女眞族은 朝鮮人과 닮았을까? 그들의 정체(正體)는?
〈반도인(半島人)들의 오해(誤解) 〉
(여진인(女眞人)은, 몸집이 크고, 목 굵기가 소와 같고, 신장도 길었다.)
○ 여진족(女眞族), 그들은 누굴까? 지금 세계사(世界史)에서 여진족(女眞族)의 후예(後裔)라고 하는 나라(國)가 있을까? 여진족(女眞族)이 세웠다는 후금(後金) 곧 청(淸)도 망(亡)하고 난 뒤니 말이다. 물론(勿論) 개인적(個人的)으로 그들의 후손(後孫)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있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 여진족(女眞族)의 직계후손(直系後孫) 또는 자손(子孫)일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얘기다.
쉽게 말해 :〈여진족(女眞族)은 어떤 인종(人種)이었으며, 그들의 체형(體形)은 어떻고, 그들의 얼굴(貌)은 어땠을까?〉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그저 현재(現在)의 대륙(大陸)이나, 반도(半島) 땅에 살고 있는 주류(主流)들인 황인종(黃人種)과 같은 인종(人種)이며, 체형(體形)과 얼굴(貌)도 거의 같았던 종족(種族)이지 않았을까하고, 막연(漠然)하게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 역사서(歷史書)에 등장(登場)하는〈여진(女眞〉은 : 「숙신(肅愼)=숙신국(肅愼國)」이 근원(根源)이다. ‘주신(珠申)’이라고도 하는데, 혹자(或者)는 이를 두고 ‘주신(珠申)’이 전음(轉音)되어 ‘조선(朝鮮)’이 되었다고 주장(主張)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이는 주객(主客)이 전도(顚倒)된 이야기다.
즉(卽) 숙신씨(肅愼氏)는, 조선(朝鮮)을 이루고 있던 많은 종족(種族)과 부족(部族)중의 “한 일원(一員)”이었을 뿐이다. 이를 ‘조선(朝鮮)과 숙신(肅愼)이 같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오버(over)하지 말자.
➊ 해동역사(海東繹史)는 : 춘추좌전(春秋左傳)의 주(註)를 인용(引用)하여, 〈숙신(肅愼)은 북이(北夷)로, 현도(玄菟)에서 북(北)쪽으로 3,000 리 되는 곳에 있다〉고 하였고, 국어(國語) 주(註)를 인용(引用), 〈숙신(肅愼)은 북이(北夷)의 나라이다〉라고 하였다.
➋「숙신(肅愼)」으로 불리던 시기(時期)는, “조선(朝鮮)의 일원(一員)”으로 단군(檀君)【임금=왕(王)】의 통치(統治)를 받았고,
「읍루(挹婁)」라고 불릴 때는, 부여(夫餘)에 복속(服屬)되었으며,
「물길(勿吉), 말갈(靺鞨)」로 불리던 때에는, 부여(夫餘)와 함께 고구려(高句驪)에 복속(服屬)되어, 고구려(高駒驪)의 일원(一員)으로, 고구려(高句驪) 군대(軍隊)에 편입(編入)되어, 백제(百濟), 신라(新羅)와의 전쟁(戰爭)에 참전(參戰)하였으며, 어떤 때는 ‘고구려(高句驪)+말갈(靺鞨)+백제(百濟)’가 연합(聯合)하여, 신라(新羅)를 치기도 했다.
➌ 이후(以後), 수(隋)·당(唐)과의 80년 전쟁(戰爭)동안에, 고구려(高句驪) 군대(軍隊)의 일원(一員)으로, 수많은 전투(戰鬪)에 참가(參加)하여, 용맹(勇猛)을 떨쳤다. 당(唐) 태종(太宗)은 말갈(靺鞨)병사(兵士)를 얼마나 증오(憎惡)했던지, 포로(捕虜)로 잡힌 ‘3천여 명’의 말갈(靺鞨)병사(兵士)들에게 스스로 구덩이를 파게하고는, 「그 구덩이에 산채로 묻어버렸다」고 전한다.
➍ 서력(西曆) 668년 내란(內亂)과 당(唐)의 공격(攻擊)으로 고구려(高駒驪)가 무너지자, 말갈(靺鞨)은 고구려(高駒驪)부흥군(復興軍)의 일원(一員)이 되어, 이곳저곳에서 항복(降伏)하지 않은 고구려(高駒驪)군(軍)과 함께 고구려(高駒驪) 부흥(復興)을 위해 당군(唐軍)과 전투를 벌였으며, 대조영(大祚榮)과 함께 「발해(渤海)」를 건국(建國)하는데 역시(亦是) 함께하였다.
➎ 이후(以後), ‘글란(契丹)=요(遼)’에 복속(服屬)되었고, 고려(高麗)인의 후손(後孫)과 함께 「금(金)」나라를 세웠으나, 다시 원(元)나라에 복속(服屬)되었다.
➏ ‘백두산(白頭山)=장백산(長白山)의 동남(東南)쪽 만주(滿洲) 땅’ 이라고 스스로 명명한 곳에서 발흥(發興)하여, 건주여진(建州女眞)이 되어, 명(明)을 격파하고, 후금(後金)이라고 했다가 뒤에 “청(淸)”이라 했다고 전(傳)해지는 주인공(主人公)들이다.
➐ 여진(女眞)에 대해여 : 〈홍호(洪皓)의 송막기문(松漠紀聞)〉에서는, 여진(女眞)의 여러 부족(部族)중에, 「금발머리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황두여진(黃頭女眞)이라고 하는 자(者)들도 있었다.」고 하였는데, 이들은 하서【河西 : 하(河)의 서(西)쪽】땅에 살고 있었다고 전(傳)하고 있다. 또 이들을 가리켜 ‘합소관(合蘇館)여진(女眞)’이라고도 했다.
조선사(朝鮮史)에서는 이를 “압록강(鴨綠江) 서(西)쪽”이라고 하였고,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는 :〈합소관(合蘇館)은 갈소관(曷蘇館)이며, 압록강(鴨綠江) 서(西)쪽에 있는데, 금(金)과 고려(高麗)의 접경(接境)지역이다.〉라고 하였다.
〈합소관(合蘇館)은, 갈소관(曷蘇館)〉이며, 송막기문(松漠紀聞)에서 말하는 〈하서(河西)에 있다”〉는 말은, 〈압록강(鴨綠江) 서(西)쪽에 있다〉는 말이며, 〈압록강(鴨綠江)은, 곧 “하(河)”이다.〉라 할 수 있다. 이게 사실(史實)【역사(歷史)에 실제(實際)로 있었던 사실(事實)】이다.
이런 조선사(朝鮮史) 해설(解說)을 〈믿는다, 안 믿는다.〉하는 얘기는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과 전혀 다른 이야기다. 이것은 각각(各各) 사람들의 사고력(思考力), 역사(歷史)를 바라보는 시각(視角)의 차이(差異)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을 〈믿는다, 믿지 않는다.〉하는 자체(自體)가 ‘코-메-디’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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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河西) = 압록강(鴨綠江) 서(西)쪽〉
●〈하(河)의 서(西)쪽과 압록강(鴨綠江) 서(西)쪽〉이란 말은, 같은 땅(地)을 두고, 이름만 다르게 불렀다는 것이고,
●〈압록강(鴨綠江) 서(西)쪽〉은 : 〈금(金)나라와 고려(高麗)의 접경지역(接境地域)이었다〉는 말은, 즉(卽) 송막기문(松漠紀聞)에서 말하는 「하서(河西)와 같은 곳」을 말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금(金)나라 곧 여진족(女眞族)이 세운 금(金)나라는 반도(半島)나 중원(中原) 대륙(大陸) 땅이 아닌 “하서(河西)지방 = 압록강(鴨綠江) 서(西)쪽” 지방이며,
ⓐ 그곳은, 현재(現在)의 러시아(Russia) 서(西)시베리아(Siberia)분지(盆地)를 흐르는 「오비(Ob)강(江)=오브(Ob)강(江)」서(西)쪽이다.
ⓑ 또 하나의 「하서(河西)」는, 대륙(大陸)의 영하성(寧夏省)을 남북(南北)으로 관통(貫通)하는 황하(黃河)의 서(西)쪽을 말하는 것이므로, 「하서(河西)」란 곳은 「하란산맥(賀蘭山脈)과 알타이(Altai)산맥(山脈)의 서(西)쪽 지방」을 말하는 것이다.
ⓒ 이런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은, 수천(數千)년 전(前)의 선대(先代)들이 기록 해 놓은, 소위(所謂) 고전(古典)에서 말하는 것들과 대동소이(大同小異)한 것들이다.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에 바탕을 둔 조선사(朝鮮史)를, 국수주의(國粹主義)나 민족주의(民族主義)등으로 왜곡(歪曲)하는 것 또한, 역사왜곡(歷史歪曲)이라고 할 수 있다.
【소위(所謂) 고지도(古地圖)에 표기(表記)해 놓은 내용(內容)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고지도(古地圖)는 사실(史實)과 부합(符合)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證據)한다. 중요(重要)한 것은, 당시(當時)에 그러한 지도(地圖)가 어떻게 제작(製作)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곧 근대(近代)에 만들어진 지도(地圖)에, (필요한, 목적을 가진)그림만 그려 넣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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➑ 위에서 보다시피 〈숙신(肅愼)으로부터 읍루(挹婁), 물길(勿吉), 말갈(靺鞨), 여진(女眞)까지 조선왕조(朝鮮王朝)를 말하지 않고는, 이들에 대해 설명(說明)할 염두(念頭)조차 낼 수 없다는 것은, 그만큼 「조선(朝鮮)과 관계(關係)가 깊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디에서 시원(始源)하며,
이들은 어떤 인종(人種)이었으며,
이들은 체형(體形)은, 얼굴(貌) 모습은?
이에 대한 논리적(論理的)인 설명(說明)없이, 뜬 구름(浮雲)잡는 이야기들만 장안(長安)에 회자(膾炙)되며, 인터넷(Internet)에 떠 돌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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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산해경(山海經)의 「숙신국(肅愼國)」
《山海經.大荒北經:大荒之中,有山,名曰不咸.有肅慎氏之國 : 산해경(山海經) 대황북경(大荒北經) : 대황(大荒) 가운데, 불함(不咸)이란 이름을 가진 산이 있다. 숙신씨(肅愼氏)국이 있다. 郭璞云:今肅慎國去遼東三千餘里 : 곽박(郭璞)이 말하기를 : 숙신국(肅愼國)은 요동에서 3천여 리를 가야한다고 하였다.》
《山海經.海外西經:肅慎之國在白民北,有樹名曰雄常,先入伐帝,于此取之. : 산해경(山海經) 해외서경(海外西經) : 숙신국(肅愼國)은 백민(白民)의 북(北)쪽에 있는데, 웅상(雄常)이란 이름을 가진 나무가 있어, 임금(帝)이 먼저 그곳으로 들어가, 이것을 취한다. 淮南子墬形篇有肅慎民,周書王會篇云:稷慎大麈.孔晁注云:稷慎,肅慎也. : 회남자(淮南子)지형(墬形)편에 숙신민(肅愼民)이 있다. 주서(周書) 왕회(王會)편에서는 : 직신(稷愼)대진(大塵)이라고 하였다. 공조(孔晁)주(注)에서는 : 직신(稷愼)은, 숙신(肅愼)이라고 하였다.》
➊ 대황북경(大荒北經)이니, 해외서경(海外西經)이니 하는 방위(方位)는, 산해경(山海經)에서 말하는 중심(中心)에서, 동방(東方)쪽과는 전혀 관련(關聯)이 없다. 특히 해외서경(海外西經)이란 말은 중심(中心)에서 아주 먼 서(西)쪽 지방을 말하는 것이다.
위 산해경(山海經)에서 말하는 바를 보면 : 대황북경(大荒北經)과 해외서경(海外西經)편에 기록(記錄)된 것이므로, 〈북방(北方)과 서방(西方)사이에 숙신씨(肅愼氏)가 있었다.〉고 하면 정답(正答)처리가 될 것 같다.
➋ 그렇다면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말하는 숙신씨(肅愼氏)는, 반도(半島) 북방(北方)이요, 대륙(大陸)에서는 동북방(東北方)이다.
그러나 산해경(山海經)에서 말하는 방향(方向)은, 그 중심(中心)을 대륙(大陸)의 어느 곳에든 지정(指定)한다고 하더라도 “서북방(西北方)과 동북방(東北方)은 함께 할 수 없다.” 가면 갈수록 멀어지는 형국(形局)이다.
➌ 따라서 산해경(山海經)으로 “숙신씨(肅愼氏)=숙신국(肅愼國)=숙신민(肅愼民)”을 바라보면 :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은,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된 역사해설(歷史解說)이란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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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淮南子傳 / 墜 形 訓
《八極:西北方曰不周之山,曰幽都之門,中略. : 8극 : 서북방(西北方)을 말하기를 불주산(不周山)이라하고, 유도(幽都)의 문(門)이라 한다. 중략(中略).》고 하였으니, 유도(幽都)는 유릉(幽陵)이고, 유주(幽州)다. 따라서 〈유주(幽州)는 서북방(西北方)에 있었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凡海外三十六國,自西北至西南方,有修股民,天民,肅愼民,白民,沃民,女子民,丈夫民,奇股民,一臂民,三身民.中略. : 무릇 해외(海外)에 36국이 있다. 서북(西北)에서 서남방(西南方)까지에는, 수고민(修股民),천민(天民),숙신민(肅愼民),백민(白民),옥민(沃民),여자민(女子民),장부민(丈夫民),기고민(奇股民),일비민(一臂民),삼신민(三身民)이 있다. 중략(中略).》
➊〈회남자(淮南子)〉도 산해경(山海經)과 똑같은 방위(方位)를 말해주고 있다. 특히 〈“유주(幽州)=유릉(幽陵)=유도(幽都)”라고 하는 “유주(幽州)”지방은, 서북방(西北方)에 있었다.〉고 한 것이다. 불주산(不周山)은, 곧 곤륜산(崑崙山)이요, 총령(葱嶺)이라고 하였는데, 이곳이 “유도(幽都)의 문”이라고 하였다.
➋ 해외(海外)에 36개 나라(國)가 있는데, 〈서북방(西北方)∼서남방(西南方)사이에 숙신민(肅愼民)이 있었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이를 뛰어넘을 만한 반론(反論)은 없다.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은 ‘믿을 수 없다 또는 오류(誤謬)다’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그것을 입증(立證)할 수 있는 자료(資料)가 없다.
➌ 21세기(世紀)! 최고(最高)로 발전(發展)된 문명시대(文明時代)에 살고 있지만, 산해경(山海經)이나 회남자(淮南子)속에서 말하는 내용(內容)에 대해, “아니다”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없다. 이는 자연환경(自然環境)적 요인(要因)과 지형지세(地形地勢)와 방위(方位)등을 고려(考慮)해 볼 때, 이의(異議)를 제기(提起)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는〈조선사(朝鮮史)는 고의적(故意的)으로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되었다.〉는 것을 확실(確實)하게 입증(立證)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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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胡渭禹貢錐指【우공추지(禹貢錐指) : 청(淸) 강희제(康熙帝) 때, 호위【胡渭 : 1633-1724】가 쓴 지리서(地理書)이다. “호위(胡渭)”는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편찬(編纂)에도 참여했다. ‘우공(禹貢)’은 자연지리를 묘사한 지리(地理) 문헌(文獻)인데, 이것에 대한 자세한 설명(說明)을 한 것이 “우공추지(禹貢錐指)”이다. 강희 36년(1697)으로 호위(胡渭) 65세 때 완성되었다고 전한다.】
《胡渭禹貢錐指 : 弱水出山丹衛西南窮石山.東北入居延澤.其下流不知所歸.似弱水自居延澤東北流.歷夫餘.挹婁之北境而歸於東海 : 호위우공추지(胡渭禹貢錐指) : 약수(弱水)는 산단위(山丹衛) 서남(西南) 궁석산(窮石山)에서 나온다. 동북(東北)쪽 거연택(居延澤)에 들어가는데, 그 하류(下流)는 어디로 돌아가는지 알지 못한다. 같은 약수(弱水)는 거연택(居延澤) 동북(東北)으로 흘러, 부여(夫餘)를 지나, 읍루(挹婁)의 북쪽지경의 동해(東海)로 돌아간다.》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➊ 호위(胡渭)의 우공추지(禹貢錐指)에서는 : 부여(扶餘)와 읍루(挹婁)가 내몽고 최(最) 서(西)쪽의 거연해(居延海) 북방지대(北方地帶)를 일컫고 있다.【오늘날의 액제납기(額濟納旗)의 액제납호(額濟納湖)이다. 예전에는 동(東)쪽에 동해(東海), 서(西)쪽에 서해(西海)로 두 개의 호수(湖水)로 나누어져 있었다고 전하며, “이 지명(地名)이 서(西)쪽으로부터 이동(以東)되어온 것이 아니다.”라는 전제(前提)하에 설명(說明)하는 것이다.】
➋ 이곳은 알타이(Altai)산맥(山脈)의 동남(東南)쪽 옛 고비(Gobi)사막(沙漠)이다. 「부여(夫餘)와 읍루(挹婁)는 현 대륙(大陸) 서쪽지방인 하서회랑(河西回廊)의 장액(張掖)과 주천(酒泉)의 북(北)쪽으로, 고장성(古長城)의 북방(北方)지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서(西)쪽에서 이동(移動)된 지명(地名)이라면, 당연(當然)히 서(西)쪽 본시의 곳으로 옮겨져야 마땅하다.】거연해(居延海)의 동남(東南)쪽 약수(弱水)변에는 「거연성(居延城) 또는 흑수성(黑水城)」의 유적(遺蹟)이 상존(尙存)하고 있으며, 그 유물유적(遺物遺跡)이 발굴(發掘)되기도 했다.
위의 (3)에서 말하는 것은 : 오늘날의 액제납기(額濟納旗)의 액제납호(額濟納湖)이다. 예전에는 동(東)쪽에 동해(東海), 서(西)쪽에 서해(西海)로 두 개의 호수(湖水)로 나누어져 있었다고 전하며, “이 지명(地名)이 서(西)쪽으로부터 이동(以東)되어온 것이 아니다.”라는 전제(前提)하에 설명(說明)하는 것이다.【착오(錯誤)없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곳의 위치(位置)는 곧 ‘하서(河西)지방(地方)’으로, 위의 글 서두(序頭)편의 〈하서(河西) = 압록강(鴨綠江) 서(西)쪽〉에서 말한 곳과 똑같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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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연행록총서(燕行錄叢書) 북원록(北轅錄)【저자 이의봉(李義鳳, 1733~1801)】
북원록(北轅錄) 제1권 / 산천풍속총론(山川風俗總論) : 《청나라 사람의 모습은 몸집이 많이 좋은데, 목의 굵기가 소와 같고 몸뚱이는 길다.(淸人貌多豊碩項大如牛而身又長.) 또 중국 사람들이 야무진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과 같았으나 또 더러는 그렇지 아니한 사람도 있었다.》고 하였다. 이는 곧
《淸 人 貌 多 豊 碩 項 大 如 牛 而 身 又 長 : 청(淸)나라 사람의 모습은 몸집이 많이 좋은데(豊碩), 목의 굵기가 소와 같고, 신체(身體)는 또 길다.》고 하였다. 그런데, 《한인(漢人)들이 야무진 것은(적한 : 積悍), 우리나라 사람들(我東人)과 같았으나(似)【漢 人 積 悍 似 我 東 人 物】, 또 더러는 그렇지 아니한 사람도 있었다.》고 하였다.
➊ 당시(當時)의 〈청(淸)나라 사람들과 우리나라 사람(我東人 : 조선인)과는 체형(體形)이 달랐다.〉는 얘기다. 곧 「청인(淸人)들은 몸집이 크고, 특히 목이 소(牛)처럼 크고, 신장(身長)이 컸다.」는 이야기다. 청인(淸人)들은 : 즉(卽) 저자(著者)인 이의봉(李義鳳, 1733~1801) 본인(本人)과 동인(東人) 곧 조선인(朝鮮人)과는 전혀 다른 체형(體形)을 갖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➋ 위의 이야기로 보면 : 〈건주(建州) 여진족(女眞族)〉은, 조선인(朝鮮人)과 체형적(體形的)으로 달랐다는 이야기다.【서력(西曆) 1,760년∼1761년 사이에 연행(燕行)을 다녀왔다고 한다.】혹자(或者)들은 여진족(女眞族)은 조선인(朝鮮人)과 같은 종족(種族)이나, 또는 사촌(四寸)쯤 되는 부족(部族)정도로 알고 있지만, 이는 전혀 다르다. 이들은 몽고족(蒙古族)과 더 가까운 체형(體形)을 가지고 있었다.
연행기록(燕行記錄)을 남긴 저자(著者)가 자신(自身)과 똑같은 얼굴모습이며, ‘체형(體形)=체양(體樣)’이 비슷한 청인(淸人)들을 보면서,《淸 人 貌 多 豊 碩 項 大 如 牛 而 身 又 長 : 청(淸)나라 사람의 모습은 몸집이 많이 좋은데(豊碩), 목의 굵기가 소와 같고, 신체(身體)는 또 길다.》고 했을까? 이건 아니다.
〈몸집이 좋다는 말은, 몸집이 크다는 것이고, 목의 굵기가 소(牛)처럼 크다는 말은 신체(身體) 자체(自體)가 몹시 컸다는 뜻이고, 신장(身長)이 길다(長)라는 말은, 키가 컸다.〉는 뜻이다. 이렇게 묘사(描寫)한 ‘체형(體形)=체양(體樣)’은 우리들과 같은, 동일(同一)한 황인종(黃人種)계열(系列)이 될 수 없다.
…명(明)나라 때 그려진 여진족(女眞族) <출처 : 네이버 캐스트>
이와 같은 ‘체형(體形)=체양(體樣)’을 가진 종족(種族)이나 부족(部族)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일부(一部) 및 러시아(Russia)등지의 슬라브(Slav)족일 가능성(可能性)이 아주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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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단일민족(單一民族)으로 형성(形成)된 나라가 아니었다. 많은 이민족(異民族)과 종족(種族)과 부족(部族)들이 의탁(依託)하여, 제후국(諸侯國)을 두고, 때로는 군대(軍隊)를 출정(出征)시켜 정복사업(征服)業)을 펼쳐, 그들을 속국(屬國)으로 만들고, 왕사(王師)를 보내어 통치(統治)하기도 했다.
전한(前漢)【전한서(前漢書)】시대와 오늘날의 인종(人種)분포(分布)를 보면 :〈대략적(大略的)으로 크게 변함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견(異見)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중요(重要)한 것은 말로만 떠드는 것이 아닌 논거(論據)를 가지고 있는 이견(異見)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사(朝鮮史)를 가지고 자신의 주장(主張)만이 옳다는 식(式)의 독단적(獨斷的)인 이야기는, 조선사(朝鮮史)를 위해서도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수천(數千)년을 이어온 인간(人間)의 삶 이야기가 어떻게 일개 개인(個人)의 주장(主張)만이 옳을 수 있겠는가! 가소로운 이야기일 뿐이다.
조선왕조(朝鮮王朝)를 이룬 주류(主流)는 황인종(黃人種)으로, 오늘날 우리들과 똑같은 인종(人種)이었다. 또한 지배계층(支配階層) 또한 똑같은 자(者)들이었다.
여진족(女眞族) 또한 조선왕조(朝鮮王朝)에 포용(包容)된, 의탁(依託)한 ‘종족(種族)·부족(部族)’으로 조선왕조(朝鮮王朝)를 이룬 많은 종족(種族)과 부족(部族)중의 한 일원(一員)이었을 뿐이다. 이를 확대재생산(擴大再生産)해 “조선(朝鮮)이 여진(女眞)이다”라는 말은, 주객(主客)의 전도(顚倒)된 아주 나쁜 역사해설(歷史解說)이라고 본다.
굳이 말한다면 :〈여진(女眞)은, 조선(朝鮮)의 일원(一員)이었다〉는 말이 적절(適切)한 표현(表現)이라고 본다.
2018년 02월 15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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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8.02.15 설날 연휴를 맞아, 고향으로 가시는 길은 "안전운행"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가족과 함께라면 더더욱 "안전운행"은 필수조건이 되어야 합니다.
가족이 함께하는 즐겁고, 행복한 "설" 보내시기를 기원합니다. -
작성자김영주 작성시간 18.02.16 경자연행잡지에
" 淸人大抵豐偉長大。而間有面目極可憎者。羶臭每多襲人。"
청인(淸人)들은 대개 몸이 살지고 큰데 그중에는 얼굴이 몹시 가증스러운 자도 있다.
누린내가 많아서 사람에게 풍기기도 한다.
...
문무님 늦으나마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항상 건강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
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8.02.16 안녕하세요. <김영주>님!
님께서 인용하신 대로, <만주족 또는 청인이라고 하는 여진족의 체양(體樣)과 면상(面相)은 우리들과는 많이 다르다>고 봐아야 합니다. 그러나 19세기 말경에서 20세기 초의 한반도 북방에 있는 소위 "만주"라는 곳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은 오늘날의 우리들과 똑같은 모습을 한 사람들이었고, 다른 것은 다만 옷차림뿐이었습니다. 결국 현재의 한반도 북방지대 "만주"는 역사서에서 말하는 "만주" 땅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인종 역시 자연환경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죠.
즐겁고, 행복한 설날 연휴를 보내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