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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파가(琵琶歌), 명나라 비파 명인 굴씨 조선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다

작성자수돌이(최찬집)|작성시간26.06.09|조회수2 목록 댓글 0

 

 

<비파가(琵琶歌), 명나라 비파 명인 굴씨 조선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다> 고영화(高永和)

 

산문시(散文詩) <숭정궁인 굴씨 비파가(崇禎宮人屈氏 琵琶歌)>는 명나라 마지막 황제의 궁녀로 유락하다가, 이후 조선으로 들어와서 살다가죽은 굴씨(屈氏 1623~1697)의 유물인 비파에 얽힌 이야기를 엮어, 저자 신위(申緯 1769~1847)가 예인으로서의 굴씨를 형상화한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궁녀로 살다 간 그녀의 지난 여러 기록물을 살펴보니, 그녀가 조선에서 명나라 황실의 예법을 가르치기도 했고, 여인네의 머리 매는 법, 새와 짐승 길들이기, 비파의 명수로도 높은 성과를 이룩했다고 적고 있다.

이번 지면에 소개하는 신위(申緯)의 ‘굴씨(屈氏) 「비파가(琵琶歌)」’에서는 그녀를 비파 명인으로 그려냈고, 또한 그녀가 남긴 비파 악기를 소재로 삼아 시(詩)를 이루었다.

 

○ 이 작품은, 굴씨가 작고하고 난 후 백수십년(125년)의 세월이 흐른 1821년(辛巳)에 그녀가 타던 비파 악기가 숯광에 버려져 있었는데, 그것을 악기로 다시 재현하여 연주한 감회를 살려서 쓴 것이다. 비파의 발견이 계기가 되어 굴씨의 매몰되었던 예인적 형상이 이 시에서 복원된 셈이다. 이 시는 서사적 내용이 매우 풍부하다. 그러나 사실의 구체성을 표출하기보다 서정적 색조로 형상을 드러내는, 주로 낭만적 수법을 구사한 것이 특징이다. 고사를 많이 채용해서 문맥의 파악이 비교적 난삽(難澁)한 측면도 그 특징적 수법에 기인한 현상으로 여겨진다.

 

◉ 명⋅청 교체기였던 17세기 중반인 1645년 2월에, 소현세자와 함께 우여곡절 끝에 조선으로 건너온 굴씨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다. 조선 효종의 사위 정재륜(鄭載崙 1648~1723)이 1708년에 저술한 『한거만록(閒居漫錄)』에 처음 굴씨의 기록을 담은 이후로, 그녀의 사적이 차츰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궁인(宮人) 굴씨는 7세 소녀로 처음 명나라 황궁에 들어갔고 1644년 22세의 처녀로 소현세자의 잉첩(媵妾)이 되었는데, 1년도 채 안되어 소현세자의 비극과 함께 고독한 신세가 되어 낯선 이국 땅 조선에서 살다가 75세로 한 많은 생애를 마친 인물이다.

『한거만록』에는 소현세자의 손자 임창군(臨昌君) 이혼(李焜 ?~1724)이 굴씨를 위해 지은 묘지(墓誌)가 인용되어 있으므로 그 일부를 여기에 소개하겠다. 결국 따지고 보면, 그녀는 조선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와 그의 아들 경안군, 그리고 그의 아들 임창군과 또 그의 아들들을 보살폈으니 모두 4대에 걸친 한 집안의 보모였던 셈이다. 다음 글은 굴씨의 일생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던 임창군(臨昌君)이 직접 서술한 실제 기록(實錄)물이다.

⇨ “저(姐, 여성)는 성이 굴씨(屈氏)로 중국 소주부(蘇州府) 소천현(蘇川縣) 사람이다. 7세에 뽑혀서 궁중으로 들어와 효순(孝純) 유태후(劉太后)를 모셨으니 태후는 곧 회종(懷宗)황제의 생모다. 숭정 갑신년(1644년) 3월에 유적(流賊)이 황성을 함락하더니 이윽고 청인이 유적을 섬멸하고 눌러앉아 수도로 삼았다. 이때 우리 소현세자는 심양에 볼모로 있었던바 청인은 굴씨(屈氏 1623~1697)를 세자관으로 보냈던 것이다. 드디어 세자의 고면(顧眄, 관심을 받았다. 즉 관계를 맺었음을 뜻함)을 입었으니 그때 나이 22세였다.

그해 1644년 10월에 세자빈(世子嬪)이 나의 선고(先考) 경안군(慶安君)을 낳으셨는데 역시 세자관에 함께 있어서 굴씨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다 한다. 을유년(1645년)에 세자께서 귀국하시매 굴씨는 따라서 우리나라로 온 것이다. 4월에 세자가 돌아가시자 굴씨는 궁중에 남아 장렬왕후를 모셔서 직품이 상기(尙記)에 이르렀다. 상기는 여관의 종6품이다. 왕후가 돌아가시자 나(임창군)의 집에 나와 있으면서 나의 자녀들을 정성껏 양육하였다.

병자년(1696) 겨울에 내가 사신으로 연경에 갔다가 정축년(1697) 봄에 돌아와 보니 굴씨는 이미 정월 초하룻날 세상을 떴다. 임금께서 관을 하사하시어 내 선고의 산소가 있는 산 안에 장사를 지냈으니 경기도 고양군의 대자동이다.“

 

◉ 명나라 궁녀 굴씨(屈氏)의 사적에 비상한 관심을 표명한 인물로는, 18세기 시인 이규상(李奎象 1727~1799)을 들 수 있다. 그는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 「풍천록(風泉錄)」에서 사실을 서술했으며, 따로 「장남행(江南行)」이란 제목의 서사시로 노래하였다. 「강남행」에서는 명나라에 대한 회고적 의리의 측면에 초점이 가 있다.

또한 조선후기 유명한 문인이었던 신위(申緯 1769~1847)의 「비파가(琵琶歌)」 역시 『한거만록」의 기록에 의거하였는데 굴씨가 구왕을 비꼬았다는 일화를 보충하고, 또 임종에 “훗날 다행히 북벌의 날이 있게 되면 나는 그걸 보겠다. 나를 서쪽 길에 묻어다오”라고 유언을 했다하여 명나라 궁녀였던 굴씨를 반청적 형상으로 그려내었다.

그리고 영조 시대의 문관 홍신유(洪愼猷 1724~?)가 지은 「굴씨사(屈氏辭)」가 있는데 굴씨의 사적을 사부(辭賦)의 형식으로 표출한 것이다. 이 글에서 그의 기구한 인생과 향수의 정서가 애절하게 그려진다. 그런데 굴씨의 새(鳥) 길들이기 재주를 강조하여 드러내면서 비파의 재주는 전혀 비치지 않고 있다. 굴씨가 비파의 예인으로 부각된 것은 지금 신위의 「비파가」에 이르러서다.

 

● 그렇다면 그간 기록에서 전하는 굴씨(屈氏 1623~1697)의 간략한 생애를 살펴보겠다. 먼저 그녀는 명나라 숭정제 때 궁인(宮人)으로, 굴씨(屈氏) 또는 굴저(屈姐), 최회저(崔回姐), 유저(柔姐), 긴저(緊姐)라고 불리었고 조선 인조 때에는 조선에 귀화한 중국 예인(藝人)이었다. 중국 소주(蘇州) 지방 양인(良人) 출신의 딸로, 7세 때 명나라 황궁에 들어갔으며 명의 제16대 황제 숭정제의 황후를 모시는 일로 첫 궁인생활을 시작했다. 명나라가 청나라에게 멸망하게 되자. 굴씨는 청나라의 포로가 되었다. 홍타이지의 이복동생인 도르곤이 굴씨에 미모에 반하여 굴씨를 첩에 삼으려고 했지만, 굴씨는 거부하였다. 도르곤은 굴씨를 죽이지 못하고, 병자호란 후 중국 심양에서 볼모로 잡혀 있던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환관 5명과 궁인 4명을 주어 보낼 때 같이 보냈다.

굴씨는 조선에 와서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를 모셨다. 소현세자가 조선으로 돌아온 지 두 달 만에 죽자 환국령을 내렸으나, 굴씨는 돌아가지 않았다. 굴씨는 여승이 되어, 자수궁(慈壽宮)에서 지냈다. 굴씨는 소현세자의 아들 경안군을 평생 보살폈다. 굴씨는 조선 궁인들에게 자수와 중국어를 가르쳤다. 현종 때 자수원이 혁파되고는 성 밖으로 나가 살다가 나이 75세에 죽었다. 죽을 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바라건대 저를 서쪽 근교의 길에 묻어 주십시오. 그곳에 묻어 주신다면 죽어서라도 왕의 군대가 청나라를 징벌하기 위해 출정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경안군의 아들 임창군은 굴씨의 유언에 따라 경안군 묘 좌측언덕, 중국으로 가는 의주로가 보이는 곳에 굴씨를 묻어 주었다. 굴씨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있다.

 

○ 굴씨 묘의 비문에는, ‘昭顯世子 淸國瀋館侍女 屈氏之墓(소현세자 청국심관시녀 굴씨지묘)’라고 쓰여 있다. 훗날 이곳을 지나던 조선말 선비 김구(金球)는 ‘굴씨 묘를 지나며(過屈氏墓詩)’라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그녀의 혼령을 위로했다. “비단치마는 꽃 같고, 비녀는 □같구나. 이 언덕에다 그대 묻은 지 그 몇 해더냐. 해마다 한식 청명절 날에는 명나라 궁녀 위해 지전(노자돈)이나 보낼까 하노라.(似羅裙花似□鈿 斷原埋玉幾經年 年年寒食淸明節 惟有宮娥送紙錢)”

조선후기에는 소현세자 문중에서 그녀의 묘를 보살폈고, 또한 위의 김구(金球)의 시에서 보듯 궁녀들도 보살폈으며 그녀의 비파 연주는 장악원에 전수되었다고 한다. 강세황의 손자 강이오(姜彛五)는 자단목(紫檀木)으로 된 그녀의 비파를 찾아내 손질했고 자하(紫霞) 신위(申緯)는 그녀로부터 전수받은 장악원 악사로부터 비파 연주를 듣고 그 감흥을 떨칠 수가 없었다. ‘미인은 흙으로 돌아갔어도 악기에 배인 향기는 남았구나.’ <숭정궁인 굴씨 비파가(崇禎宮人屈氏 琵琶歌)>는 절절히 애절하다.

 

● 지금부터는 조선후기 시(詩), 서(書), 화(畵) 삼절(三絶)로 일컬어진 문신,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7)의 <숭정궁인굴씨 비파가(崇禎宮人屈氏 琵琶歌)>를 소개하겠다. 이 글은 저자 신위(申緯)가 지은 1821년(辛巳) 作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에 담겨 있는 산문(散文)이다. 먼저 개략적인 설명을 담은 서문(序文)과 조선으로 들어온 비파 명인 굴씨(屈氏)의 파란만장한 삶을 남기게 된 사연을 열거한 ‘藥’ 운(韻)의 총 46구(句)인, 본문(本文)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本文)은 내용상 크게 4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먼저 첫 부분 10구(句)에선, 비파란 악기는 본래 말 위에서 줄을 타는 것으로 변방에서 만든 것이다. 손을 밖으로 밀어서 소리 내는 것을 비(琵)라고 했고, 안으로 끌어들여서 소리 내는 것을 파(琶)라고 했다.”라고 악기이름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다음 두 번째 부분 12구(句)에선, 명나라가 망하자 소현세자를 따라 조선에 온 궁녀 굴씨는 가장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장렬왕후를 모시며 비파를 연주했는데 마치 그 모습은 작약 같았고 항상 그렁그렁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 비파 소리가 모래바람이 불듯하고 은혜와 원한이 번갈아 오고가듯 하여 장악원 예인들을 감복케 하였다한다.

세 번째 18구(句)에선, 비파 연주를 굴씨의 제자가 전수를 받았다하나 백수십 년(125년)이나 흘러 전하질 않게 되었는데 마침 굴씨의 악기를 발견하게 된다. 라사(逤邏)의 자단목에 봉황무늬가 있고 금색 실에 옥빛 바탕이라 광택이 반짝이나 비파줄과 철발이 끊어져 있었다. 예인(藝人) 강군(姜君)이 악기를 고치니 현과 기둥 사이로 신명한 소리가 스스로 약동하였다. 이 악기는 한나라 궁궐로부터 와서 오랑캐의 음악과 함께 즐기었고 결국 조선에 와서 마음껏 울부짖다 다시 부활하였다. 그녀는 비록 흙으로 돌아갔지만 악기에 배인 향기는 남아 있다.

마지막 네 번째 6구(句)에선, 이로부터 저자가 그녀를 조문하는 마음을 드러내며 마무리했다. 예인(藝人) 강군이 나를 위해 비파 네 곡조를 연주하니 비애와 원한을 담은 노래가 서글프고도 텅 빈 듯하고, 또한 그녀가 말없이 소매를 안고 서 있는 모습을 보는 듯 하다며, 부디 굴씨의 정령이 요동(遼東)의 학(鶴)으로 변화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길 저자는 기원한다.

 

<숭정궁인굴씨 비파가[崇禎宮人屈氏 琵琶歌] 병서(幷序)> 신위(申緯 1769~1847)

◉ 서문(序文)

명나라 숭정제(崇禎帝, 의종(毅宗)의 연호)의 궁녀인 굴씨(屈氏)는 소주의 양가집 자식으로 어렸을 때 장추전(명나라 후비의 궁전)의 시녀로 뽑혔고 숭정 말기에 이자성이 북경을 함락하자 굴씨는 민가로 도망쳐 숨었으며 자성이 실패함에 이르러 굴씨는 청나라 구왕에게 포획 당해 항상 군영 속에 두었다. 우리 소현세자께서 심양에 인질로 잡히자 굴씨로 시중들게 했고, 마침내 따라와서 조선에 이르러 만수전에 소속되어 장열왕비를 모셨다. 굴씨는 비파를 잘 탔고 또한 손가락을 사용하여 짐승을 요란케 할 수 있는데 뜻 같지 않음이 없었고 제자 진춘이란 사람이 아울러 법을 전수 받았다. 효종이 일찍이 상투 만드는 법을 굴씨에게 물었는데 지금 사대부가의 상투 만드는 제도는 굴씨에게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굴씨는 진실로 지식이 많았다. 굴씨가 이미 조선으로 와서 항상 눈물 흘리며 북쪽을 바라보았고 나이 일흔 여(75세) 살에 죽으려 할 때 그 사람에게 말했다. “나를 서쪽 길에 묻어주길 바랍니다.” 고향에서 살고 싶음을 잊지 못한다는 말이다. 숙종이 광평 전씨(田氏)에게 명하여 굴씨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고 해마다 제수를 공급하여 지금에 이르도록 끊이질 않는다. 전씨는 또한 명나라 조정의 상서인 전응양(田應揚)의 후손이라 한다. 내가 오래된 장악원(掌樂院)의 말을 들어보니 굴씨는 세자를 따라 와서 향교방(안국동 교동초교 근방)의 저택에 살며 이따금 장악원의 몇 무리를 불러 발을 가로막고 비파의 운지법을 전수했으니 지금 아직도 강전악(姜典樂)이란 사람이 사숙한 것이다. 일찍이 연주한 비파는 자단목으로 만든 것으로 무늬가 광대하다가 움츠러들어 머리털이 빛나 비칠 정도였다. 후대 사람들은 그 악기를 모르고 우물 푸는 그릇으로 사용하다가 심지어 헛간 속에서 굴욕 당하게 됐다. 강약산(姜若山)이 우연히 임금 왕실의 오랜 집에서 찾아 그것을 위해 거듭 새롭게 하고 음을 살펴 조율하니 매우 우레가 구르는 듯한 아름다운 소리가 났다. 나는 이미 강약산의 일에 감탄했고 또한 굴씨의 일사(逸史)를 모아 그것을 찬수하며 서술하고서 노래를 붙였다.

[屈氏蘓州良家子 幼選侍長秋殿 崇禎末 李自成陷京師 屈氏逃匿民間 及自成敗 屈氏爲淸九王所獲 常置軍中 我昭顯世子質于瀋 以屈氏隷焉 竟從至國 屬萬壽殿 事莊烈王妃 屈氏善琵琶 又能擾禽獸指使 無不如意 有弟子進春者幷傳法 孝廟甞詢䯻制於屈氏 今士大夫家䯻制自屈氏 則屈氏固多識也 屈氏旣東來 常泫然北望 年七十餘將死 語其人曰 幸埋我西郊路 不忘首邱也 肅廟命廣平田氏主屈氏祀 歲給祭需 至今不絶 田氏亦明朝尙書應揚之後云 余聞老梨園言 屈氏隨世子出 居鄕校坊邸 往往召梨園數輩 隔簾授琵琶指法 今尙有姜典樂者私淑焉 其甞所御琵琶紫檀槽 文理盤蹙 光鑒毛髮 後人不知其樂器 用爲陶井之具 甚至屈辱廠中 姜若山偶得於天潢故家 爲之重新 審音調律 大有䨓輥之美 余旣感歎姜若山事 又摭屈氏逸史而修書之 系以歌]

 

[주1] 청구왕(淸九王) : 청 태조 누루하치의 14번째 아들로 이름은 다이곤(多爾袞, 1612~50)이고 예친왕(睿親王)에 봉해졌으며, 북경에 입성하여 이자성 농민반란군을 진압하고 순치제(順治帝)를 맞이했다. 순치제는 당시 어렸기에 그가 섭정왕이 되어 왕권을 행사했다.

[주2] 수구(首邱) : 수구(首丘)로 표기하는데, 여우가 죽을 때에 제가 살던 굴이 있는 언덕 쪽으로 머리를 둔다는 말에서 연유한 것으로, 고향 땅에서 살고 싶어 하는 소원을 이른다. 『예기』 「단궁(檀弓)」 상(上)에 "여우는 죽을 때에 머리를 바로 하여 언덕으로 향한다(狐死正丘首)"라고 보인다.

[주3] 광평전씨(廣平田氏) : 중국 광평부(廣平府) 계택현(鷄澤縣) 사람 전호겸(田好兼)이 병자호란 이후 귀화해서 형성된 성씨다. 이규상(李奎象)이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 「우예록(寓裔錄)」에 "전상서 자손이 병자년 뒤에 들어와서 지금 무가(武家)의 대족이 되었는데, 서울 새문밖에 살고 있다"라고 하였다.

[주4] 장악원(掌樂院) : 조선시대 궁중에서 연주되는 음악 및 무용에 관한 모든 일을 맡아보던 관청. 이원(梨園)·연방원(聯芳院)·함방원(含芳院)·뇌양원(蕾陽院)·진향원(趁香院)·교방사(敎坊司)·아악대(雅樂隊) 등으로 불렸다.

[주5] 천황(天潢) : 임금의 왕통(王統).

[주6] 일사(逸史) : 정사에 빠져서 드러나지 않은 사실을 기록한 역사

 

◉ 본문(本文), 조선에 온 비파의 달인 굴씨, 그녀의 악기가 후대에 되살아나다.

(1) 비파란 악기 이름의 유래를 설명하다.

琵琶本是馬上絃索 비파는 본래 말 위에서 줄을 타는 것으로

釋名以爲蕃中所作 『석명(釋名)』에선 ‘변방에서 만든 것이다’라고 하였다.

順手曰秕逆手把 손을 밖으로 순조롭게 밀면 ‘비(秕)’라 했고 손을 안으로 당기면 ‘파(把)’라 했으니

一絃一聲推又郤 밀고 또 당김에 한 줄에 한 소리라 한다.

不知何時此器入漢宮 어느 때 이 악기가 한나라 궁궐에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復隨烏孫公主傷流落 다시 오손공주 따라가 고향을 떠남에 속상해 했더냐?

杜摯則云長城築時 두지(杜摯)는 만리장성을 쌓을 적에

絃𪔛而鼓苦秦虐 현도(絃𪔛)로 진나라 학정의 괴로움을 두드렸네.

漢樂蕃樂不一名 한나라 악기와 변방의 악기 이름 통일되지 않았고

拗項直項無定矱 목이 꺾인 것, 목이 곧은 것으로 정해진 표준도 없었네.

 

[주1] 두지(杜摯) : 중국 삼국시대 위(魏) 나라 사람으로 자는 덕로(德魯)이고 벼슬은 교서(校書)에 이르렀다.

[주2] 현도(絃𪔛) : 진나라 때 긴 자루에 가죽으로 원형의 울림통을 만든 비파를 말한다.

 

(2) 명나라가 망하자 조선에 온 비파의 달인 굴씨, 뛰어난 재능을 보이다.

崇禎宮女搊琵琶 명나라 숭정제의 궁녀가 비파 타는데

鼎革身羇九王幕 왕조가 바뀔 때 그녀는 청나라 구왕의 막사에 억류되었다가

蒼黃步趨壽皇亭 경황없이 수황정(壽皇亭)에서 달려 도망쳐

恨不以殉命之薄 따라 죽지 못한 운명의 박함이 한스러웠다네.

思歸公子幸相隨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소현세자를 다행스레 따라왔으니

東流之水花漂泊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표류하는 꽃 같았어라.

莊烈閤裏第一人 장렬왕후를 모신 이들 중 제일 뛰어난 이로

萬壽殿中春綽約 만수전(萬壽殿) 속 봄의 작약 같았네.

破撥聲繁恩怨長 번거로운 소리 튕김에 은혜와 원한이 길어져

風沙猶覺繞簾閣 모래바람이 오히려 주렴 친 누각을 에워 싼듯 하니

性靈屢伏善才曹 성령이 자주 장악원 예인들을 감복케 했고

汎瀾相對供奉駱 그렁그렁한 눈물로 임금을 받드는 낙타처럼 서로 대하네.

 

[주3] 정혁(鼎革) : 낡은 것을 새것으로 고친다는 뜻으로, 이미 있던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움을 이르는 말이다.

[주4] 수황정(壽皇亭) : 황제의 장수를 기원하는 뜻을 담아 경산(景山)에 세운 정자이다. 1644년 청군이 북경에 쳐들어오자 명나라 숭정(崇禎) 황제가 수황정 앞의 괴목(槐木)에 목을 매 자살한 일을 가리킨다.

[주5] 장렬합(莊烈閤) : 인조의 비 조씨(1624~88)인 장렬왕후를 가리킴.

[주6] 만수전(萬壽殿) : 창덕궁에 있는 건물로 효종이 장렬왕후를 위해 세움.

[주7] 선재조(善才曹) : 백거이의 「비파행」 서문에서 작중 주인공이 "일찍이 비파를 목과 조 두 선재에게 배웠다(嘗學琵琶於穆曹二善才)"고 했다. 선재는 당나라 때 비파 예인이나 악사에 대한 칭호다.

[주8] 범람(汎瀾) : 환란(汍瀾)과 같은 말로 눈물이 그렁그렁한 모습을 말한다.

 

(3) 백수십년 후에 되살아난 굴씨의 비파 소리를 듣고 배인 향기를 느끼다.

弟子進春學新飜 제자 진춘(進春)이 새로운 악보와

幷擾禽獸傳糟粕 아울러 동물 길들이는 법의 어설픔을 배웠다네.

而來二百年無聞 그러나 이백년 흘러 전해지지 않아

惆悵人琴兩冥漠 사람과 비파 두 가지가 어둡고 막막하여 슬프도다.

逤邏檀槽蹙鳳紋 라사(逤邏)의 자단목의 좁아지는 곳엔 봉황무늬가 있고

金縷玉質光灼爍 금색 실에 옥빛 바탕이라 광택이 반짝인다.

豈知屈氏琵琶尙人間 어찌 굴씨의 비파가 아직도 인간세상에 있다는 걸 알았으랴.

鵾絃鉄撥隨風蘀 곤으로 만든 비파줄과 연주하는 철발이 바람 따라 끊어져

宮商附木木不言 궁상의 음계 나무에 붙었지만 나무는 말이 없고

庸奴淘井事可愕 하찮은 종놈의 우물 뜨개가 되었으니 이 일 경악할 만하네.

姜君歎息爲重裝 예인(藝人) 강군은 탄식하며 거듭 고치니

翠鳳昂首靈龜旁礴 비취빛 봉황이 머리 들고 신령한 거북이 위대하여라.

神明頓還絃柱間 신명함이 갑자기 현과 기둥 사이로 돌아와서

是日池上蕤賓鐵自躍 이날 연못가 유빈 소리가 스스로 약동하네.

此器本自漢宮來 이 악기는 본래 한나라 궁궐로부터 왔는데

肯與兜離共唯諾 기꺼이 오랑캐의 음악과 함께 즐기네.

胸膝上抱相親 가슴과 무릎에 올리고 안아 서로 친했지만

美人黃土餘薌澤 미인은 흙으로 돌아갔지만 배인 향기는 남았네.

 

(4) 그녀의 비애와 원한을 담은 비파 곡조를 듣고 조의를 표하다.

我傷哀樂在前中年 나는 슬픔과 즐거움에 속상한 중년의 나이에 있지만

况今憑吊心作惡 하물며 이제 조문하는 마음에 의지하니 괴로운 마음까지 생겨나네.

姜君爲我轉軸抹四絃 강군이 나를 위해 굴대 옮겨가며 네 곡조를 연주하니

匪凮ㆍ下泉凄而廓 비애와 원한을 담은 노래 서글프고도 텅 빈 듯해서

宛見屈氏無言擁袂立 굴씨가 말없이 소매 안으며 서 있는 모습 분명히 보이고

精靈化下遼陽鶴 정령이 요양의 학으로 변화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길....

 

[주9] 조박(糟粕) : '술찌꺼기'라는 뜻으로, '고인(古人)이 남긴 글'을 가리킨다. 그래서 '고인의 진면(眞面)은 추구하지 않고 껍데기만 익히는 것'을 말하기도 하고, '학술ㆍ예술 따위 학문을 옛 사람이 다 밝혀내고 남은 찌꺼기'를 말하기도 한다.

[주10] 곤현철발(鵾絃鐵撥) : 곤계(鵾雞)의 힘줄로 만든 비파 줄로, 곤현(鵾弦)이라고도 한다. 곤계는 학(鶴) 비슷한 새의 이름이다. 철발(鐵撥)은 악기를 탄주하는 공구(工具)인데, 쇠로 만들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시구는 『소동파시집』 권11 「고전두곡(古纏頭曲)」 첫머리에 나오는데, 당 현종(唐玄宗) 개원(開元) 연간에 이원(梨園)에서 낙공봉(駱供奉), 하회지(賀懷智), 뇌청(雷淸) 등이 곤계의 힘줄로 줄을 만들고 철발로 탄주했다는 왕십붕(王十朋)의 주석이 있다.

[주11] 유빈철(蕤賓鐵) : 고악(古樂)의 12율 가운데 제7율을 가리킨다. 철(鐵)은 아주 분명함을 강조하는 수식어다.

[주12] 두리(兜離) : 오랑캐의 음악 이름으로, 전아하지 못한 음악을 말한다.

[주13] 요양학(遼陽鶴) : 요동학(遼東鶴)과 같다. 요동사람 정영위(丁令衛)가 도술을 익혀 학이 되어 돌아왔다는 고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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