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 루(太和樓)인가, 태화 루(泰和樓)인가?

작성자문 무|작성시간12.03.18|조회수278 목록 댓글 0

                                    태화 루(太和樓)인가, 태화 루(泰和樓)인가?

 

     뉴스에 의하면,

 

    입력 : 2012-03-08 22:42:50수정 : 2012-03-08 22:42:50 영남울산 태화 루, 기업 후원으로 복원 탄력. 백 승 목 기자 smbaek@kyunghyang.com l울산

 

    1400여 년 전() 울산 태화강변에 커다란 누각이 하나 있었다. ‘신라중기 때 건립된 것으로 알려진 이 누각의 이름은 태화 루(太和樓)’이다. 태화 루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졌다. 그나마 남아있던 누각의 골격은 일제시대(1940) 때 철거됐다. 태화 루는 예부터 밀양의 영남루, 진주의 촉석루와 함께 영남 3로 통했다. 울산문화계는 1990년부터 태화 루 복원을 건의했고, 울산시가 1995년 건립 위치까지 결정했지만 실제 공사가 이뤄지기까지 20여년 이상 걸렸다. 울산시는 지난해 9월부터 중구 태화동 옛 로-얄 예식장 주변 1400에 태화 루 건립(연면적 731)을 추진하고 있지만, 막대한 예산(507억 원)을 감당하지 못해 애를 태웠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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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막대한 예산으로 인하여 복원(復元)계획(計劃)은 있었으나, 실제 공사는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모 업체(業體)의 후원(後援)으로 복원공사(復元工事)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내용(內容)이다.

 

    신라(新羅) 중기 때, 건립(建立)된 것으로 추정(推定)된다고 하니, 유서(由緖)깊은 건축물(建築物)이란 것을 알 수 있으며, 이 내용(內容)으로 한반도(韓半島) 경상도(慶尙道) 땅은 예전의 신라(新羅)땅이었다는 증거(證據)가 또 생긴 것이다.

 

    국영방송(國營放送)에서 드라마로 방영(放映)하고 있는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에서도 신라(新羅)” 땅은 경상도(慶尙道) 땅으로 나오며, 백제(百濟)의 아신왕(阿莘王)()”를 불러들여, 신라(新羅)를 치게 하고,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이 신라(新羅)를 구원(救援)하는 사이에, 고구려(高句驪)를 칠 계획(計劃)이었던 것으로 묘사(描寫)하여, 방송(放送)중이다.

 

    이것은 금성(金城) 곧 경주(慶州)에서 기와 장 파편(破片)을 발굴(發掘)하였는데,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의 연호(年號)가 새겨져 있었다는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斟酌)된다. 그렇다면 과연(果然) 삼국(三國)시절의 고구려(高句驪). 백제(百濟). 신라(新羅)가 반도(半島) 땅에 있었을까? 우선 태화 루(太和樓)”에 대한 옛 기록을 찾아보기로 하자. 정말 진실(眞實)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 고전번역원에서 태화 루(太和樓)”를 검색(檢索)해 보면, 자세한 것이 없다. 태화 루(太和樓)는 태화 루(泰和樓)로 되어 있는 것도 있으며, 신라(新羅) 중기(中期)에 건립(建立)되었다는 유서(由緖)깊은 유적(遺跡)에 대한 기록(記錄)치고는 너무 빈약(貧弱)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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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태화 루(太和樓)

 

    《신라시대에 경상도 울산(蔚山)에 건립한 누각. 진주 촉석루(晉州 矗石 樓밀양 영남루(密陽 嶺南 樓평양 부벽루(平壤 浮 碧 樓)와 함께 조선 4대 명루로 불리며, 조선 성종(成宗) 때 박 복경(朴 復 卿)에 의해 중수됨.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울산읍지(蔚山邑誌)>에 기록이 남아 있음.이렇게 설명하고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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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사가문집 제3/ 기류(記 類) / 태화 루(泰和樓)를 중신한 것에 대한 기문 이곳에서는 태화 루(太和樓)가 아닌 태화 루(泰和樓)라 하였다.

 

       <고전번역원의 번역본> : 내가 일찍이 남도(南道)를 유람하며 이름난 곳을 두루 찾아다닐 적에, 누각으로는 촉석루(矗石 樓), 영남루(嶺南 樓), 명원 루(明 遠 樓), 영호 루(映 湖 樓), 쌍벽 루(雙 碧 樓), 누대로는 해운대(海 雲 臺), 월영 대(月影 臺), 관어 대(觀 魚 臺)를 보았는데, 참으로 이른바 경관이 아주 특별한 명승들이었다. 맨 뒤에 울산(蔚山)을 가려던 참에 태화 루의 경관이 빼어나다는 말을 듣고 한번 시원스레 올라 보고 싶었다. 울 강(蔚 江)에 이르러 멀리 바라보니, 누각 하나가 층암절벽 위에 우뚝 솟아 맑고 푸른 강물을 굽어보고 있었는데, 그 웅장한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물어보니, ‘태화 루(泰 和 樓)’라고 했다. 강을 건너 배에서 내려, 지팡이를 짚고 걸어 누각 아래에 이르러 바라보니, 용마루와 지붕, 난간과 기둥이 모두 썩어 부러졌고 또한 층계를 딛고 오를 수도 없었다. 서성이며 서 있자니, 종사관 이공 세우(李 公 世 佑), 유공 계분(柳 公 桂 芬), 이공 인석(李 公 仁 錫), 사천(泗 川) 양 희지(楊 熙 止), 지례(知禮) 정 석 견(鄭 錫 堅)이 나를 이끌고 애를 써서 올라갔다. 기둥에 기대어 잠시 앉아 눈길을 돌려 먼 곳을 바라보니, 그 훌륭한 경관이 앞에서 말한 누대들과 서로 백중을 다툴 만하였고, 시원히 트인 전망은 이들보다 더 나았다. 이어, 설 곡(雪 谷) 정 선생(鄭 先生)이 부() 여덟 수[八 詠]를 지었고 가정(稼亭) 이 선생(李 先生)이 여기에 대한 화운 시(和韻 詩)를 지었으며 우리 외조부인 양촌(陽村) 권 선생(權 先生)이 또한 기문을 지었던 사실이 생각이 나서, 현판을 우러러보았더니, 그 현판이 모두 없었다.

 

     얼마 뒤에 다시 누각에서 내려와서 땅에 앉아 간소하게 주연을 열었다. ‘거 정이 제군들에게 말하기를, “누각의 경관이 이와 같이 훌륭하고 앞뒤로 수령을 지낸 이로서 영웅호걸이 한두 사람이 아니었을 터인데, 어찌하여 한 사람도 누각을 중신(重 新)하는 데에 뜻을 두지 않아서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하물며 설 곡, 가정, 양촌 세 선생의 시와 기문은 이 누각의 영광으로 응당 등왕각(滕 王 閣)의 삼왕(三王)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터인데, 이제 어찌 차마 민멸하여 전해지지 않게 한단 말인가.” 하였다. ‘거 정이 또 웃으며 말하기를, “옛사람 중에 황 학 루(黃 鶴 樓)를 때려 부수려고 한 이가 있었는데, 지금 이 누각이 중수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이러한 허물에 걸린 것이 아니겠는가. ‘거 정이 다행히 여러 선생들처럼 풍류스럽고, 문아(文雅)한 분들과 이 누각에 왔는데도, 마치 희문(希 文)이 악양루(岳陽樓)에서, 최호(崔 顥)가 황 학 루에서, 조하(趙 嘏)가 위 남(渭南)에서, 왕 반산(王 半 山)과 곽 공보(郭 功 甫)가 봉황대(鳳 凰 臺)에서 했던 것처럼 올라가 시를 짓지 못하고, 붓을 던지고 돌아가니 또한 살풍경이라 이르지 않겠는가.” 하니, 제군들도 크게 웃었다.

이튿날 개운포(開 雲 浦)를 향해 돌아오니, 절도사 능산(綾 山) 구공 겸(具 公 謙)이 강에 나와 나를 마중하였고, ‘절도사 설 무림(薛 茂 林)’도 왔다. 때는 바야흐로 보름 다음 날이라 달빛이 아름다웠다. 또한 제군들과 조각배를 하나 띄워 만경창파 위를 저어 가며 술잔을 들어 서로 권하면서, 은근히 스스로 적벽의 놀이에 견주어, 일전에 누각에 올랐을 때의 불쾌했던 마음을 조금 풀었다. 서울에 돌아와서는 지난 일들이 생각이 나서 날마다 마음속에서 오갔다.

 

      지난해에 사천 양 희지가 거정에게 말하기를, “울산은 저희 고을입니다. 지금의 수령 박 후(朴 侯)가 고을을 잘 다스려, 복잡한 일들을 잘 처리하여 정사가 이미 닦여지고 폐단이 제거되었습니다. 이에 관부(官府)와 누관(樓 觀)을 점차 수리하여 태화 루도 새롭게 다시 지었는데, 크고 넓고 툭 트였으며 새롭게 벽을 칠하여 이전에 비해 더 아름다워졌습니다. 선생께서 이전에 이 누각에 대해 결함으로 여겼던 것이 이제 조금도 유감이 없게 되었습니다. 선생께서 기문을 지어 주십시오.” 하였다. ‘거 정,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박 후의 현능함이 이전의 수령들보다 훨씬 훌륭하다.” 하였다. 그 뒤 남쪽에서 오는 자들이 모두들 울산이 아주 잘 다스려졌음을 칭송하고 또 이 누각의 장관을 찬탄하였다. ‘거 정이 더욱 박 후의 선정을 믿게 되었다.

 

    아! 옛날에 등왕각을 중수했을 때에 한퇴지(韓 退 之)가 기문을 지었다. 지금 이 누각은 비록 명승이지만 거정의 글이 한퇴지에 미치지 못하는데, 뻔뻔하게 기문을 짓자니 외람된 짓인 줄을 알겠다. 그러나 거 정이 태사(太史)의 장관으로 있고 박 후의 덕정에 대해 들었으니, 그것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누각의 형승은 오늘날의 글 잘하고 반듯한 선비 중에 필시 잘 묘사해 낼 이가 있을 것이므로 여기서 거론하지 않는다. ‘거 정이 혹시라도 다시 남쪽으로 유람 가서 박 후와 함께 이 누각에 한번 오른다면 마땅히 술을 한잔 나누면서 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할 것이다. ‘박 후의 이름은 복경(復 卿)이고 자는 세 휴(世 休)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내, 외직을 두루 거치며 당시의 칭송을 받았다. 을사년(1485, 성종16).

 

    [D-001] 양 희지(楊 熙 止) : 1439~1504. 자는 가행(可 行)정보(楨 父), 호는 대봉(大 峯), 본관은 중화(中和)이다. 1478(성종9)에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사천 현령(泗 川 縣令)으로 나갔다. 형조 판서, 충청도 관찰사, 도승지, 대사헌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대봉 집(大 峯 集)이 있다.

 

    [D-002] 정 석 견(鄭 錫 堅) : ?~1500. 본관은 해주(海 州), 자는 자건(子 健), 호는 한 벽재(寒 碧 齋)이다. 이조 좌랑, 지성균관사, 대사간, 이조 참판 등을 지냈다.

 

    [D-003] 설 곡(雪 谷) 정 선생(鄭 先生) : 고려 때 학자인 정포(鄭 誧, 1309~1345)이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중부(仲 孚)이며, 설 곡은 그의 호이다.

 

    [D-004] 가정(稼亭) 이 선생(李 先生) : 이곡(李穀, 1298~1351)이다. 본관은 한산(韓 山), 자는 중보(中 父)이며, 가정은 그의 호이다. 시호는 문 효(文 孝)이다. 저서로는 가정집이 있다.

 

    [D-005] 양촌(陽村) 권 선생(權 先生) : 권근(權近, 1352~1409)이다. 본관은 안동, 자는 가원(可 遠)사숙(思 叔)이다. 양촌은 그의 호이다. 시호는 문 충(文 忠)이다. 저서로는 양촌 집이 있다.

[D-013] 구공 겸(具 公 謙) : 생몰년 미상이다. 성종실록에 의하면, 1475(성종6) 7월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 兵馬節度使)에 제수되었다.

 

    [D-014] 설 무림(薛 茂 林) : 생몰년 미상이다. 성종실록에 의하면, 1478(성종9) 9월에 경상좌도 절도사에 제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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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전번역원에서 태화 루를 검색해 보면 몇 건 되지도 않고 제대로 된 설명조차 찾을 수 없다.

 

    ㉠ 위 기록으로 보면, 태화강(太 和 江)이란 하천(河川) 이야기는 없고, 대신 울 강(蔚江)”이 나온다. 울 강(蔚 江)에 이르러 멀리 바라보니, 누각 하나가 층암절벽 위에 우뚝 솟아 맑고 푸른 강물을 굽어보고 있었는데, 그 웅장한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물어보니, ‘태화 루(泰 和 樓)’라고 했다.고 하였다.

 

    ㉡ 후대(後代)의 선조(宣祖) 임란(壬亂)때의 기록을 보면, 태화강(太和江)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위에서 말하는 울 강(蔚江)”은 무엇이며, “태화 루(泰和樓)”는 무엇이냐는 것이다.

 

    ㉢ 아래 (3)에서 보면, 태화강(太和 江)의 하류인 남강(藍 江)이란 말이 있다. 이러한 것으로 보면, 태화강(太和江) 또는 태화강(泰和江), 또는 울 강(蔚江)이라고 불렀던 하천(河川)이란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하천(河川)은 쾌나 큰 강()이므로, 하류(下流)지방을 흐르는 강을 남강(藍江)’이라고 별도(別途)로 호칭(呼稱)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렇게 여러 이름으로 불려진 하천(河川)으로, 반도(半島) 울산(蔚山)을 흐르는 하천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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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태화강 / 왕조실록 / 선조 31년 무술(1598,만력 26) / 16(임진) / 접반사 이덕형·권율이 울산에서의 전투 상황을 보고하다.

 

     <고전번역원의 번역본> : 경리(經理)의 접반사인 이조 판서 이덕형과 도원수 권율이 치계 하였다. “울산에서 승첩을 거둔 날 경리와 제독이 군영(軍營)으로 돌아와 신을 불러 말하기를 조선군이 현재 도착한 자는 단지 35백에 불과하니, 이 여 매(李 如 梅)와 이 방춘(李 芳春)에게 분속시키는 것이 좋겠다.’ 하였습니다. 마침 그때 흰 운기가 펼쳐진 부채처럼 군영 위에 있자 경리가 그것을 쳐다보면서 이 운기를 보니 매우 기쁘다.’ 하였습니다. 경리가 제독(提督)과 함께 묘시(卯 時)에 삼 협(三 協)을 재촉하여 진군시키고 함께 가서 독전(督 戰), 서낭당(城隍堂)의 토굴(土窟)을 공격했습니다. 성 안에 있는 집들과 강변에 있던 왜선(倭船) 2척이 불화살을 맞고 타느라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뒤덮었습니다. 중국군이 소리 지르면서 성을 함락시키자, 여러 왜적들이 도산(島山)에 있는 토굴 속으로 도망쳐 들어갔습니다. 중국군이 추격하여 많은 적을 참획하였고 경리와 제독은 그 맞은편에 있는 봉우리에 올라가 독전하니 모든 군사들이 일제히 분발하여 성의 동쪽으로 진격하여 갔습니다. 중국군 10명이 성 위로 올라갔으나 싸우다가 나오지 못했고 나머지 군사들도 성을 무너뜨리지 못한 채 올라갔습니다. 왜선 40여 척이 태화강(太和 江)의 하류인 남강(藍 江)에 정박하고 있었는데, 경리가 절병(浙 兵) 2천 명과 기병(騎兵) 1천 명으로 강안(江岸)을 방비하게 하였습니다. 해가 진 뒤 경리가 왜적 56인이 성을 나와 도주한다는 말을 듣고 몸소 추격하였습니다. 제장(諸將)들을 불러 다시 상의하고 긴 나무와 마른 섶을 준비하여 다음날 화공(火攻)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항복한 왜적과 포로가 되었던 사람들을 심문하였더니, 모두들 청정(淸正)23일 밤중에 서생 포에서 말을 타고 왔는데, 휘하 장수 56인과 함께 토굴 속에 모여 있다.’ 하였습니다. 왜적의 수효는 2천 명 정도인 듯, 한데 석축(石築)이 깍아 지른 듯하고 토굴이 마치 벌집과 같은데 중국군이 쳐다보며 공격하기 때문에 형세가 쉽지 않았습니다. 어제 적의 목을 벤 것이 매우 많았는데, 경리는 성을 함락시키기 전에는 실수(實數)를 조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또한 우리 편의 사상자 수도 말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인용(引用)/고전번역원의 번역본/>

 

     [D-001] 절병 (浙 兵) : 절강(浙江)성의 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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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라(新羅) 중기(中期)때라고 하면서, 1,400여 년 전()의 건축물(建築物)이라고 하였는데,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소실(燒失)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반도(半島)의 유서(由緖)깊은 건축물(建築物), 사찰(寺刹), 궁전(宮殿), ()등은 대부분 임진왜란(壬辰倭亂)왜군(倭軍)”에 의해 파괴(破壞)되고, 소실(燒失)되었다고 말한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일으킨 자는 반도(半島)”의 문화유산(文化遺産)을 욕심(慾心)내어, 이것들을 없애려 한 것이 침략(侵略)목적(目的)”인지 헷갈릴 정도이다.

 

    전투(戰鬪)를 하기에도 바쁜 그들이, 진군(進軍)하는 길목에 건축물(建築物)이 장애(障碍)가 되어 없앴다는 말은 충분(充分)히 이해(理解)되는 말이며, 교량(橋梁)같은 축조(築造)물은 후퇴(後退), 공격(攻擊)군의 도하(渡河)를 막기 위해 파괴(破壞)할 수 있다. 또한 궁전(宮殿)이나, 대궐(大闕)등은 그들도 잠을 자야하고, 때론 휴식(休息)도 취해야 하며, 그들이 오랫동안 차지할 목적(目的)이었다면, 구태여 불 지르고 파괴(破壞)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더더구나 오지(奧地)의 산 속 깊은 곳에 있었던, 사찰(寺刹)등은 대부분 임진왜란(壬辰倭亂), 왜군(倭軍)에 의해 소실(燒失)되었다는 이야기는 믿기 어려운 측면(側面)이 많다. 왜군(倭軍)의 공격로(攻擊路) 또는 진군(進軍)로에 방해(妨害)가 되었다면 당연(當然)히 그럴 수 있었을 것이나, 산 속 깊은 곳에 있었던 사찰(寺刹) 대부분(大部分)은 그들의 목적(目的)과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곳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왜군(倭軍)은 길도 마땅치 않은 곳에서 게릴라부대(部隊)로 산악(山岳)지대에서만 활동(活動)했다면 몰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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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화 루(太和樓)가 맞는 것인가? 아니면 태화 루(泰和樓)인가?

 

     태화강(太和江)인가? 울 강(蔚江)인가? 그 하류는 남강(藍江)인가? 도대체 무엇 하나 올바르게 정립(正立)된 것이 없다. 그렇게 유명했던 태화 루(太和樓)”의 이름인 어떤 것이 올바른 것인지 조차 알 수 없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 틀림이 없으며, ()의 이름조차 헷갈릴 정도라면 말이다.

 

      태화강(太和江)의 하류(下流)가 얼마나 넓었기로, 왜선 40여척이 정박하고 있었단 말인가? 절병(浙 兵) 2천 명과 기병(騎兵) 1천 명으로 강안(江岸)을 방비하게 하였다면, 이곳은 쾌나 큰 하천(河川)이었다는 얘기다. 과연 반도(半島) 울산(蔚山)에 있는 하천(河川)이 맞기는 맞는 것인가?

 

                                          20120318<글쓴이 : 문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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