 미치리. : 雄 氣 寧 同 百 獸 才

 

    신라오기(新羅五伎) 중에서 그 유래(由來)를 직접적(直接的)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사자춤인 산예(狻猊)이다.하였다. 곧 신라(新羅)에서 풍속(風俗)으로 하던 사자놀이는, 저 멀리 인도(印度)로부터, 총령(葱嶺)을 지나,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와 신강성(新疆省)의 사막지대(沙漠地帶)를 지나, 중원대륙(中原大陸)으로 왔다는 이야기다.

 

    일만(一萬)리 길의 사막지대(沙漠地帶=流砂)를 지나서, 대륙(大陸) 땅에 왔다는 것이지, 반도(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를 거쳐서, 또 남하(南下)하여, 경상도(慶尙道) 모퉁이 땅으로 들어왔다는 이야기는 흔적(痕迹)조차 발견할 수 없다. 최치원(崔致遠)의 향악잡영(鄕樂雜詠)에도 기록(記錄)되어 있다고 하니, 최치원(崔致遠) 이전(以前)에 신라(新羅)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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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통설(歷史通說) /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산예(狻猊)

 

    신라오기(新羅五伎)의 하나. 최치원(崔致遠)은 그의 향악잡영 鄕樂雜詠5수에서 산예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 “일만리라 유사에서 건너왔기로, 누런털은 다 빠지고 먼지는 부얘. 몸에 배인 착한 덕에 슬겁게 노니, 온갖 짐승 재주좋다 이와 같으랴(遠涉流沙萬里來 毛衣破盡着塵埃 搖頭掉尾馴仁德 雄氣寧同百獸才).” 신라오기 중에서 그 유래를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사자춤인 산예이다.

 

    시에서 읊은 유사(流沙)는 원래 고비(Gobi, 戈壁)사막을 이른다. 사자무(獅子舞)는 인도 특유의 동물의장무(動物擬裝舞)로서 서역과 동방 여러 나라에 널리 유행하게 된 무악(舞樂)으로, 그 여풍이 중국·한국·일본 등지에 지금도 전해온다.

 

신라의 사자기(獅子伎)는 구자악(龜玆樂)에서 온 중국의 서량기(西凉伎) 계통의 놀이를 받아들인 것이며, 일본의 사자무 역시 한국을 거쳐 받아들인 기악(伎樂)과 무악 그리고 산악(散樂) 이래의 대륙계의 오랜 역사를 가지며, 일본 예능사(日本藝能史)에서 사자물(獅子物)’이라는 계보마저 성립시키기에 이르고 있다.

 

    사자는 한국에 일찍 소개되었는바, 그 기록이 지증왕 13(512) 이사부(異斯夫)의 우산국(于山國) 정벌기사에 나온다. 또한 삼국사기악지(樂志)에는 우륵(于勒)이 지은 12곡 중에 사자기가 제8곡으로 들어 있다. 백제기악(百濟伎樂)에도 사자기가 있었음이 일본 악서(樂書)의 기록에 나오며, 신라는 불교와 관련된 우수한 사자의 조각품을 남기고 있다.

 

    이 신라오기의 사자무는 이미 향악화되었으리라 짐작되지만, 아직 서역계의 사자춤의 모습이 보였으리라 생각된다. 그 뒤 점차 한국화되어서 조선시대 김홍도(金弘道)의 그림으로 전하는 평안감사환영도 平安監司歡迎圖화성성역의궤 華城城役儀軌낙성연도 落成宴圖에 보이는 사자춤의 모습이 되고, 현존하는 민속극인 북청사자놀음·봉산탈춤, 오광대와 야류(野遊)에도 각각 민속사자춤이 추어지고 있다.(인용/). 출처 : [Daum백과] 산예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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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설명을 보면 : 이해(理解)할 수 없는 설명(說明)으로 꽉 차있다.

 

    신라의 사자기(獅子伎)는 구자악(龜玆樂)에서 온 중국의 서량기(西凉伎) 계통의 놀이를 받아들인 것이며라고 하였는데, 고구려기(高句麗伎)가 서량(西凉)과 밀접(密接)한 관계(關係)에 있다는 이야기는 백과사전(百科事典)에도 있는 말이다. 그러나 반도(半島) 신라(新羅)가 무슨 재주로 서량기(西凉伎)를 받아들였을까?

 

    사자는 한국에 일찍 소개되었는바, 그 기록이 지증왕 13(512) 이사부(異斯夫)의 우산국(于山國) 정벌기사에 나온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사자란 사자(獅子)를 말하는 것일 게고, 그런 동물(動物)이 우산국(于山國)에 있었다는 이야긴가? 아니면?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智證麻立干 : 十三年,夏六月,于山國歸服,歲以土宜爲貢.于山國在溟州正東海島,或名鬱陵島.地方一百里,恃嶮不服. : 13년 여름 6, 우산국이 귀순하여, 매년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기로 하였다. 우산국은 명주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인데, 울릉도라고도 한다. 그 섬은 사방 1백 리인데, 그들은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었다.伊湌異斯夫爲何瑟羅州軍主,謂于山人愚悍,難以威來,可以計服,乃多造木偶師{},分載戰船,柢其國海岸,誑告曰:汝若不服,則放此猛獸踏殺之.國人恐懼則降. : 이찬 이사부가 하슬라주의 군주가 되었을 때, 우산 사람들이 우둔하고도 사나우므로, 위세로 다루기는 어려우며, 계략으로 항복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곧 나무로 허수아비 사자를 만들어 병선에 나누어 싣고, 우산국의 해안에 도착하였다. 그는 거짓말로 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않는다면 이 맹수를 풀어 너희들을 밟아 죽이도록 하겠다고 말하였다. 우산국의 백성들이 두려워하여 곧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반도(半島)에서 사자(獅子)가 자생(自生)하고 있었을까? 또 사자(獅子)가 맹수(猛獸)의 왕()이란 것도 당시(當時) 신라(新羅)인들이 알고 있었을까? 사자(獅子)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허수아비 사자(獅子)를 만들어 전쟁(戰爭)에 투입(投入)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반도(半島) 땅이 신라(新羅)일 수 없다는 얘기다. 반도(半島) ()쪽 지방에 사자(獅子)가 있었다는 그 징후(徵候)나 흔적(痕迹), 학계(學界)에 보고(報告)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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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에서, 산예(狻猊)공연단(公演團), 인도(印度) 땅에서 북진(北進)하여 총령(葱嶺)주위(周圍)에서, 다시 동()쪽으로 일만(一萬)리 사막지대(沙漠地帶)를 거쳐, 대륙(大陸)을 지나, 계속 동진(東進) 고구려(高句驪) 땅인 요서(遼西)지방과 요동(遼東)지방을 거쳐, 고구려(高句驪) 황도(皇都)였던 평양성(平壤城)=장안성(長安城)을 무사히 통과(通過), 남하(南下)하여 동남(東南) 모퉁이에 도착(到着)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면 왜 고구려(高句驪)와 백제(百濟)에는 산예(狻猊)가 전수(傳授)되지 않고, 유독(惟獨) 신라(新羅)만이 그것을 받아들여, 나중엔 풍속화(風俗化)까지 되었을까? 고구려(高句驪)가 이들 산예(狻猊)공연단(公演團)들을 자국(自國)내 동서(東西) 수천(數千), 남북 수천(數千)리 땅을 통과(通過)시켜 주었을까? 이건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또 이들 공연단(公演團)들은, 언제 그들 나라로 귀환(歸還)했을까?

 

    조선사(朝鮮史) 이야기만 나오면, 무엇하나 제대로 설명(說明)되는 것들이 없다. 왜곡(歪曲)하고, 조작(造作)하고, 뒤죽박죽을 만들어 놓은 결과(結果).

 

    혜초(慧超)의 천축국(天竺國) 여행(旅行)과 산예(狻猊)가 신라(新羅)에 들어올 수 있었던 시기(時期)? 또 혜초(慧超)가 반도(半島) 땅에서 대륙(大陸)으로 건너 간 승려(僧侶)라는 이야기도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 해설(解說)일 뿐이다. 왜냐하면 혜초(慧超)가 반도(半島)로 귀환(歸還)했다는 흔적(痕迹)이 없기 때문이다.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는 망국사관(亡國史觀)이다. ‘사드전개문제(展開問題)로 대륙(大陸)애들의 보복(報復)전이 시작되자, 우리나라 언론(言論)들이 하는 말에, 옛 적에 조공(朝貢)을 바치던 속국(屬國)이 아니다.”라는 등()의 기사가 있었는데,

 

    이 말은,옛 적에는 중국(中國)에 사대(事大)하며, 조공(朝貢)을 바치고, 책봉(冊封)까지도 허락(許諾)을 받아야 했지만, 지금은 아니다.라는 뜻일 게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사들을 내보내는 언론인들이나 국민들은, 과거(過去)에 조선왕조(朝鮮王朝)가 중국(中國)에 사대(事大)하며, 조공(朝貢)을 바치고, 책봉(冊封)까지 허락(許諾)받아야 했다는 것을 보았는가?묻지 않을 수 없다.

 

    무엇으로 그것을 기정사실화(旣定事實化)하느냐 하는 거다. 스스로 경험(經驗)해보지 못한 사실(事實), 무엇으로 그런 사실들을 알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뻔하지 않은가! 공교육(公敎育)이란 미명하(美名下)에 획책(劃策)된 정권(政權)의 교육(敎育)탓이다. 일제(日帝)가 만들고, 일제(日帝)가 남기고 간 그 유산(遺産)을 하나님 모시듯 추종(追從)하던 식민사학자(植民史學者)들과 이들과 야합(野合)한 정권(政權)탓이다.

 

    만약(萬若), 우리가 중국(中國)의 당사자(當事者), ()이며, 중화(中華)라고 배웠다면고려인(高麗人)은 중화(中華)이며, 화인(華人)이라고 가르치고, 배웠다면이런 불필요(不必要)한 소모전(消耗戰)은 없었을 거다. 

                          20170310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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