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수[遼水]의 근원[根源]과 요동, 요서[遼東,遼西]

작성자환국고려|작성시간12.12.22|조회수1,043 목록 댓글 3

                                           요수[遼水]의 근원[根源]은 어디 인가 ?

 

 

조선사[朝鮮史]에 있었서 요수[遼水]는, 조선사[朝鮮史] 일만년[一萬年]의 역사[歷史]에 빠짐없이 등장[登場]하며, 조선사[朝鮮史]의  한, 획[劃]을  긋는 아주 중요[重要]한,  하천[河]

이요, 강[水]의  명칭[名稱]이다.

요수[遼水]는, 수경주[水經注]의 기록[記錄]으로 부터, 그 유명한 고구려[高句麗]와  수당[隋唐]의 전투[戰鬪], 그리고 역대[歷代]왕조[王朝]의  역사서[歷史書]에,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역사[歷史]의 뿌리와 같은, 강[水]의 이름이다.

 

 

지금 조선사[朝鮮史]에 있어서 요수[遼水]는, 왜곡[歪曲]된 조선사[朝鮮史]복원[復原]의 중심[中心]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강[江]이요,  하[河]와  수[水]이다.

수[數]천년[千年]역사서[歷史書]에 항상  등장[登場]하는, 이렇게 유명[有名]한, 강[水]을

왜 이렇게 찾기가 어려운 것일까 ?

역사서[歷史書]에는, 요수[遼수]의 근원[根源]과  요수[遼水]가 흐르는 방향[方向]까지 기록[記錄]하고 설명[說明]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지금 한국의 사학계[史學界]는 재야를 막론하고, 요수[遼水]의 위치[位置]에 대하여  추정[推定]과  비정[比定]을  하는 설만 난무 할뿐, 정확[正確]하게, 그 위치[位置]를 확정[確定]하지 못하고 있다.

동북[東北] 삼성[三省]이라  든가, 북경[北京] 지역[地域]이,   요수[遼水]의  유역[流域]이라고  추정[推定]하는  설[說]이  난무[亂舞]하지만, 이는 역사서[歷史書]원전[原典]을 본 사람이라면 이는 도저히 이해 할수 없는 일이다.

 

 

소위 고지도[古地圖]라는 것은, 조선사[朝鮮史]에 있어서 참고만 될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식민 시대의 역사[歷史]왜곡 조작[歪曲造作]은,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常識]을 훨씬 뛰어넘어 일일이 다 열거 할수 조차 없다.

현실이 이러 한데도, 그러한 부류[部類]의 사서[史書]와, 지도[地圖]을 가지고 논[論]하는 것은 조선[朝鮮]의 역사[歷史]를 포기[抛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진정한  대한민국[大韓民國]사람으로서, 조국[祖國]과  민족[民族]을 사랑하고, 잃어버린 일만여년의 조선사[朝鮮史]를 복원[復原]하여, 바로 세우고자  뜻[志]을 세웠다면, 확실[確實]하게 규명[糾明]되지 않은 사항에 대해서, 그 어떤 누구와도 논쟁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모순[矛盾]되고 의아스러운 부분들은, 꾸준히 노력을 하며 굳게 길을 가면, 스스로 밝혀 지는 것, 그 무엇을 원망하고 그 무엇을 탓 하겠는가 ?

 

 

이제 역사서[歷史西]의 기록[記錄]을 보면서, 요수[遼水]에 대하여  논[論]해 보기로 한다.

 

 

연도기행[燕途記行]

원문과 번역, 한국 고전번역원

 

 

以三叉爲名者。蓋遼東太子河。瀋陽混河。豆乙非城遼河。俱自北漠流入遼左。三派合流于此。因以爲名。自此西流數百里。入于廣鹿島前洋云 三河源出未詳。[중략]

 

삼차’라고 이름을 지은 것은, 요동(遼東)의 태자하(太子河), 심양(瀋陽)의 혼하(混河)와 두을비성(豆乙非城)의 요하(遼河)가 모두 북막(北漠)으로부터 흘러서 요좌(遼左)로 들어가서, 세 줄기가 여기에서 합류(合流)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다. 이로부터 서쪽으로 수백 리를 흘러 광록도(廣鹿島) 앞바다로 들어간다고 하나, 세 물의 근원은 자세하지 않다. [중략]

 

 

북막[北漠], 북쪽 사막으로 부터 흘러 내린 3개의 물,  태자하[太子河], 혼하[混河], 요하[遼河] 가  요좌[遼左]로 흘러가서 합류[合流]하고, 다시 서쪽으로 흘러가서 광록도[廣鹿島]앞바다로들어가는데, 그 물의 근원[根源]이 자세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自牛庄抵廣寧二百餘里。大野泥濃。唐朝所謂遼澤。霖䨪則陸地行舟。以是行旅不通。萬曆間。寧遠伯李成樑聞于朝。大發民丁。自牛庄抵廣寧。築大墻堤。高廣俱數丈。堤北坎土處爲壕。壕行船。堤容軌。民甚便之。[중략]

 

 

우장(牛莊)으로부터 광녕(廣寧)에 이르기까지 200여 리 사이는 큰 들판이 모두 진흙수렁으로서 당조(唐朝)의 이른바 ‘요택(遼澤)에 장마가 지면 육지로 배가 다닐 지경이다.’는 것이다. 그런 때문에 행려(行旅)들이 다니지 못한다.
만력(萬曆) 연간에 영원백(寧遠伯) 이성량(李成樑)이 이 사정을 조정에 보고하고 민정(民丁)을 크게 동원하여 우장(牛莊)으로부터 광녕(廣寧)까지 큰 둑을 쌓았는데, 높이와 너비가 모두 두어 길이나 된다. 둑 북쪽에서 흙을 파온 곳은 호(壕)가 되었는데, 이 호(壕)로는 배가 다니고, 둑으로는 수레가 다닐 만하여 백성들이 몹시 편하게 여겼다. [중략]

 

 

요하[遼河]가   서[西]쪽으로 흐르는데, 우장[牛莊]과 광녕[廣寧]사이 200 리 길이, 요택[遼澤]이다.  그런데 장마가 지면 배가 다닐 정도로 진흙 수렁이다.

영원백[寧遠伯]이성량[李成樑]이 민정[民丁]을 동원하여, 우장[牛莊]으로부터 광녕[廣寧]까지 큰 둑을 쌓고, ......................

 

 

辛酉後。不復修治。間間崩頹。濠水滉漾。長堤之餘。存者甚狹。或有獨馬難行處。每當霖潦之時。曲曲阻水。處處泥濘。且有蚊蚋成陣。人不得往來。而至若如此深秋。則僅可以通遼左。所謂罪地也。信步河岸。周回顧望。野天一色。四際無山。浩浩蕩蕩。怳如乘船大海中。鶴野九千里之說。[중략]

 

 

신유년(1621, 광해군 13) 후로는 다시 수리를 하지 않아 간간이 무너졌고 해자[濠]의 물이 넘쳐 흘렀다. 남아 있는 둑도 몹시 좁아서 말 한 필도 다니기 어려운 곳이 있었다. 매양 장마철을 당하면 굽이마다 물이 막히고 곳곳에 수렁이며, 또 모기가 떼를 지어 사람이 왕래할 수가 없으나 이러한 깊은 가을에는 겨우 통행할 수가 있었다. 참으로 요좌(遼左)는 죄인이나 살 땅이다. 하안(河岸)을 거닐면서 둘레를 돌아보니, 들과 하늘이 서로 맞닿고 사방에 산이라고는 없었다. 넓고 넓어서 마치 큰 바다 가운데에서 배를 탄 것과 같았다. 학야(鶴野)는 9000리란 말이 과연 헛된 말이 아니었다.  [중략]

 

 

요택[遼澤]은, 요하[遼河]가 흐르면서 거대한 습지대[濕地帶]를 형성하고 있다.  200 리 거리에 둑을 쌓았다면 작은 면적[面積]이 아니다. 이때 벌써 둑이 무너지고, 해자[濠]의 물이 넘쳤다면 200리에 걸쳐 쌓은 제방이 붕괴 상태가 된 것이다.  

도대체  요택[遼澤]이란 지역[地域]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 것인가 ?

요택[遼澤]은 하안[河岸]이라고 했으니, 지금 통상 적으로 생각하는 바다는 아니다.

 

하안[河岸]을 거닐면서 둘레를 돌아보니, 들과 하늘이 서로 맞닿고 사방에 산이라고는 없으니......... 

 

요수[遼水]와  요택[遼澤]은, 바다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 확실하고,   육지[陸地]안에, 사막이 있는 광활한 벌판의  어느 지역[地域]일 것이다.

 

 

夜坐虛館。細算所經程路。則自漢陽抵遼陽向直北。自遼陽至牛庄向西南。自牛庄至廣寧又向西北。自廣寧抵燕京又向西南。其路屈曲盤旋。夷險則自鎭江至冷井。山河酷似吾東。山高水深。道路崎嶇。自冷井至廣寧。曠野連天。路由其中。所經平坦。然處處卑濕。時或阻水。 [중략]



밤에 빈 사관에 앉아서 지나온 길을 자세히 생각해 보니, 한양(漢陽)으로부터 요양(遼陽)에 이르기까지는 바로 북쪽으로 향해서 왔고, 요양으로부터 우장(牛莊)까지는 서남쪽을 향해서 왔고, 우장으로부터 광녕(廣寧)까지는 또 서북쪽을 향해서 왔고, 광녕으로부터 연경(燕京)까지는 또 서남쪽을 향해서 왔다. 그 길이 굴곡이 많고 험한 곳은 진강(鎭江)으로부터 냉정(冷井)까지인데, 산과 물이 마치 우리나라의 산이 높고 물이 깊어 도로가 기구한 것과 같았다. 냉정(冷井)으로부터 광녕(廣寧)에 이르기까지는 넓은 들이 하늘에 연했고 길이 그 속으로 나서, 지나오는 길이 평탄했다. 그러나 곳곳에 비습(卑濕)한 곳이 있고 때로는 간혹 물에 가로막히기도 했다. [중략]

 

 

연도기행[燕途記行]의  저자[著者]가 지나온 길의 방향[方向]을 회상[回想]하는 이 귀절은, 요수[遼水]와  연경[燕京]을 찾아가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답을 주고 있다.

본인이 이와 비슷한 길을 밟으면서, 연행록[燕行錄]에 등장[登場]하는  노봉구[蘆峰口]를 찾고나서,  방향[方向]때문에 많은 고심[苦心]을 했기 때문이다.

 

 

해동역사[海東繹史]

지리고 15[地理考十五], 산수 3[山水三]

원문 번역, 한국 고전 연구원

 

    ○ 소요수(小遼水) -남소수(南蘇水)를 덧붙인다.

《한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현도군 고구려현(高句驪縣)에는 요산(遼山)이 있는데, 요수(遼水)가 나오는 곳이다. 요수는 서남쪽으로 요대(遼隊)에 이르러서 대요수(大遼水)로 들어간다. 또 남소수(南蘇水)가 있어 서북쪽으로 흘러 새외(塞外)를 지나간다. [중략]

 

 

고구려[高句麗]에도 요산[遼山]이 있고 요수[遼水]가 있어, 서남 쪽으로 흘러 요대[遼隊]에 이르러  대요수[大遼水]로 들어간다. 고 했으니,  요수[遼水]는 고구려[高句麗]지역[地域]에서도  발원[發源]하고 있다.

 

 

 

《통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의 소요수는 그 근원이 요산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대량수(大梁水)와 합류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혼하(渾河)는 승덕현(承德縣)에서 남쪽으로 10리 되는 곳에 있다. 그 근원은 새외(塞外)에서 나와 흥경(興京) 경계 안으로 흘러들어서 요양주(遼陽州)의 서북쪽에 이르러 태자하(太子河)와 만나는데, 바로 옛 소요수이다. 살펴보건대, 지금 혼하는 그 근원이 장령자(長嶺子)의 납록와집(納綠窩集)에서 나오는데, 이를 납록하(納綠河)라고 한다. 납록하는 영액변문(英額邊門)으로 흘러 들어와 갈상아하(噶桑阿河)와 만나 혼하가 된다. 여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흥경 경계 안을 지나는데, 이곳에 소패하(小貝河)가 있어서 개원현(開原縣) 경계로부터 서남쪽으로 흘러와 합류하며, 또 소자하(蘇子河)가 있어 흥경 경계로부터 서북쪽으로 흘러와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남소수(南蘇水)는 《대청일통지》에 의거하면 흥경 경계 안에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구려 남소성조(高句麗南蘇城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중략]

 

 

 

요수[遼水]의 발원지[發源地]가 또 다르게 기록[記錄]되어 있다. 연도기행[燕途記行]의 저자[著者]]는 물의 근원[根源]이 확실[確實]하지 않다고 한다.

 

 

 

    ○ 대요수(大遼水)

《통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에는 대요수가 있는데, 그 근원이 말갈(靺鞨)의 서남쪽 산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로 안시(安市)에 이른다. -삼가 살펴보건대, 안시는 바로 당나라 문황(文皇)이 공격하였던 성이다.

 

 

 

통전[通典]의 기록[記錄]은,     어휘가 또 다르게 기술[記述]되어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요하(遼河)는 봉천부(奉天府)에서 서쪽으로 100리 되는 곳에 있다. 동쪽과 서쪽의 두 근원이 변경 밖에서 흘러와 합류한 다음 남쪽으로 흘러 개원현(開原縣)과 철령현(鐵嶺縣) 두 현의 서쪽을 지나고, 다시 남쪽으로 흘러 승덕(承德), 요양(遼陽), 해성(海城)의 서쪽을 지나며, 다시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한서》 지리지를 보면, “망평현(望平縣)에는 대요수가 있다. 대요수는 변경 밖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안시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가는데, 1250리를 흐른다.” 하였다. [중략]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와  한서 지리지[漢書, 地理誌]에는, 애매 모호[曖昧模糊]하고 복잡하게 기록[記錄]하고   있다.

 

 

  

《성경통지》를 보면, “요하는 구려하(句驪河)라고도 하며, 지금은 거류하(巨流河)라고 한다. 거류하는 그 근원이 새외(塞外)에서 나오는데, 두 개의 근원이 있다. 서북쪽에서 흘러오는 한 근원은 너무 멀어서 상고할 수가 없다. 동쪽에서 흘러오는 한 근원은 역시 장백산 서북쪽에 있는 여러 와집(窩集) 안에서 나와 흑이소하(黑爾蘇河) 등과 합류한 다음 북쪽으로 흘러 변경을 나가 서북쪽으로 흘러 등자촌(鄧子村)을 감돈 다음 다시 서남쪽으로 꺾어지면서 서북쪽에서 흘러온 한 물과 합류하여 하나가 된다. 여기에서 마침내 서남쪽으로 흘러 개원현의 명안패륵둔(明安貝勒屯) 동쪽 10리 되는 곳에서 변방에서 흘러온 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흘러 철령현의 북쪽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청하(淸河)가 동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다시 쌍협구(雙峽口)의 서남쪽으로 들어가 두 물로 나누어지는데, 이를 내요하(內遼河), 외요하(外遼河)라고 한다. 다시 현의 서남쪽을 돈 다음 합해져서 하나가 된다. 개성(開城)에 이르러서 거류하가 되었다가 또 나누어 흐르다가 다시 남쪽에서 모여 해성현(海城縣)의 서쪽을 지나면서 태자하(太子河)와 합류하는데, 이곳을 삼차하(三汊河)라고 하며, 여기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 하(河)는 바로 요동(遼東)과 요서(遼西)가 나누어지는 곳이다.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적에 진흙탕길 200여 리에 흙을 깔고 다리를 만들어서 건넌 곳으로, 지금도 이 지역 100여 리 이내에는 비가 오면 진흙탕이 되어 길을 갈 수가 없다. 강희(康煕) 58년(1719)과 옹정(雍正) 6년(1728)에 서로 잇달아서 길을 닦아 점차 평탄한 길이 되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지금 흑이소하는 길림(吉林) 오라(烏喇)의 서남쪽에 있는 고이낙와집(庫爾諾窩集)에서 나와 북쪽으로 흘러 변경으로 나갔다가 곧바로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흐른다. 그 서쪽의 한 근원은 바로 서라목륜하(西喇木倫河)로, 그 근원이 고북구(古北口)에서 북쪽으로 500여 리 되는 곳에 있는 몽고(蒙古)의 극서극등(克西克騰) 경계 안의 백이흑하이홍(百爾黑賀爾洪)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고북구 바깥에 있는 몽고의 여러 주목지(駐牧地)를 지나면서 북쪽으로는 객라목륜하(喀喇木倫河)를 받아들이고, 남쪽으로는 노합하(老哈河)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개원현의 서북쪽 변경 밖에 이르러서 흑이소하와 합류하여 변경으로 들어가서 요하가 된다. 《한서》 지리지나 《수경주(水經注)》에서 말한 요수의 근원은 모두 지금 서북쪽에서 흘러오는 한 지류에 대해서만 말하였으며, 동쪽에서 나오는 한 근원에 대해서는 《통전》에서 처음으로 말하였다.  [중략]

 

 

성경통지[盛京通志]의 기록[記錄]은 더 복잡[複雜]하고. 내요하[內遼河]와  외요하[外遼河]가 있다. 내요하[內遼河]와 외요하[外遼河]가, 거류하[일명, 句麗河]가 되었다가, 다시 나뉘어져  흐르다가 남쪽에서 모여 해성현 서쪽을 지나면서,  태자하[太子河]와 합류[合流]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이 요하[遼河]를 기준으로, 요동, 요서[遼東,遼西]가 나뉘어 진다. .......... ? [연도기행,燕途記行]의 저자[著者]는, 이 물의  근원[根源]이 자세하지 않다고  의문[疑問]을 남긴다.]

 

진흙탕길 200 리, 이 곳이 바로 요택[遼澤]......... !

 

요택[遼澤]200 리에,  영원백[寧遠伯]이성량[李成樑]이 민정[民丁]을 동원하여 둑을 쌓고, ....

 

요택[遼澤]은, 광녕[廣寧]에서 우장[牛莊]까지, ...............

 

 

 

강희[康熙]58 년에서,  옹정[雍正]6 년에 잇달아 길을 닦아, 점차  평탄[平坦]한 길이 되었다. 지형 지세[地形地勢]바뀌어 지고 있는 것 아닌가 ?

 

몽고[蒙古]에서도  발원[發源]하여, 여러 주목지를 거치면서, 이리 저리 흘러 내리다가, 변경[邊境]으로 들어가서 요하[遼河]가 된다, .................?

 

 

  

    ○ 대양수(大梁水)

《통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의 대량수는 나라의 서쪽에 있는데, 새외(塞外)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소요수(小遼水)로 들어간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태자하(太子河)는 요양주(遼陽州)에서 북쪽으로 15리 되는 곳에 있는데, 바로 옛날의 대량수로, 일명 동량하(東梁河)라고도 한다. 그 근원은 살수선산(撒水禪山)에서 나와 위자곡(葦子谷) 동쪽에서부터 변방으로 들어가 서남쪽으로 흘러 요양주의 서북쪽에 이르러서 혼하(渾河)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흘러 해성현(海城縣) 서북쪽에 이르러서 요하(遼河)로 들어간다. 《한서》 지리지를 보면, “요양현의 대량수는 서남쪽으로 흘러 요양에 이르러서 요하로 들어간다.” 하였고, 《요사》 지리지를 보면, “동량하는 동쪽 산으로부터 나와 서쪽으로 흘러 혼하와 합류하여 소구(小口)가 되고, 요하와 만나서 바다로 들어간다. 또 태자하라고도 하며, 대량수라고도 한다.” 하였다. 《금사(金史)》 지리지를 보면, “동량하는 국명(國名)이 올로홀필자(兀魯忽必刺)이다.” 하였고, 《대명일통지》를 보면, “태자하는 그 근원이 간라산(幹羅山)에서 나와 서쪽으로 500리를 흘러 요동도사성(遼東都司城)에서 동북쪽으로 5리쯤 되는 곳에 이른다. 여기에서 꺾어져 서남쪽으로 흘러 혼하에 이르러 합해져 소구가 된 다음 요하와 만나서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다. 《방여기요》를 보면, “태자하는 바로 옛 연수(衍水)로, 연(燕)나라 태자(太子) 단(丹)이 연수에 숨어 있었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이를 인하여 태자하라고 이름하였다.” 하였다. [중략]

 

 

대양수[大梁水],  여러 사서[史書]를 인용[引用]하여 다양하고, 자세한 설명의 기록[記錄]이다. 

요하[遼河]와 요수[遼水]의 근원[根源]과 지류[地流]가,  이렇게 여러 갈래로 기록 [記錄]되고 있으니,  요하[遼河]와 요수[遼수]는 한두개의 강[江]이 아니다. 

 

 

 

 

 

 

원전[原典] 사서[史書]의 여러 기록[記錄]은, 이렇게 다양하다. 요수[遼水]는 한두개의 강이 아니라, 위 지도에서 표시한  원[圓]을 중심으로 흘러드는 사방[四方]의 지류[地流]들을 모두 말하는 것이다.

강물이 발원[發源]하여 흘러 모이는 방향을 보면,  지도[地圖]에서 표시한,  원[圓]을 줄심으로 동남으로 걸쳐 있는,  천산[天山] 줄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완전한 육지[陸地]안의 섬[島]이다.

 

 

지형지세[地形地勢]가 이러 하다보니, 기록[記錄]도 다양하고, 설명도 각각 다르게 기술[記述]되어 있어  요수[遼水]를 찾는데 혼란을 많이 초래 한 것이다.

 

 

여기서 요동, 요서[遼東,遼西]를 나뉘는 기준이 되는 요수[遼水]는, 광녕[廣寕]에서 우장[牛莊]까지,  요택[遼澤]200 리를 흐르는  요수[遼水]와 요하[遼河]이다.

지금은, 지형지세[地形地勢]와,  물길, 들판 등이 많이 변하여,  천년[天年]전의 모습을 볼수 없지만, 요택[遼澤]의 둑이,  아직까지 그  형태[形態]가  남아 있는 곳이 있었다.

남에서,  북서 쪽으로 비스듬이 흐르는, 이 요택[遼澤]의  둑[堤防]옆에 있는  하[河]가, 바로 요동[遼東]과   요서[遼西]를 나누는 기준이 되지 않겠는가 ?

 

그리고 요수[遼水]의  근원[根源]은,  이 하[河]의  상류[上流]를 따라 올라가면, 그 근원[根源]이 있을 것이다.

 

성경강역고[盛京疆域考]의  위지요해즉요하상원야[謂之遼海即遼河上源也]는, 황당한 구절 같지만, 이곳의  지형지세[地形地勢]를 잘 알고 있는 저자[著者]의 적절한 표현이 아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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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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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돌아가자 | 작성시간 12.12.22 자세한 내용까진 어렵지만..
    재밌게 잘 보고 있습니다.. ^^
  • 작성자문 무 | 작성시간 12.12.22 성경강역고에 나오는 요하에 대한 기록은 처음부터 의미심장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찾아 수년을 허비했는데, 이곳이 신강성의 서북지방과 카자흐스탄 접경지역이라는 내용에 놀라움을 진정키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이곳지방을 흐르는 하천과 여러 개의 하천의 물이 들어와 요해를 이루는 곳이 있을 것이며, 요하에 관한 많은 옛 기록들을 충족시킨다면 획기적인 일입니다. 일단 님의 주장을 경청하겠습니다. 또 시간이 나는대로 옛 기록을 대입해 보겠습니다. 놀라운 내용의 글을 계속 게재해주시는 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다음 글이 벌써 기대됩니다.
  • 작성자환국고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12.25 해무님 감사합니다. 해무 선생님께서 말씀 하시는 뜻 알것 같습니다. 조선사의 서쪽 변경이 어디였는가에 대하여는 좀더 정확한 자료와 고증이 필요 할것으로 보입니다. 본인이 확실하게 말할수 있는것은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한때는, 흑해 동부와 남부, 그리고 북쪽 지역까지는 확실 합니다. 고대에는 프랑스 스폐인 까지 진출한, 고고학적 자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고대이고 근세는, 정확한 자료와 고증이 필요 할것으로 사료 됩니다. 해무 선생님 건강하시고 댁내에 만복이 가득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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