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漢)의 장안성(長安城)은, 구자국성(龜茲國城)?
평양성(平壤城)=장안성(長安城)·구자국성(龜慈國城)의 미스터리(mystery)
○ 〈漢都長安(한도장안)〉이란 말이 있다. 이런 말이 인구회자(人口膾炙)【널리 세상(世上) 사람의 이야깃거리가 되는 것】되는 것은,
장안(長安)은,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에 의해 도읍지(都邑地)가 되어 융성(隆盛)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以後)에도 장안(長安)은, 봉건왕조(封建王朝)들의 도읍지(都邑地)로 유명세(有名稅)를 탔는데, 특히 수(隋)와 당(唐)나라 때는 이곳 장안(長安)은, 동도(東都)라고 했던 낙양(洛陽)과 더불어 가장 번화(繁華)했던 도회지(都會地)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소위(所謂) 정사(正史)라고 칭하는 중국사(中國史)에서도, 또 조선사(朝鮮史)에서도 〈“장안(長安)을 유경(柳京)”이라는 애칭(愛稱)으로도 불렸고, 이곳이 낙랑군(樂浪郡)이었고, 평양(平壤)이다.〉라고 기록(記錄)해 놓아, 작금의 세대(世代)에서 “이게 무슨 까닭인가?”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한(漢)【‘서한(西漢)=전한(前漢)’과 ‘동한(東漢)=후한(後漢)’】이란 옛 봉건왕조는, 조선사(朝鮮史)의 “한(韓)”이었을까? 이 말은 “한(漢)이 곧 구려(駒驪)였는가?” 하는 의심(疑心)이다.
이게 아니었다면, 분명(分明) 「한(漢)」이란 옛 봉건왕조(封建王朝)는 존재(存在)했었다고 보아야 하는데, 오늘날 대륙(大陸)의 장안(長安)【서안(西安)】땅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이곳 “장안(長安)은 고구려(高駒驪)의 땅” 이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옛 원전(原典)속에서는 〈동방(東方) 땅에 구이(九夷)가 살았다.〉고 했고, “동방(東方)이란 서방(西方)”과 대칭(對稱)되는 곳이다.
「항상(恒常) 주장(主張)하는 것이지만, 동방(東方)이 어떻게 반도(半島) 땅이 될 수 있겠는가? “반도(半島) 땅은. 동방(東方)의 넓고 넓은 땅 가운데 오직 한 부분(部分)일 뿐이다.”」 이러한 것을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이 지들 멋대로 “동방(東方)은 반도(半島)다”라고 해설(解說)해 버린 것이다. 그래야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를 반도(半島) 땅에 가둬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이러한 조선사(朝鮮史)로 바라볼 때, 오늘날의 대륙(大陸) 땅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은,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장안(長安)이었고, 유경(柳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도장안(漢都長安)’이란 말은, 조작(造作)된 것일까?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즉(卽) 「 한(漢)은, 한(韓)으로, 한(馯)이다. 한(馯)은 동방(東方)족의 한 갈래다. 구려(駒驪)다. 한(漢)은, 소수민족(少數民族)으로 오늘날의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와 서역(西域)【신강지방(新疆地方)】에 있었던 제후(諸侯)로, 장안(長安)은 구자성(龜玆城)이다.」라고 추정(推定) 및 유추(類推)해 볼 수 있는데, 오늘의 주제(主題)다.
“한도장안(漢都長安)”이라고 불릴 수 있는 곳이 딱 한군데 있는데, 「그 나라의 성(城)과 궁실(宮室)이 매우 크고, 시읍(市邑)이 장안성(長安城)과 같았다.」라고 역사서(歷史書)는 전하면서, 그 유적(遺跡)도 상존(尙存)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한(漢)나라 이전(以前) 또는 이후(以後)의 수당(隋唐)등의 여러 왕조(王朝) 이야기는, 오늘날의 ‘동방(東方)=대륙(大陸)’【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의 동(東)쪽】땅이 아닌 “동방(東方)과 서방(西方)의 완충지대(緩衝地帶)였던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와 신강(新疆)의 일부(一部) 땅에서 벌어졌던 사건(事件)이다.”〉라고 보는 것이다.
특히 조선왕조(朝鮮王朝) ‘삼국시대(三國時代)’라고 하는, ‘고구려(高駒驪)·신라(新羅)·백제(百濟)’가 흥성(興盛)할 때, 밀접(密接)한 관계(關係)를 맺고 있었던 여러 왕조(王朝)의 역사서(歷史書)와 조선사(朝鮮史)의 ‘삼국사기(三國史記)·고려사(高麗史)·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등과 학자(學者)들의 개인문집(個人文集)속에 기록(記錄)된 것은,
◇ 평양(平壤)은, 「기성(箕城)ㆍ낙랑(樂浪)ㆍ장안(長安)인데, 당서(唐書) 또는 통전(通典)등에서는, “평양(平壤)을 또한 장안(長安)이라 이른다.”했다. 최자(崔滋)의 삼도부(三都賦)에서는, 서경(西京)ㆍ서도(西都)ㆍ호경(鎬京)ㆍ유경(柳京)이다.」라고 하였다.
특히 “유경(柳京)”이라고 한 것은, 〈장안(長安)을 흐르는 하천(河川) 양 둑에 십여(十餘)리에 걸쳐 펼쳐져 있는 버드나무(柳) 숲을 지칭(指稱)하는 말로, 그야말로 장관(壯觀)이었다고 전하는데, 특히 남녀(男女)간에, 부모(父母)와 자식(子息)간에, 형제(兄弟)와 자매(姊妹)간에, 선후배(先後輩)간에, 군주(君主)와 신하(臣下)사이에, “이별(離別)의 애처로운 장소(場所)”로 기억(記憶)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애처로운 장소(場所)로 기억(記憶)될 수 있었던 십여(十餘)리에 펼쳐져 있던 하천(河川)가의 버드나무(柳) 숲은, 장안(長安)이 유일무이(唯一無二)했다.”는 것이 중요(重要)하다. 이러한 곳은 당시(當時), 한 곳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유경(柳京)”이란 이름은 언제부터 애칭으로 불러졌는가? 하는 것인데, 이긍익【1736년(영조(英祖)12-1806년(순조(純祖)6】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역대전고(歷代典故) / 기자조선(箕子朝鮮)”편을 보면, 그 연유(緣由)를 알 수 있는데, 유경(柳京)의 원조(元祖)라 할 수 있다. 즉(卽),
《순오지(旬五志)를 인용(引用)하여 : 《「세상에 전하기를, “기자가 조선(朝鮮)의 풍속(風俗)이 억세고 사나운 것을 보고, 버드나무의 본성(本性)이 부드럽다는 이유로 백성(百姓)들로 하여금 집집마다 버드나무를 심게 하였다. 이 때문에 평양(平壤)을 일명 ‘유경(柳京)’이라고 한다.”』고 한다. 世傳箕子見鮮俗强悍,以柳樹性柔,悉令民家種柳, 故平壤一名,柳京云.[旬五志]》 이렇게 기록(記錄)으로 남겨놓고,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또 전하기를,
《평양(平壤) 대동강(大同江) 동쪽 기슭에 긴 느릅나무 숲이 길 좌우에 늘어서 있는데, 가로(東西)로 10 리나 뻗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기자(箕子)가 백성(百姓)들에게 심게 하여 흉년(凶年)의 굶주림에 대비한 것이다.(平壤大同江東岸,有長楡林,擁路左右,橫亘十里,世傳箕子使民種植,以備救荒)”》라고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를 또 고증(考證)하듯,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편을 보면, 『平壤(평양)은 長安(장안)이며, 鎬京(호경)이며, 柳京(유경)이며, 樂浪(낙랑)이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이렇게 조선사(朝鮮史)에서는 “유경(柳京)”이란 바로 “평양(平壤)”을 말하며, 이는 또 장안(長安)을 뜻하며, 곧 “고구려(高句驪)의 황도(皇都)”를 말하는 것으로 인식(認識)되고, 설명(說明)되어 있다.
※ 한대(漢代)의 장락궁(長樂宮)·미앙궁(未央宮)도 [청(淸)의 필원(筆苑)] / 출처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또 하나 반박(反駁)할 수 없는, 빼도 박지도 못하는 결정적(決定的)인 것 하나는, 바로 “호경(鎬京)”때문이기도 하다. ‘장안성(長安城)과 호경(鎬京)’은 장안(長安)에 함께 있고, 서로 인접(隣接)해 있었다. “호경(鎬京)”은 주무왕(周武王)이 ‘은(殷)=상(商)’을 멸하고, 옮긴 주(周)나라 서울(京)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주무왕(周武王) “발(發)”이 천도(遷都)한 “호경(鎬京)이 두 곳에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에,
수년(數年)에 걸쳐 장안성(長安城)을 쌓고, 완성(完城)되자 장안성(長安城)으로 서울(京)을 옮기고(遷都)… …이렇게 장안(長安)은, 옛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서울(京)로써, 한 때 흥성(興盛)했다고 전해진다.
똑같은 이름의 장안(長安)과 유경(柳京)과 장안성(長安城)은,
➊ 전한(前漢)과 수당(隋唐)의 서울(京)이었던 장안(長安)!
➋ 고구려(高駒驪) 서울(京)이었던 장안(長安)!
똑같은 장소(場所)에, 서로 이질적(異質的)인 전혀 다른 두 나라(國家)의 왕조(王朝)가 서로 사이좋게 도회지(都會地)를 나누어 서울(京)로 사용(使用)했을까?
○ 조선사(朝鮮史) 입장(立場)에서 바라보는 “장안(長安)”은, 옛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서울(京)이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옛 조선(朝鮮)의 영토(領土)는 동방(東方)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서방(西方) 땅에 장안성(長安城)이란 성(城)과 도회지(都會地)가 있었을까?
있다. 존재(存在)해 있었다. ‘장안성(長安城)과 도회지(都會地)가 같았다’고 하였으니, 그것이 ‘서방(西方)의 장안(長安)’이 아니었을까? 그 일부(一部) 유적(遺跡)들은 지금도 상존(尙存)하고 있다고 한다.
동방(東方) 대륙(大陸)의 장안(長安)으로부터 ‘무려(無慮) 7-8천리(千里)나 떨어져 있었다.’는 서역(西域) 땅의 구자국(龜慈國)편에, 〈구자성(龜茲城)은 장안성(長安城)과 장안(長安)의 시읍(市邑)과 똑같고, 궁실(宮室)도 대단히 성했다(컸다)(城如長安市邑,宮室甚盛)〉는 생뚱맞은, 이질적(異質的)인, 전혀 관계(關係)없는 기록(記錄)을 남겨 놓은 것일까?
합리적(合理的)인 의심(疑心)은 이러한 것에서부터 출발(出發)한다.
※ 구자(龜茲)는, 쿠차(龟兹, Kucha)다.
◇ 쿠처(龟兹, Kucha)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쿠처【위구르어: كۇچار, 중국어 간체자: 库车, 정체자: 庫車, 屈支 ,屈茨, 丘玆, 중국어 간체자: 龟兹, 정체자: 龜玆】는 고대 불교 왕국 구자국(龜玆國)의 현지명으로 비단길에 있으며,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 가장자리 무자트강 남쪽에 있다. 현재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아커쑤 지구에 속하며 쿠처 현 중심이다. 인구는 1990년에 74,632명이었다. 쿠처(Kucha)는 쿠샤, 쿠처르 등으로도 읽히며 같은 곳을 가리킨다. - 인용/끝 -
○ 이러한 곳에 있었던 구자국(龜慈國)의 「구자국성(龜慈國城)과 시읍(市邑)이 매우 크고 성했는데, 장안성(長安城)과 같았다.」는 것이다. 명(明)나라 말(末)과 청(淸) 초기(初期)를 살다간 “고조우(顧祖禹)”가 편찬(編纂)한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서역(西域)편에 이러한 이야기가 기록(記錄)되어 있다.
【고조우(顧祖禹1631 ~ 1692) : 명나라 말과 청나라 초의 역사, 지리학자. 사학자 유겸의 아들. 지리학에 정통하였다. 벼슬하지 않고, 20년에 걸쳐 “여도요람, 독사방여기요”를 완성했다. 서건학·진덕화 등과 함께 “대청일통지”편찬에도 참여했다고 전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조우 [顧祖禹] (두산백과)】
○ 讀史方輿紀要.西域 / 龜茲國城 :《龜茲國城在亦力把力東南. 구자국성(龜慈國城)은 역력파력(亦力把力)동남(東南)쪽에 있다. 漢西域傳:龜茲治延城,去長安七千四百八十里,東至都護治烏壘城三百五十里.或曰丘慈,亦曰屈茲.武帝時,內附.中略. : 한(漢) 서역전(西域傳)에 의하면 : 구자(龜玆)는 연성(延城)에서 다스렸다. 장안(長安)으로부터 7,480리 떨어져 있고, 동(東)쪽으로 도호(都護)가 다스리는 오루성(烏壘城) 350리에 다다른다. 혹은 구자(丘慈), 또 굴자(屈慈)라고도 한다. 무제(武帝)때 내부하였다. 중략(中略). 太元七年,苻秦將呂光伐西域,焉耆諸國皆降,惟龜茲不下.九年,龜茲窘急,重賂獪胡求救. : 태원7년, 부진(苻秦)의 장(將) 여광(呂光)이 서역을 쳐서, 언기(焉耆)등 여러 나라가 모두 항복(降伏)하였으나, 유일하게 구자(龜玆)가 항복치 않았다. 9년에, 구자(龜玆)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몹시 급하게 되어, 많은 뇌물을 주고 회호(獪胡)에게 도움을 구했다. 獪胡王引溫宿尉頭諸國兵赴救,光大破之於城西.王侯降者三十餘國,光入龜茲城. : 회호왕(獪胡王)은 온숙(溫宿), 위두(尉頭)등의 여러 나라 병사들과 다다라 구원했으나, 여광(呂光)이 성(城)의 서(西)족을 크게 깨뜨렸다. 왕후(王侯) 30여 나라가 항복하고, 여광(呂光)이 구자성(龜玆城)에 들어왔다. 城如長安市邑,宮室甚盛.光撫寧西域,前世所不能服者,悉來歸附,改立故王帛純之弟震為龜茲王而還.中略. : 구자성(龜茲城)은 장안(長安)의 시읍(市邑)과 똑같고, 궁실(宮室)도 대단히 성했다(컸다). 여광(呂光)은 서역(西域)을 안무(按撫)하니, 전에 항복하지 않았던 자들도, 모두 와 귀부(歸附)하니, 옛 왕(王) 백순(帛純)의 동생인 ‘진(震)’을 구자왕(龜茲王)으로 다시 세웠다. 중략(中略).》하였는데, 공교롭게도…
※ 장안성(長安城)과 구자국성(龜慈國城)은 여러 가지로 공통점(共通點)이 많다. 우선(于先),
〈방(方) 6 리에 펼쳐져 있었다. 사찰(寺刹)이 많았다. 내성(內城). 외성(外城)등의 몇 겹으로 성(城)의 규모가 컸고(三重), 궁실(宮室) 또한 크고 성했으며, 시읍(市邑) 또한 같았다.〉고 하였다.
※ 장안(長安)외성(外城) 남문 명대(明代)에 보수 (출처 : 교수신문)
(1) 「구자국성(龜茲國城)은, 삼중(三重)으로 방(方) 5∼6 리에 걸쳐 있었다.」고 하였는데, 조선(朝鮮)의 장안성(長安城)인 평양성(平壤城) 즉(卽) 유경(柳京)의 「도성(都城)이 6 리(里)였다.」고 하였다.
진서(晉書)에서 이르기를 : 《구자국(龜慈國)은 낙양(洛陽)으로부터 서(西)쪽으로 8,280리 떨어져 있고, 성곽(城郭)이 있고, 그 성(城)은 삼중(三重)이며, 그 가운데에는 불탑과 사당이 천(千)개소가 있다. 왕궁(王宮)은 장엄하고 화려하였다.【晉書四夷 / 龜茲國:龜茲國西去洛陽八千二百八十里,俗有城郭,其城三重,中有佛塔廟千所.中略.王宮壯麗,煥若神居.】》고 하였다.
북사(北史)에서 이르기를 : 《구자국(龜慈國)은, 위리(尉犁)서북(西北)에 있는데, 백산(白山) 남쪽 170 리에 있다. 대(代)로부터 10,280리 떨어져 있다. 중략(中略). 그 나라 왕이 살고 있는 성(城)은 방(方) 5, 6리이다.【北史 西域 / 龜茲國,在尉犁西北,白山之南一百七十里,都延城,漢時舊國也。去代一萬二百八十里.中略.所居城方五六里】》라고 하였다.
수서(隋書)에서 이르기를 : 《구자국(龜慈國)의 서울(京)은 백산(白山)의 남(南) 170리에 있다. 도성(都城)은 방(方) 6 리이다.【隋書.西域.龜茲:龜茲國,都白山之南百七十裡,漢時舊國也.其王姓白,字蘇尼咥.都城方六里.】》라고 하였다.
(2) 고구려(高駒驪)의 ‘장안성(長安城)’은, 역시 6 리(里)였다고 한다.
주서(周書)에서 이르기를 : 《평양성(平壤城)은, 동서 6리(里)였다》고 하였다.
북사(北史)에서 이르기를 : 《도읍지는 평양성(平壤城)인데, 또한 장안성(長安城)이라고 한다. 동(東) 6 리(里)였다.》라고 하였고,
수서(隋書)에서 이르기를 : 《도읍지는 평양성(平壤城)인데, 또한 장안성(長安城)이라고 하는데, 동서(東西) 6리(里)였다.》라고 하였다.
(3) 섬서성(陝西省) 장안(長安)에 대하여,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는 주위(周圍) 65리라고 하였는데,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長安[編輯]편을 보면 : 《城市佈局[編輯] 漢長安城位於今西安市區西北郊外,面積約36平方公里》라고 하였다.
또 相關遺址[編輯]편을 보면 : 《“目前唐長安城相關的遺址主要為:大雁塔,大慈恩寺,小雁塔,大明宮,太極宮,乾陵,昭陵等十八座唐朝帝陵,碑林,法門寺,青龍寺,大秦寺塔,興教寺塔,灞橋遺址,華清宮遺址,仙遊寺法王塔,水陸庵,東渭橋遺址,鳩摩羅什舍利塔,香積寺善導塔,八雲塔,長安聖壽寺塔,長安華嚴寺塔,昭慧塔,藥王山石刻,玉華宮遺址,隋泰陵,耀縣文廟,隋仁壽宮唐九成宮遺址,慈善寺石窟,楊珣碑,大佛寺石窟,昭仁寺大殿,精進寺塔,百良壽聖寺塔等”이 있다.》고 한 것처럼 「구자국성(龜慈國城)에도, 천(天)개소에 이르는 사찰(寺刹)과 탑(塔)이 있었다(有佛塔廟千所).」고 한다.
○ 讀史方輿紀要.西域 / 龜茲國城【原文繼續】 / 上元以後,河西軍鎮,多為吐蕃所陷.惟北庭安西為唐守,以沙陀回鶻為應援. : 상원(上元)이후에, 하서군진(河西軍鎭)은, 토번(吐蕃)에게 함락된 곳이 많았다. 유일하게 북정(北庭)과 안서(安西)만이 당(唐)이 지키고 있었는데, 이는 사타(沙陀)회골(回鶻)이 응원(應援) 했기 때문이다. 吐蕃急攻二部,二部益衰.貞元三年.安西陷於吐蕃.自是不復入於中國. : 토번(吐蕃)이 2부를 갑자기 공격하여, 2부가 점점 쇠약해졌는데, 정원(貞元)3년에, 안서(安西)가 토번(吐蕃)에 함락되었고, 그 뒤로 중국(中國)에 다시 들어오지 못하였다. 唐志:龜茲東接焉耆,西連疏勒,南鄰吐蕃,北拒突厥,為四鎮之一. : 당지(唐志)에 따르면 : 구자(龜茲) 동쪽으로 언기(焉耆)와 접(接)하고, 서(西)쪽으로는 소륵(疏勒)과 연이어져 있으며, 남(南)쪽은 토번(吐蕃)과 인접(隣接)해 있고, 북(北)쪽은 돌궐(突厥)에 막혔다. 東北到北庭府二千里,西南到于闐亦二千里.李泌謂安西,北庭,控制西域五十七國及十姓突厥. : 동북(東北)으로 북정부(北庭府)에 2천리에 이르고, 서남(西南)으로는 우전(于闐) 또한 2천리에 이른다. 이필(李泌)이 안서(安西)와 북정(北庭)에서 서역(西域)의 57개 나라와 십성(十姓)돌궐(突厥)을 제압하였다. 五代史:安西都護衛西域羈縻三十六國.是也. : 오대사(五代史)에서 이르기를 : 안서도호위(安西都護衛)는 서역(西域)의 36개 나라를 기미(羈縻)하였다【종속(從屬)시켰다】고 하였다.》-讀史方輿紀要. 龜慈國. 引用 / 끝-
○ 과연(果然) 무엇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判斷)할 수 있을까? 중요(重要)한 것은 동방(東方)과 서방(西方)이란 뜻이다.
‘동방(東方)’이 극동(極東)의 조그마한 “반도(半島)”땅일 수 있을까? 「반도(半島) 땅이 동방(東方)이라면 서해(西海)바다 건너의 대륙(大陸) 중원(中原) 땅은, 서융(西戎) 또는 서이(西夷)들이 살았던 서방(西方) 땅인가?〉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의 논리(論理)와 주장(主張)은, 오늘도 우리 사회(社會)에 메아리친다.
◇ ◇ ◇ ◇
○ 언론(言論)과 정치(政治)판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팔과 다리와 같다. 헐뜯고 비방(誹謗)하며, 야합(野合)하고, 이별(離別)하고를 반복(反復)하며, 오늘도 이합집산(離合集散)으로 하루해를 다 보낼 것이다.
관행(慣行)이란 깨라고 존재(存在)하는 것이고, 권력(權力)은 흥(興)하고, 망(亡)하기를 지 뜻대로 하는 것이며, 집단(集團)의 수장(首長)이 패거리를 만들어 수족(手足)이니, 좌우(左右) 뭔 뭐이니, 하는 것은 지편을 만든다는 뜻이다. 가족(家族)간이나, 개인그룹이나 회사(會社)에서도 지편 만들고 편 가르기 하는 것은 곧 망(亡)할 징조(徵兆)다.
그걸 깨닫치 못하는 수장(首長)은, 수장(首長)으로써의 자격미달(資格未達)인 셈이다.
대한민국(大韓民國) 육군(陸軍)에서 ‘하나회’는 어떻게 되었으며, 끼리끼리 문화의 폐해(弊害)는 무엇이었으며, 대권을 꿈꾸는 것이 아닌가? 싸움을 붙이고, 꼬드기는 말은 언론(言論)에서 부추기는 말이다. “이런 것들이 난무(亂舞)했다는 것은, 곧 급격(急激)한 변화(變化)가 있을 징조(徵兆)다.”라는 것쯤은 범인(凡人)들도 예측(豫測)할 수 있다.
국론분열(國論分裂)은, 어떤 연유(緣由)를 대거나 설명(說明)하더라도 용납(容納)될 수 없는 그만큼 중요(重要)한 것이다. 국론분열(國論分裂)은, 곧 국가(國家)의 분열(分裂)과도 직결(直決)되는 사안(事案)이며, 국가(國家)나 사회(社會)의 발전(發展)동력(動力)을 현저(顯著)하게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2020년 01월 10일 [글쓴이 : 문무(文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