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칼과 꽃이란 사극에...
주신으~~~별이시여~~~...의 최민수가 나와 연개소문역을 한다.
실록관 나이나 가족관계가 차이는 나지만...
그 소재와 이야기 전개는 자못 재미진 감도 있다.
연개소문하면...흔히들 동부가문의 막지리라 하는데...
밑의 해동역사엔...분명 서부대인(西府大人)이라 명기했다...?...뭐가 진실일까...?
그리고 연개소문이 새삼 막지리로 등극한게 아니고...
윗대부터 막리지를 연임한 것이며...
정작 5부가의 동의로 오르는 자리는...대막리지라하고...대대로라 했음을 알수 있다.
막리지는 여기저기 5부에 흔했단 것이다.
그리고...
밑의 해동역사를 보건데...
고구려 전성기의 영토는 신장성을 넘어 카자흐까지 다 아우렀다 보이긴 하나...
돌궐의 동서분열이란 양원왕기의 동서분열로 장안성(평양성)으로 동천한 이후 수당의 침입으로 동부로 몰렸을 당시엔...
그 서쪽 국경지 요동은...아무래도 현 돈황지역이라 보인다.
돌궐이 서고구려인 것이다.
당나라 수군이 내주(來州)에서 바다를 건너 온단 얘기도...현 청해호를 건넌단 얘기가 맞을듯 하다.
그 해로 빼곤...오로지 그늠의 수럼 80리 요택지대를 건너야만 고구려 평양성에 다다를 수 있으니...
이는 북은 고비사막과 고비알타이(음산)에 막히고...
남쪽은 기련산맥과 청해호와 그 주변 소금벌판에 막혀...
오로지 감숙성 옥문관 일대를 거처야만 섬서성에 다다를 수 있는...
현 감숙성 돈황 동쪽 과주(瓜州)의 안시(安西)일대가 고구려의 안시(安市城)이란 추측을 하게 만든다.
당태종이 파촉의 지역에 명해 배를 축조하려 조세를 강화하는 바람에 소요가 일어나...토벌했다는데...
그 지역인들을 만인(蠻人)들이라 함은...
조선사에서 이르던 남만(南蠻)은...인도네시아 남쪽의 호주지역을 이른 말이긴 하나...
원래의 만(蠻)은 인도,파키(파촉?)의 인종들을 이르고...
이들과 닮은 아리안 서역인들도..그래 간혹 만(蠻)이라 통칭됐던것 아닌지 싶다.
또한...
고려 내내...
조선 내내도...
태조 왕건과 태조 이성계가 개국하여 요동을 차지했던 왕조의 초기 몇대 말고는...
거란이 망해 요동이 잠시 비어있던 때 말고는....발해국 빼고는...
이 감숙성 가욕관 정도가 조선의 서북 국경이요...여기부터 고구려 천리장성이축조돼어...
후일 신라가 구연성을 더 보강하고...고려가 개축하고...조선 만리장성이 현 북경지역까지 연장돼어...
현재는 진나라 만리장성이라 왜곡돼기에 이른 것이라 보인다.
단군조선의 시초와...고구려의 전성기에는 총령넘어 알타이 서쪽까지 통치가 미쳤으나...
기자조선 이후...고구려 말기엔 분명 대륙고려&조선의 통상적인 서북경계는 요동인 돈황지역이고...
확실한 관문은...현 가욕관 천하제일웅관9天下第一雄關)이 거길까 한다.
고려나 조선 사신단이...
늘상 유일하게 이길로 북송과 원나라 명나라로 통행한 것이며...
이 유일한 감숙섬 길다란 협곡로가 막히면..별 수 없이 청해호를 건너...청해성 소금사막 불모지를 넘고 넘어...
그것도 천산지역 연경이 북쪽 오랑케에 점령당하면...타클라마칸 남쪽 호탄정도로 조공하는게 유일한 중국(황도)으로의 통로같다.
남송은...타클라마칸은 커녕...한 티벳 라싸정도가 왕도였을듯 하다.
조선의 강역을...근세조선 강역까지도 너무 서역으로만 비정하여...
스스로 대륙조선사 찾기를 수렁으로 몰아 넣어 환타지를 만들 연유는 없을듯 하다.
중원 대륙만 해도 그 면적이 차고 넘치니...너무 오바하다 진실은 사라지고...환타지만 남는 허망함이 없어야 하겠다.
나부터도... 너무 오바하지 않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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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世紀) 8 | ||||
| 고구려(高句麗) 3 |
○ 당 고조 무덕(武德) 2년 영류왕(榮留王) 2년 고구려 왕 고건무(高建武)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고건무는 바로 전왕 고원(高元)의 이모제(異母弟)이다.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으로, 그 나라는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였으니, 바로 한나라 낙랑군의 옛 땅으로, 경사(京師)에서 동쪽으로 5천 1백 리 떨어져 있다. 《구당서》
○ 5년 영류왕 5년 고조가 수나라 말기에 전사(戰士)들이 고구려에 많이 함몰하였음을 생각해서 고건무에게 조서를 내리기를, 조서는 예문지에 상세히 보인다.
○ 7년 영류왕 7년 2월 정미에 형부 상서(刑部尙書) 심숙안(沈叔安)을 보내어 고구려로 가서 고건무를 책봉하여 상주국 요동군왕 고려왕(上柱國遼東郡王高麗王)으로 삼게 하였다. 이어 천존상(天尊像) 및 도사(道士)를 데리고 고구려로 가서 《노자(老子)》를 강(講)하게 하니, 왕과 도가(道家), 속가(俗家)들 가운데 청강하는 자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 고조가 일찍이 시신(侍臣)에게 말하기를,
○ 9년 영류왕 9년 신라와 백제가 모두 사신을 보내어 고건무를 헐뜯으면서, 고구려에서 길을 막아 입조할 수가 없으며 또 서로 틈이 벌어져 자주 침략해 온다고 하였다. 이에 원외산기상시(員外散騎常侍) 주자사(朱子奢)에게 조칙을 내려 가서 서로 화해시키게 하였다. 그러자 고구려 왕 고건무가 표를 올려 사죄하고 신라와 더불어 사신끼리 회맹(會盟)할 것을 청하였다. 《상동》
○ 태종 정관(貞觀) 2년에 영류왕 11년 돌궐(突厥)의 힐리가한(頡利可汗)을 격파하자, 고건무가 사신을 보내어 하례하고 봉역도(封域圖)를 올렸다. 《상동》
○ 5년 영류왕 14년 광주도독 부사마(廣州都督府司馬) 장손사(長孫師)에게 조서를 내려 고구려로 가서 수나라 때 전사한 자의 해골을 거두어 파묻고 고구려에서 세운 경관(京觀 적의 시체를 한 데 높게 쌓아 무덤을 만들어 놓은 것임)을 헐어 버리게 하였다. 이에 고건무가 고구려를 칠까 두려워하여 장성(長城)을 수축했는데, 동북쪽의 부여성(扶餘城)으로부터 시작해 서남쪽의 바다에까지 이르니, 무릇 1천여 리였다. 《상동》
○ 14년에 영류왕 23년 고구려에서 태자 고환권(高桓權)을 보내어 입조하고 방물을 바치니, 황제가 후하게 보답하였다. 그러고는 사자(使者) 진대덕(陳大德)에게 조서를 내려 부절을 가지고 가서 위로하는 동시에 고구려의 실정을 살피게 하였다. 진대덕이 고구려의 경내로 들어가서는 이르는 성읍(城邑)마다 지키는 관리에게 후하게 뇌물을 주어 고구려의 실정을 자세히 파악하였으며, 수나라 때 종군하였다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중국 사람들을 보면 친척들의 존망(存亡)에 대해 말해 주자, 그를 보는 사람마다 눈물을 흘렸다. 그러므로 그가 이르는 곳마다 사녀(士女)들이 길을 메우고서 그를 보았으며, 고건무는 성대히 군용(軍容)을 펼치고 사자(使者)를 만나 보았다. 진대덕이 돌아와서 모든 사실을 진달하니, 황제가 몹시 기뻐하였다. 진대덕이 또 아뢰기를,
○ 16년에 영류왕 25년 서부대인(西部大人)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섭직(攝職)을 하면서 불법을 저지르니, 여러 대신들이 고건무와 비밀히 의논하여 죽이려 하였는데, 그 일이 누설되었다. 이에 연개소문은 부병(部兵)을 다 불러 모으고는 열병한다고 하면서 성 남쪽에 술과 음식을 성대히 차려 놓고 대신들을 불러 참관하게 하니, 대신들이 모두 와서 보았다. 그러자 연개소문은 군사들을 시켜 그들을 모두 죽였는데, 죽은 자가 1백여 명이나 되었다. 그러고는 창고를 불태우고 궁궐로 쳐들어가 고건무를 죽이고 고건무의 동생인 고대양(高大陽)의 아들 고장(高臧)을 왕으로 세웠다. 그런 다음 자신은 막리지(莫離支)가 되었는데, 막리지는 중국의 병부 상서(兵部尙書)에 중서령(中書令)을 겸한 것과 같은 것이다. 이로부터 연개소문은 국정을 전횡하였다. 태종이 고건무가 죽었다고 듣고는 거애(擧哀)하였으며, 사신을 파견해 조제(弔祭)를 지냈다. 《구당서》 ○ 《규염객전(虬髥客傳)》에는, “규염이 말하기를, ‘지금부터 10년 뒤에는 동남쪽으로 수천 리 떨어진 곳에 이상한 일이 있을 것이다. 그때는 내가 일을 성사시킨 때이다.’ 하였다. 정관(貞觀) 10년에 공(公 이정(李靖)을 말함)이 좌복야 평장사(左僕射平章事)로서 남만(南蠻)에 갔는데, 그곳 사람이 들어와서 아뢰기를, ‘배 1천 척과 군사 10만 명이 부여국(扶餘國)으로 들어가서 그곳의 임금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는데, 나라가 이미 안정되었습니다.’ 하였다. 공은 마음속으로 규염이 일을 성공한 것을 알았다.” 하였다.
○ 17년 보장왕 2년 6월 정해에 태상 승(太常丞) 등소(鄧素)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회원진(懷遠鎭)의 수병(戍兵)을 증원하여 고구려를 핍박하자고 청하였다. 그러자 황제가 이르기를,
○ 윤달에 황제가 이르기를,
○ 9월 경진에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글을 올렸는데, 거기에,
○ 황제가 사농 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奬)에게 명하여 새서(璽書)를 싸 가지고 가 고구려에게 주게 하였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 18년 보장왕 3년 정월에 상리현장이 평양에 이르렀다. 이때 막리지 연개소문이 이미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여 두 성을 격파하였는데, 고구려 왕이 그를 불러들이도록 하여 돌아왔다. 상리현장이 신라를 공격하지 말도록 달래니, 막리지가 말하기를,
○ 7월에 고구려의 막리지가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침공함에 신라가 자주 사신을 보내어 구원해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황제가 신묘에 칙령을 내려 장작대장(將作大匠) 염입덕(閻立德), 괄주 자사(括州刺史) 조원해(趙元楷), 송주 자사(宋州刺史) 왕파(王波)에게 명하여 홍주(洪州)ㆍ요주(饒州)ㆍ강주(江州) 등으로 나아가서 군량을 싣고 바다를 항해할 수 있는 전선(戰船) 4백 척을 만들어 오게 하였다.
갑오에 조서를 내려 영주 도독(營州都督) 장검(張儉), 수좌종위솔(守左宗衛率) 고리행(高履行) 등을 보내어 유주도독부(幽州都督府)와 영주도독부(營州都督府)의 병마 및 거란(契丹)ㆍ해(奚)ㆍ말갈(靺鞨)의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요동(遼東)을 공격하여 그 정세를 살피게 하고, 태상 경(太常卿) 위정(韋挺)을 하북의 여러 주에 보내어 군량을 징발해 영주(營州)에다가 저장하게 하였으며, 《구당서》에, “황제가 사람을 뽑아 군량을 저장하게 하려 하니, 마주(馬周)가 위정(韋挺)을 천거하였다. 황제가 위정에게 ‘유주 북쪽은 요수(遼水)가 2천 리를 흐르면서 주현들을 아우르고 있어서 군대가 행진할 때 군량을 취해 올 곳이 없다. 경이 이번에 나가서 군량이 떨어지지 않게만 해도 그 공이 작지 않을 것이다.’고 말하였다.” 하였다. 민부시랑(民部侍郞) 최인사(崔仁師)를 시켜 그를 돕게 하였다. 또 태복 소경(太僕少卿) 소예(蕭銳)를 하남도(河南道)의 여러 주에 보내어 군량을 싣고 바다로 오게 하였다.
8월에 소예가 상소를 올려 아뢰기를,
○ 9월 을미에 고구려의 막리지가 사신을 보내어 백금(白金)을 바쳤다. 저수량이 태종에게 아뢰기를,
○ 고구려의 사신이 또 아뢰기를,
○ 10월 계묘에 옹주(雍州)의 부로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었다. 황제가 이르기를,
○ 11월 임신에 황제가 낙양에 이르렀다. 전 의주 자사(宜州刺史) 정원숙(鄭元璹)이 이미 벼슬에서 물러나 있었는데, 그가 일찍이 수 양제(隋煬帝)를 따라 고구려를 정벌하였으므로 정원숙은 수나라 때 벼슬하여 우무후장군(右武侯將軍)이 되어 고구려를 정벌하는 데 따라 갔었다. 행재소(行在所)로 나오도록 불러 물으니, 대답하기를,
○ 갑오에 형부 상서(刑部尙書) 장량(張亮)을 평양도 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상하(常何)와 좌난당(左難當)을 부총관으로 삼았으며, 염인덕(冉仁德), 유영행(劉英行), 장문간(張文幹), 방효태(龐孝泰), 정명진(程名振)을 행군총관(行軍摠管)으로 삼아 장량에게 예속시킨 다음 강회(江淮)와 영협(嶺硤)의 강한 군사 4만 명,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에서 모집한 병사 3천 명, 전함(戰艦) 5백 척을 거느리고 내주(萊州)로부터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나가게 하였다. 또 태자첨사 좌위솔(太子詹事左衛率) 이세적(李世勣)으로 요동도 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을 삼고,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으로 부총관을 삼았으며, 장사귀(張士貴)ㆍ장검(張儉)ㆍ집실사력(執失思力)ㆍ계필하력(契苾何力)ㆍ아사나미사(阿史那彌射)ㆍ강덕본(姜德本)ㆍ국지성(麴智盛)ㆍ오흑달(吳黑闥)을 모두 행군총관으로 삼아 이세적에게 속하게 한 다음, 보기(步騎) 6만 명 및 난주(蘭州)ㆍ하주(河州) 두 주의 항복한 호병(胡兵)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나아가 두 군(軍)이 합세하게 하였다. 《책부원귀》
○ 경자에 제군이 유주(幽州)에 모두 모였다. 행군총관(行軍摠管) 강행본(姜行本)과 소부 소감(少部少監) 구행엄(邱行淹)을 보내어 먼저 공인(工人)들을 독촉하여 안라산(安蘿山)에서 운제(雲梯)와 충차(衝車)를 제조하게 하였다. 이때에 원근에서 응모하는 용사(勇士)와 성을 공격하는 기계(器械)를 바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는데, 황제가 몸소 손익을 따져 편리하고 좋은 것을 취하였다. 《자치통감》
○ 황제가 조서를 내리기를,
○ 12월 신축에 무양공(武陽公) 이대량(李大亮)이 졸하였는데, 죽으면서 표문을 올려 고구려를 정벌하는 군사를 파하기를 청하였다. ○ 갑인에 조서를 내려서 제군 및 신라ㆍ백제ㆍ해(奚)ㆍ거란에게 길을 나누어 진격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이상 모두 자치통감》
○ 19년 보장왕 4년 2월 경술에 황제가 몸소 제군을 거느리고 낙양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을묘에 울지경덕(尉遲敬德)을 좌일마군총관(左一馬軍摠管)으로 삼아 따라오게 하였다. 이달에 이세적의 군사가 유주(幽州)에 도착하였다. 낙양에서 유주까지는 1천 6백 리이다. 3월 정축에 거가가 정주(定州)에 이르렀다. 낙양에서 정주까지는 1천 2백 리이다. 정해에 황제가 시신(侍臣)들에게 이르기를,
4월 초하루 무술에 이세적이 통정진(通定鎭)으로부터 통정진은 요수의 서쪽에 있다. 수나라 대업(大業) 8년에 요동을 정벌할 때 설치하였으며, 용도(甬道)는 수나라가 부교(浮橋)를 만들어 요수를 건너면서 쌓은 것이다. 요수(遼水)를 건너 현도(玄菟)에 이르니, 고구려에서는 몹시 놀라서 성읍(城邑)이 모두 성문을 닫고 나오지 않은 채 굳게 지켰다. 임인에 요동도 부대총관(遼東道副大摠管)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이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신성(新城)에 이르고, 《통감고이》에, “당력(唐曆)에, ‘장검(張儉)이 적군을 두려워하여 감히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는데, 강하왕 도종이 몇백 기를 거느리고 들어가서 적군의 형세를 살펴보고 오겠다고 굳이 청하였다. 이에 황제가 허락하면서 며칠이면 갔다가 올 수 있겠는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가는 데 10일, 살펴보는 데 10일, 돌아오는 데 10, 합하여 한 달이 지나서는 돌아와 폐하를 알현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고는 드디어 말에게 재갈을 물리고 군사들을 단속하여 험난한 길을 거쳐 곧바로 요동성의 남쪽으로 나아간 다음 지형의 험이와 진영을 친 곳을 살펴보았다. 돌아올 때 고구려의 군사들이 귀로를 차단하였는데, 도종은 이들을 격파하여 모두 죽이고 장수를 목 벤 다음 돌아와 처음에 약속한 날짜에 맞춰 황제를 알현하였다. 이에 황제가 탄복하면서 「맹분(孟賁)과 하육(何育)의 용맹도 어찌 이보다 낫겠는가.」 하고는 금 50근과 비단 1천 필을 하사하였다.’고 하였다.” 하였다. 이제 실록(實錄)을 따른다. 절충도위(折衝都尉) 조삼량(曹三良)이 10여 기(騎)를 이끌고 곧바로 성문으로 달려드니, 성중이 놀라 동요되어 감히 나오는 자가 없었다. 《상동》
○ 계묘에 황제가 군사들에게 크게 음식을 먹였다. 그런 다음 유주(幽州)의 성 남쪽에 장막을 쳤다. 조서를 내려 장손무기(長孫無忌)에게 명하여 서사(誓師)하게 한 뒤, 이어 군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갔다. 《신당서》
○ 영주 도독(營州都督)인 행군총관(行軍摠管) 장검(張儉)이 여러 번병(藩兵)의 기병을 이끌고 대군의 전봉(前鋒)이 되었다. 이때에 어떤 고구려후(高句麗侯)를 사로잡았는데, 막리지(莫離支)가 장차 요동으로 올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장검에게 조서를 내려 신성(新城) 길에서 맞아 치게 하니, 막리지가 마침내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장검이 이 틈을 타서 진격해서 요수를 건너 곧장 건안성(建安城)으로 《자치통감》 주에, “요동성에서 서쪽으로 3백 리를 가면 건안성에 이르는데, 한나라 때 평곽현(平郭縣)의 지역이다.” 하였다. 달려들어 가 고구려 군사를 궤멸시키고 수천 급을 참수하였다. 임자에 이세적과 강하왕 도종이 개모성(蓋牟城)을 《자치통감》 주에, “개모성은 요동성의 동북쪽에 있다. 당나라가 그 성을 취하고는 개주(蓋州)로 삼았으며, 원(元)나라 때에는 요양부로(遼陽府路)에 개주요해절도(蓋州遼海節度)가 있어서 건안(建安)ㆍ양지(陽地)ㆍ웅악(熊岳)ㆍ수암(秀巖) 네 현을 거느렸다.” 하였다. 공격하였다. 좌둔위장군(左屯衛將軍) 강확(姜確)이 군사들을 독려하여 성을 공격하다가 유시에 맞아 졸하였다. 계해에 이세적 등이 개모성을 함락하고 2만 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10만 석의 양곡을 노획하였다. ○ 위정(韋挺)이 면직되었는데, 황제가 백의종군하게 하였다. 전군(前軍)이 개모성을 격파함에 미쳐서 조서를 내려 위정으로 하여금 병사들을 거느리고 개모성을 지키게 하였는데, 위정은 개모성이 대군(大軍)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며, 고구려의 신성(新城)과 가깝게 접해 있어 밤낮없이 전투를 벌여 북소리와 함성이 끊이지 않았으므로, 걱정을 이길 수가 없었다. 《이상 모두 구당서》
○ 장량(張亮)이 수군을 거느리고 동래로부터 바다를 건너 비사성(卑沙城)에 이르렀는데, 그 성은 사면이 깎아지른 듯하고 오직 서쪽 문만 공격할 수가 있었다. 이에 아장(亞將) 정명진(程名振)이 군사들을 독려하여 야밤에 습격하였는데, 부총관 왕문도(王文度)가 먼저 성 위에 올라가고 사졸들이 계속해서 진격하니, 성안이 궤산되었다. 5월 기사에 드디어 그 성을 함락하고 남녀 8천 명을 포로로 잡았다. 총관(摠管) 구충효(邱忠孝) 등을 나누어 보내어 압록수(鴨綠水)에서 유격 활동을 하게 하였다. 이날 이세적이 진군해서 요동성을 포위하였다. 《책부원귀》
○ 경오에 거가가 요택(遼澤)에 이르렀는데, 진흙 수렁길이 2백여 리나 되어 인마(人馬)가 통과할 수 없었다. 이에 장작대장(將作大匠) 염입덕(閻立德)이 흙을 뿌려 다리를 놓으니, 군사들이 쉬지 않고 행군하여 임진에 요택을 건너 동쪽으로 갔다. 《자치통감》
○ 황제가 요택을 건너면서 조서를 내리기를,
○ 장군예를 참수하여 조리돌렸다. 정축에 거가가 요수(遼水)를 건너와서 다리를 철거하여 사졸들의 마음을 굳게 하고 마수산(馬首山)에 주둔하였다. 황제가 몸소 요동성 아래에 내려가 사졸들이 흙을 져다가 참호를 메우는 것을 보고, 무거운 것을 진 자의 짐을 친히 나누어 말 위에 실어 옮기니, 뭇 신하들이 모두 두려워하면서 앞 다투어 흙덩이를 날랐다. 《신당서》
○ 이세적이 요동성을 공격하면서 밤낮 12일을 쉬지 않았다. 고구려에서 당나라에 3백 근의 돌을 1리 밖까지 날리는 포거(抛車)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성 위에다 나무를 쌓아 전루(戰樓)를 만들고 새끼줄로 엮어 날아오는 돌을 막았다. 이세적이 포거를 벌여 놓고 돌을 쏘아 성을 공격하니, 돌에 맞는 곳마다 모두 무너졌다. 또 충거(衝車)로 누각을 때려 부수니 누각이 모두 무너져 내렸다. 이때 백제에서 금휴개(金髹鎧)를 올렸으며, 또 현금(玄金)으로 산오문개(山五文鎧)를 만들어, 이를 군사들에게 입혀 따르게 하였다. 황제가 친히 기병 1만여 명을 이끌고 와서 이세적과 합세하여 성을 포위하였는데, 갑옷의 광채가 빛나 눈이 부시었고 북소리와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였다. 갑신에 남풍이 세차게 불자 황제가 날랜 군사를 보내어 충차(衝車) 끝의 장대에 올라가서 서남루(西南樓)에 불을 지르게 하니, 불이 성안으로 번지어 붙어 집이 모두 불탔으며, 죽은 자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군사들이 성을 오르니 고구려 군사가 방패를 들어 막았는데, 당나라 군사들이 긴 창으로 쳐서 이를 떨구었다. 돌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으며, 성이 드디어 크게 무너졌다. 고구려 군사 1만여 명과 남녀 4만 구(口)를 포로로 잡고, 창고에 있는 곡식 50만 석을 획득하였으며, 그 성을 요주(遼州)로 만들었다. 당초에 황제가 정주(定州)로부터 수십 리마다 봉수(烽燧) 하나씩을 설치하여 요동까지 이어지게 하고는 요동성을 격파하면 봉화를 올리기로 태자와 약속하였는데, 이날 봉화를 올리라고 명하였다. 《책부원귀》
○ 을미에 군사를 백애성(白崖城)에 주둔시키고 공격하도록 명하였다.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 이사마(李思摩)가 화살에 맞았는데, 황제가 친히 피를 빨아주었다. 장사들이 그 사실을 듣고는 모두들 감격해 하며 흥기하였다. 백애성은 산을 등지고 물가를 임해 있어 사면이 아주 험하고 가파랐다. 이세적이 충거(衝車)로 때려 부수면서 돌과 화살을 성안으로 비 오듯 퍼부었다. 《신당서》
○ 고구려의 오골성(烏骨城)에서 군사 1만여 명을 보내어 백암성(白巖城)을 성원하니, 계필하력(契苾何力)이 8백 기(騎)로 이들을 쳤다. 계필하력이 몸을 날려 적진으로 들어갔다가 허리에 창을 맞았는데, 상련봉어(尙輦奉御) 설만비(薛萬備)가 단기로 달려가서 구원해 고구려 군사가 우글거리는 틈에서 계필하력을 구해 돌아왔다. 그러자 계필하력이 더욱 분발하여 창을 꼬나 잡고 나아가서 싸웠는데, 기병을 따라 돌진하여 드디어 고구려 군사를 격파하였다. 수십 리를 추격해서 1천여 급을 목 베었으며, 마침 날이 저물어서 파하였다.
○ 6월 정유에 이세적이 백암성(白巖城)의 서남쪽을 치고 황제가 서북쪽에 임하니, 성주(城主) 손벌음(孫伐音)이 몰래 심복(心腹)을 보내어 항복할 것을 청하면서, 성 위에서 도월(刀鉞)을 던지는 것을 신호로 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면서 또 말하기를,
○ 태종이 밤에 여러 장수들을 불러들여 직접 지휘하였다. 이세적을 파견하여 보기(步騎)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 군의 서쪽 고개에 진을 치게 하고, 장손무기는 우진달(牛進達) 등이 거느린 정병(精兵)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기병(奇兵)이 되어 산 북쪽에서 좁은 골짜기로 나가 고구려 군의 뒤를 치도록 하였으며, 황제는 친히 보기(步騎)를 거느리고 고각(鼓角)을 숨기고 기치(旗幟)를 뉘고 고구려 군영의 북쪽 높은 산 위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제군(諸軍)들로 하여금 고각이 울리면 일제히 내달아 치게 하였다. 인하여 유사(有司)에게 명해 항복받을 막사를 조당(朝堂) 곁에 치도록 하고 이르기를, “내일 오시에 이곳에서 고구려의 항복을 받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고는 드디어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였다. 《신당서》에, “이날 밤에 유성(流星)이 고연수의 군영(軍營)에 떨어졌다.” 하였다. 무오에 고연수 등이 이세적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는 군사를 내어 싸우려고 하였다. 태종이 멀리 장손무기의 군영에서 흙먼지가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고는 고각(鼓角)을 일제히 울리고 기치를 일제히 들게 하였다. 그러자 고구려 군사들이 몹시 두려워하여 군사를 나누어 당나라 군사를 치려고 하였으나, 대오가 이미 흐트러져 어찌할 수가 없었다. 《자치통감》에, “이때 마침 우레와 벼락이 쳤다.” 하였다. 이때 이세적이 긴 창을 가진 보병 1만 명으로 치니, 고연수의 군사가 드디어 패하였다. 장손무기가 고구려 군사의 뒤편에서 군사를 풀어 치고, 태종이 또 산으로부터 내려와 군사를 이끌고 들이닥쳤다.
○ 처음에 용문(龍門) 사람 설인귀(薛仁貴)가 군사의 모집에 응하여 종군하였다. 안시성에 이르렀을 때 마침 낭장(郞將) 유군앙(劉君昻)이 고구려 군에 포위되어 매우 위급한 처지였는데, 설인귀가 말을 타고 달려가 구원하면서 앞을 막는 고구려 장수를 참수한 다음, 그 머리를 말안장에 매달고 돌아오니, 고구려 군사들이 모두 두려워하면서 설인귀의 이름을 기억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설인귀가 스스로 날래고 용맹한 것을 믿고는 기공(奇功)을 세우고자 하였다. 이에 복색(服色)을 특이하게 해 흰옷을 입고 창을 잡고 긴 활을 허리에 찬 다음 크게 소리치며 앞장서서 돌진하니, 가는 곳마다 상대가 없어 고구려 군사가 흩어지고 쓰러졌다. 이에 대군이 승세를 타고 진군하였다. 대총관(大摠管) 유홍기(劉弘基) 역시 힘껏 싸워 고구려 군을 함몰시키고, 양홍례(楊弘禮)가 마병과 보병 24군(軍)을 거느리고 불시에 나아가 치니, 향하는 곳마다 모두 꺾어 참획한 것이 아주 많았다. 고구려 군이 이로 인해 크게 궤멸되어 1만여 급이 참수되었다. 고연수 등이 남은 군사를 이끌고 산을 의지해서 지켰다. 이에 장손무기와 이세적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 군을 포위하고, 교량을 모두 철거하여 그들이 돌아갈 길을 끊었다. 황제가 말고삐를 잡고 천천히 가서 고구려 군의 진영을 살펴보고는 시신들에게 이르기를,
○ 기미에 고연수와 고혜진이 그의 무리 15만 6천 8백 명을 거느리고 항복하기를 청하였다. 태종이 그들을 군문으로 들어오게 하니, 고연수 등이 무릎걸음으로 나와 절하면서 명(命)을 청하였다. 《신당서》에, “황제가 ‘이 뒤로도 감히 천자의 군대와 싸울 것인가?’ 하자, 고연수가 두려워 떨면서 아무 말도 못하였다.” 하였다. 태종이 누살(耨薩) 이하 추장(酋長) 3천 5백 명을 뽑아 융도(戎徒)를 주어 내지(內地)로 옮기고, 말갈(靺鞨)의 군사 3천 3백 명을 거두어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다. 《자치통감》 주에, “말갈의 군사가 진을 침범하였기 때문이다.” 하였다. 나머지 군사들은 모두 평양성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말 5만 필과 소 5만 마리와 명광갑(明光甲) 1만 벌을 획득했고, 그 밖의 다른 병기(兵器)도 이와 맞먹었다. 고구려는 온 나라가 크게 놀랐는데, 후황성(后黃城)과 은성(銀城)은 다 스스로 도망가 수백 리의 사이에 다시는 밥 짓는 연기를 볼 수가 없었다. 《신당서》에, “황제가 역서(驛書)로 태자에게 알리고, 여러 장수들에게 글을 내려 이르기를, ‘짐이 장수 노릇하는 것이 이러하니, 어떠한가?’ 하였다.” 하였다. 인하여 행차한 산을 이름하여 주필산(駐蹕山)이라 하였다. 《자치통감》 주에, “《구당서》를 살펴보건대, 그 산의 본래 이름은 육산(六山)이다.” 하였다. 장작(將作)으로 하여금 파진도(破陣圖)를 만들게 하고, 중서 시랑 허경종(許敬宗)에게 명하여 글을 지어 돌에 새겨 공적을 기록하게 하였다. 《이상 모두 구당서》
○ 7월 신미에 황제가 안시성의 동쪽 고개로 군영을 옮기었다. 기묘에 전사한 자의 시신에 표시를 하게 하고 군사들이 돌아갈 때 그들에게 주어 함께 돌려보냈다. 무자에 고연수(高延壽)를 홍려 경(鴻臚卿)으로 삼고, 고혜진(高惠眞)을 사농 경(司農卿)으로 삼았다. 장량(張亮)의 군사가 건안성(建安城) 아래에 이르러 벽루(壁壘)를 완전히 만들지 못하여 사졸들이 밖으로 나가 나무를 하고 꼴을 베었는데, 고구려 군사가 갑자기 이르자, 군중(軍中)이 놀라 동요하였다. 장량은 본래 겁 많은 사람이라 호상(胡床)에 걸터앉은 채 똑바로 응시하고 말을 못하였는데, 장사(將士)들이 그것을 보고는 도리어 용맹스럽게 여겼다. 총관 장금수(張金樹) 등이 북을 울리면서 군사를 단속해 고구려 군사들을 쳐서 격파하였다.
8월 갑진에 후기(候騎)가 막리지의 첩자(諜者) 고죽리(高竹離)를 잡았는데, 손을 뒤로 묶은 채 군문(軍門)으로 데려 갔다. 그러자 황제가 불러 보고는 결박을 풀어 주면서 묻기를,
병오에 안시성의 남쪽으로 군영을 옮기었다. 황제가 요동성 밖에 있으면서 군영을 설치할 때 척후(斥候)만 분명하게 할 뿐 참호와 성루(城壘)를 만들지 아니하였는데, 비록 성에 가까이 다가가도 고구려 군사들이 끝내 감히 나와서 노략하지 못하였다. 군사들을 뽑아 단신으로 나가 노숙하게 하기를 중국에 있을 때와 같이 하였다. 황제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 설연타(薛延陀)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는데, 황제가 그에게 이르기를,
○ 9월에 황제가 백암성(白巖城) 싸움에 이기자, 이세적에게 이르기를,
○ 강하왕 도종이 군사들을 독려하여 안시성 동남쪽에 토성(土城)을 쌓으니, 고구려에서도 또한 성의 담장을 높게 증축하여 높이가 같게 하였다. 사졸을 교대로 나누어 교전하였는데, 하루에 6, 7번씩이나 싸웠다. 이세적이 안시성의 서쪽을 공격하면서 포거(抛車)로 돌을 쏘고 충차(衝車)로 성을 부수게 하여 누첩(樓堞)을 파괴하면 성중에서는 무너지는 즉시 목책(木柵)을 세워 무너진 곳을 보완하였다. 도종이 나뭇가지와 흙을 담은 부대로 토둔(土屯)을 만들어 산과 같이 쌓고는 그 가운데에다 다섯 갈래의 길을 만든 다음 그 위에다가 나무를 얽어 놓고 흙을 입혔는데, 밤낮으로 쉬지 않고 60일 동안 쌓으면서 50만 명을 동원하였으며, 토산의 꼭대기가 성보다도 두어 길이나 높아 성중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도종이 과의도위(果毅都尉) 부복애(傅伏愛)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토산 위에 진을 치고 적을 수비하게 하였는데, 토산이 높은 곳에서 무너져 내려 성을 누르자, 성이 무너졌다. 그때 마침 부복애가 사사로이 자리를 비웠으므로, 고구려 군사 1백 인이 성이 무너진 곳을 따라 나와 싸워 마침내 토산을 빼앗아 웅거하였다. 그러고는 참호를 파 길을 끊은 다음 빙 둘러서 불을 놓고 막아 굳게 지켰다. 태종이 크게 노하여 부복애의 머리를 베어 진중에 조리돌린 다음, 제장에게 명하여 공격하게 하였으나, 3일이 되어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도종이 맨발로 깃발 아래에 나와 죄를 청하니, 황제가 이르기를,
○ 황제가, 요동은 일찍 추워져 풀이 마르고 물이 얼어 병사와 군마가 오래 머무르기가 어렵고 또 양식이 장차 떨어지려 하므로, 계미에 군사를 돌리라고 칙명을 내렸다. 먼저 요주(遼州)와 개주(蓋州) 두 주의 호구(戶口)를 뽑아서 요수(遼水)를 건너게 하고, 이어 안시성 아래에서 군사를 시위하고 돌아가니, 성중에서는 모두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았다. 안시성의 성주(城主)가 성 위에 올라가 배사(拜辭)하니, 황제가 굳게 지킨 것을 가상히 여겨 비단 1백 필을 주면서 임금을 잘 섬기라고 격려하였다. 이세적과 강하왕 도종에게 명하여 기병 4만 명을 거느리고 후군이 되게 하였다. 《자치통감》
○ 기왕부참군(紀王府參軍) 교보명(喬寶明)이 행재소(行在所)로 나오자, 태종이 이르기를,
○ 을유에 요동성에 주둔하였다. 이때 요동성에는 아직도 군량이 10만 석이나 있었는데 군사들이 다 가져올 수가 없었다. 병술에 요수를 건너 발착수(渤錯水)에 이르렀는데, 진흙탕이 80리나 되어 수레와 말이 통과할 수가 없었다. 이에 장손무기와 양사도(楊師道) 등에게 명하여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가 풀을 베어 길을 메우고 수레를 연결해 다리를 만들게 하였는데, 황제가 친히 나무를 말채찍에 매어 달고 역사(役事)를 도왔다.
10월 초하루 병신에 황제가 포구(蒲溝)에 주둔하였다. 《자치통감》 주에, “발착수(渤錯水)와 포구(蒲溝)는 모두 요택(遼澤) 가운데 있다.” 하였다. 황제가 말을 세우고 길 메우는 것을 독려하였다. 제군(諸軍)이 건널 때 사나운 눈보라가 몰아쳐 사졸들이 많이 죽었다. 이에 조서를 내려 길에다가 횃불을 피우고 군사들이 건너오는 것을 기다리게 하였다. 이 출정에서 고구려를 정벌하여 현도(玄菟)ㆍ횡산(橫山)ㆍ개모(蓋牟)ㆍ마미(磨米)ㆍ요동(遼東)ㆍ백암(白巖)ㆍ비사(卑沙)ㆍ맥곡(麥谷)ㆍ은산(銀山)ㆍ후황(後黃) 등 10성(城)을 함락하고, 10만 호(戶)에 18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통감고이》에, “실록에, 상이 이르기를, ‘요주ㆍ개주ㆍ암주 등 세 주(州)의 호구로서 내지로 들어온 것이 전후로 7만 명이었다.’ 하였다. 계축에 내린 조서에는, ‘10만 호에 18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중국으로 옮기지 않은 자까지 아울러서 말한 것이다.” 하였다. 신성(新城)ㆍ주필(駐蹕)ㆍ건안(建安) 세 곳의 큰 싸움에서 전후로 참수한 것이 4만여 급이었고, 대장 2명, 비장(裨將)ㆍ관인(官人)ㆍ추수(酋帥)ㆍ자제(子弟) 3천 5백 명, 군사 10만 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말과 소 각 5만 마리, 관곡(館穀) 10순(旬)을 노획하였다. 처음에 출정할 때에는 군사 10만 명에 말이 1만 필이었는데, 돌아옴에 미쳐서는 군사가 겨우 수천 명이었고 전마도 십중팔구는 죽었다. 수군은 7만 명 가운데 수백 명이 죽었다. 《이상 모두 책부원귀》
○ 병오에 영주(營州)에 도착하였다. 조서를 내려 싸움에서 죽은 군사의 시신을 모아 유성(柳城)에서 장사 지내고, 태뢰(太牢)로 제사 지내게 하였다. 황제가 임하여 곡을 하니, 시종하는 신하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병진에 황제가 말을 타고 임유관(臨渝關)으로 들어갔다. 황태자가 길옆에서 맞이하였다. 처음에 황제가 태자와 이별할 적에 갈포(褐袍)를 입고 임어하여 이르기를, “너를 다시 보게 되는 날 바꾸어 입을 것이다.” 하였다. 이에 두 철이 지나도록 바꾸어 입지 않아 옷에 구멍이 났는데, 여러 신하들이 바꾸어 입기를 청하자, 황제가 이르기를, “사졸들이 모두 떨어진 옷을 입고 있는데, 내가 새옷을 입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태자가 깨끗한 옷을 올리자, 바꾸어 입었다. 요동에서 사로잡은 고구려 백성 1만 4천 구(口)를 적몰하여 노비로 삼았는데, 먼저 이들을 유주(幽州)에 모아 놓고 장차 장사들에게 상으로 나누어 주려 하였다. 황제가 그들 부자와 부부가 떨어져 흩어지는 것을 불쌍히 여겨서 유사(有司)에 명하여 포백(布帛)으로 그들의 몸값을 치르어 주고 용서하여 백성이 되게 하니, 늘어서서 절하면서 즐거워 외치는 소리가 3일 동안 그치지 않았다. 고연수는 항복한 뒤에 근심하다 죽었고 고혜진만 장안(長安)으로 왔다. 《신당서》
○ 11월 신미에 거가가 유주에 이르니, 고구려의 백성들이 성의 동쪽에서 맞이하였다. 절하고 환호하다가는 땅바닥에 구르면서 흙먼지가 이는 것을 멀리 바라보았다. 《자치통감》
○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어 살펴보건대, 《자치통감》에, 5월 갑인에 사신을 보냈다고 하였다. 사죄하고 아울러 두 미녀를 바쳤다. 그러자 태종이 사신에게 이르기를,
○ 황제가 고구려에서 돌아온 뒤로 연개소문이 더욱 교만 방자하여 《신당서》에, “처음에 군사들이 돌아올 때 황제가 활과 옷을 연개소문에게 하사하였는데, 연개소문이 그것을 받고도 사신을 보내어 사례하지 않았다.” 하였다. 비록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리기는 해도 그 말이 모두 궤탄(詭誕)하였다. 그리고 또 당나라의 사신을 대접하는 것도 거만할 뿐더러, 항상 변경의 틈을 엿보았으며, 누차 칙령을 내려 신라를 치지 말라고 하였는데도 침략을 그치지 않았다. 이에 10월 임신에 조칙을 내려 그 조공을 받지 말라고 하고, 다시 고구려 토벌할 것을 의논하였다. 《자치통감》
○ 21년 보장왕 6년 2월에 황제가 장차 다시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하였다. 조정에서 의논을 올리기를,
3월에 조서를 내려서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우진달(牛進達)을 청구도 행군대총관(靑邱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우무후장군(右武侯將軍) 이해안(李海岸)을 부총관으로 삼은 다음, 군사 1만여 명을 징발해 누선(樓船)을 타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 고구려로 가게 하였다. 또 태자첨사(太子詹事) 이세적(李世勣)을 요동도 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우무위 장군(右武衛將軍) 손이랑(孫貳郞) 등을 부총관으로 삼은 다음, 3천 명을 거느리고 영주도독부(營州都督府)로부터 신성(新城) 길을 경유해 들어가게 하였다. 두 군에 모두 수전(水戰)에 익숙한 자를 뽑아 배치하였다.
○ 5월에 이세적의 군사가 이미 요수(遼水)를 건너 남소성(南蘇城) 등 몇 성을 거치는 동안 고구려에서는 대부분 성을 등지고 막아 싸웠다. 이세적이 이들을 쳐서 격파하고 그 성곽을 불지르고서 돌아왔다. ○ 7월에 우진달ㆍ이해안이 고구려의 경내로 들어가 무릇 1백여 차례를 싸워 모두 이기고, 석성(石城)을 쳐서 빼앗고 나아가 적리성(積利城) 밑에 이르렀다. 고구려 군사 1만여 명이 나와 싸웠으나, 이해안이 쳐서 격파했으며 2천여 급(級)을 베었다. ○ 8월 무술에 황제가 조칙을 내려, 송주 자사(宋州刺史) 왕파리(王波利) 등에게 명해 강남(江南) 12주의 공인(工人)을 징발해 큰 배 수백 척을 만들게 해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12월 을해에 고구려 왕이 둘째 아들인 막리지 고임무(高任武)를 사신으로 보내어 조하(朝賀)하고, 인하여 사죄하였다. 황제가 이를 받아들였다. 《책부원귀》
○ 22년 보장왕 7년 정월 병오에 우무위대장군 설만철(薛萬徹)을 청구도 행군대총관(靑邱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우위장군 배행방(裴行方)으로 부총관을 삼은 다음, 바다를 건너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였다. 《신당서》
○ 4월 갑자에 오호 진장(烏胡鎭將) 고신감(古新感)이 살펴보건대, 《신당서》에는 부장(部將) 고신감(古神感)으로 되어 있다.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가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고구려의 보기(步騎) 5천 명을 만나 역산(易山)에서 살펴보건대, 역산이 《신당서》에는 갈산(曷山)으로 되어 있다. 싸워 격파했다. 그날 밤 고구려 군사 1만여 명이 고신감의 배를 습격하였는데, 고신감이 복병을 설치하여 또 그들을 격파하고 돌아왔다. 《자치통감》
○ 6월 병자에 설만철이 갑사(甲士) 3만 명을 거느리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 압록수(鴨綠水)에서 1백여 리 떨어진 곳으로 들어가 고구려의 박작성(泊灼城)에서 40리 되는 곳에 머무르니, 고구려 사람들이 두려워서 모두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박작성의 성주 소부손(所夫孫)이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맞아 싸웠다. 설만철이 배행방(裴行方)을 파견하여 보병을 거느리고 별도의 군대가 되어 계속 전진하게 하고 설만철과 제군(諸軍)이 그 뒤를 따라 치니, 고구려 군사가 대패하였다. 1백여 리를 추격하여 진중에서 소부손을 참수한 다음, 진격하여 박작성을 포위하였다. 박작성은 산세를 따라 성을 쌓고 압록수로 가로막혀 튼튼하기 그지없었으므로,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고구려에서 장수 고문(高文)을 파견해 오골성(烏骨城)과 안지성(安地城) 등 여러 성의 군사 3만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구원하게 하였다. 그들이 도착하여서는 두 진으로 나누어 설치하자, 설만철이 군사를 나누어 대적하였는데,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고구려 군사가 대패하였다. 《구당서》
○ 황제가 장손무기와 함께 계책을 세우면서 이르기를,
○ 9월 계미에 설만철 등이 고구려를 격파하고서 돌아왔다. 《자치통감》
○ 23년 보장왕 8년 5월 기사에 태종이 붕(崩)하였다. 유조(遺詔)로 요동 정벌하는 일을 파하게 하였다. 고구려 왕 고장(高藏)이 사신을 보내어 와서 위로하였다. 《신당서》
○ 고종(高宗) 영휘(永徽) 4년 보장왕 12년 장군(將軍) 신문릉(辛文陵)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 고구려를 위무(慰撫)하였다. 행군하여 토호진수(吐護眞水)에 이르렀을 때 방비하지 않는 틈을 타 고구려 군사가 이들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이때 위대가(韋待價)가 중랑장(中郞將) 설인귀(薛仁貴)와 함께 조서를 받들고 동쪽 변경을 경략(經畧)하고 있었는데, 이를 인해 부대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였다. 신문릉이 악전고투하자, 고구려 군사들이 점차 후퇴하여 보전할 수가 있었으며, 위대가는 중상을 입었다. 《구당서》
○ 5년 보장왕 13년 10월에 고구려 왕이 장수 안고(安固)를 파견하여 말갈의 군사와 함께 거란을 공격하니, 거란의 송막도독(松漠都督) 이굴가(李窟哥)가 이를 방어하였다. 신성(新城)에서 싸울 때 바람이 세차게 불어 고구려 측에서 쏜 화살이 모두 되돌아 가므로, 거란이 이 틈을 타 공격하여 고구려를 크게 패배시켰다. 거란이 들판에 불을 놓고 다시 싸웠는데, 고구려 군사들이 서로 뒤엉켜 죽으니, 시체를 한곳에 쌓아 놓고 무덤을 만들었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승리를 고하자, 고종이 조정에 이를 포고하였다. 《신당서 및 자치통감》
○ 6년 보장왕 14년 정월에, 고구려가 백제, 말갈과 연합하여 신라의 북쪽 국경을 침략하여 33개 성을 빼앗았다. 신라 왕 김춘추(金春秋)가 사신을 보내어 도와주기를 청하였다. 2월 을축에 영주 도독(營州都督) 정명진(程名振)과 좌위중랑장(左衛中郞將) 소정방(蘇定方)을 파견하여 군사를 징발해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5월 임오에 정명진 등이 요수(遼水)를 건넜다. 고구려 군사들이 그 병력이 적은 것을 보고 귀단수(貴端水)를 살펴보건대, 《신당서》를 보면, 정명진이 신성(新城)에 이르러서 고구려를 취하였으니, 《구당서》 정명진열전에 나오는 귀단수는 마땅히 신성의 서남쪽에 있어야 한다. 건너와 맞아 싸웠는데, 정명진 등이 분투하여 크게 격파하고, 수천 명을 쳐 죽였으며, 그 외곽(外廓)과 촌락(村落)을 불태우고 돌아왔다. 《자치통감》
○ 현경(顯慶) 3년 보장왕 17년 6월 임자에 영주도독 겸 동이도호(營州都督兼東夷都護) 정명진과 우령군중랑장(右領軍中郞將) 설인귀(薛仁貴)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 고구려의 적봉진(赤烽鎭)을 쳐서 함락시키고, 4백여 급(級)을 참수(斬首)하였으며, 수백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고구려가 대장 두방루(豆方婁)를 파견하여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막게 하였다. 정명진이 거란의 군사로써 역습하여 크게 깨뜨리고, 2천 5백 급을 참수하였다. 《상동》 ○ 《통감고이》에는, “《구당서》 유인궤열전(劉仁軌列傳)에 이르기를, ‘현경 2년에 유인궤에게 정명진을 딸려서 요동을 경략하게 하였는데, 고구려를 귀단성(貴端城)에서 격파하고 3천 급을 참수하였다.’ 하였다. 이제 실록(實錄)을 따른다.” 하였다.
○ 5년 보장왕 19년 12월 임오에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계필하력(契苾何力)을 패강도 행군대총관(浿江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소정방(蘇定方)을 요동도 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을 평양도 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아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신당서》
○ 용삭(龍朔) 원년 보장왕 20년 정월 을묘에 하남(河南)ㆍ하북(河北)ㆍ회남(淮南)의 67 주 군사를 모집해서 4만 4천여 명을 얻은 다음, 평양(平壤)과 누방(鏤方)의 행영(行營)으로 나아갔다. 무오에 홍려 경(鴻臚卿) 소사업(蕭嗣業)을 부여도 행군총관(扶餘道行軍摠管)으로 삼은 다음 회흘(回紇) 등 여러 부(部)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나아가게 했다. 《자치통감》
○ 4월 경진에 조서를 내려 임아상(任雅相)을 패강도 행군총관으로 삼고, 계필하력(契苾何力)을 요동도 행군총관으로 삼고, 소정방(蘇定方)을 평양도 행군총관으로 삼고, 소사업(蘇嗣業)을 부여도 행군총관으로 삼고, 우효위장군(右驍衛將軍) 정명진(程名振)을 누방도 총관(鏤方道摠管)으로 삼고, 살펴보건대, 《자치통감》을 보면, 현경(顯慶) 5년 12월에 정명진이 포주 자사(蒲州刺史)로서 이미 누방도 총관이 되었다. 이제 《신당서》를 따른다. 좌효위장군 방효태(龐孝泰)를 옥저도 행군총관(沃沮道行軍摠管)으로 삼아, 번호(蕃胡) 35군(軍)을 거느리고 수륙(水陸)으로 길을 나누어 진격해서 먼저 고구려의 빈틈을 살피게 하고, 황제는 스스로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그들 뒤를 이으려 하였다. 그러자 울주 자사(蔚州刺史) 이군구(李君球)가 건의하기를,
○ 소정방이 양건방(梁建方)ㆍ계필하력(契苾何力)과 함께 요동으로 갔는데, 고구려의 대장 온사문(溫沙門)을 만나 횡산(橫山)에서 싸웠다. 설인귀(薛仁貴)가 필마로 돌진하면서 고구려의 군사들을 쏘아대자, 쏘는 곳마다 모두 쓰러졌다. 고구려 군사 가운데 활을 잘 쏘는 자가 있어 성 아래에서 수십 명을 쏘아 죽였는데, 설인귀가 단기로 달려가 곧장 돌진하자, 활과 화살을 모두 잃어버린 채 손을 들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이에 생포하였다. 살펴보건대, 《신당서》 설인귀열전을 보면, 이 일이 현경 4년의 일로 되어 있다. 그런데 현경 4년에는 계필하력이 고구려를 정벌한 사실이 없다. 이에 이해에다 넣어 기술하였다. 9월에 계필하력이 압록수(鴨綠水)로 나아갔는데, 그곳은 바로 고구려의 요새지이다. 막리지(莫離支)가 아들 연남생(淵男生)을 보내어 정병 수만 명을 거느리고 지키게 하였으므로 군사들이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계필하력이 이곳에 이르자 마침 얼음이 합해졌으므로, 즉시 군사들을 건너게 한 다음 북을 울리면서 진격하니, 고구려 군사가 크게 무너졌다. 이에 수십 리를 추격하여 3만 급을 참수하니, 나머지 병사들이 모두 항복하였으며, 연남생은 겨우 살아 도망쳤다. 《구당서》
○ 2년 보장왕 21년 2월 갑술에 패강도 대총관 임아상(任雅相)이 군중에서 죽었다. 무인에 좌효위장군 백주자사 옥저도총관(左驍衛將軍白州刺史沃沮道摠管) 방효태가 고구려와 더불어 사수(蛇水) 가에서 싸웠는데, 싸움에 패하여서 그의 아들 13명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신당서》에, “방효태가 영남(嶺南)의 군사를 거느리고 사수(蛇水)에 진주하였다가 개소문의 공격을 받아 전 부대가 몰살했다.” 하였다. 소정방이 평양성을 포위하였으나, 오랫동안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그런데 마침 눈이 많이 내려서 포위를 풀고 돌아왔다. ○ 12월 무신에 조서를 내려, 고구려와 백제를 토벌하려다가 하북(河北) 백성들이 전쟁에 시달렸다는 이유로 정지하였으며, 태산(泰山)을 봉하는 것과 동도(東都)에 행차하는 것도 아울러 정지하였다. 《이상 모두 자치통감》
○ 건봉(乾封) 원년 보장왕 25년 정월에 고구려 왕 고장이 아들 고남복(高男福)을 보내어 천자가 태산(泰山)에 가서 봉선(封禪)하는 데 따라가게 하였다. 《신당서》 ○ 살펴보건대, 《자치통감》을 보면, 용삭(龍朔) 2년 8월에 고남복이 와서 천자가 봉선하는 데 따라갔다.
○ 5월에 고구려의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죽으니, 큰아들 연남생(淵男生)이 그 대신 막리지(莫離支)가 되었다. 연남생이 처음에 국정을 맡고 있다가 여러 성을 순무(巡撫)하러 나가면서, 그의 아우인 연남건(淵男建)과 연남산(淵男産)에게 서울에 머물러 있으면서 뒷일을 맡게 하였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두 아우에게 말하기를,
○ 6월 임인에 조서를 내려, 우효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 계필하력(契苾何力)을 요동도 안무대사(遼東道安撫大使)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가 연남생을 구하게 하고 《자치통감》에, “연헌성을 우무위 장군(右武衛將軍)으로 삼아 향도(嚮導)하게 하였다.” 하였다. 좌금오위장군(左金吾衛將軍) 방동선(龐同善)과 영주 도독(營州都督) 고간(高侃)을 요동도 행군총관(遼東道行軍摠管)으로 삼고, 좌무위 장군 설인귀(薛仁貴)와 좌감문장군(左監門將軍) 이근행(李謹行)을 후속 부대로 삼아 따라가게 하였다. 《신당서》
○ 9월에 계필하력이 요동에 이르렀다. 고구려 군사 15만 명이 요수(遼水)에 주둔하고, 또 말갈(靺鞨)의 군사 수만 명이 와 남소성(南蘇城)에 주둔하였는데, 계필하력이 온 힘을 다해 쳐서 모두 크게 격파하였다. 1만여 급을 참수하였으며, 승세를 타고 진격하여 7개 성을 함락시켰다. 이때 마침 방동선도 고구려 군사를 격파하였는데, 연남생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방동선과 합군(合軍)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연남생을 특진요동대도독 겸 평양도안무대사(特進遼東大都督兼平壤道安撫大使)에 제수하고 현도군공(玄菟郡公)을 봉하였다. ○ 12월 기유에 이세적(李世勣)을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사열소상백(司列少常伯) 학처준(郝處俊)을 부총관으로 삼아 고구려를 정벌하게 하였다. 또 계필하력과 방동선을 모두 부대총관 겸 안무대사(副大摠管兼安撫大使)로 삼고 나머지 관직은 전대로 두게 하였다. 또 조서를 내려 독고경운(獨孤卿雲)에게 압록도(鴨綠道)를 경유하고, 곽대봉(郭待封)에게 적리도(積利道)를 경유하고, 유인원(劉仁願)에게 비렬도(卑列道)를 경유하고, 김대문(金待問)에게 해곡도(海谷道)를 경유하게 한 다음 이들 모두를 행군총관으로 삼았으며, 두의적(竇義積)을 운량사(運粮使)로 삼았다. 그런 다음 이들을 모두 이세적에게 붙여 그로 하여금 통솔하게 하였으며, 연(燕)과 조(趙) 지방에 있는 곡식을 운반해 요동으로 모으게 하였다. 《이상 모두 책부원귀》
○ 2년 보장왕 26년 정월에 이세적이 각도(各道)의 군을 이끌고 신성(新城)으로 진격하였다. 《신당서》
○ 9월 신미에 이세적이 고구려의 신성(新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다음 계필하력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이세적이 처음에 요수를 건너고서 여러 장수에게 말하기를,
○ 고종이 직접 칙서를 지어 이세적을 위로하기를,
○ 곽대봉(郭待封)이 수군(水軍)을 이끌고 다른 길로 나아가 평양으로 진격하였다. 이세적이 별장(別將) 풍사본(馮師本)을 보내 군량과 병기를 대 주게 하였는데, 풍사본이 파선(破船)을 당하여 기일 안에 대 주지 못하였다. 이에 곽대봉은 군사들이 주리고 군색하자, 글을 지어 이세적에게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에게 편지를 빼앗겨 그 허실(虛實)이 알려질까 두려워서 이합시(離合詩)를 지어 이세적에게 보냈다. 글을 받아 본 이세적은 성내어 말하기를,
○ 총장(總章) 원년 보장왕 27년 정월 임자에 유인궤(劉仁軌)를 요동도부대총관 겸 안무대사 패강도 행군총관으로 삼았다. 《신당서》
○ 2월 임오에 설인귀가 고구려 군사를 금산(金山)에서 격파하고 나서 승세(勝勢)를 이용하여 2천 명을 거느리고 부여성(扶餘城)을 공격하려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군사가 적다는 이유로 말리니, 설인귀가 말하기를,
○ 시어사(侍御史) 가언충(賈言忠)이 요동에 가서 일을 살펴보고 돌아오자, 황제가 군중(軍中)의 일이 어떠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대답하기를,
○ 4월 병진에 혜성이 오거성(五車星)에 나타나자, 허경종(許敬宗)이 황제에게 아뢰기를, “혜성이 동북쪽에 나타났으니 고구려가 곧 망할 징조입니다.” 하였다. ○ 8월 신미에 비열도총관(卑列道摠管)인 우무위 장군(右武衛將軍) 유인원(劉仁願)이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머뭇거리고 진격하지 않은 데 좌죄(坐罪)되어 요주(姚州)로 귀양 갔다. 《이상 모두 자치통감》
○ 이세적이 대행성(大行城)을 함락시키고 나서 계필하력과 설인귀 등이 모두 이세적과 더불어 압록수(鴨綠水)에 모였다. 고구려가 항거하여 오자, 이세적 등이 공격하여 크게 패배시키고 2백여 리를 추격하여 욕이성(辱夷城)을 함락시키니, 모든 성이 도피하여 잇달아 항복하였다. 계필하력이 번호(蕃胡)와 중국군 50만 명을 이끌고 먼저 평양성에 이르니, 이세적의 군사가 뒤이어 와 평양성을 7개월 동안이나 포위하였다. 살펴보건대, 《자치통감》에는 한 달 남짓으로 되어 있다.
9월 계사에 고구려 왕 고장이 연남산(淵男産)을 보내어 수령(首領) 1백 명을 살펴보건대, 《자치통감》에는 98명으로 되어 있다. 거느리고 흰기를 들고 와서 항복하고, 또 입조(入朝)하기를 청하니, 이세적이 예로서 대접하였다. 그런데도 연남건은 오히려 성을 굳게 지키면서 자주 군사를 보내 싸웠으나 모두 패하였다. 고구려의 대장인 중[浮屠] 신성(信誠)이 몰래 첩자(諜者)를 보내 내응(內應)하기로 약속하였는데, 5일이 지나자 신성이 과연 성문을 열어 놓았다. 이에 이세적이 군사를 풀어 들어가게 하고, 성 위에 올라가 북 치고 소리 지르면서 성문과 누각에 불을 지르게 하니, 사방에서 불이 일어났다. 연남건이 다급하여 스스로 자신을 찔렀으나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이에 고구려 왕 고장과 연남건 등을 사로잡았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서 먼저 소릉(昭陵)에 고구려의 포로를 바치고, 개가(凱歌)를 울리면서 돌아오게 하였다.
12월 정사에 황제가 함원전(含元殿)에 앉아서 이세적 등을 인견하고 뜨락에서 포로들을 받았다. 고장(高藏)에 대해서는 평소에 협박을 당하여 스스로 정사(政事)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사면(赦免)하여 사평태상백 원외동정(司平太常伯員外同正)으로 삼았으며, 연남산(淵南産)은 먼저 항복하였다는 이유로 사재 소경(司宰少卿)을 제수하였다. 연남건은 검주(黔州)로 유배 보내고, 백제 왕(百濟王) 부여융(扶餘隆)은 영외(嶺外)로 유배 보냈다. 연헌성(淵獻城)을 사위경(司衛卿)으로 삼고, 신성(信誠)을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삼고, 연남생(淵南生)은 중국 군사를 향도한 공이 있다는 이유로 우위대장군에 제수하고 변국공(卞國公)을 봉하였으며, 특진(特進) 등은 예전대로 주었다. 이세적은 태자태사(太子太師)를 겸하게 하고, 계필하력은 행 좌위대장군(行左衛大將軍)으로 삼고, 설인귀는 위위대장군(威衛大將軍)으로 삼았다.
고구려는 본래 나라 전체가 오부(五部)로 나뉘어져 있으며, 성이 1백 76개에, 호구가 69만 7천 호였다. 이에 그 지역을 9개 도독부(都督府), 42개 주(州), 《자치통감》 주에, “신성주(新城州)ㆍ요성주(遼城州)ㆍ가물주(哥勿州)ㆍ위락주(衛樂州)ㆍ사리주(舍利州)ㆍ거원주(居袁州)ㆍ월소주(越素州)ㆍ거조주(去朝州)ㆍ건안주(建安州) 등 9개 도독부가 있으며, 42개 주 가운데 지(志)에 있는 것은 남소(南蘇)ㆍ개모(蓋牟)ㆍ대나(代那)ㆍ창암(倉巖)ㆍ마미(磨米)ㆍ적리(積利)ㆍ여산(黎山)ㆍ연진(延津)ㆍ목저(木底)ㆍ안시(安市)ㆍ제북(諸北)ㆍ식리(識利)ㆍ불열(拂涅)ㆍ배한(拜漢) 등 14개 주뿐이다.” 하였다. 1백 개의 현으로 나누어 설치하였다. 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통괄하였으며, 고구려의 장수 가운데 공이 있는 우두머리를 택해 도독(都督)ㆍ자사(刺史)ㆍ현령(縣令)을 제수해 중국 관리와 함께 백성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이어 좌무위 장군 설인귀(薛仁貴)를 파견하여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가 유인궤(劉仁軌)와 함께 평양에 머물러 다스리게 하였다. 그 뒤에 설인귀에게 겸검교안동도호(兼檢校安東都護)를 제수해 신성(新城)으로 옮겨 가서 다스리면서 고아와 늙은이를 돌보아 주고, 재능이 있는 자는 재주에 따라 등용하며, 충효(忠孝)와 절의(節義)가 있는 자를 모두 정표(旌表)하게 하니, 고구려의 군사와 백성들이 모두 다 기뻐하여 감화되었다. 이해에 교제(郊祭)를 지내었는데, 이는 고구려를 평정한 것에 대해 하늘에 감사를 표한 것이다. 《신당서 및 구당서》
○ 2년 4월에 고구려 사람들 가운데 이반(離反)하는 자가 많자, 칙명을 내려 고구려의 민호 3만 8천 2백 호를 강남(江南)ㆍ회남(淮南) 및 산남(山南)ㆍ경서(京西) 등 여러 주의 비어 있던 땅으로 옮기고,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은 그대로 두어 안동(安東)을 지키게 하였다. 《자치통감》
○ 함형(咸亨) 원년(670) 4월에 고구려의 대장(大長) 겸모잠(鉗牟岑)이 살펴보건대, 《자치통감》에는 검모잠(劒牟岑)으로 되어 있다. 백성들을 이끌고 반란하여 고장(高藏)의 외손인 안순(安舜)을 왕으로 삼았다. 조서를 내려 좌감문위대장군(左監門衛大將軍) 고간(高侃)을 동주도 행군총관(東州道行軍摠管)으로 삼고, 우령군위대장군(右領軍衛大將軍) 이근행(李謹行)을 연산도 행군총관(燕山道行軍摠管)으로 삼아 토벌하였다. 그리고 사평태상백(司平太常伯) 양방(楊昉)을 보내 도망치고 남은 고구려 사람들을 불러들이게 하였다. 안순이 겸모잠을 죽이고 신라(新羅)로 달아났다. 《신당서》
○ 2년에 살펴보건대, 《자치통감》에는 7월 초하루 을미로 되어 있다. 동주도 총관 고간(高侃)이 안시성에서 고구려의 남은 무리들을 격파하였다. 고간이 “어떤 고구려의 중이 중외에 재이가 있을 것이라고 떠들어 대니, 주벌하소서.” 하고 상주(上奏)하니, 황제가 학처준(郝處俊)에게 이르기를,
○ 3년 12월에 고간이 고구려의 남은 백성들과 백수산(白水山)에서 싸워 살펴보건대, 《신당서》에는 천산(泉山)으로 되어 있다. 격파하였다. 신라가 군사를 보내어 고구려를 구원하였는데, 고간이 격파했다. 《자치통감》 ○ 《신당서》에는, “신라의 구원병 2천 명을 포로로 잡았다.” 하였다.
○ 4년 윤5월에 연산도총관 우령군대장군(燕山道摠管右領軍大將軍) 이근행(李謹行)이 고구려의 반란군을 발로하(發盧河)에서 격파하였다. 살펴보건대, 《자치통감》에는 발로하가 호렴하(瓠簾河)로 되어 있다. 다시 싸워서 1만여 명을 포로로 잡거나 죽였다. 이에 평양성의 패잔병들이 쇠약해져서 다시는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고 신라로 도망해 갔는바, 4년 만에 평정이 된 것이다. 처음에 이근행이 아내인 유씨(劉氏)를 벌노성(伐奴城)에 머물려 두어 지키게 하였는데, 고구려가 말갈의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유씨가 갑옷을 입고 무리를 거느리고 성을 지켰다. 이에 고구려 군사가 물러가니, 황제가 가상히 여겨 연군부인(燕郡夫人)으로 봉하였다. 《신당서 및 자치통감》
○ 의봉(儀鳳) 원년(676) 2월 갑술에 안동도호부를 요동(遼東)의 고성(故城)으로 옮겼다. 《통감고이》에 이르기를, “실록(實錄)에, ‘함형(咸亨) 원년에 양방(楊昉)과 고간(高侃)이 안순(安舜)을 토벌하여 비로소 안동도호부를 함락하고 평양성에서 요동주로 옮겼다. 의봉 원년 2월 갑술에 고구려의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안동도호부를 요동성으로 옮겼다.’고 하였는데, 대개 함형 원년에 안동도호부를 옮겼다고 한 말은 결과를 두고 말한 것이고, 의봉 원년에 고구려의 유민이 반란하였다고 한 말은 안동도호부를 옮기게 된 원인을 말한 것이다. 또 《당회요(唐會要)》에는 함형 원년에 안동도호부를 옮겼다는 사실이 없고 의봉 원년에 요동 고성(故城)으로 옮겼다고 하였기에, 이제 그를 따른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신당서》에도 “함형 원년에 고간이 도호부의 소재지를 요동주로 옮겼다.”고 되어 있다. 이에 앞서서 동관(東官)으로 있던 당나라 사람들을 모두 파직시켰다. 《자치통감》
○ 2년에 고장(高藏) 에게 살펴보건대, 《자치통감》에는 ‘2월 정사에 공부 상서(工部尙書) 고장에게’라고 되어 있다. 개부의동삼사 요동군도독(開府儀同三司遼東郡都督)을 제수하고 조선 왕(朝鮮王)을 봉한 다음, 안동(安東)에 거주하면서 본번(本蕃)을 진압하고 군주 노릇을 하면서 유민들을 안집시키게 하였다. 이에 앞서서 내주(內州)에 편입되어 있던 교민(僑民)들을 모두 용서하여 보내고, 안동도호부를 신성(新城)으로 옮겼다. 《자치통감》 주에, “지난해 봄에 안동도호부를 요동 고성으로 옮겼다가, 지금 또다시 신성으로 옮긴 것이다.” 하였다. 고장이 안동에 이르러서 몰래 말갈과 내통하여 모반하였는데, 사전에 발각되어 그를 도로 소환하여 공주(邛州)로 유배하였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각각 흩어서 하남(河南)과 농우(隴右)의 여러 주로 옮겼으며, 가난하고 허약한 자들은 안동성 주위에 머물려 두었다. 《구당서 및 신당서》
○ 영순(永淳) 초에 고장이 졸하였다. 위위 경(尉衛卿)에 추증하고, 힐리가한(頡利可汗)의 묘 왼쪽에 장사 지냈으며, 주위에 비석을 세워 주었다. 예전의 고구려 성들은 왕왕 신라에 편입되고 유민들은 돌궐이나 말갈로 흩어져 도망갔다. 이로 말미암아 고씨(高氏)의 군장(君長)이 모두 끊어졌다. 《신당서》
○ 무후(武后) 수공(垂拱) 2년(686)에 고장의 손자 고보원(高寶元)을 봉하여 조선군왕(朝鮮郡王)으로 삼았다. 《구당서》
○ 성력(聖曆) 원년(698)에 고보원을 좌응양위대장군(左鷹揚衛大將軍)으로 올려 제수하고, 충성국왕(忠誠國王)에 봉하였다. 그러고는 그에게 안동을 맡겨 고구려의 옛 백성들을 통섭하려 하였으나, 일이 끝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상동》
○ 2년 말에 고장의 아들 고덕무(高德武)를 안동 도독으로 삼았다. 그 뒤로 조금씩 나라의 모양이 이루어졌다. 《신당서》
○ 헌종(憲宗) 원화(元和) 13년(818) 4월에 고구려국에서 악공(樂工)을 보내왔다. 《책부원귀》 ○ 살펴보건대, 《당서》를 보면 이는 바로 고덕무의 후손이다.
[주D-002]천존상(天尊像) : 도교(道敎)의 신상(神像)이다. 도교에서는 천신(天神)을 천존(天尊)이라 한다.
[주D-003]도사(道士) : 도교의 승려를 말한다. 원래 도사라는 칭호는 전한(前漢) 시대 이전에는 없었으나 후한의 장릉(張陵)이 오두미교(五斗米敎)를 개창하자, 후대 사람들이 비로소 그 무리를 도사라고 칭하였다. 방사(方士)라고도 한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79쪽》
[주D-004]힐리가한(頡利可汗) : 계민가한(啓民可汗)의 셋째 아들로, 이름이 아사나돌필(阿史那咄苾)이다. 당 고조 때 군사가 강한 것을 믿고 중국의 변경을 침입하였는데, 정관(貞觀) 연간에 이정(李靖)에게 토벌당했으며, 보철산(保鐵山)으로 도망쳐 있다가 장보상(張寶相)에게 체포당하여 경사(京師)로 잡혀 와 있다가 죽었다. 그의 시신은 돌궐의 풍속에 따라 패수(㶚水) 가에서 불태웠다.《舊唐書 卷194上》
[주D-005]대대로(大對盧) : 고구려의 최고 관직의 하나이다. 초기의 대로(對盧)가 뒤에 대대로(大對盧)ㆍ태대대로(太大對盧) 등으로 되었다.
[주D-006]연개소문(淵蓋蘇文) : 이병도는, “개소문에 대하여는 《신당서》 고려열전(高麗列傳)에 ‘개소문이란 자가 있는데, 혹 개금(蓋金)이라고도 한다. 성은 천씨(泉氏)이고, 스스로 물속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여 사람들을 미혹시켰다.’라 한 한 구절이 있는데, 이에 의거하면 소문의 완칭은 천개소문(泉蓋蘇文)이요, 다른 한 이름은 개금(蓋金)이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6년 및 10년 조에 보이는 고구려 대신 연정토(淵淨土)가 《당서》의 ‘소문의 동생 정토’와 같은 사람임을 보면 천씨(泉氏)는 본래 연씨(淵氏)였던 것이 당나라 고조 이연(李淵)의 휘를 피하여 소문의 아들 남생(男生)이 당나라에 투항한 뒤 천(泉) 자로 대신한 것이 아닌가 함이 통설(通說)이다. 《삼국유사》 보장봉노조(寶臧奉老條)에 적힌 ‘스스로 성은 개(蓋)이고 이름은 금(金)이라고 칭하였으며, 지위가 소문(蘇文)에 이르렀는데, 바로 시중의 직책이다.’라 하여 소문을 관직명이라 한 것은 고려할 가치도 없다고 본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321쪽 주》 이하 본 번역에서는 모두 연개소문(淵蓋蘇文)으로 표기하였다.
[주D-007]고장(高臧) :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寶臧王)의 이름이다. 보장왕은 나라를 잃은 탓에 시호(諡號)가 없으며, 보장은 그의 또다른 이름이다.《三國史記 卷21 高句麗本紀 第9 寶臧王上》
[주D-008]막리지(莫離支) : 고구려의 최고 관직이다. 막리지의 호칭은 수ㆍ당 이전부터 있어 오던 것인데, 최초로 막리지가 되어 군권(軍權)과 정권(政權)을 한꺼번에 잡은 사람은 연개소문(淵蓋蘇文)이다. 막리지는 기무(機務)ㆍ조명(詔命)뿐만 아니라 군사권까지 한 손에 쥐어 막대한 권력을 행사하였으며, 어원(語源)은 확실하지가 않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81쪽》
[주D-009]진씨(晉氏)의 난리 : 사마염(司馬炎)이 위(魏)나라를 찬탈하여 진(晉)나라를 세운 것을 말한다.
[주D-010]설연타(薛延陀) : 종족의 이름으로 흉노의 별종이다. 처음에는 설부(薛部)와 연타부(延陀部)로 나뉘어져 있다가 설부가 연타부를 합병하고는 설연타라 칭하였다. 처음에는 연말산(燕末山)에 웅거해 있다가 이남(夷男)이 부족장이 되어 돌궐에 귀부하였으며, 그 뒤 돌궐을 배반하고 자립(自立)하였다. 당 태종 때 진주비가가한(眞珠毘伽可汗)으로 책립(册立)되었으며, 정관(貞觀) 말에 몽고의 울독군산(鬱督軍山) 즉 지금의 항애산(杭愛山) 부근에 웅거해 있으면서 여러 부족을 통솔하였다. 진주비가가한이 죽은 뒤 국내가 어지러워지자 당나라에서 이세적(李世勣)을 파견하여 토벌하였다.
[주D-011]해(奚) : 4세기경부터 몽고 동부 지역에서 유목 생활을 하면서 거란족(契丹族)과 인접해 있던 선비족(鮮卑族)의 한 부족으로, 처음에는 고막해(庫莫奚)라고 불렸다. 뒤에 흉노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주D-012]고정(郜鼎) : 고정은 고나라에서 만든 솥이다. 춘추 시대 때 송나라의 태재(太宰) 독(督)이 상공(殤公)을 죽이고 정(鄭)나라에서 풍(豐)을 맞아다가 옹립하였는데, 주위에 있는 나라들이 이를 규탄할까 두려워하여 먼저 노(魯)나라 환공(桓公)에게 고정을 뇌물로 주었다. 이로부터 고정은 비리(非理)로 받는 뇌물을 뜻하게 되었다.
[주D-013]개모성(蓋牟城) : 지금의 무순(撫順) 서쪽에 있는 탑산산성이다. 심양(瀋陽)과 요양(遼陽)의 중간 지점인 십리아반(十里阿畔)이라는 설과 대련(大連)의 북쪽인 개평(蓋平)이라는 설도 있다.
[주D-014]개주(蓋州) : 지금의 요령성(遼寧省)에 있었던 주의 이름이다. 본래 고구려의 개모성이었으나 당나라에서 빼앗아 개주를 두었다. 뒤에는 발해의 영토로 편입되었다가 원나라 때에는 개주로(蓋州路)가 되었고, 명나라 때에는 개주위(蓋州衛)를 설치하였으며, 청나라 때에는 개평현(蓋平縣)을 설치하였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82쪽》
[주D-015]국내성(國內城) : 고구려 전기(前期)의 수도로, 만포진(滿浦鎭) 대안(對岸)의 집안현성(輯安縣城)과 그 배후의 산성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제2대 유리왕 때 이곳으로 천도하여 장수왕 15년(427)에 평양으로 천도할 때까지 고구려의 근거지가 된 곳이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83쪽》
[주D-016]이세적(李世勣) : 원문에는 ‘李勣’으로 되어 있는데, 이적의 본명은 이세적(李世勣)으로,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휘를 피하여 이적(李勣)으로 표기한 것이다. 본 번역에서는 모두 이세적으로 표기하였다.
[주D-017]백애성(白崖城) : 《신당서》와 《삼국사기》에는 백암성(白巖城)으로 되어 있다. 지금의 요령성 요양현(遼陽縣) 동북쪽에 있는 연주성(燕州城)이다. 당나라에서 이곳을 빼앗은 다음에 암주(巖州)를 설치하였다.
[주D-018]손벌음(孫伐音) : 《통감》과 《삼국사기》에는 손대음(孫代音)으로 되어 있다.
[주D-019]북부 누살(北部耨薩) : 누살은 욕살(褥薩)을 말한다. 욕살은 군(郡) 규모의 여러 성을 통괄하는 커다란 행정 구역인 대성(大城)의 장관이다.
[주D-020]대로(對盧) : 고구려 왕실 직속의 최고 벼슬로 패자(沛者)와 같이 왕을 보좌하며 국정을 총리(總理)하는 수상격이며, 후대에는 대대로(大對盧)ㆍ태대대로(太大對盧)라는 관직까지 생겼다. 대로는 왕이 직접 임명하는 벼슬이 아니라 여러 부족 가운데 우세한 부족에서 선출하였던 것으로, 타부족의 대변자 역할을 하면서 왕권을 견제하는 기능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71쪽》
[주D-021]진왕(秦王) :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이 처음 봉군(封君)되었을 때의 칭호이다.
[주D-022]주필산(駐蹕山) : 지금의 요령성 요양현(遼陽縣) 서남쪽에 위치해 있는 산으로, 일명 수산(首山)이라고도 한다.
[주D-023]진주가한(眞珠可汗) : 설연타(薛延陀)의 부족장인 이남(夷男)이 당나라로부터 받은 칭호이다.
[주D-024]안시성의 성주(城主) : 성주의 이름은 정사(正史)에는 전하지 않아 상세하게 알 수가 없으나, 야사(野史)에는 양만춘(梁萬春) 또는 양만춘(楊萬春)이라 전한다.《동춘당선생별집(同春堂先生別集)》 권6 경연일기(經筵日記) 기유년 4월 26일 조에, “상이 이르기를, ‘안시성 성주의 이름은 누구인가?’ 하니, 송준길(宋浚吉)이 아뢰기를, ‘양만춘(梁萬春)입니다. 그는 당나라 태종의 군대를 막았으니, 참으로 성을 잘 수비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하였으며,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도강록(渡江錄) 6월 28일 을해 조에, “세상에 전하기를, ‘안시성주 양만춘(楊萬春)이 당나라 황제의 눈을 쏘아 맞히자, 황제가 성 아래에서 군사들을 시위하게 하면서 비단 1백 필을 하사하여 그가 자신의 임금을 위하여 성을 굳게 지킨 데 대해 상 주었다.’고 한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335쪽 주》
[주D-025]부개자(傅介子) : 한나라 소제(昭帝) 때의 무신(武臣)으로, 대완국(大宛國)에 사신으로 가서 조령(朝令)으로 누란국(樓蘭國)과 구자국(龜玆國)을 책하여 모두 복종시켰다. 뒤에 누란국과 구자국이 배반하자, 누란국으로 가서 왕의 목을 베어 가지고 돌아와 의양후(義陽侯)에 봉해졌다.
[주D-026]박작성(泊灼城) : 지금의 안평(安平) 하구(河口)에 있으니, 단동현(丹東縣) 동쪽의 구련성(九連城)이다.《조선전사 제3권, 124쪽》
[주D-027]거란의 …… 방어하였다 : 거란은 수나라 개황(開皇) 말기에 부족이 점차 불어나자, 목축을 하기 위해 물과 풀이 있는 곳을 찾아 요서(遼西) 2백 리 되는 곳에 이르러 회흘(回紇)에 의지하여 살았다. 당 태종 정관(貞觀) 22년(648)에 추장인 굴가(窟哥)가 당나라에 내부(內附)하자, 당 태종이 거란부(契丹部)를 송막도독부(松漠都督府)로 만들고 굴가를 도독으로 임명하여 송막과 요락(樂樂) 지방을 통치하게 하였으며, 이씨(李氏) 성을 하사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신성(新城)에서 고구려와 싸운 것이다.《東史綱目 第4下》
[주D-028]귀단수(貴端水) : 지금의 혼하(渾河)이다.
[주D-029]회흘(回紇) : 종족의 이름으로, 외올아(畏兀兒)ㆍ회골(回鶻)이라고도 한다. 본디 흉노족의 후예로, 돌궐족에 복속되었었다. 위(魏)나라 때에는 고거(高車)ㆍ원흘(袁紇)ㆍ오호(烏護)라 칭해졌고, 수나라 때에는 위흘(韋紇)이라 칭하다가 당나라 때 이르러 비로소 회흘이라 칭하였으며, 당나라 곽자의(郭子儀)와 함께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의 난을 평정하여 회골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처음에는 내몽고와 외몽고의 지역에 거주하다가 내란으로 인해 서쪽으로 가 지금의 신강성(新疆省) 동남부 지역에 거주하였다. 송나라와 원나라 때에는 외올아(畏兀兒)라 칭하였으며, 천산(天山) 남로(南路)의 지역에 거주하였다.
[주D-030]고남복(高男福) : 《삼국사기》에는 복남(福男)으로 되어 있다.
[주D-031]금산(金山) : 《성경지(盛京誌)》에는 지금의 영해현(寧海縣) 서남쪽 1백 27리 지점에 있는 황금산(黃金山)이 이곳이라고 하였다.
[주D-032]연남생의 …… 합하였다 : 이병도는, “연남생은 이때 당나라 군대와 행동을 같이하고 있었으므로, 여기에서 말한 연남생의 군사는 그가 당나라에 내부(內附)할 때 본래의 근거지인 국내성(國內城)에 머물러 있게 하였던 군대인 것 같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343쪽 주》
[주D-033]이합시(離合詩) : 시를 지으면서 상대방이 쉽게 알아보지 못하도록 자획(字劃)을 떼어서 지은 것으로, 그것을 합하여 보아야만 원뜻을 알 수가 있다. 곽대봉(郭待封)이 지은 이합시는 내용이 전하지 않는다.
[주D-034]고구려의 성 : 《삼국사기》에는 학처준이 안시성(安市城) 아래에 있었다고 하였다.《三國史記 卷22 高句麗本紀 第10》
[주D-035]소릉(昭陵) : 당나라 태종(太宗)의 능으로, 섬서성(陜西省) 예천현(醴川縣) 동북쪽에 있다.
[주D-036]부여융(扶餘隆) : 백제 의자왕(義慈王)의 셋째 아들이다. 의자왕 4년(644)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백제가 망하면서 당나라로 압송되어 갔다. 665년에 당 고종(唐高宗)의 명으로 웅진 도독(熊津都督)이 되었다가 얼마 뒤 당나라로 돌아가 낙양(洛陽)에서 죽었다. 중국 측의 사서(史書)에는 부여융이 의자왕의 태자라고 되어 있는데, 의자왕의 태자는 부여효(扶餘孝)이다.
[주D-037]그 뒤에 …… 다스리면서 : 이병도는 이에 대해 “설인귀는 다음 해에 도호부를 평양에서 신성으로 옮겼다. 도호부를 옮긴 것은 검모잠(劒牟岑) 등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 운동이 평양 부근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345쪽 주》
[주D-038]고구려의 …… 겸모잠(鉗牟岑) : 《삼국사기》와 《동사강목》에는 검모잠(劒牟岑)으로 되어 있으며, 관직도 대형(大兄)으로 되어 있다.《三國史記 卷22 高句麗本紀 第10》 《東史綱目 第4下》
[주D-039]고장(高藏)의 …… 안순(安舜)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왕의 외손인 안순(安舜)’으로 되어 있으나, 신라본기에는 ‘안승(安勝)’이라 하였으며, 《동사강목》 제4에는 ‘왕의 아들 안승(安勝)’으로 되어 있다. 이병도는 “안승의 신분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함형(咸亨) 원년 4월 조의 기사에서는 ‘왕의 외손’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신당서》나 《자치통감》의 기사와 일치한다. 한편 《삼국사기》 권6 문무왕 10년 6월 조의 기사에는 ‘연정토(淵淨土)의 아들’이라 하였다. 그러나 문무왕이 안승을 고려국왕에 봉할 때의 책명(册命)에 ‘高句麗嗣子安勝公’이라고 한 것을 보면 서자(庶子)라고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 같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345~346쪽》
[주D-040]발로하(發盧河) : 《삼국사기》에는 호로하(瓠瀘河)로 되어 있다. 《동사강목》 제4에 “지금의 마전(麻田) 징파도(澄波渡) 하류에 호로하가 있는데, 그 남쪽이 바로 칠중성(七重城)이다.” 하였다. 지금의 임진강(臨津江)이다.
[주D-041]동관(東官) : 고구려와 백제의 지역을 통치하는 도독부의 관원을 말한다.
[주D-042]섭소온(葉少蘊) : 섭몽득(葉夢得)을 말한다. 소온(少蘊)은 그의 자(字)이다. 송나라 오현(吳縣) 사람으로, 《석림연어(石林燕語)》를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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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서정호 작성시간 13.07.23 근래에 다시 왕성하게 글을 올려 주셔서, 시간 가는 줄 모르며 탐독하고 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당 태종의 요택과 관련하여 이르티시강을 중심으로 한 서시베리아 저지대를 언급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미욱한 제 느낌에는 압록강, 두만강, 요하 이 세 물줄기의 위치는 예전 주장과 다소 달라진 것 같습니다.
혹, 지리 비정에 변화가 있으시다면 정리를 좀 해 주실 수 없을런지요..~ -
답댓글 작성자궐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7.23 네..서선생님...
라선정벌과 요수,흑룡강을 이르티쉬로 봤는데...너무 성급했던듯 합니다.
총령이란 빼도박도 못할 확고부동한 지형지물이 있기에...그 기준 동북쪽이 흑룡강이고 라선정벌지이니...
예니세이가 맞을듯 합니다.
일단 러시아쪽은 문헌기록으로 아주 춥단 흑룡강에 비해 그렇게 춥지가 않기에 그렇습니다.



세기(世紀)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