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거제도 귀양살이, 선비의 부끄러움> 고영화(高永和)
사람은 누구나 부끄러움이 있다. 자신의 가슴에서 느끼는가가 문제다. 이태 것 선비의 도도함과 고고함으로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다가, 뒤늦은 유배생활로 인해 가슴에 와 닿게 되는 경우가 많다. 선비와 관료의 기본 덕목은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다. 공자는 "모든 행동에 부끄러움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선비라고 할 만하다."고 했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가 도덕적일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사회의 지도자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그 사회는 존립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다. “선비가 부끄러움이 없는 것은 나라의 부끄러움 즉, 국치(國恥)이다.”라는 말은 사회의 지도자에게 부끄러움을 강력하게 요청하는 것이다. "선비들이 모두 부끄러움을 안다면 나라에는 영원토록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선비들이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이는 곧 나라의 큰 부끄러움인 것이다"(士皆知有恥 則國家永無恥矣 士不知恥 爲國之大恥).
조선중기 김육(金堉, 1580~1658)선생은 "어찌 염치를 모두 잊어버리고서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날 줄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豈可都喪廉恥 知進而不知退乎)". 또한 조선전기의 문인인 임억령(林億齡, 1496~1568)은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날 줄을 모른다면 결국은 엎어지고 말 것이다.[知進不知退 竟至於顚跌]”라고 말하였다. 현대의 이형기 시인의 노래처럼,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낙화〉”
○ 갑자사화로 1504년에서 1506년까지 수월리 제산마을에서 귀양살이 한, 김세필(金世弼 1473~1533) 선생은 서울 집에서 답장이 오질 않아, 오양역에서 오는 우편물을, 선비로서 부끄러움도 잊고 날마다 기다린다. 얼마나 집의 소식이 그리우면 아침저녁으로 까치소리에 점을 쳤겠는가? 극한의 귀양살이에서 삶의 의지를 잃지 않고, 희망을 잃지 않는 이것만이 행복일 것이다. 절망의 상황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시편에서 거제도 귀양살이의 궁핍함과 근심스런 정황을 핍진(逼眞)하게 나타내었다.
1) 집에서 보낸 편지가 아직 오지 않아 기다리며(待家書不至)
家書裁幾帛 집의 편지는 몇 필의 비단에다 쓰길 래,
天里邈無傳 천리 길 아득히 전해오지 않는구나.
破褐風霜急 찢어진 베옷이 바람과 서리에 급박한데
窮途歲月遷 궁핍한 타향 길에서 세월만 간다.
殷郵應見辱 오고가는 우편물을 부끄럽게 보는데도
陸犬不時旅 편지는 제때에 도착하지 않구나.
朝暮占乾鵲 아침저녁으로 까치소리로 점치나니
秪爲愁緖牽 다만 근심의 단서만 끌어 낼뿐.
2) 거제유배 때 지은 시(謫巨濟時作)
少將高武布亨衢 무예가 높은 젊은 장수가 조정에 즐비하지만
一得誰知失處吁 한번 올랐다 자리 잃고 탄식하는 줄 누가 알았으랴
文墨自慙無遠計 먼 계획도 없이 시문을 지으며 스스로 부끄러워하는데
雷霆何怪被頑軀 천둥소리가 어찌나 괴이한지, 둔한 몸까지 미치겠구나.
爭如叢薄安巢雀 숲속에 깃들어 사는 참새처럼 조잘대다가
應笑泥塗跕翅烏 날개 떨어져 진흙 속에 더럽히니 웃음 살만하고
兩度春風吹海菊 두 차례나 봄바람이 해국에다 불어도
榮光不借澤邊枯 영광에 힘입지 못하고 못 가에서 시든다네.
追風逸足度雲衢 갈림길에 눈이 내리면 매우 빠른 발로 바람을 쫓아가
地上駑駘仰更吁 지상에 둔한 말을 다시 불러 탄식만 하누나.
藝苑一鳴宜索價 예원에서 한번 읊어도 값을 따질만한데
詞場三捷尙充軀 문단에서 세 번 합격한 것 몸을 가득 채워 자랑했었지.
絶域久羈嘶病驥 먼 변방 이 지역에 오래 잡아 두니 준마가 병에 걸려 울고
荒郊猶怕啄瘡烏 황폐한 들이 두려워 까마귀는 부스럼만 쪼는구나.
飽聞漢室歌天馬 한강 가족 소식은 많이들은 천마가 노래하는데
縱得孫陽骨已枯 손양(孫陽)을 얻어도 이미 말라버린 뼈인 것을..
[주] 손양(孫陽) : 춘추전국시대 백락(伯樂)이다. 백락이 왔다 해도 죽은 말을 살릴 수는 없다는 뜻이다. 자신은 늙어 이제 틀렸다는 말을 의미한다.
○ 김세필 선생은 거제도에 유배와서, 최숙생(子眞), 이행(李荇,擇之), 강유선(元叔), 이려(強哉), 홍언승(大曜), 홍언충(直卿), 홍언국(公佐), 이윤(李胤, 子伯), 자선(子善), 홍언방(君美), 공백(恭伯), 인지(訒之), 공신(公信) 등과 함께 교분을 나누었다. 이분들이 가장 자주 찾은 곳이 문동저수지에서 문동폭포사이였다. 그리고 거제선비 이악(사립)과 함께 선생의 거제도 유배 시 가장 힘이 되어준 친구는 이행과 홍언충이다. 가장 어려운 시기의 교우였기에 이들과의 교분은 각별하여 평생을 같이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문간공 김세필 묘역을 경기도 문화재 제92호로 지정되었고, 위치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 산23번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