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장,
수아는 엄마를 설득하려 애를 쓴다.
허지만 큰일을 앞두고 있는 김여인으로서는 오백이라는 돈을 수아에게 내어줄 여유가 없다.
“글쎄, 네가 아무리 그래도 돈이 없다.
그리고 이제는 다시는 네게 그런 돈을 해 주지 않을 것이다.“
수아는 결국 빈손으로 돌아가면서 마음이 상한다.
이제 더 이상 어디에서도 손을 벌릴 곳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월급생활을 하는 남편에게 달리 방도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수아는 잠시 윤주를 생각해 본다.
그러다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자신의 생각을 떨쳐버린다.
차라리 일선이의 학원을 중지할망정 윤주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기는 죽어도 싫은 것이다.
자신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이 아쉬운 소리를 하려면 분명히 머리를 숙이며 들어가 형님이라고 불러야만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수아는 너무 성격이 강한 것이다.
“여보!
당신 어디 가서 돈을 마련할 곳이 없어?“
“뭐?
돈이라니?
매달 꼬박 월급이 들어오는데 무슨 돈?“
“그것으로 부족하니까 하는 말이지.”
“그것으로 부족해?
남들은 그 돈으로 자식들 공부를 시키면서도 저축도 하고 그러는데 대체 뭐가 부족하다는 거야?“
“그야, 쓰기 나름 아니겠어?
자식들을 그냥 학교에만 보내고 밥이나 먹이려면 그렇게 하고 살아도 되겠지. 허나, 우리 일선이는 그렇게 못 키워!“
“그럼 어떻게 키워?
돈을 쌓아 온 몸에 칭칭 감고 키울래?“
“왜 못해?
돈만 있으면 왜 못해?
정말 이렇게 답답하게 살게 될 줄을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야!“
현우는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아무리 월급생활을 한다고 해도 적은 월급이 아니었다.
충분히 생활을 하고도 저축이 될 수 있는 액수인 것이다.
“대체 일선이에게 매달 얼마가 들어가는데 그러는지 말해 봐!”
“그래!
똑똑히 들어!“
수아는 그동안 들어가는 학원비와 교습비 영수증을 꺼낸다.
“이게 뭐야?
아직도 어린 아이에게 이렇게 많은 돈을 들여가면서 영재학원에 보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어?
뭐? 일선이 한 달 학원비와 교습비 그리고 영양식이 삼백?“
현우는 그만 말문이 막혀버린다.
“그것뿐인 줄 알아?
매일 다니는 승용차 기름 값에 내 화장품값에 옷과 구두 값 등은 어쩌고?“
“...........................”
“매일 나가니 같은 옷만 입을 수도 없고 화장도 매일 해야 하니 그것도 생각보다 만만치 않고 가끔 주차위반딱지에다............”
“난 몰라!
더 이상 어디 가서 도둑질 할 수 있는 재주도 없고 사기를 칠 수 있는 재간도 없으니 능력이 있는 당신이 알아서 해!“
현우는 더 이상 말씨름조차 하기 싫었다.
“당신 형들 있잖아!
이럴 때 가서 도움을 청해 보란 말이야!“
“.............................”
현우는 아예 대꾸조차 하지 않는다.
대꾸할 말이 없는 것이다.
더 이상 말을 했다가는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것이다.
현우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수아는 마음이 조급해 진다.
“여보!
이번 한 번만!
한 번만 어디서 오백만원만 만들어 줘!
더 이상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하지 않을게!“
수아는 자신의 성질을 가라앉히고 사정을 한다.
카드를 막아야 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떻게 되겠지 하며 카드를 쓴 것이 자꾸만 연체가 되어 불어나고 있는 것이다.
현우는 아내의 사정조의 말에 마음이 약해진다.
아직은 한 번도 자신에게 이렇게 급하게 돈을 해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한 번쯤은 아내의 그런 부탁을 들어주는 것도 부부로서 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형들보다는 그래도 부모님이 더 편안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음날 조금 일찍 퇴근을 해서 평택으로 내려간다.
“네가 웬일이냐?”
막 저녁을 드시려던 어머니가 반색을 하시면서 의아하다는 듯이 묻는다.
“저녁 아직 안 먹었지?
어서 이리 앉아라!“
강숙희는 얼른 막내아들의 수저를 놓고 밥을 챙긴다.
이유가 무엇이든 일단 식사를 하고 난 이후에 말을 들어볼 생각인 것이다.
현우 역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맛있게 식사를 한다.
어머니가 해 주시는 밥은 언제 먹어도 꿀맛이었다.
강숙희는 대충 주방을 정리하고 현우와 마주 앉는다.
이미 남편은 저녁을 먹고 다시 과수원을 둘러보러 나간 후였다.
아무리 어두워도 꼭 과수원을 휙 둘러보고 나서야 잠자리에 드는 남편이다.
“무슨 일이냐?”
과일을 포크로 찍어 현우에게 주면서 묻는다.
“엄마!
부탁을 하러 왔어요.“
“부탁?
뭔지 말해 보거라!“
“실은.........집사람 몰래 돈이 좀 필요해서.........”
“돈은 왜?
더구나 네 안식구 몰래 무슨 돈이 필요하다는 말이냐?”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 술김에 내가 술값을 낸다고 큰 소리를 치고 나서 카드로 끊었는데 글쎄 그것이 좀 과해서..........”
“그랬니?”
“엄마!
그 사람이 알면 마음이 상할 것 같고 말다툼을 해야만 하고........“
“오냐!
무슨 말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
내일 내가 네 통장으로 보내주마.
얼마면 되겠니?“
”한.......오백, 아니 기왕이면 천만 원만 빌려주세요.
조금씩 갚아드릴게요.“
“부모자식 간에 빌려주기는?
내일 오전 중에 보내면 되는 것이냐?
네 통장의 계좌 번호를 적어 놓고 가거라!“
강숙희는 두 말도 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이런 일이 한 번도 없던 아들이다.
그동안 아들들과 며느리들에게 받아온 용돈은 한 푼도 쓰지 않고 고스란히 모아져 있는 것이다.
쓸래야 쓸 곳이 없고 그럴 시간도 없다.
과수원에서 나오는 수익만으로도 두 식구 먹고 살고도 충분했고 여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아직 어떤 자식들 하나 손을 내미는 자식들이 없다.
보태주지도 도움을 받지도 않으며 서로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남자가 돈이 궁하면 못쓰는 법이다.
어미가 조금 더 보내 줄 테니 네 안식구 모르게 쓰고 싶은 곳이 있으면 쓰도록 하거라!“
“엄마!
더 이상은 필요없어요.
천만 원만 있으면 됩니다.“
“알았다!”
다음날 강숙희는 현우의 통장으로 이천만원이라는 돈을 송금한다.
어차피 봐주는데 그 정도는 봐주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현우는 어머니가 보내주신 돈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한다.
그 돈을 모두 아내의 손에 준다면 그대로 다 없어질 것이다.
필요하다는 오백만원만 찾아서 주기로 하면서 아내의 모든 것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집안에 단 한 푼의 여유 돈이 없다는 말에 현우의 가슴에 싸늘한 찬바람이 불어오고 있는 것이다.
이 상태로 지내다 만일 집안에 어떤 불상사라도 생기게 된다면 어떻게 대처해 나갈 수가 있을 것
인지 앞이 보이지 않는 미로 속처럼 캄캄해진다.
현우는 이제부터라도 자신이 모든 경제권을 아내에게만 맡겨놓을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해 보았으나 이미 그것은 자신의 생각뿐이다.
모든 월급은 이미 아내의 통장으로 고스란히 입금이 되어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달리 대처해볼 방법이 없다.
현우는 자신의 월급에서는 단 한 푼도 가져다 쓰지 않는다.
월급 이외에 나오는 특별 수당을 가지고 한 달 차량 유지비와 점심값과 용돈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 놓고 형님들을 만나서도 술 한 잔도 대접을 할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막내라는 이유로 항상 형님들께 의존해 오면서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큰형님이야 같은 월급쟁이라 하더라도 큰형수님이 워낙에 알뜰하고 큰형님 또한 형수님이 챙겨
주시는 대로 살아가시는 분이시고 모든 것은 다 알아서 하시는 큰형수님 덕분에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우는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이나 집안의 경조사는 모두 현우 자신이 알아서 해야만 하는 것이다.
아내의 손으로 들어간 돈은 단 한 푼도 그런 곳에 쓰여 지는 법이 없다.
자신의 친정 일에는 대신에 현우의 처분을 기다리지 않고 마음대로 결정을 하는 것이 바로 아내였다.
말하자면 자신의 집안에 대해서는 각자 알아서 하자는 것이다.
그런 현우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현태는 가끔씩 현우를 도와주고 있었다.
큰 도움은 아니더라도 필요할 때를 알아서 챙겨주는 작은형의 마음을 현우는 고맙고 요긴하게 도움을 받는다.
결혼을 하기 전에는 이런 생각들을 꿈에도 꾸어보지 못했던 일들이다.
자신이 벌어들이는 돈을 단 한 푼도 구경하지도 못한다는 일을 생각해 볼 수도 없는 일이었고 자신에게 권한이 없다는 것 또한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나서 그 돈은 아내의 돈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자신의 권한보다 아내의 수중에 있는 아내의 돈이었다.
현우는 어머니의 마음을 잘 알 수가 있었다.
아들의 그러한 마음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에서 현우는 그 돈을 모두 아내의 수중에 줄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현우는 오백만원만 찾아 가지고 집으로 들어간다.
“당신 나하고 약속을 해!”
“무슨 약속?”
“내가 오백만원을 해 주면 다시는 카드빚을 지지 않는다는 약속을 해야지만 줄 수가 있어!”
“정말?
그 약속이라면 할게!“
“정말지이 두 번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기다.
또 다시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때는 당신 통장으로 월급을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놓고 내가 주는 대로 생활을 할 것을 약속해!“
“뭐라고?
그깟 오백만원 때문에 그런 약속까지 하라고?
당신 지금 날 협박하고 있어?“
“싫어?
싫으면 그만 둬!“
“.............................”
그러나 수아는 당장 발등에 불이 급한 것이다.
“알았어!
약속할게!“
“분명히 약속했어!
그때 다른 말을 해도 어림없다는 것을 명심해!“
“알았어!”
현우는 비로소 오백만원을 꺼내어 준다.
“아, 살았다.
정말 고마워요!“
수아는 큰 짐을 내려 놓았다는 듯이 기뻐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참으로 속이 좁은 남자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이 좀 더 큰 사람이었다면 이런 돈 가지고 아내를 이렇게 닦달하지 않아도 좋은 것이었다.
돈은 손에 쥐고 좋아하는 아내를 보면서 미안한 마음이 든다.
‘여보!
미안하다.
허나, 내 능력이 그것뿐인걸 어떻게 하겠어?
조금만 더 고생을 해 줘!
나도 더 노력해서 한 단계라도 더 올라가면 우리도 남들처럼 돈에 궁색하지 않고 당신이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하면서 살 수 있는 날이 오지 않겠니?‘
마음속으로만 하는 현우의 독백이다.
글: 일향 이봉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