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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金春洙 1922∼) 시인의 약력과 시 80편

작성자muse|작성시간04.09.18|조회수178 목록 댓글 0
김춘수(金春洙 1922∼)

시인. 경상남도 통영(統營) 출생. 경기중학교를 마치고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과를 중퇴하였다.

1946년 해방 1주년기념시화집 《날개》에시 <애가(哀歌)>를 발표하여 작품활동을 시작하였고 대구에서 발행된 동인지 《죽순(竹筍)》에 참가하였다. 48년 시집 《구름과 장미》로 등단하여 《사상계》 《현대문학》 등에 작품을 발표하였다. 초기에는 R.M.릴케의 영향을 받은 시를 썼으나 50년 이후부터는 이른바 의미의 시를 쓰기 시작했다.

경북대학교 교수와 예술원회원·한국시인협회장을 지냈다. 주요작품으로 《김춘수시집(1982)》 《늪(1950)》 《꽃의 소묘(1959)》 《처용 이후(1982)》 등의 시집과 《의미와 무의미(1982)》 등의 시론집이 있다.




1. 약력

1922년 11월 25일 경남 충무에서 출생, 통영보통학교를 거쳐 명문 경기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5학년 때 스스로 퇴학하고 40년 일본대학 창작과에 입학하였으나 42년 12월 사상 혐의로 퇴학 처분 당하였다.

이후 충무에서 유치환, 윤이상, 김상옥 등과 <통영문화협회>를 만들어 예술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통영중학 교사로 재직 시절인 47년 첫시집 <구름과 장미>를 출간했다. 49년 다시 마산중학으로 옮기고 제2시집 <늪>, 제3시집 <旗>, 제4시집 <隣人>을 차례로출간하면서 왕성한 창작 활동을 전개했다.

60년대부터 해인대, 경북대, 영남대 교수를 차례로 거쳐 81년에는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한국시인협회상, 자유아세아 문학상, 경상남도 문화상, 대한민국 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82년에는 문장사에서 詩와 詩論에 대한 <김춘수 전집>을 출간하여 회갑 맞이 작품 정리를 시도해 보기도 했다.

80년대 중반 이후부터 세계의 여행을 통해서 그의 무의미 시를 다져 가고 있다.



2. 김춘수 詩의 변천사(意味에서 無意味까지)

김춘수의 詩는 세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 큰 변화의 단계가 있다.

그 첫번째가 첫 시집이 나오던 47년 무렵부터 50년대의 <꽃>에 대한 일련의 詩가 생산되던 시기까지로 볼 수가 있다. 이 시기를 시인 스스로 이야기하기를 '自己內 世界'의 시절이라고 한다.

두번째 단계는 57년의 詩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이후로 시작되는 `말의 트레이닝' 단계이다. 이때 시인은 의식과 무의식의 詩作에서의 상관 관계에 천착하게 된다.

마지막 변화의 단계는 두번째 단계의 시도가 거의 완성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보는 <처용단장 2부>를 시작하던 무렵부터로 본다. 이때부터 시인은 완벽하게 보통 시 속에서 보여지는 통일된 image를 버리고 일정하고 보편적인 세계관에서 이탈하며 철저한 허무 속으로 빠지게 된다.


가) 意味의 시기

첫 시집인 <구름과 장미>에 대한 시인의 설명을 보면 `구름은 감각으로 설명도 없이 나에게 부닥쳐왔지만 장미는 관념으로 왔다. 따라서 장미를 노래한 것은 하나의 이국 취미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때로부터 나는 장미를 하나의 유추로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시인은 하나의 시적 방법론을 정립하지 못하고 '촉각'에 의지한 詩를 썼으며 그것은 意味(말)보다 먼저 tone이 앞섰다.

시인의 발상은 서구의 관념 철학으로 접근해 갔으며, 그가 사숙(私淑)했던 릴케의 영향력과 함께 형이상학적 인식의 세계로 침잠하여 선험의 세계를 떠돌기에 이른다. 그러다 결국 시인은 '실제 감각' 따위를 잃어버리고 지적으로는 불가지론의 바닥에서 끝내는 '허무'함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 존재의 허무함 앞에서 시인은 <꽃>, <꽃을 위한 서시> 등의 詩를 남기기에 이르는데, 이러한 詩들을 고비로 시인은 의식적으로 '말의 트레이닝' 곧 '데생 시기'로 돌입하게 된다.


나) 意味에서 無意味로

시인은 50년 말에서 60년 전반에 걸쳐 이른바 '말의 트레이닝'에 들어간다. 그것은 관습적인 언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에서 사물의 의미와 질서에 대한 시적 재구성을 해가는 작업이었다. 그에 의하면 비유적 image를 버리고 image를 위한 image로써 詩를 일종의 순수한 상태로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시인은 세잔이 사생(寫生)을 거쳐 추상에 이르는 과정을 확신하고, 詩로 이 과정을 대체 경험하기 위해 노력한다. 즉 사생이라고해서 있는 풍경을 그대로 그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집이면 집, 나무면 나무를 대상으로 좌우의 배경을 취사 선택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대상의 어느 부분을 버리기도하고, 과장되게도 하고, 실제와 전혀 다르게 재배치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대상의 재구성이며 이 과정에서 논리가 끼이게 되고 자유 연상이 끼이게 되는 것이다. <처용단장 제 1부>는 이러한 트레이닝 끝에 쓰여진 연작시이다.

여기서 '말의 트레이닝'을 다른 말로 바꾸면 일종의 '언어 유희'이다. 李箱의 시가 '말의 장난'이었던 것처럼 이 시기의 김춘수의 시를 '예술=장난'이라는 오락 예술론의 재시도로 보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시는 무엇이가를 말하려는 시가 아니라 무념무상의 세계로서, 의미가 없는 전체적이며 동시적인 어떤 '연상(聯想)의 순간'과 같은 개념으로 보는 것으로 이러한 것을 '무의미 시'로 지칭한다.


다) 無意味詩

김춘수는 image를 image 그 자체가 목적인 서술적 심상과 관념을 전달하는 수단인 비유적 심상으로 나누고, 서술적 심상을 다시 대상을 가진 서술적 심상과 대상을 놓친 서술적 심상으로 나누면서, 바로 이 대상을 놓친 서술적 심상에서 無意味시가 탄생한다고 하였다.

시인의 표현을 직접 빌리면

[나에게 있어 무의미란 무엇일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노력이다.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무의미시는 관습이나 기성 관념의 입장에서 보면 '허무'가 된다. 허무는 일체의 의미를 거부한다. 그것은 이 세계를 의미 이전의 원점으로 돌리는 일이 된다.]

고 하여 그의 시를 지탱시키는 현상학적 에너지가 '허무'임을 이야기한다. 즉 李箱의 경우처럼 대상과 사물과 관념을 제거시키고난 어떤 방심상태, 그 자유스러운 유희의 상태가 곧 '무의미시'라는 것이다. 따라서 무의미시는 전혀 유사성이 없는 image들을 비논리적으로 결합시킨 대상을 놓친 절대 심상인 것이다.

다른 시인들은 image를 얻으려는데 비해 김춘수는 image를 버리려 한다. image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image의 명중성, 의미성, 상징성 따위를 파괴하려는 것이다. 대상의 구속을 받는 의식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언어 행위와 사고 행위가 빚어내는 무의미시, 곧 탈image의 리듬과 쾌감으로부터 구원을 얻고자 하는 것이 그의 시이다.


3. 김춘수 詩에 있어서의 개인적 상징

김춘수의 시가 난해한 이유는 기법상의 초현대성과 함께 보편성이 없는 개인적 상징을 그의 시어에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바다>, <꽃> 같은 시어들은 그의 시 속에서 특수한 의미로 표현되는데 특히 <처용단장>의 주된 맥을 이루는 <바다>에 대한 시인의 말을 인용하면

[바다는 '병'이고 '죽음'이기도 하지만, 바다는 또한 '회복'이고 '부활'이기도 하다. 바다는 내 '유년'(幼年)이고 또한 내 '무덤'이다.]

라고 했다. 곧 시인은 <바다>에서 여러 가지 개인적인 특수한 의미를 부여하고 이러한 의미간의 무상관성 때문에 시는 자연히 보편성을 잃고 난해해지는 것이다.


4. 인간 김춘수

김춘수는 충무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세상 물정을 모르고 자라난 귀공자였다. 그의 유년기 시절은 자전적인 그의 소설 <처용>에 비교적 자세히 소개되고 있는 편이다. 그러한 그의 생활이 장년이나 노년이 된 이후에도 그를 현실에서 좀 떨어진 고고한 위치에 서 있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는 또한 양복 윗도리를 매일 갈아입는 멋쟁이였으며, 미식가였고, 사람을 사귐에 있어서도 선별적으로 사귈 만큼 성격에 융통성이 있는 편은 아니었다. 허약해 보이는 체구와 여자의 손처럼 희고 깨끗한 손, 거울 같은 구두에 드러나는 그의 결벽성은, 여러 제자들과 술자리에 어울렸다가 제자들이 술집 여자로 접대하려하면 가차없이 내쫓아버리는 공선생 같은 면모와 맞아 떨어졌다. 무엇보다도 신체의 결정적 결함이었던 대머리를 감추기 위해 한 때는 가발을 쓰고 다니기도 했지만 딸들의 절대적인 반대에 부딪쳐, 계절에 맞게 여러 개의 모자로 대신하기로 했다. 한때는 위장병이 악화되어 수전증까지 일으켰지만 수술 후에는 오히려 몸이 불어나 얼굴에는 윤기가 나고 배가 앞으로 나올 만큼 풍체가 좋아졌으며 자연히 수전증도 사라졌다. 그의 결단력 또한 대단해 수술 후에 결연히 금연을 해 동료 흡연가들을 놀라게 했다.

집안에서 그는 전기 휴즈도 하나 갈아끼우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에도 7,8년간 사진 한 장 찍어보지 못할 만큼 세상살이에는 무관했으며 심지어 카메라의 셔터가 어느 것인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거기다 그는 고소 공포증이 심각해서 74년에 새로 집을 지을 당시 2층 계단에도 올라서지 못할 정도여서 옆집에 살던 동료 교수가 대신 감독을 해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국회의원 시절 의원 사절단으로 세계 일주를 다녀오면서 그 심각한 고소 공포증을 고쳤다고 하니 국회의원이 좋기는 좋은 모양이다.

그는 예술가답게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18년간 제자 양성에 정성을 기울인 경북대를 떠나 영남대로 자리를 옮긴 것도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악명높던 K총장과 그 주변 인물이 무슨 심의위원회란 것을 만들어 직,간접으로 여러 가지 제약을 가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 여겨진다.

또한 그는 시인이지만 그림에도, 조각에도, 꽃에도 조예가 깊다. 벽에 걸린 탈이나 그림을 늘 즐거이 바라보고 아끼고 사랑한다. 지금도 그의 집 안마당에는 전라(全裸)의 여인상이 자리하고 있고 수많은 기화요초가 향기를 품고 있으며 값의 고하를 막론하고 마음에 들면 즉석에서 구입하는 분재들이 즐비하게 놓여있다.

대학에서 행한 그의 강의는 언제나 열강이었다. 국문학과 전공 강의인 <시론>시간에는 학년 정원의 3배를 웃도는 수강생으로 북적였으며 늘 시간이 끝나는 것도 모르고 강의를 계속해 다음 시간의 교수를 복도에 오래 세워 놓기도 했다.

제 5공화국 출범과 동시에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어 정계로 진출한 뒤 그는 어느 신문기자와의 대담에서 정치와는 관련이 없던 시인이 의원 생활을 하는 것에 대해 "내게 있어 시는 최선의 도덕적 결백을 위한 윤리요, 의지라고 말할 수 있다면, 정치란 최선을 우선하다 차선, 삼선의 여지로서 운영되는 현실에 대한 나의 참여이다."라고 자신의 견해와 입지를 밝히기도 했다.

시인이요, 교수요, 국회의원이기 이전에 인간 김춘수는 겉으로 보기엔 차갑고 냉담한 느낌의 외모를 가졌지만, 드넓은 통영 앞바다를 사계절 지켜 보며 자란 까닭에 깊고 담담한 인품과 경상도 남자답게 표현에 능숙하지 못한, 조금은 어리숙하고 세상 물정에 어두운 한 사람의 인간이었다.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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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 경남충무출생
1946 "애가"를 발표하고 시작활동을 함.
1948 첫시집 [구름과 薔薇] 간행
1950 제2시집 [늪] 간행
1951 제3시집 [旗] 간행
1953 제4시집 [隣人] 간행
1958 [한국 현대시 형태론](해동문화사) 간행. 제2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1959 시집 [꽃의 소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간행. 제7회 자유아세아문학상 수상
1961 [시론] 간행
1964 78년까지 경북대학교 교수로 재직
1969 시집 [타령조 기타] 간행
1974 시선집 [처용] 간행
1977 시선집 [꽃의 소묘], 시집 [남천] 간행
1979 시론집 [시의 표정], 수상집 [오지 않는 저녁] 간행. 81년까지 영남대 교수로 재직
1980 시집 [비에 젖은 달] 간행
1981 국회의원 피선. 예술원 회원
1982 시선집 [처용 이후] 간행
1986 [김춘수 전집](문장사) 간행

● <김춘수의 문학세계-중앙일보>
● <김춘수론-이승훈(시인)>

■ 시
● <꽃> <꽃을 위한 서시> <처용단장>, <능금> ,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 수필
● <뻔한 거짓말의 진실> <외할머니를 위한 장미> <향수>



**** 김춘수님의 시 ****

차례

1.가을 저녁의 시
2.꽃
3.꽃을 위한 서시
4.네가 가던 날은
5.능금
6.늪
7.마음의 태양
8.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9.분수
10.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11.처용
12.하늘
13.모른다고 한다
14.구름과 장미
15.또 하나 가을 저녁의시
16.소년
17.가나 마을에서
18.갈대 섰는 풍경
19.겟세마네에서
20.겨울꽃
21.경(瓊)이에게
22.김춘수의 "꽃"을 가르치며
23.꽃 1
24.꽃 2
25.눈물 1
26.눈물 2
27.꽃밭에 든 거북
28.너와 나
29.인동(忍冬) 잎
30.갈대
31.물망초
32.사모곡
33.귀촉도 노래
34.꽃의 소묘
35.구름과 장미
36.겨울밤의 꿈
37.거리에 비내리듯
38.부두에서
39.귀촉도 노래
40.) 계단(階段)을 위한 바리에테
41.기(旗)
42.金宗三
43.정
44.나비
45.나의 하나님
46.길바닥
47.산을 등진 거리
48.오랑캐꽃
49.석류꽃 대낮
50.버찌
51.부두에서
52.도(歸蜀途) 노래
53.마음의 태양
54.나목(裸木)과 시(詩)
55.나이지리아
56.낙일(落日)
57.내가 만난 이중섭(李仲燮)
58.눈물 1
59.눈물 2
60.릴케의 장(章)
61.누란(樓蘭)
62.밤의 시(詩)
63.부재(不在)
64.니가 가던 그날은
65.대지진(大地震)
66.돌
67.두개의 꽃잎
68.둘째번 마리아
69.저녁별
70.땅위에
71.안료
72.분꽃을 보며
73.차례
74.고뿔
75.밤이면
76.비탈
77.봄 C
78.벽이
79.책
80.노래

********************

(1) 가을 저녁의 시

누가 죽어가나 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가는가 보다

살을 저미는 이세상 외롬 속에서
물 같이 흘러간 그 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가는가 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 같이 흘러가 버리는가 보다.



(2)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3) 꽃을 위한 서시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 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이 될 것이다.

...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



(4) 네가 가던 그날은

네가 가던 그날은
나의 가슴이
가녀린 풀잎처럼 설레이었다

하늘은 그린듯이 더욱 푸르고
네가 가던 그날은
가을이 가지 끝에 울고 있었다

구름이 졸고 있는
산마루에
단풍잎 발갛게 타며 있었다

네가 가던 그날은
나의 가슴이
부질없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5) 능금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이미 가 버린 그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날에 머문
이 아쉬운 자리에는
시시각각의 그의 충실만이
익어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애무의 눈짓을 보낸다

놓칠 듯 놓칠 듯 숨가쁘게
그의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며는
세월도 알 수 없는 거기
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가 있다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6) 늪

늪을 지키고 섰는
저 수양버들에는
슬픈 이야기가 하나 있다.

소금쟁이같은 것, 물장군같은 것,
거머리같은 것,
개밥 순채 물달개비같은 것에도
저마다 하나씩
슬픈 이야기가 있다.

산도 운다는
푸른 달밤이면
나는
그들의 혼령을 본다.

갈대가 가늘게 몸을 흔들고
온 늪이 소리없이 흐느끼는 것을
나는 본다.



(7) 마음의 태양

꽃다이 타오르는 햇살을 향하여
고요히 돌아가는 해바라기처럼
높고 아름다운 하늘을 받들어
그 속에 맑은 넋을 살게 하라

가시밭길을 넘어 그윽히 웃는 한 송이 꽃은
눈물의 이슬을 받아 핀다 하노니
깊고 거룩한 세상을 우러르기에
삼가 육신의 괴로움도 달게 받으라


괴로움에 짐짓 웃을 양이면
슬픔도 오히려 아름다운 것이
고난을 사랑하는 이에게만이
마음나라의 원광(圓光)은 떠오르노라

푸른 하늘로 푸른 하늘로
항시 날아오르는 노고지리 같이
맑고 아름다운 하늘을 받들어
그 속에 높은 넋을 살게 하라



(8)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다뉴브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의 첫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발의 소련제 탄환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바숴진 네 두부는 소스라쳐 30보 상공으로 뛰었다.
두부를 잃은 목통에서는 피가
네 낯익은 거리의 포도를 적시며 흘렀다.
-너는 열 세 살이라고 그랬다.
네 죽음 앞에서는 한 송이 꽃도
흰 깃의 한 마리 비둘기도 날지 않았다.
네 죽음을 보듬고 부다페스트의 밤은 목놓아 울 수도 없었다.
죽어서 한결 가비여운 네 영혼은
감시의 1만의 눈초리도 미칠 수 없는
다뉴브강 푸른 물결 위에 와서
오히려 죽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소리 높이 울었다.
다뉴브강은 맑고 잔잔한 흐름일까,
요한 쉬트라우스의 그대로의 선율일까,
음악에도 없고 세계 지도에도 이름이 없는
한강의 모래 사장의 말없는 모래알을 움켜쥐고
왜 열 세 살 난 한국의 소녀는 영문도 모르고 죽어 갔을까?
죽어 갔을까, 악마는 등 뒤에서 웃고 있었는데
한국의 열 세 살은 잡히는 것 한낱도 없는
두 손을 허공에 저으며 죽어 갔을까?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네가 한 행동은
네 혼자 한 것 같지가 않다.
한강에서의 소녀의 죽음도
동포의 가슴에는 짙은 빛깔의 아픔으로 접어든다.
기억의 분한 강물은 오늘도 내일도
동포의 눈시울에 흐를 것인가,
흐를 것인가, 영웅들은 쓰러지고 두 주일의 항쟁 끝에
너를 겨눈 같은 총부리 앞에
네 아저씨와 네 오빠가 무릎을 꾼 지금
인류의 양심에서 흐를 것인가,
마음 약한 베드로가 닭 울기 전 세 번이나 부인한 지금
다뉴브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의 첫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발의 소련제 탄환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내던진 네 죽음은
죽음에 떠는 동포의 치욕에서 역으로 싹튼 것일까.
싹은 비정의 수목들에서보다
치욕의 푸른 멍으로부터
자유를 찾는 네 뜨거운 핏속에서 움튼다.
싹은 또한 인간의 비굴 속에 생생한 이마쥬 움트며 위협하고,
한밤에 불면의 염염한 꽃을 피운다.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9) 분수
1
발돋움하는 발돋움하는 너의 자세는
왜 이렇게
두 쪽으로 갈라져서 떨어져야 하는가.

그리움으로 하여
왜 너는 이렇게
산산이 부서져서 흩어져야 하는가.

2
모든 것을 바치고도
왜 나중에는
이 찢어지는 아픔만을
가져야 하는가.

네가 네 스스로에 보내는
이별의
이 안타까운 눈짓만을 가져야 하는가.

3
왜 너는
다른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떨어져서 부서진 무수한 네가
왜 이런
선연한 무지개로
다시 솟아야만 하는가.


(10)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샤갈의 마을에는 3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11) 처용

인간들 속에서
인간들에 밟히며
잠을 깬다.
숲 속에서 바다가 잠을 깨듯이
젊고 튼튼한 상수리나무가
서 있는 것을 본다.
남의 속도 모르는 새들이
금빛 깃을 치고 있다.



(12) 하늘

언제나 하늘은 거기 있는 듯
언제나 하늘은 흘러가던 것

아쉬운 그대로
저 봄풀처럼 살자고
밤에도 낮에도 나를 달래던
그 너희들의 모양도

풀잎에 바람이 닿듯이
고요히 소리도 내지 않고
나의 가슴을 어루만지던
그 너희들의 모양도

구름이 가듯이
노을이 가듯이
언제나 저렇게 흘러가던 것


(13) 모른다고 한다.

산은 모른다고 한다.
물은
모른다 모른다고 한다.

속잎 파릇파릇 돋아나는 날
모른다고 한다.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을
내가 이처럼 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산은 모른다고 한다.
물은
모른다 모른다고 한다.



(14) 구름과 장미

저마다 사람은 가졌으나
임은
구름과 장미되어 오는 것

눈뜨면
물위에 구름을 담아 보곤
밤엔 뜰 장미와
마주 앉아 울었노니

참으로 뉘가 보았으랴?
하염없는 날일수록
하늘만 하였지만
임은
구름과 장미되어 오는 것



(15) 또 하나 가을 저녁의 시


부서져 흩어진 꿈을
한 가닥 한 가닥 주워 모으며
눈물에 어린 황금빛 진실을
한아름 안고
나에게로 온다.

바람이 가지를 흔들듯이
넘쳐흐르는 이 정적을
고요히 흔들며
나에게로 온다.

저 섧게 물든 전나무 가지 사이
가리마 같은 언덕길을
한 걸음 한 걸음
나에게로 온다.


(16) 소년

희맑은
희맑은 하늘이었다.

(소년은 졸고 있었다)

열린 책장 위를
구름이 지나고 자꾸 지나가곤 하였다.

바람이 일다 사라지고
다시 일곤 하였다.

희맑은
희맑은 하늘이었다.

소년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17) 가나마을에서


노새는 죽어서 어디로 갔나
하늘은 너무 밝고 너무 가까이에 있다.
노고지리도
저녁에는 별들도 너무 가까이에 있다.
허파와 간에 작은 물방울을 달고
노새는 죽어서 어디로 갔나.


(18) 갈대 섰는 풍경

이 한밤에
푸른 달빛을 이고
어찌하여 저 들판이
저리도 울고 있는가

낮 동안 그렇게도 쏘대던 바람이
어찌하여
저 들판에 와서는
또 저렇게도 슬피 우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바다보다 고요하던 저 들판이
어찌하여 이 한밤에
서러운 짐승처럼 울고 있는가



(19) 겟세마네에서

꿀과 메뚜기만 먹던 스승,
허리에만 짐승 가죽 두르고
요단강(江)을 건너간 스승
라비여,
이제는 나의 때가 옵니다.
내일이면 사람들은 나를 침 뱉고
발로 차고 돌을 던집니다.
사람들은 내 손바닥에 못을 박고
내 옆구리를 창으로 찌릅니다.
라비여,
내일이면 나의 때가 옵니다.
베드로가 닭 울기 전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합니다.
볕에 굽히고 비에 젖어
쇳빛이 된 어깨를 하고
요단강(江)을 건너간 스승
라비여,



(20) 겨울꽃

잎을 따고 가지를 친다.
하늘이 넓어진다.
살을 버리고 뼈를 깎는다.
뼈를 깎아서 뼈를 드러낸다.
바다를 다 적신 피 한 방울,
그것은 언제나 가고 있다.
넓어진 하늘로
드러난 뼛속의 드러난 뼛속으로
그것은 언제나 가고 있다.



(21) 경(瓊)이에게

경이는 울고 있었다.
풀덤불 속으로
노란 꽃송이가 갸우뚱 내다보고 있었다.

그것뿐이다.
나는
경이가 누군지를 기억지 못한다.

구름이 일다
구름이 절로 사라지듯이
경이는 가 버렸다.

바람이 가지 끝에
울며 도는데
나는
경이가 누군지를 기억지 못한다.

경이,
너는 울고 있었다
풀덤불 속으로
노란 꽃송이가 갸우뚱 내다보고 있었다.



(22) 김춘수의'꽃'을 가르치며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자고
가르치지만 얘들아

네 쪽으로 걸었던 내 발자국은 몇 걸음이지?

다가가서는
색깔 있는 눈짓이나 그래서 얼마큼 향기나는
이름이나 나누었던가
너희 웃음도 모르고 너희 노래도 모르고

아버지의 직업, 어머니의 학력, 그렇고 그런 것
너의 점수, 너의 석차, 그렇고 그런 것

얘들아, 꽃은 도대체 무엇이니?




(23) 꽃1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24) 꽃2

바람도 없는데 꽃이 하나 나무에서 떨어진다. 그것을 주워 손바
닥에 얹어 놓고 바라보면, 바르르 꽃잎이 훈김에 떤다. 화분(花粉)도 난[飛]다. '꽃이여 !'라고 내가 부르면 그것은 내 손바닥에서 어디
론지 까마득히 떨어져 간다.
지금, 한 나무의 변두리에 뭐라는 이름도 없는 것이 와서 가만히
머문다.



(25) 눈물1

이것이 무엇인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그 또 할아버지의 千年이 아니 萬年,
눈시울에 눈시울에 실낱같이 돌던 것.
지금은 무덤가에 다소곳이 돋아나는 이것은 무엇인가?
내가 잠든 머리맡에 실낱 같은 것.
바람 속에 구름 속에 실낱 같은 것.
千年 아니 萬年,
아버지의 아저씨의 눈시울에 눈시울에 어느 아침 스며든 실낱 같은 것.
네가 커서 바라보면, 내가 누운 무덤가에 실낱 같은 것.
죽어서는 무덤가에 다소곳이 돋아나는 몇 포기 들꽃…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무엇인가?




(26) 눈물2

男子와 女子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밤에 보는 오갈피나무,
오갈피나무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
새가 되었다고 한다.
발바닥만 젖어 있었다고 한다.




(27) 꽃밭에 든 거북


거북이 한 마리 꽃 그늘에 엎드리고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조심성 있게 모가지를 뻗는다. 사방(四方)을 두리번거린다. 그리곤 머리를 약간(若干) 옆으로 갸웃거린다. 마침내 머리는 어느 한자리에서 가만히 머문다. 우리가 무엇에 귀 기울일 때의 그 자세(姿勢)다.(어디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고 있는 것일까,)
이윽고 그의 모가지는 차츰차츰 위로 움직인다. 그의 모가지가 거의 수직(垂直)이 되었을 때, 그때 나는 이상한 것을 보았다. 있는 대로 뻗은 제 모가지를 뒤틀며 입을 벌리고, 그는 하늘을 향하여 무수히 도래질을 한다. 그 동안 그의 전반신(前半身)은 무서은 저력(底力)으로 공중(空中)에 완전(完全)히 떠 있었다.(이것은 그의 울음이 아니었을까,)
다음 순간(瞬間), 그는 모가지를 소롯이 옴츠리고, 땅바닥에 다시 죽은 듯이 엎드렸다.


(28) 너와 나

맺을 수 없는 너였기에
잊을 수 없었고

잊을 수 없는 너였기에
괴로운 건 나였다.

그리운 건 너
괴로운 건 나.

서로 만나 사귀고 서로 헤어짐이
모든 사람의 일생이려니.



(29) 인동(忍冬) 잎

눈 속에서 초겨울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다.
서울 근교(近郊)에서는 보지 못한
꽁지가 하얀 작은 새가
그것을 쪼아먹고 있다.
월동(越冬)하는
인동(忍冬) 잎의 빛깔이
이루지 못한 인간(人間)의 꿈보다도
더욱 슬프다.



(30) 갈대

1
너는 슬픔의 따님인가 부다.

너의 두 눈은 눈물에 어리어 너의 시야(視野)는 흐리고 어둡다.

너는 맹목(盲目)이다. 면(免)할 수 없는 이 영겁(永劫)의 박모(薄暮)를 전후좌우(前後左右)로 몸을 흔들어 천치(天痴)처럼 울고 섰는 너.

고개 다수굿이 오직 느낄 수 있는 것, 저 가슴에 파고드는 바람과 바다의 흐느낌이 있을 뿐

느낀다는 것. 그것은 또 하나 다른 눈.
눈물겨운 일이다.


2
어둡고 답답한 혼돈(混沌)을 열고 네가 탄생(誕生)하던 처음인 그날 우러러 한 눈은 하늘의 무한(無限)을 느끼고 굽어 한 눈은 끝없는 대지(大地)의 풍요(豊饒)를 보았다.
푸른 하늘의 무한(無限).
헤아릴 수 없는 대지(大地)의 풍요(豊饒).

그때부터였다. 하늘과 땅의 영원(永遠)히 잇닿을 수 없는 상극(相剋)의 그 들판에서 조그만 바람에도 전후좌우(前後左右)로 흔들리는 운명(運命)을 너는 지녔다.

황홀(恍惚)히 즐거운 창공(蒼空)에의 비상(飛翔).
끝없는 낭비(浪費)의 대지(大地)에의 못 박힘.
그러한 위치(位置)에서 면(免)할 수 없는 너는 하나의 자세(姿勢)를 가졌다.
오! 자세(姿勢)―기도(祈禱).

우리에게 영원(永遠)한 것은 오직 이것뿐이다




(31)물망초

부르면 대답할 듯한
손을 흔들면 내려올 듯도 한
그러면서도 아득히 먼
그대의 모습
하늘의 별일까요.

꽃피고 바람 잔 우리들의 그날
날 잊지 마셔요.
그 음성 오늘 따라
더욱 가까이에 들리네
들리네......


(32) 사모곡

주신 사랑이 적은 듯 싶어도 나 삽니다.
주신 말씀이 적은 듯 싶어도 나 삽니다.
오밤중에 전기불 꺼지듯 나 삽니다.
하느님
나는 꼭 하나만 가질래요.
세상 것 모두 눈 감을래요.
하느님
나는 꼭 그 사람만 가질래요.
산엔 돌치는 징소리 내가슴에 너 부르는 징소리.
솔밭이 여긴데 솔향기에 젖는데
솔밭도 나도 다 두고 넌 어디쯤서 길 잃었니.
나도 바람이더면 아무대나 갈껄
그대 가는 곳 어디라도 갈껄
내가 물이라면 아무대나 스밀껄
그대 몸 속 마알간 피에라도 스밀껄



(33)귀촉도 노래

이렇게 많은 곷을
꽃마다 이를 수는 없지 않은가

이야기야 많지만
오늘 갓피올 너에게만
일러두고 가련다

환히 트인 날은
먼 촉나라의 변두리도
나는 볼 수가 있어다고

이야기야 많지만
너에게만
나는 일러두고 가련다



(34) 꽃의 소묘


1
꽃이여, 네가 입김으로
대낮에 불을 밝히면
환히 금빛으로 열리는 가장자리,
빛깔이며 향기며
花粉이며...... 나비며 나비며
축제의 날은 그러나
먼 추억으로서만 온다


나의 추억 위에는 꽃이여,
네가 머금은 이슬의 한 방울이
떨어진다 .


2

사랑의 불 속에서도
나는 외롭고 슬펐다

사랑도 없이
스스로를 불태우고도
죽지 않는 알몸으로 미소하는
꽃이여,

눈부신 순금의 阡의 눈이여,
나는 싸늘하게 굳어서
돌이 되는데,


3
네 미소의 가장자리를
어떤 사랑스런 꿈도
침범할 수는 없다

금술 은술을 늘이운
머리에 칠보화관을 쓰고
그 아가씨도
新婦가 되어 울며 떠났다.



꽃이여, 너는
아가씨들의
肝을 쪼아 먹는다.


4

너의 미소는 마침내
갈 수 없는 하늘에
별이 되어 박힌다


멀고 먼 곳에서
너는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나의 추억 위에는 꽃이여,
네가 머금은 이슬의 한 방울이
떨어진다.


너를 향하여 나는
외로움과 슬픔을
던진다.


(35) 구름과 장미


저마다 사람은 임을 가졌으나
임은
구름과 薔薇되어 오는 것

눈 뜨면
물 위에 구름을 담아 보곤
밤엔 뜰 薔薇와
마주 앉아 울었노니

참으로 뉘가 보았으랴?
하염없는 날일수록
하늘만 하였지만
임은
구름과 薔薇되어 오는 것



(36) 겨울 밤의 꿈


저녁 한동안 가난한 시민(市民)들의
살과 피를 데워 주고
밥상머리에
된장찌개도 데워 주고
아버지가 식후(食後)에 석간(夕刊)을 읽는 동안
아들이 식후(食後)에
이웃집 라디오를 엿듣는 동안
연탄(煉炭)가스는 가만가만히
쥐라기의 지층(地層)으로 내려간다.
그날 밤
가난한 서울의 시민(市民)들은
꿈에 볼 것이다.
날개에 산호빛 발톱을 달고
앞다리에 세 개나 새끼 공룡(恐龍)의
순금(純金)의 손을 달고
서양(西洋) 어느 학자(學者)가
Archaeopteryx라 불렀다는
주라기(紀)의 새와 같은 새가 한 마리
연탄(煉炭)가스에 그을린 서울의 겨울의
제일 낮은 지붕 위에
내려와 앉는 것을,



(37)거리에 비 내리듯

비 개인 다음의
하늘을 보라.
비 개인 다음의
꼬꼬리새 무릎을 보라. 발톱을 보라.
비 개인 다음의
네 입술
네 목젖의 얼룩을 보라.
면경(面鏡)알에 비치는
산과 내
비 개인 다음의 봄바다는
언제나 어디로 떠나고 있다.

(남천(南天), 근역서재, 1977)




(38) 부두에서

바다에 굽은 사나이들.

하루의 노동을 끝낸

저 사나이들의 억센 팔에 안긴

깨지지 않고 부서지지 않은

온전한 바다.

물개들과 상어떼가 놓친

그 바다



(39) 귀촉도 노래

이렇게 많은 곷을
꽃마다 이를 수는 없지 않은가

이야기야 많지만
오늘 갓피올 너에게만
일러두고 가련다

환히 트인 날은
먼 촉나라의 변두리도
나는 볼 수가 있어다고

이야기야 많지만
너에게만
나는 일러두고 가련다




(40) 계단(階段)을 위한 바리에테


라인홀드 니버라는 아이가 있었다. 하루는 녀석이 밤을 까먹다가 싱글벙글 웃는 낯으로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내 입에다 밤 한 톨을 물린다. 입 안이 들쩍지근하다. 얼른 뱉었다. 그러나 녀석은 내 호주머니에 밤 몇 톨을 쑤셔넣는다. 집에 가서 꺼내보니 껍질에 설탕가루가 묻어 있고 알은 다 썩어 있다. 다음날 녀석을 만나면 밤을 도로 돌려줄 생각이었다. 입 안에다 한 톨만 물려줄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다음날 녀석을 보자 왠지 나는 손이 나가지지가 않았다. 녀석은 눈을 가늘게 뜨고 싱글벙글 웃고 있다. 광대뼈가 어제보다 더 불거져나온 듯하고 눈은 자꾸 가늘어지더니 끝내는 아예 감겨지고 말았다. 그런데도 얼굴 전체는 싱글벙글 웃고만 있다. 라인홀드 니버라는 아이는 뒤에 유명한 신학자가 되었다.
(현대문학 1999.1 )



(41) 기(旗)

1
제일 용맹한 전사(戰士)의 손에 잡힌 너는 질타(叱咤)하고 명령(命令)하던 전장(戰場)에서의 너는
우리들 마지막 성(城)이었다.
기(旗)여,
우리들 처음인 출범(出帆)이었다.
돛대 위에서 항구(港口)의 하늘을 노래처럼 흔들던 기(旗)여,

펄떡이던 기(旗).
수지운 시늉으로 나부끼던 기(旗).
끝없는 하늘가에 저마다 올려 건 기(旗), 기(旗),
빛나는 천(阡)의 눈동자에 새겨진, 그것이 넘쳐 흐르는 물결이었다.


2
기(旗)를 위하여 훈장(勳章)도 없이 용맹하던 사람들도 쓰러져 갔다.
쓰러진 사람들을 불러 보아라.
가슴같이 부풀은 하늘의 저기, 그들 무명(無名)의 전사(戰士)들의 아름다운 이름을 불러 보아라.

지금은
저마다 가슴에 인(印) 찍어야 할 때,
아! 천구백이십육년(一九二六年), 노을빛으로 저물어 가는
알프스의 산령(山嶺)에서 외로이 쓰러져 간 릴케의 기(旗)여,




(42)金宗三

라산스카,
그가 불러본 이름이다.
배꼽이 솔방울을 낳는
몹쓸 병을
그는 한때 앓기도 했다.
蛇足이나마
한 마디 할 말이 없을까 하고
눈에 띄는대로 나는 얼른
발바닥만한 낙엽
이라고 했더니
그는 이미 그 오솔길을 저녁이내처럼 슬쩍
지나갔다고 한다.
친구가 사준 이탈리아제 키또구두를 신고,

(시와반시1998. 봄)


(43)정

외로운 밤이면
자꾸만 별을 보았지.
더 외로운 밤이면
찬란한 유성이 되고 싶었지.
그토록 그리움에
곱게곱게 불타오르다간
그대 심장 가장 깊은 곳에
흐르는 별빛처럼
포옥 묻히고 싶었지.



(44) 나비

나비는 가비야운 것이 美다.
나비가 앉으면 순간에 어떤 우울한 꽃도 환해지고 多彩로와진다.
變化를 일으킨다.
나비는 福音의 天使다.
일곱 번 그을어도 그을리지 않는 純金의 날개를 가졌다.
나비는 가장 가비야운 꽃잎보다도 가비야우면서
영원한 沈默의 그 空間을 한가로이 날아간다.
나비는 新鮮하다.




(45) 나의 하나님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悲哀)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詩人)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女子)의 마음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어린
순결(純潔)이다.
삼월(三月)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둣빛 바람이다.



(46) 길바닥

패랭이꽃은
숨어서
포오란 꿈이나 꾸고

돌멩이 같은 것 돌멩이 같은 것
돌멩이 같은 것은
폴 폴
먼지나 날리고

언덕에는 전봇대가 있고
전봇대 위에는
내 혼령의 까마귀가 한 마리
종일을 울고 있다.



(47) 산을 등진 거리

1
가위 눌린 하늘의 한 조각이 방금 무너지는 듯 매섭게 북풍이
휘몰아치면, 가계도 이발소도 계어디 오똑하게 올라앉은 안과 의
원도 아프게 찢어지는 소리를 하고.....
미친 듯 달려온 시커먼 밤이 온 거리를 소롯이 한입에 삼켜 버렸다.


2
밤은, 산 냄새 풍기는 보오얀 안개 속에 그대의 입김 같은 등불이
하나 둘........



(48) 오랑캐꽃


너는 서서 있고나
고요하고 잔잔한 거기에

너는 서서 있고나
신이 주신 그대로의 모습으로

찌그러져 기울어진 나쁜 세상에서
인정스런 웃음을 띄우고

오랑캐꽃!
너는 거기에 서서 있고나



(49) 석류꽃 대낮

어제와 오늘 사이
비는 개이고
구름이 머리칼을 푼다.
아직도 젖어 있다.
미류나무 어깨 너머
바다
석류꽃 대낮.



(50) 버찌

밤은
작디작은 입술이라고 하고
밤은 또
눈먼 코뿔소라고도 하지만
어깨를 타고 밤은 무너지는 시늉만 한다.
밤은 차라리 강물이고 숲이라
안은 보이지 않고
봄이 오면 산과 들에
한없이 이어지고 또 이어져 있다.



(51) 부두에서

바다에 굽은 사나이들.
하루의 노동을 끝낸
저 사나이들의 억센 팔에 안긴
깨지지 않고 부서지지 않은
온전한 바다.

물개들과 상어떼가 놓친
그 바다





(52) 도(歸蜀途) 노래


이렇게 많은 꽃을
꽃마다 이를 수는 없지 않은가

이야기야 많지만
오늘 갓피올 너에게만
일러두고 가련다

환히 트인 날은
먼 촉(蜀)나라의 변두리도
나는 볼 수가 있었다고

이야기야 많지만
너에게만
나는 일러두고 가련다.





(53) 마음의 태양

꽃다이 타오르는 햇살을 향하여
고요히 돌아가는 해바라기처럼
높고 아름다운 하늘을 받들어
그 속에 맑은 넋을 살게 하라

가시밭길을 넘어 그윽히 웃는 한 송이 꽃은
눈물의 이슬을 받아 핀다 하노니
깊고 거룩한 세상을 우러르기에
삼가 육신의 괴로움도 달게 받으라


괴로움에 짐짓 웃을 양이면
슬픔도 오히려 아름다운 것이
고난을 사랑하는 이에게만이
마음나라의 원광(圓光)은 떠오르노라

푸른 하늘로 푸른 하늘로
항시 날아오르는 노고지리 같이
맑고 아름다운 하늘을 받들어
그 속에 높은 넋을 살게 하라



(54)나목(裸木)과 시(詩)

1
시(詩)를 잉태(孕胎)한 언어(言語)는
피었다 지는 꽃들의 뜻을
든든한 대지(大地)처럼
제 품에 그대로 안을 수가 있을까,
시(詩)를 잉태(孕胎)한 언어(言語)는
겨울의
설레이는 가지 끝에
설레이며 있는 것이 아닐까,
일진(一陣)의 바람에도 민감(敏感)한 촉수(觸手)를
눈 없고 귀 없는 무변(無邊)으로 뻗으며
설레이는 가지 끝에
설레이며 있는 것이 아닐까,

2
이름도 없이 나를 여기다 보내 놓고
나에게 언어(言語)를 주신
모국어(母國語)로 불러도 싸늘한 어감(語感)의
하나님,
제일 위험(危險)한 곳
이 설레이는 가지 위에 나는 있습니다.
무슨 층계(層階)의
여기는 상(上)의 끝입니까,
위를 보아도 아래를 보아도
발뿌리가 떨리는 것입니다.
모국어(母國語)로 불러도 싸늘한 어감(語感)의
하나님,
안정(安定)이라는 말이 가지는
그 미묘(微妙)하게 설레이는 의미(意味) 말고는
나에게 안정(安定)은 없는 것입니까,

3

엷은 햇살의
외로운 가지 끝에
언어(言語)는 제만 혼자 남았다.
언어(言語)는 제 손바닥에
많은 것들의 무게를 느끼는 것이다.

(꽃의 소묘(素描), 백자사, 1959)



(55) 나이지리아

나이지리아 나이지리아,
바람이 불면 승냥이가 울고
바다가 거멓게 살아서
어머님 곁으로 가고 있었다.
승냥이가 울면 바람이 불고
바람이 불 때마다 빛나던 이빨,
이빨은 부러지고 승냥이도 죽고
지금 또 듣는 바람 소리
나이지리아 나이지리아,

(비에 젖은 달, 근역서재, 1980)



(56)낙일(落日)

둑이 하나 무너지고 있다.
날마다 무너지고 있다.
무너져도 무너져도 다 무너지지 않는다.
나일강변(江邊)이나 한강변(漢江邊)에서
여자(女子)들은 따로따로 떨어져서 울고 있다.
어떤 눈물은
화류(樺榴)나무 아랫도리까지 적시고
어딘가 둑의 무너지는 부분으로 스민다.

(남천(南天), 근역서재, 1977)



(57) 내가 만난 이중섭(李仲燮)

광복동(光復洞)에서 만난 이중섭(李仲燮)은
머리에 바다를 이고 있었다.
동경(東京)에서 아내가 온다고
바다보다도 진한 빛깔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눈을 씻고 보아도
길 위에
발자욱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뒤에 나는 또
남포동(南浦洞) 어느 찻집에서
이중섭(李仲燮)을 보았다.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진한 어둠이 깔린 바다를
그는 한 뼘 한 뼘 지우고 있었다.
동경(東京)에서 아내는 오지 않는다고,

(남천(南天), 근역서재, 1977)




(58) 눈물 1

이것이 무엇인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그 또 할아버지의 千年이 아니 萬年,
눈시울에 눈시울에 실낱같이 돌던 것.
지금은 무덤가에 다소곳이 돋아나는 이것은 무엇인가?
내가 잠든 머리맡에 실낱 같은 것.
바람 속에 구름 속에 실낱 같은 것.
千年 아니 萬年,
아버지의 아저씨의 눈시울에 눈시울에 어느 아침 스며든 실낱 같은 것.
네가 커서 바라보면, 내가 누운 무덤가에 실낱 같은 것.
죽어서는 무덤가에 다소곳이 돋아나는 몇 포기 들꽃…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무엇인가?




(59) 눈물 2

男子와 女子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밤에 보는 오갈피나무,
오갈피나무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
새가 되었다고 한다.
발바닥만 젖어 있었다고 한다.



(60) 릴케의 장(章)

세계(世界)의 무슨 화염(火焰)에도 데이지 않는
천사(天使)들의 순금(純金)의 팔에 이끌리어
자라가는 신(神)들,
어떤 신(神)은
입에서 눈에서 코에서
돋쳐나는 암흑(暗黑)의 밤의 손톱으로
제 살을 할퀴어서 피를 내지만
살점에서 흐르는 피의 한 방울이
다른 신(神)에 있어서는
다시 없는 의미(意味)의 향료(香料)가 되는 것을
라이너어 마리아 릴케
당신의 눈은 보고 있다.
천사(天使)들이 겨울에도 얼지 않는 손으로
나무에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을
죽어간 소년(少年)의 등 뒤에서
또 하나의 작은 심장(心臟)이 살아나는 것을,
라이너어 마리아 릴케
당신의 눈은 보고 있다.
하늘에서
죽음의 재는 떨어지는데
이제사 열리는 채롱의 문(門)으로
믿음이 없는 새는
어떤 몸짓의 날개를 치며 날아야 하는가를.

(꽃의 소묘, 백자사, 1959)




(61)누란(樓蘭)

과벽탄(戈壁灘)

고비는 오천리(五千里) 사방(四方)이 돌밭이다. 월씨(月氏)가 망(亡)할 때, 바람 기둥이 어디선가 돌들을 하늘로 날렸다. 돌들은 천년(千年)만에 하늘에서 모래가 되어 내리더니, 산 하나를 만들고 백년(百年)에 한 번씩 그들의 울음을 울었다. 옥문(玉門)을 벗어나면서 멀리멀리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奬)도 들었으리.


명사산(鳴沙山)

그 명사산(鳴沙山) 저쪽에는 십년(十年)에 한 번 비가 오고, 비가 오면 돌밭 여기저기 양파의 하얀 꽃이 핀다. 봄을 모르는 꽃. 삭운(朔雲) 백초련(白草連). 서기(西紀) 기원전(紀元前) 백이십년(百二十年). 호(胡)의 한 부족(部族)이 그 곳에 호(戶) 천 오백 칠십(千五百七十), 구(口) 만 사천백(萬四千百), 승병(勝兵) 이천 구백 이십갑(二千九百二十甲)의 작은 나라 하나를 세웠다. 언제 시들지도 모르는 양파의 하얀 꽃과 같은 나라
누란(樓蘭).



(62) 밤의 시(詩)

왜 저것들은 소리가 없는가
집이며 나무며 산(山)이며 바다며
왜 저것들은
죄(罪)지은 듯 소리가 없는가
바람이 죽고
물소리가 가고
별이 못 박힌 뒤에는
나뿐이다 어디를 봐도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이 천지간(天地間)에 숨쉬는 것은
나 혼자뿐이다.
나는 목메인 둣
누를 불러볼 수도 없다
부르면 눈물이
작은 호수(湖水)만큼 쏟아질 것만 같다
―이 시간(時間)
집과 나무와 산(山)과 바다와 나는
왜 이렇게도 약(弱)하고 가난한가
밤이여
나보다도 외로운 눈을 가진 밤이여

(늪, 문예사, 1950)




(63) 부재(不在)

어쩌다 바람이라도 와 흔들면
울타리는
슬픈 소리로 울었다.

맨드라미 나팔꽃 봉숭아 같은 것
철마다 피곤
소리없이 져 버렸다.

차운 한겨울에도
외롭게 햇살은
청석(靑石) 섬돌 위에서
낮잠을 졸다 갔다.

할일없이 세월(歲月)은 흘러만 가고
꿈결같이 사람들은
살다 죽었다.

(늪, 문예사, 1950)




(64) 니가 가던 그 날은

네가 가던 그날은
나의 가슴이
가녀린 풀잎처럼 설레이었다

하늘은 그린듯이 더욱 푸르고
네가 가던 그날은
가을이 가지 끝에 울고 있었다

구름이 졸고 있는
산마루에
단풍잎 발갛게 타며 있었다

네가 가던 그날은
나의 가슴이
부질없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65) 대지진(大地震)

한밤에 깨어보니
일만 개의 영산홍(映山紅)이 깨어 있다.
그들 중
일만 개는 피 흘리며
한밤에 떠 있다.
밤은 갈라지고, 혹은 찢어지고
또 다른 일만 개의 영산홍(映山紅) 위에 쓰러진다.
밤은 부러지고
탈장(脫腸)하고
별들은 죽어 있다.
별들은 무덤이지만
영산홍(映山紅)은 일만 개의 밤이다.
눈 뜨고 밤에 깨어 있다.
깨어 있는 것은 쓰러지고
피 흘리고
한밤에 떠 있다.
마침내 비단붕어는 눈 뜨리라.
지렁이가 눈에 불을 켜고
별이 또 떨어지리라.
바다는 갈라지고
밤도 어둠도 갈라지고 갈라지고
땅은 가장 깊이에서 갈라지고
개미만 두 마리 살아나리라.
영산홍(映山紅)의 바다,
일만 개의 영산홍(映山紅)이 깨어 있다.
커다란 슬픔으로
그것은 부러진다.
영산홍(映山紅) 일만 개의 모가지가
밤을 부수고 있다.
맨발의 커다란 밤이 하나
짓누르고 있다.
어둠들이 거기서 새어 나온다.
어둠들이 또 한번 밤을 이룬다.
갈라진다.
혹은 찢어진다.




(66) 돌

돌이여,
그 캄캄한 어둠 속에 나를 잉태(孕胎)한
나의 어머니,
태어나올 나의 눈망울
나의 머리카락은 모두
당신의 오랜 꿈의
비밀(秘密)입니다.
아직은 나의 이름을
부르지 마십시오.
무겁게
겹도록 달이 차서
소리하면 당신의 일어설 그때까지
당신의 가장 눈부신 어둠 속에
나의 이름은
감추어 두십시오.
그 한번도 보지 못한 나를 위하여
어둠 속에 사라진 무수한 나……
돌이여,
꿈꾸는 돌이여,






(67) 두 개의 꽃잎

해 질 무렵은
긴 회랑(廻廊)의 끝 아이들 발자국처럼
봄의 뜨락처럼
소리없이 술렁이는
죽음 이쪽의 저무는 산허리,
늑골(肋骨)의 초록 비늘,
어제 죽고 내일 죽고
해 질 무렵은
오늘 하루 저무는 꽃잎의
그 아련함.



세브린느,
오후 두 시에서 다섯 시 사이
네 샅은 열린다.
비가 내리고
비는 꽃잎을 적신다.
꽃잎은 시들지 않고 더욱 꽃 핀다.
―이건 사랑과는 달라요.
세브린느,
네 추억은 너를 보지 못한다.
세브린느 세브린느,
부르는 소리 등 뒤로 흘리며
오후 다섯 시
네 샅은 시들고
사랑을 찾아
너는 비 개인 거리에 선다.



너 보고 싶은 마음
안개 속에 있고 진흙 속에 있다.
희멀건 하늘에 있고
연못 바닥에 모로 누워 있다.
세브린느,
너 꽃잎으로 피었다 지면서
바람 부는 날 코피 쏟고
눈 감으면 또 아침과 만난다.
눈이 눈을 덮고 겨자씨를 덮는
그런 겨울 밤에
나는 죽는 꿈을 꾸었지만
죽음은 없고, 없는 것이 너무 좋아
갈잎에 듣는 이슬방울을
세브린느,
나는 그만 꿈에서 보고 만다.




(68) 둘째번 마리아

유카리나무 그늘에
가도 가도 갈릴리 호숫가
유카리나무 그늘에
발톱 다 빠지고
신발 벗고
눈 한번 곱게 감고
거기가 하늘인 듯
하늘 한쪽에
흐린 날은 무너지는 하늘 한쪽에
유카리나무 그늘에
마리아, 막달라와 마리아,
아직 너는 너의 잠을 깨지 않고 있나니,



(69) 저녁별

막 태어난 별이
혼자서는 가지 못하고 있다.
지상의
키 작은 아저씨 귓쌈을 치며 치며
울고 있다.




(70) 땅 위에

구름 위 땅 위에
하나님 말씀
이제는 피도 낯설고 모래가 되어
한 줌 한줌 무너지고 있다.
밖에는 봄비가 내리고
남천이 젖고 잇다.
남천은 멀지 않아 하얀 꽃을 달고
하나님의 말씀 머나먼 말씀
살을 우비리라.
다시 또 우비리라.




(71) 안료

해가 지고 있다.
하늘 가까이 작은 열매 몇 개가
빛나고 있다.
여황산 긴 허리를 빠져나온
바다,
턱이 뾰족한 아이가
발을 담그고 있다.
집에는 가지 않는 그 아이를 위하여
달이 뜨고 어둠이 오고 있다.




(72) 분꽃을 보며

목수의 아내 마리아,
당신이 든 잔은
눈물도 아니고 놋쇠도 아니다.
당신은 양 한마리와
하늘에 있다.
아들을 위하여
언제까지나 처녀로 있어야 하는 마리아,
당신 아들은 지금도
갈릴리 호수를 맨발로 가고 있다.




(73) 차례

추석 입니다.
할머니,
홍시 하나 드리고 싶어요.
상강의 날은 아직도 멀었지만
안행의 날은 아직도 멀었지만
살아 생전에 따뜻했던 무릎,
크고 잘 익은
홍시 하나 드리고 싶어요.
용둣골 수박,
수박을 드리고 싶어요,
수박 살에
소금을 조금 발라 드렸으면 해요.
그러나 그 뜨거웠던 여름은 가고
할머니,
어젯밤에는 달이
앞이마에 서늘하고 훤한
가르마를 내고 있었어요.
오십년 전 그 날처럼




(74) 고뿔

- 고 장 폴 사르트르에게 -

하늘수박 가을 바람 고추잠자리,
돌담에 속색이던 경상도 화개 사투리
신열이 나고 오늘밤은 별 하나가
연둣빛 화석이 되고 있다.





(75) 밤이면

불이 켜인다
밤이면 집집마다
불을 켜인다

멀리 가까이
우는 듯 속삭이는 듯
불이 켜인다

사랑하는 이들의
사랑하는 이들의
우는 듯 속삭이듯
밤이면 집집마다에
불이 켜인다

따스한 손결들
보고 싶은 이름들
저마다 마음속
소리도 없이....

불이 켜인다
밤이면 집집마다
불이 켜인다




(76) 비탈

풀 한잎
패랭이 한 송이를 발 붙이지 않고
올올이 말라 가던
네 심정을 알껬다

뼈를 깍는
섣달 한천에
가슴 파 헤치며 미칠 듯 패악하던
네 그 심정을 알겠다

그리고 오늘밤
무섭고도 은은한 달빛을 이고
저리도 두 눈을 휩뜨고 있는
네 심정을 나는 알겠다.




(77) 봄 C


어디서 목련 봉오리 터지는 소리
왼종일 그 소리
뜰에 그득하다
아무것도 없어도 뜰은
소리 하나로
고운 봄을 맞이한다




(78) 벽이

벽이 걸어온다.늙은 홰나무가 거렁온다.
머리가 없는 인형이 걸어온다.
(어디서 오는 것일까,)
노오틀담 사원의 회랑의 벽에 걸린 청동 시계가
밤 한시를 친다.
어딘가,늪의 바닥에서 거무리가 운다.
그 눈물 위에 떨어져 쌓이는
붉고 붉은 꽃잎,




(79) 책

얼마만큼 높을까,
하늘만큼 가을만큼 높을까,
망개알이 가맣게 타고 있다.
이제는 꿈이 되고 보석이 된
알맞게 휘어진 저 허리 저 어깨,
하늘을 눈으로 잴 수 있을까,




(80) 노래

새는 사철나무
키 작은 가지 끝에
바람은 멀리멀리
낮달과 함께, 혹은
막 잠깬 골목길 입구 손수레 곁에
하느님은 어린 나귀와 함께
이번에도 동쪽 포도밭 길을 가고 있다.
해가 뜨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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