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穢)·맥(貊)=예맥(穢貊)은 서역(西域)의 나라(國)?
○ 예맥(穢貊)은 「예맥(濊貊) 또는 예맥(獩貊) 또는 예맥(薉貊)」이라고도 하는데, 예(濊)와 맥(貊)을 별도부족(別途部族)으로 말하기도 한다. ‘예(穢)=예(濊)…맥(貊)…예맥(濊貊)=예맥(穢貊)’등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명확(明確)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가장 일반적(一般的)인 한국사(韓國史)해설(解說)은 : 「고대 한민족의 종족 이름으로 한반도 북부와 중국의 동북부에 살던 한민족(韓民族)의 근간이 되는 민족 중 하나로 보는 게 마땅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主張)은 :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주장(主張)하는 것과 한 치의 차이(差異)도 없는 그 내용(內容) 그대로다. 식민사관(植民史觀)이나 반도사관(半島史觀)은, 한 글자도 틀리지 않는 내용(內容)으로 설명(說明)하고 있다.
여기서 한반도(韓半島)북부(北部)는 어디고, 중국(中國)의 동북부(東北部)는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별도(別途)라는 것일까? 똑같은 곳, 똑같은 땅을, 왜 이렇게 번잡(煩雜)하게 표현(表現)하고 있을까.
○「맥(貊)=맥(貉)」에 대해서, 전한서(前漢書) 본기(本紀) : 한 고조(漢高祖) 4년(기원전 203) 8월에, 한 왕(漢 王)이 초(楚)를 공격할 때, 「북맥(北貉)과 연(燕)나라 사람들이 날쌔고 용감한 기마(騎馬)를 보내 한(漢)을 도왔다(北 貉, 燕 人 來 致 梟 騎 助 漢).」고 하였다. 유방(劉邦)은 항우(項羽)와 함께 천하(天下)를 놓고, 한 판 승부를 겨룰 때다.
응소(應劭)는 이르기를 : 〈북맥(北貉)은 나라(國)이다 : 應 劭 曰 :北 貉 , 國 也.〉라고 했고, 안사고(顏師古)는 이르기를 : 〈맥(貉)은 동북방(東北方)에 있는데, 삼한(三韓)에 속한 모든 맥(貉) 류(類)이다. 師 古 曰 : 貉 在 東 北 方 , 三 韓 之 屬 皆 貉 類 也〉라고 했다.
「북맥(北貉)이란 말 그대로, 북(北)쪽의 맥(貉)들을 말하는 것이고, 유방(劉邦)의 전한(前漢)은 장안(長安)중심(中心)의 왕조(王朝)다.」 그렇다면 당시의 북맥(北貉)들이 살았던 「북방지대(北方地帶)는 삼한(三韓)의 땅이었다.」는 뜻이다. 이들 ‘북맥(北貉)’이 한반도(韓半島) 북방(北方)이나 강원도(江原道)지방에 있었다는 말은 코-메-디다. 반도(半島)에서는 :
심지어 「한반도(韓半島) 강원도(江原道) 강릉(江陵)지방이 예국(濊國)이 있었다.」는 이야기까지 만들어냈다. 강릉시(江陵市)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
《강릉시는 옛 부터 예맥족이 살던 곳으로 기원전 129년에는 위만조선에 영속하고 있었으며, 기원전 128년에 예맥의 군장인 남려가 위만조선의 우거왕을 벌하고 한나라에 귀속, 창해군의 일부가 되었다가 고구려 미천왕 14년(313년)에는 고구려 세력에 합치게 되어 하서랑 또는 하슬라라고 불리었다. 그 후 신라 내물왕 때에 신라의 영역으로 되었으며, 경덕왕 16년(757년)에 명주라 하였고, 고려 충열왕 34년(1308년)에 강릉부로 개칭 되었다. 공양왕 때에는 강릉대도호부가 있어 북쪽으로 원산에서 남쪽으로는 울진에 이르는 동해안 일대를 관할하였다. 조선시대로 들어 태조 4년(1395년)에 강원도로 개칭하였고, 고종 33년(1896년)에 강릉군으로 되어 21개 면을 관할하였다. 중략.》인용/끝.
〈기막힌 이야기들을 흥미롭게 만들어 놓았다. 이게 대한민국(大韓民國)의 현실(現實)이다. 반도(半島) 북방(北方) 만주(滿洲)지방에 있었다고 하고는, 그것도 모자라 반도(半島)의 허리쯤에 갖다 놓고는 이곳이 옛 예맥(濊貊)이 살던 곳이다.〉 라고 말한다.
➨ 그렇다고 누굴 탓할 수는 없다. 온 나라가, 지금(只今)까지 그렇게 해오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니 말이다. 거짓과 진실(眞實)을 구별(區別)하지 못하는 우리들 사정(事情)이니, 누굴 탓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들만이라도, 꼭 한 번 짚고 넘어가야 되지 않을까? ‘예맥(濊貊)=예맥(穢貊)=예맥(獩貊)=예맥(薉貊)’은 한반도(韓半島)와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북방(北方) 부족(部族)이었으며, 그곳은 오늘날의 중앙아세아(中央亞細亞)와 근접(近接)한 곳이다.
○ 예(濊)와 맥(貊)에 대해,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는, 고전(古典)을 인용(引用)하여 말하기를(관심부분(關心部分)만을 발췌(拔萃) :
㉮《급총주서(汲冡周書) : 성주(成周)의 회합에서 서면(西面)한 자는, 정북방의 예인(穢人) 전아(前兒)인데, 전아는 원숭이와 같이 생겼다. 》
㉯《급총주서주 : 예(穢)는, 한예(寒穢)로 동이의 별종이다. 》
㉰《상서 : 무왕이 상(商)을 정벌하자, 화하(華夏)와 만맥(蠻貊)이 모두 다 복종하였다. 》
㉱《주례(周禮) : 하관(夏官) 직방씨(職方氏)는, 구맥(九貉)의 사람을 관장한다.》
㉲《주례주(周禮註) : 구맥은 주나라에서 복속한 나라의 숫자이다. 주례소(周禮疏) : 구맥은 바로 구이(九夷)로 동방에 있다.》
㉳ 《사기 흉노전(凶奴傳) : 묵특(冒頓)이 강대하여 북방의 오랑캐를 모두 복종시켰다. 좌방(左方)의 왕(王)과 대장(大將)들은 동쪽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상곡(上谷)과 맞닿아 있고, 그 이후는 동쪽으로 예ㆍ맥ㆍ조선과 접해 있었다.》
㉴《후한서 : 명제(明帝) 영평(永平) 2년(59) 정월 신미에 광무황제(光武皇帝)를 명당(明堂)에다 제사 지내었는데, 오환(烏桓)ㆍ예(濊)ㆍ맥(貊)이 모두 와서 제사를 도왔다.》
㉵《후한서 : 광무제 건무 원년에 오한(吳漢)이 우래(尤來), 대창(大槍) 등 적(賊)을 추격하여, 요서(遼西)와 요동(遼東)에 들어 왔다가 오환(烏桓)과 맥(貊) 사람들에게 격파되어 몰살하였다.》
➨ 위 글에서 보듯이 《“예(濊) 또는 맥(貊)”등은 주(周)【기원전(紀元前) 1,121년】나라가 건국(建國)되기 그 이전(以前)에 있었던 나라(國)들이며, 구이(九夷)는 구맥(九貊)이며, 이들은 모두 동방(東方)에 있다.》고 하였다.
이는 옛 고전(古典)에서 말하는 것이지, 필자(筆者)의 개인적(個人的)인 주장(主張)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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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도사관(半島史觀)과 식민사관(植民史觀)의 “예맥(濊貊)”에 해설(解說)은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예맥[濊貊] : 예맥족(濊貊族) 고대 만주지역에 거주한 한국의 종족 명칭.
예(濊)와 맥(貊)으로 나누어 파악하기도 한다. 예·맥·예맥의 상호관계와 그 종족적 계통에 관해서는 일찍부터 논란이 되풀이되어 왔다. 예맥에 대해서는 예와 맥으로 나누어 보거나, 예맥을 하나의 범칭(汎稱)으로 보는 견해, 예맥은 맥의 일종이며, 예는 예맥의 약칭이라는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예맥 [濊貊]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 예맥[濊貊] : 한민족(韓民族)의 근간이 되는 민족. 맥(貊:貉), 또는 예(濊:穢 ·薉)라고도 약칭하였다. 중국 고전의기록에 의하면 《시경(詩經)》 《논어(論語)》 《중용(中庸)》 《맹자(孟子)》에는 맥(貊)으로, 《사기(史記)》의 <흉노전(匈奴傳)> <화식전(貨殖傳)>에는 예맥으로 기록되어 있다. 맥족의 원주지에 대한 명확한 근거는 없으나 《위지(魏志)》 <고구려전>에 따르면 대수(大水:漢代에 鹽難水라고 하였던 鴨綠江) 유역에 거주한 부족과 소수(小水:漢代에 馬訾水라고 하였던 渾江) 유역에 거주한 2개의 집단이 있어 각기 수장(首長)을 추대하고 있었는데, 한인(韓人)들이 소수지역에서 거주한 집단을 소수맥이라 칭하였다. 또한 《한서(漢書)》 <무제기 원삭원년조(武帝紀 元朔元年條)>와 《후한서(後漢書)》 동이전 예조(東夷傳 濊條)에 보면 BC 128년 예의 군장(君長)인 남려(南閭)는 조선왕 우거(右渠)와의 관계를 끊고 그가 지배하던 전예맥사회의 인구 28만을 이끌고 한(漢)의 요동군(遼東郡)에 가서 내속(內屬:半 예속적 관계)을 청하였다.
무제는 그곳에 창해군(蒼海郡)을 설치하여 이들을 거주하게 하였으나 BC 126년에 폐지하였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당시의 남려는 대수맥과 소수맥을 연합한 최고의 맹주(盟主)였음을 알 수 있다. 예맥족은 이후 부여(扶餘) ·고구려 ·동예(東濊) ·옥저(沃沮) 등으로 중국 북동부와 한반도의 동부 및 중부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또 고조선의 준왕(準王)이 남으로 망명할 무렵 북방에서 함께 내려온 이주민들은 한강 이남 지역에서 토착민과 연합하여 삼한(三韓)이라는 연방체를 만들었다. 여기에 고구려의 한 갈래인 위례(尉禮)가 한강 유역에 자리잡으면서 차차 커져서 백제가 되었는데, 이 또한 예맥족의 나라이다.
이 사실로 미루어 예맥족은 초기에 숙신(肅愼)과 동호(東胡) 사이에 끼어 중국의 쑹화강[松花江] 및 헤이룽강[黑龍江]과 압록강 ·두만강 유역 및 한반도 북부 지역인 함경도 ·강원도 등지에 걸쳐 살고 그 갈래가 남부에 백제를 이루며 번창한 대민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종족상으로는 알타이어계(語系)의 퉁구스족(族)에 속하는 한 갈래이다. 농경문화의 경제력을 기반으로 발전하면서 한민족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예맥 [濊貊] (두산백과)
(3) 예맥(濊貊)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예맥(濊貊)은 고대 한민족의 종족명으로 한반도 북부와 중국의 동북부에 살던 한민족(韓民族)의 근간이 되는 민족 중 하나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에 관한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예(濊)와 맥(貊)을 갈라 보는 견해에서는 예족은 요동과 요서에 걸쳐 있었고 맥족은 그 서쪽에 분포하고 있다가 고조선 말기에 서로 합쳐진 것이라고 보며, 예맥(濊貊)을 단일종족으로 보는 견해에서는 예맥은 고조선의 한 구성부분을 이루던 종족으로서 고조선의 중심세력이었다고 본다.
예맥은 맥(貊·貉) 또는 예(濊·穢·薉)로도 불렸는데, 서쪽으로는 동호(東胡), 동쪽으로는 숙신(肅愼)과 접해 있었다.
예맥은 기원전 2~3세기 경부터 송화강, 압록강 유역과 동해안 일대(한반도의 평안도·함경도·강원도, 만주의 랴오닝 성과 지린 성)에 걸쳐 정착하며 활동한 대민족으로 추측된다. 부여(扶餘)·고구려·옥저·동예 등으로 부르는 여러 족속들은 모두 예맥에 포괄되며, 여기에 부여의 한 갈래로 한강 유역에 자리잡고 커진 백제 역시 예맥족의 나라이다.
《삼국지》〈위서〉「동이전」에 따르면 예족은 호랑이에 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곽박의 《이아(爾雅)》, 《일본서기》 등을 근거로 '맥(貊)'이 곰을 의미했고 예족과 맥족의 관계가 단군신화에 반영되었다는 주장이 있다.[2] 이로부터 단군신화(檀君神話)에는 하늘과 태양을 숭배하는 천신족(天神族)이 곰을 토템(totem)으로 하는 맥족(貊族)과 호랑이를 토템으로 하는 예족(濊族)을 평정하고 복속시키는 사실을 설화로서 전해주는 신화(神話)로 남아있다고 여겨지고 있다.[1]
대한민국 학계에서는 예맥이 예와 맥으로 구분되지만 서로 다른 계통이 아닌 하나의 계통(系統)이며, 다만 세부적으로 갈라진 갈래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즉, 예와 맥은 사회적·정치적으로 서로 구분이 되지만 종족 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4) 예맥족[濊貊族] / 한국고중세사사전 : 고대 한민족의 종족명. 예족과 맥족을 나누어 따로 보는 견해도 있고, 예맥을 단일종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예와 맥을 갈라 보는 견해에 의하면 예족은 요동과 요서에 걸쳐 있었고, 맥족은 그 서쪽에 분포하고 있다가 고조선 말기에 서로 합해진 것으로 본다. 예맥을 단일종족으로 보는 견해에 의하면 예맥은 고조선의 한 구성부분을 이루던 종족으로서 고조선의 중심세력이었다고 본다.[네이버 지식백과] 예맥족 [濊貊族] (한국고중세사사전, 2007. 3. 30. 가람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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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조선사(朝鮮史)=한국사(韓國史)’ 해설은 철저(徹底)하게 한반도(韓半島)와 그 부속도서 위주(爲主)로 잘 짜진 각본(脚本)처럼 빈틈없이 꾸며져 있다.
예맥(濊貊)이란 종족(種族) 또는 부족(部族)이 반도북방(半島北方)과 동해(東海)연안(沿岸)에 자리 잡고 있었고, 그들을 가리켜, 「날쌔고 용맹한 기마(騎馬)」라고 불렀을까? 또한 그들을 가리켜 ‘북맥(北貊)=북맥(北貉)’이라고 호칭(呼稱)했을까?
〈이런 일은 없었다.〉는 것이 고전(古典)에서 말하는 바다. ‘북맥(北貊)=북맥(北貉)’이란 :「대륙(大陸)의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있었던 맥(貊)」이란 뜻이다.
➨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의 한 기록(記錄)을 보면서, 조선사(朝鮮史)를 다시 한 번 새롭게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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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讀史方輿紀要(독사방여기요) 西域(서역) 寧遠國(영원국)
《寧遠國在故曹國東北.本名破落那.漢大宛別部也.晉咸康中,代王什翼犍之地,東自穢貊,西及破落那.中略. : 영원국(寧遠國)은 예전의 조국(曹國) 동북(東北)에 있다. 본명(本名)은 파락나(破落那)이다. 한(漢) 때의 대완(大宛)의 별부(別部)이다. 진(晉)나라 함강(咸康)중에, 대왕(代王) 십익건(什翼犍)의 땅으로, 동(東)쪽으로 예맥(穢貊)으로부터, 서(西)으로 파락나(破落那)에 미쳤다. 중략(中略). 北史:破落那即漢大宛,去代萬四千四百五十里。: 북사(北史)에서 이르기를 : 파락나(破落那)는 곧 한(漢)의 대완(大宛)으로, 대(代)로부터 14,450리 떨어져있다. 唐史:顯慶中,拔汗那內附.自是屢來貢獻.拔汗那者,亦曰汗.後魏曰破落那.中略. : 당사(唐史)에 의하면 현경(顯慶)중에, 발한나(拔汗那)가 내부(來附)하였다. 발한나(拔汗那)는 또한 ( )한(汗)이다. 후위(後魏)때 파락나(破落那)를 일컫는다. 중략(中略) : 開元末,以拔汗那助唐平突騎施吐火仙可汗,改其國曰寧遠,冊其王為奉化王.其後分為二:一治呼悶城,一治遏塞城. : 개원(開元)말에, 당(唐)이 돌기시(突騎施) 토화선가한을 평정할 때 발한나(拔汗那)가 조력(助力)하여, 그 나라를 영원(寧遠)이라고 고치고, 그 왕(王)을 봉화왕(奉化王)으로 봉(封)하였다. 그 뒤로 둘로 나누어졌는데 : 하나는 호민성(呼悶城)에서 다스렸고, 하나는 알새성(遏塞城)에서 다스렸다. 杜環征行記:拔汗那國,在恆邏斯南千里,隔山,東去疏勒二千餘里,西去石國千餘里. : 두환(杜環)의 정행기(征行記)에 의하면 : 발한나국(拔汗那國)은, 항라사(恆邏斯) 남쪽 천리(千里)에 있는데, 산(山)에 막혀, 동(東)쪽으로 소륵(疏勒)까지 2천여(千餘)리 떨어져 있고, 서(西)쪽으로 석국(石國)까지 천여(千餘)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➊ 위 인용문(引用文)에서 :〈寧遠國在故曹國東北.本名破落那.漢大宛別部也.晉咸康中,代王什翼犍之地,東自穢貊,西及破落那.中略. : 영원국(寧遠國)은 예전의 조국(曹國) 동북(東北)에 있다. 본명(本名)은 파락나(破落那)이다. 한(漢) 때의 대완(大宛)의 별부(別部)이다. 진(晉)나라 함강(咸康)중에, 대왕(代王) 십익건(什翼犍)의 땅으로, 동(東)쪽 예맥(穢貊)으로부터, 서(西)쪽으로 파락나(破落那)에 미쳤다.〉고 하였는데,
「代王什翼犍之地,東自穢貊,西及破落那. : 대왕(代王) 십익건(什翼犍)의 땅으로, 동(東)쪽 예맥(穢貊)으로부터, 서(西)쪽으로 파락나(破落那)에 미쳤다.」고 하였다. 당시(當時)의 ‘탁발(拓拔)십익건(什翼犍)’은 선비족(鮮卑族)으로, 「대(代)」지방의 「속국(屬國) 왕(王)」이었을 뿐이다. 그 뒤로 서력(西曆) 386년, 손자(孫子) 탁발규(拓跋圭)가 ‘대(代)’를 다시 세웠다가, 국호(國號)를 위(魏)라고 고친 후에, 즉위(卽位)했다. 북위(北魏)는 십익건(什翼犍)을 소성황제(昭成皇帝)로 시호를 올려 추존했다.
위에서 이야기하는 대로, ‘식민사관(植民史觀)=반도사관(半島史觀)’에서 바라보면 : 북위(北魏)의 선조(先祖)들은 나라(國)를 세우기도 전(前)에, 동(東)쪽으로부터 서(西)쪽까지 ‘북방(北方)통일(統一)을 이루었다’는 말과 같다. 이것은 고전(古典)의 기록(記錄)을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해설(解說)하는 것일 뿐, 실제(實題) 역사(歷史)전개내용(展開內容)과는 전혀 별개다.
고생(苦生) 끝에 나라를 세운 탁발씨(拓拔氏) 북위(北魏)는, 겨우 중원(中原) 황하(黃河)남북(南北)안을 영역(領域)으로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나라를 건국(建國)하기도 전(前)에 이미 ‘일만(一萬)리, 북방통일(北方統一)을 했다.’는 말은, 사기(詐欺)다.
◈ 더더구나, 〈중원(中原)북방지대(北方地帶)는, 위에서 말했듯이 기원전(紀元前) 1,121년 이전(以前)【주(周)가 개국(開國)되기 그 이전(以前)】에, 그곳은 이미 예맥(濊貊)의 땅이었다.〉고 여러 고전(古典)에서 증거(證據)해주고 있다.
◈ 그러한 땅, ‘북맥(北貉)=북맥(北貊)’의 땅에 웬 선비(鮮卑) 탁발씨(拓拔氏)가 있었다는 것일까? “맥(貊) 또는 예(濊) 또는 예맥(濊貊)”을 고구려(高句驪)가 합병(合倂)해버렸기 때문에, ‘탁발(拓拔) 십익건(什翼犍)’이 나타나기 수백(數百)년 이전(以前)에, 이미 그곳은 고구려(高句驪) 땅이었다.
북위(北魏)는 서력(西曆) 386년에 개국(開國)되었는데, 이때 고구려(高句驪)는 고국양왕【故國壤王 : 재위 384~391】이 4만의 보기(步騎)로 요동(遼東)을 공격하고, 백제(百濟)를 정벌(征伐)하고, 국가체제(國家體制)를 크게 확립(確立)했다고 전해지는 시기(時期)이며, 북방지대(北方地帶)는 이미 조선(朝鮮)의 왕조(王朝)들이 굳건하게 자리를 잡고, 인접(隣接)한 소국(小國)들을 병합(倂合)할 때다. 당시(當時)의 유목(遊牧)족이 감히 참칭(僭稱)할 수 없었던 시기(時期)이기도 하다.
동방(東方)의 땅엔, 이미 구이(九夷)들이 터를 잡고 살아온 지가 수만(數萬)년 전(前)의 일이고, 이곳은 옛 조선(朝鮮)의 땅이었고, 백성(百姓)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➋ 선비(鮮卑) 탁발씨(拓拔氏)들이 오랜 고생(苦生) 끝에 창건(創建)했다는 위(魏)나라 역사서(歷史書)인 북사(北史)속에 있는 위(魏) 본기(本紀)를 보자.
北史 / 魏 本紀 / 第一 :《魏之先,出自黃帝軒轅氏.黃帝子曰昌意,昌意之少子受封北國,有大鮮卑山,因以為號. : 위(魏)의 선조(先朝)는, 황제헌원씨로부터 나왔다. 황제(黃帝)의 아들은 창의(昌意)고, 창의(昌意)의 소자(少子)는 북국(北國)을 봉(封)받았다. 대선비산(大鮮卑山)이 있어, 이로 인해 호(號)가 되었다. 其後世為君長,統幽都之北廣莫之野,畜牧遷徙,射獵為業,淳樸為俗,簡易為化,不為文字,刻木結繩而已. : 그 뒤 대대로 군장이 되었다. 유도(幽都)의 북(北)쪽 광막(廣莫)의 평원에서, 기축을 기르며 움직여 옮겨다나며, 수렵(狩獵)을 업(業)으로 하였다. 소박하고 순진한 것이 풍속이며, 간역(簡易)이 되고, 문자(文字)는 없어, 나무에 새기거나 끈으로 매듭을 맺었다.》
위의 이야기는 본기(本紀) 서두(序頭)에 있는 말로, 위(魏)나라 선조(先祖)들의 이야기다. 이들은 본시(本是) 북쪽의 땅을 봉(封)받았으며, 대대로 유도(幽都)의 북(北)쪽, 넓고 넓은 평원(平原)에서 가축(家畜)을 기르며, 수렵(狩獵)을 업(業)으로 이동(移動)하며 살았던 유목족(遊牧族)이라고 지들 스스로 말하고 있다.
「유도(幽都)의 북(北)이란 말은 유주(幽州)의 북(北)쪽이란 뜻이다.」 곧 「유도(幽都)는 유주(幽州)요, 유릉(幽陵)이다.」
회남자(淮南子)에서는, “총령(葱嶺)이 유도(幽都)의 문(門)”이라고 했으니, “총령(葱嶺)의 북방(北方)이란 : 서북방(西北方)·동북방(東北方)사이”를 일컫는 말이다.
➌ 北史 / 魏 本紀 / 第一 :《昭成皇帝諱什翼犍,平文皇帝之次子也.中略.建國元年十一月,帝即位於繁畤北,時年十九. : 소성황제 휘(諱)는 십익건(什翼犍)이다. 평문황제의 차자(次子)이다. 중략(中略). 건국 원년 11월, 제(帝)가 번치(繁畤)의 북쪽에서 즉위(卽位)했는데, 이때가 19살이었다. 二年春,始置百官,分掌眾職.東自水歲貊,西及破落那,莫不款附.中略. : 2년 봄에, 처음으로 백관(百官)을 두고, 업무를 분담토록 하였다. 동쪽으로 세맥(歲貊)으로부터, 서쪽으로 파락나(破落那)에 미쳤다.》고 하였다.
➨【歲貊(세맥) : 세(歲)는 예(濊)의 오자(誤字)로 보인다. 다른 사서(史書)는 모두 ‘예(濊)’자(字)로 되어 있다.】
이때가 선비족(鮮卑族) 십익건(什翼犍)이, 대(代)지방의 조그만 제후 왕(諸侯王)으로 봉(封)받은 때다. 그러한 때에, 그의 영토(領土)가 “중앙아세아(中央亞細亞)로부터 반도(半島) 북방(北方)의 만주(滿洲)까지였다”고 한다면 누가 이걸 믿겠는가?
「이런 이야기는 아예 존재(存在)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공상소설(空想小說)같은 얘기를 믿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반도(半島) 국민(國民)들이다.
➍ 위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➊ 글에서〈寧遠國在故曹國東北.本名破落那.漢大宛別部也.晉咸康中,代王什翼犍之地,東自穢貊,西及破落那.中略. : 영원국(寧遠國)은 예전의 조국(曹國) 동북(東北)에 있다. 본명(本名)은 파락나(破落那)이다. 한(漢) 때의 대완(大宛)의 별부(別部)이다. 진(晉)나라 함강(咸康)중에, 대왕(代王) 십익건(什翼犍)의 땅으로, 동(東)쪽으로 예맥(穢貊)으로부터, 서(西)으로 파락나(破落那)에 미쳤다.〉고 하였는데, 하나하나 따져 보기로 하자.
1)〈영원국(寧遠國)은 파락나(破落那)이고, 한(漢)때의 대완(大宛)의 별부(別部) 땅으로, 대(代)로부터 14,450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는데, 대완(大宛)은 : 오늘날의 ‘키르기스스탄의 땅’이라고 하였는데, 별부(別部)라고 했으니, 그 서(西)쪽 지방에 있었다고 보아진다. 왜냐하면 「대(代)로부터 14,450 리 떨어져 있다」고 한 것이 그 증거(證據)다.
14,450리라고 한다면 : 최소(最小)한 카스피해(海)를 지나 흑해(黑海) 동안(東岸)까지에 미친다. 이러한 예(例)는 : 신당서(新唐書) 서역(西域) :《小 勃 律 去 京 師 九 千 里 而 贏 : 소발률(小勃律)은 경사(京師)로부터 9천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기 때문인데, 전회(前回)에서 설명(說明)한대로 :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과 캐슈미르(Kashmir)사이의 “파키스탄(Pakistan) 북부지방(北部地方)”이다. 이러한 곳이 경사(京師)로부터 9천리(千里)라고 하였으니, 14,450리라면… …서(西)쪽으로 수천(數千)리를 더 가야 한다는 이야기다.
「대(代)로부터 타슈켄트(Tashkent)까지래야 직선거리(直線距離)로 3,500km 정도다.」 고전(古典)에서 말한 대로 ‘14,450’리라면 : 흑해(黑海) 동안(東岸)까지가 되어야 하는데, 최소한(最小限) 카스피 해(海)와 흑해(黑海)사이의 코카서스산맥(山脈)지대에 닿는다.
2) 발한나국(拔汗那國)은 곧 영원국(寧遠國)인데, 「소륵(疏勒)으로부터 서(西)쪽으로 2천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으면, 그곳은 ‘아무다리아강(江)’의 서쪽지대로, 파미르 (Pamir)고원지대(高原地帶)를 지나, 사마르칸트(Samarkand)와 부하라(Bukhara)쪽이다.
3) ‘북사(北史) 위(魏) 본기(本紀)’의 기록(記錄)을, 지금(只今)의 역사(歷史)해설(解說)로 보면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카라쿰(Kara-Kum)사막지대(沙漠地帶)의 동(東)쪽에 있었다는 ‘영원국(寧遠國)=대완(大宛)별부(別部)=파락나(破落那)=발한나국(拔汗那國)’으로부터, 반도(半島) 강릉(江陵)의 예맥(濊貊)까지 선비족(鮮卑族) 십익건(什翼犍) 대국(代國)의 땅이었다.〉는 얘기가 성립(成立)된다.
만약(萬若) 이게 사실(事實)이라면, 당시(當時)의 선비족(鮮卑族) 십익건(什翼犍)은, 「진시황(秦始皇)에 버금가는 황제(皇帝)였다」는 것이 밝혀지는 거다. 왜냐하면 「중앙(中央)아세아(亞細亞)로부터 대륙(大陸) 중원(中原) 북방(北方)을 지나, 반도(半島)북방(北方)까지를 통일(統一)했으니 말이다.」사실(事實)일까?
그런데 이러한 십익건(什翼犍)이 “한 지역(地域)의 책봉(冊封) 왕(王)으로 속국(屬國)의 왕(王)”이었다니… …태수(太守)와 같은 격(格)일 정도(程度)다. 정말 웃기지 않는가! 그가 죽고 나서, 손자(孫子)대에서, 소위 황제(皇帝)를 참칭(僭稱)하여, 위(魏)나라를 개국(開國)하게 되는 것이, 탁발씨(拓拔氏) 위(魏)나라 창건(創建)이야기다.
‘대(代)’라는 지방(地方)을 봉(封)받은 자(者)가 “십익건(什翼犍)”이다. 그런데 사가(史家)들은 “대(代)”로부터 14,450 리 떨어져 있던 옛 대완(大宛)의 땅까지 그의 영토(領土)라고 했을까? 그곳이 그들의 터전이었으니 당연(當然)한 이야기다.
➎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영원국(寧遠國)’편에 그 해답(解答)이 있다. 즉(卽)〈寧遠國在故曹國東北.本名破落那.漢大宛別部也.晉咸康中,代王什翼犍之地,東自穢貊,西及破落那. : 영원국(寧遠國)은 예전의 조국(曹國) 동북(東北)에 있다. 본명(本名)은 파락나(破落那)이다. 한(漢) 때의 대완(大宛)의 별부(別部)이다. 진(晉)나라 함강(咸康)중에, 대왕(代王) 십익건(什翼犍)의 땅으로, 동(東)쪽으로 예맥(穢貊)으로부터, 서(西)으로 파락나(破落那)에 미쳤다.〉고 하였으니,
「파락나(破落那)는 옛 대완(大宛)의 땅이고, “대(代)” 지방이 바로 대완(大宛) 별부(別部) 땅에 있었고, 그 동(東)쪽에 예맥(濊貊)이 있었다.」는 얘기다. 이러한 역사해설(歷史解說)은, 조선사(朝鮮史)의 상고사(上古史)와 맞물리는 이야기로, 21세기 역사통설(歷史通說)인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의 조선사(朝鮮史) 이야기 가지곤 불가해(不可解)한 사건(事件)일 수밖에 없다.
➏ 전회(前回)의 ‘여인국(女人國)과 옥저국(沃沮國)’에 대한 조선사(朝鮮史) 해설(解說)에서 보듯이, 이들 모두는 구라파(歐羅巴)와 아세아(亞細亞)의 접경지대(接境地帶)에서 일어났던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들이다.
그렇다면 당시(當時)의 조선인(朝鮮人)은, 어떤 인종(人種)이었을까? 당연(當然)한 합리적(合理的)인 의심(疑心)이다.
여기서 “당시(當時)에 대완(大宛)의 땅에 살던 백성(百姓)들”의 형상(形相) 곧 인종(人種)에 대해서, 통전(通典)에서는 이렇게 기록(記錄)해 놓고 있다. 《其 人 皆 深 目 , 多 髭 髯 : 그 사람들은 모두 눈이 깊고, 콧수염과 구레나룻 수염이 많다.》고 말이다. 오늘날의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인들과 똑같은 인종(人種)들이란 이야기다. 이들은 황인종(黃人種)이 아니다.
오늘날의 인종분포구도(人種分包構圖)와 전한(前漢)시대의 것과 별반(別般) 차이(差異)가 없다. 대략적으로 : 총령(葱嶺)을 기준(基準)해 보면 :
1) 북(北)쪽으로 발하슈 호(湖), 카자흐스탄의 아스타나 및 카라간다를 잇는 선의 동(東)쪽은 황인종(黃人種)계열(系列)이요, 서(西)쪽은 코카서스 계열(系列)이요,
2) 남(南)으로 카라코람산맥(山脈)과 히말라야산맥의 동(東)쪽 및 북쪽의 티베트는 황인종(黃人種) 계열(系列)이고, 서(西)쪽과 남(南)쪽은 코카서스 계열(系列)로 구분(區分)된다.
○ 조선사(朝鮮史)의 주역(主役)들인「고조선(古朝鮮)…삼한(三韓)…삼국(三國)의 무대(舞臺)는 동구라파(東歐羅巴)를 포함(包含)하며, 우랄산맥(山脈) 서(西)쪽까지를 아우른다.」
이러한 조선사(朝鮮史) 영역(領域)을, 극동지방(極東地方)으로 몰아넣고 나니,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된 곳에, 조선(朝鮮)의 속국(屬國)들을 황제국(皇帝國)으로 만들어 채워 넣어 버렸다. 이게 오늘날 우리가 배우고 있는 역사 얘기다.
2017년 10월 29일 〈글쓴이 : 문무(文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