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시문학 시조의 대가 윤선도의 자식 잃은 아픈 ‘마음을 달래다(遣懷)’> 고영화(高永和)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노인을 제외하고 한국 고전시가(古典詩歌) 사상 최고의 작가였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를 모르시는 분은 드물 것이다. 그의 문학 작품은 학창시절 뿐 만아니라 대중매체에서도 가끔씩 접하기 때문이다. 풍성한 시정(詩情)과 호연한 기상(氣像)을 담아낸 고산(孤山) 선생의 시문학(詩文學)은 주지하듯이, 일찍부터 국문학계의 주목을 받아 왔다. 특히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비롯한 일군의 시조(時調) 작품에서 보여 준 뛰어난 문학적 성취는, 그를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과 함께 한국 고전 시가 사상 최고의 작가로 평가하는 데에 이견이 없다.
반면에 그의 한시와 산문 등 한문학 작품은 상대적으로 오랫동안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그의 한시가 국문 시가 작품의 4배가 넘을 정도로 많고, 창작 시기도 10대부터 70대 이후까지 거의 전 생애에 걸쳐 있는 점을 감안할 때, 고산(孤山) 문학에서 한문 작품이 갖는 중요성이 아주 크다 하겠다. 한마디로 고산의 한문학(漢文學)은 청년기에서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임병양란의 사회적 혼란과 사색당파의 어지러운 정치 현실 속에서 파란만장한 부침을 거듭한 삶의 역경 속에서 창작되어, 농밀한 시정(詩情)이 담겨 있다.
◉ 이번 지면에 소개하는 윤선도의 한시(漢詩) <견해(遣懷)>는 선생 자신의 경험과 거기에서 얻은 감상을 장편의 오언고시(五言古詩) 형식을 사용하여 형식적 제한을 벗어나 자유롭게 회포를 푼 글이다. 이 시의 창작 동기는 고산(孤山)이 영덕의 유배지에서 1639년 53세 때 풀려나 고향으로 가던 중, 46살에 유배지에서 얻은 아끼고 사랑했던 서자(庶子)인 막내 미(尾)가 마마를 앓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 아파하며 길을 가던 중에, 우연히 만난 개와의 일화에서 기인한다. 첫 구에서 12구까지는 그 일을 요약하여 제시하고 있다. 여정에서 길거리를 떠도는 개와의 만남과 헤어짐은 그다지 특이할 것이 없는 일상적 상황이다. 하지만 고산은 이러한 평범한 일상사를 그냥 보아 넘기지 않는다. 그 다음의 13구부터는 이 일에서 깨달은 자신의 감상이 표출되어 있다. 그가 얻은 깨달음은 ‘얻음과 잃음’, ‘만남과 헤어짐’, ‘삶과 죽음’ 등은 자연의 이법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46살에 얻은 늦둥이인 미(尾)는, 늘 그를 따르며 재롱을 부리는 귀염둥이였기에 상심이 더욱 컸던 것이다. “비통한 이 심정 비할 데 없어 밥을 대하면 눈물이 수저에 떨어지고 말에 올라타면 눈물이 고삐를 적신다.(痛悼無與比 臨飡涕垂匙 騎馬淚霑轡)”고 애통해 했다. 그런데 이런 가운데 떠돌이 개와의 우연한 만남은, 그에게 아들 미의 죽음과 관련하여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는 계기가 된다. 그렇게 얻은 깨달음은, 15구부터 18구까지에서 보이듯 살아가는 데 있어서 득실은 그다지 마음에 둘 일이 아니며, 삶과 죽음의 문제도 결국 무상(無常)한 것으로 슬픔이나 괴로움에 빠질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처럼 평범한 일상적 체험을 자아 성찰의 계기로 삼고, 인생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는 태도는 그의 여러 시편들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고산의 시 세계에 있어서 하나의 특징적 국면으로 보인다. 참고로 고산은 평생 첩(妾)을 2명 두었는데, 이 글에서 잃은 자식은 영덕 유배지에서 배수첩(配修妾)이 낳은 아들 미(尾)였다. 그리고 그는 병자년(1636년)에 이미 아들 하나를 질병으로 잃은 바가 있었다.
◉ 윤선도가 살았던 17세기에는 붕당(朋黨)과 관련된 정치적 혼란과 반정, 만주족의 침입 등의 대외적 난리로 인해 고산 선생의 인생 역정 또한 파란만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이러한 정국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고산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총3차례 유배형’에 처해졌다. 처음 유배는 그의 나이 30세 1616년 이이첨 일파의 모함을 받아 함경도 경원(慶源)으로 유배됐다가, 1년 뒤인 1617년(광해군 9) 경상남도 기장(機張)으로 이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이이첨 일파가 처형된 뒤 풀려났다. 두 번째는 병자호란이 평정된 뒤 서울에 돌아와서도 왕에게 인사를 드리지 않았다는 죄로 1638년(인조 16) 6월 다시 경상북도 영덕(盈德)으로 귀양 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세 번째는 1659년 효종이 죽자 예론문제(禮論問題)로 서인과 맞서다가 1660년 6월 함경남도 삼수(三水)에 유배됐다가 1665년 전라도(全羅道) 광양(光陽)으로 이배의 명이 내려져 광양 백운산(白雲山) 아래 옥룡동(玉龍洞)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1667년 9월 석방되어 해남으로 돌아와서 있다가 곧바로 부용동(芙蓉洞)으로 들어갔다. 1668년 무민당(無憫堂) 동쪽 시냇가에 작은 집을 짓고 곡수(曲水)라고 명명하고 여생을 한적히 보내다가 1671년 7월 16일 전라남도 해남군 보길도 낙서재(樂書齋)에서 사망하였다.
●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는 영덕의 유배지에서 1639년 53세 때(인조 17년) 해배되어 풀려났다. 그가 기묘년(1639, 인조17) 2월에, 그가 영덕(盈德)의 유배지에서 사면을 받고 고향으로 가던 중, 20일 아침에 경주(慶州) 지역 요강원(要江院)에 이르렀을 때, 서자(庶子)인 막내 미(尾)가 마마를 앓다가 10여일이 지난 이달 초하루에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 너무 아파서 어떻게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어 슬퍼하며 지은 시(詩)가 <미아의 죽음을 슬퍼하며(悼尾兒)>와 <마음을 달래다(遣懷)> 등이다.
○ 이번 지면에서 소개하는 ‘陌’ 운(韻)의 오언고시(五言古詩) 28구(句) <마음을 달래다(遣懷)>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창작된 작품이다. 이 당시 아들 미(尾)를 잃어버리고 슬픈 상심 속에 있었는데 홀연히 나타났다가 곁에 머물던 개 한 마리가 갑자기 사라지자 인생살이도 이와 같아, 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영원한 것이 아니고 언젠가는 다 헤어지게 되는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래서 가장 사랑스럽게 생각하던 아들 미(尾)가 마마에 걸려 8살의 나이로 일찍 떠난 것이 이 강아지가 잠깐 곁에 있다가 사라진 것처럼 잠시 머무르는 손님과 같은 것이었음을 깨닫고 마음의 위안을 삼는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시구(詩句)에서 “얻었다고 좋아하고 잃었다고 아쉬울 것도 아니다. 사람이 살고 죽는 문제도 이와 무엇이 다르리오.(得之不足喜 失之不足嘖 人之生與死 與此何殊跡)”라고 읊었다. 애별리고(愛別離苦)라는 말이 있듯이 ‘사랑하는 존재가 곁에서 떠나는 것은 견디기 힘든 슬픔’이지만 그 슬픔을 어떻게 해서든 극복하려는 아버지로서의 애틋함이 느껴진다.
<마음을 달래다 기묘년(1639)[遣懷 己卯]>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
途中逢一犬 길 가다 만난 한 마리의 개
尾長而色白 꼬리는 길고 색깔은 흰데
兩日隨我馬 이틀 동안 내 말을 따라다니며
下馬繞我舃 말에서 내리면 내 발을 맴돌았네.
麾之終不懋 손을 저어도 끝내 경계하지 않고
掉尾如有索 꼬리 흔들면서 뭔가 구하려는 듯했네.
奴婢欣投飯 노비들도 기꺼이 밥을 던져 주며
爭思逐兔策 토끼 쫓을 꾀를 다투어 생각했는데
今朝忽不見 오늘 아침에 홀연히 보이지 않아
一行深歎惜 일행이 깊이 탄식하며 아쉬워했네.
來何不待招 부르지도 않았는데 어디서 왔다가
去何不待斥 쫓지도 않았는데 어디로 떠났는가.
造物於人世 인간 세상에 조물이 하는 짓이란
百事渾戲劇 백 가지 일이 죄다 희극일 뿐이니
得之不足喜 얻었다고 기뻐할 것도 없고
失之不足嘖 잃었다고 한탄할 것도 없네.
人之生與死 사람의 삶과 죽음이라는 것도
與此何殊跡 이것과 다를 것이 뭐가 있으랴.
乃知化去兒 이에 알겠도다. 세상 떠난 미아(尾兒)는
是我八年客 팔 년 동안 내 곁에 머문 객이었음을
因此頓有悟 이로 인해 갑자기 깨치며
塡胸氣始釋 가슴의 응어리가 비로소 풀리는구나.
無乃舊仙侶 그동안 함께 놀아 준 신선의 짝이
哀我悲懷迫 너무 슬퍼하는 나를 애달피 여겨
爲之遣此物 특별히 이 동물을 나에게 보내
以開迷惑膈 미혹을 깨우치려 함이 아니리오.
路傍沙水明 길가의 모래톱 물 밝게 비치나니
我意還有適 나의 마음이 다시금 편안해지는구나.
[주1] 쟁사축교토(爭思逐狡兔) : 그 개를 잘 길들여서 토끼를 잡으러 갈 때 사냥개로 이용할 생각도 해 보았다는 말이다. 진(秦)나라 승상 이사(李斯)가 간인(奸人)의 무함을 받고 함양(咸陽)에서 요참(腰斬)의 형을 당하기 직전에 그의 아들을 돌아보며 “내가 너와 함께 다시 사냥개를 이끌고 상채의 동문으로 나가서 약빠른 토끼를 쫓으려고 한들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吾欲與若復牽黃犬 俱出上蔡東門 逐狡兔 豈可得乎)”라고 탄식했던 고사가 전한다.
[주2] 미아(尾兒) : 영덕 배수첩(配修妾)이 낳은 아들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매우 영특해서 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기묘년(1639) 2월에 고산이 영덕(盈德)의 유배지에서 사면을 받고 돌아오게 되었는데, 20일 아침에 경주(慶州) 지역 요강원(要江院)에 이르렀을 때, 미아가 마마를 앓다가 이달 초하루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 너무 아파서 어떻게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이에 말 위에서 시를 지어 나의 슬픔을 토로하였다고 그의 시 <도미아(悼尾兒)>에서 밝혀 놓았다.
● 참고로,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을 ‘서하지통(西河之痛)’이라 하는데 서하(西河)에서의 아픔이라는 말로, 공자의 제자인 자하(子夏)가 서하(西河)에 있을 때 자식을 잃고, 너무 슬피 운 나머지 소경이 된 옛일에서 온 말이다. 이 일을 상명지통(喪明之痛)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말에도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머리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창자가 끊기는 애절(哀絶)한 고통이라거나, 단장의 아픔(斷腸之哀)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