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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의 조선사 해설

여진(女眞)황성(皇城).철관(鐵關).만리장성(萬里長城)

작성자문 무|작성시간19.11.10|조회수722 목록 댓글 0

 

                       여진(女眞)황성(皇城철관(鐵關만리장성(萬里長城)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을 비판(批判)한다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거대(巨大)한 역사(歷史)기록물(記錄物)이다. 이러한 규모(規模)의 역사(歷史) 보고(寶庫), 지구(地球)라는 행성(行星)에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존재(存在)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은 이러한 왕조실록(王朝實錄)의 내용(內容)반도조선왕조(半島朝鮮王朝)의 가장 확실(確實)한 증거(證據)’인 냥 떠벌리며 말한다.

 

    이렇게 당당하게 자신(自信)있게 주장(主張)하고, 떠벌리는 이 자()들이 왕조실록(王朝實錄)속에서 말하는 반도(半島) 땅 이야기가 아닌 전혀 다른 땅()과 기후대(氣候帶)와 자연환경적(自然環境的) 요소(要所)와 지형지세(地形地勢)와 토산물(土産物)과 방위(方位)에 대해서는 꿀 먹은 벙어리인 냥 침묵(沈默)으로 일이관지(一以貫之=일관:一貫)하며, 때론 오류(誤謬)라고 한다거나 기록(記錄)의 잘못으로 매도해 버린다. 이게 오늘날 우리 사회(社會) 현실(現實)이다.

 

    【 21세기(世紀) 작금(昨今)의 대한민국(大韓民國) 사회(社會), 불신풍조(不信風潮)가 가장 팽배(澎湃)해 있어,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비난(非難)과 비판(批判), 비하(卑下)와 함께 서로를 물어뜯어 비참(悲慘)한 지경(地境)에 처하여 그 고통(苦痛)에서 헤어나려고 비명(悲鳴)을 지르며 몸부림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 연유(緣由)가 무엇일까? 친일(親日)과 친미(親美)를 가장한 매국노(賣國奴)들이 가면(假面)을 쓰고 우리 사회(社會)에 기생(寄生)하면서 분열(分裂)과 혼란(混亂=溷亂)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自信)이 속해있는 일족(一族)의 목숨을 걸고 기록(記錄)을 남겼다는 옛 사관(史官)들을 모조리 생매장(生埋葬)시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엄청난 범죄(犯罪)를 저지르고 있는 현행범(現行犯)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은 조선왕조(朝鮮王朝) 개국시조(開國始祖)인 이성계(李成桂)태조(太祖):고황제(高皇帝)의 실록(實錄)속에 기록(記錄)된 것들 중에서 관심부분(關心部分)을 임의(任意) 선택(選擇)해 보기로 하였다.

 

    1.於是,東至皇城,北至東寧府,西至海,南至鴨綠江,爲之一空.皇城,古女眞皇帝城也. : () 황성(皇城), () 동녕부(東寧府), (西) 바다(), () 압록강(鴨綠江)에 이르기까지 텅 비게 되었다. 황성(皇城), 옛 여진(女眞)의 황성(皇城)이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기록(記錄),

 

    태조실록(太祖實錄) 1, 총서 47번째 기사 : 태조가 군대를 거느리고 동북면의 영토를 확장하다 : 於是,東至皇城,北至東寧府,西至海,南至鴨綠江,爲之一空.皇城,古女眞皇帝城也. : 이에 동()쪽으로는 황성(皇城)에 이르고, ()쪽으로는 동녕부(東寧府)에 이르고, (西)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쪽으로는 압록강(鴨綠江)에 이르기까지 텅 비게 되었다. 황성(皇城)은 옛날 여진(女眞) 황제(皇帝)의 성()이다.라고 하였다.

 

    (1) 이때가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19(1370) 경술(庚戌) 정월(正月)’이다. 곧 이성계(李成桂)기병 5천 명과 보병(步兵) 1만 명을 거느리고 동북면(東北面)으로부터 황초령(黃草嶺)을 넘어 6백여 리()를 행진하여 설한령(雪寒嶺)에 이르고, 7백여 리를 행진하여 압록강(鴨綠江)을 건넜다.는 것에서 이야기가 시작(始作)된다.

 

    압록강(鴨綠江) 이북의 광활(廣闊)한 땅에 있던 여러 부락(部落)의 부족(部族)과 종족(種族)들을 항복(降伏)시키고, 귀순(歸順)토록 하니, 이에 동()쪽으로는 황성(皇城)에 이르고, ()쪽으로는 동녕부(東寧府)에 이르고, (西)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쪽으로는 압록강(鴨綠江)에 이르기까지 텅 비게 되었다. 황성(皇城)은 옛날 여진(女眞) 황제(皇帝)의 성()이다. : 於是,東至皇城,北至東寧府,西至海,南至鴨綠江,爲之一空.皇城,古女眞皇帝城也.고 한 것이다.

 

    (2) 위의 간단(簡單)한 문장(文章)속에는 반도(半島) 땅에 있었다는 고려(高麗)왕조(王朝)”로써는 이해불가(理解不可)한 지형지세(地形地勢)를 나타내고 있다. 곧 지형지세(地形地勢)는 수백(數百)만년이나 수십(數十)만년 또는 수백(數百), 수천(數千)년 동안 변함없는 것들이 많다. 특히 큰 산()이나 산맥(山脈), 바다()와 하천(河川), 또는 방위(方位), 또는 특이지형(特異地形)”등이 그렇다.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의 역사해설(歷史解說)대로 반도(半島) 고려왕조(高麗王朝)의 영토(領土)는 반도(半島)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위에서 말하는 압록강(鴨綠江)이북(以北)의 지형지세(地形地勢방위(方位특이(特異)지명(地名)등은, 오늘날까지도 밝혀진 것이 전무(全無)하다는 것이다.

 

    (3) 이에 동()쪽으로는 황성(皇城)에 이르고하였는데, 압록강(鴨綠江) 이북(以北)의 동()쪽 어디에 황제국(皇帝國)의 서울()인 황성(皇城)이 있었느냐? 또 이 황성(皇城), 옛날 여진(女眞) 황제(皇帝)의 성()이다라고 친절(親切)하게 설명(說明)해주고 있다.

 

    도대체 그곳이 어디냐? 황성(皇城)의 주춧돌(基礎石)이라도 만들어 놓은 것이냐? 황성(皇城)이 있었다면 그 안에는 궁궐(宮闕)의 여러 전각(殿閣)과 관청(官廳), 민가(民家)들이 즐비하게 있었을 것이 아니더냐? 그곳이 도대체 어디냐? 하는 것이다.

 

    이때가 고려(高麗)말기(末期)였음을 상기(想起)한다면, 고대(古代)의 숙신국(肅愼國) 또는 그 후예(後裔)라고 하는 금()나라일 것이나 이들이 오늘날의 반도(半島) 북방(北方)땅에 황성(皇城)을 두고 존재(存在)했다는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은 전무(全無)하다. 숙신(肅愼)이니 여진(女眞)이니 하는 종족(種族)들은, 서북방(西北方)에 살고 있었던 나라() 또는 종족(種族)이다라는 것은, “산해경(山海經)이나 회남자(淮南子)” 정도(程度)의 원전(原典)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4)(西)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하였는데, 그 바다는 어디에 있는 어떤 바다를 말하는 것이냐? 요동반도(遼東半島)의 발해(勃海)를 말하는 것이냐? 그러나 요동(遼東)이니 요서(遼西)’하는 지명(地名)요수(遼水)=요하(遼河)’와 직접적(直接的)인 관련(關聯)이 있다. 이것이 반도(半島) 북방(北方)에 있다.라는 역사해설(歷史解說), 20세기(世紀)에 출현(出現)한 제국주의(帝國主義的) 역사관(歷史觀)일 뿐이다.

 

    (5)()쪽으로는 동녕부(東寧府)에 이르고하였는데, “동녕부(東寧府)는 북계 54성과 서해도(西海道)6성을 들어 원()에 투항하니, 자비령(慈悲嶺) 이북의 60성을 동녕부(東寧府)로 편입하고, 서경에 치소를 두었다고 한 것이고, “뒤에 동녕부(東寧府)를 요양행성으로 이동하였다는 것에 따라 압록강(鴨綠江) 이북(以北)에 동녕부(東寧府)가 있게 된 까닭이다.”

 

    여기서 압록강(鴨綠江) 이북(以北)의 땅에 요양(遼陽)”이 있느냐? 하는 것이고, 요양(遼陽)이란 요수(遼水)=요하(遼河)”와 직접적(直接的)인 관련이 있는데, 압록강(鴨綠江) 이북(以北)의 어떤 하천(河川)요수(遼水)=요하(遼河)”냐 하는 것이다.

 

    도대체 요수(遼水)=요하(遼河)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거다. 수경주(水經注)요수(遼水)=요하(遼河)’가 기록(記錄)되어 있다는 것은, 그 하천(河川)대륙(大陸)의 땅에 있었다.”는 직접적(直接的)인 증거(證據).

 

    (6) ()쪽으로는 압록강(鴨綠江)에 이르기까지 텅 비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소위(所謂) 조선사(朝鮮史)와 조선인(朝鮮人)들이 기록한 많은 기록(記錄)에서는, 압록강(鴨綠江)이 화이(華夷)를 나누고, 이는 하늘이 베풀어준 천혜(天惠)의 지경(地境)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반도(半島) 땅의 고려(高麗) ()이며, ()이고, 중국(中國)이며, 중원(中原)의 땅이다.” 라고 하여야 한다. 그래야 그 북()쪽의 땅에 살고 있는 야만인(野蠻人)들은 곧 ()’가 되는 것이 아니더냐?

 

    반도(半島) 북방(北方) 땅에 있었던 야인(野人) 또는 만이(蠻夷), ()들이 화(), ()라고 한다면, 오늘날의 중국(中國) 땅은 서융(西戎)들의 터전이어야 한다. 도대체 무엇이 진실(眞實)을 말하고 있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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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철관(鐵關)? 철문관(鐵門關)?

 

    太祖實錄 1, 총서 44번째 기사 / 태조가 삼선 삼개를 격퇴하여 함주를 탈환하고, 그 공으로 밀직부사로 승진하다 : 二月,太祖自西北面,引軍至鐵關,人心皆喜,將士膽氣自倍.與方信,,,三面進攻,大破走之,悉復和,咸等州.三善,三介奔于女眞,終不返. : 2, 태조(太祖)가 서북면(西北面)으로부터 군사를 이끌고 철관(鐵關)에 이르니, 인심(人心)이 모두 기뻐하고 장수와 군사들의 담기(膽氣)가 저절로 배나 솟았다. 한방신·김귀와 함께 삼면(三面)에서 전진해 공격하여 크게 부수어 그들을 달아나게 하고 화주(和州)와 함주(咸州) 등 고을을 수복하니, 삼선(三善)과 삼개(三介)는 여진(女眞) 땅으로 달아나서 마침내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였다.

 

    ※ 철관(鐵關) : ()로 제작(製作)하여 설치(設置)한 관문(關門)이나 아주 튼튼한 관문(關門)을 칭한다. 또는 험산(險山)준령(峻嶺)에 만들어 놓은 튼튼한 관문(關門)이나 깊은 골짜기등에 만들어 놓은 관문(關門)등을 일컫는다.는 것이 정설(定說)일 것이다.

 

    아울러 누구도 넘보지 못할 견고(堅固)한 성벽(城壁)과 성문(城門)을 말하는 것, 또는 지형지세(地形地勢)가 험준(險峻)한 곳에 외통수 길만이 있는 곳에, 성벽(城壁)을 쌓아 성문(城門)으로만 출입(出入)이 가능(可能)하도록 하고, 군사(軍士)들이 이곳을 수비(守備)하고 있으니, 결코 침입(侵入)할 수 없는 곳이란 생각을 언 뜻 떠올릴 수 있다.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은, 반도(半島) 철령(鐵嶺) 고갯마루에 성()과 관문(關門)을 설치(設置)해 놓고 이를 철관(鐵關)”이라 했다하고, 함흥(咸興) 주위에도 있었다고 하며, 경상도(慶尙道) 신라(新羅)의 동쪽 장인국(長人國)”과의 국경(國境)지대(?)에도 있었다고 말하며, 안북하(安北河)주변에도 있었다.고 말한다.

 

    신라(新羅)의 동()쪽이란 말은 계림(鷄林) 곧 경주(慶州)의 동()쪽이란 말과 같다. 이곳 어디에 철관(鐵關)의 흔적(痕迹)이 있으며, 더불어 장인국(長人國)이 있었느냐? 또는 그 흔적(痕迹)? 이건 반도(半島) 땅 신라(新羅)에서는 따지고 지지고 볶고 할 일도 없다. 왜냐하면 불가능(不可能)한 일이기 때문이다.

 

    「철관(鐵關) 또는 철문관(鐵門關)에 대해 하나하나 따져보기로 하자.

 

    (1) 新唐書 新羅 : 新羅,弁韓苗裔也.居漢樂浪地,橫千里,縱三千里,東拒長人 (中略). : 신라(新羅), 변한(弁韓)의 묘예苗裔 : 먼 후대의 자손이다. ()의 낙랑군(樂浪郡) 땅에서 살았다. ()으로 천리(千里), ()으로 3 천리(千里)인데, ()쪽으로는 장인(長人)에 닿고, (중략). 長人者,人類長三丈,鋸牙鉤爪,黑毛覆身,不火食,噬禽獸,或搏人以食得婦人,以治衣服.其國連山數十里,有峽,固以鐵闔,號關門,新羅常屯弩士數千守之 : 장인(長人)은 사람의 일족인데 신장(身長)3 ()이며, 어금니가 톱니와 같고(鋸牙) 갈고리 손톱(鉤爪)을 하고, 검은 털(黑毛)이 몸을 덮고 있으며, 음식은 익혀 먹지 않고, 금수(禽獸)를 물어 잡고, 혹은 사람을 때려잡아 먹는다. : 부인을 얻으면, 의복이나 짓게 한다. 그 나라는 산()이 수십(數十) 리에 이어져 있으며, 협곡(峽谷)이 있어, 철문鐵闔 : 철 합(鐵闔)으로 단단하게 닫혀 있는데, “관문(關門)”이라 부르는데, 신라(新羅)는 항시(恒時) 쇠뇌 수(弩士) 수천(數千)을 주둔(駐屯)시켜 지킨다.고 하였으니,

 

    이러한 것들을 증거(證據) 또는 고증(考證)할 수 있는 것들이 상존(尙存)하느냐하는 것이다. 한글 해설서(解說書)속에만 존재(存在)하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뜻이다.

 

    (2)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 文武王 下 : 十五年,緣安北河設關城,又築鐵關城.靺鞨入阿達城劫掠,城主素那逆戰死之.唐兵與契丹靺鞨兵來,圍七重城不克. : 15, 안북하(安北河)를 따라 관문(關門)과 성()을 쌓고 또한 철관성(鐵關城)을 쌓았다. 말갈(靺鞨)이 아달성에 들어와 약탈을 시작하자, 성주 소나가 그들과 싸우다가 전사(戰死)하였다. ()이 글란(契丹) 말갈(靺鞨) 군사와 함께 칠중성(七重城)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신라(新羅)는 두 개의 철관(鐵關)’이 있었다는 것으로 이해(理解) 할 수 있다. 경주(慶州) ()쪽의 철문(鐵門)鐵闔=關門과 안북하(安北河)에 관성(關城)을 쌓고, 또 철관성(鐵關城)을 쌓았다.고 하였으니 말이다.

 

    말갈(靺鞨)이 고구려(高駒驪)? 어떻게 고구려(高駒驪) 땅을 지나 신라(新羅) 땅을 침범(侵犯)할 수 있겠는가? 또 안북하(安北河)는 어느 하천을 말하는 거며, 더불어 철문(鐵門)의 유적지(遺蹟地)는 상존(尙存)하느냐? 흔적(痕迹)이라도 찾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 신당서(新唐書) 신라(新羅)편에서 말하는 철관(鐵關) 또는 철문(鐵門)’과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말하는 철관성(鐵關城)’등은, 반도(半島) 땅에서는 불가능(不可能)하다는 것은 상식(常識)이다.

 

    오직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한글 해설서(解說書)‘에서 만이 존재(存在)하고 있을 뿐이다. 이들이 바로 조선왕조(朝鮮王朝)를 반도(半島) 땅에 처넣은 원흉(元兇)들이다.

 

    (3) 연행(燕行)기 철문관(鐵門關) / 연행(燕行)2/ 起 熱 河 至 圓 明 園 / 경술년(1790, 정조 14) 7[16-26] 22(경자)

 

    《潮河自塞外興州發源.入古北口西南.經密雲懷柔.至牛欄山.與白河合.中略. : 조하는 새외(塞外) 흥주(興州)에서 발원, 고북구에 들어와서 서남으로 밀운(密雲), 회유(懷柔)를 거쳐 우란산(牛欄山)에 이르러 백하(白河)와 합류한다. 중략(中略). 然水性湍急.大雨則諸崖之水.奔騰而下.漂木走石.當歲歲修治.川之兩旁.築垣立臺.東臺下.有鐵門關.爲出入道. : 그러나 물살이 급하여 큰비가 오면 여러 산비탈의 물이 넘쳐 내려와서 나무가 뜨고 돌이 굴러가므로, 해마다 수리해야 한다. 내의 양쪽 곁에는 담을 쌓고 대()를 세웠는데, 동쪽 대 아래 철문관(鐵門關)이 있으니 이것이 출입하는 길이다. 常扃鑰不開.而臺上有樓.今廢.總督大臣以撫賞涖焉.中略. : 그러나 항상 잠가 둔 채 열지 않는다. 대 위에는 문루(門樓)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총독대신(總督大臣)이 보살피고 상 주는 일로 임하는 곳이다. 중략(中略).하였다.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에 철문관(鐵門關)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4) 新唐書 地理志 / 媯州 媯川郡 / 懷戎縣에 있는 철문관(鐵門關)

 

    《鐵門關:.天寶中析置媯川縣,尋省.媯水貫中.北九十里有長城,開元中張說築.東南五十里有居庸塞,東連盧龍,碣石,西屬太行,常山,實天下之,鐵門關.西有寧武軍.又北有廣邊軍,故白雲城也. : 철문관(鐵門關) : 천보(天寶) 중에 규천현(嬀川縣)을 나누어 두었는데, 규수(嬀水) 가운데를 관통하여, 북쪽 90 리에 장성(長城)이 있는데, 개원(開元)중에 장설(張說)이 쌓았다. 동남(東南) 50리에 거용새(居庸塞)가 있으며, 동쪽으로 노룡(盧龍)과 갈석(碣石)으로 연이어져 있으며, (西)쪽에는 태행(太行), 상산(常山)에 속하여 천하의 보배이다. 철문관(鐵門關)이 있으며, 서쪽에는 영무군이 있고, 또 북()쪽에 광변군(廣邊軍)이 있는데, 옛 백운성(白雲城)이다.라고 하였는데,

 

    위의 글 “(3)+(4)”를 보면 : 연행기(燕行記)속의 철문관(鐵門關)과 신당서(新唐書) 지리지(地理志) 규주(嬀州) 규천군(嬀川郡)내에 있는 철문관(鐵門關)은 같은 장소(場所)의 것이 아닌가 짐작(斟酌)된다.

 

    여기서 문제(問題)가 되는 것은, 이곳은 유주대도독부(幽州大都督府)’에 속한 곳으로 곧 규주(嬀州)는 규수(嬀水)의 이름을 취해 그 땅의 이름으로 한 것舊唐書 地理志 : 改名媯州,取媯水為名이니, 당연(當然)하게도 규수(嬀水)”주변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대의 유주대도독부(幽州大都督府)’는 범양(范陽)에 있었으며, 이 범양(范陽),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에 있었다.는 것이다.

 

    규수(嬀水),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아랄 해(Ara )로 들어가는 오호수(烏滸水 : 烏滸河)”를 말하는 것인데, 또 다른 이름이 아무(Amu)강 또는 아무다리아(Amu, Darya이다.

 

    ※【오호수(烏滸水) : 오호수(烏滸水)는 또 오호하(烏滸河)이며, 아무다리아강(A m u, D a r y a, 러시아어: Амударья, 페르시아어:آمودریا, D a r y a (바다를 의미함)이다. 총령(蔥嶺)에서 발원(發源)한다. "다리야"는 터키어로 ""의 의미이므로 "아무강"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하는 문제(問題), 각 개개(箇箇)인의 조선사(朝鮮史) 역량(力量)과 관계(關係)되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5)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 서역(西域) : 鐵門關,唐志在焉耆西五十里.又龜茲西出有拓厥關 : 철문관(鐵門關), 당지(唐志)에 의하면, 언기(焉耆) 서쪽 50 리에 있다. 또 구자(龜茲)에서 서(西)쪽으로 나가면 척궐관(拓闕關)’이 있다.

 

    (6)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 서역(西域) : 鐵門峽在渴石城之西.懸崖絕壁,高數十仞,徑路崎嶇,深二三里.蕃人守此.亦名鐵門關 : 철문협(鐵門峽)은 갈석성(渴石城)의 서(西)쪽에 있다. 절벽(絶壁)으로 낭떠러지인데, 높이가 수십(數十)()이며, 지름길은 험하고 험해물에서 길쭉하게 뻗어있어, 깊이가 2-3리이다. ()인들이 이곳을 수비한다. 또한 이름이 철문관(鐵門關)”이다.라고 하였다.

    (6)-1) 芝峯類說卷二 / 諸國部 / 外國 / 渴石 : 在撒馬兒罕西南.城周十餘里.四面水田.故元駙馬居也.中略.兩壁懸崖.宛如斧劈.行二三里.出峽口有門.謂之鐵門關. : 갈석(渴石) : 살마아한(撒馬兒罕)의 서남(西南)에 있는데, 성의 둘레가 십()여리이며, 사면이 수전(水田)이다. 옛 원()의 부마국(鮒馬國)이다. 중략(中略). 양쪽의 벽은 낭떠러지이다. 마치 도끼로 자른 것과 같다. 2-3리를 가면, 골짜기 입구가 나오는데 문()이 있다. 철문관(鐵門關)이라 이른다. 撒馬兒罕.漢罽賓也.去嘉峪關萬里.東西相距千里.風景偉麗.中略.略與中國文字相同. : 살마아한(撒馬兒罕), ()대의 계빈(罽賓)이며, 가욕관()에서 만리(萬里) 떨어져있다. 동서(東西)는 서로 천리(千里)떨어져 있으며, 풍경은 아름답고 곱다. 중략. 대략 중국문자와 서로 같다.고 하였다.

    ※ <‘사마르칸트의 음역(音譯) : ‘살마아한(撒馬兒罕)’이라고 한다. 계빈(罽賓)캐시미르지방이라고 한다.>

    (6)-2) 청장관전서 / 송사(宋史)전 몽고열전(蒙古列傳) :十四年.鐵木眞.克卜哈兒薛迷思干等城.駐兵鐵門關.關在撒馬兒國 : 14(태조 16, 1221), 철목진(鐵木眞)이 복합아(卜哈兒)설미사간(薛迷思干) 등의 성()을 쳐 이기고, 병사를 철문관(鐵門關)”에 주둔시켰다. ()살마아국(撒馬兒國)”에 있다.

    (7)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 서역(西域) : 鐵門關在東印度國.宋嘉定十五年,蒙古鐵木真侵西域,至忻都國鐵門關,大掠而還,是也. : 철문관(鐵門關)은 동인도국에 있다. () 가정 15, 몽고(蒙古)의 철목진(鐵木眞)이 서역을 침노하였는데, ‘흔도(忻都)’가 철문관(鐵門關)에 이르러 크게 약탈하고 돌아왔다.

    (8) 위키 백과 / 철문관(鐵門關) / 철문관(鐵門關)은 비단길에서 천산남로의 중요한 요충지로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진()나라 때 처음 설치되었다. ‘쿠얼러에서 20분 거리로 지금은 남아 있는 유적이 거의 없고, 성벽의 흔적만 남아 있다. 지금의 철문관은 최근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철문관의 흔적은 흉노가 서역을 다스리던 BC 174년에 동복도위(僮僕都尉)가 수비를 했다는 첫 기록이 있다. BC 138-119 장건이 서역을 정벌하기 갈 때도 두 번을 지나갔다는 기록이 있으며, 현재의 것은 위진남북조 시대에 건설되었고, 당나라 때는 이곳에 관리들을 상주시켰다. 7세기 중엽 당나라의 고승인 현장의 여행기인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8세기 혜초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의 행로에서도 철문관(鐵門關)을 거쳐 안국(安國)으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13세기 전진파의 도사 장춘진인 구처기도 1220년 제자 18인과 함께 산동 성에서 출발하여 철문관 등지를 거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것은 그의 제자 이지상(李志常)을 통해 1권의 단편인 "장춘진인서유기(长春真人西游记)"로 편찬되었다.

    위의 위키백과를 보면, ()나라 때 처음 설치되었다.고 하는데, 현존(現存)하는 어떤 원전(原典)을 보아도 ()의 영토(領土)가 현() 신강성(新疆省) 중부(中部)지방을 포함(包含)한다는 것이 없다.” 21세기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은 모두 이 모양이다. 이렇게 역사(歷史)는 승자(勝者)편에 서서, 그 자()들의 입맛에 맞춰, 다시 써지는 것이다.

    ● 조선사(朝鮮史)에서 이를 바라보면 :()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와 그 남부(南部)지방(地方)을 강역(疆域)으로 있었던,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지방의 왕조(王朝)라고 했을 때, ()쪽 이민족(異民族)옛 조선왕조(朝鮮王朝)의 국가(國家)들의 침입(侵入)을 차단(遮斷)하기 위해 철문관(鐵門關)”을 설치(設置)할 수 있다. 이게 바로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인 것이다.

    (9) 백과사전 / 현장(玄奘 : Hsuantsang ) 중국 승려 / 629년 비밀리에 사천(四川)지방을 떠나 인도(印度)로 향했다. 그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쪽을 지나 투루판·카라샤르·쿠차·타슈켄트·사마르칸트 등의 오아시스 중심지를 거쳐 철문(鐵門 Iron Gates)’을 넘어 박트리아로 들어갔으며, 힌두쿠시 산맥을 가로질러 서북 인도의 카피사·간다라·카슈미르 등지를 통과했다.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10) 해국도지(海國圖志) 속의 철문관(鐵門關  

    해국도지(海國圖志) / 西南洋(沿革/ 邱長春西遊記 : 真人長春子,姓邱,名處機,登州棲霞人 : 구장춘서유기(邱長春西遊記) / 진인(眞人)으로 장춘 자, 성은 구()이며, 이름은 처기(處機)로 등주(登州) 서하(棲霞)인이다.진인(眞人) 구장춘(邱長春)이 몽고(蒙古) 황제(皇帝)의 요청(要請)으로 서역(西域)을 여행(旅行)하고 남긴 기행문(紀行文)이다.

 

    《四日,過碣石城,傳旨以甲士千人衛送,過鐵門東南度山. : 4, 갈석성(碣石城)을 지나니, 조서(詔書)가 전해져 갑사 일천(一千)인이 호위하여 보내주어, 철문(鐵門)을 지나 동남(東南) ()에 닿았다. 山勢高大,亂石縱橫,眾軍挽車,兩日方至前山.沿流南行,軍即北入大山破賊. : 산세(山勢)는 높고 커, 종횡(縱橫)으로 돌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어, 무리의 병사들이 거마를 밀고 당겨, ()일에 산 앞에 이르러, 물을 따라 남쪽으로 가는데, 군대(軍隊)는 곧 북쪽으로 들어가 큰 산의 도적()을 깨뜨렸다. 五日,舟渡小河,七日舟濟大河,即阿母河也. : 5, 배로 조그만 하천을 건너고, 7일 배로 큰 하천을 건넜는데, 아모하(阿母河)이다.라고 하였다.

 

    ※ 구장춘서유기(邱長春西遊記) 계속(繼續) / 碣石 : 元史·地理誌作柯傷.明史.外國傳作渴石雲,南傍大山屹立,出峽口,有石門,色似鐵. : 갈석(碣石) : 원사(元史)지리지(地理志) 가상(柯傷)’이다. 명사(明史) 외국전(外國傳)의 갈석(渴石)인데, 남쪽 곁에 큰 산이 우뚝 솟아 서있는데, 골짜기 입구로 나오니, 석문(石門)이 있는데, 색깔이 철()과 같다. 唐西域記出鐵門至睹賀羅國,其地東拒蔥嶺,西接波剌斯,南逾大雪山,北據鐵門: 당서역기(唐西域記) : 철문(鐵門)을 나와 도하라국(睹賀羅國)에 이르렀는데, 그 땅은 동쪽으로 총령(蔥嶺)에 막혀있고, 서쪽은 파랄사(波剌斯)와 접()하며, 남쪽은 대설산(大雪山)을 지나야 하며, 북쪽은 철문(鐵門)이 굳게 지키고 있다. 過雪山為濫波國,即北印度境是也.太祖追北印度算端,南逾雪山,已親至北印度: 설산(雪山)을 지나 람파국(濫波國)인데, 곧 북인도(北印度)의 지경이다. 태조(太祖)가 북인도(北印度)산단(算端)”을 쫓아, 남쪽의 설산(雪山)을 지나, 친히 북인도(北印度)에 이르렀다. 太祖旋師後複遣將追至忻都窮及申河算端死乃返則兵亦至中印度界矣: 태조(太祖)가 장수들을 되돌린 후 다시 장수를 보내 추격하였는데 흔도(忻都)’신하(申河)’ 끝까지 이르자, ‘산단(算端)’이 죽자 이에 되돌아 왔는데, 군대는 또 중인도(中印度)의 지경에 이르렀다. 故逾雪山南又三日乃達乃長春至行在則帝已回至雪山避暑.故長春過鐵門後行十二日至雪山而止也: 설산(雪山)의 남쪽을 지나 또 3일에 도달하고, 장춘(長春) 일행이 가에 이르렀는데, 태조(太祖)는 이미 회군(回軍)하여 설산(雪山)에 이르러 시원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 장춘(長春) 일행은 철문(鐵門)을 지난 뒤, 12일을 가 설산(雪山)에 이르러 머물렀다. 所渡之阿母河元史亦作暗布河亦作阿木河元秘史作阿梅河即佛書之縛芻河發源蔥嶺大龍池西北流入裏海者: 물을 건넌 아모하(阿母河), 원사(元史)에서 암포하(暗布河)이며, 또한 아목하(阿木河)이다. () 비사(秘史)의 아매하(阿梅河)이며, 곧 불서(佛書)의 박추하(縛芻河)인데, 총령(蔥嶺)의 대()용지(龍池)에 발원하여, 서북(西北)으로 흘러 리해裏海 : 아랄해(Aral )로 들어가는 하천이다. 其後於阿母河立元帥府,統蔥嶺以西各國.大雪山,今為和羅三托山.自東而西,綿亙千裏. : 그 뒤에 아모하(阿母河)에 원수(元帥)부를 세우고, 총령(蔥嶺) 서쪽의 각국을 통치하였다. 대설산(大雪山)은 지금의 화라삼탁산(和羅三托山)’이다. ()에서 서(西), 천리(千里)에 가로 질러 연이어 뻗쳐 있다. 】》

 

    ● 현재(現在)의 하북성(河北省) 산해관(山海關) 바닷가에 있었다는 갈석(碣石)’이 이곳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아모하(阿母河)’ 일대(一帶)에 있었다는 것이고, 또 이곳 주변에 철문(鐵門)’이 있었다고 하였다.

 

    조선사(朝鮮史)에서 이를 보면 :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의 아랄 해(Aral )아모하(阿母河)=규수(嬀水)=아무다리아강유역(流域)과 그 일대(一帶)등에는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일대에 있었다는 옛 지명(地名)들이 그대로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史實)이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 태조실록(太祖實錄)에서 말하는 철관(鐵關) 또는 철문관(鐵門關)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二月,太祖自西北面,引軍至鐵關,人心皆喜,將士膽氣自倍.與方信,,,三面進攻,大破走之,悉復和,咸等州.三善,三介奔于女眞,終不返. : 2, 태조(太祖)가 서북면(西北面)으로부터 군사를 이끌고 철관(鐵關)에 이르니, 인심(人心)이 모두 기뻐하고 장수와 군사들의 담기(膽氣)가 저절로 배나 솟았다. 한방신·김귀와 함께 삼면(三面)에서 전진해 공격하여 크게 부수어 그들을 달아나게 하고 화주(和州)와 함주(咸州) 등 고을을 수복하니, 삼선(三善)과 삼개(三介)는 여진(女眞) 땅으로 달아나서 마침내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였으니,

 

    왕조실록(王朝實錄)에서 말하는 철관(鐵關), 고려(高麗)와 여진(女眞)의 지경(地境)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判斷)되는데, 이를 원전(原典)에서 그 위치(位置)를 추적(追跡)해 보면, 아모하(阿母河) 유역일대(流域一帶)로 좁혀지게 된다.

 

    이성계(李成桂) 가문(家門)이 토호(土豪)로써 군벌(軍閥)이 될 수 있었고, 그의 조상(祖上)들이 묻혔다는 달단동(韃靼洞)과 함께, 몽고(蒙古)의 달로화적(達魯花赤)을 세습(世襲)할 수 있었던 것들을 무리(無理)없이 설명(說明)할 수 있는 것이다.

 

    太祖實錄 1, 총서 69번째 기사 / 태조가 단주에 침입한 호발도를 격퇴하고 변방을 평안히 할 계책을 올리다 : 太祖因獻安邊之策曰:北界與女眞,達達,,瀋之境相連,實爲國家要害之地.雖於無事之時,必當儲糧養兵,以備不虞. : 북계(北界)는 여진(女眞달단(韃靼), 요동(遼東심양(瀋陽)의 경계와 서로 연해 있으므로 실로 국가의 요해지(要害地)가 되니, 비록 아무 일이 없을 시기일지라도 반드시 마땅히 군량을 저축하고 군사를 길러 뜻밖의 변고에 대비해야 될 것입니다.라고 한 것이 그 증거(證據).

 

     조선사(朝鮮史)=한국사(韓國史)’는 기필코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이는 미국(美國)을 위해서도 아니고, 일본(日本)을 위해서도 아니다. 오직 조선(朝鮮)의 후예(後裔)들인 대한민국(大韓民國)과 국민(國民)들을 위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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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만리장성(萬里長城)

 

    太祖實錄 1, 총서 68번째 기사 / 태조가 동북면 도지휘사가 되어 임지로 떠나자, 이색이 시를 지어 전송하다 : 辛禑八年壬戌秋七月,以太祖爲東北面都指揮使.時女眞人胡拔都,擄掠東北面人民而去,以太祖世管其道軍務,威信素著,遣以慰撫之.韓山君 李穡作詩送之曰 : 신우(辛禑) 8(1382) 임술 가을 7, 태조를 동북면 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로 삼았다. 이때 여진(女眞) 사람 호발도(胡拔都)가 동북면의 인민을 사로잡아 가니, 태조가 그 도()의 군무(軍務)를 대대로 관장하여 위신(威信)이 본디부터 나타난 이유로써, 보내어 그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져 주게 하였다.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이 시()를 지어 전송했는데, 그 시에, 松軒膽氣蓋戎臣 : 송헌(松軒)의 담기(膽氣)가 무신(武臣)을 뒤덮으니 / 萬里長城屬一身 : 만리장성(萬里長城)이 한몸에 맡겨졌네 / 奔走幾經多故日 : 분주하면서 몇 번이나 다사(多事)한 시기를 지냈던고 / 歸來同樂太平春 : 돌아오면 함께 태평한 날을 즐길 것이네. 중략(中略)」》하였다.

 

    위의 내용(內容), “고려(高麗)의 우왕(禑王)이 이성계(李成桂)를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로 임명(任命)한 것을 두고 이색(李穡)이 임지(任地)로 떠나는 이성계(李成桂)에게 시()로써 전송하였다.”는 이야기인데,

 

    「고려(高麗) 영토(領土)안에 만리장성(萬里長城)이 있었다.는 것이고, “이 만리장성(萬里長城), 고려(高麗) 영토(領土)의 동북면(東北面)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인 매국(賣國)사학자(史學者)들은 말할 것이다. ‘천자국(天子國)=상국(上國)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차용(借用)한 것이다라고 말이다.

 

    국왕(國王)의 등극(登極) 또는 세자책봉(世子冊封)에 이르기까지 천자국(天子國)의 승인(承認)내지 허락(許諾)을 받아야 했던 제후국(諸侯國)으로써, 어디 감히… …천자국(天子國)의 천자(天子)와 관계(關係)되는 글자 한 자()도 마음대로 사용(使用)하지 못했다는 것을 감안(勘案)한다면, 천자국(天子國)의 주요(主要)것들을 차용(借用)했다는 말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고려(高麗) 영토(領土)안에 만리장성(萬里長城)이 있었다.것이 가장 올바른, 진실(眞實)된 역사인식(歷史認識)이라고 당당(堂堂)하게 말할 수 있다.

 

    ○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이제 무덤(墓地)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벌써 무덤(墓地)속으로 들어갔어야 할 폐기처분(廢棄處分) 대상 1호이다. “호소카 유지(保坂 祐二)” 교수(敎授)는 말하기를,

 

    〈오늘날의 대한민국(大韓民國) 사회(社會), () 친일파(親日派)들이 나라를 분열(分裂)시키고, 혼란(昏亂)을 조장하며, 열도(列島) 제국주의(帝國主義) 신봉자(信奉者)들로부터 금전적(金錢的) 이득(利得)을 취하며 기생(寄生)하고 있다.고 하였다. 벌써 오래 전()부터 우리 카페(Cafe)에서는 이러한 친일파(親日派) 매국노(賣國奴)들을 처단(處斷)해야 한다고 강력(强力)하게 주장(主張)한 바 있다.

 

    이러한 우려(憂慮)가 현실(現實)로 다가왔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 이상(以上)의 많은 친일파(親日派) 매국노(賣國奴)들이 겉으로는 애국자(愛國者), 학자(學者), 교수(敎授), 문학자(文學者), 종교인(宗敎人)으로 가면(假面)을 쓰고 암암리에 활동(活動)하고 있다는 것이 전율(戰慄)을 느낀다.

 

    이들에 의해 오늘날 우리 사회(社會)는 분열(分裂)과 대립(對立)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중이다. 하루라도 빨리 매국노(賣國奴)를 색출(索出)하여 분열(分裂)과 대립(對立)을 멈추고, 국가(國家)의 번영(繁榮)과 발전(發展)에 매진(邁進)할 때다.

                                                                        20191110[글쓴이 : 문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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