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바로크
프랑스의 바로크는 강력한 중앙 집권의 정권 체제 확립을 확고히 하면서 17세기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궁정발레로부터 출발하여 융성한 프랑스 오페라는 이 시기를 잘 대변해 줍니다.
프랑스의 오페라가 탄생한 것은 궁정발레 <왕비의 발레 코믹(Ballet comique de la Reine, 1581)>부터 왕립 음악 아카데미(Academie Royale de Musique, 오페라 극장)가 창립된 1672년까지 1세기 동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바로크는 중세 이후 확립된 프랑스적 전통과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으며 발전했습니다.
프랑스에서 오페라의 기운은 이미 중세부터 싹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세에 교회에서 행해지던 전례극과 기적극은 음악과 화려한 무대장치를 중심으로 했고, 귀족의 행사에서는 무언극과 합창, 기악곡, 발레 등을 행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잡다한 요소들을 긁어모으고 인문주의자들의 종합예술론의 영향을 받아 바로크 시대에 오페라로 꽃피게 되는 것입니다.
◈ 궁정발레
우선 장차 프랑스 오페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궁정 발레부터 살펴봅시다. 앞서 잠깐 이야기했던 <왕비의 발레 코믹>은 음악가, 시인, 안무가, 배우 그리고 연출가들의 합작품으로서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즉 당시 유행하던 종합예술적 사고방식과 고대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결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 이후 1581년부터 1610년까지 수많은 발레들이 루브르 궁전에서 지방도시들에 이르기까지 공연되었지만 대본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1610년 이후 발레 대본들은 대부분 출판되었습니다. 이 당시의 발레들을 살펴보면 크게 멜로드라마적 발레(발레 멜로드라마티크)와 앙트레가 붙은 발레(발레 아 앙트레)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두 형태의 발레는 오페라와 오페라 발레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멜로드라마적 발레는 일관된 줄거리를 가진 음악극적 발레입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타소⑴ 의 시를 바탕으로 한 <르노의 해방을 기리는 발레(Ballet de la delivrance de Renaud, 1617)>와 <마법의 탄크레아우스 숲속을 모험하는 발레(Ballet de l'aventure de Tancrede en la forte enchantee, 1619)>입니다.
이 두 작품은 벨빌이 기악곡을, 피에르 게드롱이 성악곡을 작곡했습니다. 게드롱은 '왕의 실내악단'의 총감독이었습니다. 이 작품들의 연주규모는 굉장히 웅장해서 '왕의 실내악단'과 '왕의 예배음악대' '왕의 큰 마굿간 음악대'가 모두 참여해서 모두 64명의 가수와 24명의 비올 연주자, 14명의 류트 연주자들이 참여했다고 합니다.
무용수들 중에는 귀족들이 몇몇 섞여있었는데, 전문 무용수들이 귀족을 둘러싸는 형식으로 공연했다고 합니다. 복잡한 기계장치를 사용한 무대는 호화롭기 이를 데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1615년 공연된 <미네르바의 발레(Ballet de Minerva)>에서는 초롱불 1200개를 사용하고 효과를 높이기 위해 반짝이는 베에 금실은실을 수놓아 의상으로 사용했다고 하니, 당시의 발레가 얼마나 화려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1620년 이후 앙트레가 붙은 발레가 우세해졌습니다. 이 발레들은 기괴한 것, 우스꽝스러운 것, 놀라운 것을 소재로 했습니다.
어쨌거나 당시의 발레는 굉장한 유행이어서 학교에서, 거리에서, 민가에서, 대상인들의 저택에서 어디서든 볼 수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당시의 대표적인 예술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발레의 음악은 갖가지 요소들을 긁어모은 공동제작품이었으며 장차 오페라의 '프랑스식 서곡'을 탄생시키게 됩니다.
◈ 이탈리아 오페라의 영향
프랑스의 궁정에서 호화로운 발레가 발전할 무렵, 이탈리아에서는 오페라가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적지 않은 교류를 하면서 서로 영향을 받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사크라티의 오페라 <라 핀타 팟차(La Pinta Patcha)>가 파리 왕궁에서 상연되어 기상천외한 무대장치로 관객을 놀래켰습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프랑스인들은 이탈리아 오페라를 지루해했고 유명한 카스티라토의 레시타티브에 대해 야유를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합주곡, 비극과 희극의 조화, 안무, 기계장치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1654년 이탈리아 가수들이 모여 카프롤리의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결혼>을 공연했는데 굉장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엄밀히 말해 오페라라기 보다는 발레에 가까웠습니다.
1662년에는 베니스의 오페라 작곡자 카발리를 초빙하여 <사랑에 빠진 헤라클레스>를 튈르리 궁전의 웅장한 홀에서 상연했습니다. 이 작품은 당시 프랑스인들의 구미에 맞추어 각각의 막(幕) 마지막 부분에 발레의 앙트레를 덧붙였습니다.
이 발레 앙트레(디베르티스망)는 당시 젊은 신인이던 륄리가 작곡한 것으로 카발리의 곡보다 훨씬 주목받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오페라는 화려한 볼거리로 변신하게 됩니다.
◈ 왕립 음악 아카데미: 파리 오페라 극장
기계장치를 활용하여 무대를 화려하게 만드는 경향은 오페라에서 연극으로 번져나갔습니다. 특히 파리의 마레극장에서는 연극의 막간 구경거리로 음악을 선뵈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의 음악학자 리오넬 드 라 로랑시는 이 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막간 음악극이 서서히 연극을 잠식해 들어갔다. 이렇게 막간 음악이 들어간 연극은 점차 오페라를 닮아가기 시작했다." 또한 프랑스인들이 오래전부터 즐기던 파스토랄(전원극)도 처음부터 끝까지 노래로 불리게 됨으로써 오페라의 탄생을 예고했습니다.
한편 1669년, 음악가 피에르 페랭과 사업가 로베르 캉베르는 프랑스에서 오페라로 돈을 벌어들일 궁리를 하였습니다. 이윽고 그들은 국왕으로부터 '오페라 아카데미, 즉 프랑스어 시를 바탕으로 한 음악극 아카데미를 파리 또는 프랑스 왕국의 다른 도시에 창립'할 수 있는 면허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면허는 12년의 유효기간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른바 오페라 상영권이라고도 불렸습니다. 페랭과 캉베르는 파리 시내 중심가의 큰 건물을 빌려서 프랑스 최초의 오페라 극장을 설립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왕립 음악 아카데미' 즉 '오페라 극장'인 것입니다.
그러나 곧 그들 사이에 불화가 일어났습니다. 페랭은 수르데아크 후작에게 빚을 잔뜩 지고 감옥에 갔습니다. 후작은 빚 대신 극장을 빼앗았고 이 극장을 국왕의 총애를 받던 륄리가 가로채버렸습니다. 륄리는 페랭으로부터 빚을 대신 갚아주는 조건으로 상영 면허권을 샀고 페랭과 캉베르는 영국으로 망명해 버렸습니다.
륄리는 독재적으로 오페라극장을 관리했습니다. 1673년부터는 국왕으로부터 팔레 르와얄 극장을 무료로 사용하게 허가를 받아 프랑스 오페라 독점권을 확보하기에 이르렀지요. 극장 독점권은 오페라 작곡까지 륄리가 독점하도록 만들었습니다.
◈ 장-바티스트 륄리
륄리는 1632년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방앗간집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원래 이름도 륄리(Lulli)가 아닌 조반니 바티스타 룰리(Lully)였습니다. 륄리는 당시 프랑스 루이 14세의 사촌동생인 몽팡시에 공주가 이탈리아어를 배우기 위해 데려온 시종이었습니다.
그러나 곧 무용과 바이올린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 몽팡시에 공주로부터 총애를 받기 시작했지요. 몽팡시에 공주는 음악을 대단히 사랑해서 가수 겸 작곡가인 미셀 랑베르를 고용하고 있었습니다.
륄리는 랑베르로부터 음악을 배우고 몇 년 뒤에는 랑베르의 딸과 결혼하기에 이릅니다. 이때쯤 프랑스에는 프롱드의 난 이 일어나 몽파시에 공주는 귀양을 가고 이때 륄리는 하인의 신분에서 해방됩니다.
륄리는 파리로 가서 귀족출신으로 자처하며 무용과 음악을 좋아하던 젊은 국왕 루이 14세에게 접근합니다. 처음에는 궁정발레의 무용수였지만 국왕의 파트너가 되기에 이릅니다. 곧 바이올린에 대한 재능도 주목을 끌게 됩니다.
당시 루이 14세는 '왕의 24 바이올린'이라는 악단을 이끌고 있었는데 곧 륄리는 이와 흡사한 '쁘띠 비올롱(23명으로 된 젊은 바이올린)'을 창설하기도 합니다. 이때 륄리는 오르간 연주자 지고와 로베르데 밑에서 음악공부를 하고 프랑스에 와 있는 이탈리아인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습니다.
머지 않아 그는 무용수, 바이올린 연주자, 작곡가로서 3중의 명성을 날리게 됩니다. 특히 당시 되살아난 발레 열풍에 힘입어 여러 발레곡을 작곡했습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유명 작곡가의 오페라에 발레곡을 추가하기도 했지요. 륄리는 더더욱 왕의 사랑을 받고 1661년에는 '왕의 실내악단' 총감독에 등극합니다. 또한 프랑스 최고의 극작가 몰리에르와 함께 <서민귀족(Le Bourgeois gentilhomme, 1670)>을 공연하게 됩니다.
륄리는 국왕의 총애를 받아 마음껏 권세를 휘두른 음악가였습니다. 1672년에는 왕립 음악 아카데미(오페라극장)을 손에 넣었고 이것을 프랑스 유일의 오페라 공연장으로 만들었습니다. 당시의 오페라 대본을 보면 20-30명의 합창과 20명 정도의 무용수들이 등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륄리는 오케스트라를 지도하고 가수를 모집, 육성하면서 독특한 창법(데클라마시옹 릴리크)을 고안해냈습니다. 그것은 유명한 비극작가 라신느의 작품에서 명성을 떨친 여배우 샹멜레의 대사 낭독법으로부터 힌트를 얻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프랑스어의 특성을 잘 살린 음악적 낭독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륄리 오페라의 특징은 바로 이 독특한 레시타티브에서 가능해졌습니다. 프랑스 관객들은 전부터 이탈리아 레시타티브가 단조롭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노래도, 말도 아니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륄리의 데클라마시옹 릴리크는 이탈리아 레시타티브보다 훨씬 선율적이고 극적이었습니다. 륄리는 2박자와 3박자를 번갈아 사용하면서 쉼표를 통해 풍부한 표현을 해냈습니다.
또 가락을 다양화하여 자유로운 걸음걸이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즉 륄리의 레시타티브는 운율을 충분히 살려 밀도 높은 경지에 이른 것입니다. 이러한 레시타티브는 보통 통주저음으로 반주했지만 슬픈 장면같이 분위기를 잡을 필요가 있을 때에는 오케스트라로 반주했습니다.
기악 면에서 륄리는 '프랑스식 서곡'을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두 부분이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부점(附點)리듬을 지닌 느리고도 장중한 도입부와 푸가 풍의 빠른 악장, 그리고 느린 악장으로 마무리짓는 구성입니다. 이 서곡은 장중한 문(門)을 의미할 뿐, 뒤이어 나올 중심 극과도 관계가 없고 음악상의 주제와도 관계없는 것이었습니다.
륄리는 악기로 상황을 묘사했고 음악으로 배경을 표현했습니다. 특히 전원적 풍경, 전투, 지옥, 장례식 장면과 신들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장면, 마법 장면 등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 장면들에서는 특이한 춤들이 등장했는데 이를 위해서 륄리는 전통적 무용곡들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륄리의 오페라는 더할 나위 없이 화려했고, 장엄했고 변화무쌍했습니다. 그리고 국왕을 찬양하는 관례적 프로그램에 있어서도 '태양왕' 루이 14세 당시 궁정의 영화를 그대로 반영했습니다.
⑴ 타소 시인. 후기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시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앞에서도 여러번 등장했던 인물입니다. 그의 대표작으로 <해방된 예루살렘>을 들 수 있는데 십자군 전쟁을 소재로 한 이 시는 수많은 마드리갈, 오페라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⑵ 프롱드의 난 1648∼1653년에 걸쳐 일어난 프랑스의 내란을 말합니다. 프롱드(fronde)란 당시 청소년들 사이에 유행한 돌팔매 용구인데, 왕궁에 반항하여 돌을 던진다는 뜻으로 이런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기득권을 잃은 구귀족들이 절대왕정에 대항하여 일으킨 반란입니다.
◈ 륄리 이후의 프랑스 오페라
1687년 륄리는 세상을 떠나고 늙은 국왕 루이 14세는 종교에 몰입해 버렸습니다. 이에 따라 화려했던 음악과 춤은 베르사이유 궁정을 떠나 귀족의 궁정이나 중산계급의 저택으로 옮아갔습니다. 당시 프랑스 사람들은 호화롭고 웅장한 것에 싫증을 내고 대신 귀엽고 경쾌한 것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페라 발레가 발전했습니다.
오페라 발레는 오페라와 달리 일관된 줄거리가 없으며 장면의 수도 적었습니다. 즉 저마다 다른 줄거리들이 사계절이나 시대, 향연 등의 큰 주제 아래 뭉쳐져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 줄거리들도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고 그보다는 얼마나 장식을 했는가가 중요했습니다.
오페라 발레는 이렇게 삽화적이었으므로 작가는 마음대로 개정, 첨가, 삭제를 일삼았고, 그래서 악보 출판자들은 큰 손해를 보았습니다. 오페라 발레의 주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평범한 일상의 희극적 상황을 그리게도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오페라 발레로 <우아한 유럽(L'Europe galante)>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작품도 그림과 같은 아름다움과 이국적 취미만을 중시했고 얼마나 현실성 있는 내용인가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이 작품은 파리 노틀담 대성당 성가대의 악장이었던 앙드레 캉프라에 의해 작곡되었습니다.
캉프라는 성직자의 신분으로서 자유사상가들로 구성된 대귀족들과 친분이 두터웠습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굉장히 이상한 관계였습니다. 아무튼 캉프라는 자기 이름이 아니라 동생의 이름으로 이 작품을 발표했지만 곧 장안에 이런 노래가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주교님이 아셨다면
새로운 오페라의 작가 캉프라는
지금 있는 대성당에서
쫓겨났을 테지"
결국 캉프라는 노틀담 대성당 악장 자리에서 물러나 활발한 오페라 발레를 창작했습니다. 그는 곧 왕립 음악아카데미의 지휘자가 되었고, 륄리의 오페라를 본보기로 삼아 많은 작품을 썼습니다.
캉프라의 작품을 륄리와 비교해 보면, 더 선율적이고 폴라포닉했습니다. 화성진행에 있어서도 조바꿈이 훨씬 많았지요. 특히 이탈리아적 음악들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그의 작품집인 『칸타타 제1권』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습니다. "나는 프랑스 음악의 섬세함과 이탈리아 음악의 생기를 조화시키려 노력했다."
캉프라의 제자로서 앙드레 카르디날 데투쉬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원래 국왕의 근위병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스승 캉프라와 달리 이탈리아 풍의 음악을 아주 싫어해서 빈정거리기 위해서만 이탈리아 양식을 사용했습니다.
데투쉬는 자연스럽고 신선하면서 예리한 감수성으로 사람들을 매혹시켰습니다. 그의 화성은 참신한 편이지만 폴라포닉 앙상블은 서툰 편이었습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칼리로에(Callirohe, 1712)>와 <4대 원소(Les Elements, 1721)>이 있습니다.
이밖에 장 요셉 무레는 당대 사람들로부터 '우아한 음악가'라는 애칭으로 사랑받았습니다. 무레야말로 로코코의 정신을 제대로 구현한 음악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라공드의 사랑(Les Amours de Ragonde, 1714)>는 오페라 부파의 전신이라고 할 만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민중적인 성격을 띤 작품으로 특히 <샤리바리(Le Charivari)>라고 이름 붙은 마지막 장면은 늙은이와 젊은 아가씨, 혹은 노파와 젊은 청년의 결혼을 방해하는 '바보놀이'를 그리고 있습니다.
무레의 음악은 경쾌하고 사랑스러우며 신선하고 서민적이었습니다. 1717년 그는 이탈리안극장(코메디 이탈리안느)의 대표 작곡가가 되었으며 수많은 디베르티스망(발레 앙트레)을 작곡하여 프랑스 오페라 코믹의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 프랑스 오페라의 가수들
오페라의 여성 가수, 여성 무용수들은 엄청나게 까다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어마어마한 대귀족의 후원을 등에 업고 있어서 웬만한 일로는 연출가나 작곡가의 말을 듣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예컨대 륄리의 후임(실은 륄리의 사위)이 왕립 음악 아카데미의 악장이 되었을 때, 극장 운영은 엉망진창이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륄리 당시에는 적어도 여가수들이 1년중 6개월 동안 감기에 걸리거나 남성 가수들이 1주일에 4일 술에 취해 있던 적은 없었다"는 구절이 남아있을 정도입니다.
18세기 초, 프랑스 오페라계에는 엄청난 스타가 몇사람 있었습니다. 그중 여가수 모뱅은 특히나 스캔들 메이커였죠. 메조 소프라노였던 그녀는 아름다운 목소리의 소유자였지만 음란한 몸짓으로 수많은 결투의 원인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녀 자체가 뛰어난 검술사였다고 합니다.
어쨌거나 프랑스 가수들은 가장 프랑스적인 가창법으로 사랑을 받았습니다. 특히 이탈리아 가수들과는 다른 가창법을 발전시켰고, 노래를 일종의 연주라고 여겼습니다. 장-앙뜨완 베라르라는 사람이 쓴 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훌륭하게 연주된 노래의 꾸밈음은 교묘한 웅변술과 같다. 대연설가는 웅변술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여러 가지 감정을 투입한다. 노래의 꾸밈음도 마찬가지다. 뛰어난 가수가 힘, 감미로움, 온화함, 부드러움을 가진 꾸밈음으로 노래하면 인간의 영혼을 뒤흔들게 된다. 노래에서 꾸밈음을 없앴다면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없애는 것이 된다." 이처럼 프랑스인들은 표현에 역점을 두었고 이는 목소리의 기교를 중시했던 이탈리아인들과 대조됩니다.
◈ 라모와 부퐁논쟁
장-필립 라모(Jean-Philippe Rameau, 1683-1764)는 프랑스 고전주의의 대표자입니다. 라모는 오랫동안 귀족 라 푸플리니에르의 후원을 받았는데 푸플리니에르는 오케스트라도 갖고 있었고 자기 집을 예술 클럽처럼 만들어서 당시의 문화예술인들을 초청하곤 했습니다. 그중엔 유명한 계몽사상가 볼테르도 포함되어 있었지요. 이들은 나중에 라모에게 오페라 대본을 써주기도 했습니다.
라모는 나이가 쉰이나 되어서야 첫 번째 오페라를 작곡했습니다. 라모의 작품들은 륄리를 계승하던 정통파 음악가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륄리파와 라모파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제 라모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음악가란 자연을 묘사하기에 앞서 자연을 배워야 한다. 자신의 정신과 취미를 활용하여 적절한 표현을 위한 음색과 뉘앙스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라모의 창작방식이었습니다. 라모는 오케스트라를 공연에 참여시키려고 한 최초의 음악가이기도 했습니다.
라모의 레시타티브는 륄리에 비해 혁신적이었다고는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라모의 작품은 표현상의 배려, 거침없는 선율의 흐름을 지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레시타티브는 어느 사이엔가 아리아가 되고 아리아는 또 레시타티브가 되곤 했습니다. 화성의 측면에서는 륄리보다 라모가 훨씬 풍요로웠습니다. 라모는 또한 클라리넷을 처음 사용한 음악가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라모의 <우아한 인도의 나라들>의 표현은 이전까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또한 희극 <플라테(Platee)>에는 힘있는 익살과 넘치는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라모의 오페라는 굉장히 생기 넘치는 것으로서, 이는 다양한 요소들이 교체하면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라모의 작품들은 18세기 중엽을 주름잡았습니다만 만년에는 계몽사상가인 장-자크 루소와 '부퐁 논쟁'에 휘말리기도 했습니다. 이 논쟁은 1752년 파리에 있던 몇 명의 이탈리아인들이 상연한 오페라 부파 <마님이 된 하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로 인해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를 찬양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들은 이탈리아 오페라의 범속한 스타일과 발랄함, 민속 음악적 단순함에 매료되었고 프랑스 오페라를 철저히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루소를 필두로 한 계몽주의 백과사전파로서 새것을 애타게 찾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루소는 라모의 <우아한 인도의 나라들>에 대해 합주가 너무 복잡하다, 화성이 너무 으리으리하다면서 '마치 끊어지지 않는 소음과 같다'고 비난했습니다. 루소 편에는 디드로 등의 계몽사상가와 왕비가 섰고 라모 편에는 국왕과 대부분의 청중이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이 논쟁은 극장에서의 말싸움과 비방하는 글이 돌아다니는 것에 그치지 않고 결투가 벌어지는 등 가히 전쟁을 방불케 했다고 전해집니다.
부퐁 논쟁은 오페라 코믹의 탄생으로 이어졌습니다. 오페라 코믹은 상당히 서민적인 소재를 사용했고 일상생활이나 전원생활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루었습니다. 또한 굉장히 희극적이었으며 풍자적이기도 했습니다. 오페라 코믹은 점차 진지해져서 나중에는 낭만주의적 내용도 다루게 됩니다.
오페라 코믹은 처음에 파리 세느강 근처의 생 로랑과 생 제르망 장터에서 공연되었습니다. 이때는 오페라나 연극이라기보다는 서커스에 가까웠죠. 그러나 엄청난 인기를 누리면서 곧 연극과 음악이 혼합되어 있고 괜히 무게잡지도 않으면서 너무나 재밌고 통쾌한 형식으로 자리잡아갔습니다.
오페라 코믹의 음악은 보드빌로서, 원래 잘 알려진 선율에다가 가사만 바꿔서 부르는 형태였습니다. 결국 18세기 중반에 이탈리아적 희극과 장터에서의 희극이 결합하여 오페라 코믹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지요. 대표적인 오페라 코믹 극장은 '이탈리안 극장'으로 사람들이 이탈리안 극장에 간다고 하면 곧 오페라 코믹을 보러 간다는 뜻이었습니다.
◈ 그밖의 작곡가들
그럼 이제 18세기 중후반, 부퐁논쟁 이후의 프랑스 작곡가들로 우선 필리도르는 체스의 명수로서 캉프라의 제자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이탈리아에서 들여온 경향과 캉프라에게서 전수받은 프랑스적 전통이 결합된 것이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이탈리아적 생기와 역동성을 지니면서도 프랑스적 자연스러움과 규모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몽시니는 <마님이 된 하녀>로부터 충격을 받고 음악가가 되었습니다. 그의 대표작은 이탈리안 극장에서 상연한 <탈주병(Le Deserteur)>으로 오페라의 새로운 경향을 반영한 것입니다.
이 작품은 전통적 오페라의 거창한 영웅들도, 희극적인 하인들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당시 문학을 주름잡던 감상벽을 담고 있어서 눈물 없인 볼 수 없던 최루성 극이었습니다.
사랑을 위하여 도망쳤다가 영창에서 사형을 기다리는 어느 병사의 눈물어린 이야기! 배경은 시골이며 인물은 농민들이었습니다. 몇 곡의 술노래가 분위기를 녹이고 있고 결국은 해피엔드이지만 관객들은 눈물을 쏟으며 보았다고 전해집니다.
1774년, 글룩은 파리의 오페라계를 뒤집어놓았습니다. 글룩은 체코계 독일인으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 여러 나라를 유람하면서 빈둥거리던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오페라 세리아를 아주 많이 보았는데 가수들의 기교와 카스티라토를 굉장히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훗날 그가 1767년 오페라 <알케스티스>를 작곡하면서 머리말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알케스티스>를 작곡하면서 나는 모든 악폐를 떨어내려 했습니다. 그 악폐란 무능한 가수들이 자기들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서 도입했거나 작곡가들이 자기만족에 취해서 끌어들인 것들입니다.
악폐들은 오랫동안 이탈리아 오페라를 일그러뜨리고 장엄하고 아름다운 스펙타클을 바보스럽고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바꿔버렸습니다. 음악을 쓸 데 없는 꾸밈음으로 죽여버리지 않고, 가사의 모든 감정과 상황을 표현할 수 있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글룩은 유명한 극작가 라신느의 비극에서 착안한 오페라 <아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를 공연하러 파리 오페라극장에 왔을 때, 황태자비 마리 앙뜨와네뜨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 작품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들 사이에 엄청난 논쟁을 불러왔습니다. 이것이 1774년의 일입니다. 특히 피치니라는 작곡가와 글룩이 <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라는 같은 제목의 오페라를 발표했을 때는 엄청난 경쟁이 있었습니다. 결국 글룩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결국 프랑스의 바로크는 오페라에서도 보았던 것처럼, 세련됨과 우아함을 추구했습니다. 특히 궁정에 상주하는 현악합주단의 프랑스 5성부 관현악법과 발레 음악의 부점리듬은 프랑스적 음악을 구축했습니다. 프랑스의 이러한 취향은 바로크 말기에 직접 전고전주의의 문을 여는 로코코로 치닫게 했습니다.
즉 음악은 심각할 필요가 없고 향수 묻은 손수건처럼 사치스러운 장식품에 불과하다는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프랑스 로코코 음악은 당시의 건축물이나 공예품과 마찬가지로 장식이 많은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특히 합시코드와 류트음악이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바로크는 강력한 중앙 집권의 정권 체제 확립을 확고히 하면서 17세기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궁정발레로부터 출발하여 융성한 프랑스 오페라는 이 시기를 잘 대변해 줍니다.
프랑스의 오페라가 탄생한 것은 궁정발레 <왕비의 발레 코믹(Ballet comique de la Reine, 1581)>부터 왕립 음악 아카데미(Academie Royale de Musique, 오페라 극장)가 창립된 1672년까지 1세기 동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바로크는 중세 이후 확립된 프랑스적 전통과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으며 발전했습니다.
프랑스에서 오페라의 기운은 이미 중세부터 싹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세에 교회에서 행해지던 전례극과 기적극은 음악과 화려한 무대장치를 중심으로 했고, 귀족의 행사에서는 무언극과 합창, 기악곡, 발레 등을 행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잡다한 요소들을 긁어모으고 인문주의자들의 종합예술론의 영향을 받아 바로크 시대에 오페라로 꽃피게 되는 것입니다.
◈ 궁정발레
우선 장차 프랑스 오페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궁정 발레부터 살펴봅시다. 앞서 잠깐 이야기했던 <왕비의 발레 코믹>은 음악가, 시인, 안무가, 배우 그리고 연출가들의 합작품으로서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즉 당시 유행하던 종합예술적 사고방식과 고대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결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 이후 1581년부터 1610년까지 수많은 발레들이 루브르 궁전에서 지방도시들에 이르기까지 공연되었지만 대본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1610년 이후 발레 대본들은 대부분 출판되었습니다. 이 당시의 발레들을 살펴보면 크게 멜로드라마적 발레(발레 멜로드라마티크)와 앙트레가 붙은 발레(발레 아 앙트레)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두 형태의 발레는 오페라와 오페라 발레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멜로드라마적 발레는 일관된 줄거리를 가진 음악극적 발레입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타소⑴ 의 시를 바탕으로 한 <르노의 해방을 기리는 발레(Ballet de la delivrance de Renaud, 1617)>와 <마법의 탄크레아우스 숲속을 모험하는 발레(Ballet de l'aventure de Tancrede en la forte enchantee, 1619)>입니다.
이 두 작품은 벨빌이 기악곡을, 피에르 게드롱이 성악곡을 작곡했습니다. 게드롱은 '왕의 실내악단'의 총감독이었습니다. 이 작품들의 연주규모는 굉장히 웅장해서 '왕의 실내악단'과 '왕의 예배음악대' '왕의 큰 마굿간 음악대'가 모두 참여해서 모두 64명의 가수와 24명의 비올 연주자, 14명의 류트 연주자들이 참여했다고 합니다.
무용수들 중에는 귀족들이 몇몇 섞여있었는데, 전문 무용수들이 귀족을 둘러싸는 형식으로 공연했다고 합니다. 복잡한 기계장치를 사용한 무대는 호화롭기 이를 데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1615년 공연된 <미네르바의 발레(Ballet de Minerva)>에서는 초롱불 1200개를 사용하고 효과를 높이기 위해 반짝이는 베에 금실은실을 수놓아 의상으로 사용했다고 하니, 당시의 발레가 얼마나 화려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1620년 이후 앙트레가 붙은 발레가 우세해졌습니다. 이 발레들은 기괴한 것, 우스꽝스러운 것, 놀라운 것을 소재로 했습니다.
어쨌거나 당시의 발레는 굉장한 유행이어서 학교에서, 거리에서, 민가에서, 대상인들의 저택에서 어디서든 볼 수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당시의 대표적인 예술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발레의 음악은 갖가지 요소들을 긁어모은 공동제작품이었으며 장차 오페라의 '프랑스식 서곡'을 탄생시키게 됩니다.
◈ 이탈리아 오페라의 영향
프랑스의 궁정에서 호화로운 발레가 발전할 무렵, 이탈리아에서는 오페라가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적지 않은 교류를 하면서 서로 영향을 받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사크라티의 오페라 <라 핀타 팟차(La Pinta Patcha)>가 파리 왕궁에서 상연되어 기상천외한 무대장치로 관객을 놀래켰습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프랑스인들은 이탈리아 오페라를 지루해했고 유명한 카스티라토의 레시타티브에 대해 야유를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합주곡, 비극과 희극의 조화, 안무, 기계장치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1654년 이탈리아 가수들이 모여 카프롤리의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결혼>을 공연했는데 굉장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엄밀히 말해 오페라라기 보다는 발레에 가까웠습니다.
1662년에는 베니스의 오페라 작곡자 카발리를 초빙하여 <사랑에 빠진 헤라클레스>를 튈르리 궁전의 웅장한 홀에서 상연했습니다. 이 작품은 당시 프랑스인들의 구미에 맞추어 각각의 막(幕) 마지막 부분에 발레의 앙트레를 덧붙였습니다.
이 발레 앙트레(디베르티스망)는 당시 젊은 신인이던 륄리가 작곡한 것으로 카발리의 곡보다 훨씬 주목받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오페라는 화려한 볼거리로 변신하게 됩니다.
◈ 왕립 음악 아카데미: 파리 오페라 극장
기계장치를 활용하여 무대를 화려하게 만드는 경향은 오페라에서 연극으로 번져나갔습니다. 특히 파리의 마레극장에서는 연극의 막간 구경거리로 음악을 선뵈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의 음악학자 리오넬 드 라 로랑시는 이 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막간 음악극이 서서히 연극을 잠식해 들어갔다. 이렇게 막간 음악이 들어간 연극은 점차 오페라를 닮아가기 시작했다." 또한 프랑스인들이 오래전부터 즐기던 파스토랄(전원극)도 처음부터 끝까지 노래로 불리게 됨으로써 오페라의 탄생을 예고했습니다.
한편 1669년, 음악가 피에르 페랭과 사업가 로베르 캉베르는 프랑스에서 오페라로 돈을 벌어들일 궁리를 하였습니다. 이윽고 그들은 국왕으로부터 '오페라 아카데미, 즉 프랑스어 시를 바탕으로 한 음악극 아카데미를 파리 또는 프랑스 왕국의 다른 도시에 창립'할 수 있는 면허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면허는 12년의 유효기간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른바 오페라 상영권이라고도 불렸습니다. 페랭과 캉베르는 파리 시내 중심가의 큰 건물을 빌려서 프랑스 최초의 오페라 극장을 설립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왕립 음악 아카데미' 즉 '오페라 극장'인 것입니다.
그러나 곧 그들 사이에 불화가 일어났습니다. 페랭은 수르데아크 후작에게 빚을 잔뜩 지고 감옥에 갔습니다. 후작은 빚 대신 극장을 빼앗았고 이 극장을 국왕의 총애를 받던 륄리가 가로채버렸습니다. 륄리는 페랭으로부터 빚을 대신 갚아주는 조건으로 상영 면허권을 샀고 페랭과 캉베르는 영국으로 망명해 버렸습니다.
륄리는 독재적으로 오페라극장을 관리했습니다. 1673년부터는 국왕으로부터 팔레 르와얄 극장을 무료로 사용하게 허가를 받아 프랑스 오페라 독점권을 확보하기에 이르렀지요. 극장 독점권은 오페라 작곡까지 륄리가 독점하도록 만들었습니다.
◈ 장-바티스트 륄리
륄리는 1632년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방앗간집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원래 이름도 륄리(Lulli)가 아닌 조반니 바티스타 룰리(Lully)였습니다. 륄리는 당시 프랑스 루이 14세의 사촌동생인 몽팡시에 공주가 이탈리아어를 배우기 위해 데려온 시종이었습니다.
그러나 곧 무용과 바이올린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 몽팡시에 공주로부터 총애를 받기 시작했지요. 몽팡시에 공주는 음악을 대단히 사랑해서 가수 겸 작곡가인 미셀 랑베르를 고용하고 있었습니다.
륄리는 랑베르로부터 음악을 배우고 몇 년 뒤에는 랑베르의 딸과 결혼하기에 이릅니다. 이때쯤 프랑스에는 프롱드의 난 이 일어나 몽파시에 공주는 귀양을 가고 이때 륄리는 하인의 신분에서 해방됩니다.
륄리는 파리로 가서 귀족출신으로 자처하며 무용과 음악을 좋아하던 젊은 국왕 루이 14세에게 접근합니다. 처음에는 궁정발레의 무용수였지만 국왕의 파트너가 되기에 이릅니다. 곧 바이올린에 대한 재능도 주목을 끌게 됩니다.
당시 루이 14세는 '왕의 24 바이올린'이라는 악단을 이끌고 있었는데 곧 륄리는 이와 흡사한 '쁘띠 비올롱(23명으로 된 젊은 바이올린)'을 창설하기도 합니다. 이때 륄리는 오르간 연주자 지고와 로베르데 밑에서 음악공부를 하고 프랑스에 와 있는 이탈리아인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습니다.
머지 않아 그는 무용수, 바이올린 연주자, 작곡가로서 3중의 명성을 날리게 됩니다. 특히 당시 되살아난 발레 열풍에 힘입어 여러 발레곡을 작곡했습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유명 작곡가의 오페라에 발레곡을 추가하기도 했지요. 륄리는 더더욱 왕의 사랑을 받고 1661년에는 '왕의 실내악단' 총감독에 등극합니다. 또한 프랑스 최고의 극작가 몰리에르와 함께 <서민귀족(Le Bourgeois gentilhomme, 1670)>을 공연하게 됩니다.
륄리는 국왕의 총애를 받아 마음껏 권세를 휘두른 음악가였습니다. 1672년에는 왕립 음악 아카데미(오페라극장)을 손에 넣었고 이것을 프랑스 유일의 오페라 공연장으로 만들었습니다. 당시의 오페라 대본을 보면 20-30명의 합창과 20명 정도의 무용수들이 등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륄리는 오케스트라를 지도하고 가수를 모집, 육성하면서 독특한 창법(데클라마시옹 릴리크)을 고안해냈습니다. 그것은 유명한 비극작가 라신느의 작품에서 명성을 떨친 여배우 샹멜레의 대사 낭독법으로부터 힌트를 얻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프랑스어의 특성을 잘 살린 음악적 낭독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륄리 오페라의 특징은 바로 이 독특한 레시타티브에서 가능해졌습니다. 프랑스 관객들은 전부터 이탈리아 레시타티브가 단조롭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노래도, 말도 아니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륄리의 데클라마시옹 릴리크는 이탈리아 레시타티브보다 훨씬 선율적이고 극적이었습니다. 륄리는 2박자와 3박자를 번갈아 사용하면서 쉼표를 통해 풍부한 표현을 해냈습니다.
또 가락을 다양화하여 자유로운 걸음걸이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즉 륄리의 레시타티브는 운율을 충분히 살려 밀도 높은 경지에 이른 것입니다. 이러한 레시타티브는 보통 통주저음으로 반주했지만 슬픈 장면같이 분위기를 잡을 필요가 있을 때에는 오케스트라로 반주했습니다.
기악 면에서 륄리는 '프랑스식 서곡'을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두 부분이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부점(附點)리듬을 지닌 느리고도 장중한 도입부와 푸가 풍의 빠른 악장, 그리고 느린 악장으로 마무리짓는 구성입니다. 이 서곡은 장중한 문(門)을 의미할 뿐, 뒤이어 나올 중심 극과도 관계가 없고 음악상의 주제와도 관계없는 것이었습니다.
륄리는 악기로 상황을 묘사했고 음악으로 배경을 표현했습니다. 특히 전원적 풍경, 전투, 지옥, 장례식 장면과 신들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장면, 마법 장면 등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 장면들에서는 특이한 춤들이 등장했는데 이를 위해서 륄리는 전통적 무용곡들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륄리의 오페라는 더할 나위 없이 화려했고, 장엄했고 변화무쌍했습니다. 그리고 국왕을 찬양하는 관례적 프로그램에 있어서도 '태양왕' 루이 14세 당시 궁정의 영화를 그대로 반영했습니다.
⑴ 타소 시인. 후기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시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앞에서도 여러번 등장했던 인물입니다. 그의 대표작으로 <해방된 예루살렘>을 들 수 있는데 십자군 전쟁을 소재로 한 이 시는 수많은 마드리갈, 오페라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⑵ 프롱드의 난 1648∼1653년에 걸쳐 일어난 프랑스의 내란을 말합니다. 프롱드(fronde)란 당시 청소년들 사이에 유행한 돌팔매 용구인데, 왕궁에 반항하여 돌을 던진다는 뜻으로 이런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기득권을 잃은 구귀족들이 절대왕정에 대항하여 일으킨 반란입니다.
◈ 륄리 이후의 프랑스 오페라
1687년 륄리는 세상을 떠나고 늙은 국왕 루이 14세는 종교에 몰입해 버렸습니다. 이에 따라 화려했던 음악과 춤은 베르사이유 궁정을 떠나 귀족의 궁정이나 중산계급의 저택으로 옮아갔습니다. 당시 프랑스 사람들은 호화롭고 웅장한 것에 싫증을 내고 대신 귀엽고 경쾌한 것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페라 발레가 발전했습니다.
오페라 발레는 오페라와 달리 일관된 줄거리가 없으며 장면의 수도 적었습니다. 즉 저마다 다른 줄거리들이 사계절이나 시대, 향연 등의 큰 주제 아래 뭉쳐져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 줄거리들도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고 그보다는 얼마나 장식을 했는가가 중요했습니다.
오페라 발레는 이렇게 삽화적이었으므로 작가는 마음대로 개정, 첨가, 삭제를 일삼았고, 그래서 악보 출판자들은 큰 손해를 보았습니다. 오페라 발레의 주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평범한 일상의 희극적 상황을 그리게도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오페라 발레로 <우아한 유럽(L'Europe galante)>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작품도 그림과 같은 아름다움과 이국적 취미만을 중시했고 얼마나 현실성 있는 내용인가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이 작품은 파리 노틀담 대성당 성가대의 악장이었던 앙드레 캉프라에 의해 작곡되었습니다.
캉프라는 성직자의 신분으로서 자유사상가들로 구성된 대귀족들과 친분이 두터웠습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굉장히 이상한 관계였습니다. 아무튼 캉프라는 자기 이름이 아니라 동생의 이름으로 이 작품을 발표했지만 곧 장안에 이런 노래가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주교님이 아셨다면
새로운 오페라의 작가 캉프라는
지금 있는 대성당에서
쫓겨났을 테지"
결국 캉프라는 노틀담 대성당 악장 자리에서 물러나 활발한 오페라 발레를 창작했습니다. 그는 곧 왕립 음악아카데미의 지휘자가 되었고, 륄리의 오페라를 본보기로 삼아 많은 작품을 썼습니다.
캉프라의 작품을 륄리와 비교해 보면, 더 선율적이고 폴라포닉했습니다. 화성진행에 있어서도 조바꿈이 훨씬 많았지요. 특히 이탈리아적 음악들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그의 작품집인 『칸타타 제1권』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습니다. "나는 프랑스 음악의 섬세함과 이탈리아 음악의 생기를 조화시키려 노력했다."
캉프라의 제자로서 앙드레 카르디날 데투쉬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원래 국왕의 근위병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스승 캉프라와 달리 이탈리아 풍의 음악을 아주 싫어해서 빈정거리기 위해서만 이탈리아 양식을 사용했습니다.
데투쉬는 자연스럽고 신선하면서 예리한 감수성으로 사람들을 매혹시켰습니다. 그의 화성은 참신한 편이지만 폴라포닉 앙상블은 서툰 편이었습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칼리로에(Callirohe, 1712)>와 <4대 원소(Les Elements, 1721)>이 있습니다.
이밖에 장 요셉 무레는 당대 사람들로부터 '우아한 음악가'라는 애칭으로 사랑받았습니다. 무레야말로 로코코의 정신을 제대로 구현한 음악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라공드의 사랑(Les Amours de Ragonde, 1714)>는 오페라 부파의 전신이라고 할 만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민중적인 성격을 띤 작품으로 특히 <샤리바리(Le Charivari)>라고 이름 붙은 마지막 장면은 늙은이와 젊은 아가씨, 혹은 노파와 젊은 청년의 결혼을 방해하는 '바보놀이'를 그리고 있습니다.
무레의 음악은 경쾌하고 사랑스러우며 신선하고 서민적이었습니다. 1717년 그는 이탈리안극장(코메디 이탈리안느)의 대표 작곡가가 되었으며 수많은 디베르티스망(발레 앙트레)을 작곡하여 프랑스 오페라 코믹의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 프랑스 오페라의 가수들
오페라의 여성 가수, 여성 무용수들은 엄청나게 까다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어마어마한 대귀족의 후원을 등에 업고 있어서 웬만한 일로는 연출가나 작곡가의 말을 듣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예컨대 륄리의 후임(실은 륄리의 사위)이 왕립 음악 아카데미의 악장이 되었을 때, 극장 운영은 엉망진창이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륄리 당시에는 적어도 여가수들이 1년중 6개월 동안 감기에 걸리거나 남성 가수들이 1주일에 4일 술에 취해 있던 적은 없었다"는 구절이 남아있을 정도입니다.
18세기 초, 프랑스 오페라계에는 엄청난 스타가 몇사람 있었습니다. 그중 여가수 모뱅은 특히나 스캔들 메이커였죠. 메조 소프라노였던 그녀는 아름다운 목소리의 소유자였지만 음란한 몸짓으로 수많은 결투의 원인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녀 자체가 뛰어난 검술사였다고 합니다.
어쨌거나 프랑스 가수들은 가장 프랑스적인 가창법으로 사랑을 받았습니다. 특히 이탈리아 가수들과는 다른 가창법을 발전시켰고, 노래를 일종의 연주라고 여겼습니다. 장-앙뜨완 베라르라는 사람이 쓴 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훌륭하게 연주된 노래의 꾸밈음은 교묘한 웅변술과 같다. 대연설가는 웅변술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여러 가지 감정을 투입한다. 노래의 꾸밈음도 마찬가지다. 뛰어난 가수가 힘, 감미로움, 온화함, 부드러움을 가진 꾸밈음으로 노래하면 인간의 영혼을 뒤흔들게 된다. 노래에서 꾸밈음을 없앴다면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없애는 것이 된다." 이처럼 프랑스인들은 표현에 역점을 두었고 이는 목소리의 기교를 중시했던 이탈리아인들과 대조됩니다.
◈ 라모와 부퐁논쟁
장-필립 라모(Jean-Philippe Rameau, 1683-1764)는 프랑스 고전주의의 대표자입니다. 라모는 오랫동안 귀족 라 푸플리니에르의 후원을 받았는데 푸플리니에르는 오케스트라도 갖고 있었고 자기 집을 예술 클럽처럼 만들어서 당시의 문화예술인들을 초청하곤 했습니다. 그중엔 유명한 계몽사상가 볼테르도 포함되어 있었지요. 이들은 나중에 라모에게 오페라 대본을 써주기도 했습니다.
라모는 나이가 쉰이나 되어서야 첫 번째 오페라를 작곡했습니다. 라모의 작품들은 륄리를 계승하던 정통파 음악가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륄리파와 라모파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제 라모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음악가란 자연을 묘사하기에 앞서 자연을 배워야 한다. 자신의 정신과 취미를 활용하여 적절한 표현을 위한 음색과 뉘앙스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라모의 창작방식이었습니다. 라모는 오케스트라를 공연에 참여시키려고 한 최초의 음악가이기도 했습니다.
라모의 레시타티브는 륄리에 비해 혁신적이었다고는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라모의 작품은 표현상의 배려, 거침없는 선율의 흐름을 지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레시타티브는 어느 사이엔가 아리아가 되고 아리아는 또 레시타티브가 되곤 했습니다. 화성의 측면에서는 륄리보다 라모가 훨씬 풍요로웠습니다. 라모는 또한 클라리넷을 처음 사용한 음악가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라모의 <우아한 인도의 나라들>의 표현은 이전까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또한 희극 <플라테(Platee)>에는 힘있는 익살과 넘치는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라모의 오페라는 굉장히 생기 넘치는 것으로서, 이는 다양한 요소들이 교체하면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라모의 작품들은 18세기 중엽을 주름잡았습니다만 만년에는 계몽사상가인 장-자크 루소와 '부퐁 논쟁'에 휘말리기도 했습니다. 이 논쟁은 1752년 파리에 있던 몇 명의 이탈리아인들이 상연한 오페라 부파 <마님이 된 하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로 인해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를 찬양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들은 이탈리아 오페라의 범속한 스타일과 발랄함, 민속 음악적 단순함에 매료되었고 프랑스 오페라를 철저히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루소를 필두로 한 계몽주의 백과사전파로서 새것을 애타게 찾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루소는 라모의 <우아한 인도의 나라들>에 대해 합주가 너무 복잡하다, 화성이 너무 으리으리하다면서 '마치 끊어지지 않는 소음과 같다'고 비난했습니다. 루소 편에는 디드로 등의 계몽사상가와 왕비가 섰고 라모 편에는 국왕과 대부분의 청중이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이 논쟁은 극장에서의 말싸움과 비방하는 글이 돌아다니는 것에 그치지 않고 결투가 벌어지는 등 가히 전쟁을 방불케 했다고 전해집니다.
부퐁 논쟁은 오페라 코믹의 탄생으로 이어졌습니다. 오페라 코믹은 상당히 서민적인 소재를 사용했고 일상생활이나 전원생활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루었습니다. 또한 굉장히 희극적이었으며 풍자적이기도 했습니다. 오페라 코믹은 점차 진지해져서 나중에는 낭만주의적 내용도 다루게 됩니다.
오페라 코믹은 처음에 파리 세느강 근처의 생 로랑과 생 제르망 장터에서 공연되었습니다. 이때는 오페라나 연극이라기보다는 서커스에 가까웠죠. 그러나 엄청난 인기를 누리면서 곧 연극과 음악이 혼합되어 있고 괜히 무게잡지도 않으면서 너무나 재밌고 통쾌한 형식으로 자리잡아갔습니다.
오페라 코믹의 음악은 보드빌로서, 원래 잘 알려진 선율에다가 가사만 바꿔서 부르는 형태였습니다. 결국 18세기 중반에 이탈리아적 희극과 장터에서의 희극이 결합하여 오페라 코믹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지요. 대표적인 오페라 코믹 극장은 '이탈리안 극장'으로 사람들이 이탈리안 극장에 간다고 하면 곧 오페라 코믹을 보러 간다는 뜻이었습니다.
◈ 그밖의 작곡가들
그럼 이제 18세기 중후반, 부퐁논쟁 이후의 프랑스 작곡가들로 우선 필리도르는 체스의 명수로서 캉프라의 제자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이탈리아에서 들여온 경향과 캉프라에게서 전수받은 프랑스적 전통이 결합된 것이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이탈리아적 생기와 역동성을 지니면서도 프랑스적 자연스러움과 규모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몽시니는 <마님이 된 하녀>로부터 충격을 받고 음악가가 되었습니다. 그의 대표작은 이탈리안 극장에서 상연한 <탈주병(Le Deserteur)>으로 오페라의 새로운 경향을 반영한 것입니다.
이 작품은 전통적 오페라의 거창한 영웅들도, 희극적인 하인들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당시 문학을 주름잡던 감상벽을 담고 있어서 눈물 없인 볼 수 없던 최루성 극이었습니다.
사랑을 위하여 도망쳤다가 영창에서 사형을 기다리는 어느 병사의 눈물어린 이야기! 배경은 시골이며 인물은 농민들이었습니다. 몇 곡의 술노래가 분위기를 녹이고 있고 결국은 해피엔드이지만 관객들은 눈물을 쏟으며 보았다고 전해집니다.
1774년, 글룩은 파리의 오페라계를 뒤집어놓았습니다. 글룩은 체코계 독일인으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 여러 나라를 유람하면서 빈둥거리던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오페라 세리아를 아주 많이 보았는데 가수들의 기교와 카스티라토를 굉장히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훗날 그가 1767년 오페라 <알케스티스>를 작곡하면서 머리말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알케스티스>를 작곡하면서 나는 모든 악폐를 떨어내려 했습니다. 그 악폐란 무능한 가수들이 자기들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서 도입했거나 작곡가들이 자기만족에 취해서 끌어들인 것들입니다.
악폐들은 오랫동안 이탈리아 오페라를 일그러뜨리고 장엄하고 아름다운 스펙타클을 바보스럽고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바꿔버렸습니다. 음악을 쓸 데 없는 꾸밈음으로 죽여버리지 않고, 가사의 모든 감정과 상황을 표현할 수 있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글룩은 유명한 극작가 라신느의 비극에서 착안한 오페라 <아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를 공연하러 파리 오페라극장에 왔을 때, 황태자비 마리 앙뜨와네뜨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 작품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들 사이에 엄청난 논쟁을 불러왔습니다. 이것이 1774년의 일입니다. 특히 피치니라는 작곡가와 글룩이 <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라는 같은 제목의 오페라를 발표했을 때는 엄청난 경쟁이 있었습니다. 결국 글룩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결국 프랑스의 바로크는 오페라에서도 보았던 것처럼, 세련됨과 우아함을 추구했습니다. 특히 궁정에 상주하는 현악합주단의 프랑스 5성부 관현악법과 발레 음악의 부점리듬은 프랑스적 음악을 구축했습니다. 프랑스의 이러한 취향은 바로크 말기에 직접 전고전주의의 문을 여는 로코코로 치닫게 했습니다.
즉 음악은 심각할 필요가 없고 향수 묻은 손수건처럼 사치스러운 장식품에 불과하다는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프랑스 로코코 음악은 당시의 건축물이나 공예품과 마찬가지로 장식이 많은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특히 합시코드와 류트음악이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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