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濟의 自然環境과 特徵들[기병(騎兵)·늪(澤)·신병(神兵)] [제2편]
반도(半島)백제(百濟)의 허구(虛構)를 말한다.
○ 20세기(世紀) 이전(以前)의 대규모(大規模) 병력(兵力)을 동원(動員)한 전쟁사(戰爭史)를 찾아보면 : 전국시대(戰國時代) 칠웅(七雄)간의 패권(覇權) 다툼과 시황제(始皇帝) 진(秦)의 전쟁(戰爭), 그리고 후대(後代) 수(隋) 양제(煬帝)의 고구려(高駒驪)침공군(侵攻軍)이 아니었을까?
몇 만(萬)은 일상(日常)이고, 십만(十萬), 이십(二十)만, 오십(五十)만 병력(兵力)으로 쳤다 또는 〈공격군(攻擊軍) : 일백이십(一百二十)만 + 지원군(支援軍) 일백만(一百萬)을 합치면 2백만(百萬)이 넘는 군사(軍士)가 동원(動員)됐다.〉는 수양제(隋煬帝)의 고구려(高駒驪) 침공군(侵攻軍)!
그러나 이 모두의 전쟁사(戰爭史)를 추적(追跡)해 보아도, 「기마(騎馬) 수십만(數十萬)을 출정(出征)시켰다는 기록(記錄)은 “북위(北魏)=북로(北虜)=위로(魏虜)”밖에 없다.」
수십만(數十萬)【한자사전 : 십만(十萬)의 두 서너 곱절】이란 말은 「최소(最小) 20만∼30만」을 뜻한다. 이건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엄청난 대병단(大兵團)이다. 기마(騎馬) 일(一), 이만(二萬)이 출정(出征)해도 변경지방(邊境地方)은. 쑥대밭이 된다고 했잖은가!
이렇게 ‘기마(騎馬)수십만(數十萬)’필(匹)의 침공(侵攻)을 받은 백제(百濟) 역시(亦是), 그에 걸 맞는 군사력(軍事力)을 보유(保有)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수십만(數十萬) 기마(騎馬)를 출정(出征)”시킬 때는 “상대국(相對國)의 군력(軍力)에 대하여, 면밀(綿密)한 검토과정(檢討過程)을 거치는 것은, 기본(基本) 상식(常識)”이기 때문이다.
(9) 남제서(南齊書)와 송서(宋書) / 백제(百濟)
➊ 백제(百濟) 나라 땅에는 22개의 담로(檐魯)가 있어, 모두에 자제(子弟)나 종족(種族)들을 보내 분거(分據)토록 하였다. 22 ‘담로(檐魯)=담로(擔魯)’란 제후국(諸侯國)을 말하는 것이다.
➋ 또 <남제서(南齊書)나 송서(宋書)>에 기록(記錄)된 백제(百濟)의 제후(諸侯)들을 보면 :
〈面中王…都漢王…阿錯王…邁盧王…邁羅王…右賢王…左賢王〉
〈八中侯…弗中侯…面中侯…弗斯侯〉
〈廣陽太守…朝鮮太守…帶方太守…廣陵太守…清河太守…樂浪太守…城陽太守…西河太守〉 등으로 기록(記錄)되어 있다.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말하는 백제(百濟)란 중국(中國)에서 5천리(千里)나 떨어져 있는 해외(海外)의 조그만 제후국(諸侯國)으로써, 그들로부터 책봉(冊封)이나 받고, 조공(朝貢)하는 이런 나라로 묘사(描寫)시켜 놓았는데,
위에 열거(列擧)된 제후왕(諸侯王)과 후작(侯爵)과 태수(太守)등을 보면 : 백제(百濟)란 나라가 조그만 제후국(諸侯國)이 아닌 대제국(大帝國)이었음을 증거(證據) 또는 고증(考證)해 주고 있다.
더구나 좌현왕(左賢王)은 무엇이고, 우현왕(右賢王)은 또 무엇일까? 반도(半島) 땅 서남(西南) 모퉁이에서 가당키나 한 이야기냐? 반도(半島) 서남(西南) 모퉁이 땅의 백제(百濟)가 ‘하늘(천(天)의 아들(子)이었다’는 ‘황제(皇帝)의 나라(國)’라도 되었다는 것이냐?
좌현왕(左賢王)이니 우현왕(右賢王)이니 하는 말은,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다. 그렇다. 돌궐(突厥)이니 흉노(匈奴)니 하는 ‘서융(西戎)과 북적(北狄)’ 나라(國)에서 등장(登場)하는 왕(王)의 이름이다.
그렇다면 백제(百濟)가 서융(西戎)이었는가, 아니면 북적(北狄)이었는가? 당연(當然)한 합리적(合理的)인 의심(疑心)일 수 있다. 이건 바로 백제(百濟)의 요서경략(遼西經略)과 관계(關係)된다고 보아진다.
➌ 남제서(南齊書) :《是歲,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入其界,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率眾襲擊虜軍,大破之. : 이해에, 위로(魏虜:北魏)가 다시(또) 수십만(數十萬)기마(騎馬)를 보내어 백제(百濟)를 공격(公格)하여, 백제(百濟)의 지경(地境)으로 들어갔는데, 모대(牟大)가 보낸 사법명(沙法名), 찬수류(贊首流), 해례곤(解禮昆), 목간나(木干那)등이 무리들을 이끌고 위로(魏虜) 군대(軍隊)를 습격(襲擊)하여, 크게 깨뜨렸다.》고 하였다.
이 기록(記錄)은, 자치통감(資治通鑑) 제기(齊紀)에도 기록(記錄)되어 있다. 곧 【資治通鑑 136 齊紀 二. 世祖武皇帝 :《永明六年,魏遣兵擊百濟,為百濟所敗. : 영명(永明) 6년, 위(魏)에서 보낸 군사가 백제를 쳤으나, 백제에게 패하였다.》】고 하였다.
● <제(齊) 세조(世祖) 영명(永明), 6년(六年)은, “서력(西曆) 489년”>이다.
이때 「북위(北魏)가 백제(百濟)를 치기 위해, “기병(騎兵) 수십만(數十萬)”을 출병(出兵)시켜, 백제(百濟) 땅 안으로 들어갔다가, 이를 눈치 챈 백제(百濟) 왕(王) “모대(牟大)”의 명(命)을 받은 ‘사법명(沙法名)·찬수류(贊首流)·해례곤(解禮昆)·목간나(木干那)’등이 거느린 군대(軍隊)가 기습(奇襲), 공격(攻擊)하여 북위(北魏) 수십만(數十萬) 기병병단(騎兵兵團)을 궤멸(潰滅)시켰다.」는 이야기다.
근데, 이해(理解)하기 어려운 것은, “又”자(字)다.
네이버한자사전 : 【「又」/ 1. 또 2. 다시 3. 또한, 동시에 4. 더욱 5. 오른손, 오른쪽 6. 거듭하다, 두 번 하다 7. 용서하다(容恕--) / 자원(字源) : 상형문자 : 又자는 ‘또’나 ‘다시’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又자는 사람의 오른손을 그린 것으로 이전에는 ‘손’이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중국에서는 오른쪽이 옳고 바름을 상징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이가 어릴 때부터 오른손잡이가 되도록 가르쳤다. 그래서 又자는 ‘손’을 뜻하다가 후에 ‘또’나 ‘자주’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자주 쓰는 손이라는 뜻인 것이다. 특히 금문에서부터는 손과 관련된 여러 글자가 파생되면서 又자는 손이 아닌 ‘자주 사용한다.’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하지만 又자가 다른 글자와 결합할 때는 여전히 ‘손’과 관련된 뜻을 전달한다.】
● 그렇다면 서력(西曆) 489년 이전(以前), ‘북위(北魏)=위로(魏虜)’가 백제(百濟)를 침공(侵攻)했었고, 〈제(齊) 세조(世祖) 영명(永明), 6년(六年)【서력(西曆) 489년】〉에, 또 다시 2차로 침공(侵攻)했다는 뜻이다.
➨ 당(唐) 소정방(蘇定方)은, 겨우 보기(步騎) 혼성부대 13만(萬)으로 백제(百濟)를 쳤다고 하였다. 의자왕(義慈王)때에 이르러 백제(百濟)의 국력이 쇠(衰)하였거나, 또는 내부(內部)의 반란(叛亂)등으로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당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기마(騎馬) 수십만(數十萬)’은, 그 편제(編制)로 볼 때, 세계(世界) 역사상(歷史上) 유례(類例)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기병병단(騎兵兵團)이다. 백제(百濟) 역시(亦是) 이와 대등(對等)할 정도의 무력(武力)을 소유(所有)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 말이 틀렸는가?
여러 차례에 해설(解說)한 것이라서 식상(食傷)한 이야기지만, 이 짤막한 기록(記錄)들은, 백제(百濟)의 강역(疆域)이 어느 곳에 있었는가를 말해준다. 곧 〈백제(百濟)는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 반도(半島)와는 전혀 관계(關係)없다는 뜻이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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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資治通鑑 136 齊紀二. 世祖武皇帝 :《永明六年,魏遣兵擊百濟,為百濟所敗. : 영명 6년, 위(魏)에서 보낸 군사가 백제를 쳤으나, 백제에게 패하였다. 陳壽曰:三韓凡七十八國,伯濟其一也.據李延壽史,中略.晉世句麗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 진수(陳壽)가 이르기를 : 삼한은 무릇 78개 나라이다. 백제(伯濟)는 그 중의 하나이다. 이연수(李延壽)의 기록에 의하면, 중략. 진(晉)나라 때에 구려(句麗)가 요동(遼東)을 다스릴 때, 백제(百濟) 또한 요서(遼西)·진평(晉平)2군의 땅에 웅거하였다.》
(11) 남사(南史) : 백제(百濟) : 《其 人 形 長, 衣 服 潔 淨. : 그 나라 사람들의 형체는 길고(크고), 의복은 깨끗하고 말끔하다. 後漸強大,兼諸小國.其國本與句麗俱在遼東之東千餘里,晉世句麗既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中略. : 뒤에 점점 크고 강해져, 여러 작은 나라를 병합하였다. 그 나라는 본래 구려(句麗)와 함께 요동(遼東)의 동쪽 천여(千餘)리에 있었는데, 진(晉)나라 때에 구려(句麗)가 요동을 경략할 때에, 백제(百濟) 역시 요서, 진평 2군의 땅에 웅거하였다. 백제군(百濟郡)을 두었다.》
(12) 梁職貢圖 : 《晉末駒麗畧有遼東 樂浪亦有遼西晉平縣. : 진(晉) 말기에 구려(駒麗)가 요동(遼東)을 공략(攻略)해 점령(占領)했다. 낙랑(樂浪) 역시 요서(遼西) 진평현(晉平縣)에 있었다.》
「백제(百濟)가 소국(小國)들을 병합(倂合)하여 강(强)하고 커졌다(大)」고 하였다. 양직공도(梁職貢圖)에서는, 그 소국(小國)들을 : <반파(叛波), 탁(卓), 다라(多羅), 전라(前羅), 사라(斯羅), 지미(止迷), 마련(麻連), 상기문(上己汶), 하침라(下枕羅)>등의 9개 나라를 기록(記錄)해 놓고 있다. 여기서 <사라(斯羅)는 곧 신라(新羅)>의 ‘나라이름’이기도 하다. 우리 사학(史學)계는 이 소국(小國)들을 가라(伽羅)의 일부라고도 하며, 적당히 얼버무린다. 알 수 없으니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백제(百濟)의 속국(屬國) 사라(斯羅)> : 신라(新羅)는 백제(百濟)에 예속(隷屬)되었던 나라다. 신라(新羅)가 처음 고구려(高句驪)에 의존(依存), 사신(使臣)을 보냈고, 나중에는 <백제(百濟)에 의존(依存)하여 사신(使臣)을 보냈다는 것, 말도 통하지 않아 백제(百濟)를 통해서야 통(通)했다는 기록(記錄)을 생각해보면, 대국(大國)이었던 백제(百濟)를 따라온 신라(新羅)는, 소국(小國)이었고, 백제(百濟)에 의지(依支)하여 나라를 지탱한 것이다.
양서(梁書) 신라(新羅)편을 보면 : 《문자(文字)자 없어, 나무에 새겨 믿고, 말도 백제와 통하고 난 뒤에야 통했다. : 無 文 字, 刻 木 為 信. 語 言 待 百 濟 而 後 通 焉.》고 하였다. 이러한 당시(當時)의 사정(事情)이나 실정(實情)을 1천하고도 5∼6백년이 지난 지금, 누가, 무엇으로 부정(否定)할 수 있는가? 말장난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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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흑치준묘지명(黑齒俊墓誌銘) :《公諱俊卽唐左領軍衛大將軍燕國公之子焉. : 공(公)의 이름은 준(俊)이니, 즉 당나라 좌령군위대장군(左領軍衛大將軍) 연국공(燕國公)의 아들이다. 分邦海濱見美玄虛之賦,稱酋澤國取重太沖之詞熾種落於遐荒積衣冠於中國. : 바닷가의 땅을 나누어 나라를 이루매 목화(木華)가 지은 해부(海賦)에서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있고, 늪지가 많은 나라에서 우두머리를 칭하매, 좌사(左思)가 지은 삼도부(三都賦)에서 그 소중함을 얻을 수 있도다. 먼 오랑캐의 땅에서 부락을 크게 일으켰고, 중국에 들어와서 누차 벼슬을 하였구나.》
➊ 각종(各種) 사서(史書)에서 언급(言及)하고 있는 것이 백제(百濟)의 많은 땅(영토:領土)은, 「그 땅이 낮고, 습(濕)하다[地多下濕]」고 하였다. 그래서 「백제(百濟)의 많은 백성(百姓)들은 산(山)에 집을 짓고 산다[率皆山居]」고 하였다.
이런 백제(百濟) 땅의 지세(地勢) 이야기의 ‘백미(白眉)’는 바로 위에서 말하고 있는 “택국(澤國)”이란 구절(句節)이다. 「택국(澤國) 즉(卽) 늪지 나라」란 뜻이다.
● [出處 : 네이버한자사전] / 〈澤〉 : 못(넓고 오목하게 팬 땅에 물이 괴어있는 곳) / 늪(땅바닥이 우묵하게 뭉떵 빠지고 늘 물이 괴어 있는 곳) / 습하다(濕--) / 축축하다.
澤 : 형성문자 : 沢(택)의 본자(本字). 뜻을 나타내는 삼수변(氵(=水, 氺)☞물)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睪(역ㆍ택)으로 이루어짐. 물이 축축하게 젖어 빛나는 것, 慈悲(자비)를 베푸는 것, 지금은 水草(수초)가 돋아나 있는 못의 뜻으로도 쓰임.
澤자는 ‘못’이나 ‘택지’, ‘늪’을 뜻하는 글자이다. 澤자는 水(물 수)자와 睪(엿볼 역)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못’이나 ‘늪’은 오목한 땅에 물이 괴어 있는 곳을 말한다. 항시 물에 젖어있는 곳이기 때문에 澤자는 ‘축축하다’나 ‘습하다’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또 습지에서는 농사가 잘되기 때문에 ‘은혜’나 ‘은덕’이라는 뜻으로도 쓰이고 있다. <인용/끝>
➋ 〈반도(半島)의 서남(西南) 모퉁이 땅인 한강이남(漢江以南)의 경기(京畿)일부(一部)…충청도(忠淸道)…전라도(全羅道) 땅에 택지(澤地)가 많다느니, 늪지가 많다느니, 습지(濕地)가 많다느니, 땅이 낮아 습(濕)하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한다면, 「대한민국(大韓民國) 국민(國民)들 백(百)이면 백(百) 모두가 “이 사람, 이거 맛이 갔네. 에그, 불쌍해라. 완전히 맛이 갔어!”라고 혀를 찰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 완전히 맛이 간 이야기다.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은, 완전히 맛이 간 자(者)들이요, 그들이 주장(主張)하는 조선사(朝鮮史)=한국사(韓國史)는, 완전히 맛이 간 조작(造作)된 이야기다.〉
➌ 《본시(本是) 백제(百濟) 땅, “강(江)의 남북(南北)” 땅은, “늪지와 택지(澤地)와 호수(湖水)등이 즐비하게 널려있고, 기후(氣候)가 온난(溫暖)하니 습기(濕氣)가 많아, 시원한 산(山)에 집을 짓고 사는 백성(百姓)들이 많았다.”는 것인데, 이런 자연환경(自然環境)은, 백제왕조(百濟王朝)가 당(唐)의 공격(攻擊)으로 무너졌다는 서력(西曆) 668년 이후(以後), 21세기(世紀) 오늘날까지도 크게 변함이 없다는 사실(事實)이다. 이게 중요(重要)한 핵심(核心) 요소(要所)다.
※ 강(江)을 기준(基準), 남북(南北)의 땅에는 온통 호수(湖水)와 그 지류(支流)들로 늪지대를 형성(形成)하고 있다. 기원전(紀元前)이나 서력(西曆) 400-500년경이었다면, 강(江)과 지류(支流)들과 호수(湖水)는, 서로 엉키고 엉켜 “대규모(大規模) 늪지대”를 만들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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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태평어람(太平御覽) 삼한(三韓)
《弁韓:後漢書曰:弁韓與辰韓雜居,城郭衣服皆同,言語風俗有有異. : 변한(弁韓) : 후한서(後漢書)에서 말하기를 : 변한(弁韓)은 진한(辰韓)과 뒤섞여 사는데, 성곽(城郭)이나 의복(衣服) 모두 같다. 언어(言語)와 풍속(風俗)은 다름이 있다. 其人形皆長大,美髮,衣服潔清,而刑法嚴峻.其國近倭,故頗有文身者. : 그 사람들의 형상(形相)은 모두 크고 길며, 아름다운 머리털을 가졌으며, 의복(衣服)은 청결(淸潔)하며, 형법은 엄하고 엄하다. 그 나라는 왜(倭)와 가까운데, 두루 문신(文身)을 한 자들이다.》라고 하였다.
➊ ‘삼한(三韓)은 곧 뒤(後)의 삼국(三國)이다.’라고 하는데, 즉(卽) ‘마한(馬韓)은 고구려(高駒驪)요, 진한(辰韓)은 신라(新羅)요, 변한(弁韓)은 백제(百濟)’라고 말이다. 이건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도 통용(通用)되는 해설(解說)이다.
‘변한(弁韓)과 진한(辰韓)’은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언어(言語)와 풍속(風俗)에서만은 다름이 있었다는 것인데, 이는 ‘진한(秦韓)’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변한(弁韓)과 진한(辰韓)이 함께 살면서도 언어(言語)와 풍속(風俗)이 조금 달랐다는 이야기는 진한(辰韓)은 곧 진한(秦韓)이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다.
곧 ‘진한(秦韓)=진한(辰韓)’은 서(西)쪽에 온 사람들로 이루어진 나라(國)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본시(本是) 난(亂)을 피해 유랑(流浪) 또는 이주(移住)한 무리들로, 마한(馬韓) 왕(王)이 땅을 떼어주지 않았다면 ‘진한(秦韓)은 태어날 수 없었다.’는 얘기다.
따라서 처음엔 변한(弁韓)과 진한(辰韓)이 함께 뒤섞여 살았고, 마한(馬韓)에서 보낸 거수(渠帥:우두머리)가 이들을 다스렸으나, 점차(漸次) 24개 나라로 나누어졌으나, 백제(百濟)가 이들을 점진적(漸進的)으로 병합(倂合)하고는 진한(辰韓)까지도 통치(統治)했다는 것이 삼한(三韓) 초기(初期)의 역사(歷史)이야기다.
그래서 ‘진한(辰韓) 곧 신라(新羅)’는 「초기(初期) 제대로 된 글자(文字)도 없어, 고구려(高駒驪)나 백제(百濟)의 통역(通譯)과 지원(支援)없이 외교(外交)조차 할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➋ 〈其 人 形 皆 長 大, 美 髮, 衣 服 潔 清 : 그 사람들의 형상(形相)은 모두 크고 길며, 아름다운 머리털을 가졌다. 의복(衣服)은 청결(淸潔)하다.〉고 하였다.
이건 ‘변한(弁韓)의 백성(百姓)’들을 말하는 것이다. 「변한(弁韓) 백성(百姓)들의 생긴 모습【형(形) : 모양, 꼴, 형상(形狀), 얼굴, 몸, 육체(肉體), 모습. 모양 형상(形象)=형상(形狀)】이 신장(身長)과 체형이 크고, 특히 아름다운 머리털을 갖고 있었으며, 의복(衣服)은 청결(淸潔)하게 입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記錄)을 할 수 있는 것은, 「주변(周邊)의 다른 나라(國) 또는 부족(部族), 종족(種族)과 비교(比較)했을 때 그랬다.」는 것일 게다. 인접(隣接)하고 있었던 진한(辰韓), 왜(倭)등의 여러 나라등과 비교(比較)했을 때, 변한(弁韓)인들은, 키도 크고, 체격(體格)도 크고, 아름다운 머리털과 의복(衣服) 또한 깨끗하게 입었다는 이야기다.
반도(半島) 땅의 경기(京畿)일부(一部)…충청도(忠淸道)…전라도(全羅道) 땅에 살고 있었던 옛 백성들의 형상(形象)에 대해, “신장(身長)과 체형이 크고, 특히 아름다운 머리털을 갖고 있었으며, 의복(衣服)은 청결(淸潔)하게 입었다.”고 하는, 그것을 고증(考證)할 수 있는, 기록(記錄), 징후(徵候)나 증거(證據), 유물유적(遺物遺跡)등이 상존(尙存)하고 있느냐?
반도(半島)의 백성(百姓)들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름이 없다는 사실(事實)은 너무도 명백(明白)하여 비교(比較)할 대상(對象)조차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너무도 똑같기 때문이다.
● ‘반도(半島)백제(百濟)’니, ‘반도(半島)삼한(三韓)’이니 하는 역사해설(歷史解說)은, 속된 말로 “맛이 많이 간 왜곡(歪曲), 조작(造作)으로 만들어진 옛 이야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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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資治通鑑卷200 唐紀十六 / 高宗皇帝下 / 顯慶五年(660)
《百濟恃高麗之援,數侵新羅;新羅王春秋上表求救. : 백제(百濟)가 고려(高句麗)를 믿고 지원으로, 수차례에 걸쳐 신라(新羅)를 침략하자, 신라왕(新羅王) 김춘추는 글을 올려 나라를 구원해달라고 청하였다. 辛亥,以左武衛大將軍蘇定方為神丘道行軍大總管,新書作神兵道.帥左驍衛將軍劉伯英等帥.水陸十萬以伐百濟. : 신해(辛亥)에, 좌무위대장군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神丘道)행군대총관【신서(新書)에는 신병도총관(神兵道總管)】으로, 좌효위장군 유백영등을 장수로 수군(水軍)과 육군(陸軍) 십만(十萬)이 백제(百濟)를 쳤다. 以春秋為嵎夷道行軍總管,將新羅之衆,與之合勢. : 신라왕 김춘추(金春秋)를 “우이도(嵎夷道)행군총관”으로 하여, 신라의 장수들과 함께 합세하도록 하였다.》
【考異曰:舊書定方傳,新羅傳皆云定方為熊津道大總管.實錄定方傳亦同.: 고이(考異)에서 이르기를 : 신구당서(新舊唐書) 소정방전(蘇定方傳), 신라전(新羅傳)에서 모두 말하기를, 소정방(蘇定方)은 “웅진도(熊津道) 대총관(大總管)”이다. 실록(實錄)의 소정방(蘇定方)전 역시 같다. 今從此年實錄,新唐書本紀.又舊本紀,唐曆皆云,四年十二月癸亥,以定方為神丘道大總管,劉伯英為嵎夷道行軍總管. : 이(此) 해(年)의 실록(實錄)에 따르면, 신구당서(新舊唐書) 본기(本紀), 또 구본기(舊本紀), 당력(唐曆) 모두에 따르면, 4년 12월, 계해(癸亥)에, 소정방(蘇定方)이 신구도대총관(神丘道大總管), 유백영(柳伯英)이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이 되었다. 按定方時討都曼,未為神丘道總管,舊書,唐曆皆誤.今從實錄. : 안(按) 소정방(蘇定方)은, 이때 도만(都曼)을 토벌할 때이기 때문에, 신구도총관(神丘道總管)직을 아직 맡을 수 없다. 구서(舊書), 당력(唐曆) 모두 잘못이므로, 이제 실록(實錄)에 따른다.】고 하였다.
➊ 〈신병도총관(神兵道總管)이냐? 웅진도대총관(熊津道大總管)이냐? 신구도대총관(神丘道大摠管)이냐?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總管)이냐?〉하는 것은, 사서(史書)를 편찬(編纂)할 때에, 저본(底本) 또는 참고본(參考本)등 수많은 기록(記錄)을 보고 참고(參考)하여 만든다는 전제(前提) 자체(自體)가 흔들린다.
이 말은, 「조선사(朝鮮史)를 왜곡(歪曲) 또는 조작(造作)하기 위해 만들다보니, 후대(後代)인들에 의해 삭제(削除)되고 추가(追加)되고 가필(加筆)된 것이다.」라는 뜻이다.
신병도총관(神兵道總管)【新書 : 新唐書)】
웅진도대총관(熊津道大總管)【舊書 : 列傳 : 新羅傳】
신구도대총관(神丘道大總管)【新書本紀.又舊本紀,唐曆皆云,四年十二月癸亥,以定方為神丘道大總管】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總管)【資治通鑑】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사실(史實)은 무엇일까? 백제(百濟)를 토벌(討伐)하고자 당(唐) 고종(高宗)은, 13만 출정군(出征軍)에게 어명(御命)을 내렸는데, 그 출정군(出征軍) 총사령관(總司令官)의 직책(職責)조차 오락가락했다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하는 거다.
●〈서력(西曆) 659년【당(唐) 현경(顯慶) 4년(年) 12월(月)】에 “소정방(蘇定方)”은 서역(西域)【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지방에서 도만(都曼)을 토벌(討伐)하기 위해, 현재(現在)의 신강성(新疆省) 서(西)쪽의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에 있었으므로, 당시(當時)에 아직 출정군(出征軍) 총사령관(總司令官)직을 수행(遂行) 할 수 없었다.[未 為 神 丘 道 總 管] 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을 편찬(編纂)한 ‘북송(北宋)의 사마광[司馬光:1019~1086]’은, 너무 헷갈리니, 실록(實錄)에 따라서 기록(記錄)하겠다고 한 것이다. 【舊書(구서). 당력(唐曆) 모두 착오(錯誤)이므로 이제 실록(實錄)에 따른다. : 按定方時討都曼,未為神丘道總管,舊書,唐曆皆誤.(今從實錄)고 한 것이다.】
● 위에서 말하는 핵심(核心)은, 〈서력(西曆) 659년 당(唐) 현경(顯慶) 4년 12월에도 소정방(蘇定方)은 보기(步騎) 수만(數萬)을 거느리고, 당(唐) 경사(京師)로부터 1 만리(萬里) 이상(以上) 떨어진 오늘날의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사막지대(沙漠地帶)에서, 반란군(叛亂軍)들을 토벌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토벌군(百濟討伐軍) 사령관(司令官)직을 수행(遂行)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또 하나는 당시(當時) 당(唐)의 ‘백제(百濟) 침공로(侵攻路)’가 어디냐? 하는 것이다. “웅진도(熊津道)냐? 신병도(神兵道)냐? 신구도(神丘道)냐?” 하는 문제(問題)다.
➋ 또 하나는 우이도(嵎夷道) 행군총관(行軍摠管)은 도대체 뭐하는 거냐?
위의 원전(原典)에서는, 신라왕(新羅王) 김춘추(金春秋)에게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직을 수행하도록 했는데, 당(唐) 장수(長帥) 유백영(柳伯英)도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직으로 황명(皇命)을 받았다고 하였다.
두 명의 지휘관(指揮官)에게 똑같은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이라는 직책(職責)을 내린 고종(高宗)은, 제정신을 가진 자(者)는 아니었을 것 같다. 더더구나 여기서 말하는 “우이도(嵎夷道)”에서 “우이(嵎夷)”란 말은 동이(東夷)족 중의 하나인 우이(嵎夷)들이 살고 있는 땅의 이름과 같다.
〈以 春 秋 為 嵎 夷 道 行 軍 總 管 : 김춘추(金春秋)는 우이도(嵎夷道) 행군총관으로 하였다. 劉 伯 英 為 嵎 夷 道 行 軍 總 管 : 유백영(柳伯英)을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하였다.〉하는 기록(記錄)속의 “우이(嵎夷)”는 곧 “양곡(陽谷)”을 말하는 것으로, “욱이(郁夷)”와 같은데, 후한서(後漢書)에 의하면, “우부풍군(右扶風郡)”의 속현(屬縣)이다. 이곳은 대륙(大陸) 장안(長安)의 서(西)쪽에 있다.〉
➡ 이게 정말 웃기는 이야기가 아니더냐! 조작(造作)하다 보니 너무 오버(Over)해버린 것이다.
반도(半島) 땅의 서남(西南) 모퉁이 땅에 있었다는 백제(百濟)를 토벌하는데, 대륙(大陸)의 장안(長安)을 거쳐 그 서(西)쪽으로 진군(進軍)한다면… …그들이야말로 ‘신(神)의 군대(軍隊)’라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신(神)의 군대(軍隊)’는, 「장안(長安)으로부터 1 만리(萬里)도 넘게 떨어져 있던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아무다리아강 주변의 사막지대(沙漠地帶)’에서 “도만(都曼)”과 그 반란군(叛亂軍)들을 토벌(討伐)하기 위해, 죽기 살기로 싸우던 소정방(蘇定方)과 그의 부대(部隊) ‘보병(步兵)과 기병(騎兵)’들이, 어느 날 갑자기 “신(神)의 군대(軍隊)”가 되어 1 만리(萬里)를 훌쩍 뛰고, 또 5천리(千里)를 훌쩍 뛰어, 사막지대(沙漠地帶)를 누비던 장병(將兵)들이 전함(戰艦)에 몸을 싣고, 반도(半島) 서남(西南) 땅에 왔다는 것, 그게 바로 “신병(神兵)”들의 이야기가 아닐까?
또 하나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도, “우이(嵎夷)는 오늘날의 대륙(大陸)의 하남성(河南省)·산동성(山東省)·안휘성(安徽省)·강소성(江蘇省)등지의 바닷가에 살던 이(夷)”라고 말하고 있는 것에 따르면,
이들의 주장(主張)에 따른다고 하더라도, 「당시(當時)의 신라왕(新羅王) 김춘추(金春秋)나, 당장(唐將) 유백영(柳伯英)은,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하남성(河南省)·산동성(山東省)·안휘성(安徽省)·강소성(江蘇省)”등지의 백제(百濟) 땅으로 출병(出兵)한 것이 된다. 무엇이 옳은 것인가?
● 「반도(半島) 백제(百濟)란 역사해설(歷史解說)은, 어처구니없는 짓이다.」
※ ➊ 장안(長安)에서 서(西)쪽 1만1천리가 넘는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아무다리아강 주변에서 “도만(都曼)”의 반란군(叛亂軍)을 토벌(討伐)하던 소정방(蘇定方)과 ‘보병+기병(騎兵)’ 부대(部隊)가 “도만(都曼)을 사로잡아 장안(長安)을 거쳐 낙양(洛陽)에 귀환(歸還)하여, 도만(都曼)을 고종(高宗)에게 바치고,
➋ 소정방(蘇定方)은 백제(百濟)를 토벌(討伐)하는 총사령관(總司令官)으로 반도(半島) 서남(西南) 땅에 상륙(上陸)한다. 이때 소정방(蘇定方)이 걸어온 길은, “1만 6천리(千里)”에 해당한다.
➌「반란군(叛亂軍)을 토벌(討伐), 포로(捕虜)들과 함께, 보기(步騎)로 편성(編成)된 부대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아무다리아강 주변으로부터 낙양(洛陽)까지 온다면 도대체 몇 개월(個月)이나 걸릴까?」당시의 1일 행군거리(行軍距離)를 40리를 생각하면… …350일(日) 이상(以上)이 걸리는 셈이다.
➍ 〈서력(西曆) 659년 당(唐) 현경(顯慶) 4년 12월에도, 소정방(蘇定方)은 보기(步騎) 수만(數萬)을 거느리고, 당(唐) 경사(京師)로부터 1만1천리 이상(以上) 떨어진 오늘날의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사막지대(沙漠地帶)에서, 반란군(叛亂軍)들을 토벌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토벌군(百濟討伐軍) 사령관(司令官)직을 수행(遂行)할 수 없었다.〉고 당시(當時)와 그 뒤의 사가(史家)들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핵심(核心) 요점(要點)이다. 즉(卽)〈 “신병(神兵)”은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다만 만들어지는 것이다.〉 조선(朝鮮)을 지우기 위해, 고의적(故意的)으로 조작(造作)해 만들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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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資治通鑑 200 唐紀17 高宗 龍朔 2年 :
《十二月,戊申,詔以方討高麗,百濟,河北之民,勞於征役,其封泰山,幸東都並停. : 12월, 무신(戊申), 정벌한 고려(高麗)와 백제(百濟)도, 하북(河北)의 백성(百姓)으로, 조세와 부역의 일을 하라고 하였다. 태산(泰山)에 봉하고, 동도(東都)에 행차하여 머물렀다.》고 하였다.
● 당(唐) 고종(高宗)이 조서(詔書)를 내린 것은, 「백제(百濟)를 토벌(討伐)하고, 고구려(高駒驪)의 일부(一部) 땅도 토벌(討伐)했으니, 백제(百濟) 백성(百姓)들과 일부(一部) 점령(占領)당한 고구려(高駒驪) 땅의 백성(百姓)들도 조세(租稅)와 부역(賦役)의 일도 똑같이 해야 된다」는 이야기다.
토벌당하고 점령당했으면 조세(租稅)와 부역(賦役)을 해야함은 당연(當然)한 것이었을 것이나, 그 백성(百姓)들이 어떻게 하북(河北)의 백성(百姓)들이었을까?
여기서 문제(問題)는, <高 麗, 百 濟, 河 北 之 民 : 고려(高麗)와 백제(百濟)는 하북(河北)의 백성들이다.> 라고 기록된 구절(句節)이다. 곧 〈고구려(高駒驪)와 백제(百濟)는 하북(河北)의 백성(百姓)들이다〉라는 뜻이다.
●「하북(河北)」이란, 『하(河)의 북쪽지방』을 뜻하는 말로,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총령(葱嶺)=곤륜산(崑崙山)’으로부터 신강성(新彊省)·청해성(靑海省)·감숙성(甘肅省)으로부터 대륙(大陸)을 관통(貫通)하는 ‘하(河)’를 말하는 것이고, 그 북(北)쪽을 “하북(河北)”이라고 하였으니, 그곳은 아세아(亞細亞) 땅의 절반(折半)쯤 큰 곳이다.」
그래서 ‘하백(河伯)’이란 말도, ‘하수(河水)의 수신(水神)=하신(河神)’이란 말도 생겼으리라!
백제(百濟)의 백성(百姓)들이 “하북(河北)의 백성(百姓)”들이라고 할 때, 그 땅이 반도(半島) 서남(西南) 모퉁이 땅이 될 수 있겠는가?
수백(數百), 수천(數千)번을 되 뇌이며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반도(半島) 땅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면 부여(夫餘)로부터 고구려(高駒驪), 백제(百濟)등은 반도(半島)와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옛 봉건왕조(封建王朝)였다는 이야기다.
○ 물론 많은 원전(原典)을 하나하나 세밀(細密)하게 고찰(考察)해 낼 수도 있으나, 엄청난 량(量)의 원전(原典)을 개인(個人)의 힘으로 먹고 살기에 바쁜 시간(時間)을 쪼개어 연구(硏究)한다는 것은 불가능(不可能)에 가깝다. 다만 중요(重要)한다고 판단(判斷)되는 부분(部分)만을 발췌(拔萃)할 뿐이다.
이렇게 부분적(部分的)으로 발췌(拔萃)하는 것에도, 조선왕조(朝鮮王朝) 각(各) 나라들의 지형지세(地形地勢)나 자연환경(自然環境)등의 요소(要素)는, 반도(半島) 땅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관계(關係)없는, 해당(該當)되지 않는 경우(境遇)가 허다(許多)하다는 것이다.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의 주장(主張)은, 이제 무덤(墓地)속으로 들어가야 할 때다. 반도(半島) 조선왕조(朝鮮王朝)란 존재(存在)할 수 없다는 거다.
미안(未安)하고, 죄송(罪悚)한 말이지만, “반도(半島)의 영광(榮光)은, 서력(西曆) 1,945년 8월 15일 이후(以後)다.”
2020년 01월 19일 [글쓴이 : 문무(文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