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천재 대경세가 대모략가 야율초재(耶律楚材)의 모든 것
야율초재(耶律楚材)
요약 몽골 제국 초기의 공신으로 오고타이의 즉위를 도와 중서령(中書令)이 되었고 금나라가 멸망하자 화북(華北) 지역의 실정에 적합한 정치를 폈다. 세제(稅制)를 정비하여 몽골제국의 경제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출생-사망: 1190 ~ 1244 자: 진경 시호:문정 국적: 몽골제국
주요저서
《담연거사집》 《서유록》
자 진경(晉卿). 시호 문정(文正). 요(遼)나라의 왕족 출신. 대대로 금(金)나라를 섬겼으며, 천문·지리·수학·의학·유교·불교·도교(道敎)에 통달하였다. 1215년 몽골군이 연경(燕京: 北京)을 점령하자 칭기즈칸에 항복, 정치고문이 되어 서역(西域) 원정에 종군하였다. 오고타이의 즉위를 도와 중서령(中書令)으로 중용되었으며, 1234년 금나라가 멸망하자 화북(華北) 지역의 실정에 적합한 정치를 폈다. 군정(軍政)과 민정(民政)을 분리하여 군·관(軍官)이 민정을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세제(稅制)를 정비하여 몽골제국의 경제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시인으로서도 뛰어나 문집 《담연거사집(湛然居士集)》(14권)과, 서역에 종군했을 때의 견문기인 《서유록(西遊錄)》 등이 있다. 아들 주(鑄)도 세조 쿠빌라이를 섬겨 고관이 되었는데, 특히 시인으로 유명하였다.
두산백과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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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율초재(耶律楚材)
천하를 정벌하고, 지혜로 원나라를 돕다
목차
허심탄회하게 대책을 강구하다
나라를 바로 다스리고, '한화'를 이끌다
충정과 지혜를 다하다
야율초재는 금나라 장종 명창 원년인 1199년에 태어나 몽고 내마진후 3년인 1243년에 죽었다. 자는 진경(晉卿)이고 거란 황족 후예다. 아버지 야율이(耶律履)는 금나라 시대의 학자로 재상까지 지냈다. 야율초재는 30년 가까운 관직생활을 통해 원 태조(칭기즈칸), 예종(태조의 넷째 아들 토레이), 태종(태조의 셋째 아들 오고타이) 그리고 내마진후(乃馬眞后, 태종의 여섯째 황후)까지 세 황제 4대를 거치면서 덕과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는 용감하게 몽고를 위해 서역을 원정했으며, 남방 출정에 군을 이끌면서 각종 책략을 제출하여 수준 높은 군사모략을 선보였다. 이로써 원이 통일 왕조를 이루는 데 피와 땀을 다 바쳤다. 그는 군주를 보좌하여 열심히 나라를 다스렸으며 유학의 부흥을 제창하고 법을 제정했다. 생산발전과 경제번영에 힘을 기울여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몽고의 '한화(漢化)'를 위한 길잡이 역할까지 해냈다. 그는 불후의 업적을 통해 걸출한 정치적 재능과 경제적 식견을 드러냈다. 일을 할 때는 크고 자잘한 것을 따지지 않고 국가와 백성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면 충심을 다했다. 군주에게는 강력한 충고와 능숙하고 곧은 직언으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함으로써 국사에 충성과 지혜를 다하는 모범을 남겼다.
야율초재는 중국 역사상 보기 드문 지혜와 모략을 갖춘 명 재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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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심탄회하게 대책을 강구하다
야율초재는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어머니 양씨는 글도 읽을 줄 알고 예의에 밝은 여성이라 야율초재에게 좋은 교육을 시켰다. 게다가 야율초재는 타고난 총명함과 매일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노력하는 자세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는 도박이나 잡기 따위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들보다 빨리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청년기에 접어든 야율초재는 벌써 천문·지리·율력·산술을 비롯하여 불교와 도교 그리고 의학·점복 등에 상당한 조예를 갖추기에 이르렀다.
그는 유학을 깊이 있게 연구했고 불교에도 큰 관심과 수준을 보였다. 여기에 악기 연주와 노래까지 그야말로 다재다능 그 자체였다. 그는 일찌감치 충분히 한화된 봉건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자유자재로 한문을 읽고 쓸 줄 알았다. 게다가 문화적 소양이 높고 한 번 쓰면 거의 고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문장력이 뛰어났다. 그의 이러한 박학다식은 훗날 그가 큰 공을 세우는 데 훌륭한 기초로 작용했다.
하지만 야율초재는 좋은 때를 만나지 못했다. 그는 혼란스러운 사회환경에서 성장했다. 당시는 중국 전체가 원에 의한 대통일을 이루기 직전의 열국이 서로 다투던 단계였다. 따라서 여러 세력이 서로 으르렁대며 하루가 멀다 하고 전쟁을 벌였다. 북방에는 새로 일어난 몽고족이 칭기즈칸의 통솔 아래 야심만만하게 끊임없이 금나라를 공격하고 있었다.
남방에서는 강남 한 쪽에 치우쳐 있는 남송 왕조가 단 한시도 잊지 않고 북방의 잃어버린 땅을 찾기 위해 금나라에 계속 도전하고 있었다. 서방에서는 감숙성과 섬서성 일대에서 나라를 일으킨 서하가 호시탐탐 중국에 대해 야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들은 남송과 결탁하여 금나라 서북 지역을 공격했다. 금나라는 중원을 차지한 채 북중국을 통치하고는 있었지만 국력이 갈수록 쇠퇴해져 몸이 마음을 따르지 못하고 있었다.
17세에 벼슬에 나간 뒤 25세 때 금나라 수도 연경이 함락될 때까지 야율초재는 거의 소리소문 없이 8년을 보냈다. 가슴에서는 천하를 품고 남을 의지가 타오르고 있었지만 행동으로 표출하기는 어려웠다. 연경이 함락된 뒤 야율초재는 금나라의 기세가 이미 기울었다고 판단하고는 불교에 귀의했다. 적어도 당시로서는 자신의 뜻을 펼칠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만송 노인(행수)을 찾아 스승으로 모시고 불가의 교리를 배웠다. 사람과의 관계를 끊고 집안일까지 내팽개친 채 일심으로 수양에 몰두했다. 차디찬 비바람이 불어도 뜨거운 태양빛 아래에서도 그의 수양은 중단되지 않았다.
야율초재는 마침내 선의 참뜻을 깨닫고 연경성에서 이름난 불교 신도가 되었다. 3년에 걸친 힘겨운 수련을 거치면서 야율초재의 의지는 더욱 굳어졌고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원대한 포부가 우뚝 섰다. 그는 피나는 수양을 통해 두 가지 큰 준비를 갖추었다. 첫째 무엇인가 잘 되지 않을 때는 간단하고 쉬운 방법으로 마음을 다스린다. 둘째 통달하면 인의의 방법으로 사해를 다스린다. 그는 포부를 펼칠 기회를 기다렸다.
"갇혀 있는 용은 언젠가는 승천한다." 칭기즈칸 3년인 1218년, 마침내 기회가 왔다. 연경을 장악한 칭기즈칸에게는 여러 방면의 인재가 절실했다. 야율초재가 보기 힘든 인재라는 정보를 들은 칭기즈칸은 바로 사람을 보내 그를 맞아들여 치국의 큰 계책에 대해 자문했다.
은둔생활을 하던 야율초재는 영웅 칭기즈칸이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에 마침내 자신의 뜻을 진취적으로 펼칠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고는 흔쾌히 부름에 응했다. 칭기즈칸은 야율초재가 금나라에게 멸망당해 대대로 금과 원수지간인 요나라 종실의 후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만난 자리에서 "요와 금은 대대로 원수였다. 지금 내가 너를 위해 원한을 씻어주겠다"며 야율초재의 관심을 끌려 했다.
그런데 야율초재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그건 지난 일입니다. 저의 할아버지께서 이미 금나라에서 벼슬을 했는데 어떻게 군주를 원수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칭기즈칸은 이미 한 차원을 뛰어넘은 야율초재의 대답에 아주 만족해 하며 이런 인물이라면 믿고 의리의 정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칭기즈칸은 야율초재를 중요하게 쓸 생각을 했다.
야율초재는 인품만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외모도 매력적이었다. 고상한 수염과 낭랑한 목소리, 준수한 자태 등 모든 것이 칭기즈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후 칭기즈칸은 늘 야율초재를 '오도살합리'라고 부르며 살갑게 대했다. 몽고어로 '오도살합리'란 '긴 수염'이라는 뜻이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격변의 시대에 야율초재는 마침내 세상을 덮을 자신의 재능을 펼칠 기회를 찾았다.
그러나 새로 귀순한 유생이 무력으로 천하를 취하려는 군사 귀족들 틈바구니에서 신임을 얻고 위치를 굳히기란 쉬운 일이 결코 아니었다. 상팔근이라는 서하 사람이 활솜씨로 칭기즈칸의 총애를 얻었다. 무식한 무인이 최고 권력자의 총애까지 얻고 보니 교만이 하늘을 찔렀다. 그는 문인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런 그가 한번은 야율초재가 있는 자리에서 칭기즈칸에게 "지금은 무력을 사용할 때입니다. 야율초재 같은 약해빠진 유생이 무(武)에 대해 뭘 알겠습니까. 아무짝에 쓸모없지요"라고 말했다. 야율초재라고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날카롭게 상대의 말을 되받아서 "활은 활을 만드는 기술자가 있어야 합니다. 천하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활을 만드는 장인은 필요가 없답니까?"라고 쏘아붙였다. 칭기즈칸은 야율초재의 기지 넘치는 말솜씨와 날카로운 논리에 탄복하여 더욱 그를 중시했다. 칭기즈칸은 아들 오고타이에게 "이 사람은 하늘이 내게 주신 선물이다. 앞으로 나랏일과 군대 일은 모두 그에게 맡겨 처리하도록 해라"고 말했을 정도다.
몽고는 태조(칭기즈칸) 14년(1219)부터 20년(1225)까지 저 유명한 서방 정벌에 나섰다. 그 목적은 주로 중앙아시아 화랄자모를 겨냥한 출동이었다. 출병하던 때는 6월 여름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광풍이 몰아치고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더 놀랍게도 대설이 내려 무려 석 자나 쌓였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출정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며 웅성거렸고, 태조도 무슨 징조인지 몰라 의심을 가졌다. 태조는 즉각 야율초재를 불러 길흉을 점치게 했다.
상당히 높은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던 야율초재는 천체운행과 계절의 변화에 따른 이치를 잘 알고 있었다. 또 월식날짜와 역법을 수정하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단순히 천지 대자연의 규칙만 가지고 하늘의 상태를 해석할 수 없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가? 남다른 정치적 모략을 갖춘 인물이 아니던가?
그는 칭기즈칸을 포함한 몽고인들이 천문에 대해 무지하다는 점과 이들이 기상현상에 대해 특별한 미신을 갖고 있다는 점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여기에 화랄자모를 정벌하여 지난날의 수치를 갚고자 하는 이들의 복수심 등을 고려하여 "겨울의 살기가 한여름에 보인다는 것은 하늘의 뜻을 우리가 받들어 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좋은 징조입니다!"라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칭기즈칸이 바라던 것이 이런 길조가 아니던가. 10만 대군은 벼락같이 화랄자모를 향해 진격했다. 1222년 몽고군은 화랄자모와 중앙아시아를 정복했다. 칭기즈칸은 서방 정벌에서 대승을 거둔 것을 야율초재의 점괘와 연계시켰다.
1224년, 칭기즈칸은 군대를 돌려 돌아왔다. 서방 정벌 때 출병을 거절한 서하와 서하와 동맹을 체결한 금나라에 대한 징벌을 위해 칭기즈칸은 서하 정벌을 결정했다. 1227년 6월, 서하는 투항했다. 성이 무너지던 날 몽고군은 여자와 재물을 약탈하느라 정신없었다. 하지만 야율초재는 책 몇 권과 대황이라는 약재만 챙겼을 뿐이다. 당시 동료들은 이런 그의 행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이윽고 여름이 지나고 겨울로 접어들었다. 비바람을 맞으며 노숙하던 병사들이 이런저런 병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때 야율초재가 대황으로 만든 약으로 병사들의 목숨을 여럿 구했다. 그제서야 동료들은 야율초재의 남다른 지혜와 식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하가 망함으로써 몽고의 서쪽 근심거리가 사라졌다. 동시에 금나라는 자신들의 조력자를 잃었다. 오고타이 3년인 1231년 몽고는 오랜 휴식 끝에 다시 남하하여 금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한 군사행동에 착수했다. 몽고 대군은 금나라의 변경을 포위하여 공격했으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쳤다. 쌍방은 16일 밤낮에 걸쳐 혈전을 벌였고, 성 안팎으로 백 만에 이르는 사상자가 났으나 변경은 함락되지 않았다.
그뒤 몽고군은 남송과 연합하여 금나라를 협격함으로써 비로소 효과를 볼 수 있었다. 변경이 함락되기 전 몽고군의 장수 속불대는 특별히 태종 오고타이에게 도성을 완전 도살하자고 건의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야율초재는 급히 태종의 막사로 달려와 "군사들이 해마다 계속되는 정벌전쟁으로 피흘리며 희생한 목적은 토지와 백성을 얻기 위해서였는데, 땅만 얻고 백성을 얻지 못한다면 땅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라고 말했다.
이 말에 태종은 머뭇거리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첫 건의가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자 야율초재는 재빨리 모략가의 또 다른 면을 발휘했다. 그는 개인적 욕심이란 측면을 이용해 태종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변경은 한 나라의 수도입니다. 솜씨 좋은 기술자와 진기한 문물이 이곳에 다 모여 있습니다. 그런데 도성을 도살해버리면 칸께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실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태종은 이 말에 마음이 움직여 성에 진입한 뒤 금나라 황족 완안씨들만 잡아죽이고 나머지는 모두 사면했다.
이렇게 변경 도성에 살고 있던 140만 백성들은 야율초재의 지혜로운 건의로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로부터 점령지에 대해 관례적으로 행하던 대도살의 풍조가 몽고군 내에서 사라졌다.
몽고가 금나라를 멸망시키자 삼국 정립의 형세는 깨졌다. 몽고와 송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몽고 통치계급 내부에서는 한족과 서역 이슬람족 사이의 모순을 부추겨 서로를 공격하게 하여 몽고는 앉아서 어부지리를 얻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야율초재는 진지하게 형세를 분석하고 이해득실을 가늠하여 자신의 의견을 제출했다.
그는 남송과 서역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군대가 움직이기에는 너무 힘들기 때문에 서로 상대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아무리 민족간에 모순과 갈등이 심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부딪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남송을 멸망시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므로 반드시 병력을 집중하여 정면 공격과 우회 기습을 서로 섞는 전략전술이 필요하다. 따라서 야율초재는 남송을 멸망시키기 위한 한결 성숙한 방안을 제기했다.
많은 논란 끝에 몽고군은 야율초재의 방안을 채택했다. 그리하여 전군을 정돈하여 일제히 빠른 속도로 남송을 전략적으로 포위했고, 1257년 남송은 결국 멸망했다.
나라를 바로 다스리고, '한화'를 이끌다
나라를 다스리는 야율초재의 능력과 재능은 10년에 걸친 원정을 거쳐 태조 22년(1227년) 전쟁이 끝나고 연경으로 돌아온 뒤 비로소 펼쳐지기 시작했다. 군사조직을 위주로 한 몽고제국은 사실 서방에 대한 원정 때문에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제도와 법률 등을 미처 정비하지 못했고, 또 몽고에 귀순한 주·군에 대한 관리도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다 보니 지방 관리들이 재물 약탈은 기본이고 처녀를 겁탈하고 멋대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 다반사였다. 땅을 빼앗는 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연경의 유후장관 석말함득복은 특히 유별났다. 그는 탐욕의 화신이었고, 사람 죽이기를 재미로 삼았다. 저잣거리에는 늘 사람 목이 넘쳐날 정도였다.
이런 정보를 입수한 야율초재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는 몽고의 장기통치를 다진다는 점에 착안하여 해서는 안 될 금지조항들을 즉각 발표했다. 각 주·군에서 황제의 옥새가 찍힌 문서가 없으면 함부로 백성들의 재물을 징발하지 못하게 했으며, 죄수에게 사형 판결을 내릴 때는 반드시 국가에 보고하고 허락을 받도록 했다. 이 명령을 어기는 지방 관리들은 절대 사면 없이 처형시킨다는 처벌조항이 발표되었다. 명령이 내려가자 각지의 폭정이 줄어들고 사회는 점차 질서와 안정을 찾아갔다.
당시 연경성은 국도이긴 했지만 사회질서는 매우 혼란했다. 매일 저녁에는 도적들이 소가 끄는 수레를 몰고 부잣집을 털었다. 반항하면 사람까지 죽이고 빼앗아갔다. 누구도 이들을 막거나 추궁하지 못할 정도였다. 보아 하니 이 도적들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간 되레 화를 당할 정도의 인물들이었다.
이런 소식을 들은 예종은 야율초재 정도가 되어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야율초재와 탑찰아를 보내 처리하게 했다. 야율초재는 자세히 탐문하고 조사하여 도적들의 이름을 알아냈다. 알고 보니 연경의 책임자 유후의 친족과 권문세가의 자제들이었다. 야율초재는 손톱만큼도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이들을 일망타진하여 모조리 감옥에 가두었다. 이들 집안에서는 탑찰아에게 뇌물을 먹여 위기를 모면해보려 했다. 이 사실을 안 야율초재는 원칙과 이해득실 관계를 가지고 탑찰아를 설득했고, 탑찰아는 겁을 먹고 야율초재의 말에 따라 법대로 이들을 처리했다. 결국 16명에 이르는 흉악범들이 목이 잘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로부터 도적들은 종적을 감추었고, 연경의 백성들은 안정을 되찾고 건전한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황제 자리를 순조롭게 교체하기 위해 국가의 주요 참모로서 야율초재는 많은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칭기즈칸이 세상을 떠나자 몽고의 관례대로 먼저 그 넷째 아들 톨레이가 국정을 대리했다. 그러나 태조의 유언은 황제 자리를 셋째 아들 오고타이에게 물려주라는 것이었다. 야율초재는 잘 알고 있었다. 칸 자리가 허수아비 같은 인물로 채워지거나 잘못 전해지면 나라와 백성들에게 그 피해가 돌아간다는 사실을. 예로부터 최고 권력을 앞에 두고 골육간에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던가. 그리하여 야율초재는 오고타이를 재촉하여 하루 빨리 최고 부족회의인 '쿠릴타이'를 열어 칸 자리를 결정하라고 했다.
회의가 40일을 넘었는데도 논의는 결말을 보지 못했다. 야율초재는 회의가 더 지연되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여 직접 톨레이를 찾아가 "칸을 추대하는 일은 종묘사직의 대사이니 하루라도 빨리 확정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톨레이는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으니 며칠 더 기다려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이 말에 야율초재는 단호하게 "이번 기한을 넘기면 더 이상 길일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야율초재는 몽고 귀족들의 미신을 교묘하게 이용했고, 마침내 톨레이는 오고타이의 등극 날짜를 결정했다.
황제의 위엄을 살리고 존엄과 비천함의 예의를 제정하기 위해 야율초재는 심혈을 기울여 황제 즉위식을 준비했다. 먼저 오고타이의 형인 차가타이에게 가족관계로는 형이지만 군신관계로는 신하인 만큼 정중하게 무릎을 꿇고 신하의 예를 갖추어줄 것을 당부했다. 차가타이가 이에 따르면 나머지는 볼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차가타이는 야율초재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인정했고, 즉위식에서 동생 앞에 무릎을 꿇고 신하의 예를 올렸다. 이로써 즉위식은 아주 순조롭게 끝났고, 차가타이는 야율초재에 대해 "당신이야말로 사직을 지키는 공신이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몽고는 원래 초원의 유목민족으로 씨족사회에서 계급사회로 넘어가는 발전기에 놓여 있었다. 칭기즈칸이 건립한 몽고제국은 막강한 군사와 무기에 의존하여 영역을 넓히고 엄청난 땅을 정복했다. 그러나 몽고제국이 문명 수준이 높은 중원과 강회 지역을 다스리려면 정치·경제·문화 등에서 심각한 개혁을 추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탁월한 사상가이자 모략가인 야율초재는 이 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오고타이에게 옛 말을 인용하여 "천하를 말 위에서 얻을 수는 있지만 말 위에서 다스릴 수 없습니다"라고 충고했다. 비교적 깨어 있는 의식을 지녔던 오고타이는 '한족의 법'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야율초재는 오고타이의 유력한 보좌인이 되어 개혁을 진행하고 '한화'를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유익한 건의를 수도 없이 제기하여 뛰어난 정치·경제 정책과 제도를 제정했다. 오고타이는 그의 의견에 따랐다. 당시 야율초재가 제안한 정책과 제도를 요약해보면 아래와 같다.
첫째, 약탈이나 도살 같은 좋지 못한 습속을 폐지하여 백성과 포로의 목숨을 구했다. 이로써 무수한 백성을 살렸을 뿐 아니라 중국인의 몽고에 대한 두려움과 복수심리를 많이 해소시켰다.
둘째, 땅을 쪼개 백성을 나누려는 움직임을 막고 중앙집권을 수립했다. 몽고는 칭기즈칸이 건국한 이래 땅을 나누고 백성을 가르는 분봉제를 시행해왔다. 야율초재는 이러한 몽고식의 저급한 통치방식을 막고 권력이 황제와 중앙에 집중되는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했다.
셋째, 유교를 존중하고 교화를 제창했다. 야율초재는 중국의 숱한 사상들 중 유가가 역대 왕조의 혼백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칭기즈칸 이후 줄기차게 이 점을 강조하여 통치자들을 세뇌했다. 그는 "기물을 만드는 데는 솜씨 좋은 장인이 필요하고, 이룩한 나라를 지키는 데는 유가의 인재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앞세워 유가에 정통한 인재를 추천했다. 이로써 많은 유생들이 벼슬에 나서 나라를 다스렸고, 이로써 몽고의 관료문화가 크게 바뀌었다. 문무가 조화되는 전환점이 마련되었다.
넷째, 법을 만들고 집행하여 폭정을 막았다. 법을 모르던 몽고족들을 법으로 다스리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엄청난 크기의 제국을 통치하는 길은 법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야율초재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통치자를 설득하여 각종 법령을 만들고 그것을 엄격하게 집행하게 하여 기강을 세워나갔다. 야율초재가 내세운 법치는 관리의 탐욕과 폭정을 억제했으며 사회질서를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다섯째, 퇴보를 막고 농업을 발전시켰다. 오고타이가 즉위한 뒤 몽고 귀족인 별질이란 자가 "중원 지구의 한인들은 목축업을 몰라 우리에게 별다른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니 전부 죽이고 그 땅을 목장으로 만드는 것이 낫겠습니다"라는 어처구니없는 건의를 올렸다. 이에 야율초재는 "천하는 넓고 사해는 풍요로워 각지 백성들이 모두 자신의 생산활동에 부지런히 힘을 씁니다. 하지만 정책이 좋아야만 그들에게 많은 부를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야율초재의 말을 알아들은 오고타이는 "그대의 말대로 한다면 국가 수입이 늘 것이니 사람은 죽여서 뭐하겠는가"라며 야율초재의 의견에 손을 들어주었다. 이렇게 해서 하마터면 중원 농업경제를 파괴할 뻔한 재난을 막았다.
여섯째, 조세제도를 수립하여 군사적 약탈을 대신했다. 무를 숭상하던 몽고족은 가는 곳마다 약탈을 일삼았다. 세금이란 관념조차 없었다. 그러다보니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비용을 적절하게 댈 수 없는 상황은 필연적이었다. 이에 야율초재는 오고타이에게 건의하여 하북 일대에 먼저 세금을 거두는 제도를 만들었다. 1231년 10로를 통해 거둔 금·은·옷감·농산물 등 현물세를 포함한 세금이 산더미처럼 궁중에 쌓인 것을 본 오고타이는 놀라움과 기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고는 야율초재를 향해 "그대가 내 곁을 떠나지 않고도 나라에 필요한 물자를 이렇게 많이 거두어들이다니, 누가 감히 그대에 비할 수 있겠는가!"라며 야율초재를 칭찬했다.
일곱째, 포로를 석방하여 민심을 안정시켰다. 금나라를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몽고는 엄청난 수의 포로를 획득했다. 하지만 포로들은 호송 도중 70퍼센트 가까이 도망쳤다. 화가 난 오고타이는 도망치는 포로는 가족까지 함께 죽이고 심지어는 동네 사람에게까지 공동 책임을 물겠다는 명령을 내렸다. 민심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는 이치를 잘 알고 있던 야율초재는 오고타이에게 "중원이 평정되었으니 모든 백성이 다 황제의 백성입니다. 그들이 도망쳐봐야 어디로 가겠습니까. 어째서 포로 하나 때문에 수백 명의 목숨을 빼앗는 것입니까"라고 건의하여 명령을 취소시켰다.
여덟째, 고리대금을 억제하고 지나친 착취에 반대했다. 나라가 넓어지자 상인들이 활약하고 고리대금업이 성행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가난한 백성들은 빚에 시달렸고, 이는 또 심각한 착취현상으로 발전했다. 이에 야율초재는 고리대금의 이자율을 제한하고, 빚을 진 백성들에게는 관에서 빚을 대신 갚아주었다. 또 상인과 결탁하여 엄청난 뒷돈을 챙기던 관리들을 숙청했다.
이렇듯 야율초재의 피땀어린 노력으로 몽고 통치자들은 중원의 고도로 발전된 봉건제도에 빠르게 적응했다. 이렇게 해서 전쟁으로 생긴 파괴와 상처를 회복하고 봉건경제는 정상적인 발전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
충정과 지혜를 다하다
야율초재는 치국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익을 주는 일 한 가지를 더 하는 것보다 해를 주는 일 하나를 제거하는것이 낫다. 한가지 일을 더만드어내는 것보다 나쁜일 한가지를 줄이는것이 낫다.
참으로 진취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는 국가와 백성들에게 이익이 된다고 판단하면 어떤 방법이라도 생각해내고 최선을 다해 실행에 옮겼다. 그의 생각은 군왕에 의해 대부분 접수되었고, 때로는 군왕 본인에게도 영향이 미쳤다. 따라서 지배층은 그가 어떤 의견을 낼 때마다 조바심을 냈고, 때로는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때마다 그는 자신의 지혜와 모략을 교묘하게 운용하여 때로는 강경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대응하면서 갖은 방법으로 자신의 주장을 실현시켰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과 군왕 사이의 친밀한 관계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그랬기 때문에 칭기즈칸에서 오고타이에 이르는 30여 년 동안 별 다른 충돌 없이 이들과 잘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이다.
1223년 여름, 칭기즈칸이 화랄자모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둔 뒤 철문관에 주둔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 지역 사람이 뿔 하나에 몸은 사슴 같고 꼬리는 말 같으며 온몸이 초록색에 마치 사람 소리같이 우는 괴수 한 마리를 잡아 바쳤다. 칭기즈칸은 하도 신기해서 야율초재에게 어떤 동물인지 물었다. 야율초재는 서방 정벌에 성공했으니 이제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대전제에서 출발하여 옛날 책에 근거하여 이 동물에 대해 이렇게 소개했다.
"이 짐승은 각단이라고 합니다. 이 동물이 출현했다는 것은 상스러운 조짐입니다. 이 동물은 사람의 말을 할 수 있고, 살생을 아주 싫어합니다. 방금 전 울음소리는 칸에게 빨리 귀국하는 것이 옳다는 뜻으로 한 것입니다. 황제는 하늘의 큰아들이고, 천하 백성은 모두 황제의 자식입니다. 원하옵건대 칸께서는 하늘의 뜻을 받들어 천하 백성들을 보살피십시오."
이 말에 칭기즈칸은 즉각 서방 정벌을 끝내고 회군을 명령했다.
오고타이 8년인 1236년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오고타이가 궁실의 미녀를 선발하여 후궁으로 삼겠다는 조서를 내렸다. 이에 야율초재는 지금도 미녀가 넘치는데 또 뽑는다면 백성들을 힘들게 하지 않을까 걱정된다면서 명령의 집행을 거부했다. 오고타이는 처음에는 몹시 화를 냈지만 잠시 생각한 다음 야율초재의 마음을 헤아리고 더 이상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몽고족은 술자리를 성대하게 베푸는 풍속이 있었다. 오고타이도 이 풍속을 버리지 못하고 수시로 술판을 벌여 대취하곤 했다. 이때마다 야율초재는 "술은 철기도 부식시킵니다. 하물며 인간의 오장육부야 오죽하겠습니까"라며 충고하여 마침내 태종을 깨닫게 만들었다. 태종은 스스로 음주를 절제했을 뿐 아니라 신료들에게도 하루에 석 잔 이상은 못 마시도록 권고했다. 군신간에 이러한 도타운 정이 있었기에 오고타이는 야율초재에게 공손하게 술을 올리며 "그대가 없었더라면 중원은 절대 안정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오. 내가 지금 편히 잠들 수 있는 것도 다 그대의 공로 덕분이오"라고 말할 수 있었다.
몽고제국은 법 집행이 건전하게 실행되면서 갈수록 발전했다. 하지만 기득권을 누리다가 각종 제한을 받게 된 수구세력들은 야율초재에게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품었다. 그래서 온갖 비방과 유언비어를 퍼뜨려 야율초재를 해치려 했다. 하지만 야율초재를 태산같이 믿고 있던 오고타이는 이런 일들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무고한 자들을 크게 나무랐다. 그 중에서도 연경의 유후장관 석말함득복의 유언비어는 정말 지독하여 오고타이는 그를 잡아들여 야율초재에게 직접 심문하도록 했다. 하지만 야율초재는 개인적인 원한보다는 나랏일이 더 중요하다며 나중에 처리해달라고 부탁했다. 오고타이는 관대한 야율초재의 인품에 다시 한번 감동했다.
야율초재는 군주에게 충고할 수 있는 기회는 절대 놓치지 않았다. 한번은 오고타이가 총애하는 양유 등이 살인범을 감싸다가 야율초재에게 체포되어 심문을 당한 일이 있었다. 이들은 온갖 비방으로 야율초재를 헐뜯었고, 오고타이도 이 말을 믿고는 불문곡직하고 야율초재를 잡아들이게 했다. 그리고 얼마 뒤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신이 지나쳤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야율초재를 석방하게 했다. 이에 야율초재는 오고타이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신은 조정의 대신으로 폐하를 보좌하여 국정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저를 잡아들이라고 하신 것은 저에게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문무백관 앞에서 저의 죄가 무엇인지 선포하셔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지금 저를 석방하라고 하시니 이는 저에게 죄가 없다는 뜻 아닙니까. 이렇게 문제를 가볍게 뒤집는 것은 아이들 장난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만약 나라의 큰일이라면 이렇게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야율초재의 거리낌 없는 말에 신하들은 모두들 숨을 죽인 채 식은 땀만 줄줄 흘렸다. 황제에게 바로 대드는 '범상(犯上)'의 죄는 죽음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고타이는 영명한 군주였다. 그는 성을 내지 않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가 귀한 황제임에는 틀림없지만 나라고 전혀 실수하지 않을 수 있는가"라며 넘어갔다.
야율초재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상벌, 명분, 녹봉, 공신, 농업과 누에치기, 조운 등 열 가지 대책을 건의하여 오고타이의 허락을 얻어내기까지 했다.
물론 그의 모든 건의를 오고타이가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고독하게 홀로 맞서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야율초재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밝혔다. 1239년, 오고타이가 참으로 어리석게도 국가의 세금징수를 거상에게 팔아넘기는 일을 저질렀다. 이에 야율초재는 목 놓아 울면서 간청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돌아서서 "백성들의 고통이 시작되겠구나!"라며 탄식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황제에 충성을 다하며 바쁘게 국사를 처리했다.
태종 13년인 1241년 오고타이가 세상을 떠나고 내마진 황후가 권력을 장악했다. 그녀는 많은 금을 뇌물로 바친 적이 있는 오도랄합만이란 자를 총애했고, 많은 귀족들이 그가 두려워 다투어 꼬리를 쳤다. 야율초재는 이들에 의해 배척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것보다 백성들의 고달픔이 더 걱정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직언을 멈추지 않았다.
한번은 내마진이 옥새가 찍힌 백지 한 장을 오도랄합만에게 건네주면서 신료들의 관직을 마음대로 적어 임용하도록 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작태였다. 이 일을 알게 된 야율초재는 내마진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이 천하는 지난 황제들의 천하입니다. 대신의 임용에는 엄연히 조정의 정해진 법규가 있습니다. 법대로 일을 처리하지 않는다면 조정은 금세 문란해집니다. 이런 명령은 받들 수 없습니다!"
야율초재의 강경한 반발에 백지는 다시 회수되었다. 그러나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뒤 내마진은 다시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오도랄합만이 제기한 모든 건의는 영사(令史)가 반드시 기록해두었다가 처리하라. 만약 그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손을 자르겠다!"
야율초재가 다시 나섰다.
"선제께서는 국가의 대사에 관한 일은 이 노신에게 위임하셨습니다. 영사에게 무슨 책임이 있다고 이러십니까. 건의가 합당하면 당연히 실행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죽어도 안 됩니다. 손 잘리는 것쯤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야율초재의 말에 내마진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졌다. 곧 폭발할 기세였다. 하지만 야율초재는 눈 하나 깜짝 않고 계속해서 외쳤다.
"이 늙은 몸은 태조와 태종을 30년 넘게 수행하면서 한 번도 나라에 잘못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황후께서는 어찌 하여 죄 없는 저를 죽이려 하십니까."
내마진은 아무 말도 못한 채 어쩔 줄 몰라했다.
내마진 3년(1243년), 야율초재는 신임을 얻지 못하고 울분 속에 55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간신들이 설치고 조정의 기강이 문란해진 모습에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세상을 등졌다. 원 왕조의 기틀을 놓은 당대 최고의 모략가의 별이 떨어졌다.
인물소개 야율초재
몽고족에 의해 중국 땅에 세워진 원나라는 인류 역사상 미증유의 대제국을 건설했다. 이 대제국의 한 귀퉁이에서 조용히 제국의 구석구석을 어루만졌던 불세출의 모략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야율초재였다.
그는 군주와 신하 사이의 예의범절을 기록한 '편의십팔조'를 제정했으며, 연경 등 10로에 세금을 징수하는 관리를 두어 몽고국에 의례와 법제를 갖추게 했다. 오고타이를 수행하여 금을 멸망시켰고, 금의 변량을 공격할 때는 공자 51대손 공원조(孔元措)를 연성공으로 봉할 것을 요청했다. 편수소·편적소를 설립하여 유가 전적을 인쇄했고, 유명한 유생들을 불러들여 경전을 강연하게도 했다.
1236년에는 전국적으로 조세제도를 정했고 이듬해에는 상벌에 믿음이 있을 것, 명분을 바르게 할 것, 관리들에게 녹봉을 지급할 것, 공신들에게 관직을 내릴 것, 기술자들을 선발할 것, 농사와 누에치기를 장려할 것, 조운을 정비할 것 등 '시무십책'을 올려 대부분 채택되었다.
그는 세 황제를 보필하면서 제도와 문화 면에서 낙후되었던 몽고인 정부를 다듬었고, 여기에 몽고족의 건전한 정신을 가미하여 중국사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게 했다. 송나라를 거치면서 기력을 잃고 쇠잔해가던 중국은 이민족에게서 젊은 피를 공급받고 소생할 수 있었다. 그 수혈조치에 큰 역할을 담당했던 모략가가 바로 야율초재였다. 그는 충성스러웠고, 동시에 지혜로웠다. 모략가에게 필요한 덕목을 고루 갖춘 보기 드물게 뛰어난 모략가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야율초재 [耶律楚材] - 천하를 정벌하고, 지혜로 원나라를 돕다 (5000년 중국을 이끌어온 50인의 모략가, 2005. 10. 20., 도서출판 들녘)
출처 : 5000년 중국을 이끌어온 50인의 모략가
저자 차이위치우 편역 김영수
제공처 도서출판 들녘 http://www.ddd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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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율초재(耶律楚材): 징기스칸은 왜 그를 중용했는가.
1211년, 징기스칸의 철기가 야호령(野狐嶺)에서 금나라군대와 격전을 벌일 때, 야율초재는 겨우 21살이었다. 그는 가슴에 큰 뜻을 품고 황제와 함께 곧 중원으로 쳐들어올 몽골인을 격퇴하려고 준비했다. 그러나, 역사의 저울은 이때 이미 몽골인에게 기울어 있었다. 수십년간의 향락과 소비로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의 자손들이 지탱해온 국가는 사상유례없는 위협을 맞이하게 된다. 야호령 전투에서 금나라군대는 정예병을 모조리 잃어버린다. 심지어 황제 금선종(金宣宗)마저 남으로 도망쳐 변경으로 간다. 일시에 금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공포분위기가 중원대지를 감싸게 된다.
야율초재는 몽골인과 더욱 거리가 가까운 중도(中都)에 남기로 결정한다. 즉 지금의 북경이다. 이곳은 여러 대에 걸친 금나라황제를 안장한 용맥지지(龍脈之地)이다. 그런데 완안가족에게 이제는 버림을 받았다. 1215년, 징기스칸의 대군이 중도를 함락시키고, 백성들이 대량으로 피살되고 포로로 잡혀가며, 대량의 건문을 초토화된다. 문인묵객들은 일찌감치 사방으로 도망쳐서, 중도에 남아있는 금나라사람에게는 확실히 세계종말이 온 것과 같았다.
징기스칸이 입성한 후, 야율초재를 만나자고 한다. 이때의 야율초재는 이미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젊은 세대의 지식인중 아주 높은 지위를 누렸다. 징기스칸도 잘 알았다. 이 문인의 대표를 정복하는 것이 문화적으로 피정복지를 지배하기 쉬워진다는 것을. 어쨌든 역사적으로 유사한 일은 여러번 재연된다. 단지 누구는 죽어도 투항하지 않는 길을 선택하고, 누구는 적극적으로 귀순하는 길을 서낵할 뿐이다. 야율초재의 번민과 고통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야율초재 내심의 갈등은 당시의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후세에서도 왕왕 이를 무시한다. 비록 후세의 야율초재에 대한 평가는 거의 모두 긍정적이지만, 그의 내심의 번민과 시종일관 차지하고 있었던 자아회의, 자아비판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제세의 성취 아래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유가의 요구에 따른 독서인은 충군애민(忠君愛民)해야한다는 이데올로기 하에서, 야율초재의 조상들은 이미 그 정신에 위배했다. 그들 가족은 원래 거란(契丹)의 황족후예이다. 금나라에서 관직을 지낸 것이 첫번째 배반이다. 그리고, 야율초재의 조상들은 금나라황제의 총애를 받았는데, 그는 징기스칸에 투항한다. 이것이 두번째 배반이다. 비록 그의 조상들 및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은 강렬한 충군사상을 지니고 있지 않았지만, 야율초재는 어쨌든 어려서부터 유가정통학설의 영향을 받아, 혼란한 국면에서 어려운 선택을 해야 했다. 그의 내심에 번민이 없었다거나 고통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부득이하게 즉시 하나의 명확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사명지(以死明志)' 즉 죽음을 선택해서 뜻을 세울 것인지, '이생천지(以生踐志)' 사는 길을 선택해서 뜻을 굽힐 것인지. 이 두가지 선택 앞에서 그는 피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이미 그는 은거하는 것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징기스칸이 이미 알고 있었다. 몽골인도 알고 있다. 그들이 정복한 지역을 다스리려면 무력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야율초재는 그들이 반드시 얻어야할 인재였다.
야율초재를 징기스칸이 점찍은 것은 그의 학식이 풍부하고, 외모가 속되지 않다는 것 외에 그는 '잡가(雜家)'라고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제왕의 곁에서는 뛰어난 모사이면서, 길흉을 점칠 수 있는 고인이기도 하다. 매번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 특히 출정하기 전에, 징기스칸은 야율초재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야율초재의 예측이 매번 들어맞았기 때문에, 징기스칸은 그를 더욱 중시하게 된다. 그리고 다른 왕공귀족들에게도 이 이국의 고인을 존중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는 일찌기 후계자인 오고타이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이 자는 하늘이 우리 집안에 내려보내준 것이다. 이후 군국서정은 모조리 그에게 맡겨라."
야율초재는 이런 신뢰에 협력하고 또한 그를 통하여 그의 원래 목적을 실현한다. 야율초재가 징기스칸의 진영에 가입하기로 결정한 것은 그가 이 몽골초원의 효웅이라말로 중국을 통일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천하에 전쟁이 계속되고, 할거분쟁이 계속된다면 더욱 큰 재난을 불러올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징기스칸이 가는 곳은 살륙이 넘치지만, 그는 항상 자신이 천만명의 생명을 결정하는 강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환상을 가졌다.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생각을 바꾸게 하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쓴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이것은 아주 이상주의적인 색채이다. 그리고 권모술수적 사고의 생각이기도 하다. 야율초재는 징기스칸을 따라 서정하면서, 그의 인생의 앞날은 더욱 넓어진다. 그러나 더 많은 불확실성도 존재했다. 화북평원에서 막북초원까지 천산대막에서 서역설령까지 야율초재는 징기스칸의 군대를 따라 천킬로미터이상의 정벌길을 따라다닌다. 그가 본 것은 책에서 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세계가 넓다는 것을 더욱 알게 되었고, 그것은 중원문인의 상상을 훨씬 초월하는 것이었다.
호라즘(花剌子模)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야율초재는 징기스칸의 좌우를 따르게 된다. 미래 중앙아시아지역의 패주지위를 결정하는 전투에서, 피비린내나는 도살이 진행된다. 야율초재는 그렇게 많은 백성들이 칼날아래 죽어가는 것을 차마 그냥 보지 못하고, 더더구나 하중지구가 허허벌판의 황야로 바뀐 광경은 더욱 참지 못한다. 그러나, 이 일대는 자고이래로 사방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곳이다. 암강, 시르강일대에는 비록 대량의 황야가 있지만, 사막오아시스와 강가의 좋은 밭들에는 여전히 많은 인구가 밀집되어 있었다. 유라시아를 차지하는 강성한 제국들은 모두 하중지구를 지배하고 싶어 했다. 그렇게 하여야 자신의 혁혁한 전공을 과시하는게 되는 것같았다. 호라즘은 비록 아케메네스왕조, 알렉산더대제처럼 영토가 광활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한때 잘나간 중앙아시아의 대국이다. 그의 위세는 직접 지중해 동안까지 미칠 정도이고, 이는 야율초재로 하여금 초조와 불안을 가져오게 만든다.
그러나, 이번 혈전은 결국 발생했고, 징기스칸은 3년의 시간을 들여 호라즘의 국토를 붕괴상태로 몰아넣는다. 몽골인은 하중지구의 수십개 도시를 점령하고, 대량의 호라즘인들은 도살당한다. 야율초재는 일찌기 서행도중에 이런 시를 지은 바 있다:
西域河中十詠 서역하중십영 五言律詩
耶律楚材 야율초재 작
?寂寞河中府 적막하중부 사마르칸드의 도시는 적막하지만
連?及萬家 연맹급만가 처마가 잇닿은 집은 수만 채일 듯.
蒲萄親釀酒 포도친양주 그들은 포도로 손수 술을 빚는데
杷欖看開花 파람간개화 扁桃복숭아꽃은 활짝 피었다.
飽啖鷄舌肉 포담계설육 鷄舌 향료로 맛을 낸 고기를 먹고
分飡馬首瓜 분손마수과 말 머리만큼 큰 수박을 갈라 먹는다.
人生惟口腹 인생유구복 인생은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사는 것
何?過流沙 하애과유사 그 때문에 사막을 건너는 데 장애는 없다.
그러나 전쟁이 긴박해지면서 전체 호라즘은 전화에 휩싸인다. 야율초재는 이국풍광을 감상하는 외에 현지의 맛있는 술과 음식을 감상할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이런 생각은 징기스칸과 정반대였다. 이 토지를 정복하기 위하여, 징기스칸은 반드시 그의 몽골장병들과 끝까지 혈전을 벌여야 했다. 호라즘의 국왕 무하마드(Ala al-din Muhammad)가 카스피해의 한 작은 섬으로 도망칠 때까지. 그들은 여전히 잔여세력을 추격하여 호라즘을 멸망시킨다. 야율초재는 비록 항상 징기스칸에게 '호생오살(好生惡殺)'하도록 권했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혀에 연꽃이 핀다고 하더라도 칸의 철석같은 마음을 바꾸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매번 이국에서의 깊은 밤에는 눈앞의 영지에서 빛나는 고독의 불꽃을 본다. 야율초재는 자신이 어려서부터 클 때까지 받은 성현의 가르침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몽골인에게 투항하기로 결정한 것은 구차하게 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더더구나 투기모리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 야만적인 군대를 감화시켜 성현의 도리로 그들에게 문명의 소양을 갖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호라즘에서 발생한 모든 것은 그로 하여금 자아회의의 번민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야율초재가 생각해낸 것은 도교에서 명망이 아주 높은 장춘진인(長春眞人) 구처기(丘處機)였다. 징기스칸도 자주 사람들이 구처기를 추천하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야율초재로 하여금 서신을 써서 구처기를 호라즘으로 불러서 만나고 싶다고 한다. 야율초재는 유불도를 모두 아우르는 통재(通才)이다. 그러나 그의 밑바탕은 여전히 유생이다. 머리 속에는 천하를 다스리는 이치밖에 없었다. 우울하게 뜻을 펼치지 못하고 있을 때, 불학의 수양을 통하여 자신을 조절하는 법을 배웠다. 소위 '이유치세(以儒治世), 이불치심(以佛治心)'이다. 그러나, 그는 도교의 학설에 대하여는 그다지 찬동하지 않았다. 그래도 필요한 존중은 해주었다. 그러므로 구처기가 와서 만나게 되었을 때 주로 그를 통해 징기스칸을 감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칸에게 전쟁을 끝내고, 휴양생식(休養生息)하게 하도록 권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유교와 도교위 발언권쟁탈문제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구처기는 불원만리 머나먼 동방에서 제자와 함께 징기스칸의 장막으로 온다. 그러나 칸은 어떻게 장생불로할 것인지에 대하여만 관심을 두었지, 구처기가 말하는 휴양생식의 이론에 대하여는 완전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호라즘의 전투은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하마드의 후계자인 잘랄 알딘(Jalan al-Din Menguberdi) 국왕은 여전히 잔여부대를 이끌고 싸우고 있었다. 몽골인이 이미 점령한 영토도 안정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몽골대군에서는 이미 전쟁혐오정서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국타향에서 전쟁을 벌이다보니 수토불복(水土不服)의 문제도 갈수록 심각해져서, 심지어 무서운 전염병까지 돌았다. 이에 대하여, 중의약재를 잘 알고 있는 야율초재는 걱정이 많았다. 만일 몽골대군이 계속 인도로 잘랄 알딘의 잔여부대를 추격해가면 아마도 진퇴양난의 처지에 놓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혹서의 기후하에 속속 병으로 쓰러질 수도 있었다. 이전에 취득한 성과마저 지켜내지 못할 수 있는 것이다.
<원사>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황제가 동인도에 도착하여 철문관(鐵門關)에 주둔했는데, 뿔이 하나달린 짐승이 있는데 모양이 사슴같은데 꼬리는 말과 같았고, 색깔이 녹색이며, 사람의 말을 했다. 시위에게 말하기를, '너의 주인은 빨리 돌아가는게 좋다'. 황제는 야율초재에게 묻자 이렇게 대답한다: '이것은 상서로운 동물입니다. 이름은 각단(角端)인데, 사방의 말을 할 줄 알고, 호생오살합니다. 이것은 하늘이 부(符)를 내려 폐하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폐하는 하늘의 원자이고, 천하의 사람이 모두 폐하의 아들입니다. 원컨대 하늘의 뜻을 받아들여, 백성들의 목숨을 살려두고, 바로 회군하시기 바랍니다." 이 철문관의 괴수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다. 관건은 야율초재가 이를 기화로 설득하게 된 것이다. 장생천(長生天)을 믿는 징기스칸은 하늘의 뜻을 알았고 ,반드시 장생천의 안배에 따라야 했다. 그래서 서정대군이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명령을 내린다.
여러가지 고려에서 징기스칸은 마침내 회군을 결정한다. 야율초재의 '호생오살'의 사상이 마침내 작용을 발휘한 것이다. 그리고, 구처기와 징기스칸의 대화로 지금까지 살륙과 전쟁을 멈춰본 적이 없던 총사령관으로 하여금 처음 자연과 시간의 역량에는 항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징기스칸은 마침내 알게 되었다. 구처기가 무슨 장생불사의 신선이 아니고, 자신도 장생불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반드시 남은 얼마 안되는 시간 내에 가족과 국가의 운명을 잘 안배해야 한다는 것을.
그런, 야율초재는 이로 인하여 점차 구처기와 갈라져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심지어 그들이 서역에서 같이 지은 시작도 개폭 삭제하고 수정하게 된다. '장춘진인'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시작은 모조리 바꾸어진다. 야율초재는 구처기에게 도덕수양상의 문제가 있다고 보고, 그가 징기스칸의 종교관용정책을 이용하여 전진교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그 자신이 전진교의 장문인이었다. 이렇게 되니, 구처기는 천하의 신도들에게 호령할 수 있게 되고, 원래 처지가 난감하던 유교와 불교는 더욱 주변으로 밀려나게 된다. 야율초재는 당연히 구처기와 신도들이 이렇게 자신의 신앙을 해치는 것ㅇ르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일이 이 지경이 되다보니 그저 말과 글로 화풀이하는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다행히 징기스칸의 야율초재에 대한 신뢰와 인정은 변함없었다. 1227년, 징기스칸이 서하를 정벌하는 중요한 순간에 사망하고 만다. 그후 신임칸인 오고타이는 그를 더욱 신뢰한다. 야율초재는 오고타이시기에 중서령을 맡는다. 직접적으로 몽골칸의 최고의사결정권내에 들어가게 된다. 심지어 황금가족의 주요구성원들도 모두 존경하고 서로 차지하려는 중요인물이 된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야율초재는 불가피하게 각파세력의 이익다툼에 말려들게 된다. 징기스칸시대에 칸의 말은 일언구정(一言九鼎)의 무게가 있었다. 여하한 내부세력도 모두 그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었다. 야율초재는 단지 칸의 뜻에 따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오고타이시대에 이르러, 서로 다른 파벌의 이익이 점점 분화되기 시작한다. 야율초재는 적시에 유가의 겸공(謙恭)과 신독(愼獨) 정신을 극치로 발휘한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해줄 수는 없었다. 1244년, 권력쟁탈전에 어쩔 수 없이 말려들어, 야율초재는 속을 끓이다가 사망한다. 향년 55세이다.
야율초재의 이상은 자신의 경세지재(經世之才)를 통하여 이 '말등에 탄 민족'으로 하여금 천하를 품고 만민을 보유하는 성현의 나라로 만들고자 했다. 이것은 유가사상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다. 오랫동안 중원에서 살아온 유생과 비교하자면, 야율초재는 확실히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세계에 대한 이해에서 스스로를 속박하지 않았고, 더 많이 이해하고 포용했다. 중국의 유가 지식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천하'에 대한 인식범위는 아주 넓었고, 그런 인식은 시문에서도 나타난다.
학자 왕소운(王篠芸)는 일찌기 이렇게 얘기한 바 있다. 야율초재, 구처기등으로 구성된 '서유문학(西遊文學)'의 집단은 '서역시와 몽공몰왕조의 인식교량'의 관계에 있다. 이는 확실히 당시 사람들에 대하여 '동정의 이해'이다. 특히 야율초재와 다른 수군서행(隨軍西行)한 문인들과 같이 만든 작품은 중원왕조 지식엘리트의 몽골 '천하'국면에 대한 상상과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몽골서정이후에 얻은 새 영토를 중원왕조의 역사와 인식을 결합키려면 시간적 과정이 필요하다. 혹은 이 중앙제국이 일단 형성되면 부득이 어떻게 '상상의 공동체'를 만들 것인가의 문제가 남는다. 매개전파가 낙후했던 당시에, 문학은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러나, 뿌리를 찾아보면, 야율초재의 이상도 좋고, 번민도 좋고, 모두 그의 유가학설에 대한 충정불이(忠貞不貳)의 독신에서 비롯된다. 야율초재가 남긴 시작(詩作)은 적지 않다. 그중 그의 사상을 가장 잘 반역한 문학집 중에 <담연거사문집>이 있다. 그는 일찌기 이렇게 쓴 바 있다: "무릇 문장이라는 것은 기(氣)를 위주로 해야 한다. 호연지기를 가슴 속에 길러서 내뱉으면 문장이 된다. 글을 만들려 하지 않아도 충분히 글이 된다." 야율초재가 흠모한 것은 유가에서 주장하는 호연지기이다. 혼탁한 시대에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군자의 기운이다. 그의 문풍은 방박대기(磅?大氣)하다. 아마도 이런 관념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가 바라던 것은 바로 제갈량, 범중엄같은 광부천하(匡扶天下)의 제세인재(濟世人才)였다. 글을 탁마하는 소재(小才)가 아니라. 이런 관념을 신봉하는 독서인이 언젠가 황제의 부름을 받아 세상의 만민을 수화에서 구제하겠다는 환상을 갖지 않을 수는 없다. 특히 야율초재는 난세에 살면서 눈에 보이는 것은 도탄에 빠진 생령들이다. 그리하여 대의를 세워서 천하를 태평하게 만들겠다는 숙원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가 어려운 선택을 한 후에, 정말 바라던대로 되었을까?그가 지고무상한 영예와 자손이 음덕을 받게 된 때에도, 자신의 고국이 지리멸렬하고 산하가 뒤집힌 침통한 장면을 마음 속에서 지워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유감과 적막을 당시 사람이나 후세인들이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출처 : 중국 역사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