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東夷)의 풍속은 머리를 자르고 문신(文身)하며..

작성자해모수|작성시간12.06.05|조회수703 목록 댓글 2

조선인은 활을 잘 쏘며 성품이 유순한 군자가 사는 동이(東夷)족으로 우리는 알고있다.

학계에서 동이(東夷)에 대한 의견은 다양하지만, 그 위치는 중국 동북면 방면이라는 것, 활을 잘쏘며 유순한 성품을 가지고 있는  군자의 나라라는 점에서는 대개 의견일치를 보는듯하다.

 

그런데 고려도경에 묘사되어있는 이(東夷)의 실제 모습은 단발령에도 머리 자르기를 거부하고 성품이 유순한  조선인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데,  동이족은 몸에 문신과 이마에 무늬를 하고 변발을 하는 오랑캐를 연상시키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고전번역원의 주석 또한 동이족의 그런 모습을 오랑캐의 풍습으로 설명하고 있다

=============================================================================

선화봉사고려도경 제7권

 관복(冠服)

동이(東夷)의 풍속은 머리를 자르고 문신(文身)하며, 이마에 무늬를 새기고 발이 교차한다[雕題交趾]고 했다. 그런데 고려는 기자(箕子)를 봉했을 때부터 이미 농사와 누에치기의 이로움을 가르쳤으므로 마땅히 의관(衣冠)의 제도가 있었을 것이다.
한(漢) 나라 역사에, 그 공회(公會)할 때의 의복은 다 비단에 수놓고 금과 은으로 이를 장식하되, 대가(大加)ㆍ주부(主簿)는 책(幘)을 쓰는데 관(冠)과 같고, 소가(小加)는 절풍(折風)을 쓰는데 고깔[弁]과 같다고 하였으나, 이것이 어찌 상(商 중국 고대 은 나라)이나 주(周)의 관(冠)과 고깔의 제도를 모방해서 그렇겠는가? 당(唐) 나라 초에 차츰 오색 옷을 입고, 백라관(白羅冠)을 쓰고, 혁대(革帶)에는 다 금이나 옥으로 장식하였더니, 그러니 다만 변발(辮髮)을 풀고 좌임(左袵)을 없앴을 뿐만이 아니다.

그러나 관직명이 일정하지 않고 조정에서 입는 옷과 집에서 입는 옷이 혹, 우리 송의 제도와 다른 것이 있으므로, 이를 들어 관복도(冠服圖)를 그린다.

 

   [주석] 이마에 무늬를 새기고 발이 교차한다[雕題交趾]오랑캐의 풍속을 말한다. 《예기(禮記)》

             왕제(王制)에 동이(東夷)는 단발문신(斷髮文身)이라 했고, 남만(南蠻)은 조제교지(雕題交趾)

             라 하였다.

 

 

<예기 왕제>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東方曰夷, 被髮文身, 有不火食者矣. 南方曰蠻, 雕題交趾, 有不火食者矣. 西方曰戎, 被髮衣皮,有不粒食者矣. 北方曰狄, 衣羽毛穴居, 有不粒食者矣.
동방은 이(夷)라 한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문신을 하며, 불로 음식을 지어먹지 않는 자가 있다. 남방은 만(蠻)이라 한다. 이마에 문신을 새기고 다리를 엇갈리게 하고 다니며, 불로 음식을 지어먹지 않는 자가 있다. 서방은 융(戎)이라 한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가죽으로 옷을 지으며, 쌀밥을 먹지 않는 자가 있다. 북방은 적(狄)이라 한다. 짐승의 깃과 털로 옷을 짓고 동굴에서 실며, 쌀밥을 먹지 않는 자가 있다.]

 

 1. 이(東夷) 풍속은 머리를 자르고 문신(文身)하며, 이마에 무늬를 새기고 발이 교차한다[雕題交趾]고 했다.

 

2. 우리 송 나라에 이르러 해마다 신사(信使)를 보내므로 자주 왕이 옷을 내려 점차 우리 중국풍에 젖게 되고, 천자의 총애를 입어 의복의 제도가 크게 갖추어지고 우리 송의 제도를 따르게 되었다.  그러니 다만 변발(辮髮)을 풀고 좌임(左袵)을 없앴을 뿐만이 아니다.

 

 

발이 교차한다는 말은 다리를 엇갈리게 히고 다닌다는 뜻이다.  몸에 문신과 이마에 무늬를 새기고 머리를 짧게 자르거나 변발을 했으나, 후에 중국풍을 따르면서 의복 제도가 갖추어지고 변발(辮髮)을 풀었다고 했다.  자임(  ) 이란 옷깃을 왼쪽으로 여밈. 중국 변방 민족들의 옷입는 풍습을 비하(卑下)하는 말로 쓰였다고 한다.

 

이런 모습이 과연  어질고 살리기를 좋아하고 모든 것은 땅에 뿌리박고 있으므로 천성이 유순하고 도로써 다스리기 쉬워서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라고 알려진 이(東夷)족의 모습일까?

신체발부수지부모 [身體髮膚受之父母] 사상 '신체와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다'라는 뜻으로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몸을 소중히 여기는 조선인의 모습과는 천양지차의 모습을 보인다

오히려 몸과 이마에 문신을 하고 의복제도가 없던 전형적인 왜(倭)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이(東夷)는 동왜(東倭)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문장이다

 

 

아래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동이(東夷)에대한 설명으로 사료속에 나타난 동이족의 풍속과는 다르다.

 

이(東夷)

 

1. 연원 및 변천

 

동이의 시원과 종족적 성격·활동범위·문화단계에 대해서 고대부터 깊은 관심이 있어 왔다. 우리나라에서는『삼국사기(三國史記)』에 동이라는 기록이 나온 이래 기자(箕子)와 관련지어 관심을 가졌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은 동이를 상고사 문제와 관련시켜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한치윤(韓致奫)은『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 단군조선보다 앞서 동이총기(東夷總記)를 두고 동이족에 대한 중국의 고기록들을 정리하였다.


중국인들도 자국의 상고문화와 관련해 선진문헌(先秦文獻)부터 현대까지 동이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이(夷)는 “종대종궁동방지인야(從大從弓東方之人也)”라고 하여 대궁(大弓)과 관련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유궁(有窮: 지금의 산둥성 덕현)의 군주 예(羿: 하나라의 제후로 궁술에 능한 명인)와 회수(淮水) 유역의 서언왕(徐偃王), 고구려의 주몽(朱蒙) 등 동이계의 수장(首長)들에게는 궁시설화(弓矢說話)가 있어 동이족은 활을 잘 쏘는 민족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후한서(後漢書)』동이전에는, “동방을 ‘이(夷)’라 한다. ‘이’라고 하는 것은 뿌리이다. 말하기를, 어질고 살리기를 좋아한다고들 한다. 모든 것은 땅에 뿌리박고 있으므로 천성이 유순하고 도로써 다스리기 쉬워서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가 있게 된 것이다.”라고 하여 ‘이’의 문화적 특성과 동경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견이(畎夷)·우이(于夷)·방이(方夷)·황이(黃夷)·백이(白夷)·적이(赤夷)·현이(玄夷)·풍이(風夷)·양이(陽夷) 등 9종으로 분류해 기술하고 있다.


이 밖에도『논어(論語)』·『예기(禮記)』·『산해경(山海經)』등에 동이에 대한 언급이 있으며,『사기(史記)』·『전한서(前漢書)』·『후한서(後漢書)』·『삼국지(三國志)』·『송서(宋書)』·『남제서(南齊書)』·『위서(魏書)』등의 사서에서는 논찬(論贊)·평어(評語) 등에 역사적 사실과 함께 시대에 따라 변하는 동이에 대한 인식을 기술하고 있다.


내용

1. 종족적 성격


‘이(夷)’라는 말은 산둥반도로부터 회사(淮泗) 유역, 즉 현재의 장쑤성(江蘇省)·안후이성(安徽省)·황해연안 등에 분포된 이들 집단이 한족과 접촉을 시작하는 은대(殷代)부터 역사에 등장하였다.


은 말기에는 인방(人方)으로 불리었으며, 시방(尸方)·이방(夷方)으로도 불렸다. 은으로부터 대규모의 정벌을 당하기도 하였다. 은대의 갑골문(甲骨文)에도 ‘이’에 대한 기록이 보이며, 시조의 난생설화나 분포지 등을 고려할 때 동이라는 견해가 통용되고 있다.


특히 서주(西周)시대 때 동이의 대표적 수장인 서언왕(徐偃王)의 시조난생설화는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설화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은의 시조신인 순(舜)임금도 동이족이다. 그리고 은이 하를 멸망시키는데 이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서주시대의 금석문에는 동이·남이·회이라는 명칭이 보인다. 중국인들이 점점 여러 종족의 차이를 인식하면서 ‘만(蠻)’·‘융(戎)’·‘적(狄)’의 구분이 생기고, 그 뒤 음양오행사상이 발달함에 따라 방위개념이 첨가되어 동이·서융(西戎)·남만(南蠻)·북적(北狄) 등의 명칭으로 고정되었다. 『관자(管子)』에도 이러한 구분이 표현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중국역사 초기에 ‘동이’라는 것은, 한족이 동방의 이민족에게 붙였던 범칭으로서 특정한 종족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라기보다는 방위개념을 첨가한 한족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족의 활동영역이 확대되고 지리적 지식의 양이 증가하면서 점차 일정한 종족적 개념의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2. 동이의 범주


동이족은 중국의 서북부에서 수렵생활을 하다가 동으로 이동해, 한 줄기는 산둥반도(山東半島) 방면으로, 다른 한 줄기는 다시 동으로 나와 만주·한반도 일대에 분포하였다. 동이족의 적용범위는 진나라의 통일을 전후해 다르게 나타난다.


진나라의 통일 이전에는 한족과 대립관계를 가지고 황허(黃河)·화이허(淮河) 유역을 중심으로 중국 동북부와 북만주일대, 한반도 등 기타지역에 거주하는 북방 몽골리안계 종족을 일컬었다. 이들은 환황해연안 지역에 분포했으며 중국 한족과는 갈등 혹은 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진나라가 통일을 한 뒤에는 산둥반도의 일부가 중국역사에 흡수·동화됨으로써 발해만을 끼고 만주와 한반도로 분포한 한·예맥(韓·濊貊)을 ‘동이’라 불렀다.『설문(說文)』에는 예맥(濊貊)을 동이를 가리키는 이름이라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의 서(序)에 ‘진병육국기회사이개산위민호(秦竝六國其淮泗夷皆散爲民戶)’라는 기록은 이러한 역사적인 상황을 반영한다.


한편, 『후한서』와 『삼국지』의 동이전에는 부여·고구려·백제·신라·마한·진한·변한 등 현재 우리 민족과 직접 관련 있는 나라들이 나타난다. 다만 현재는 우리와 민족 및 역사를 달리하고 있는 읍루(挹婁)·왜(倭) 등이 포함되어 있어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


이와 같이 동이의 범주에 관해서는 나라와 학자 또는 시대에 따라 서로 다른 견해가 나오고 있다. 동이에 관해서는 흑도문화와의 관련성, 민무늬토기, 청동기문화의 담당자로서의 역할과 구체적인 종족적 특징 등 앞으로 연구되어야 할 과제가 많다. 또한 역사적인 실체로서 거주지역 및 유적유물조사, 황해연안에서의 해양문화 담당 등 구체적인 활동 모습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동이가 한민족의 근간이 된 예맥족을 포함하고 있으며, 중국의 한족과 대립하면서 중국 및 북방종족들과는 다른 독특한 문화전통을 유지·발전시켰다는 것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문 무 | 작성시간 12.06.06 해모수님은 "중앙아시아 조선"을 신봉하는 분으로 알고 있었는데, 위의 글은 핀트에서 많이 벗어난 글 같습니다.

    동이는 구이를 말함이요, 그 영역은 세계의 중심이었다고 믿었던 곤륜산의 동쪽으로부터 열도까지를 망라합니다.
    한족이란 최근세기에 만들어진 허구의 종족입니다. 소수민족입니다.
    동이들이 살고 있는 전체 영역 중에서 중국은 華(화)라 한 것이며, 북적, 남만, 북접, 서융등은 모두 구이에 포함됩니다.
    이것은 현 유럽등에 살고 있는 종족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이속에 이들이 포함된다는 것이지요.
    한민족이 예맥족이란 말도 학자 몇 분의 주장일 뿐, 명백하게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지요.
  • 작성자문 무 | 작성시간 12.06.06 동이의 구이 중에서 한 종족이 산동쪽으로 이주했다고 해서 전체 동이가 그렇게 한 것처럼 하는 말은 문제가 생길 소지가 많습니다. 산동쪽으로 간 종족은 오직 욱이(우이)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이는 많은 동이 중 한 부류일 뿐입니다. 축소지향적인 조선사는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글 잘 보았습니다. 그리고 건강하세요.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