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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 김정(孤峯 金淨)의 절명사(絶命辭)

작성자수돌이(최찬집)|작성시간15.10.05|조회수123 목록 댓글 0

 

 

 

 

고봉 김정(孤峯 金淨)의 절명사(絶命辭)

대전 동구 신하동 268-5 고봉 김정(孤峯 金淨)의 묘소(墓所) 문화재자료 25호

 

고봉 김정(孤峯 金淨) 그는 1521년 10월 말에 제주도에서 사약을 받고도 얼굴빛이 하나도 변치 않고 술을 가져오게 하여

통쾌하게 마신 뒤, 형과 아우에게 편지를 보내어 노모를 잘 봉양하도록 부탁하고, 나이 36세에 죽음을 맞이하면서 읊은.

절명사(絶命辭 臨絶辭(임절사))는

投絶國兮作孤魂

투절국혜작고혼

遺慈母兮隔天倫

유자모혜격천륜

遭斯世兮隕余身

조사세혜운여신

乘雲氣兮歷帝閽

승운기혜력제혼

從屈原兮高逍遙

종굴원혜고소요

長夜暝兮何時朝

장야명혜하시조

烱丹衷兮埋草菜

경단충혜매초채

堂堂壯志兮中道摧

당당장지혜중도최

嗚呼千秋萬世兮應我哀

오호천추만세혜응아애

외딴 섬에 귀양 와 외로운 넋이 되어.

어머니를 두고 가니 천륜을 어기누나.

이런 세상 만나 내 목숨을 떨구어.

구름 타고 옥황상제 궁궐에 가서.

굴원을 따라 아득히 노닐련다 만은.

긴 밤이 너무도 어두워라 아침이 언제 오랴.

빛나는 丹心(단심)은 잡초에 묻히고.

당당하게 장한 뜻은 중도에 꺾이도다.

아아 천 년 뒤 이 슬픔에 응답 있으리.

김정(金淨 1486(성종 17)∼1521(중종 16).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원충(元食), 호는 충암(食菴), 또는 고봉(孤峯)이며 호조 정랑(戶曹正郞)을 지낸 김효정(金孝貞)의 아들이다. 조선 중기 문인화가로 보은 출생이다.연산군 10년(1504)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중종(中宗) 2년(1507)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수석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임명되었다. 이어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정언(正言)에 전임되고, 다시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 이조 정랑(吏曹正郞) 등을 거쳐 중종 9년(1514) 순창 군수(淳昌郡守)로 재직시 왕의 구언(求言)에 응하여 담양 부사(潭陽府使) 박상(朴祥)과 함께 폐비(廢妃) 신씨(愼氏)의 복위와 폐비의 주모자 박원종(朴元宗) 등을 추죄(追罪)할 것을 상소하다가 보은(報恩)으로 유배되었다.중종 11년(1516) 풀려나와 응교(應敎) · 전한(典翰)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뒤에 부제학 · 동부승지 ·도승지를 거쳐 이조 참판 · 홍문관 제학 · 대사헌을 거쳐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극형에 처해지게 되었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등의 옹호로 금산(錦山)에 유배되었으며 진도(珍島)를 거쳐 제주도에 안치(安置)되었다가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사사(賜死)되었다. 인종 1년(1545)에 복관(復官)되고, 인조(仁祖) 24년(1646)에 영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사림파(士林派)의 대표적인 인물로 조광조의 정치적 성장을 뒤에서 도왔다. 시문(詩文)은 물론 그림에도 능하여 새 · 짐승 등을 잘 그렸다. 특히 화조를 잘 그려 조선 중기에 유행한 소경수묵사의(小景水墨寫意) 화풍의 전통을 형성했다.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청주(淸州)의 신항서원(莘巷書院),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 금산(錦山)의 성곡서원(星谷書院) 등에 제향(祭享)되었다. 저서로 충암집(食菴集)이 있으며, 유작은 〈이조화조도〉 등이 있다. 시호는 처음에는 문정(文貞)이었다가 문간(文簡)으로 고쳐졌다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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