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일반 게시판

정여립 모반사건 전말과 후대의 의견들

작성자수돌이(최찬집)|작성시간15.10.19|조회수483 목록 댓글 0

정여립 모반사건 전말과 후대의 의견들

http://gongha.egloos.com/6034213

 

호남은 과연 반역의 땅인가

지난 5월13일 김대중 대통령은 박정희 전대통령의 기념관 건립사업을 지원한다는 뜻을 피력, '역사적 화해'를 시도한 바 있다. 이같은 김대통령의 조처는 자신의 최대 정적이었으며 대구·경북지역의 상징적 인물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우리 역사에 망국병이 되왔던 지역 갈등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결단이란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지역갈등의 문제는 멀리는 삼국시대에서부터 고려시대 「훈요십조」의 문제, 조선조 정여립의 반란·이인좌의 난·임꺽정의 난, 가깝게는 5.16과 12.12 군사쿠데타를 거치면서 심화되었다. 그러나 시대를 거슬러 오면서 지역갈등의 원인은 일반 국민(백성)들과는 무관하게 권력층, 또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발생, 왜곡된 정서로 자리잡았다. 그 가운데 조선조의 정여립모반 사건은 호남차별을, 이인좌의 난은 영남차별을, 임꺽정 난은 서북 차별의 빌미가 되었다. 먼저 호남차별의 원인을 제공한 정여립 모반사건의 전말을 알아봤다. 국가반란의 빌미 된 대동계 흔히 정여립(?-1589)은 조선 중기의 모반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 우리의 현대사가 그러했듯 정여립 또한 정치적 사건으로 인해 그러한 평가를 받아왔다. 정여립의 본관은 동래로 전주에서 태어났다.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에 통달, 선조 2년(1570)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예조좌랑을 거쳐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그는 본래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에게 사사한 서인(西人)이었으나 1583년 서인을 탈당하여 당시 집권당인 동인에 입당하였다. 동인 입당후 이미 사망한 스승인 이이와 성혼을 비판하여 서인들로부터 스승을 배신한 자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선조로부터도 배척당하자 고향인 전주 남문밖(현재의 완주군 상관면)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정여립의 이름이 알려진데다 집권 동인의 실세였으므로 감사나 수령들이 다투어 그의 집을 찾았다. 그는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지어 놓고 대동계(大同系)를 조직하고 매달 활을 쓰는 사회(射會)를 열었는데 이 대동계가 모반의 증거로 채택되었다.

 

모반의 진위 불투명
모반의 빌미가 된 대동계는 사실 비밀조직이 아니라 선조20년(1587) 전라도 손죽도에 왜구가 침입했을 때 전주부윤 남언경의 요청을 받고 공식적으로 출동해 왜구를 물리쳤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조직이었다. 모반설에 따르면 정여립은 대동계 조직을 전국으로 확대해 해주의 지암두, 운봉의 중 의연 등의 기인과 모사꾼을 거느리고 좥정감록좦의 참설을 이용하는 한편, 망이흥정설(亡李興鄭說)을 퍼뜨려 민심을 선동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선조22년(1589) 거사를 모의, 반군을 서울에 투입해 일거에 병권을 장악하려 했다는 것이다.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정여립은 대동계를 확대해 가는 과정에서 서인의 모사 송익필의 사주를 받은 황해도 관찰사 한준 등의 고변으로 역모로 몰리게 된다. 관군이 잡으러 온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아들 옥남과 함께 죽도로 피신했다가 관군이 포위하자 자결하고 만다. 이 사건은 정여립 모반이 사실인지 불분명해서 조선시대에도 서인의 무고라는 주장과 모반은 사실이라는 주장이 대립되어 왔다. 사건 150년 후쯤인 영조때에 남하정이 저술한 좥동소만록좦에는 정여립이 죽도에서 놀고 있을 때 선전관 등이 달려와 박살한 후 자결로 보고했다고 적고 있는데 이 책은 남인, 즉 동인의 자리에서 적은 책이라서 정여립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쓴 것이다. 반면 이이와 송익필의 제자인 서인 김장생이 지은 좥송강행록좦에는 고변이 있자 사람들이 정여립의 상경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정철은 그의 도망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결국 정여립 사건에 대한 의문은 동인과 서인을 막론하고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반역향으로 낙인 찍혀
당시 정여립은 도망간 것이 역모의 증거로 굳어져 국청이 열리고 정철이 위관이 되어 사건을 조사하였다. 이 과정에서 동인의 영수였던 이발을 비롯해 수많은 동인들이 숙청되었다. 이 사건으로 연루되어 화를 입은 인물들이 무려 1천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을 정도로 이 사건은 동인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는데, 그중에서도 정여립이 살았던 전주지역 사대부들의 피해가 가장 컸다. 정여립 사건을 호남차별론에 연결시키는 논자들은 이 사건으로 전라도 전체가 반역향으로 낙인 찍혀 호남 출신 사대부들의 관계 진출이 제한받았다고 주장한다.

 

호남차별론의 문제점
정여립 사건이 호남차별론의 근거가 되는 데는 몇가지 문제점이 있다. 먼저 국청의 위관을 맡았던 정철이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전주에서 가까운 전라도 담양출신이라는 점이다. 정철은 위관을 맡으며 심지어는 함께 수학했던 동문들마저 죽음으로 몰고 가 이 지역 사대부들의 저주를 받았다. 이 사건이 지역차별의 전제가 되려면 위관을 다른 지역 사람이 맡았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또 정여립 사건이 발생한 지역이 원래 서인 지역이라는 점이다. 조선의 세력판도를 보면 동인은 영남이 중심이고 서인은 충청·호남이 중심이었다. 즉 집권당 지역에서 발생한 역모사건이 정여립 사건이기 때문에 이로 인해 호남 전체가 반역향으로 찍히지는 않았다. 다만 나주와 함께 호남의 대읍인 전주지역 연루자가 워낙 많아서 그 후손들의 출사가 제한되었으므로 호남이 지역차별 받은 것처럼 여겨진 것은 사실이다.

 

박종진 기자
<pjj@ilyosisa.co.kr>
[원본] http://www.ilyosisa.co.kr/ILYO/177/News/Culture/177_Cul_48-1.html

52334 역사 시사용어 제목 : 정여립 모반사건

정여립은 본래 서인 세력이었으나 수찬이 된 뒤 당시 집권 세력이던 동인 편에 들어가 이이를 배반하고 성혼, 박 순을 비판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선조가 그의 이당을 불쾌히 여기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버린다. 그가 서인을 공격하게 된 원인은 분명하지는 않다. 그가 이조 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이이가 반대했던 적이 있 긴 했으나 이것이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그의 직선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 동인의 영수 이발 의 성향과 일치했던 것이 동인에 동조하게 된 이유였을 것이다. 어쨌든 그가 이이를 공격한 이유로 서인의 미움이 그에게 집중되었고, 그래서 그는 동인의 후원에도 불구하고 중앙에서 관직을 내놓고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다. 그는 낙향한 몸이었음에도 동인들 사이에서는 명망이 높았다. 그래서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매달 모임을 갖는 등 세력을 확장시켜나갔다. 1587년 왜선들이 전라도 손죽도를 침범하였을 때는 대동계를 동원해 이를 물리치기도 했다. 대동계의 조직은 더욱 확대되어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 박연령, 해주의 지함두, 운봉의 승려 의연 등 기인, 모사 세력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동정이 주목을 받게 되고 마침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황 해도 관찰사의 고변이 임금에게 전해지자 조정은 커다란 파란을 일으켰다. 고변의 내용은 정여립의 대동계 인물들이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해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동시에 봉기하여 입경하고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정여립은 아들과 함께 죽도로 피신하였다가 관군의 포위망이 좁혀지자 자살하고 말았다. 이로써 그의 역모는 사실로 굳어지고, 서인의 정철이 위관이 되어 사건을 조사하면서 동인의 정예 인사들이 제거되었다. 이 때 숙청된 인사는 장살로 죽은 이발을 비롯하여 약 1천 명에 육박했다. 이를 '기축옥사'라고 한다. 이 옥사로 한때 서인이 조정을 장악하긴 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출 처 :

 

작성자 : cybaek | 작성일 : 2005-03-18 | 조회수 : 215
[출처] http://kbank.nate.com/cmsense/diccm_read.asp?sno=52334

신채호는 정여립 모반사건은 | [사상n철학n인물] 2005/01/07 04:28
http://blog.naver.com/cadline/9053654

일찍이 단재 신채호는 정여립 모반사건은 조선후기를 얼룩지게 했던 당쟁의 역사에 도화선 작용을 한 사건으로 보고, 정여립을 당쟁의 희생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처럼 기축옥사로 더 유명한 정여립 모반 사건은 격화된 당쟁의 와중에 발생한 조선사 최악의 정치 모략극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 희생의 규모와 정도를 넘는 사대부의 피해는 조선 4대 사화의 희생을 합친 숫자와 비견될 뿐만 아니라, 정여립의 고향이었던 전주는 반역의 향으로 찍혀 조선 왕조의 집단 따돌림을 감내해야만 했지만 정여립 사건을 찬찬히 살펴보면 변화에 대한 조선 사회의 무의식적 거부감과 내부 모순을 극복할 여력을 잃어버린 조선 왕조의 무기력함이 빚어낸 정치적 쇼에 지나지 않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훈구 척신 세력을 청산하고 사림 세력이 중앙 정계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 조선 선조 대에는 시스템의 붕괴에 따른 혼란과 사회 전 분야의 개혁을 요구하는 열망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입니다. 그러나 원래 배타적인 성향이 강한 성리학을 신봉한 조선 기득권은 이런 민초들의 요구를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였고 선조 자신 또한 군왕으로서의 자질 부족과 개혁 역량 미비로 사회 불안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었습니다. 민생은 도탄에 빠져있고 각종 유언비어로 민심이 요동치고 있었으나, 동인과 서인으로 갈린 당파싸움은 상호간 증오를 바탕으로 한 전면전 상태에 다다르고 있었습니다. 동인이 장악한 조정에 의구심을 갖고 있던 선조는 초조해했고, 뭔가 정치적 돌파구를 찾고자 했습니다. 이 때 마침 전라도 전주에서 정여립이 모반을 꾀한다는 비밀 상소가 올라온 것입니다. 정여립은 동인이었고 정여립이 추진 중인 대동계는 성리학 질서에 명백히 반하는 불순사상이니 상소가 나름대로 타당성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평소 정여립은 선조가 갖고 있는 소인배적 기질과 군왕으로서의 자질 부족을 공공연히 비판하고 있었음으로 선조와 서인측은 일시에 조정을 쇄신하고 요동치는 민심을 가라앉힐 계기로 이 사건을 충분히 이용하였습니다. 선조와 서인의 도살꾼으로 불린 송강 정철, 송익필이 주도하여 동인계 전라도 유림에 대한 집단적인 왕따가 시작됩니다. 사건 당사자인 정여립, 이발, 정개창, 정언신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비들이 모진 고문 끝에 처형되었고 이들의 사지를 전국 팔도에 보내 역모를 꾀하고자 한 죄인들의 말로를 일반 백성들에게 잔인할 정도로 주입시켰습니다. 사건이 이 정도로 마무리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중세 마녀 사냥을 연상시킬 정도로 서인은 정여립과 일면식도 없는 동인계 선비들을 무리하게 엮어 넣어 주살하였습니다. 눈이 아파 눈물을 보여도 정여립 때문에 운다고 하여 처형된 사람, 임지를 옮기면서 정든 여인을 그리워하여 보인 눈물도 정여립 때문이라 하여 능지처참된 관리가 있었다 하니 정도를 넘어선 왕따의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의 첫 공화주의자 정여립]
정여립은 동래 정씨 희증의 아들로 조선 중기의 사상가이다. 통솔력이 있고 두뇌가 명석하여 제자백가서에 통달하였는데, 명종 22년에 진사가 되고 선조 2년에 식년 문과 을과에 두 번째로 급제한 뒤 이이와 성혼의 문하에 들어가 각별한 후원과 촉망을 받았다. 이에 일세의 이목이 정여립에게 집중되고 후에 예조좌랑이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이이의 천거로 수찬이 되었는데, 본래 서인이었으나 이이가 사망하자 당시 집권 세력인 동인 편에 서서 이이를 배반하고 서인의 영수인 박순·성혼을 비판하였다. 이에 의주 목사 서익이 상소하여 여립의 배신을 공격하고 이 상소에 의해 정여립은 왕의 미움을 샀다. 상소 파문이 갈수록 확산되어 마침내 정여립은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때가 선조 20년의 일인데 이로 인해 당시 동인이 쥐고 있던 삼사의 주도권이 서인으로 넘어간 해이기도 하다. 여립이 서인을 공격하게 된 연유는 확실치는 않으나, 그가 이조 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이이가 반대했다는 설도 있으나 그보다는 직정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동인의 영수 이발과 잘 어울린 탓이 아닌가 싶다. 하여튼 어쩔 수 없이 관직을 버리고 내려오긴 했지만 여전히 동인 사이에는 인망과 영향력이 있어 감사나 수령이 다투어 그를 찾아 인사했다 하고, 전라도 일대에 그의 명망이 높았다. 여립은 그 후 진안 죽도 천반산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시회를 여는 등 날로 세력을 확장시켜 갔다. 이들은 임진년에 있을 변에 대비하여 10만의 군사를 양성해야 한다는 이이의 뜻에는 동감하여 열심히 무술을 연마하였다. 1587년 왜선 18척이 전라도 손죽도에 침범한 정해 왜변이 발발하였는데 전주부윤 남언경의 요청에 의해 정여립의 대동계 무사들이 동원되어 이를 물리쳤다. 그러나 훗날 여립을 평소 못마땅하게 여긴 서인들은 이 대동계가 불측한 일을 위해 조직되었다 하여 모반 음모로까지 연결지어버리지만, 오히려 호국정신이 깃든 우국충정의 단체라 함이 더 옳을 것이다. 어쨋든 그 뒤 대동계의 조직은 전국적으로 널리 확산되어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박연령, 해주의 지함두, 운봉의 승려 의연 등의 기인·모사의 세력으로 확대되었다. 그런데 1589년 이들이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하여 황해도와 해남에서 동시에 입경하여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기로 하였다는 고변이 황해도 관찰사 한준,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등의 연명으로 급보되어 관련자들이 잡혔다.
이 때 정여립은 변숭복이 이 사실을 알려와 죽도로 피신하였다가 관군의 포위가 좁혀오자 자살하고 말았다. 정철이 위관이 되어 이 사건을 처리하면서 동인의 정예 인사는 거의 제거되었다. 이렇게 해서 비명에 숙청된 이들은 천여 명에 달하였다.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그의 진보적인 사상과 혁명성은 역모라는 이름 하에 묻혀지고 말았다.

[조작설]
정여립이 모반을 계획했고 그런 의사가 있었다면 어째서 단한 번의 저항도 없이 스스로 죽음으로써 최후를 맞이하였을까?
정여립 사건은 서인에 의해 이루어진 모함으로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참설에 전해져 오는 '여립이 어린 시절 자신의 잘못을 아버지께 고자질하여 책망을 듣게 한 동네 아이를 죽였다.' 는 이야기나 '어릴 적부터 제비나 찢어 죽이는 잔인한 인물'이었다는 등의 구전은 그의 모반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꾸며낸 것들이라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여립의 도피는 안악의 교생 변숭복의 급보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그는 수사의 손길이 자신에게 미칠 것을 알면서도 각종 서신 문서들을 집안에 방치하여 후일 이 문서로 말미암아 많은 동인의 무리들을 죽게 할 리 없다. 또 급보를 받고 도망간 곳이라면 과연 죽도를 택했을까? 이미 그는 죽도를 자주 찾아 '죽도 선생'이라 불릴 정도였는데 세상의 눈을 피해 몸을 숨기기에 좋은 깊은 산을 두고도 연고지를 택했을까? 또 한가지 의문이 있다면 정여립의 자결이다. 옥남과 춘룡을 차례로 내려치고 나서 칼자루를 꽂아놓고 목을 칼날에 대고 찔렀다 하는데 그 동안 관군들은 구경만 했단 말인가? <동소만록>같은 야사에서는 '여립이 진안 죽도로 놀러 갔는데 선전관과 현감이 살해한 후 자결한 것으로 했다.' 고 전해지는데, 기축옥사의 후유증이 컸던 만큼 이설(異說)의 채택에 신중하였을 것으로 보아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김장생이 엮은 <송강행록>에서는 정철이 정여립의 도망을 미리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진하여 옥사처리를 담당하였는데 이것은 정철이 그의 유인과 암살을 지령한 최고 지휘자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정철의 배후에는 실질적으로 기축옥사를 지휘한 노비 출신의 송익필이 있었는데 서인의 참모 격으로 활약했던 사람이다. 이 송익필이 자신과 그의 가족 70여명을 환천시키고자 했으나 동인의 이발·백유양 등이 이를 반대하자 이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정여립 모반 사건의 조작에 동참한 것이라 보여진다.

[모반설]
정여립이 남긴 문장 중에 천하공물설(天下公物設)과 '누구를 섬기던 임금이 아니겠는가'라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으로 본다면 이것은 그의 모반을 뒷받침하고 있다. 하사비군이란 말은 그 당시 사회 통념으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다. 그는 400년 전에 군신강상론을 타파하려 한 것이니 여립이 혁명성을 지닌 사상가라는 점은 분명하다.

"목자(木子= 李씨)는 망하고 존읍(尊邑= 鄭씨)은 흥한다."
"요동에서 바라보니 동쪽 나라에 왕기가 있어 나와 보니 전라도 땅 남문 밖에서 뻗었다."
"정팔룡이라는 신기로운 용맹 있는 사람이 곧 임금이 될 것인데 머지않아 군사를 일으킬 것이다."

존읍(尊邑= 鄭씨)은 그를 가리키고 그의 어릴 때 이름이 팔룡이며, 그의 출생지는 남문 밖이다. 정여립이 이 낭설을 퍼뜨려 믿게 한 것은 곧 반역·모역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집에서 압수된 '제천무'에서는 선조의 실덕을 열거하였는데 이를 <연려실기술>에서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역적들의 문서 중에 정여립이 하늘에 제사 하는 제문이 일곱 장이나 나왔는데, 임금의 죄악을 말함에 있어서 특히 흉하고 참혹하였다." 그리고 여립은 왕조의 운수가 다했음을 논하고 천명의 이행을 기도하였다 한다. 선조 밑에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판단하고 혁명을 은밀히 생각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옥사에서 쓰러진 동인 명사들이 선조에게 등을 돌리는 자세에 있어 어느 정도의 공통점은 있으나 역모와는 관계가 없다고 보여진다

[출처] http://blog.naver.com/cadline/9053654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




역사스페셜: 제159회[20020525] 역모인가 조작인가? 정여립의 난



2006/01/01 21:37



복사
http://blog.naver.com/myunggyu/60020707718






역모인가 조작인가? 조선최대 정치 미스터리 정여립의 난


 


기축옥사(정여립의 난)
연루,사망자 1000여명 - 조선 4대 사화에서 죽은 수보다 많음


 


정여립 [鄭汝立, 1546~1589]


조선 중기의 문신·사상가.

본관 동래
별칭 자 인백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전북 전주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자는 인백(仁伯)이다. 전라북도 전주에서 첨정(僉正)을 지낸 희증(希曾)의 아들로 태어났다. 통솔력이 있고 명석하였으며,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에 통달하였다.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1583년(선조 21) 예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수찬(修撰)이 되었다.


처음에는 이이와 성혼의 문하에 있으면서 서인(西人)에 속하였으나, 이이가 죽은 뒤 동인(東人)에 가담하여 이이를 비롯하여 서인의 영수인 박순·성혼을 비판하였다. 이로 인하여 왕의 미움을 사자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인망이 높아 낙향한 뒤에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이후 진안군의 죽도(竹島)에 서실(書室)을 세워 color=#096ab5>활쏘기

모임[射會]을 여는 등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동계를 조직하고 무력을 길렀다. 이때 죽도와의 인연으로 죽도선생이라고도 불렀다.


1587년(선조 25)에는 전주부윤 남언경의 요청으로 대동계를 이끌고 손죽도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다. 이후 황해도 안악(安岳)의 변숭복, 해주(海州)의 지함두(池涵斗), 운봉의 승려
의연(義衍) 등의 세력을 끌어모아 대동계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였다.


1589년(선조 27) 황해도 관찰사 한준과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등이 연명하여 정여립 일당이 한강이 얼 때를 틈타 한양으로 진격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고발하였다.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혀가자 정여립은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죽도로 도망하였다가 관군에 포위되자 자살하였다.


이 사건의 처리를 주도한 것은 정철 등의 서인이었으며, 동인인 이발(李潑) ·이호(李浩) ·백유양 등이 정여립과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되는 등 동인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를 color=#096ab5>기축옥사라고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라도는 반역향(叛逆鄕)이라 불리게 되었고, 이후 호남인들의 등용이 제한되었다.


정여립에 대하여는 어릴 때부터 잔인하고 포악하였으며, '이씨는 망하고 정씨는 흥한다[木子亡尊邑興]'는 《정감록》류의 설을 퍼뜨려 왕조를 전복시키려 한 인물로 보기도 한다. 반면에 평소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는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何事非君論) 등 왕권체제하에서 용납될 수 없는 혁신적인 사상을 품은 사상가이기도 하였다.

또 그가 대동계를 조직하여 무력을 기른 것은 이이의 십만양병설에 호응하였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런 이유로 정여립은 서인과 동인 사이에 벌어진 당쟁의 희생자로서 그가 주도했다는 역모(逆謀)는 조작되었다는 설도 있다.

 


- 백과사전


 


 


 


及壯, 身幹壯偉, 容色靑赤, 年才七八, 與群兒嬉?, 刀?鵲雛, 自?至趾。 希曾訶問誰所爲, 有其家女僕稚兒, 指證汝立。 其夜, 立乘兒父母出?隣家, 持刀潛入, 剌殺其兒, 流血滿席。
其父母見之號哭, 莫知其由, 一里聚觀, 汝立徐出謂之曰:
“此兒告我, 故吾殺之。” 辭氣晏然, 聞者大駭, 或以爲: “惡將軍出矣。”
...
天下, 公物, 豈有定主? 堯、舜、禹相傳, 非聖人乎?”
...
‘何事非君?’


 


정여립이 장성하게 되자 체구가 장중하고 얼굴빛이 청적색(靑赤色)이었다. 나이 겨우 7∼8세에 여러 아이들과 장난하고 놀면서 칼로 까치 새끼를 부리에서 발톱까지 도막내었다. 희증이, 누가 한 짓이냐고 꾸짖으며 묻자 그의 집 어린 여종이 여립을 가리켜 말하였는데 그날 밤 여립이 그 아이의 부모가 이웃 집에 방아찧으러 나간 틈을 타서 칼을 가지고 몰래 들어가 그 아이를 찔러 죽여 피가 자리에 흥건히 흘렀다. 그 부모가 그것을 보고 울부짖으면서 몸부림쳤으나 그 이유를 알지 못하였다. 온 마을 사람이 모여 구경하고 있는데 여립이 서서히
나와 말하기를,

“이 아이가 나를 일러 바쳤으므로 내가 죽였다.”

하는데, 말씨가 태연하였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크게 놀랐고 어떤 사람은 악한 장군이 태어났다고 하였다.

...
천하는 공물(公物)인데 어찌 정해진 임금이 있겠는가. 요(堯)임금, 순(舜)임금, 우(禹)임금은 서로 전수하였으니 성인이 아닌가.”
...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는가.
- 선조 수정실록 22년 10월 (서기 1589년)


 


이발
정여립과 시국을 비판한 것으로 연루.
26세 장원급제. 이조좌랑, 부제학 역임. 동인의 영수로 활동. 1624년 무죄 공식 인정.
이발의 3형제 죽음
82세 노모 압슬형 받다 사망
5세,11세 두 아들 매맞아 죽음


 


최영경
남명 조식의 수제자로 손꼽힘.
정여립의 상장 길삼봉으로 몰려 옥사


 


천반산
대동계 모임(군사훈련- 활쏘기, 진법훈련)


정여립이 자살한 곳으로 알려짐.


 


여립이 옆사람이 들고 있던 칼을 빼앗았다. 칼을 번득일 때마다 한 사람씩 쓰러졌다.
마침내 여립이 칼을 땅에 꽂고 스스로 목을 찔러, 마치 소가 우는 듯한 소리를 내며 죽었다.
- 민인백의 토역일기


 



자살했다는 것부터 조작의 의혹이 불거짐.


의혹1. 정여립은 왜 저항하지 않았나?
의혹2. 왜 서신들을 그대로 방치했을까?
의혹3. 왜 하필 죽도로 도망갔을까?
의혹4. 정적들은 사전에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정여립 사건이 났을 때 공은 나를 불러 의견을 물었다.
그는 정여립이 반드시 도망을 갈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며
극구 만류에도 불구하고 입궐을 서둘렀다.
- 김장생 <송강행록>


 


동인이 정국을 주도하고 있는 상황. 서인의 조작과 선조의 방관으로 인한 정치적 음모
서인인 정철의 조작극으로 추정


 


정철은 자기와 반대되는 뜻을 가진 자는 모두 역적으로 몰아 기필코 죽이려 했다.
마음씨가 참혹하고 독하기가 칼날보다 더하니 생각하면 기가 막힌다.
- 연려실기술 선조조 고사본말



남명 조식 - 실천을 강조. 왜의 침입에 대비


조식학파, 정여립, 화담학파(서경덕 학파: 이지함, 이발, 정개천,..)가 사상적 공통점 존재


 


'백성이 물과 같다'함은 옛부터 있던 말이다.
백성은 임금을 모시지만 나라를 뒤엎기도 한다.
- 민암부 중에서


정여립(상상화)

 



이 근처에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함

 



위 지역에는 이 사람도 유명

 



연려실기술은 정여립을 호의적으로 기술되어 있음

 




정여립은 진안의 천반산에서 대동계를 조직하여 군사훈련을 했다고 함. 역모계획이 탄로나자 여기서 자살했다고 기록되어 있음

 



 

대동계는 왜구를 물리치는 등의 활약을 했던 인정받던 조직

 



이씨는 망하고 정씨는 흥한다[木子亡尊邑興]

 




기록된 정여립의 역모계획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한성으로 공격


 



기록된 정여립의 역모계획

 



정여립이 자살한 곳

 


조작극임을 의혹

 



실천을 강조했던 조식의 문하에는 임진왜란시 활동했던 의병장들이 많았다.

 





 

[출처]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yunggyu&logNo=60020707718


 






159회 역모인가 조작인가? 조선 최대 정치 미스터리, 정여립의 난 역사스페셜

2007/03/30 15:46

복사 http://blog.naver.com/k092000/50015851456

159회 역모인가 조작인가? 조선 최대 정치 미스터리, 정여립의 난


1) 기획의도

 

역사스페셜의 역사 바로 세우기, 지워진 이름 정여립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주인이 있을 수 있는가?' '누구를 섬기든 임금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혁명적인 사상을 지녔던 정여립. 그는 조선왕조의 근본사상인 충군 이데올로기를 부정하고 대동계란 (향토방위)무장조직을 양성한 급진 개혁주의자였다. 그러나 당대의 통념을 뛰어넘은 그의 파격적 행보는 격화되기 시작한 당쟁 구도와 맞물리면서 '기축옥사'라는 정치 보복극의 빌미가 됐다. 기축옥사는 1000여명에 달하는 무고한 연루자들의 목숨을 앗아가며 조선 전체를 죽음의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는데... 그후 4백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는 아직도 반역자요, 호남을 반역향으로 낙인찍히게 만든 장본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번주 역사스페셜에서는 조선 왕조 내내 역모자라 낙인찍혀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했던 동양 최초의 공화주의자 '정여립'의 진면목을 재조명하고, 가려졌던 기축옥사의 진실을 추적한다.

 

2) 내용요약

 

조선시대판 용공조작, 정여립의 난은 과연 조작인가?

 

실록에 의하면 정여립은 역모가 사전에 발각돼 관군에게 쫒기다 자결한다. 당초 대부분의 조정 중신들은 정여립의 역모를 믿지 않았으나, 자살이 역모의 결정적 증거가 되고 만다. 그러나 <동소만록>에 자살이 아닌 타살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어 정여립의 난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강력히 대두되는데... 당시 정권은 동인에게 있었고 정권 탈환을 위해 서인은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을 필요가 있었기에 역모 조작설은 더욱 힘을 갖는다. 정여립은 과연 역모자인가 서인의 덫에 걸린 희생양인가?

 

시대를 앞서간 사상가, 그는 동양 최초의 공화주의자였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은... 성현의 통론이 아니다'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고 누구를 부린들 백성이 아니겠는가' 조선 왕조를 지탱하던 충군 이데올로기를 정면 부정한 혁명적인 사상은 정여립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16세기 후반 피폐했던 조선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개혁을 주창했던 실천적 지식인 정여립! 군주는 선출되야 하며 아래로부터 백성을 위한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했던 그는 동양 최초의 공화주의자였던 것이다!

 

이번주 역사스페셜에서는 4백년동안 반역자라는 오명을 쓰고 역사 속에서 지워졌던 정여립의 재조명을 통해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반추해본다.

 

3) 세부내용

 

1. 천여명 지식인의 죽음 - 동암 이발가문의 피맺힌 유서 최초 공개!

 

1589년 10월 1일, 황해 감사는 역모를 고변한다. 역모의 주모자로 지목된 정여립은 능지처참 된 후 팔다리가 팔도에 순회 전시된다. 정여립의 사후, 그와 친교 맺었던 천여명의 무고한 지식인들의 피가 조선팔도를 붉게 물들이며 전국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는데... 이러한 기축옥사의 수많은 피해자 중 정여립과 가장 친했다고 전해지는 동암 이발. 7대 연속 과거 급제자를 낸 명문 광산 이씨 집안은 이발이 시국 비판 내용이 담긴 서신을 정여립과 교환한 사실 때문에 멸문지화를 당한다. 그 후 이발의 후손들은 밀양 이씨로 본관을 바꾸고 숨어지내는데... 역사스페셜 취재진은 기축옥사로부터 250년 후 발견된 그들의 피맺힌 사연이 들어있는 문서를 긴급 입수하여 공개한다!

 

2. 문무를 겸비한 개혁 사상가 정여립!

 

호남의 어미뫼 모악산을 중심으로 넓게 펼쳐진 원평들, 이곳은 풍수지리상 명당으로 손꼽히는 곳으로 정여립이 낙향 후 살아간 무대이다. 이곳에선 정여립에 대한 얘기가 전해지는데, 민중 속의 그는 역적이 아니라 문무를 겸비한 호방한 인물로 남아있다. 제자백가에 두루 밝았던 그는 다른 사대부과 달리 천문·지리 등 다양한 학문에 능했으며, 천하를 능력있는 사람이 다스려야 한다는 정통 성리학의 틀에서 벗어난 말도 서슴없이 하였다. 병법에도 일가견이 있던 그는 600명에 달하는 인원으로 대동계를 조직하여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는데... 정여립은 조직 장악력과 리더쉽까지 뛰어난 카리스마형 인물이었던 것이다!

 

3. 기축옥사, 그것은 정치 조작극이었다!

 

주자 성리학을 벗어나고 시국에 대해 강한 불만을 지녔던 유능하고 박식한 인물, 대동계를 조직할 정도의 카리스마와 지역적 기반까지 갖춘 정여립, 그는 정말로 역모를 꾀했을까? 그렇다면 왜 왕실에 맞서보지도 않고 자살했을까? 자살은 그의 역모에 결정적 증거가 되고, 그 후 기축옥사의 피바람이 몰아닥친다. 그런데 여립이 자살한 것이 아닌 타살된 것이라는 기록이 <동소만록>에 나타나고 이를 시작으로 '역모 조작'의 흔적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역모 고변이 정여립의 활동무대인 전라도가 아닌 황해도에서 왜 이뤄졌는가? 대동계는 왜 저항하지 않았나?... 당시에 동서의 치열한 정권 다툼이 일어났던 시대 배경은 조작 음모설에 더욱 힘을 싣는다. 서인세력이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동인을 내몰기 위한 희생양으로 정여립을 선택했던 것이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최악의 반역자로 낙인찍힌 그는 당쟁의 덫에 걸린 최대의 희생자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4. 실천하는 지식인의 선구자, 정여립 재조명!

 

16세기 후반 피폐해진 조선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개혁을 주창했던 남명과 화담학파의 지식인들. 정여립 역시 그들과 같은 노선에서 민중을 위한 정치 실현을 역설하고 실천적 지식인의 모습을 보인다. 정여립이 자주 사용한 '대동'이라는 의미는 원시 유교에서 평등과 화합이 구현되는 이상사회를 의미하는데.. 여기에 그가 역설한 천하공물설의 원형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후 정여립의 사상은 허균의 '호민론'과 정약용의 '탕론'으로 이어져 철저히 백성으로부터의 개혁을 지향한다. 현실에 타협치 않고 개혁을 추구한 행동하는 지식인의 선구자 정여립, 그는 조선의 혁명가였다!

 

※=== History ===※=== History ===※=== History ===※=== History ===※=== History ===※=== History ===※=== History ===※

 

역모인가 조작인가? 조선 최대 정치 미스터리,정여립의 난.

 

---------------------------------------------------------------------------
<프롤로그>
선조 22년 시월, 황해감사가 올린 비밀 장계 한 장이 피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역성혁명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고 수많은 선비들이 죽어갔다. 조선조 최대의 옥사였다. '천하는 왕의 사유물이 아니고 모두의 것이다' '누구나 임금이 될 수 있다' 당시로서는 지극히 불순한 사상이 역모의 배경에 자리잡고 있었다. 주모자로 지목된 사람은 당시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정여립. 하지만 그는 돌연, 의문의 자살을 하고 사건은 조선 최대의 정치 미스테리로 남는다.
---------------------------------------------------------------------------
서브타이틀 : 역모인가, 조작인가 - 정여립의 난
---------------------------------------------------------------------------
ST1 오프닝
여기는 의금부에 있던 추국청입니다. 우리에게 흔히 '정여립의 난'으로 알려진 이 사건에 연루된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국문을 받았습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이 안은 비명소리와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고 죄수들은 귀신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의 형법제도는 보통 3심제였지만 역모는 예외적으로 단심제 였습니다. 따라서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상상을초월하는 갖은 고문이 행해졌습니다. 이것이 흔히 자백을 받아낼 때 사용되던 '신장'이란 것입니다. 보기엔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참나무, 박달나무 같이 매우 단단한 재질로 만들어져서 몇 대만 맞아도 살과 피가 튈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번에 30대 이상은 치지 못하게 돼 있었지만, 역모사건의 경우에는 이런 제한규정이 거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역모사건에는 이렇게 생긴 '곤'이란 것이 주로 사용됐습니다. 이쪽에 있는 대곤을 보면, 길이가 168센티미터에 넓이가 13센티미터, 두께가 1.8센티미터 정도입니다. 이쪽의 중곤, 무거울 중(重)자 중곤은 대곤과 비교하면 조금 길고 두껍습니다. 손에 들기에도 버거운 정돈데, 이렇게 형틀에 팔과 다리를 묶어놓고 자백을 할 때까지 무제한으로 쳤습니다. 그래서 매를 맞다가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습니다. 매질로도 자백을 하지 않는 경우에는 이렇게 무릎을 짓누르는 압슬형이 가해졌습니다. 널판 위에 날카로운 사기 조각을 깔고 그 위에 무릎을 꿇린 뒤 무거운 돌을 올려놓았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이 올라가 밟기도 했는데 6명까지 올라가 밟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낙형'이란 것도 행해졌습니다. 화로에 벌겋게 달군 인두로 발바닥을 지지는 것입니다. 이런 고문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상상만해도 끔찍합니다. 정여립 역모사건에 연루돼 이렇게 고문을 받다가 죽고, 또 사형을 받아 죽은 사람이 모두 천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조선의 4대 사화에서 죽은 사람을 모두 합한 것보다 많은 숫자입니다. 선비들은 물론 평민과 노비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서산대사, 사명대사 같이 유명한 승려들도 연루돼 곤욕을 치렀습니다. 도대체 그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정여립의 역모에 연루된 것일까요?
-------------------------------------------------------------------------
VCR1.
광주광역시의 한 아파트. 4백여년 전의 사연이 이곳에 간직돼 있다. 광산 이씨 가문의 후손 이재수씨. 그는 소중하게 보관해오던 고문서 한 장을 내놓았다. 정여립 역모사건이 발생한지 20여년 뒤인 1610년 작성된 유서였다. 여기에는 정여립 역모사건에 연루돼 멸문지화를 입고 겨우 살아남은 후손이 밀양이씨 행세를 하며 숨어 지내야 했던 가문의 내력이 적혀 있었다. 이 유서의 작성자는 '사건 당시 9살의 어린 나이로 화를 피해 어머니와 함께 도망갔으며 그 와중에 어머니는 굶어서 돌아가시고 혼자 거지 행세를 하며 살아남은 이원경'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후 이원경은 나주로 피신해서 상민과 결혼, 밀양 이씨 이정신으로 신분을 위장했다. 하지만 서른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몸져눕는다. 이 유서는 죽기 한달 전 이원경이 구술한 것을 처가쪽 인척이 받아 적은 것이다. 세살박이 어린 아들에게만은 조상을 바로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이 유서가 발견된 것은 1860년대. 전염병이 한창 나돌던 때였다. 집안에서 오래된 물건을 찾아 태우라는 무당의 말을 듣고 버려둔 장롱 한귀퉁이에 붙어있는 이 유서를 발견한 것이다.
내용 자막 (내 자손들이 자라거든 이 말과 이 글을 전해서 출신 가문과 선조를 잊지 않도록...)
이재수 인터뷰 : 귀신이 붙은 거니까 불태워버려라. 근데 용케 내용이나 보고 태워버리자 그래가지고 그걸 뜯어보니까 유서가 붙어있더라. 농 안에. 그래서 알게 됐다. 240년동안 밀양 이가로 행세하고 거기서 결혼을 하고 산거다. 어디를 가지도 못하고.
이원경이 도망을 간 이유는 아버지 이급의 동생, 이발 때문이었다. 이발은 역모의 주모자로 지목된 정여립과 절친한 사이였다. 하지만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던 그가 역모에 가담했다는 증거는 없었다. 빌미는 정여립과 시국을 비판했다는 것이었다. 이발은 귀양을 가다가 잡혀와 고문 끝에 죽었고, 나머지 형제들도 역모를 부인하다가 죽었다. 여든이 넘은 이발의 노모는 압슬형을,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하던 아이들도 매를 맞다가 죽었다. 역모에 대한 수사는 상식을 초월했다. 사건의 여파는 이곳 함평의 조용한 제동 마을에까지 불어닥쳤다. 당시 이곳에서는 호남의 대유학자 정개청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50대 후반의 그는 조정에서 내리는 관직을 사양하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지금도 소중하게 보관되고 있는 정개청의 '우득록'. 임금이 읽어 보고 칭찬하자 홍문관에서 귀하다는 먹감나무를 전국에 수소문해 목판본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인근에 살던 정여립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 역모에 가담했다는 증거가 돼 화를 입는다.
리현석 영산강 문화연구소장 인터뷰 : 정여립의 집터를 보아줬다. 이 양반이 역학을 했기 때문에 타당한 말. 그 다음에 이분이 쓴 편지 두통이 나왔는데 거기에 도를 아는 건 당신이다 이 말이 크게 얘기를 했다.
정개청은 예의상 한 말일뿐 정여립과 동조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결국 유배당하고 두달만에 죽었다. 화는 마을 전체에까지 미쳤다. 정개청을 따르던 제자 50명이 죽고 20명이 유배당했다. 남아있던 4백여명도 과거응시자격을 박탈당했다.
리현석 인터뷰 : 선생이 그렇게 되니까 다들 떠났다. 마을도 비고 그분들 벼슬길도 막히고 수난을 겪게 된다.
어이없게 희생된 사람도 많았다. 안질 때문에 오해를 받아 죽었는가 하면, 관기와 헤어지면서 흘린 눈물이 화근이 돼 역모에 몰리기도 했다.
이이화 인터뷰 : 정여립이 글도 잘하고 하니까 백유양이란 사람이 자기 아들을 그리로 보내면서 당신 아들처럼 대해달라 이렇게 얘기했다. 있을 수 있는 얘기다. 그런데 이걸 역적으로 몰아가다 보니까 어떻게 역적한테 내 아들을 네 아들처럼 여겨달라 이렇게 할 수 있느냐. 그런데 옛날에 자기 자식을 보낼 때 그렇게 했다. 그래가지고 몰아서 다 죽인다든지.
주모자 정여립의 시신은 만조백관이 보는 가운데 능지처사됐다. 그 부모와 자식들도 모두 교수형을 당했다. 조선 전체가 공포분위기에 휩싸였다. 날조된 유언비어 때문에 희생되는 사람들도 속출했다. 도동서원에 위패가 모셔져 있는 최영경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가 옥에 갇히자 천여명의 선비들이 모여들었을 정도로 최영경은 학문과 덕망이 높았다. 그는 소문으로만 떠돌던 정여립의 부하 길삼봉이라는 누명을 썼다.
신병주 박사 인터뷰 : 길삼봉에 대한 진술도 용모에 있어서 수염도 허옇고 아주 수척하다는 표현이 있는가하면 아주 살이 쪘다는 진술도 있었고 나이도 30세다 50세다 60세다, 사는 곳도 전주나, 나주다, 진주다이런 여러 정황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60세에 수염이 허옇고 수척한 노인이다는 진술만 증거로 채택.
이것은 실존인물 최영경과 닮은 진술만 채택함으로써 최영경을 옥사에 연루시키려했던 그 당시에 짜맞추기식 수사에 최영경은 희생됐다고 볼 수 있다. 최영경은 국문을 받던 중 옥사했다. 독살됐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정확한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고 희생자들 중 가장 먼저 명예가 회복됐다. 16세기 후반,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 이렇게 정여립 역모사건은 조선사회에 광풍을 몰고 왔다. 그리고 그 회오리는 이름높은 학자에서 이름 없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천여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
ST2.
이렇게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알거나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사실만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역모 가담 여부와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정말 이상한 옥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정여립이란 인물이 그 정도로 위험한 인물이었을까요? 바로 이 사람이 정여립, 역모의 주모자로 지목된 사람입니다. 전주에서 명문으로 꼽히는 동래 정씨 가문에서 태어나 22살에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학유, 예조좌랑, 홍문관 수찬 등을 지냈습니다. 정사인 실록에 의하면 자신을 조정에 천거한 이이를 비판한 것이 선조의 진노를 사 관복을 벗게 되고 그 사건 이후 벼슬길이 막혀버립니다. 여기에 앙심을 품고 천민과 승려 등 사회불만 세력을 규합해서 역모를 했다는 것입니다. 또 정여립의 어린 시절 일화가 전해지는데, '여립이 7,8세 무렵 아이들과 함께 놀다가 까치 새끼를 부리에서 발톱까지 토막내었다. 아버지 희증이 노하여 누구의 짓이냐고 물었다. 한 여종이 그 연유를 일러바치자 희증은 여립을 크게 나무랐다. 그날 밤 여종의 부모가 출타하고 여종 혼자 자고 있을 때, 여립은 그녀의 배를 칼로 찔러 죽였다.' '성격이 흉악해서 형제 대여섯명 간에 사이가 좋지 못했고 친척 중에 원수지지 않은 자가 없었다.' 역모자에게는 흔히 이런 식의 일화가 따라다니긴 하지만 대단한 악평입니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호의적인 평가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조선 초부터 인조때까지의 야사가 수록된 <대동야승>을 보면, '정여립은 넓게 보고 잘 기억했고, 논의가 격렬해서 거센 바람이 이는 듯했다'고 합니다. 이이도 '호남에서 학문하는 사람 중 정여립이 최고'라고 극찬한 바 있습니다. '잔인무도한 반역자', '박람강기한 대학자' 이 중 어떤 것이 진짜 정여립의 모습일까요? 정여립의 흔적을 찾아가 봅니다.
---------------------------------------------------------------------------
VCR2. 범상치 않은 인물, 정여립
관복을 벗고 낙향한 정여립이 터를 잡은 곳. 이 일대는 지금까지 다양한 민간신앙이 성행할 정도로 예로부터 명당으로 손꼽혀왔다. 미륵신앙의 본거지 금산사가 근처에 있고, 증산교의 본부건물이 자리잡고 있는가하면, 강증산이 도를 깨쳤다는 대나무 숲 터 얘기도 전해진다. 30대 중반의 정여립은 이 일대에서도 이름난 명당, 제비산 자락에 집을 짓는다. 4백년 전 정여립의 집이 있었다는 곳.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에게 정여립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라온 최순식씨는 이곳을 정여립의 집터라고 확신하고 있다.
현장음 : 여기 기와도 있네요. 정여립의 집터에서 나온 거다. 그럼 여기가 다 집터였다? 정여립의 집터가 여기에서 저기까지...
일제시대까지만해도 이곳은 흉가터로 알려져 사람들이 접근하기를 꺼렸다고 한다.
최순식 인터뷰 : 밭임자가 이것을 밭에서 나왔다고 해서 이건 정여립의 집터에서 나온 거기 때문에 이건 보존을 해야 한다. 이건 수막새인데 안에 별이 일곱 개가 있더라 ...
일곱 개의 별까지 새겨진 범상치 않은 기와. 명문가인데다 재력도 상당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관직을 떠났지만 그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멀리서 선비들이 찾아오고 인근 수령들도 앞다투어 그를 방문했다. 사람들이 오면 중국에서 들여온 천문학과 풍수 지리학 책을 함께 읽고 토론하기도 했다. 이렇게 정여립의 행동은 보통 사대부들과는 다른 점이 많았다. 지금도 효험있는 기도처로 유명한 제비산 중턱의 치마바위. 그는 이곳에서 천일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시국을 비판하는 발언을 자주 했다고 한다.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주인이 있겠는가, 누구든 능력 있는 사람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 이런 언행은 당시의 흐름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신병주 박사 인터뷰 : 풍수나 천문지리에 해박했다거나 병법에도 일가견이 있었다는 등 당시의 국시였던 정통 주자성리학의 흐름과는 아주 배치되는 사상의 소유자. 더구나 나아가서 천하에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리오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할만큼 일탈된 사상의 소유자. 이런 정여립의 급진적 진보적인 사상의 배경에는 현실에 대해서 보다 개방적이고 자유롭게 사유하고자 하는 의식이 내포된 것이 아닌가 판단한다.
정여립은 점점 영향력을 확대해나간다. 옛날에는 3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산속의 섬으로 불린 죽도. 이곳에 그는 서당을 짓고 양반, 상민, 천민, 승려 등 신분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모아 학문을 가르쳤다. 그래서 죽도선생으로 불리기도 했던 정여립은 다른 한편으로는 무예를 가르치는데 힘썼다. 죽도 뒤편으로 덕유산 줄기를 타고 내려온 천반산. 가파른 능선을 한시간 정도 올라가면, 정여립이 활쏘기와 무술을 가르쳤다는 곳이 나타난다. 이 일대에서 화살촉과 커다란 솥이 발견되기도 했다. 무려 6백여명이 '대동계'라는 이름으로 한달에 한번 이곳에 모였다고 한다.
신정식 인터뷰 : 이곳이 천반산인데 평평한 곳이 한 5천여평. 지금은 나무가 가득차 있지만 이곳에서 정여립이 대동계원들과 같이 군사훈련을 했다. 활쏘기나 진법훈련이 끝나면 정여립이 가산을 털어 여러사람들과 음식을 나눠먹고...
대동계의 위력은 대단했다. 1587년 정해왜변 당시 전주부윤 남언경이 도움을 요청하자 정여립은 하루도 안 돼 군사를 모아 왜구를 격퇴했다.
이이화 선생 인터뷰 : 선비 위주로 모인 것이 아니라 신분계층이 다양했다. 중, 술사, 천민들이 들어있다는 것이 범상치 않은 것. 그 당시로서는 불손한 것.
신병주 박사 인터뷰 : 정여립처럼 카리스마와 리더쉽을 갖춘 지식인이 당시 지식인의 행동반경이 좁은 사회에서는 금방 포착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정여립의 뛰어난 자질과 능력이 정적들에게는 경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보여진다.
체제에 대한 불만, 강한 리더쉽, 그리고 관군을 능가하는 군사력. 이렇게 역모 주모자로서 필요한 조건을 다 갖추고 있었던 정여립. 실록에 의하면 그는 대동계원을 모아 치밀하게 거사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민심을 이반시키기 위해 역성혁명은 필연이라는 도참설을 세간에 유포시킨다. 실제로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는 '목자망 존읍흥', 즉 이씨 왕조가 곧 망하고 정씨가 새로 일어난다 이야기가 떠돌았다. 기록에 의하면 '선조 23년 정월, 전라도와 황해도에서 일시에 군사를 일으켜 한강까지 올라가 서강창을 습격, 군량미를 확보한 뒤 홍제원에 진을 친다. 팔도물산이 올라오는 수로를 차단하고 성안에 자객을 들여보내 병조판서와 금부도사를 죽인다. 그리고 민심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성안으로 진입한다.'는 거사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계획이 사전에 탄로가 나고 조정에서는 즉시 체포령을 내린다. 뒤늦게 이 소식을 안 정여립은 죽도로 도망 가다가 천반산 중턱에 몸을 숨긴다. 그리고 이 작은 굴에서 최후를 마친다. 당시 그를 뒤쫓았던 민인백은 그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토역일기 : 여립이 옆사람이 들고 있던 칼을 빼앗았다. 칼을 번득일 때마다 한사람씩 쓰러졌다. 마침내 여립이 칼을 땅에 꽂고 스스로 목을 찔러 마치 소가 우는 듯한 소리를 내며 죽었다.
이렇게 자결한 정여립의 시신은 한양으로 압송 됐고 역모의 주모자로 능지처사된다.
--------------------------------------------------------------------------
ST3.
그런데,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역모를 꾀한 정여립이 자살을 했다'... 유교경전 뿐 아니라 풍수와 천문 등 다양한 학문에 두루 능통해서 학계와 벼슬아치들에게까지 두루 영향력이 미쳤던 인물 정여립. 게다가 그는 하층민과 무사들을 대규모로 조직할 정도로 강한 리더쉽까지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역모를 했다면 왜 싸워보지도 않고 자살을 했을까요? 실록에는 조정 중신들 대부분이 처음에는 정여립의 역모 사실을 믿지 않았다고 돼 있습니다. 정여립이 서울로 올라와서 결백을 밝히면 다 해결될 걸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정여립은 도망을 가다가 자결을 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자결한 것이 역모를 시인한 증거로 해석돼 사건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됐 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뒤집는 기록이 있습니다. 17세기에 쓰여진 당쟁에 관한 책, <동소만록>을 보면, 정여립이 자살한 것이 아니라, 타살됐다는 것입니다. '정여립은 진안 죽도에서 놀고 있었는데 선전관과 현감 민인백이 군사를 데리고 포위하여 그를 때려 죽였다.' 즉 누군가 치밀한 사전 각본을 만들어 정여립을 죽이고 역모를 조작했다는 것입니다. 정여립 역모사건 자체가 조작된 것이다! 학계에는 이 주장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습니다.
-------------------------------------------------------------------------
VCR3. 정여립 역모는 조작됐다?
학계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정여립 역모 조작설을 주장하고 있는 이희권교수. 처음 이교수가 정여립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자신의 고향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자료를 검토할수록 조작의 의혹이 짙어졌다고 한다. 특히 이교수는 정여립이 싸워보지도 않고 자결 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자막) 의혹1: 정여립은 왜 저항하지 않았나?
이희권 교수 인터뷰 : 국가적인 힘을 기울여 찾아봤어도 역모를 증명 하는 한편의 문서도 발견하지 못했고 한점의 병기도 찾을 수 없었다. 정여립이 모반을 위해서 대동계라는 무사집단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집단은 어디 갔으며 왜 놔둔 채 도망을 갔느냐 하는 점이다.
이덕일 한가람 역사연구소장 인터뷰 : 왜구가 쳐들어왔을 때 지방관의 요청에 의해 왜구를 물리쳤다고 하면 대동계는 비밀조직이 아니라 지방관이 알고 도움을 요청할 정도로 공개된 조직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또한 대부분의 연루자들이 명예회복 됐기 때문에 정여립이 역모를 꾀한 대상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게 되는 모순에 부딪힌다. 작고한 원로 사학자 김용덕 교수는 또다른 각도에서 조작설을 제기한바 있다. 정여립의 도주 행적이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자막) 의혹2 : 왜 서신들을 그대로 방치했을까?
많은 사람들에게 역모 가담의 증거가 됐던 서신. 실제로 정여립이 역모를 꾀했다면 도망가면서 서신을 불태웠을 것이라는 점.
(자막) 의혹3 : 왜 하필 죽도로 도망갔을까?
또 정여립이 체포령을 피해 도망간 곳은 그의 본거지로 이미 알려져 있었던 죽도였다고 게다가 자신의 행방까지 알렸다는 점 등이 역모 주모자로서는 비상식적인 행동이라는 주장이다.
(자막) 의혹4 : 정적들은 사전에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흔히 가사문학의 대가로 알려져 있지만 당쟁의 한복판에 서있던 송강 정철. 정권에서 밀려나 있던 그는 정여립의 역모 고변이 있던 날 밤 아들의 초상을 치르고 있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송강은 입궐을 서두른다. 또한 아무도 정여립의 역모를 믿지 않던 상황에서 벌써 정여립이 도망갔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김장생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송강은 입궐해서 선조를 독대했다. 곧이어 수사 총책임자가 역모를 믿지 않았던 정언신에서 정철로 교체됐다. 정철은 옥사의 확대에 서인의 영수로서 전면에 나섰고 그 배후에는 당시 제갈공명에 비유되던 송익필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기록에 의하면 그 당시 동인들은 송익필이 사건을 사전에 기획하고 정철에 의해 실행됐다고 믿었다고 한다.
이덕일 인터뷰 : 익필의 동생 송한필이 자기 부하들을 정여립이 왕이 된다는 말을 조직적으로 퍼뜨렸다. 이 말들이 나중에 정여립이 역모를 했다는 중요한 증거로 채택됐다는 점에서 송씨 형제가 배후에서 이 사건을 조작했다는 동인들의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당시 정국은 동인의 주도하에 있었다. 하지만 동인의 유력 인사들이 정여립 역모에 연루돼 화를 입고 서인이 정권을 장악했다.
권인호 교수 인터뷰 : 5년 전부터 동인이 정국을 장악하고 있는데 동인에 속해있다고 할 수 있는 정여립이나 당시 피해를 입은 인사들이 동인인데 그 역모에 가담할 리가 없다. 따라서 이것은 무옥이고 왜곡 날조된 것이라고 본다.
선조는 이 사실을 알면서 방관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선조는 중종의 손자이자 덕흥 대원군의 셋째아들로,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조정에 의해 추대된 임금이다. 따라서 정통성이 약할 수밖에 없었던 선조는 당시 동서 붕당대립 구도를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옥사가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선조의 태도가 돌변했다는 사실로도 짐작된다. 훗날 선조는 정철이 서인의 세력을 만회하려고 제멋대로 무고한 사람들을 연루시켰다며 정철을 강계로 유배 보냈다.
이덕일 인터뷰 : 선왕의 유명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임금이 되었기 때문에 상당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고 선조와 신하 사이는 예전과 다른 임금과 신하의 관계였다. 정여립 사건이 발생하자 선조는 이 사건을 이용해서 임금과 신하사이의 관계를 분명히하는 계기로 이용하는 측면이 있고 십여년 동안 집권하면서 세력이 강대해진 동인세력을 약화시키고 붕괴시킨 그런 측면이 있다.
따라서 이런 몇가지 근거로 미루어 볼 때 정여립 역모는 조작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학계의 주장이다. 조선조 내내 반역자로 지목돼 족보에서도 지워진 정여립. 그는 정치적 음모에 걸린 희생양은 아니었을까?
---------------------------------------------------------------------------
ST4.
보신대로 정여립 역모사건이 조작 됐다는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역모의 진위를 명백히 가리기는 어렵습니다. 사건 기록은 임진왜란으로 모두 유실됐고, 정여립의 저술은 모두 불태워졌기 때문입니다. 또 후대의 기록들 역시 동인 입장에서 쓴 것과 서인 입장에서 쓴 것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어떤 기록을 근거로 하느냐에 따라 역모 여부에 대한 판단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여립이 했다는 말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정여립이 자주 했다는 말입니다.
'천하는 공물이니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겠는가'
'요임금과 순임금 그리고 우임금은 왕위를 세습하지 않고 서로 물려줬는데 그들은 성현이 아닌가?'
'충신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은 왕촉이 한 때 죽음에 임하여 한 말이지 성현의 통론은 아니다.'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고 누구를 부린들 백성이 아니겠나'
왕위 세습을 부정하고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다는 이 말은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만 당시로서는 지극히 반체제적인 발언이었을텐데.
MC : 신복룡 교수님, 정치사학을 전공하신 분으로서 당시 이런 말을 한 정여립의 사상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신복룡 : 폭군을 어떻게 갈아치우느냐는 정치사상사적으로 오랜 화두였다. 하지만 서구에서도 올리버 크롬웰에 가서야 가능했고, 그런 점에서 본다면 정여립은 서구보다 60여년 앞서 공화주의를 주장한 선각자였다고 본다.
MC : 정치사상사적으로 볼 때 정여립은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였다는 말씀이군요.
시대를 앞서갔다.....그렇다면 정여립이 실제로 역모를 했든 하지 않았든 그가 품은 사상 자체가 당시 체제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얘긴데 그 때문에 정여립이 죽음에 이르게 됐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신분상으로 기득권 층이고 또, 관직에서 물러났지만 고향에서 나름대로 편안히 살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여립은 왜 그렇게 위험한 생각을 하게 됐을까요?
-------------------------------------------------------------------------
VCR4.
정여립의 집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금산사. 대표적 미륵도량인 이곳에는 당시 백성들의 고통이 서려있다. 건국 초기 백성을 위한다던 명분은 땅에 떨어진지 오래였다. 평화롭고 풍요로운 세상을 열어준다는 미륵. 당시 백성들은 이 미륵신앙에서 구원을 찾을 정도로 현실은 절망적이었다. 중앙의 훈척세력은 국가의 재산을 빼돌려 사유재산을 늘리고 바닥난 국고는 백성의 세금으로 채워졌다. 지방관리들은 중간에서 농간을 부려 이득을 취하면서 술과 고기로 잔치를 벌였다. 세금을 피하려고 노비를 자청하거나 유랑생활을 하는 양민들이 부지기수였다. 붕괴 직전에 이른 조선의 현실. 그 심각성은 '고치려 해도 이미 때가 늦은 것 같다'는 당시 서인들의 상소문에서도 지적되고 있다.
이덕일 인터뷰 : 방납업자들로부터 농민들이 사가지고 납부하는 것만 국가에서 받아줬다. 이 경우 방납업자들이 파는 것이 정상가의 30배에 달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농민들이 공납의 폐단과 방납업자의 중간 농간에 의해 겪는 고통은 아주 심각했다.
배동수 박사 인터뷰 : 여진족들이 여러차례 침략을 해와. 기록에 보면 마치 나라가 망하는 듯한 사황, 또 임진왜란은 10년 전 율곡이 10만 양병설을 얘기할 때부터 예견된 것. 율곡 뿐만 아니라 당시 지식인들은 일본의 침략을 예측. 그러니까 국내, 국외적으로 대단히 위기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근본적인 개혁을 주장한 지식인들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호랑이가 출몰했다는 지리산 자락. 가산을 모두 아우에게 물려주고 이곳에 들어온 남명 조식이 그 중심 인물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정여립 사건에 연루됐던 최영경, 정인홍 등 150여명의 제자를 키워냈다. 그는 일부 보수적 사림파들이 훈척과 결탁하면서 가문과 파벌의 이익을 챙기는 등 변질돼가는 것을 강하게 비판했다. 말로는 맹자 공자를 논하면서 실제로는 유교적 통치이념의 근간인 민중에게서 멀어지고 있는 정치인들에게, 남명은 백성들의 현실과 체제의 모순을 직시할 것을 요구했다.
정우락 영산대 교수 인터뷰 : 당대에 기대승과 이황이 벌이던 이기논쟁을 이론을 위한 이론, 학문을 위한 학문은 무용하다. 물뿌려 쓸고 응하여 대답하는 것도 제대로 못하면서 입으로만 천리를 얘기한다 하면서 그 사람들을 기세도명,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도둑질한다고 비난. 강하게 실천을 강조했던 것.
남명은 나아가 '물이 있어야 배가 떠다닐 수 있듯이 권력은 민중에게서 나오는 것이며 따라서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임금은 쫓겨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민중 중심적인 개혁사상과 실천 태도는 그 제자들에게 이어진다.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학문에 개방적이 었던 남명은 일찍이 외침을 예견하고 제자들에게 병법을 가르쳤다. 임진왜란 당시 무력한 관군을 대신해 의병을 일으킨 제자들이 50여명에 이른다.
정우락 영산대 교수 인터뷰 : 학문의 개방성. 주자성리학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단이라고 하는 노장사상을 받아들인다. 정여립도 율곡을 추종하는 서인이었지만 동인 쪽으로 넘어오면서 그런 성향을 보이게 되는데 실천적 성향, 박학풍, 주자학을 고답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을 탈피...남명사상과 일정하게 연결이 되지 않았을까...
지리적 여건 상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더욱 개방적이었던 개성 일대의 화담학파 역시 당시 개혁을 주장하던 지식인들이었다. 여기에는 토정 이지함을 비롯해 정여립 역모에 연루돼 죽은 이발과 정개청 등이 속해 있었다.
신병주 인터뷰 : 화담학파의 경우에는 신분적 개방성이 돋보인다. 공사천이나 서얼들의 자식들도 직접 가르치고 신분에 대한 개방성을 보인 모습이나 이지함은 명문가의 후손이면서 거지에게조차 혜택을 베푸는 아주 민중지향적인 흐름들이 조선중기 사상계에 큰 흐름으로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당시의 진보적 개혁 세력들은 유교의 근본으로 돌아가 개혁의 방향을 찾고자 했다. 그 핵심 사상이, 사서 중 하나인 '예기'에 언급된 '대동'이었다. 정여립이 사용한 '대동계'라는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다. 정여립이 즐겨했다는 '천하는 공물' 이라는 말도 발견된다.
권인호 교수 인터뷰 대진대 철학과 : 역대 제왕들이 마치 나라를 자기 사적 소유물인 것처럼 했기 때문에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나라가 망했다. 그래서 정여립의 대동이라는 것은 이상상태가 아니라 유교의 상고주의에 입각, 과거를 본받아서 현실을 보다 나은 세계 대동의 세계로.
배동수 박사 인터뷰 : 현명한 자를 뽑아서 지도자로 하고 천하가 하나의 공공의 것이다. 노약자나 병자 과부도 복지, 사회보장도 있고 전체적으로 볼 때 대단히 평등 지향적이고 정치적으로 공화주의, 사회주의적 요소도 약간 있고...
16세기 후반 조선사회에는 이렇게 정여립과 같이 화합과 평등이 실현되는 대동세상을 위해 개혁을 주장한 지식인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
ST5.
당시 조선은 안으로는 사회·경제적 모순이 곪을 대로 곪아 있었고 밖으로는 왜와 여진의 침략이 예고돼 있는 등 총체적인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체제의 개혁을 주장하는 진보세력과 기존의 질서를 더욱 강화시키려고 했던 보수세력이 첨예하게 갈등을 빚었습니다. 그 와중에서 기축옥사, 즉 정여립 역모사건이 터지고 개혁, 진보세력들이 일거에 거세됐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여립 사건은 그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개혁세력의 거세로 조선은 스스로 자기모순을 치유할 기회를 잃어버렸고 3년 뒤 임진왜란이라는 전면적인 국가위기를 겪게됩니다. 그후로도 조선은 성리학적 명분론에 매몰돼 새로운 시대적 조류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하게 됩니다. 정여립 사건은 명분과 신분질서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성리학의 흐름이 경직화돼 가는 시점에서 이에 맞서고자 했던 신진사림들의 고민과 다양한 이론적, 실천적 모색, 그리고 현실적 패배를 보여주는 일대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정여립 역모사건의 끝은 아닙니다.
------------------------------------------------------------------------
VCR5.
늦은밤 개인 병원의 한편. 4백년 전의 정여립 역모사건은 아직도 이곳에서 현재 진행형이다. 45세의 나이에 대학원에 진학, 역사학을 전공 하고 있는 정회수씨. 그는 정여립 사건의 진상 규명을 필생의 과업으로 여기고 있다.
정회수 인터뷰 : 언젠가 반드시 진상이 밝혀져서 지난 4백년 이상 불명예스럽게 있던 분들이 명예를 되찾고 그 진상을 통해서 후손들이 어떤 교훈과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좋겠다. 그것이 바램이다.
정여립 사건으로 동래 정씨 일가는 고향에서 쫓겨나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조상들의 무덤은 모두 파헤쳐져 다른 곳으로 이장됐다. 하지만 당시 흔적은 확연히 남아 있다. 공덕을 기리는 비석은 동강난 채 쓰러져 있다. 평평했던 조상묘지는 봉분을 파헤치면서 흙이 없어져 계단식 지형이 돼 있다. 당시 목이 잘려나간 석상은 시멘트로 이어 붙인 자국이 선명하다.
정길수(정인겸의 후손) 인터뷰 : 머리부분이 없어서 머리부분을 시멘트로 만들어 붙여놨다. 비문 훼손된 것은 봉분 앞에 상돌 식으로 그냥 놔둔 거다. 계단식으로 된 것은 왜? 흙이 모자라서 인력으로 흙을 보강해 채울 수가 없어서. 인원은 없고 멀리서 후손들이 와서 산소를 돌보다 보니까 ...예전엔 평평했다.
당시 역모사건 수사에 직접 참여했던 이항복이 남긴 이 시는 어느 누구도 억울함을 대변해줄 수 없었던 공포 분위기를 말하고 있다. 연루자들 대부분이 후대에 명예회복이 이뤄졌지만 정여립 가문만은 예외였다. 그의 이름을 거명하는 것조차 금기시됐다. 정여립이 속한 문중 전체가 수백년 동안 족보에서 누락됐다. 정여립이 태어났다는 완주군 월암리.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지방관리들의 송덕비가 발견되는 것으로 봐서 당시 교통의 요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여립이 능지처사된 후 조정에서는 집터를 송두리째 파내고 그것도 모자라 물을 채워 연못으로 만들었다. 풀 한포기도 자라게해서는 안된다는 강력한 징벌이었다. 연못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지명에서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신정식 인터뷰 : 여기가 파쏘, 봉우리는 파쏘봉, 이 들판은 파쏘들, 여기 모랭이 돌아가는 데는 파쏘 모랭이, 밑에는 파쏘보라고 5백년 전 사건이 일어난 다음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온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지명으로 남아 있는 것. 파가지고 소를 만들었다. 그래서 아예 역적모의를 했던 사람의 흔적을 없애버렸다.
그러나 백성들 사이에 남겨진 기억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논 한가운데 솟아있는 말무덤은 정여립이 실수로 죽인 자신의 용마를 애석해하며 여기에 묻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아직도 보존돼 있고, 조상들의 사당터에는 절을 세워 제사를 지내고 있다.
김옥진 주지 인터뷰 : 그 양반이 세대를 잘못 만나 일을 못하고 돌아 가셨기 때문에 원한이 있다. 그래서 업장 생각을 하고 일을 하고 그런다.
최순식 인터뷰 : 어려서 동네 마을에서 사람들이 모여 놀다가 시비가 생기면 이거 정여립 데려다 시비를 가려야 겠구만 이런 얘기를 했다.
당시 백성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공포 분위기 속에서도 '정여립이 죽지 않고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나돌았다. 그것은 또 다른 정여립에 대한 민중들의 염원이었다. 정여립의 개혁사상은 훗날 실학자들에게 이어진다. 16세기 후반의 진보적 사림들이 그랬듯 이들은 다양한 문물을 수용했다. 정약용의 경우 천주학까지 받아들일 정도로 주자성리학적 이론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리고 거중기가 말해주듯 그 핵심에는 어떻게 하면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할 것인가 하는 실천적 모색이 자리잡고 있었다. 또한 정약용은 무력에 의한 정권교체도 그것이 백성의 뜻이라면 정당한 것으로 보았다. 더 나아가 그는 지금의 간접 선거방식과 비슷한 형태를 정치의 본질이라고 역설했다.
권인호 교수 인터뷰 : 우리가 민의에 도움을 주는 리더를 처음에 뽑았다. 처음부터 임금이 있고 황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군수도 뽑고 대통령을 뽑는 그런 얘기를 탕론에서 하고 있다. 이것은 천하위공적인 대동의 얘기. 이것은 정여립이 얘기하고 정약용이 얘기한 것은 같은 맥락으로 이어진 것.
임금은 하늘이 낸 것이고 백성은 임금의 것이었던 당시 조선 사회.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그 속에 안주했지만 동시에 민본주의적 개혁을 주장한 선구자들이 분명히 존재했다. 정여립 역시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이제 정여립은 실패한 반란의 우두머리가 아닌 민본주의적 개혁을 선구적 지식인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
ST6. 클로징
이렇게 시대를 앞서갔던 정여립의 혁신적 사상과 실천은 근대에 와서야 비로소 재평가되기 시작합니다. 민족주의 역사학자 신채호는 정여립을 '4백년 전에 군신강상론을 타파하려한 동양의 위인으로 '민약론'을 저작한 루소와 견줄 만하다. 하지만 루소와 같이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루소의 사상은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졌지만 정여립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평했습니다. 사실 이 초상화는 실제 정여립의 얼굴은 아닙니다. 그 후손들이 정여립의 기상을 미루어 짐작해 상상으로 복원한 얼굴입니다. 지식인으로 일신의 영달을 좇지 않고 사회의 모순을 고민했던 정여립. 자기가 선 자리에서 대안을 모색하고 실천했던 정여립. 그의 정신이 지금 우리 사회에도 이 초상화처럼 복원되길 기대해봅니다.

※=== History ===※=== History ===※=== History ===※=== History ===※=== History ===※=== History ===※=== History ===※

 

 



[출처]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092000&logNo=500158514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