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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三韓)은... 티벳.

작성자궐한|작성시간11.11.13|조회수844 목록 댓글 11

 

동사강목을 보면...

우리 선현들께서도...정작 지 조상국인 삼한의 강역에 대해서 몰라...

이게 맞다... 아니다 저거다...엄청 논쟁한 것을 보건데...삼한은 삼국과 관련됀 땅이면서도...

이후엔 삼국과 다른 위치가 돼어 버렸단 방증이라 보입니다.

 

광개토왕이 현 중원 서역 청해성에 있었던 토욕혼을 정벌함을 ...

먼 한반도와 만주에서 위나라 북부를 빙 돌아와 토욕혼을 쳤다 해석하는 등신짓들을 할게 아니라...

고구려가 그 토욕혼과 위나라를 같이 경계에 끼고 있었다 보면 그만일 것이고...

 

마한과 백제가 관련이 많고...진한과 신라가 관계가 많으며...변한은 그 남부에 있고...

이 삼한 공히 고구려가 지배했고...왜와 육지로 인접해 있었다 함은...

 

동남아(왜)와 인접한 티벳이 마한이요...그 동쪽인 진한이 사천성...변한이 운남성 정도로 보면 무리없을 듯 합니다.

 

 

 

 

밑의 사기에는...

마한의 강역엔 성곽(城郭)이 없고...산해(山海0로서 그 경계를 삼았답니다.

이를 현 한반도 서해,남해 등으로 해석함도 등신짓인게...

 

마한의 나라가 50여국인데...

무슨 바다가 50여개나 현 서해,남해에 있어 경계로 했단 걸까요?

 

고로, 고원 내륙해가 수 십 수 백개인 현 티벳지역이 그 마한의 후보지라 보이는 이유며...

 

 

특히나,

마한을 저도 이전엔 중앙아로 보았었는데...급 수정합니다.

 

기록들을 보니...마한엔 성곽이 없다 합니다.

중앙아엔 중원같이 국토경계 전체를 두른 장성은 아닐지라도...

도시나 마을을 감싸는 방어성곽은 엄청 많았을 것이...무역로들이 도적떼들 천지이기 때문입니다.

 

흙으로 무덤같은 집을 지었으니...

중앙아나 지중해식 돔형 건물이라시는 분들의 말씀도 솔깃하긴 했으나...

출입문이 집 위로 나 있단 설명은 어떻게 설명할지는 없어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밤이면 엄청 추운 고지대의 토굴집 비슷한 폐쇠적 공간의 집일것 같거든여...

청나라에 중가르 토벌때 밀렸을 운남성등의 티벳족들 전통가옥을 보건데...

밑의 층은 짐승들 우리...살림집은 사다리 타고 윗층에 문이난 구조가...그 삼한의 고대 주택구조의 변형일지 싶습니다.

 

 

진한 12국은 사천성 남부정도...

 

 

변한 12국은 성곽이 있다 함은 운남성등의 성곽들을 이른것으로 보이며...

이 삼한이 월지와 가락국과 통한다 함은...중앙아나 인도로 통한단 얘기로 저는 이해합니다.

 

그 상대적 중국인 한(漢)나라의 위치가 서역인지 오히려 동녁인지는 아직 감잡기 어려우나...

어딘지 모르겠단 그 삼한은...어쩔수 없이 현재도 오지중 고산오지인 티벳지대로 봄이 적당하고...

마한의 지방이름과 현 티벳의 지명들도 얼추 어감이 같음도 무시할수 없는 참고사항 같습니다.

 

 

마한에 꼬리가 5자..즉 옛날 척수 1m가 넘는 닭이 사육됀다 했으니...

그건 그 남쪽 인도에서 가져온 공작새가 아닐지 추정해 봅니다.

 

이들이 월지나 가라와 연접했으니...

당연 수메르 문명과도 연결됀 세력임은 자명하다 보이고여...

각 마을(나라)마다 지도자(선생)이 각각있어 다스렸다 함도...티벳고원의 라마승 정치체계와 유사하다 보입니다.

사천 운남성의 수십개 소수민족 수도...삼한의 수십개 자치 지방국 숫자와도 딱. 맞아 떨어진니다.

 

 

문젠 그 삼한을 이은 삼국이 원체 문자가 없었단 자백을 보면 좀 헤깔리긴 하는데...

불모지란 몽골초원에도 한무제 침공이전 이미 한자가 있었음을 감안하면...이해하기 곤란하니...

그 문자란 기준이 수메르문자나 위그루문자같은 글이 아닌...한자만을 이름을 아닐지 추론해 봅니다.

 

 

지중해 조선설 연구자님들은...

다른건 다 마한기록을 지중해 조선의증거라 하시면서...

마한엔 성곽이 없이 산해(山海)를 경계로 50여국이 존재했단 기록만은 왜곡이라 편취 해석하시는데...

 

이는 객관적이지 못한...보고싶고 돼고싶은 것만 편취연구하는 역사연구라 염려됍니다.

 

 

마한 50여국은 마소를 타고 부릴줄 모른다 했습니다.

마한이 중앙아라면...완안마를 타고 사막을 누볐을 텐데 말이 않 됍니다.

 

 

마한엔 여자 남자의 구별도 애 어른의 구별도 없는 사회랍니다.

아직도 상당수가 모계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티벳 출신 소수족들...이건 곤륜산 마고할미(서황모)의 영향일지 싶습니다.

마한이 중앙아라면...이슬람과 흡사한 전통을 유지했을 것이니...최소 부계가 세계에서 젤 강했을 사회니...

또 맞지가 않습니다.

 

 

마한의 이주가 수메르까지 인건 인정하겠으나...

중앙아전체와 지중해유역이 마한이자...삼한...그걸 근대조선까지 유지했단 설엔...

도저히 수긍키가 어렵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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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 제1상
무신년 왕 준 28년 조선 왕 위만 원년 ○ 이해에 참국(僣國)이 하나이다(한 혜제(惠帝) 2 B.C. 193)


위만이 배반하여 왕도(王都)를 엄습하매, 왕이 남으로 달아나니, 위만이 조선왕이라 칭하고 왕검성(王儉城)에 도읍하였다.
위만이 서쪽 변방에 있으면서 망명한 무리들을 꾀어서 점점 많아지매 사람을 왕에게 보내여 ‘한(漢)의 군사가 열 갈래의 길로 온다.’고 거짓으로 고하여 들어가 숙위(宿衛) 하기를 청하고, 드디어 도리어 왕을 공격하였다. 왕이 위만과 싸웠으나 대적하지 못하고, 좌우(左右)와 궁인(宮人) 및 나머지 무리 수천 인을 거느리고 남으로 달아나서 마한(馬韓)에 가니, 기자(箕子)로부터 준(準)까지 41세(世)이며 모두 9백 30년을 지내고서 나라를 잃었다.
최씨(崔氏) 보(溥)는 이렇게 적었다.
“기자가 다스리는 도리에 밝은 학식을 지닌 이로서, 신복(臣服)하지 않는 뜻을 높이 가지고 자취를 감추어 동으로 와서 8조의 가르침을 펴고 정전(井田)의 법을 시행하였으니, 그 깊은 인애(仁愛)와 두터운 혜택은 백성의 마음을 굳게 맺어지게 하여 나라의 명맥을 길게 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우리 동방의 예속이 아름답다는 것이 천하에 알려졌으므로 부자(夫子 공자(孔子)를 가리킨다)가 이곳에 살려는 뜻은 두었었고. 《한서》에는 ‘인현(仁賢)의 교화’라 하고, 《당서》에는 ‘아름다운 군자의 나라’라 하고, 송조(宋朝)에서는 ‘예악문물(禮樂文物)의 나라’라 하였고, 함허자(涵虛子)도 ‘시서(詩書)와 인의(仁義)의 나라’라 하였으니, 우리 기자가 지나는 곳마다 신묘한 덕화(德化)로 우리 동방에 혜택을 준 것은 천만 년이 지나도 한결같은데, 아깝게도 그 사실이 실린 서적이 전하여 오지 않아서 증거할 만한 문헌(文獻)이 없다.”
○ 위만이 조선을 격파하고 점점 진번ㆍ조선의 제이(諸夷)와 옛 연ㆍ제에서 망명하여 온 자들을 종속시켜서 그들의 왕이 되고 왕검성에 도읍하였다. 마침 효혜(孝惠 한(漢) 혜제(惠帝))ㆍ고후(高后 한 고조(高祖)의 후) 때에 천하가 비로소 평정되었으므로 요동 태수(遼東太守)가 위만을 외신(外臣)으로 삼아서 변방 밖을 지키게 하매, 그 때문에 위만이 병권과 재물을 얻게 되어 곁에 있는 작은 고을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ㆍ임둔이 다 복속해 와서 지방이 수천 리가 되었다. 《한서》에서 보충
【안】 《사기》와 《전한서》에 비로소 조선전(朝鮮傳)을 넣었다. 또 혹 ‘위만은 바로 중국 사람이요 조선의 신자(臣子)가 아니니 찬적(簒賊)의 유례(類例)에 두지 않아야 한다.’고도 하나 이 말은 잘못이다. 《사기》에, ‘위만이 항복해 왔다.’ 하고, ‘또 위만에게 박사(博士)를 제배(除拜)하였다.’ 하고, 또 ‘들어와 숙위(宿衛)하기를 청하였다.’ 하였으니, 그가 신하로서 섬긴 자취가 명백하다. 또한 그는 양나라 후경(侯景)의 무리이니, 《강목(綱目)》이 후경을 어찌 일찍이 찬적으로 대우하지 않았던가! 《통감(通鑑)》에서는 단군ㆍ기자와 함께 삼조선(三朝鮮)이라 아울러 불러서 덕(德)과 의(義)가 같은 것처럼 하였으나, 그 뜻은 잘못된 것이다.
○ 왕이 마한(馬韓)을 공략하여 격파하고 금마군(金馬郡)지금의 익산군(益山郡) 에 도읍하였다.
왕이 남으로 달아나 마한을 공략하여 격파하고 스스로 한왕이 되니, 곧 무강왕(武康王)이다. 지금의 익산(益山) 오금사봉(五金寺峰) 서쪽에 쌍릉(雙陵)이 있는데 《고려사(高麗史》에 ‘후조선(後朝鮮)》 무강왕과 비(妃)의 능’이라 하였고, 세속에서는 영통대왕릉(永通大王陵)이라 부른다. 또 기준성(箕準城)이 용화산(龍華山) 위에 있다.
준(準)이 마한에서 임금 노릇을 하면서 조선과 서로 왕래하지 않았으며, 그 아들ㆍ벗ㆍ친족으로서 나라에 머물러 있던 자가 성(姓)을 한씨(韓氏)라고 고쳤다.
○ 한 땅은 조선 동남 바다쪽에 있으며, 그 종족이 셋인데 마한ㆍ진한(辰韓)ㆍ변진(弁辰)-변한(卞韓)-이다. 《진서(晉書)》ㆍ양서(梁書)에는 변한(卞韓)이라 하였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54국이이며 그 땅은 북으로 낙랑(樂浪)과 연접하고 남으로 왜(倭)와 연접하였으며,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국이며 땅은 북으로 예맥(濊貊)과 근접하고 남으로 왜(倭)와 근접하였으며, 변한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또한 12국이며 땅은 왜에 근접하였으니, 모두 78국이었다.
큰 것은 만여 호(戶)이고 작은 것은 수천 호였으며, 각각 산과 바다 사이에 있었는데, 모두가 옛 진국(辰國)이었다. 마한이 가장 크므로 함께 그 종족을 진왕(辰王)으로 세우니, 목지국(目支國) 지금은 미상 에 도읍하여 삼한 땅을 다스렸다.
그 여러 나라 왕의 선대는 모두가 마한 종족의 사람이었다.
진한의 노인들이 스스로 이렇게 말하였다.
“진(秦)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고역(苦役)을 피하여 한국(韓國)에 오니, 마한이 그 동쪽 경계의 땅을 베어 주었는데, 언어가 진 사람과 같으므로 진한(秦韓)이라고도 하였다.
그 왕은 항상 마한 사람으로 하고 대대로 세습하고 스스로 임금이 되지 못하였으니, 유망(流亡)하여 옮겨온 사람들임이 분명하다. 변진의 시조는 알 수 없으나 진한에 소속되어 진한과 섞여 살았다. 성곽(城郭)이 있었으며 의복ㆍ거처가 진한과 같았고 언어 풍속이 서로 비슷하였으므로 삼한이라 불렀다.” 《후한서》ㆍ《두씨통전(杜氏通典)》에서 보충
한씨(韓氏) 백겸(百謙) 는 이르기를,
“우리 동방은 예전에 스스로 남북으로 나뉘었었는데, 북은 본디 삼조선(三朝鮮) 땅이었다가 뒤에 고구려(高句麗)가 되었고, 남은 삼한(三韓)의 땅이 되었다.
《후한서》에 ‘변한은 남에 있고 진한은 동에 있고 마한은 서에 있다.’ 하였는데, 그것이 삼한 지방을 가리킴은 또한 확실하다. 그 뒤에 혁거세(赫居世)가 진한에서 추대되어 신라가 시작되었고, 온조(溫祚)가 마한을 멸망시키고 백제를 일으켰고, 수로(首露)가 진한의 남쪽 경계를 차지하여 가야산(伽倻山)의 남쪽과 지리산(智異山)의 동쪽이 모두 그의 소유였는데 곧 변한의 땅인 듯하다. 그러니, 남쪽은 남쪽대로이고 북쪽은 북쪽대로 이어서 본디 서로 침범하지 않았다. 그 경계가 어느 곳에 있었는지는 확실히 모르나, 아마도 한수(漢水) 일대가 남북을 가르는 천연의 구덩이었을 것이다.”
하였다.
임씨(林氏) 상덕(象德)는 이르기를,
“이때에 조선은 이미 망하고 삼한은 넓고 거칠었는데, 백성이 지리(地利)를 따라 모여 살면서 각각 부락을 만들고 간혹 웅장(雄長)이 있으면 다 나라라고 칭하니, 삼한이 거느린 나라가 무려 70여 국이나 되었고 조선ㆍ예맥 사이에 있던 작은 나라는 다 적을 수 없다. 신라가 처음 일어나서부터 수 십년 사이에 고구려가 패수(浿水) 북쪽에서 일어나고 백제는 한수 남쪽에서 일어났는데, 작은 나라들이 항복하거나 멸망하여 모두가 삼국의 군현(郡縣)이 되었다.”
하였다.
【안】 《후한서》와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에 비로소 삼한전(三韓傳)을 넣었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이렇게 적혀 있다.
마한 사람들은 농사짓고 누에 치며 면포(綿布)를 만들 줄 알았다. 배[梨] 만한 큰 밤[大栗]이 나고, 길이가 5척이나 되는 장미계(長尾鷄)가 있다. 마을에 모여 살지만 성곽(城郭)은 없으며, 토실(土室)을 지어 사는데 모양이 무덤과 같고 문이 위로 났다. 꿇어앉아 절할 줄 모르며, 어른 아이와 남자 여자의 분별이 없다. 금은 보화와 비단ㆍ털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마소[馬牛]를 탈 줄 모르며, 다만 꿴 구슬을[纓珠]을 중히 여겨서 옷에 꾸미고 또 목에 걸고 귀에 드리운다. 대개 괴두 노계(魁頭露紒)하고 포포(布袍 베 도포)를 입고 초리(草履 짚신)를 신는다. 그들은 씩씩하고 용맹하여, 소년 중에도 집을 짓기에 힘을 쓰는 자가 있는데, 등 가죽에 끈을 꿰어 큰 나무를 거기에 달아매고는 건장하다고 떠들어댄다.
항상 5월이면 귀신에게 제사지내며 밤낮으로 술잔치를 벌리고 여럿이 모여 노래와 춤으로 즐기는데, 춤을 출 때에는 수십 인이 서로 따라 가며 땅을 차는 것으로 절도를 삼는다. 10월에 농사가 끝나면 또한 다시 그와 같이 한다. 모든 국읍(國邑)은 각각 한 사람이 천신에게 제사하는 것을 주장하는데 천군(天君)이라 부른다. 또 소도(蘇塗)를 두어, 큰 나무를 세우고 영고(鈴皷)를 걸어 놓고서 귀신을 섬기는데, 소도란 뜻은 부도(浮屠)와 비슷한 데가 있다. 남쪽이 왜국과 가까와서 또한 문신(文身)한 자들이 있다.
그 나라들은 각각 장수가 있는데, 큰 자는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邑借)라 하며,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있는데, 성곽은 없다. 애양국(愛襄國)ㆍ모수국(牟水國)ㆍ상외국(桑外國)ㆍ소석색국(小石索國)ㆍ대석색국(大石索國)ㆍ고탄자국(古誕者國)ㆍ신분활국(臣濆活國)ㆍ백제국(伯齊國)ㆍ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ㆍ우휴모탁국(優休牟國)ㆍ고리국(古離國)ㆍ노람국(怒藍國)ㆍ월지국(月支國)ㆍ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ㆍ소위건국(素謂乾國)ㆍ고원국(古爰國)ㆍ막로국(莫盧國)ㆍ비리국(卑離國)ㆍ점리비국(占離卑國)ㆍ신흠국(巨釁國)ㆍ지침국(支侵國)ㆍ구로국(狗盧國)ㆍ비미국(卑彌國)ㆍ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ㆍ고포국(古蒲國)ㆍ치리국국(致利鞠國)ㆍ염로국(冉路國)ㆍ아림국(兒林國)ㆍ사로국(駟盧國)ㆍ내비리국(內卑離國)ㆍ감해국(感奚國)ㆍ만로국(萬盧國)ㆍ벽비리국(辟卑離國)ㆍ구사오단국(舊斯烏旦國)ㆍ일리국(一離國)ㆍ불미국(不彌國)ㆍ우반국(友半國)ㆍ구소국(狗素國)ㆍ첩로국(捷盧國)ㆍ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ㆍ신소도국(臣蘇塗國)ㆍ막노국(莫盧國)ㆍ고랍국(古臘國)ㆍ임소반국(臨素半國)ㆍ신운신국(臣雲新國)ㆍ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ㆍ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ㆍ일난국(一難國)ㆍ구해국(狗奚國)ㆍ불운국(不雲國)ㆍ불사분야국(不斯濆邪國)ㆍ원지국(爰池國)ㆍ건마국(乾馬國)ㆍ초리국(楚離國) 등 무릇 50여 국이 있다. 큰 나라는 만여 집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집인데, 모두 합하여 10여 만 호(戶)이다.
신지(臣智)는, 신운견지보(臣雲遣支報)ㆍ안야축지(安邪踧支)ㆍ분신리아불례(濆臣離兒不例)ㆍ구야진지렴(拘邪秦支廉)이라는 칭호로 더 우미(優美)하게 부르기도 한다. 그 벼슬에는 위솔선(魏率善)ㆍ읍군(邑君)ㆍ귀의후(歸義侯)ㆍ중랑장(中郞將)ㆍ도위(都尉)ㆍ백장(伯長)이 있다.
○ 진한(辰韓)의 풍속으로는 나라[國]를 방(邦)이라 하고, 활[弓]을 호(弧)라 하고, 적(賊)을 구(寇)라 하고, 술 따르는 것[行酒]을 행상(行觴)이라 한다. 서로 호칭하기를 모두 도(徒)라 하며, 모든 작은 고을[小邑]에 각각 우두머리[渠帥]가 있는데, 큰 자는 신지(臣智)라 부르고, 다음에는 험측(險側)이 있고, 다음에는 번예(樊穢)가 있고, 다음에는 살해(殺奚)가 있고, 다음에는 읍차(邑借)가 있는데, 모두 벼슬 이름이다.
땅이 기름져서 오곡을 심기에 마땅하며, 상잠(桑蠶 뽕을 가꾸어 누에를 치다)하고 겸포(縑布 깁, 생견(生絹))을 만들고 마소[牛馬]를 탈 줄안다. 예를 갖추어서 혼인하며, 남녀의 분별이 있으며,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는 데에는 큰 새의 깃을 쓰는데 그 뜻은 죽은 사람을 하늘로 오르게 하려는 것이다. 이 나라에는 쇠[鐵]가 나는데, 한(韓)ㆍ예(濊)ㆍ왜(倭)가 모두 여기서 가져간다. 저자에서 매매하는 데에는 모두 쇠를 쓴는데, 마치 중국에서 돈[錢]을 쓰는 것과 같으며, 또 이것을 이군(二郡 낙랑군 대방군)까지 공급한다, 풍속이 노래와 춤과 술 마시고 거문고ㆍ비파 타기를 좋아하는데 비파의 모양은 축(筑)과 같으며 타면 또한 음곡(音曲)이 나온다.
아이를 낳으면 곧 돌로 머리를 눌러 넙적하게 하려 하므로, 진한 사람은 모두 넙적머리[扁頭]이다. 남녀가 왜(倭)에 가까와서 문신(文身)을 한다. 보전(步戰)의 병장(兵仗)은 마한(馬韓)과 같다. 그 풍속은 길가는 사람이 서로 만나면 모두 멈추어서 길을 양보한다.
○ 변진(弁辰)에는 또한 성곽(城郭)이 있고, 의복ㆍ거처가 진한과 같고, 언어와 풍속이 서로 비슷하나, 귀신을 제사하는 데에 있어서는 달라서, 조(竈 부엌, 부엌을 지키는 귀신)를 모두 문 서쪽에 설치한다. 사람의 생김새는 모두 크고 머리털이 아름다우며, 의복이 깨끗하고, 형법(刑法)이 매우 엄하다. 그 나라가 왜(倭)에 가까우므로, 문신(文身)한 사람이 퍽 많다.
진(辰)ㆍ변(弁) 두 나라에, 이저국(已柢國)ㆍ불사국(不斯國)ㆍ변 미리미동국(弁彌離彌凍國) 변 접도국(弁接塗國)ㆍ근기국(勤耆國) 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ㆍ변 고자미동국(弁古資彌凍國)ㆍ변 고순시국(弁古淳是國)ㆍ염해국(冉奚國)ㆍ변 반로국(弁半路國)ㆍ변 낙노극(弁樂奴國)ㆍ군미국(軍彌國)ㆍ변 군미국(弁軍彌國)ㆍ변 미오야마국(弁彌烏邪馬國)ㆍ여담국(如湛國)ㆍ변 감로국(弁甘路國)ㆍ호로국(戶路國)ㆍ주선국(州鮮國)ㆍ만연국(馬延國)ㆍ변 구야극(弁狗邪國)ㆍ변 주조마국(弁走漕馬國)ㆍ변 안야국(弁安邪國)ㆍ변 독노국(弁瀆盧國)ㆍ사로국(斯盧國)ㆍ우중국(優中國)이 있는데, 합하여 24국이 된다. 큰 나라는 4~5천 집이고 작은 나라는 6~7백 집인데, 모두 합하면 4~5만 호이다. (‘진ㆍ변 두 나라……4~5만 호이다.’는 《산국지》 위서(魏書) 변진조(弁辰條)에 보인다)
○ 여기에는 25국으로 되어 있으니, 아마도 군미국이 거듭 적힌 듯하다.


 

[주D-001]후경(侯景) : 양(梁) 무제(武帝) 때에 하남왕(河南王)으로 봉해졌었는데, 뒤에 배반하여 대성(臺城)을 함락시키고 간문제(簡文帝)를 옹립하였고 곧 또 그를 죽이고서 스스로 한제(漢帝)를 칭하였으나, 얼마 안 가서 왕승변(王僧辯) 등에게 패하였다. 《梁書 卷五十六》
[주D-002]괴두노계(魁頭露紒) : ‘모자 따위를 쓰지 않고 맨머리를 드러내다’의 뜻. 괴두는 머리를 따거나 말아 올린 상투. 《文獻通考 馬國 注》
[주D-003]신지(臣智)는 …… 부르기도 한다 : 이 대목은 가장 해독하기 어려운 글로 여겨져 온다. 원문은 ‘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이다. 이 글을 그대로 번역하면, “신지는 ‘신운 …… 렴’이라는 칭호로 더 우미하게 부르기도 한다.”가 된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무리한 해석이 된다. 이병도(李丙燾) 박사의 설에 따르면, 이 대목을 편사자의 두찬(杜撰)으로 보고, ‘우미하게 부르기도 하였다’라는 말은 임의로 삽입한 것이고 실상은 거수(渠師)의 칭호를 국명(國名)에 붙여서 열거한 것이라고 하였다. 즉, 신운국(臣雲國) 곧 신운신국(臣雲新國)의 견지(遣支) 곧 험측(險側)인 보(報)―아마도 인명―과, 안야국의 축지 곧 신지와, 분신리아국 곧 신분활국(臣濆活國)의 불례 곧 번예(樊濊)와, 구야국의 진지인염―아마도 인명―으로 풀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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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星宿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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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02g0637a 님
김진숙님의 포토입니다.

공작(peacock, 孔雀)

동물 소개
닭목(―目 Galliformes) 꿩과(―科 Phasianidae)에 속하는 몇 종(種)의 화려한 조류. 엄밀하게 말하면 영어로 수컷을 피콕(peacock), 암컷을 피헨(peahen), 암수 모두를 피파울(peafowl)이라고 한다. 공작속(―屬 Pavo)에 속하는 공작(P. cristatus)은 인도와 스리랑카에, 참공작(P. muticus)은 미얀마에서 자바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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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기 아깝습니다 <동 티벳 [川西]을 나는 "內 샹그리라" 라고 부르고 싶다>| 천하위공님의 중국 칼럼
天下爲公 | 조회 63 |추천 0 | 2010.08.16.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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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천하님이 올리셔야되는디 제게보내주신 메일의 내용 그냥올림니다 

내는 갈람니다 내년안으루

 

 

 

 

 

 동 티벳 [川西]을 나는 "內 샹그리라" 라고 부르고 싶다

 

옛말에 촉도지난 (蜀道之難)이라는 말이 있었다.

 

세종 임금도 못 말린 천하에 한량...양녕대군이 어느기생 치마폭에

너를 만나려 가는길이 蜀 으로 가는 길보다도 험 하고 힘이 드는구나...어쩌구...저쩌구...하듯

 

그러한  蜀道之難 이란 이름은 명함을 내밀수 조차 없는 

茶馬古道(川藏公路 를.....

 

 

 

 +++ 검문관. +++

  

 +++ 험준한 검문관 일각. +++

 

蜀道之難에 할배 보다 몇 곱절 힘든길 茶馬古道 ....를 다녀 왔수다레

 

 

운남에서 시작 되는 茶馬古道(전장공로)는 2004년도 에 메리설산 까지 다녀온것으로 대리 만족을 하고.....

덕흠을 거쳐 鹽井을 가려면 사전에 티벳 퍼밋(통행허가)를 받아야 되기에 생략을 하고서리...

 

四川省 成都 외곽 上里 古鎭에서 부터 시작되는 川藏公路를 가보려고 ...

그 동안 기회를 만들어 오는 중에

 

중여동 회원 이시며 오지 여행 전문가 이신 어느 노 선배가 

2010.5.26-6.4까지 10일 일정으로 어느 자유여행동호인 카페에서 만난 회원 29명과 함께

중국 사천성 청뚜에서 시작하여, ,,,,川藏南路

야안-루딩-칸딩-신두교-야강-리탕-따오청-야딩-칸딩-무거쵸-공가산(해라구)을 가려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청을 드려 합류 할수 있는 기회를 얻어

때묻지 아니한 웰빙여행 이고  청정지역을 동행을 하여 다녀 왔습니다 

 

본 팀과 성도 합류 3일전에 심양에서 사천성 성도로 출발 하여 오래전 부터 가보려 했던 劍門閣 을 다녀와서

 

 

대략의 코스개념도 

 

 

  

이번 투어의 핵심인 최후의 샹그릴라로 불리는 야딩풍경구 사진들입니다.

 

 또우청 에서 야딩 가는길

 

 

 

 

  

 

 

 

 

 

 

 

 

 

 

 

 

 

 

 

 

 

 

 

 

 

 

 

 

 

 

 

 상기 사진들은 그동안 컴에서만 떠도는 샹그리라 야딩 풍경구 사진 모음 임다.

 

 

 

야딩(亞丁) 진주해에서 바라 본,

현지인들이 원조신산이라고 부르는 선네일 설산(관세음보살)

 

결론부터 말하자면, 빠듯한 일정으로 成都를 벗어나서

그다음 날 부터...평균  해발 4-5000미터 높이의 산을 6번이나 넘고 달리는 구간이 있는데,

고소증에 시달리며 ...하루 평균 12 ~14 시간의 차량으로 강행군 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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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전에 코스와 여행지를 안내할 때

사전에 여러 정보를 충분히 알려야 했었는데 ,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고혈압이나

당뇨 또는 우울증 환자까지 참여하여 가끔 힘이 들고 고난의 연속 이였다. 

 

 야딩을 가기위해서는 이런 고산의 산허리를 수 십 번씩 돌고 돌며 올라갔다 내려오는 코스를 달려야 했습니다

(카즈라산 고갯길에서). 평균 해발 4000 M 이상 이다.

 

한국에서 출발하는 일행(本隊)들이 묵기로한  신남문 교통빈관(新南門  交通빈관)에 찿아가서 합류를 하고

 

청뚜 교통빈관의 숙소는 외국인 배낭여행자들이 즐겨찾는 곳이어서 깨긋하면서도 저렴한 것이 특징이다.

호텔급인데도 3-4인용 도미토리는 1인당 45위안에 묵을 수 있으며, 표준방은 145-190위안이었다.

 

제2일 청뚜에서 칸딩으로 가는 길은 비교적 포장이 잘 되어있으나 

얼랑산 터널을 앞에두고 산사태가 나서 3시간이나 차를 세우고 기다려야 했는데,

우리 버스가 지나가자 다시 큰 바위가 굴러내려 뒤따르던 차량들은 그 곳에서 하룻밤 세워야 했다는

가슴이 철렁한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우리가 칸딩을 지날 때는 벌써 어두운 밤이었으며,

해발 4200미터의 절다산 고개를 넘을 때는 눈보라가 휘날리고 있었다.

그러나 신두치아오(신도교)로 가는 절다산 고갯길은 포장이 잘 되어있어서 어렵지 않게 예약한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게스트하우스는 2인실 표준방 하나에 100위안으로 좀 비싼 편이었지만 묵을 만 했다.

 

제3일은 따오청까지 가는 긴 여정이어서 아침 7시에 출발하였다.

그런데 한 여성회원이 차멀미를 시작하면서 고통을 호소했는데, 머리까지 아프다고 해서 걱정되기도 했다.

 

고산병증세로 보지는 않았지만 심리적인 안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비아그라 반쪽을 먹도록 했는데,

바로 토해 버려서 쉬는 시간에 안정을 찾은 뒤 다시 복용시켜야 했다.

아무튼 그 이후 이 회원은 탈 없이 전 일정을 마칠 수 있었다.

 

 

야딩가는 길의 티벳불교 사원의 모습 

 

가는 길에 기사와 가이드가 점심 먹는 식당문제로 의견이 엇갈리는 것을 보았는데,

가이드는 이 길이 초행길인지 기사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는 것 같았고,

우리가 기사가 추천하는 가격 높은 식당을 피하려 하자

 

그는 심통을 부려 아주 지저분한 식당 앞에 차를 세우는 것이었다.

아침을 굶은 일부회원들이 어쩔 수 없이 볶음밥과 국수를 시켜 먹었는데,

국수는 차마 입에 당기지 않았으며, 볶음밥 하나를 두 셋이 나누어 먹자

기사가 값을 올려 받도록 부추기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인간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도시 리탕에 도착하여 허름한 식당에서 점심 겸 저녁을 맛있게 먹고

늦지 않은 시간에 리탕을 빠져 나와 따오청 변두리에 위치한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 수 있었습니다.

<리탕은 해발이 너무 높은 도시 이라서 여행객들의 고산증 증세를 피하기 위하여 다른 도시에서 숙박을 합니다.>

날씨는 좋아보였으나 야딩의 변덕스러운 날씨가 걱정되는 하룻밤이었다.

  

 

 제4일째 따오청의 아침은 맑았으며,

야딩에 들어서는 고갯길에 이르자 멀리 선네일 신산이 모든 것을 내 놓고 우리를 맞아 주었다.

야딩의 입장료는 150위안이었으나 60세 이상은 80위안으로 할인 해 주었다.

그런데 공원 내 셔틀버스요금을 120위안이나 받아먹는 것이었다.

우리는 숙소마을을 지나쳐 바로 야딩풍경구로 달려가 우선 충고사를 거쳐 진주호를 찾았습니다.

 

 야딩마을

 

 야딩의 고찰 충고사와 선네일신산

 

 진주호

 

 진주호의 아가씨들

 

진주호의 물은 많이 말라있었으며,

호수 안에 아름다운 모습을 비춰주며 찰랑거릴 것으로 기대했던 선네일신산은 없었다.

시간적으로 늦은 오후여서 산의 모습이 잠기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송판으로 만들어 놓은 쉼터에 누어 거꾸러 선내일신산을 올려다 보며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정상은 언제나 구름이 일고 있어서 파란 하늘 밑에 우뚝 솟은 그 끝은 볼 수 없었다.

 

새로 단장한 충고사 전경

 

그날 저녁 묵은 티벳전통가옥은 참으로 어이없는 숙소였다.

천장에 전등은 달려있는데 전기는 이미 끊긴지 오래였으며, 화장실도 집밖에 2개뿐이었다.

세수하는 곳도 간이시설이었다. 취사장은 손가락 만한 촛불하나로 불을 켜고 있었으며, 식당도 마찬가지였다.

 

 티벳가옥 수소 3층 지붕에서 본 마을 모습

 

제5일째 날은 아침부터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 때문에 늦게 출발하였는데,

오늘은 처음부터 말도 타고 전기차도 타면서 우유-오색호까지 다녀올 생각이었다. 충고사까지 말 타는 값은 40위안이었다.

그 곳에서 20여분 걸리는 낙용목장 까지의 전기차는 왕복 80위안이었다.

 

건너편 현지인 간이숙소까지 나무 마루판을 이어 새로 깐 것 같은 넓은 길이 이어졌다.

  

충고사에서 낙용목장 가는 길의 습지 초원 

 

비는 멈추었지만 바로 앞에 해맑게 맞아줄 것으로 기대했던 해발 5958미터 앙메용설산은 구름 속에 숨어있고

좌축에 우뚝 솟아있어야 할 같은 높이의 하나답길 설산도 히끗히끗 윤곽만 보이는 것이었다.

 

넓은 초원에서 이제 막 올라오는 풀을 뜯고 있던 야크들도 더 이상 없었고

현지인 토굴마을에서 왕복 300위안에 말을 빌려 타고 우유해를 오르기 시작하는데,

비 온 뒤라 길이 진창이어서 말이 미끄러져 넘어질까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길을 걸어서 오르면서도 동충하초 캐러가는 현지 여인들에 뒤처지지 않았는데,

우유호에 이르는 마지막 고갯길 위험구간을 말에서 내려 10여분 걸어가면서 가쁜 숨을 헐떡이어야 했다.

  

 우유호수 오르는 고갯길의 작은 폭포

 

 우유호수

 

우유호가 내려다보이는 고개에 이르자 먼저 온 일행들이, 호수주변의 한없는, 맑고 깨끗함에 취해 있었다.

. 한 발 한 발 마지막 힘을 다해 언덕꼭대기에 이르자

선네일신산에서 흘러내린 하얀 석회암이 자갈무더기가 발을 담그고 있는 비취빛 찬란한 오색호가 한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언덕아래 앙메용신산이 잠겨있는 우유호가 내려다보이는 것이었다.

마부들은 그 아름다움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동충하초 찾기에 열심이었으며 잠간 사이 두 개나 캐는 것이었다.

이곳에 서면 누구나 그 청아한 모습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는가 보다. 현지인들이 원조신산이라고 부를 만큼 맑고

깨끗하고 높고 아름답고 신비스럽기 때문이다.

이제 내려가면 다시 올 수 있을까 하는 맘으로 긴 한 숨을 내쉬어야 했다.

  

선네일신산 아래 오색호수

 

오색호 언덕에서 내려다 본 우유호수

  

 60대 중반에 든 나이 다시 이 곳에 올 수 있으랴!

 

오색호 언덕에서 저마다 준비해 온 간식으로 점심을 때우고 마부의 다그침에 따라 하산하였다.

 

 아무리 돌아보아도 앙메용신산은 얼굴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구름속에 감추어진 앙메용의 모습이랍니다.

  

 낙용목장 건너편에 현지인 토굴마을(말 타는 곳)이 보임

 

 

동티벳고원의 하늘(멀리 보이는 마을은 해빌 4000미터가 넘는 분지에 자리잡은 리탕)

 

 티벳고원의 하늘 빛

 

  

 끝없는 해발 4-5000미터의 산악지평선

 

 

제6일째 우리는 칸딩까지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

마침 날씨가 좋아서 갈 때 보지 못했던 해발 4-5000미터 동티벳고원의 특이하면서도 아름다운 풍경을 다 볼 수 있었다.

동티벳고원에서 멀리 보이는 공가산 일대

 

절다산을 넘으면서 다시 비가 오기 시작했으며, 칸딩에서도 보슬비를 맞아야 했다.

오랜만에 자유여행답게 각자 저녁식사를 해결하고 일부는 호텔옆에 있는 안마소에서 피로를 풀기도 했다.

100분에 60위안이었다.

 

제7일째 우리는 예정대로 무거쵸로 이동하였다.

셔틀버스요금을 포함해서 1인당 163위안을 주고 들어갔다. 무거쵸는 호수 그 자체 보다는 그 곳에서부터 내려오는 두견계곡이 아름답다.

해발 3600미터에 위치한 호수의 둘러싼 산은 설산인데 안개가 자욱하여 조망할 수 없었다.

우리는 한켠에서 꼬치구이로 파는 야크고기를 먹으며 시간을 보내다 두견계곡을 따라 도보로 발온천장까지 하산하였다.

온천은 섭씨 90도씨의 물이 솟아나는데 입장료도 받고 삶은 달걀도 팔고 있었다. 물은 자주 갈아주지 않았는지 이끼도 끼어있고 그리 깨끗해 보이지 않았다.

  

 두견계곡

  

 공가산 해라구  야외 온천

지난날 서울 여행가 회원들과 함께  왔었던  해라구 온천 안에 호텔에서 1 泊

  

 

 

공가산으로 들어가는 오후 5시 마지막 셔틀버스시간이 맞추어 입구에 도착하였다.

입장료에 셔틀버스 요금까지 150위안이었다. 노인 할인은 없었다.

 공가산 해라구 빙천 온천의 중간지점

 

 

 온천지역 숙소(중국에서 가장 비싼 편임-도미토리도 1인 204위안)

  

 

제9일 아침에도 일부 부지런한 회원들은 온천욕을 즐기기도 했는데,

아침을 먹은 후 곧장 청뚜로 돌아와서 금리거리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저녁식사도 각자 알아서 해결했던 것이다.

 

제10일 마지막 날 우리는 아침부터 서둘러 공항으로 이동을 하고

나는 이곳에서 오후 비행기로 심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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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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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궐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11.14 고지도들 중엔 현재의 서안 서북쪽 황하의 상류정도에 한(韓)이란 지명이 자주 표기됌을 보건데...
    서안이나 낙양을 경기도로 산정했을 시...청해성에서 발원하는 한강(양자강 북류)의 강원(江原)의 조건이 그 서부에 가능한 지명이며...
    가섭원이 강원도다 ...아니 그건 현재의 지명에 맞춘 오기다...뭐다의 조선인들 갑론을박기록은...
    고지도상의 사천성에 표기됀 강원(江原)이...진정한 양자강 북류 한수(漢水)의 기원은 아니란 얘기 같으며...
    원래는 한(韓)이란 지명이 많은...현재의 한중(漢中)보다 훨씬 서북쪽인...섬서성 서쪽 감숙성 주위정도 중심을 가섭원이라 했다 예상됍니다.
    청해성도 그 유력 후보지일 겁니다.
  • 답댓글 작성자궐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11.14 전체적 추측으론...곤륜산 마고할미(서황모)의 나라가 마한일지 싶습니다.
    그럼 단군신화의 웅녀 할머니 나라요...황제의 토템인 곰(고마)와도 같으니...한(韓)이 한(漢)이고 칸(汗)이란...
    원론적인 옛 사람들의 규정도 일리있는 것이며...
    황제란 인물 자체가 동이족이 아닌 이방족은 아니란 얘기 같습니다.
  • 작성자문 무 | 작성시간 11.11.13 사진, 귀한 사진 정말이지 가보고 싶은 곳입니다.
    마음 것 감상하겠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궐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11.14 저는 돈 좀 생기면...꼭. 아르항가이(항애산)에...사라진 고려성(돌궐,여진,거란,고구려 공통 발원 천자(皇天)의 성)과 민속촌을 만들고 싶답니다.
    청명한 공기와 산과 강 벌판이 어우러진 자연에서 조랑말 타며..좀 늦은감 있지만...자연인답게 살아보고 싶습니다.
    최소 병원 하나와...이를 운영할 사업기반은 있어야 가능할 삶 같아 문제지만여...^..^
    상당계절이 춥고...비상시의 의료체계 부재는 극복해야할 조건이거든요...
    인터넷 망도 구축해 놔야...수다도 떨 수 있겠고여...ㅡ. .ㅡ
  • 답댓글 작성자궐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11.14 다시 환타지로 돌아가...
    만일 여건이 너무 잘 풀린다면...
    단지, 상징적이고 관관상품 정도만의 수준까지만이라도...
    그 아르항가이 투구산에서...북부여(皇天)족들의 대 쿠릴타이(호를태,호로회)를 소집(재연)해 보고도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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