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책 - 정끝별 -

작성자혜성|작성시간26.06.09|조회수9 목록 댓글 0

흰 자모음을 두서없이 휘갈겨대는군요 바람이 가끔 문법을 일러주기도 합니다 아하 千軍萬馬라 써 있군요 누군가 백말떼 갈기를 마구 흔들어대는군요 희디흰 말털들이 부지런히 글자를 지우네요 아이구야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떼떼로 몰려오는군요 흰 몸이 흰 몸을 붙들고 자면 사랑을 낳듯 흰 자음 옆에 흰 모음이 가만히 눕기만 해도 때때로 詩가 됩니다 까만 머리를 빡빡 밀어버린 수천의 중들이 휘파람을 불면서 써제끼는 날라리 게송들도 있군요

 

가갸거겨 강을 라랴러려 집을 하햐허혀 나무를 들었다 놓았다 한밤내 석봉이도 저렇게 글줄께나 읽었을 겝니다 그밤내 불무 불무 불무야 이 땅에서 제일 따뜻한 아랫목 을 위해 확―열어놓은 불구멍 같은 저 달을 세상 어미들이 밤새 가래떡처럼 썰어대는군요 그러니 저리 펄펄 내리는 거겠죠 한밤내 호호백발 두 母子가 꿈꾸었을 해피엔딩 을 훔쳐 읽다 문득 자고 있는 아이놈 고추를 만져보는 기가 막힌 밤인 겝니다

 

 

- 정끝별, 『흰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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