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무진이 태어난 오논강변>
징기스칸의 유년 시절은 불행했다. 그의 본명은 테무진이었다. 그의 이름은 그의 아버지 예수게이가 패배시킨 적장의 이름을 본뜬 것이라 한다.
고단했던 테무진의 유년시절에 대한 기록은 따라서 자세하지 않다. 그의 유년시대는 결코 행복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테무진이 9세 때 몽골 왕족 보르지긴족의 후예인 아버지 예수게이가 그의 부족과 오랜 불화관계에 있던 타타르족에 의해 독살되었다. 아버지 예수게이가 죽자 그의 부족 사람들은 예수게이와 정적인 타이치우트 일가의 사주를 받아, 예수게이의 미망인 호엘룬과 그 자녀들이 지도력을 발휘하기에는 너무 약하다고 생각하고 기회를 이용하여 권력을 찬탈했다.
이로 인해 낙동강 오리알이 된 테무진은 부족에서 따돌림을 당했다. 즉 이로 인해 테무진의 영세한 가문은 유목민의 일상음식인 양고기와 우유는 전혀 먹지 못하고 풀뿌리와 생선으로 연명하는 극심한 가난을 경험했다.
테무진과 그의 가족은 비록 보르지긴족들의 배척을 받긴 했지만 근본이 왕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자라면서 나름대로 상당한 대접을 받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는 아버지 예수게이가 죽기 전에 정혼해준 아내 보르테를 되찾아올 수 있었던 것을 보아도 알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몽골 북방에 사는 메르키트족은 예수게이가 그들에게 빼앗은 여자인 호엘룬을 아내로 삼았기 때문에 테무진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메르키트족은 테무진의 아내인 보르테를 강간했다. 청년이 된 테무진은 아버지 예수게이와 의형제를 맺었던 케레이트족의 왕인 토그릴 완 칸에게 사정을 말하여 보르테를 다시 찾아올 수 있었다.
당시 케레이트족의 왕인 토그릴 완 칸은 몽골 지역 안에서 가장 강대한 통치자였다. 테무진은 결혼기념물로 받은 잘의 모피를 토그릴에게 선물했고 답례로 토그릴 완 칸은 다 자란 테무진의 흩어진 부족민들을 모아주겠다고 약속했다.
그후 토그릴 완 칸은 테무진에게 2만 명의 병력을 제공하고 테무진의 어릴 적 친구인 쟈무카도 설득시켜 병력을 제공하게 함으로써 그 약속을 지켰다. 이로써 테무진은 기적처럼 일어선 것이다.
다 아버지 친구의 덕분인 셈이었다.
강력한 동맹세력의 후원을 받은 청년 테무진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정적인 메르키트족을 패배시켰다. 또한 장래에 자신을 반역할 기미가 있는 부족은 초토화시키는 전략을 세웠다. 그는 배후에 적을 남겨놓는 경우가 절대 없었다.
그리고 메르키트족에 이어 주르킨족의 귀족들도 패배시켰다. 왜냐하면 주르킨족의 귀족들은 테무진의 동맹세력이었으나, 테무진이 타타르족 공격에 나선 틈을 이용하여 그의 재산을 약탈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부족의 귀족들을 모두 처형했고 평민들은 병졸과 노예로 삼았다.
세력이 점점 강성해지자 테무진은 강대한 타타르족과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전투에서 타타르족을 패배시킨 뒤 수레바퀴보다 키가 큰 자들은 모두 죽이고 단지 아이들만 살려두었는데 이들은 나중에 커서 자신들의 신분을 잊고 몽골의 충실한 추종자가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케레이트족의 왕 토그릴과의 동맹관계도 마침내 붕괴되었고 테무진은 그마저도 최고권력을 잡는 데 장애가 된다고 판단하여 제거했다.
테무진은 토그릴을 패배시킨 뒤 케레이트족을 모두 병졸과 노예로 삼았다. 테무진은 저항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옛 정적이나 귀족 들은 하나도 살려두지 않을 속셈이었다. 그 이유는 첫째, 이들의 군대를 빼앗아 자신의 군대로 삼고, 둘째, 몽골 지역의 분열을 가져온 소속 부족 안에서의 충성심을 분쇄하고, 셋째, 모든 유목민 부족을 통일하여 테무진의 가문에만 충성을 바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1206년 모든 스텝 지역을 통치하는 황제로 추대되었을 때 그는 수천 명에 달하는 피복속 부족의 사람들과 그 지역을 자신의 친·인척, 동료들에게 나누어 관리하게 했다. 그리하여 기존 부족·가문의 조직된 형태를 바꾸어 봉건제도와 유사한 조직을 만들어냈다.
메르키트족을 패배시킨 이래 테무진은 스텝 지역의 최고 실력자가 되려는 목표를 세웠다. 부족의 지도자들은 테무진의 주위에 몰려들기 시작했고, 12세기말에 이르자 그들 지도자 가운데 일부는 테무진을 몽골족의 칸(왕)으로 옹립하자고 제의했다. 또한 그 지도자들은 전쟁과 수렵에서 테무진에게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그러나 그들이 내놓은 조건을 보면 테무진에게 믿음직스러운 장수가 되어달라는 것이었지, 그들을 지배하는 군왕(君王)이 되어달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뒤 실제로 일부 부족의 지도자는 그를 배신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테무진은 세력이 미약한 족장에 불과했다. 당시 중국 북부를 통치하고 있던 금(金)나라의 황제는 테무진을 중요하지 않은 인물로 여기고 있었다.
유목민들 사이에 분열을 조장하여 변방의 평화를 유지했던 금은 가끔씩 변방정책을 바꾸어 그들의 동맹세력인 타타르족을 공격했다. 토그릴과 함께 테무진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타타르족의 배후를 공격했다.
금나라 황제는 토그릴에게 왕(王)이라는 칭호를 내렸고 테무진에게는 그보다 낮은 칭호를 내렸다. 실제로 그후 몇 년 동안 금은 테무진의 존재를 전혀 위협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테무진은 스텝 지역에서 자신의 세력을 구축해나가는 일에 몰두했기 때문에 중국에게 그리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테무진은 조직적으로 모든 정적들을 제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친구이며 오랜 동료였던 자무카가 조직한 여러 세력의 연합은 그에게 패배를 거듭하여 그 존재가 없어졌고, 타타르족은 몰살당했다. 토그릴은 자무카의 설득과 아들의 야망과 질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테무진에게 대항하여 싸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토그릴과 케레이트족은 모두 전멸했다.
서부지역의 나이만족 통치자는 몽골족의 강력한 세력에 두려움을 느끼고 자무카와 합동으로 연합세력을 형성했으나, 완전히 패배했고 나이만 왕국은 없어졌다. 한편 변덕이 심한 자무카는 마지막 순간에 나이만족 왕을 배신했다.
이같은 전쟁은 1200년대 초반에 벌어졌고 테무진은 스텝 지역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1206년 오논 강변에서 열린 족장대회의에서 테무진은 전세계의 군주라는 뜻의 징기스칸 즉 "칭기즈 칸"으로 추대되었다.
1206년은 몽골 및 세계의 역사에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 몽골족은 스텝 지역 밖으로 출정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 목표는 바로 서쪽이었다. 징기스칸은 해외정벌을 앞두고 사실상 몽골 자체도 새로운 조직으로 재정비되어 가고 있었다.
즉 몽골족의 야망은 스텝 지역 밖으로까지 거대한 세력을 확장해나가는 것이었다. 칭기즈 칸은 세계정복의 원대한 야망을 실현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새로운 몽골국은 무엇보다도 전쟁을 치르기 위한 조직으로 정비되었다.
칭기즈 칸의 군대는 10진법 체제로 나누어져 엄격한 기강을 유지했고, 보급품과 군비를 갖추었다. 부장(部將)들은 칭기즈 칸의 아들이거나 그에게 절대충성을 바치는 선발된 사람들이었다.
칭기즈 칸은 군사적으로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급속하게 변하는 외부환경에 잘 적응했다. 처음에 그의 군대는 사료가 필요 없는 튼튼한 초식동물인 몽골 조랑말을 타는 기병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군대로 다른 유목민들은 패배시킬 수 있었지만 도시들을 함락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나 곧 몽골족들은 규모가 큰 성읍도 투석기와 쇠뇌 그리고 사다리와 끓는 기름 등을 사용하여 함락시킬 수 있었고 흐르는 강물을 다른 데로 돌려놓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정착문화를 가진 국가와 접촉하게 되면서 칭기즈 칸은 서서히 공격하고 파괴하고 약탈하는 보다 더 멋진 권력의 향유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칭기즈 칸에 대항했던 마지막 몽골 부족인 나이만의 한 신하는 그에게 문화의 유용함을 일깨워 주었고, 몽골어를 문자로 정착시키는 일을 도와주었다.
한때 금나라의 신하였던 또 다른 측근인 야율초재는 농민과 장인들이 생산해내는 물품은 과세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일러주었다.
칭기즈 칸은 당초 중국 북부의 비옥한 전답들을 말의 목초지로 만들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몽골을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시킬 위대한 정복은 아직 수행되지 않은 단계였고 그 주목표로 중국이 떠올랐다.
몽골을 통일한 그는 정착문명 민족에 대한 몽골인 최초의 공격을 시작했다. 서하는 탕구트 유목민들이 감숙, 알라샨, 오르도스에 세운 나라이다. 탕구트인들은 티베트 종족에 속했으며 종교는 불교였고 중국의 영향으로 문화가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되어 있었으며 한자에서 파생된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평원에서 전쟁하는 것에 능했던 몽골인들은 여러 차례(1205-1207, 1209) 서하를 황폐화시켰지만, 수도인 영하를 함락시키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황하의 물줄기를 바꾸어 영하를 공격하려는 시도도 하였으나 그들에게는 댐건설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1206년 반역을 일으켜 서하의 왕이 된 이안전이 자기 딸을 칭기즈 칸에게 바치고 항복함으로써 서하를 속국으로 만들 수 있었다.
결국 칭기즈 칸은 중국 북서쪽 변방지역의 국가인 서하(西夏)와 싸움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고 1211년 중국 북부에 자리잡고 있던 금을 향해 진격했다.
당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이었던 투르크계 웅구트인들이 몽골에서 만리장성으로 가는 산서성 북부의 길을 금을 위해 방어하고 있었다. 1211년 웅구트의 알라쿠쉬 티긴은 금의 정복을 위해 칭기즈 칸에게 이 길을 열어주었다. 그는 북경의 옛 주인이었으나 금에 의해 쫓겨난 거란인들과 연합하여 금나라를 공격하였다.
1212년 거란의 옛 영토인 만주 서남부의 요하에서 야율유가가 반란을 일으켰다. 거란인들은 몽골계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퉁구스계 언어를 사용하는 금의 여진족보다는 몽골과 더 친밀한 유대를 가지고 있었다. 야율유가는 몽골의 도움으로 요양을 빼았고 요나라를 세웠다.
1214년 금으로부터 막대한 금액의 보상금을 받고 철수했다가 1215년 전쟁을 재개하여 베이징[北京]을 함락시켰다. 그뒤 중국 북부의 완전한 장악은 부장인 무칼리에게 맡겨졌다.
이제 징기스칸이 목표는 바로 서쪽이었다. 거기에는 역시 강력한 카라 키타이가 있었다. 바로 시르 다리야강과 발크하쉬호 사이의 지역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곳은 투르크 기마전사들의 강력한 유목국가인 카라 키타이가 있었던 것이었다.
당시 카라 키타이 즉 카라키탄의 왕인 불교신자인 쿠쿠럭이 국민들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슬람교도인 투르크인들을 박해함으로써 국민들로부터 큰 불만을 사고 있었다. 또한 이곳은 징기스칸이 이슬람 제국인 콰레즘으로 진출하는 골목에 있는 나라였다.
따라서 비단길을 활성화시키고 싶었던 징기스칸으로는 이 나라를 정복하고 콰레즘과 직접적인 교역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즉 당시 강력한 제국을 형성하고 있던 화레즘 즉 콰레즘의 왕인 알라 에딘 모하메드와 평화적인 교역관계를 맺기를 바랬던 것이다.
1218년 몽골의 탁월한 군사령관 중 하나인 예베는 2개 사단 2만병력을 이끌고 고려의 국경에서부터 중앙 아시아에 이르는 2천5백마일을 달려 왔다.
아울러 징기스칸이 정벌 대상인 카라키탄에 도착하자 마자 자신이 이곳에 종교의 자유를 찾아주기 위해서 왔노라고 선언을 하였다. 이에 카라키탄의 이슬람교도들은 당연히 징기스칸을 대환영하였고 이에 따라 징기스칸은 불과 몇주만에 거대한 카라키탄 지역을 석권하였다.
그러나 콰레즘은 정벌대상은 아니었다. 그만큼 강력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징기스칸은 당분간 콰레즘과는 친선우호관계를 맺으면서 교역을 하고 싶어했다.
콰레즘의 모하메드는 당시 20만의 병력을 쉽게 모을 수 있는 당대의 보기드믄 대단한 군사지도자였다. 병사들은 모두 강인한 투르크족 기마 전사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징기스칸은 특사를 파견했고 선물공세를 폈지만 그만 실언을 하고 말았다. 그것은 평소에 징기스칸이 모하메드를 자신의 아들로 여긴다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알게 된 모하메드는 징기스칸을 모멸의 대상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런 줄도 모르고 징기스칸은 모하메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중국에서 약탈한 엄청난 희귀품들을 100여마리의 낙타와 대상에 실어 보낸 것이다.
이들 대상들은 시르 다리야강 하류에 위치한 옥타르 즉 "오트라르" 시에서 콰레즘의 영토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런데 그곳의 지도자인 이날치크는 대상을 모조리 붙잡고 그들의 우두머리를 처형해 버렸다.
이런 사실에 대해서 징기스칸은 한명의 콰레즘인과 2명의 몽골인을 모하메드에게 파견하여 이날치크의 처벌을 요구했다. 이에 모하메드는 콰레즘인의 머리를 잘라버렸고 몽골인의 머리를 빡빡 밀어서 돌려보내었다.
이에 화가난 징기스칸은 더이상 참을 수가 없다고 보고 다음과 같은 짧막한 선전포고를 해 버렸다.
"그내는 전쟁을 택했노라. 일어날 일이 일어날 것이고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직 신만이 알 뿐이다."
이에 놀란 모하메드는 북쪽 북경지역인 시르 다리야강을 따라 방어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모하메드의 유능한 아들인 얄라아딘은 사마르칸트로부터 군사증원을 더 받아 방어를 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모하메드는 20만이라는 숫적 우세를 믿고 15만의 몽골군의 공격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징기스칸은 그의 주력부대를 발크하쉬호 동쪽 이르티쉬강에 집결시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수베데이에게 콰레즘 침공 계획을 세우도록 하였다. 한편 징기스칸은 1219년 봄과 여름에 수베데이의 추천에 따라 자신의 큰아들인 요치가 이끄는 대부대를 시르 다리야강 하류로 보냈다. 이때 요치는 옥타르 부근 발크하쉬호의 서부지역을 완전히 초토화 시켜 버렸다.
1220년 초 예베는 카쉬가르에서 약 1만명으로 편성된 2개 사단을 이끌고 서쪽으로 이동했다. 그는 1만 3천피트 높이의 눈이 깊게 쌓인 테렉 고갯길을 통과하여 파미르 고원을 넘어갔다.
이때 몽골의 군대는 보급품을 대부분 잃어버리고 숫한 고생을 하였지만 마침내 페르가나 계곡에 도착을 하였다. 그리하여 시르 다리야강의 남단을 지키고 있던 코칸으로 진격을 하였다.
이곳에서 예베는 모하메드 권력의 양대축인 사마르칸트와 보카라를 위협하게 되었다. 코칸에서 사마르칸트까지는 220마일이고 보카라까지는 100마일의 거리였다.
페르가나 계곡에 나타난 예베는 모하메드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로써 모하메드는 시르 다리야 강 상류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려고 하였다. 그는 이곳만 막으면 된다는 생각을 하였다.
따라서 방어군의 모하메드는 그 지역의 강을 따라 전선을 폈으며 보카라에 4만명의 병력을 집결시키고 사마르칸에도 병력을 추가적으로 배치를 하였다.
여기에 맞서는 징기스칸의 주력 군대는 공격로를 3방향으로 정하면서 다른 곳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하나는 큰 아들 요치가 지휘하는 3개 사단이고 또 하나는 징기스칸의 두 아들인 오제데이와 샤가타이 휘하의 3개 사단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부대는 바로 징기스칸 휘하의 주력 부대로 수베데이가 징기스칸의 참모장으로 있었다.
이미 10만명의 군대는 요치의 선봉으로 사막으로 변한 척박한 땅을 통과함으로써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진격하여 1220년 2월에 시르 다리야 전선의 왼쪽 측면에 있는 옥타라의 평야까지 진출을 했던 것이다.
옥타르를 정복한 후 몽골의 특사를 살해한 그 지역의 통치자인 이날치크를 포로로 잡아 그가 죽을 때까지 눈과 귀에 뜨거운 은을 부어서 처형하였다.
옥타르에서 대부대는 징기스칸의 아들들이 이끄는 2개의 부대는 남쪽으로 다시 방향을 돌려 내려가면서 시르 다리야강을 따라 형성된 전선을 휩쓸어 나갔다. 곳곳의 요새들은 함락이 되면서 예베가 포진한 곳으로 합류를 해 들어가려고 했다.
여기에 예베는 코칸을 점령하고 주력부대와 합류하기 위해 북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하메드는 모든 부대를 시르 다리야 전선에 집중하면서 징기스칸의 군대에 맞서려고 하였다.
따라서 모하메드는 다른 지역들이 몽골의 군대에 유린되는 것을 멀리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한편 징기스칸이 이끄는 주력부대는 왕자들의 부대를 뒤따르지 않고 북쪽으로 숨어버리면서 투르코만의 한 도시인 자눅을 점령하였다.
징기스칸의 주력부대가 자눅을 점령한 것은 키질 쿰 사막을 통과하는 오아시스가 이어지는 길을 알고 있다고 첩보원에게 말한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징기스칸의 4개 사단은 자눅에서 찾아낸 그 안내자와 함께 무사히 키질 쿰 사막을 통과하여 행군했고 마침내 1220년 4월초에 300마일 이상의 사막을 횡단하여 모하메드 군의 배후인 보카라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런 놀라운 몽골군대의 기습적인 출현은 보카라의 수비대를 절망케하는 것이었다. 징기스칸과 수베데이는 일부러 보카라의 성문중에서 하나를 비워놓고 포위하여 공격을 하였다. 그러자 보카라의 주둔군인 캉글리스 용병부대는 무려 2만명이 몽골군을 공격하는 척하면서 문밖으로 돌진하면서 결국 도망을 쳤다.
캉글리스 용병부대는 아랄해를 건너온 용감한 킵차크 종족이었으나 몽골군의 위세 놀라 도망을 치는 형국이었으나 이들은 아무 다리야 강에서 그들을 막아선 몽골군에게 패배를 당하다가 역시 그 다음날에 등장한 뒤따라온 몽골군대에서 거의다 섬멸되었다.
이에 보카라 주둔군의 나머지 병사들은 페르시아 주민들이 아무런 저항없이 성문을 열어주자 밀려들어오는 몽골군대를 피해 성채로 피신하여 저항을 하려고 했으나 다시 몽골의 군대가 페르시아인 민간인들을 선봉에 세워 진격하자 쉽게 허물어졌다.
징기스칸의 부대와 다른 세개의 몽골군대는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보루인 사마르칸트에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놀란 모하메드는 사마르칸트를 5만명의 캉글리스 용병부대에게 맡기고 도망을 가 버렸다.
5만명의 캉글리스 용병부대는 보카라의 용병부대와는 다르게 용감하게 몽골군에 맞서 싸웠으나 역부족으로 패배하였고 절반이 살해를 당하였다. 주둔군의 나머지 2만명의 캉글리스 부대는 콰레즘을 버리고 몽골에서 용병으로 싸우겠다면서 항복을 하였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몽골의 군대는 캉글리스 부대를 섬멸하기 시작하였다.
약 1000명의 주둔군만 야음을 틈타 도망을 갔으며 대부분은 처형을 당하였다. 징기스칸은 그들을 전원 살해한 것은 배신자는 또 배신한다는 말을 남기면서 죽였던 까닭이었다.
도망친 마호메드를 수베데이의 특수 부대는 끝까지 쫓아가자 모하메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카스피해의 어느 섬에서 늑막염으로 죽었던 것이었다.
징기스칸은 뒤이어 아프가니스탄을 조직적으로 파괴하면서 다녔다. 그의 아들인 투루이는 수많은 코살라인들을 죽였다.
한편 요나라는 요나라의 지도자인 야율유가가 1220년 죽을 때까지 몽골의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로서 몽골과 함께 하였다. 이로써 금나라 서북의 웅구트와 동북의 거란은 몽골과 연합하게 되었고 역시 서역 정벌에 군대를 파견하였던 것이다.
1221년 2월 수베데이와 예베는 2만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서부 스텝지역을 2년간 살피면서 정찰을 했다. 정찰은 기습을 의미하기도 했다.
1222년말 아무다리야(고대명은 옥수스) 강과 시르다리야(고대명은 작사르테스) 강 지역에서 화레즘 샤 왕조와 전쟁을 벌였을 때 징기스칸은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즉 이슬람 출신의 측근으로부터 성읍의 의미와 중요성을 배우게 되었다.
이 전쟁에서 몽골족은 끔찍한 야만적 행동을 자행하여 이그만족이라는 악명을 얻게 되었다. 몽골족은 모든 도시를 휩쓸었고, 주민들은 몰살되거나 동족들을 몰살시키는 몽골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도록 강요되었다.
징기스칸이 화레즘 샤를 상대로 무자비한 복수전을 펼쳐나가는 동안 전답과 화원은 황폐화되었고 관개시설은 파괴되었다.
1223년 마침내 징기스칸은 그곳에서 철수했고 1226년과 1227년 서하를 상대로 마지막 전역(戰役)에 나설 때까지 더이상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전투의 실력을 확실하게 보여준 징기스칸은 1227년 8월 18일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