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도 유배인의 향수(鄕愁)> 고영화(高永和)
향수(鄕愁)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나 그로 인해 생긴 시름"을 뜻하는 말이다. "향수(鄕愁)"란 단어를 떠올리면 정지용의 시가 먼저 생각난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 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빼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고향'이란 인간본성의 한 중간.... 마음 속, 자아(自我)의 정체성 속에서 잠자고 있었던 새로운 본성이 점철되어 깨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먼 변방, 거제도로 유배 온 분들은 산천은 물론 구름, 달빛, 꽃 그리고 계절의 변화를 보며, 애절히 고향을 그리워했다.
1) 이려(李膂, 1484년∼1512년)선생은 조선 중기 문신이고 본관은 고성이씨, 자는 강재(强哉)이다. 1504년 갑자사화로 인해 진도로 유배되었다가 1506년 거제로 이배되었고, 형 이윤(李胤)선생이 앞선 무오사화로 1498년~1500년까지 거제시 신현읍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다시 갑자사화로 연좌되어 거제도에서 아우들(이전,이육,이려)과 함께 유배되었다. 당시 거제도에는 이려선생의 4형제, 홍언승 선생의 4형제, 이행, 김세필, 최숙생 등이 함께 귀양살이 하며 교분을 나누었다. 1506년 봄에 거제로 이배되어 여러 유배자와 함께 꽃구경하다가, 그리운 고향 생각에 시를 짓게 된다(丙寅春遷 巨濟 與同竄諸君賞花有作).
共道花開便破愁 꽃 피면 시름없다 서로 얘기하였더니
看花愁思益悠悠 꽃 보니 시름 더욱 많아지네.
故園政在千山北 고향은 천산의 북녘에 있는데
今日春光似舊不 이날도 봄빛은 의구하였는지.
2) 죽천 김진규(竹泉 金鎭圭 1658∼1716)선생은 1690년경 거제면 동상리 녹반골에서 보름달빛 아래 떨어진 꽃을 보다가, "꽃 지니 달은 밝고(花落後月明)" 시제를 붙여 그리운 이를 떠올린다.
花開不見月 꽃 피니 달을 볼 수 없더니
花落月方圓 꽃 지니 보름달이 뜨네.
可惜花與月 꽃과 달이 서로 애달픈데
何不並嬋娟 어찌 아름답게 어울리지 못할까?
人生亦幾何 인생도 또한 거듭할수록
樂事苦難全 즐거운 일과 온갖 고생 다 겪는다네.
對月拾落花 달을 보며 떨어진 꽃을 주우니
惆悵久不眠 슬픔 이어져 잠 못 드누나.
꽃이 화려하게 피듯, 내가 좋을 때는 그대의 깊은 사랑을 미처 알지 못했는데 어려우니 그대를 그리는구나. 인생은 원래 희로애락이 있는 법. 꽃처럼 애처롭고 달처럼 사랑스러운 우리 사랑을 생각하니, 찢어질듯 애달픈 마음에 잠 못 들어, 날이 밝도록 보름달빛 아래서 떨어진 꽃을 쉼 없이 주워본다. 간절한 마음이 새록새록 느껴진다.
3) 새벽에 읊다(曉吟) / 김진규(金鎭圭 1658∼1716)
窓外雲峯隔幾重 창밖 구름 덮은 봉우리의 몇 겹 저편에
曉天微月透踈松 새벽하늘 희미한 달, 성긴 솔에 사무친다.
翛然一枕禪房夢 서둘러 베개에 누워 선방(禪房)에서 꿈꾸다가
驚起山僧禮佛鍾 놀라 일어나니 산중의 스님 예불 종소리네.
절간의 선방(禪房)에서 새벽하늘 저편 봉우리를 바라보니 성긴 소나무 사이로 희미한 달이 비춘다. 뒤척이다가 서둘러 베개에 누워 선잠을 들었다. 꿈속에서 그리운 가족을 만나고, 대궐로 들어가 온갖 부귀영화를 누린다. 예불 종소리에 놀라 깨워나 보니 산중의 절간이다. 그의 옆에 스님이 미소를 지으며 “인생이란 본시 이런 것이오”라고 말하는 듯하다. 선생은 시구 속에서 “부귀의 무상함”을 느낀다. "일침황량(一枕黃粱)"이란, 당나라 심기제의 침중기에 나오는 표현을 슬쩍 빌려 와서 자신의 생각을 담아냈다.
4) 누워 듣는 시냇물 소리(卧聽溪聲) / 김진규(金鎭圭 1658∼1716)
窓外溪流雨後聲 비온 후 창밖의 시냇물,
隨風觸石自相鳴 따라온 바람에 부딪히는 돌, 소리 울린다.
可憐嗚咽終宵響 가련하게 흐느끼는 소리, 밤새도록 메아리치며
似訴騷人去國情 시인에게 하소연하듯, 고향 떠난 이내 마음.
비가 그친 후에 불어난 시냇물은 우렁차게 시끄러운 굉음을 낸다. 바람은 아직도 세차게 불고 있는데, 어쩐지 그 소리가 귀양살이 나그네의 향수를 대변하듯 밤새도록 흐느낀다.
5) 집에서 보내온 편지로 오랫동안 답답했던 마음을 풀었다(家信久斷遣悶). / 죽천 김진규(竹泉 金鎭圭)
鄕國孤雲外 고향의 외로운 구름 넘어 온
音書閱月稀 편지에 기뻐 한 달을 보냈으나
一心長自苦 언제나 괴로운 마음뿐이라,
十口竟何依 숨을 열 번 내쉬니 진정이 된다.
乾鵲虛占喜 까치 울어도 기쁜 소식 헛되고
春鴻未伴歸 봄 기러기 짝지어 돌아가지 못하구나.
茫茫愁萬段 끝없이 조각난 수많은 근심에
獨立對斜暉 홀로 서서 저문 햇살 마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