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일반 게시판

이름 모를 소녀‘, ’하얀 나비‘, ’님‘ 등 주옥 같은 노래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수 故 김정호(광주 출신)

작성자수돌이(최찬집)|작성시간26.06.20|조회수5 목록 댓글 0

 

 

오늘은 9쪽 분량의 글입니다. ’이름 모를 소녀‘, ’하얀 나비‘, ’님‘ 등 주옥 같은 노래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수 故 김정호(광주 출신) 님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분들께일독을 권합니다. 뿐더러 광주의 소리역사를 알고 싶은 분들께도 일독을 권유드립니다.

【산 아래 마을에 ‘꽃’ 핀다】

김정호의 하얀 나비, 세습적으로 물려받은 소리

왕버들을 뒤로하고 ‘무등산 역사길’은 정점을 향해 간다. 온통 푸르름으로 둘러싸여 있는 집, 환벽당環碧堂으로 길은 흐른다. 찻길을 따라 곧장 다리를 건너면 담양 땅이고, 다리 직전에 오른쪽 흙길로 들어서면 환벽당이다. 지금이야 증암천을 사이에 두고 광주와 담양, 충효동과 지실마을로 나뉘지만 예부터 이곳은 한 마을, 한 동네였다. 지곡의 소쇄원, 지실의 식영정, 충효동의 환벽당은 일동삼승 一洞三勝 혹은 성산삼승星山三勝으로 묶여서 불리었다.

다리 건너 담양으로 들어서면 정면의 거대한 기와건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만들어낸 거대한 유산을 전시한 곳이다. ‘한국가사문학관韓國歌辭文學館’이다. 담양가사문학관도, 남도가사문학관도 아닌 ‘한국’가사문학관이다. 일동삼승이 있는 이곳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산실이다. 고려 말을 그 기원으로 보고 있는 ‘가사歌辭’는 이곳에서 본격적인 문학장르로 성장하고 절정기를 맞는다.

가사문학관은 그것을 고스란히 증거한다. 이서李緖의 「낙지가樂志歌」부터 송순宋純의 「면앙정가俛仰亭歌」, 정철鄭澈의 「성산별곡星山別曲」 등 이 고장에서 전하는 18편의 주옥같은 가사가 가사문학관에서 흐르고 있다. ‘엇던 디날 손’들은 꼭 한 번 이곳에 ‘머믈’기를 권한다.

가사문학관의 전시실을 들고 날 때 정자와 연못이 있는 널찍한 마당을 지나게 된다. 그 마당의 한편에는 어떤 사람을 기념하는 조형물이 서 있다. 그런데 그 기념비의 주인공은 송순도 정철도 아니다. 박동실朴東實이라는 소리꾼이 그 주인공이다. 의외이고 다소 뜬금없다. 그의 기념비가 이곳에 세워진 내력은 이러하다.

1938년 무렵 박동실이라는 소리꾼이 이곳 지실마을의 정각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당시 박동실은 그저 판소리꾼 중의 하나가 아니었다. 박유전, 이날치, 김채만 등의 계보를 잇는 서편제의 명인이요 거목이었다.

같은 담양의 금성면에서 태어난 그는 아홉 살 때부터 소리를 시작했다. 세습적으로 소리를 물려오는 집안에서 태어난 박동실에게는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다. 제자 양성과 판소리 순회공연 등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던 그는 박석기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이후 그의 인생을 바꿔놓는 운명적 만남이었다.

박석기는 경성제국대학 불문과 출신이면서 거문고를 연주하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창극단의 매니저였고 창작극의 프로모터였으며 소리꾼들의 스폰서였다. 부유한 집안의 인텔리가 우연히 국악의 세계에 빠지게 됐고 국악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것에 자신의 인생을 바쳤다.

박동실의 지실행은 박석기가 이곳에 정각을 짓고 박동실을 모셔오면서 이뤄진 일이다. 의기투합이었다. 그들이 다른 많은 곳을 두고 왜 이곳에 터를 잡았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그들이 한 일은 과거 일동삼승의 선비들과 많이 닮았다.

그들은 먼저 후진양성에 힘썼다. 김소희, 한애순, 박지희, 한승호 등이 이곳에서 배웠다. 우리 귀에 익은 김소희는 안숙선과 오정해의 스승이었다. 지실은 현대 판소리의 전승에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그들은 판소리 사설의 한글화에도 공을 들였다. 주옥같은 우리 말이 가사를 통해 만개한 곳에서 판소리 사설에 우리 말과 글을 입히는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또한 지실은 판소리 창작의 왕성한 현장이었다. 박동실의 창작판소리는 당시의 현실에 단단히 뿌리내려진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작품들이었다. 〈이준 열사가〉, 〈안중근 열사가〉, 〈윤봉길 열사가〉, 〈유관순 열사가〉로 이어지는 ‘열사가’ 연작이 특히 그랬다. 열사들의 영웅적 모습을 찬양하면서도 그런 열사들이 다시 나타나지 않을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미래상을 제시하는 내용이었다.

해방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박동실은 북을 선택한다. 여러 정황과 그동안의 활동으로 보아 그의 월북은 자발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와 지실에서 함께했던 많은 동료들이 월북했고 친일파가 득세하는 남쪽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1960년경까지 인기 레파토리였던 〈열사가〉가 박정희의 등장과 함께 부를 수 없게 된 나중의 일까지 고려해보면 그의 월북은 본인에게는 좋은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한·일국교정상화’ 협상의 여파로 금지된 〈역사가〉는 어쩌면 박정희 군사정권의 첫 금지곡이었는지도 모른다.

북으로 간 명창 박동실의 삶은 어땠을까? 단편적으로 알려진 북에서의 활동과 이력을 볼 때 순탄했던 것 같다. 1950년대 초반에 ‘사회주의 음악예술인’이 되었고, 1956년엔 평앙음악무용대학에서 재직했다. 1957년 공훈배우, 1961년엔 인민배우가 되었다. 서편제의 맥을 이은 거장이었고 많은 제자를 배출하고 왕성한 창작을 했으나 월북과 함께 철저히 남쪽에서 금기시되고 지워졌던 박동실은 1968년 71세로 사망한다.

순탄해 보이는 그의 삶과는 별개로, 북한 체제에 대한 그의 판단과는 별개로 과연 소리꾼 박동실은 행복했을까? 북한은 김일성의 지시로 1960년대에 새로운 발성법과 창법의 개발, 악기개량 등으로 전통음악의 현대화에 착수했다. 1970년대에 등장한 북한의 혁명가극은 이 사업의 일정한 결과물일 것이다.

박동실의 순탄한 이력은 그가 이 사업에 일정한 역할을 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남도의 부드럽고 구성지면서도 애절함을 담은 서편제의 소리꾼은 뜨겁고 화려한 것 같지만 사실은 차갑고 건조한 사회주의 혁명가극에 심장이 뛰고 신명이 끓어올랐을까?

대부분의 월북자들처럼 남쪽에 가족을 남겼다. 소리를 물려받아 온 세습대로 남겨진 두 딸도 소리꾼이었다. 월북한 아버지를 둔 이 자매의 삶이 어떠했는지 알려진 바는 없다. 훗날 둘째 숙자가 자기 아들의 음악활동을 반대했던 것으로 보아 그리 순탄치는 않았을 것 같다.

박동실의 둘째 딸 숙자의 아들 이름은 조용호였다. 조용호는 전쟁 중인 1952년에 광주에서 태어나 수창초등학교 2학년 때 부모와 함께 서울로 이사갔다. 소리를 물려받아 온 세습의 뿌리는 깊고도 무서운 것이어서 조용호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음악을 시작했다. 아예 고등학교까지 그만둔다.

당시에 그가 북으로 간 소리꾼인 외할아버지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북한산 속에 들어가 음악에 몰두하는 모습은 득음得音을 찾아 어디든 가서 언제까지고 피를 토했던 소리꾼들과 다를 바 없었다.

이름과 얼굴에 앞서 그의 노래가 세상에 나갔다. ‘작은 새’, ‘사랑의 진실’, ‘저 별과 달을’ 등에 대중은 열광했다. 그리고 이 이름없는 작곡가는 1973년 ‘이름 모를 소녀’로 충격적인 데뷔를 한다. 김정호라는 이름으로. 젊은 층을 중심으로 열광적 지지를 받던 포크음악은 김정호의 등장으로 전 국민을 대상으로 영역을 넓혀버렸다. 마른 몸, 창백하고 우울한 얼굴에서 쏟아내는 호소력과 슬픈 멜로디는 모두를 매료시켰다.

김정호는 작곡과 노래가 모두 가능한 ‘싱어 송 라이터’였다. 1970년대 후반 산울림이 등장하기 전까지 김민기, 조동진, 신중현과 더불어 몇 안 되는 싱어 송 라이터였다. 확실히 그는 작곡에 있어서도 천재적이었다. 그가 다른 가수에게 써준 수많은 곡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김정호의 진가는 역시 노래였다. 똑같은 노래를 그가 부르는 것과 다른 사람이 부르는 것은 확연히 달랐다.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새롭고 독특한 목소리와 창법, 새롭고 독특한데도 대중의 보편적 공감을 끌어내는 소리였다. 그 특별한 소리의 근원이 곧 밝혀진다.

1974년 김정호는 ‘하얀나비’를 발표한다. 이 노래는 가요의 7음계를 버리고 5음계, 즉 궁, 상, 각, 치, 우라는 국악 음계로만 만들어진 노래였다. 북으로 간 외할아버지에 바치는 노래였고, 나는 ”박동실의 외손자다‘라는 선언이었다.

1975년 김정호는 1차 대마초사건으로 5년 동안 가수활동이 중단된다. 신중현, 이장희, 윤형주, 김추자 등이 이 사건에 함께 연루된 가수들이었다. 이 5년여의 기간은 김정호에게 암흑이었다. 암흑 속에서도 빛은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짝사랑해오던 ’이름 모를 소녀‘의 그 소녀와 결혼을 한다.

그러나 음악을 빼앗긴 상실감과 가난은 그의 육체와 정신을 서서히 무너뜨렸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 활동이 금지됐던 가수들이 모두 복귀할 때도 김정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결핵과 정신병 치료를 위해 입원과 요양을 반복하고 있었다.

1984년 김정호는 마지막 남아 있는 숨결을 모아 앨범을 발표했다. 숨쉬기조차 힘들어 녹음에 무려 5개월이 걸린 앨범이었다. 남은 열정을 국악에 바치겠다는 그의 염원을 조금이나마 풀 수 있었던 앨범이었다.

마지막 앨범에 수록된 ’님‘은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 상여가락을 연상시키는 선율에 한스런 탄식을 쏟아내는 노래였다. 이 곡에서 김정호는 아쟁, 가야금, 꽹과리 등을 직접 연주했다.

1985년 11월, 김정호는 세상을 등진다. 그의 나이 33세였다.

모든 요절夭折은 충격이고 오래도록 가슴을 시리게 한다. 예정됐던 짧은 생을 살다 간 것이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불가항력적인 그 무엇 앞에서, 특히 죽음 앞에서는 운명론자가 되곤 하는데 요절 앞에서는 그렇지 않게 된다.

빛나는 재능의 요절 앞에서는 특히 그렇다. 지금은 볼 수 없는 그 재능이 너무나 안타깝고 그럴수록 짧았던 재능은 더 빛나고 애틋하다.

『무등산 역사길이 내게로 왔다, 213쪽』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