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드러나는 만리대국[萬里大國]의 고려[高麗]
사해[四海]의 통일환영[統一寰瀛]을 이룩한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고려[高麗]는, 삼한[三韓]을 하나의 나라로 통일한 국가[國家]로 역사[歷史]는, 기록[記錄]하고 있다. 신라[新羅]가 삼국[三國]을 통일 했다고 우리는 배워 왔으나,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을 따라가 보면, 대진국[大震國], 일명 발해[渤海]가 고구려[高句麗]강역[疆域]의 태반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신라[新羅]와 발해[渤海]의 남북[南北]국[國] 시대[時代]로 보는 것이, 우리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일 것이다.
발해[渤海]와 신라[新羅]의 말엽에, 삼한[三韓]을 통일하고, 고려[高麗] 오백년[五百年] 왕업[王業]의 기틀을 다진 고려[高麗]의 도읍지[都邑地]인 개경[開京]의 송악[松嶽]은, 신[神] 숭산[嵩山]이라는 명칭[名稱]이 있었다고 전[傳]하고 있다. 고려[高麗]의 도읍지[都邑地]인 개경[開京]에 있는 송악[松嶽]을, 식민사관[植民史觀]인 반도사관[半島史觀]에서는, 지금 반도[半島] 한국[韓國]의 개성[開城]에 있는 송악산[松嶽山]이라고 하고 있고, 또한 지금까지 그렇게 가르쳐 오고 있다.
우리의 역사[歷史]를 찾아가는 일명, 재야사학[在野史學]에서는, 여러 지역[地域]의 설[說]을 주장[主張]하고 있는데, 그 누구도 정확[正確]하고 확실[確實]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그저 추정[推定]과 가설[假說]로 주장[主張]하고 있을 뿐이다.
송악[松嶽]이 유력[有力]하다고 주장[主張]하는 설[說]의 몇가지 예를 든다면, 지금의 북경[北京] 유역[有域]에 있었다는 설[說],............. 하남성[河南省]의 개봉[開封]이라는 설[說],........... 하남성[河南省]의 낙양[洛陽] 인근[隣近] 지역에 있었다는 설[說],............ 사천성[四川省]의 성도[成都]라고 주장[主張]하는 설[說],......... 산서성[山西省]의 태원[太原] 유역[有域]이라고 주장[主張]하는 설[설] 등, 대륙[大陸]의 여러 지역[地域]이 등장하고 있는데, 여기가 고려[高麗]의 송악[松嶽]일 것이다. 라는 추정[推定]일 뿐이지, 이에 대한 확실[確實]한 증거[證據]나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우리 역사[歷史]의 현실[現實]이며, 우리 역사[歷史]의 일면[一面]이다. 국민[國民]의 정신[精神]과 혼[魂]과 얼을 무너트리는, 식민사관[植民史觀]은, 반성[反省]할 기미[幾微]가 전혀 없는 듯이 보이고, 우리의 역사[歷史]을 찾아 바로 세우자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식민사관[植民史觀]의 폐해[弊害]를 벗어나지 못하고, 서로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벌이며, 여기에 더하여 방해[妨害] 세력[勢力]까지 그 모습을 감추고, 교묘[巧妙]히 우리 역사[歷史]에 대하여 물을 흐리고 혼탁[混濁]하게 하고 있으니, 오늘에 이르는 우리의 역사[歷史]는,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혼란[混亂]과 같은,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대[時代]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조선[朝鮮]의 국운[國運]이 다하고, 나라를 잃는 비극[悲劇]속에, 우리의 역사[歷史]는, 그 역사[歷史]의 뿌리조차 잃어버리고 말았다. 광복[光復]을 맞이하고 어언 반세기[半世紀]를 넘어서고 있는 지금, 우리의 역사[歷史]는, 지나간 비극[悲劇]의 참화[慘禍]를 떨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어두운 잔재[殘在]들이 공고화[鞏固化]되고 있으니, 오늘날, 우리가 처한 우리 역사[歷史]의 현실[現實]을 생각하면, 어찌 탄식[歎息]하고 개탄[慨歎]을 금할 수 있겠는가 ?
자신[自身]의 나라이며, 자신[自身]의 조국[祖國]이고, 미래[未來]에 우리의 후손[後孫]들이 살아가야할 조국[祖國]과 민족[民族]의 나라에서, 자기 나라의 역사[歷史]를 폄훼[貶毁]하고, 우리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을 찾기 위하여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방해[妨害]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러한 자들은, 수백만명의 선대[先代]들을 살해[殺害]하고, 조국[祖國]과 민족[民族]을 무참히 짓밟은 사악[邪惡]한 침략[侵略]자의 무리들이 만들어 놓은, 식민사관[植民史觀]에 대하여, 어떠한 생각을 하고,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한국[韓國]의 국민[國民]이 되는 것을, 포기한 것인지 알수 없는 일이다.
고려사[高麗使] 지리지[地理志]
왕경 개성부[王京 開城府]
本高句麗扶蘇岬. 新羅改松嶽郡. 太祖二年, 定都于松嶽之陽, 爲開州, 創宮闕 [중략]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부소갑(扶蘇岬)인데 신라[新羅]에서 송악군(松嶽郡)으로 고쳤다. 태조[太祖] 2년에 송악[松嶽]의 남쪽에 도읍[都邑]을 정하여 개주[開州]라 하고 궁궐[宮闕]을 창건[創建]하였다. [중략]
光宗十一年, 改開京, 爲皇都. 成宗六年, 更定五部坊里. 十四年, 爲開城府, 管赤縣六·畿縣七 [중략]
광종[光宗] 11년에 개경[開經]을 황도[皇都]로 고쳤다. 성종[成宗] 6년에 5부[五部] 방리[坊里]를 다시 정하였다. 14년 개성부[開城府]로 하고 적현[赤縣] 6개와 기현[畿縣] 7개를 관할하게 했다. [=중략]
顯宗九年, 罷府置縣令, 管貞州·德水·江陰三縣, 又長湍縣令, 管松林·臨津·兎山·臨江·積城·坡平·麻田 七縣, 俱直隸尙書都省, 謂之京畿. 十五年, 又定京城, 五部坊里 [중략]
현종[顯宗] 9년)에 부[府]를 없애고 현령[縣令]을 두어 정주[貞州], 덕수[德水], 강음[江陰]의 세 현[縣]을 관할하게 하고, 또 장단현령[長湍縣令]을 두어 송림[松林]임진[臨津], 토산[兎山], 임강[臨江], 적성[積城], 파평[坡平], 마전[麻田], 의 7개 현[縣]을 관할하게 하여 모두 상서도성[尙書都省]에 예속시키고 이를 경기[京畿]라 불렀다. 15년에 또 경성[京城]의 5부[五部] 방리[坊里]를 정하였다. [중략]
二十年, 京都羅城成【王初卽位, 徵丁夫三十萬四千四百人, 築之, 至是功畢. 城周二萬九千七百步, 羅閣一萬三千閒, 大門四, 中門八, 小門十三 [중략]
20년[二十年]에, 경도[京都]의 나성[羅城]이 완성되었다. 왕이 처음 즉위[卽位]했을 때 정부[丁夫] 304,400인[三十萬四千四百人]을 징발[徵發]해 쌓기 시작해, 이 때에 이르러 공사를 마쳤다. 성[城]의 둘레가 29,700보[二萬九千七百步]이고 나각[羅閣]이 13,000간[一萬三千閒]이며, 대문[大門]이 4개, 중문[中門]이 8개, 소문[小門]이 13개였다. [중략]
一云, 丁夫二十三萬八千九百三十八人, 工匠八千四百五十人, 城周一萬六百六十步, 高二十七尺, 厚十二尺, 廊屋四千九百一十閒 [중략]
다른 기록[記錄]에는, 정부[丁夫] 238,938[二十三萬八千九百三十八]명과 공장[工匠] 8,450[八千四百五十]명이 동원되었으며, 성[城]의 둘레는 10,660보[一萬六百六十步], 높이 27척[二十七尺], 두께 12척[十二尺], 낭옥[廊屋이 4,910간[四千九百一十閒]이라고도 한다. [중략]
文宗十六年, 復知開城府事, 都省所掌十一縣, 皆屬焉. 又割西海道平州任內牛峯郡, 以隸之. 忠烈王三十四年, 設府尹以下官, 掌都城內, 別置開城縣, 掌城外. 恭愍王七年, 修松都外城 [중략]
문종[文宗] 16년에 다시 지개성부사[知開城府事]라 하고, 도성[都省]이 관장하던 11현[縣]을 모두 속하게 하였다. 또 서해도[西海道] 평주[平州]의 임내[任內]67)인 우봉군[牛峯郡]을 분할해 여기에 속하게 하였다. 충렬왕[忠烈王] 34년]에 부윤[府尹] 이하의 관원을 두어 도성[都城] 안을 관장하게 하고, 따로 개성현[開城縣]을 두어 도성[都城] 바깥을 관장하게 하였다. 공민왕[恭愍王] 7년에 송도[松都]의 외성[外城]을 수리하였다. [중략]
恭讓王二年, 分京畿爲左右道, 以長湍·臨江·兎山·臨津·松林·麻田·積城·坡平, 爲左道, 開城·江陰·海豐·德水·牛峯, 爲右道. 又依文宗舊制 [중략]
공양왕[恭讓王] 2년에 경기[京畿]를 좌도[左道]와 우도[右道]로 나누어, 장단[長湍], 임강[臨江], 토산[兎山], 임진[臨津], 송림[松林], 마전[麻田]적성[積城], 파평[坡平]을 좌도[左道]로 삼고, 개성[開城], 강음[江陰], 해풍[海豊], 덕수[德水], 우봉[牛峯]을 우도[右道]로 삼았다. 또한 문종[文宗]때 정했던 옛 제도[制度]에 의거해 [중략]
以楊廣道 漢陽·南陽·仁州·安山·交河·陽川·衿州·果州·抱州·瑞原·高峯, 交州道 鐵原·永平·伊川·安峽·漣州·朔寧, 屬左道, 以楊廣道 富平·江華·喬桐·金浦·通津, 西海道 延安·平州·白州·谷州·遂安·載寧·瑞興·新恩·俠溪, 屬右道. 各置都觀察黜陟使, 以首領官佐之 [중략]
양광도[楊廣道]의 한양[漢陽], 남양[南陽], 인주[仁州], 안산[安山], 교하[交河], 양천[陽川], 금주[衿州], 과주[果州], 포주[抱州], 서원[瑞原], 고봉[高峯]과 교주도[交州道]의 철원[鐵原], 영평[永平], 이천[伊川], 안협[安峽], 연주[漣州], 삭녕[朔寧]을 좌도[左道]에 속[屬]하게 하고, 양광도[楊廣道]의 부평[富平], 강화[江華], 교동[喬桐], 김포[金浦], 통진[通津]과 서해도[西海道]의 연안[延安], 평주[平州], 백주[白州], 곡주[谷州], 수안[遂安], 재령[載寧], 서흥[瑞興], 신은[新恩], 협계[俠溪]를 우도에 속[屬]하게 하여 각기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를 두었으며, 수령관[首領官]으로 그를 보좌[補佐]하게 하였다. [중략]
王都鎭山, 松嶽 一名崧岳巓, 有神祠. 又有龍岫山, 進鳳山, 東江 在貞州, 西江卽禮成江, 碧瀾渡. 屬郡一, 縣十二 [중략]
왕도[王都]의 진산[鎭山]은 송악[松嶽]이다. 숭악전[崧岳巓]이라고도 하는데, 신사[神祠]가 있다. 또 용수산[龍岫山], 진봉산[進鳳山], 동강[東江]은 정주[貞州]에 있다. ·서강[西江], 곧 예성강[禮成江]이다. 벽란도[碧瀾渡], 가 있다. 속군[屬郡]이 1개, 속현[屬縣]이 12개이다. [중략]
고려사[高麗使] 지리지[地理志]
개성현[開城縣]
本高句麗冬比忽, 新羅景德王十五年, 改爲開城郡. 顯宗九年, 罷開城府, 置開城縣令, 管貞州·德水·江陰三縣, 直隸尙書都省 [중략]
본[本]래 고구려[高句麗]의 동비홀[冬比忽]로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15년에 개성군[開城郡]이라고 고쳤다. 현종[顯宗] 9년에 개성부[開城府]를 없애고 개성현령[開城縣令]을 두어 정주[貞州], 덕수[德水], 강음[江陰]의 세 현[縣]을 관할하게 하고 상서도성[尙書都省]에 직속시켰다. [중략]
忠烈王三十四年, 以開城府, 掌都城內, 別置開城縣, 掌城外. 有井, 名曰大井【世傳, 懿祖娶龍女, 初到開城山麓, 以銀盂掘地, 水隨涌, 因以爲井.】. 有岐平渡 [중략]
충렬왕[忠烈王] 34년에 개성부[開城府]로 하여금 도성[都城] 안을 관장하게 하고 따로 개성현[開城縣]을 두어 성[城]밖을 관장하게 하였다. 우물이 있는데, 이름을 대정[大井]이라 하였다. 세상에 전하기를, 의조[懿祖]가 용녀[龍女]를 아내로 맞았는데, 처음 개성[開城]의 산기슭에 이르러 은[銀]사발로 땅을 파니 그곳에서 물이 솟아올랐다. 이로 인해 그것을 우물로 삼았다고 한다. 기평도[岐平渡]가 있다. [중략]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
구도개성류후사[舊都開城留後司]
本高句麗 扶蘇岬, 新羅旣幷高句麗, 改爲松嶽郡 高麗 太祖二年己卯 正月, 定都于松嶽之陽, 陞爲開州 [중략]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부소갑[扶蘇岬]이다. 신라[新羅]가 고구려[高句麗]를 합친 후 송악군[松岳郡]으로 고쳤고, 고려[高麗] 태조[太祖] 2년 기묘[己卯] 정월[正月]에 도읍[都邑]을 송악[松岳] 남[南]쪽에 정하고 개주[開州]로 승격시켰다. [중략]
我太祖二年癸酉, 築內城, 周回二十里四十二步 三年甲戌, 遷都漢湯 四年乙亥, 改舊京爲 開城留後司, 置留後副留後斷事官經歷都事各一員, 罷開城縣令 俗號松都, 亦曰開京 厥後備置醫學敎諭檢律各一人 鎭山曰 松嶽 一名崧嶽
우리 태조[太祖] 2년 계유[癸酉]에 내성[內城]을 쌓았으니, 둘레가 20리[二十里] 42보[十二步]이다. 3년 갑술[甲戌]에 도읍[都邑]을 한양[漢陽]에 옮기고, 4년 을해[乙亥]에 옛 서울을 고쳐서 개성 유후사[開城留後司]로 하고 유후[留後], 부유후[副留後], 단사관[斷事官], 경력[經歷], 도사[都事]를 각각 1인씩 두고, 개성[開城] 현령[縣令]을 파하였다. 속칭 송도[松都] 또는 개경[開京]이라 한다. 그 후 의학 교유[醫學敎諭]와 검률[檢律] 각 1인씩을 갖추어 두었다. 진산[鎭山]은 송악[松岳]이다. 일명[一名] 숭악[崧嶽]이다.[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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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치연혁[建置沿革]
신라[新羅]시대 통일기에 송악군[松岳郡]은 원래 고구려[高句麗]의 부소압[扶蘇岬]이며, 개성군[開城郡]은 원래 고구려[高句麗]의 동비홀[冬比忽]이었다. 고구려[高句麗]에서는 군현[郡縣]을 홀[忽]이라 많이 불렀다. [중략]
고려[高麗] 태조[太祖] 2년에 철원[鐵原]에서 도읍[都邑]을 송악산[松嶽山] 남[南]쪽에 옮기고, 두 고을 지역에 걸쳐 개주[開州]로 삼고, 궁궐[宮闕]을 짓고 시전[市廛]을 설치하며, 방리[坊里]를 갈라서 오부[五部]로 하였다. 광종[光宗] 11년에 황도[皇都]로 고쳤으며, 성종[成宗] 14년에 개성부[開城府]로 고쳤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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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명[郡名]
부소압[扶蘇岬], 송악군[松嶽郡], 동비홀[冬比忽], 개주[開州], 개경[開京], 황도[皇都], 촉막군[蜀莫郡] 송사[宋史]에, 고려[高麗] 왕[王]은 개주[開州] 촉막군[蜀莫郡]에 거처하는데 개성부[開城府]라 한다. 큰 산을 의지하여 궁실[宮室]을 짓고 성[城]벽을 쌓았으며 그 산을 이름하여 신숭[神嵩]이라 한다. 하였다. [중략]
조선사[朝鮮史]의 역대[歷代] 역사서[歷史書]를 읽어가다 보면, 다른 나라의 기록[記錄]을 인용[引用]하는 대목이 많이 나오는데, 유구[悠久]하고 연원[淵源]이 깊은 역사[歷史]와, 기라성 같은 문인[文人]과 문장[文章]의 대가[大家]들이 저, 하늘의 별처럼 많았던 나라에서, 그 나라의 국사[國史]인 역사서[歷史書]에 이 무슨 참람[僭濫]한 일이란 말인가 ?
역사[歷史]에 대한 한 나라의 실정[實情]은, 자국민[自國民]과 자기나라 사람들이 구두[口頭]을 통해서라도 더 상세[詳細]히 알고 있는 것이며, 자세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무슨 사서[史書]가 민멸[泯滅]이 되었다. 난리[亂離]를 겪으면서 불타고 없어졌다. 하면서 변명[辨明]을 하는 기록[記錄]까지 실어 놓고 있는데, 물론 그러한 예가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사실[史實]이 아닐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역사서[歷史書]는, 그 본[本] 모습을 잃어버리고 혼란[混亂]스럽고 모순[矛盾]된 기록[記錄]만이 가득히 남아 있을 뿐이다. 조선사[朝鮮史]의 역대[歷代] 나라들은, 왕조[王朝]만 바뀌고 대[代]를 이어 왔으며, 외세[外勢]에 멸망[滅亡]이 된 것도 아닌데, 역대[歷代]의 역사서[歷史書]에, 그러한 기록[記錄]이 주류[主流]를 이루는 것은, 우리 역사서[歷史書]의 비극[悲劇]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서[歷史書]를 볼 때마다 항상 느끼는 것은,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하고 조작[造作]하는 자들의 기술[記述]은, 말의 뜻과 어휘[語彙]를 교묘[巧妙]하게 악의[惡意] 적으로 바꾸고, 본래의 모습을 변질[變質]시켜, 본질[本質]을 흐리게 하고, 중요[重要]한 내용은 삭제[削除] 시켜버리고, 다른 뜻으로 둔갑[遁甲]된 것을, 사실[史實]인 것처럼 기록[記錄]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에 대한 진위[眞僞]를 가리고 허[虛]와 실[實]을 논[論]하고 후세[後世]들에게 정도[正道]의 학문[學文]을 가르치는 것은, 학자[學者]들의 본분[本分]이며 사명[使命]이다. 그러나 이미, 학문[學文]의 근본[根本]과 초심[初心]을 버린 자들에게, 학문[學文]의 정도[正道]라는 것이 무슨 필요가 있을 것인가 ? 또한, 그렇게 학문[學文]을 익히고, 배운 사람들에게, 무엇을 기대[期待] 할수 있을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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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城郭]
나성[羅城] 바로 외성[外城]이다. 고려[高麗] 현종[顯宗] 때에 강감찬[姜邯贊]이 경도[京都]에 성[城] 쌓기를 청하니, 왕[王]이 이가도[李可道]를 명하여 흙을 쌓아 성]城]을 만들게 하였는데, 모두 21년 만에 공사가 끝났다. 성[城]의 주위가 2만[二萬] 9천[九千] 7백 보[七百步]요, 나각[羅閣]이 1만[一萬] 3천[三千] 칸이며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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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烽燧]
송악산[松嶽山] 국사당[國師堂] 봉수[烽燧] 부[府] 북[北]쪽 11리에 있다. 북[北]쪽으로 황해도[黃海道] 강음현[江陰縣] 성산[城山]에 응하고, 동[東]쪽으로 장단부[長湍府] 천수산[天壽山]에 응한다. 송악산[松嶽山] 성황당[城隍堂] 봉수[烽燧] 부[府] 북[北]쪽 11리에 있다. 남[南]쪽으로 풍덕군[豐德郡] 덕적산[德積山]에 응하고, 서[西]쪽으로 수압산[首鴨山]에 응한다. 수압산[首鴨山] 봉수[烽燧] 부[府] 서[西]쪽 34리에 있다. 동[東]쪽으로 성황당[城隍堂]에 응하고, 남[南]쪽으로 신당[神堂]에 응한다. 신당[神堂] 봉수[烽燧] 부[府] 남[南]쪽 36리에 있다. 북[北]쪽으로 수압산[首鴨山]에 응하고, 서[西]쪽으로 황해도[黃海道] 배천군[白川郡] 부모리[夫毛里]에 응한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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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고[唐皐]의 시[詩]에, 산을 의지한 누대[樓臺]와 전각[殿閣]이 하늘에 솟아 높은데, 풀에 묻히고 연기에 잠겨 기와와 조각돌이 많구나. 5백년[五百年] 이래로 전란[戰亂] 겪은 땅에 칼날을 씻노라고 은하수의 물을 당겨 왔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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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李奎報]의 기문[記文]에, 문[門]이 천[千]이요, 호[戶]가 만[萬]인데 비늘처럼 엇물리고 빗처럼 나란하며, 둘러 싼 형세[形勢]는 용[龍]이 일어나고 봉[鳳]이 춤추는 것 같다. 하였다. [중략]
목은집[牧隱集]
목은시고[牧隱詩藁] 제30권[第三十卷]
송산[松山]
운무[雲霧]가 자욱하여 어두운 새벽하늘[雲霧冥冥暗曉天], 우구를 손에 들고 산꼭대기 올랐어라[携持雨具上山顚], 장풍도 내 마음 울적한 걸 아시는 듯[長風似識吾心悶], 짙은 구름 걷어 내고 일월을 보여 주네[吹散濃陰日月懸], 일만[一萬] 가호 큰 도로는 곧기가 화살 같고[萬戶大街如矢直], 사방의 낮은 산들 병풍처럼 둘렀어라[四方低嶂似屛聯][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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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山川]
송악[松嶽], 부[府] 북[北]쪽 5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처음 이름은 부소[扶蘇]이고 또 곡령[鵠嶺]이라 칭[稱]하였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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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李奎報]의 시[詩]에, 신령[神靈]한 사당 주악군[主岳君]을 뵈려고, 때로 절정[絶頂]에 오르니 바라보기에 의젓하네. 성중[城中]의 1만[一萬 집들은 벌[蜂]들이 모인 것 같고, 길 가는 1천[一千] 사람들 개미가 달리는 것 같구나. 무성한 상서[祥瑞]로운 구름은 임금 궁궐[宮闕]을 둘렀고, 푸릇푸릇한 왕기[王氣]는 하늘 문을 끼고 있네. 곡산[鵠山]의 형승[形勝]이 용[龍]이 서린 듯하니, 여기서부터 황도[皇都]의 줄기와 뿌리가 굳어졌도다. 하였다. [중략]
목은집[牧隱集]
목은시고[牧隱詩藁] 제4권[第四卷]
도성[都城]에 들어가다
하늘빛 태양빛이 함께 길고 평온하니[天光日色共舒長], 십만[十萬]의 민가에 기쁜 기색이 넘쳐흐르네[十萬家中喜氣揚], 숙배하고 돌아오매 마음 다시 유쾌함은[肅拜歸來心更快], 백발 노모가 고당[高堂]에 계시기 때문이라오[白頭老母在高堂]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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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산[天磨山]
송악산[松嶽山] 북[北]쪽에 있는데, 여러 봉우리가 높이 하늘에 솟아 멀리서 바라보면 푸른 기운이 엉겼기 때문에 천마[天磨]라 이른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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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동[大興洞]
천마산[天磨山]과 성거산[聖居山] 두 산 사이에 있다. 박연[朴淵]에서부터 올라가면 산은 점점 높고 물은 더욱 맑으며 암석[巖石]이 매우 기이하고 높은데, 관음굴[觀音窟] 앞에 이르러서는 물이 깊어 못을 이루고 물고기들이 떠다니며 놀고 돌이 물 가운데서 나왔으니, 귀담[龜潭]이라 한다. [중략]
역사[歷史]의 화란[禍亂]을 겪으며, 살아남아 짧고 희미[稀微]하게 전[傳]하는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은,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에 있어서, 한 줄기 서광[瑞光]으로 다가오고 있다. .......... 일만[一萬] 가호의 큰 도로는 곧기가 화살 같고[萬戶大街如矢直], 사방의 낮은 산들은 병풍처럼 둘렀어라[四方低嶂似屛聯]
문[門]이 천[千]이요, 호[戶]가 만[萬]인데, 비늘처럼 엇물리고 빗처럼 나란하며, ........... 고려[高麗]의 개경[開京]은, 반도[半島]에서는 상상조차 할수 없는 크고 웅장[雄壯]한 규모의, 대[大] 성곽[城郭]이 있는 도읍지[都邑地]였다........... 하늘빛 태양빛이 함께 길고 평온하니[天光日色共舒長], 십만[十萬]의 민가[民家]에 기쁜 기색이 넘쳐흐르네[十萬家中喜氣揚]
성중[城中]의 1만[一萬 집들은 벌[蜂]들이 모인 것 같고, 길 가는 1천[一千] 사람들 개미가 달리는 것 같구나.............. 곡산[鵠山]의 형승[形勝]이 용[龍]이 서린 듯하니, 여기서부터 황도[皇都]의 줄기와 뿌리가 굳어졌도다............... 오백년[五百年] 왕업[王業]의 중심지 였던 고려[高麗]의 송악[松嶽]은, 천하[天下]의 명산[名山]이 휘감아 돌고, 태산[太山]의 준령[峻嶺]이 겹겹이 외워 싸고 있는 천하[天下]의 요지[要地]에 자리 잡고 있다. 고려[高麗]의 도성[都城]은 황궁[皇宮]이며, 황도[皇都]이지, 일개 왕[王]이 거처하는 곳이 아니다.
산을 의지한 누대[樓臺]와 전각[殿閣]이 하늘에 솟아 높은데, 풀에 묻히고 연기에 잠겨 기와와 조각돌이 많구나............ 우리가 보고 있는 현재[現在]의 고려사[高麗史]는, 중요[重要]한 기록[記錄]들은 모두 삭제[削除]되고, 그나마 남은 기록[記錄]들도, 일부는 본질[本質]이 흐려지고 변질[變質]된 사서[史書]들이다.
누가 고려사[高麗史]를 훼손하고, 원본[原本]을 가장[假裝]하여 이렇게 만들어 놓았을까 ? 우리가 우리의 역사[歷史]의 본[本] 모습을 찾아가는데 있어서, 국사[國史]인 역사서[歷史書]가 중심[中心]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국사[國史]를 보면서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을 보려고 한다면, 그것은 거의 불가능[不可能] 하게 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예성강[禮成江]
부[府] 서[西]쪽 30리에 있다. 황해도[黃海道] 강음현[江陰縣] 조읍포[助邑浦]의 하류[下流]가 부[府]의 서[西]쪽에 이르러 이포[梨浦]가 되고, 또 전포[錢浦]가 되며, 또 벽란도[碧瀾渡]가 되고, 또 동[東]쪽으로 예성강[禮成江]이 되어 남[南]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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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란도[碧瀾渡]
부[府] 서[西]쪽 36리에 있다. 송사[宋史]에, 급수문[急水門]에서 또 3일 만에 언덕에 닿으니, 벽란정[碧瀾亭]이라는 객관이 있으며, 여기서부터 육지에 올라 험난한 40여 리를 가면 바로 국도[國都]이다. 라고 한 것이 이곳이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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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근[權近]의 기문[記文]에, 송도[松都] 서북쪽 여러 골짜기의 물이 모여 긴 강이 되어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그 나루터를 벽란[碧瀾]이라 한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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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지[柬池] 부[府] 북[北]쪽 5리에 있다. 연지[蓮池], 수창궁[壽昌宮] 서[西]쪽에 있다. [중략]
예성강[禮成江]과 벽란도[碧瀾渡], 벽란정[碧瀾亭], 급수문[急水門]등은, 고려[高麗]의 개경[開京]과 밀접한 관계을 가지고 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도 송[宋]나라의 사신[使臣]들이, 고려[高麗]의 송악[松嶽]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지역[地域]이며 이름들이다.
고려사[高麗史]와 고려도경[高麗圖經]을 백년[百年]을 본다 한들, 고려[高麗]의 송악[松嶽]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
고려도경[高麗圖經]의 기록[記錄]도, 고려[高麗]가 반도[半島]에 있어야 그 내용을 충족[充足] 할수 있게 되는데, 과연 그러한 것이 역사[歷史]의 사실[史實]이 될 수 있을 것인가 ?
소위, 중국[中國]의 역대[歷代] 왕조[王朝]들이라고 하는 나라들의 강역[疆域]과 지명[地名]들이, 모두 조선사[朝鮮史] 역사[歷史]의 강역[疆域]안에 포함되고 겹쳐지고 있으며, 서로 양국[兩國]의 강역[疆域]들이 모순[矛盾]으로 가득 차 있다. 역사서[歷史書]에서는, 중국[中國]의 역대[歷代] 왕조[王朝]들은, 모두 황제[皇帝]의 국가[國家]였으며, 모두 황제[皇帝]로 잠칭[僭稱]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사[朝鮮史]의 역대[歷代] 왕조[王朝]들은, 모두 반도[半島]를 기반으로, 대대로 조공[朝貢]을 바치는 속국[屬國]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역사서[歷史書]의 많은 내용들이 또한, 그렇게 기록[記錄]되어 있다. 그러나 역사[歷史]의 참화[慘禍]속에서 살아남은 많은 기록[記錄]들은, 우리의 역사[歷史]를 매우 혼란[混亂]스럽게 하고 있는데, 우리는, 우리 역사[歷史]의 이러한 문제[問題]들을 반드시 짚고, 그 시말[始末]을 밝힐 의무[義務]와, 사명[使命]이 있는 것이다.
세상[世上]이 다 아는 바와 같이, 50년만에 망[亡]한 나라가 황제[皇帝]을 잠칭[僭稱]하고, 천년[千年]의 대국[大國]인 고구려[高句麗]의 왕[王]에게, 작위[爵位]를 내리고, 누누이 벼슬을 내리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와 유사[類似]한 기록[記錄]들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한데, 이러한 예는 고대[古代]로부터 근세[近世] 조선[朝鮮]의 말엽[末葉]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역사서[歷史書]를 근거[根據]로 하여 식민사관[植民史觀]인 반도사관[半島史觀]은, 우리의 역사[歷史]에 대하여 사서[史書]의 기록[記錄]을 논거[論據]로 내세우는데,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矛盾]과, 반도[半島]의 한국[韓國]과는 전혀 맞지 않는 이질적인 기록[記錄]들과, 혼란[混亂]스러운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이 없다.
반도사관[半島史觀]이 맞는다고 주장[主張]을 한다면, 그에 앞서 먼저, 우리의 역사서[歷史書]가, 왜 모순[矛盾]되고 앞뒤가 맞지 않는 혼란[混亂]스러운 누더기 사서[史書]가 되어 있는지, 그에 맞는 타당한 설명을 먼저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역사[歷史]의 의문[疑問]점에 대한 명쾌[明快]한 설명을 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현재[現在]의 역사서[歷史書]가 모두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을 담고 있는 것일까 ? 우리의 역사[歷史]인 조선사[朝鮮史]에 나타나는 번득이는 기록[記錄]들은, 변질[變質]된 역사서[歷史書]와는 다른, 정 반대의 기록[記錄]들을 남기고 있고, 그러한 기록[記錄]들은 너무나 생생하게 역사[歷史]의 진실[眞實]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왜, 무엇 때문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 무엇이 진실[眞實]이고, 무엇이 위선[僞善]의 탈을 쓰고 있는 거짓인가 ?
우리의 역사서[歷史書]는, 주지[主旨]하는 바와 같이, 거짓과 진실[眞實]의 양면[兩面]을 담고 있으며, 역사[歷史]의 진실[眞實]과 역사[歷史]의 위선[僞善]과 거짓사이에서, 대륙사[大陸史]와 조선사[朝鮮史]의 둘 중에 하나는, 허구[虛構]의 역사[歷史]라는 사실[事實]이다.
어느쪽이 가공[架空]된 허구[虛構]의 역사[歷史]이며,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된 역사[歷史]가 되는 것인가 ?
목은집[牧隱集]
목은시고[牧隱詩藁] 제6권[第六卷]
팔선궁[八仙宮]
김관의[金寬毅] 편년통록[編年通錄]에 송악산[松嶽山]을 일러 팔진선[八眞仙]이, 머물던 곳이라고 하였다.
돌길을 빙빙 돌아 산꼭대기에 오르니[石路縈回到上頭], 팔선[八仙]의 궁관[宮觀]이 신주[神州]를 굽어보고 있네[八仙宮觀俯神州], 한 번 온 것은 처자의 원을 들어준 건데[一來只塞妻孥願], 두 번 절하니 사직[社稷]의 걱정을 일으키는구나[再拜翻興社稷憂] [중략]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이색[李穡]의 시[詩]에, “백이산하[百二山河]는 곡봉[鵠峯]을 껴안았는데, 견여[肩輿] 타고 곧장 팔선궁[八仙宮]으로 올라가네. 남[南]쪽 강 밝기도 한데 서[西]쪽 강은 어두워 지척간도 흐리고 갬이 스스로 같지 않구나.” 하였다. [중략]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곡령춘청[鵠嶺春晴]
이제현[李齊賢]의 시[詩]에, 여덟 신선[神仙]의 궁전[宮殿]에 아름다운 취미봉[翠微이 있어, 아득한 구름과 안개가 몇 만 겹인가. 하룻밤에 긴 바람이 비를 불고 지나가서 바다 용[龍]이 옥부용[玉芙蓉]을 받들어 내었네. 하였다. [중략]
익재난고[益齋亂藁] 제3권[第三卷]
억송도팔영[憶松都八詠]
곡령[鵠嶺]
팔선궁[八仙宮]은 푸른 산 중턱에 있었는데[八仙宮住翠微峯], 자욱한 안개 몇 만 겹이었던고[縹緲煙霞幾萬重], 하룻밤에 긴 바람이 비를 불고 지나가서[一夜長風吹雨過], 바다 용[龍]이 옥부용[玉芙蓉]을 떠받친 듯하네[海龍擎出玉芙蓉] [중략]
목은집[牧隱集]
목은시고[牧隱詩藁] 제5권[第五卷]백악[白嶽]
곡령[鵠嶺]은 똑바르고 조그마하여[鵠嶺仍端小], 모두들 천연[天錄]의 명산이라 말하네[共言天錄眞], 새 집은 노력과 비용이 서로 같고[新居勞費等], 금위[禁衛]는 왕래하는 길이 균평하구나[禁衛往來均][중략]
목은집[牧隱集]
목은시고[牧隱詩藁] 제16권[第十六卷]
송악산(松岳山)
아침 일찍 송산[松山]에 올라 팔선[八仙]을 제사하고[夙駕松山祀八仙], 지성[至誠]으로 기도한 게 어찌 공연한 일이랴[至誠祈禱豈徒然], 태후[大后]를 부호하여 무궁한 복[福]을 받게 하고[扶持大后膺千福], 명군[明君]을 잘 인도해 만년[萬年]을 누리게 함일세[啓迪明君享萬年][중략]
목은집[牧隱集]
목은시고[牧隱詩藁] 제26권[第二十六卷]
송산[松山]
소년 시절엔 걸어서 산을 올라가[少年步上山], 해뜨는 동[東]녘을 굽어보았었는데[俯視日生東], 노년에는 말을 타고 산을 올라서[老年騎上山], 중천[中天]에 오른 해를 쳐다볼 뿐이네[仰觀日在中], 산의 높음은 고금[古今]에 걸쳤거니와[山高亘今古], 우뚝한 것은 또한 팔선궁[八仙宮]이로다[巍巍八仙宮][중략]
한국[韓國]의 개성[開城]은 서울에서 지척 간에 있다. 지금은 비록 오고 갈수 없는 동토[凍土]의 땅이지만, 개성[開城]의 중요[重要]한 유적지[遺跡地]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져 있다. 송산[松山]에 있다는 팔선궁[八仙宮]에 대해서도 많은 기록[記錄]들이 전[傳]하여 내려오고 있다. 곡령[鵠嶺]의 인근[隣近]에 있는 산에 팔선궁[八仙宮]이 있었다고 전[傳]하고 있는데,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계림황엽[鷄林黃葉] 곡령청송[鵠嶺靑松]이라는, 고려[高麗]의 건국[建國]을 예언한 유명한 일화[逸話]와, 팔선궁[八仙宮]이 이곳에 있었다는 기록[記錄]은, 예사롭지가 않다.
팔선궁[八仙宮]에 올라가 고려[高麗]의 안위[安危]와, 왕실[王室]에 대한 만세[晩歲]의, 무사[無事]안녕[安寧]을 빌었다면, 팔선궁[八仙宮]이 있는 산은 신령[神靈]스럽고 예사롭지 않은 곳임이 틀림없는데, 이러한 유명한 산과 팔선궁[八仙宮]이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음은 그만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또한 팔선궁[八仙宮]에서 고려[高麗]의 개경[開京]을 내려다보았다고 하였으니, 왕경[王京]의 인근[隣近]에 있는 산에 팔선궁[八仙宮]이 있었을 것이다.
돌길을 빙빙 돌아 산꼭대기에 오르니[石路縈回到上頭], 팔선[八仙]의 궁관[宮觀]이 신주[神州]를 굽어보고 있네[八仙宮觀俯神州],.......... 고려[高麗]의 왕경[王京]을 신주[神州]라고 말하고 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은 고려[高麗]의 대신[大臣]이며 천하[天下]의 대[大] 문호[文豪]로 이름을 날렸고,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길재[吉再]와 함께, 고려[高麗]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분이다. 고려사[高麗史]에서는 개경[開京]을 황도[皇都]라고 했고, 고려[高麗]와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조선[朝鮮]이 교체[交替]되는 시기임에도, 목은[牧隱]은 개경[開京]을 신주[神州]라고 부르고 있다.
신주[神州]는 천자[天子]가 있는 도읍지[都邑地]를 말하는 것이니, 고려[高麗]의 역대[歷代] 왕[王]들은 천자[天子]였음을,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고려[高麗]말에 다시금 확인[確認] 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장엄[莊嚴]하고 위대[偉大]한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은, 흐르는 물과 같은 것이다. 막으면 넘치고, 넘치면 제방[堤防]이 터져, 그 물은 천하[天下]를 쓸고 지나갈 것이다.
양촌집[陽村集]
제8권[第八卷]
영통사[靈通寺]
오관산[五冠山] 밑 오랜 총림에[五冠山下古叢林], 누대[樓臺]에 바람 가득하고 녹음이 졌다[風滿樓臺綠樹陰], 속진 없는 지경이 언제나 고요하고 [境絶塵喧常闃寂], 비온 뒤 시냇물이 더욱 깊구나[溪因雨過更澄深], 서[西]쪽 산의 찬 기운은 조석으로 깔리었고[西峯爽氣連朝暮], 북령[北嶺]의 한가한 구름 고금[古今]에 뻗었네[北嶺閑雲亘古今], 슬프다 지난 일 물을 곳 없고[惆悵無由問前事], 흙다리만 그대로 남아 있구나[土橋依舊未消沈] [중략]
양촌집[陽村集]
제12권[第十二卷]
연복사탑 중창기[演福寺塔重創記] 봉교찬[奉敎撰]
吾東方自新羅 氏之季 奉事尤謹 城中僧廬多於民屋 其殿宇之宏 壯峻特者 至于今尙存 一時崇奉之至 可想見矣 高麗王氏統合之初 卛用無替 以資密佑 迺於中外 多 置寺社 所謂裨補是已 [중략]
우리 동방[東方]에는 신라[新羅] 말기부터 받들어 섬김을 더욱 근실히 하여, 성안에 승려[僧廬]가 민가보다도 많았고, 그중 전각[殿閣]이 굉장히 높고 특별한 것은 지금까지도 오히려 남아 있으니, 당시 존숭[尊崇]하여 받듦이 지극[至極]하였음을 상상하여 알 수 있다. 고려[高麗] 왕씨[王氏]가 통합한 초기에 변함없이 그대로 시행하여 신비[神秘]한 도움이 있기를 바라 이에 중외[中外]에 사사[寺社]를 많이 설립하였으니, 이른바 비보[裨補]라는 것이 이것이다. [중략]
演福寺實據城中闤闠之側 本號唐寺 方言唐與大相似 亦謂大寺 爲屋最鉅 至 千餘楹 內鑿三池九井 其南又起五層之塔 以應風水 [중략]
연복사[演福寺]는 실로 도성[都城] 안 시가 곁에 자리잡고 있는데, 본래의 이름은 당사[唐寺]이다. 방언[方言]에 당[唐]과 대[大]는 서로 비슷하므로, 또한 대사[大寺]라고도 한다. 집이 가장 커 천[千]여 칸이나 되는데, 안에 못[池] 세 군데와 우물 아홉 군데를 팠으며, 그 남[南]쪽에 또한 5층탑[五層塔]을 세워 풍수설[風水說]에 맞추었다. [중략]
辛未二月始事 掘舊址塡木石 以固厥基 迄冬迺 竪 縱橫六楹 克壯且廣 累至五層 覆以扁石 將訖厥功 憲臣有言而中輟 惟時我主上殿下位緫百揆 請 畢營構 未幾 恭讓以失道自遜于外 而大命集于殿下 [중략]
신미[辛未]년 2월에 일을 시작하여 옛터를 파고서 나무와 돌로 메워 그 기반[基盤]을 다지고, 겨울이 되기까지 가로 세로 6칸을 세우니, 웅장하고도 넓으며, 5층을 쌓고서 판판한 돌로 덮어, 장차 그 공정[工程]이 끝나게 되었는데, 헌신[憲臣]이 말을 하여 중지되었다. 이때 우리 주상[主上] 전하[殿下]께서 백관[百官]을 통솔하는 자리에 계시면서 공사를 끝낼 것을 청하였는데, 오래지 않아 공양왕[恭讓王]이 무도하여 스스로 손위[遜位]하고 대명[大命]이 우리 전하[殿下]께 모이었다. [중략]
於是董工益勤 功乃告成 實壬申冬十有二月也 癸酉之春。塗墍丹雘 翬飛雲表 鳥翔天際 金碧炫燿 暉映半空 上安佛舍利 中庋大藏 下置毗 盧肖象 所以資福邦家 永利萬世也 夏四月 設文殊 會以落厥成 上命臣近記其始末 [중략]
이에 공장[工匠] 감독을 더욱 부지런히 하여 공사가 완성되니, 실로 임신[壬申]년 겨울 12월이었다. 계유[癸酉]년 봄에 단청[丹靑]을 하니, 구름 밖에 꿩이 날듯, 하늘가에 새가 날듯, 금벽[金碧]이 휘황하여 반공중에 비치었다. 위에는 부처의 사리(舍利)를 봉안하고, 중간에는 대장경[大藏經)]을 간직하고, 아래에는 비로자나불상[毘盧遮那佛像]을 안치하니, 국가[國家]에 복[福]을 내리어 만세[晩歲]토록 영원[永遠]히 이로울 것이다. 여름 4월에 문수 법회[文殊法會]를 열어 낙성[落成]을 하고, 주상[主上]께서 신[臣] 권근[權近]에게 그 시말[始末]을 기록[記錄]하도록 명[命]하셨다. [중략]
臣近拜手稽首而献詞曰
신 권근(權近)은 두손 모아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축사(祝詞)를 올립니다. 이어 헌사[献詞]을 올리며 [중략]
불설[佛說]이 서역[西域]에서 생겨났는데[浮屠之說興西域], 온 세상에 퍼지자 화역[華譯]되었네[流傳四海因華譯], 보응[報應] 설명 얼마나 해박하든지[其言報應甚宏博], 누구나 부지런히 복[福] 빌게 되는구나[上下靡不勤祈福], 세워 놓은 탑묘[塔廟]들 어찌 그리 높은가[塔廟之設何巍嶪], 온 천지[天地] 사방에 가득하나니[彌天之下遍六合][중략]
신라[新羅] 때 가장 지성[至誠]으로 모셨고[新羅奉事最誠篤], 왕씨[王氏]도 존숭[尊崇]하고 변함없이 그대로 지켰네[王氏遵守更無懌], 연복사[演福寺]가 여염 곁에 있는데[演福寺在闤闠側], 그 안에 못이 셋 우물 아홉이 있도다.[中有三池九井鑿] [중략]
오층 누각[樓閣]의 탑[塔] 다시 세워 공사 마치되[五層復建畢工役], 농민[農民] 힘 괴롭히지 않으시었네[經構不擾農民力], 우뚝하게 높이 솟아 송악[崧嶽]과 나란한데[崢嶸突兀配崧嶽], 단청은 운하[雲霞]을 헤치며 휘황하게 빛나도다.[輝映雲霞燿丹碧][중략]
위에는 사리 모셔 영험[靈驗]이 빛나고[上安佛骨厥靈赫], 중간엔 대장경[大藏經] 그득 모셨으며[中庋大藏具萬軸], 아래엔 장엄[莊嚴]하게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안치하여[下置毗盧備嚴飾], 공덕[功德]이 훌륭하니 복록이 많으리다.[功德最勝甚饒益][중략]
신에게 사[詞]를 지어 돌에 새기라 하시나[命臣作詞刻諸石], 신의 사[詞] 졸렬해서 읽을 수 없나이다.[臣詞蕪拙不可讀], 다만 이 탑[塔]이 무너지지 않아[但願此塔無顚覆], 나라 따라 한없이 굳게 튼튼하기 바라나이다.[與國鞏固垂罔極][중략]
중국[中國]에 있는 대찰[大刹]들은, 우리나라의 서울에 있는 궁성[宮城]보다도 더 크고 웅장[雄壯]하다. 그리고 이러한 대찰[大刹]들이 중국[中國] 전역에 수 없이 많고, 고찰[古刹]들이 즐비한데, 이러한 절들은 모두, 신라[新羅]와 백제[百濟], 고구려[高句麗], 고려[高麗]시대에 건축[建築] 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중국[中國]에 있는 대찰[大刹]들이, 왕성[王城]에 버금가는 것도, 불교[佛敎]를 숭상[崇尙]하고 높인 조선사[朝鮮史]의 역대[歷代] 왕조[王朝]들의 지원[支援]에 힘입은 것임을 아는 사람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
고려[高麗]의 영통사[靈通寺]를 한국[韓國]의 불교계[佛敎界]에서 지원[支援]하여, 개성[開城]에 복원[復元] 시켰는데, 고려[高麗]의 영통사[靈通寺]가 있던 곳은, 반도[半島]의 개성[開城]이 아니다. 지금의 개성[開城]은, 반도[半島]에 고려[高麗]의 역사[歷史]를 옮겨다 놓은 곳일 뿐이다. 개성[開城]은, 우리의 역사[歷史]에 있어서 유서[由緖] 깊은 지역[地域]임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후[後]에, 이에 대해서 자세히 밝힐 날이 있을 것이다.
양촌집[陽村集]
제13권[第十三卷]
오관산 성등암 중창기[五冠山聖燈庵重創記]
建文元年 己卯冬十有一月辛未 都承旨臣文和以 王命召簽書中樞院事臣近傳旨若曰[중략]
건문원년[建文元年] 기묘[己卯]년, 겨울 11월 신미일[辛未日]에 도승지[都承旨] 문화[文和]가, 왕명[王命]에 따라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 신[臣] 권근[權近]을 불러 전지[傳旨]하기를 [중략]
五冠山聖燈庵 盖自前朝太祖王氏始置 予在潛邸 圖新厥屋 迨玆有成 施以土田奴婢 爾宜文之 垂示永久 臣近俯 伏受命而退 [중략]
오관산[五冠山] 성등암[聖燈庵]은, 대개 전조[前朝] 태조[太祖] 왕씨[王氏]가 처음 설치한 것이다. 내가 잠저[潛邸] 때에 이 집을 새로 짓기를 계획했었는데, 이제야 낙성하고 전토[田土]와 노비[奴婢]를 시주하였으니, 네가 기문[記文]을 지어 영구히 전[傳]하도록 하라. 하시므로, 신[臣] 권근[權近]이 엎드려 명[命]을 받들고 나왔다. [중략]
謹稽庵之舊籍 五冠山之西峯。有石屹 立 銛利如戟 人謂之戟岩 其山脊迤邐而西折而南 接于松嶽 王氏太祖統一三韓 肇建都于松嶽之陽 [중략]
삼가 암자[庵子]의 옛 문서를 고찰하건대, 오관산[五冠山] 서[西]쪽 봉우리에 날카로운 창같이 우뚝하게 선 바위가 있는데 사람들이 창바위[戟巖]라 한다. 그 산등성이는 서[西]쪽으로 뻗어가다가 남[南]쪽으로 꺾여 송악산[松嶽山]에 닿았다.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삼한[三韓]을 통일하고 송악산[松嶽山] 남[南]쪽에 새 도읍[都邑]을 세울 때 [중략]
術士進言戟岩突起 乃當地脉第二順龍肺肝衝天 而立 是爲三災發作之所 若欲禳之 宜竪石幢 於是 就其陽崖巨石之上 樹石柱四方列如屋 置長明燈 以鎭戟岩之災 且以明君相繼 忠臣不絶爲願 [중략]
풍수[術士]가 말하기를, 우뚝 솟은 창바위는 바로 지맥[地脈]이 둘째 번 순룡[順龍]의 폐간[肺肝] 자리에 해당하는데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으니, 이는 삼재[三災]가 일어날 곳입니다. 만약 이 삼재[三災]를 제거하려면 마땅히 석당[石幢]을 세워야 합니다. 고 하자, 이에 그 양지쪽 벼랑의 큰 바위 위에다가 돌기둥 네 개를 세워 집 모양처럼 하고 장명등[長明燈]을 설치하여, 창바위의 재[災]를 누르는 한편 밝은 명군[明君]이 이어서 나고, 충신[忠臣]이 끊임없기를 발원[發願]하였다. [중략]
故 王氏世世令大府寺供其燈油 致和戊辰 侍中尹碩相 忠肅王 至順庚午 侍中韓渥相忠惠王 皆與兩府諸 公添其油錢 列名于板 [중략]
그리하여 왕씨[王氏] 대대로 대부시[大府寺]로 하여금 그 등유[燈油]를 공급하도록 했다. 치화[致和] 무진년[戊辰년]에 시중[侍中] 윤석[尹碩]이 충숙왕[忠肅王]을 도울 때와, 지순[至順] 경오년[庚午년]에 시중[侍中] 한악[韓渥]이 충혜왕[忠惠王]을 도울 때, 모두 양부[兩府]의 문하부[門下府], 밀직부[密直府]의 제공(諸公)들과 함께 그 기름값을 보탠 것이 시주판[施主板]에 열명[列名]되어 있고 [중략]
洪武癸亥 侍中曺敏修等又 與兩府出米若布 以續其用 韓山李穡爲文以記 簽 書柳珣等又爲作屋 是聖燈之爲世世所重盖如此 [중략]
홍무[洪武] 계해년[癸亥年]에 시중[侍中] 조민수[曺敏修] 등이 또한 양부[兩府]와 함께, 쌀과 베[布]를 내어 그 비용을 댔는데, 한산[韓山] 이색[李穡]이 글을 지어 기[記]를 만들었으며, 첨서[簽書] 유순[柳珣]등이 또한 성등[聖燈]을 위하여 집을 세웠으니, 이 성등[聖燈]을 대대로 소중[所重]하게 여겼던 것이 대개 이러했다. [중략]
今我主上殿下以元良之德 勇智之資 惟忠惟孝 佐 太上王 弘濟多艱 誕膺天命 式啓朝鮮億萬年之業 嘗在潛邸 以賢與長 謳歌悉歸 益崇謙德 率履不越 惟有利於邦國家 是圖是力 [중략]
지금 우리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서 원량[元良]의 덕[德]과 용지[勇知]의 자품으로 충성스럽고 효성[孝誠]스러워서 태상왕[太上王]을 도와 널리 다난한 일들을 처리하시어, 거룩하게 천명[天命]을 받아 조선[朝鮮] 억만[億萬]년의 왕업[王業]을 열어 놓으셨다. 일찍이 잠저[潛邸]에 계실 적에 어질고 재주가 있으므로, 민심[民心]이 모두 돌아왔었지만, 더욱 겸손[謙遜]한 덕[德]을 숭상[崇尙]하여 행동에 법도[法度]를 넘지 않으셨으며, 오직 국가[國家]에 이로운 일만을 도모하고 힘쓰셨다. [중략]
迺於戊寅孟春 始新玆 庵 及秋八月 遂承太上王命 傳卽寶位 明良相遇 更 新政化 庶績咸熙 四方無虞 聖燈之效 盖不誣矣 [중략]
바로 무인년[戊寅年] 이른 봄에 이 암자[庵子]를 새로 짓기 시작했는데, 가을 8월이 되어 드디어 태상왕[太上王]의 명[命]을 받들어 왕위[寶位]에 나아감으로써,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만나게 되어, 정사[政事]와 교화[敎化]가 다시 새롭게 되고 모든 업적[業績]이 다 밝아져 사방[四方]이 근심이 없게 되었으니, 성등[聖燈]의 효험[效驗]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중략]
其 所重營佛宇三楹 掛以新畫釋迦三尊 十六羅漢 十 六弟子 五百聖衆都會之像 東付翼室三楹 所以寓 僧也 西付三楹 所以爲㸑也 納田百結奴婢十九口 所以續聖燈而求食輪也 [중략]
그중 새로 지은 불당[佛堂] 3칸에 새로 그린 석가 삼존[釋迦三尊], 십육 나한[十六羅漢]십대 제자[十大弟子]와 오백 성중[五百聖衆]이 모여드는 그림을 걸었고, 동[東]쪽에 행랑 3칸을 붙여 지었으니 승[僧]들이 거처할 방이며, 서[西]편에 딸린 3칸은 부엌으로 쓸 곳이며, 전지[田地] 백결[百結]과 노비[奴婢] 19구[十九口]을 주신 것은 성등[聖燈]을 이어가며 식륜[食輪]을 보살피도록 한 것이다. [중략]
嗚呼 自王氏始置此燈 子孫相傳 歷五百年而遇惟新之朝 凡所以光賁法事 益圓且備 則其所以利益邦國者 益大且久 聖壽之 長 國祚之永 當與此山此燈同垂罔極而不拔矣 臣 近拜手稽首以言 是月己亥 [중략]
아, 왕씨[王氏]가 비로소 이 성등[聖燈]을 설치[設置]함으로부터 자손[子孫]들이 서로 전[傳]하여 5백 년[五百年]을 지나 유신[維新]의 조정[朝廷]을 만났으니, 무릇 법사[法事]를 빛나게 하는 일이 더욱 원만하고 구비하게 될 것이요, 그렇다면 그 국가[國家]에 이익[利益]되게 함이 더욱 원대[遠大]하고도 장구[長久]하여, 성수[聖壽]의 장원[長遠]함과 국운[國運]의 영원[永遠]함이, 마땅히 이 산[山]과, 이 성등[聖燈]과 함께 한없이 전[傳]해지고, 끄떡없을 것입니다. 신[臣] 권근[權近]은 공손[恭遜]히 절하며 아룁니다. 이달 기해[己亥]일 [중략]
오관산[五冠山] 성등암[聖燈庵]은, 대개 전조[前朝] 태조[太祖] 왕씨[王氏]가 처음 설치한 것이다............. 고려[高麗]의 삼재[三災]의 화를 예방하기 위하여 송악[松嶽]에 세운 석당[石幢],............ 훗날 이곳에 조선조[朝鮮朝]에서 암자[庵子]를 세우고 성등암[聖燈庵]이라는 이름으로 불려 지게 된 송악산[松嶽山]의 성등암[聖燈庵],............ 고려[高麗] 왕조[王朝]의 오백년[五百年] 역사[歷史]에 그 등불이 꺼지지 않은 장명등[長明燈],.............. 고려[高麗]를 이어 조선[朝鮮]의 왕조[王朝]도 이를 이어받아 불을 밝힌 성등암[聖燈庵],............. 이 장명등[長明燈]과 성등암[聖燈庵]이 있는 곳은 어디인가 ?
곡령[鵠嶺]에 있는 팔선궁[八仙宮]의 유지[遺址]는, 지금도 그 자취가 선명[鮮明]하게 남아 있다. 지금도 시[詩]의 내용대로 돌길을 빙빙돌아 올라가고 있다. 이 산에는 선인[仙人]의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으며, 팔선궁[八仙宮]이 있던 유지[遺址]도 그대로 들어나 있다. 지금은 이름이 조금 바뀌어 있지만, 팔선궁[八仙宮]의 이름에 걸맞게 온통 선인[仙人]의 흔적[痕迹]만이 돌과 산[山]에 가득하다.
고려[高麗]의 삼재[三災]를 예방하기 위하여 송악[松嶽]에 세운 석당[石幢]과 장명등[長明燈]은, 지금도 그 자리에서 고려[高麗]의 옛일을 회고[懷古] 하고 있다. 장명등[長明燈]은, 기록[記錄]에 있는 것과 같다. 일부는 기단[基壇]만 남아 있지만 원형[原形]이 그대로 보전[保全]되고 있어서, 누구나 알아 볼수 있다. 석당[石幢]은 특이한 구조[構造]를 하고 있는데, 암석[巖石]으로 돤 산[山] 정상[頂上]에 설치[設置]되어 있다.
정상[頂上]에 설치[設置]한 석당[石幢]은, 3층[層]으로 된 기단[基壇]위에 다시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5층[層]으로 기단[基壇]을 만들고, 맨 위에는, 돌을 다듬어 둥근 함지박과 비슷한 그릇을 하늘을 향하여 올려놓았다. 이 산[山]의 사방[四方]에는 석등[石燈]과 석탑[石塔]을 세웠는데, 기단[基壇]을 통해서 확인[確認] 할수 있다. 장명등[長明燈]은 이 산[山] 정상[頂上]의 아래에 있는데, 불을 밝힌 흔적[痕迹]이 지금도 역력히 남아 있다. 일부는 파손[破損]되어 있으나 심한 편은 아니다.
그리고 이 석당[石幢]이 있는 위치[位置]가,............ 지맥[地脈]이 둘째 번 순룡[順龍]의 폐간[肺肝] 자리에 해당하는데,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으니, 이는 삼재[三災]가 일어날 곳입니다. 만약 이 삼재[三災]를 제거하려면 마땅히 석당[石幢]을 세워야 합니다. 고 하자, 이에 그 양지쪽 벼랑의 큰 바위 위에다가 돌기둥 네 개를 세워 집 모양처럼 하고 장명등[長明燈]을 설치하여,.............라는, 이 기록[記錄]과 정확[正確]히 일치[一致]하고 있다.
한 가지 흥미[興味]로운 것은, 현지[現地]에서는, 이곳의 주위[周圍]에 있는 석당[石幢]과 석탑[石塔], 장명등[長明燈]을,.......... 화상영탑[和尙靈塔]이라고 하면서, 신성[神聖]시 하고 있었다. 암자[庵子]는 자그마한 건물 한 채만 남아 있고, 당시[當時] 암자[庵子]에 있던 종[鐘]을, 종각[鐘閣]을 세우고 산[山]의 중턱에 달아 놓고 있었다. 이 산[山]의 정상[頂上]에 있는 석당[石幢]의 구조물[構造物]은 특이해서 일반 사람들이 본다면, 아마, 그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송악[松嶽]의 석당[石幢]은, 북경성[北京城]의 정[正] 북[北]쪽에 있고, 팔선궁[八仙宮]은 북경성[北京城]의 서북[西北]지역에 있다. 그 동안 북경[北京]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문[疑問]이 제기되고, 지금도 또한, 그 의문[疑問]은, 계속되고 있다.
지금의 북경[北京]이 어찌, 고대[古代]의 유주[幽州]이며, 연[燕]의 연경[燕京]이고, 원[元]의 대도[大都]이며, 명[明]의 북경[北京]이고, 청[淸]의 연경[燕京]이 될수 있겠는가 ?
고려[高麗]의 신하[臣下]였던 이연령[李延齡], 최탄[崔坦]의 무리가, 서경[西京]을 비롯한 북계[北界]의, 54성[城]과, 자비령[慈悲領] 이북의 6성[城]을 들어 몽골[蒙古]에 귀부[歸附]하였다. 그러자 원[元]나라에서는, 자비령[慈悲領] 이북의 땅을 동녕부[東寧府]로 개칭[改稱]하고, 편입[編入]시켰다가 고려[高麗]말에, 고려[高麗]에 다시 돌려주게 되는데, 이를 경계[境界]로 했던 자비령[慈悲領]에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기문[記文]을 지은 나한당[癩漢堂]이, 세월을 지나면서 번성[蕃盛]하고, 대[大] 도관[道觀]의 사원[寺院]이 되어,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자비령[慈悲領]의 시[詩]
서목[徐穆]
요동[遼東]을 정벌[征伐]하던 장병들 해골[骸骨]도 많이 버려졌으니,....... 그 혼백[魂魄]이 아직도 창검[槍劍]을 휘두르는 듯,........ 지난 일 아득하여 흐르는 물처럼 지나갔으니,.......... 혼[魂] 부르며 애도[哀悼]하는 노래 차마 부르지 못하겠네.
서목(徐穆)
천금[千金]의 준마[駿馬]를 타고 백금[百金] 갖옷을 입고서,........ 강개하게 동정[東征]하여 봉후[封侯]되기를 바랐네,.......... 이기고 지는 것이야 병가([兵家]에서 원래 정할 수 없는 것,......... 남아[男兒]가 한 몸 죽어 골짜기를 메웠구나.
고대[古代]에 유주[幽州]의 연[燕]나라 연경[燕京]은, 원[元]의 대도[大都]이며, 명[明]의 북경[北京]이었고, 청[淸]의 연경[燕京]으로, 이 연도[燕都]는, 자비령[慈悲領]의 서[西]쪽에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수[數] 많은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이 이를 증명[證明]하고 있으며, 고증[考證]하고 있다.
이러한 자비령[慈悲領]의 서[西]쪽에 있던, 명[明]과 청[淸]의 연경[燕京]을, 만리[萬里]의 동[東]쪽에 있는, 고려[高麗]의 황도[皇都]로 이동시켜, 거짓과 위선[僞善]의 역사[歷史]를 만들고, 이를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인양 위장[僞裝]하고 있으니, 우리의 역사[歷史]인 조선사[朝鮮史]의 비운[悲運]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어떠한 교훈[敎訓]을 줄 것인가 ?
오백년[五百年], 고려조[高麗朝] 사직[社稷]의 불을 밝히고, 오백년[五百年], 조선조[朝鮮朝] 창업[創業]의 불을 밝힌, 송악[松嶽]의 석당[石幢]과 장명등[長明燈]의, 그 영험[靈驗]함은, 신령[神靈]스러움을 고이 간직하고, 곡령[鵠嶺] 백악[백악]의 팔진인[八眞人]과 더불어, 속세[俗世]의 진애[塵埃]을 뒤로하고, 지상[地上]을 떠나, 천상[天上]의 하늘로 올라 가셨는가 ?
고려[高麗]의 신지비사[神誌秘詞]에서 말하는, 부소[扶踈], 칭간[秤幹], 칭수[秤首]는, 조선조[朝鮮朝]의 오백년[五百年]에 이르는, 사직[社稷]의 운명[運命]을 보더라도 그대로 들어맞고 있다.
우리가 인간[人間]으로 세상[世上]에 태어나서, 때로 배우고 익히며 장성[長成]하여, 수신[修身], 제가[齊家]에 머물더라도, 성현[聖賢]과 선현[先賢], 선대[先代]의 가르침은 소중[所重]한 것이다. 우리가 배우고 익히는 학문[學文]의 근본[根本]이, 역사[歷史]의 그 자체[自體]이며, 모두 역사[歷史]속에 포함[包含]되어 있으니, 뜻을 원대[遠大]하게 세우고, 국가[國家]의 천년대계[千年大計]를 이끌어 나아가는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에 있어서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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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문 무 작성시간 13.12.13 <고려>의 <황성>! 이곳만 밝혀진다고 해도 조선사의 진실에 대한 절반의 성공일 것입니다. 물론 거기엔 충분한 "논거"가 필수적입니다. 더하여 님께서 말씀하시는 "자비령" 역시 아주 중요한 곳인데, 원전에서는 "단단대령은 고려의 자비령으로 원과 경계하였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여러가지 원전의 기록으로 보면, 짐작은 갑니다. 그러나 짐작가지고 내 주장을 펼칠 수는 없어. 그 여러 문헌들을 추적중입니다. <환국고려>님의 위의 글을 보고 있노라니 힘이 솟는 것 같습니다. "조선사의 진실이 만방에 밝혀지는 날, 조선의 영광은 우리곁으로,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 민족의 대동단결"과 함께 말입니다.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