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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유배문학, 삼포왜란 「한웅천륜전(韓熊川倫傳)」 ‘씹어 먹을 석철이 놈’

작성자수돌이(최찬집)|작성시간26.06.16|조회수5 목록 댓글 0

 

 

<거제유배문학, 삼포왜란 「한웅천륜전(韓熊川倫傳)」 ‘씹어 먹을 석철이 놈’> 해암(海巖)고영화(高永和)

 

이번 지면의 주제 「한륜 웅천 현감 전(韓熊川倫 傳)」은 삼포왜란 때 처형당한 웅천현감(監熊川縣事) 한륜(韓倫)의 행적을 정리한 전기(傳記)이다. 1510년에 왜구가 침구했을 때 전력을 다해 한륜은 웅천성을 지켰으나 단 한 번의 실기로 인해 군사들이 도망가 성이 함락되자 병사(兵使) 김석철(金錫哲)에게 성을 버렸다(棄城)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한 일을 애도한 글이다.

1550년경 거제시 고현동에서 귀양살이 하던 유헌(遊軒) 정황(丁熿 1512~1560) 선생이 삼포왜란에 참전한 거제도 노인들에게 삼포왜란에 대한 지난 이야기를 전해 듣고 기술한 산문(散文)이다. 참고로 역사 기록에 의하면, 한륜은 처형, 가족은 유배 또는 관노에 처해졌다고 기술되어 있다. 한편 비록 한륜에게 죄가 없다고는 할 수는 없으나 그보다는 요행만으로 부귀를 꾀하는 김석철이 더 비겁하다고 적고 있다.

 

○ 김석철이 1510년 삼포왜란 초기 4월6일~7일날 군사를 거느리고 웅천성을 구원하려 왔다가, 웅천성 군사가 겨우 수백인 것을 보고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 하여 두려워서 전진하지 못하고 물러가서, 경남 창원(昌原) 병마절도영에 보전하였다. 만일에 웅천성으로 들어가 구원하였다면 웅천성은 함락당하지도 않았을 것이고(병력 수로 보아) 삼포왜란도 일찍 끝났을 것이다.

 

○ 삼포지란(三浦之亂) 1510년 당시 경상도 연안에서는 왜적의 난으로 인해 백성들의 고충이 대단하였다. 연안 장정들은 폭동을 일으킨 왜놈들을 진압하고자 모두 차출당하여 웅천, 부산포 등지로 끌려갔다가 난이 끝난 후 돌아온 일이 있었다. 왜란이 끝나고 거제도 백성들 사이에서 가장 원성이 컸던 사람이 바로 경상병마절도사 김석철이었다. 왜란 발생 약 30년 후에도, 백성들 사이에서 원한에 사무치고 분통터지는 일이 발생하면 "씹어 먹을 석철이 놈" "석철이 같은 놈" 이런 말이 유행할 정도였으니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왜? 이런 유행어가 생겼을까? 여기 <한륜 웅천현감 전(韓熊川倫 傳)>에서 그 이유를 설명해 놓았다.

 

◉ [작품해설] 저자 정황(丁熿)이 거제시 고현동 배소에서 노인들에게 전해 들은 바로는 삼포왜란 때, 웅천성이 스스로 무너진 원인이 죽은 웅천현감 한륜(韓倫)의 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웅천성을 목전에 두고 구원하지 않고 돌아간 김석철의 죄가 더 크다고 말한다. 돌이켜보면 홀로 살겠다고 한륜에게 몰래 나가게 해 달라고 간청하여, 한 모퉁이 성문을 열게 만든 고성현감 윤효빙의 죄가 가장 큰데도 불구하고 구원하지 않은 절도사 김석철이 가장 큰 욕을 듣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후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김석철은 삼포왜란 끝날 시기에 파견 나온 중앙 정부군과 함께 난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워 이후 관료로서 승승장구하였다. 하지만 백성의 원성은 김석철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씹어 먹을 석철이 놈(欲食錫哲之肉也)"이라는 유행어가 생겼다.

삼포왜란이 끝난 후, 당시 전쟁에 참여했던 분들이 고향에 돌아와 이 같은 사실을 전하면서, 경남 해안지역에서는 "석철이 X새끼" "석철이 같은 놈" "씹어 먹을 석철이 놈" 등이 가장 큰 욕이 되어 임진왜란 전까지 유행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김석철이보다 더한 놈들이 천지빼까리였기 때문에 이후 이 유행 욕설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 작품이 중요한 이유는 중앙정부의 정사(正史)에 기록된 삼포왜란의 역사적 사실 이외에, 실제 변방 거제도민이 겪은 가감없는 참전 이야기이기에 더욱 신뢰가 간다.

덧붙여 거제도에서는 현령(縣令) 오세한(吳世翰)이 군사 50여 명을 거느리고 왜적에 대항해서 큰 전과를 세우기도 했으나 결국 왜구들의 공세에 밀려 영등포가 함락당하고 거제도 해안 마을들은 노략질당했다. 정사(正史) 기록엔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지만 거제도가 가장 큰 피해 지역이었다.

 

◉ [저자 정황(丁熿) 선생의 유배지 거제도] 정황 선생은 천품이 정직하고 항상 효제충신(孝悌忠信)으로 입신의 근본을 삼았다. 또한 성리학적인 도의 정치를 주장하다가 결국 윤원형 일파의 세도에 희생양이 되었다. 그는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곤양에 유배되었다가, 1548년에 거제로 이배되었고, 1560년에 거제배소에서 49세로 죽었던 유학자이다. 약 13년 간 거제도 고현동 귀양살이 동안 약800편의 유배문학을 남긴 문인이자 올곧은 유학자였다. 거제도의 정황(丁熿 1512~1560) 선생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37세 때인 1548년부터 1560년 49세로 사망할 때까지 유배된 고현동 서문골 거제향교에서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일이 첫째이고, 다음은 거제도를 대표하는 유배문학인 중, 한 분이자, 불모지였던 거제도 문화를 한 단계 끌어 올리신 분이다.

 

● 다음 한문 산문(散文) 「한륜 웅천현감 전(韓熊川倫 傳)」은 조선전기 문신 유헌(遊軒) 정황(丁熿 1512~1560)의 작품이다. 이 전기(傳記)는 저자가 거제도에서 노인들이 실제 겪은 여러 삼포왜란 때의 이야기 중에 하나다. 내용은 크게 4단락으로 나뉘어진다.

첫 번째 단락에선, 1510년 삼포왜란 때 웅천현감 한륜(韓倫)은 외딴 웅천성에서 적을 맞서 싸웠다.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김석철(金錫哲)이 구원하려 왔다가 적의 형세가 두려워 창원으로 돌아가 관망했다. 한륜의 군사들은 점점 지쳐갔다.

두 번째 단락에선, 공사 일로 와 있던 고성현감 윤효빙(尹孝聘)이 몰래 나가게 해 달라고 간청하여 한 모퉁이 문을 열어 줬는데 그 틈에 여러 군사들도 덩달아 성 밖으로 나가버려 3일 만에 점령당했다. 한륜은 어쩔 수가 없어 절도사 진영에 달려가 군사를 빌려 성을 회복하려 했지만 김석철은 책임을 물어 군령에 따라 한륜의 목을 베었다.

세 번째 단락에선, 김석철은 조정에 보고하며 구원 못한 자신의 책임이 들통날까 봐 함구하게 하였다. 비록 한륜이 윤효빙의 청을 거절하지 못해, 군대가 무너지게 되었던 책임은 있으나, 처음에 죽음으로써 성을 지킬 것을 맹세하고 병사들을 독려해 3일간 성을 지킨 노력은 칭찬해야 한다. 다만 정(情)에 치우쳐 의(義)를 가볍게 여긴 것이 그의 부족함이었다.

네 번째 단락에선, 한륜은 한 번의 실기로 화를 당했지만, 김석철은 많은 병력에도 불구하고 머뭇거리다가 국토가 점령 당하고 백성이 죽었으니 더 큰 죄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철은 기회를 살피고 요행으로 부귀를 얻어 결국 승승장구했다. 이에 해안가 백성들에 의해 “씹어 먹을 석철이 놈”이라는 욕이 성행하게 되었다.

 

*삼포왜란 <한륜 웅천현감 전(韓熊川倫 傳)>* 유헌(遊軒) 정황(丁熿 1512~1560)

(1) 현감을 지낸 적이 있는 웅천현사 한륜(韓倫)은 대담하고 용감한 사람이었다. 1510년 삼포왜란 時, 제포의 여러 진영이 이미 다 함락당했다. 흉악한 칼날에다 독살스런 적의 기세가 고을까지 무리 지어 밀어닥쳤다. 오랑캐의 기세가 일거에 다 죽이고자하여 한륜은 외딴 성에서 적은 병졸로 적의 무리를 대적하며 있는 힘을 다하여 방어하고 성에 올라 오랑캐를 향해 활을 쏘았다. 한륜의 수중에서 오랑캐를 죽이는 자가 매우 많았다. 열 손가락(제 진영)이 모두 파괴되고 피가 온 산천에 젖어 가히 게으르거나 고단할 겨를이 없었다. 오랑캐도 또한 어려움이 마찬가지다. 당시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김석철(金錫哲)은 전례대로 구원하려 하니 그 명성이 대단했다. 한 도(경상도)의 병졸과 군마를 거느리고 (웅천성) 왔다. 이어 올바른 방법을 생각하며 적의 형세를 멀리서 헤아리다가 두렵고 겁이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구원할 생각은 물론 성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보전했다(창원으로 완구(玩寇, 적을 관망함)). 한륜은 적을 여러 번 지켜내었으나 다른 방법이 없어 근심할 때 (적이) 성을 공격하니 더욱 위급했다. 4월 8일 한륜의 군사들은 화살이 떨어지고 병사들은 지쳐가니 여하 간에 계책이 없었다.

(2) 마침 고성현감 윤효빙(尹孝聘)이 먼저 공사일로 와 있다가 포위당하고 있었는데, 한륜에게 간절히 빌면서 말하길, "제가 궁마의 효력도 없고 비록 도움이 되지 못하지만, 청컨대 문을 열어 한 모퉁이로 몰래 나가게 해주십시오"라고 했다. 한륜이 그러하라 하였는데 윤효빙이 도망하여 문을 닫기도 전에 여러 군사들이 모두 오합의 무리인지라, 일이 또 급하게 되어, 지킬 계책이 없었다. 흩어져 무너지니 다투어 나가게 되었고 돌이켜 멈추기가 불가하였다. 한륜이 허둥거리니 병사들이 성 밖으로 나가버려 성은 무릇 3일 만에 점령당했다.

한륜이 생각하길, 병마절도사 진영으로 급히 달려가 바라건대, 그 군사를 빌려 적을 물리치고 성을 회복하자 생각했다. 장수가 속죄하려 했으나 땅을 빼앗긴 죄로, 김석철은 한륜의 목을 베었다. 병마절도사 김석철은 잃었던 땅의 책임을 헤아려보고는 구원하지 못한 자기도 책임이 있어 이를 핑계 삼았고, 군대에서 한륜이 황급히 성을 버린 죄를 쉽게 처리하였다. 군령인 까닭에 죽인 것이다.

(3) 뒤이어 조정에 보고하여 함구하게 하였다. 아~ 한륜이 죄가 없다고는 못할 것이나, 갑자기 포위를 당한 때에 외딴 성에 원조가 없었고 사졸들은 태평시대에 익숙하여 한 사람도 적을 향해 활을 당기는 용기도 없었으며, 전군이 모두 구멍을 찾아 몸을 숨기려는 뜻만 있었다. 진실로 한륜의 성난 몸이 적에 임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죽음으로써 성을 지킬 것을 맹세했겠는가? 사졸들이 감동하여 감히 움직이지 않았던 것인데 어찌하여 불충하고 불효한 윤효빙의 도망가려는 청을 거절 거절하지 못해, 이로써 흔들리고 군대 상황이 무너지게 되었다.

그 당시 그때를 당했을 때, 아무리 병든 부모가 있어, 포위당해 있다하더라도 생각건대, 충과 더불어 효의 한쪽을 중시하기는 불가하다. 생각건대, 의(義)와 더불어 정(情)의 한쪽을 맞추기는 불가한데, 가벼이 결정에 이르지 못하면 그만이지만, 피난간 걸 도출하려 하여 이런 상황에서 은혜 입은 자로써 망극함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신하된 자로 그 병란을 돌아보지 못하고 그 자신이 도망하고자 했다면 가히 악인(惡人)이겠지만, 애석하게도 한륜을 보니 이것이 자신의 부족함인지라, 끝내는 스스로 화를 당했구나. 여러 겹으로 포위당해 있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여러 날을 버티어 싸웠으니 충성스런 노력에는 또한 가히 칭찬해야 한다.

(4) 한 번의 실기로 인해 결국 패전까지 이르고 마침내는 그 몸에 화를 당하게 한 것은 진실로 한륜의 죄이지만, 김석철은 많은 병력을 이끌고 지경의 가에서 머뭇거려, 우리의 국토와 백성이 점령당하고 죽었다. 진나라 사람들이 취한 술잔 속에서 월나라 사람들을 비웃는 것과 같이, 무고한 사람들이 화를 입었구나. 취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는 기회를 얻어 요행으로 부귀를 얻고자 일을 도모했구나. 위로는 국가를 저버리고 가운데로부터 제 몸을 저버렸고 아래로는 군사와 백성을 저버렸다. 곧 어찌 절도사 김석철의 무상(無狀)과 유사(有司)가 형벌을 잃음이 아닐까?

나는 바닷가 변방에 있지만 그 당시 늙은이로서, 당시 일을 겪고 생존해 있었던 노인들에게 상세히 들었다. 지금까지도, 바닷가 나라(조선)의 백성들은 한윤의 죄가 없진 않지만,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씹어 먹을 석철이"라고 한다.(원한이 뼈에 사무침을 이르는 말)

[故監熊川縣事韓倫 豪勇人也 庚午之亂 薺浦諸鎭旣皆淪陷 凶鋒毒焰 萃迫于縣 虜勢欲一擧殲之 倫以孤城 兵單敵衆 盡力禦之 登城射虜 倫手中虜斃者甚多 十指皆破 出血淋濕 猶無困怠 虜亦難之 時兵使金錫哲 例以救爲名 盡領一道兵馬 次于中道 遙料賊勢 畏怯不進 頓無來援意 賊度保無他虞 攻城益急 倫矢盡兵疲 計無如何 適固城縣監尹孝聘 先以公幹在圍中 懇乞于倫曰 聘無弓馬之效 雖在無補 請開門一隅潛去 倫然之 聘逃出未及閉門 諸軍士皆烏合之衆 事又急矣 無可守之策 離潰競出 不可回止 倫迫於衆出城 城凡三日而陷 倫意奔于兵使軍中 庶幾借其力 以滅賊復城 將贖失地之誅 錫哲料失地之責 分歸于己之不救 便於軍中數倫棄城之罪 殺之以徇 繼聞于朝以滅口 嗚呼 倫固不得無罪矣 當被圍時 孤城無援 士卒狃於昇平 無一夫挽弓向賊之勇 有全軍尋竇竄身之意 固畏倫之憤身臨敵 誓死守城 感而不敢動矣 豈得勉循一不忠不孝尹孝聘逃難之請 以搖我欲潰之軍情乎 當此之際 雖有病父母在圍 惟忠與孝不可以偏隆 惟義與情不可以單勝 則已不得輕決於避難導出 而況於不在罔極之恩者乎 而況於爲人臣不顧其難 而欲逃其身之可惡者乎 惜倫之見不及乎此 而終自禍也 雖然在重圍之中 屢日抗戰 忠勞亦可賞矣 因一失機 以至於敗 卒禍其身 固倫之罪也 而持重兵逗遛于境上以觀望 其視我土地人民之陷沒 若秦人之於越人 不取以爲念 乘時僥倖 以圖取富貴 上負國家 中負其身 下負軍民 則豈非錫哲之無狀 而有司之失刑乎 余在海裔 得其時故老遺存者聞其詳 至今海邦之民 莫不哀倫之死 而欲食錫哲之肉也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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