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군이 섬멸당한 토이토부르크숲>
서기 9년 로마군대는 라인간 동쪽의 광대한 지역인 게르마니아에서의 반란에 직면하여 2만 5천명의 군대를 게르만 부족들이 사는 땅으로 진격을 하였다.
이는 로마로서는 사실 바라던 일이었다. 그동안 로마군대는 게르만족들이 몰려 사는 라인강 동쪽으로는 진출을 하지 못한 것은 산림이 많고 늪지도 많고 진군하기가 퍽이나 불편한 이곳을 정복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미 카이사르는 8년간의 갈리아 갈리아 전쟁을 통해 100만명을 죽이고 100만명을 노예로 삼는 커다란 성과를 올리면서 갈리아 지역을 로마의 영역으로 만들었지만 라인강 동쪽의 광대한 게르마니아 지역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는 갈리아 전기에서 이쪽 지역의 지리적인 어려움과 함께 부족의 호전성과 야만성에 포기를 한 탓도 있었다.
카이사르가 본 게르만족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았다.
‘그들 게르만족에게는 우리가 당연시하는 조직된 군대도 없고, 견고한 성채도 없다. 연구를 거듭하여 제작한 무기로 요새에 틀어박혀 항전한다는 개념도 없다.
게르만족은 우리의 침공을 받고 절망한 나머지 여러 곳에 우발적으로 모인 군중이다. 그들이 떼지어 모이는 곳은 우리가 생각하는 도시도 아니고 읍내도 아니다.
몸을 지킬 수 있을 만한 곳이라면 어디든 좋다. 나무들 사이에 숨겨진 골짜기라도 좋고, 낮에도 어두운 숲속의 빈터도 좋고, 추적하기 어려운 늪지대도 좋다.
그들은 그런 곳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도망을 멈춘다. 이런 곳은 토박이인 그들밖에 모른다. 이런 은밀한 장소에 모인 오합지졸이 아무리 공격해와도, 공포에 사로잡혀 무작정 밀어닥치는 그들의 전투 방식으로는 대규모 병력에 피해를 줄 수 없다.
하지만 소규모 부대로 행동할 경우에는 절대적인 주의가 필요하다. 그리고 병사 개개인의 안전을 중시하는 것은 군대 전체의 안전을 중시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병사들은 전리품에 대한 기대에 사로잡히거나 그밖의 이런저런 이유로 본대와 헤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동기에 사로잡히지 않은 경우에도 깊은 숲속을 지나는 좁고 구불구불한 길에서는 대열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전진하는 것조차도 어렵다.
이런 곳에 사는 야만족을 완전히 제압하고 싶으면, 군대 전체를 수많은 소규모 부대로 나누어 산비탈이나 골짜기를 빈틈없이 메우고, 적을 소탕하면서 전진할 수 밖에 없다.
로마군의 전통적인 방식의 군단기를 앞세우고 당당하게 행군하는 방식-을 고집하면, 게르마니아의 지형은 여전히 그들 야만족을 편들 것이다.
지형을 자기편으로 삼은 그들은 소규모 집단이라 해도 매복하여 아군을 기습할 용기는 부족하지 않고, 본대와 헤어진 소구모 부대를 발견하면 포위하여 죽이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이처럼 온갖 어려움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한 아군은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래도 카이사르(카이사르는 자신을 3인칭 단수로 표현했습니다)는 병사들을 죽음으로 몰고 갈지도 모르는 위험에 노출시키는 것에 비하면 병사들의 마음에 복수심을 남기는 것이 훨씬 상책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당시의 게르마니아는 그 면적의 95%가 삼림지역였다. 이런 광대한 삼림지역에서는 로마군의 장기인 대형 유지가 불가능하고, 수많은 소부대로 행군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곳에서 그 지형에 익숙한 게르만족의 매복 공격에 의해 로마군은 큰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카이사르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더이상의 진격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아 정복을 포기하지 않았다.
<황제 아우구스투스...게르마니아를 정복하려고 할 시기는 그의 제위 말년이었다. 로마의 황제중 장수하였고 오랫동안 통치를 한 황제이기도 했다.>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양자인 드루수스와 티베리우스 형제로 하여금 게르마니아 정복을 하도록 지시를 하였다.
그리하여 기원전 15년과 14년에 바바리아에서 형 티베리우스와 같이 전투에 참여한 드루수스는 게르마니아를 평정할 전략을 세웠다.
그 전략은 단순히 라인강 지역에 거주하는 게르만족의 일부인 수감부리족을 침공하여 이기는 것이 아니라 라인강과 다뉴브강 사이에 있는 돌출부를 제거하여 갈리아와 일리리쿰을 잇는 병참선을 짧게 하는 것이었다.
이 전략을 수행하기 위해 드루수스는 먼저 엘베강으로 가서 강을 따라 사는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엘베강과 다뉴브강을 연결하는 전선을 구축할 생각이었다.
먼저 나이 28세인 젊은 드루수스는 라인강 상에 겨울 숙영지 전선을 설치했다. 두 숙영지는 하나는 리페강을 따라 형성되어 있는 골짜기를 봉쇄할 수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인강의 골짜기를 향하는 마인츠에 건설했다.
다음 기원전 12년에 드루수스는 웨스트팔리아를 소탕한 후에 라쿠스 플레보에서 큰 해군 함대를 조직했다. 그리고 엠스강 어귀를 향해 가면서 적을 격파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연이어 웨제르강의 입구로 진격하여 프리시안족과 동맹을 맺었고 해변을 장악한 다음 드루수스는 기원전 11년에 게르마니아 내륙으로 침투하였다.
그는 수감브리족의 지역을 지나 리페 계곡으로 진격하여 웨제르강을 점령하였다. 거긱서 전진을 멈추고 라인강으로 돌아온 다음 기원전 10년 마인츠를 출발하여 차티 지역을 침공하고 마인강에서 웨제르강에 이르는 헤르키니안 숲으로 가서 투랑기아 내 마르코만니족을 습격하였다.
그리고는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서 체루스키 지역을 통과하고 엘베강과 마그데부르그에 이르렀다. 그러나 드루수스는 기원전 9년에 돌아오던 길에 말에서 낙마하여 사망하였다.
그후 10년 이상 로마는 게르마니아를 방치하다가 서기 4년 드루수스의 형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아 정복에 다시 나서게 되었다.
게르마니아에는 4개의 큰 강이 있었다. 라인강, 엠스강, 웨제르강, 엘베강이 서쪽으로부터 있는데 이 강들은 모두 북해와 연결되어 있는 구조였다.
티베리우스는 전군을 둘로 나누어 부장 사투르니누스에게는 라인강 상류에서 강을 건너 동쪽으로 진군하는 길을 맡기게 되었다. 자신도 하나의 진출로를 맡아 양측의 합동로 인해 강의 상류를 모두 제압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티베리우스가 이끄는 제1군은 하류에서 라인강을 건넌 다음, 전투를 계속하면서 북쪽으로 크게 우회하여 동쪽으로 진격하는 길을 택하였다.
네 강의 상류와 하류를 동시에 제압함으로써 북해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해군의 진로를 보장하고, 그에 따라 공동전선을 펼 수 있게 된 육군과 해군을 동원하여 북쪽과 남쪽에서 협공함으로써 게르마니아 전역을 재패하는 것이 티베리우스의 전략이었다.
그 결과 서기 4년 말에 이르면 엘베강을 뺀 나머지 주요 하천이 모두 로마군의 수중으로 들어왔다. 호전적인 부족인 체루스키족도 로마에 손쉽게 항복할 정도였다.
서기 5년에는 로마군이 엘베강에 도달하였다. 당시 종군했던 파테르클루스의 글에는 다음과 같이 당시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게르마니아 전역에서 로마군이 발자국을 찍지 않은 곳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로마인이 이름밖에 몰랐던 많은 부족들이 우리 진영에 투항했다.
항복한 게르만 젊은이의 수는 얼마나 많은가. 키가 크고 금발인 그 젊은이들의 늠름한 체격은 얼마나 볼 만한가.
대열을 짜서 그들을 둘러싸는 로마 병사들의 창들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승자와 패자를 불문하고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한복판에 서 있는 최고사령관에게 쏠려 있었다.
로마 진영에 투항한 부족들 가운데는 지금까지 로마군과 싸워본 적도 없는 엘베강 동족의 랑고바르드족까지 끼어 있었다.
로마 군단과 은독수리 깃발은 라인강에서 동쪽으로 600KM나 떨어져 있는 엘베강까지 포함한 게르마니아 전역을 재패했다.>
결국 드루수스와 티베리우스의 게르마니아 정복은 게르마니아 내부의 큰 강을 중심으로 이동하여 강 유역과 연결로를 장악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로마군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삼림지대 전투를 피하고 게르마니아에 진출할 수 있었으나, 문제는 게르마니아의 대부분을 점하고 있는 삼림지대를 장악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게르마니아를 평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런데도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드루수스와 티베리우스의 거듭되는 승전보에 고무되어 큰 오판을 하게 되었다. 즉 로마군대가 주요 하천을 장악한 것만으로 게르마니아를 정복했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이는 현장을 가보지 않은 황제의 크나큰 실수였던 것이다. 로마 군대는 강을 따라 게르마니아의 교통로만 평정을 하였지 게르마니아의 광대한 삼림지대를 평정한 것은 아니었다.
한편 티베리우스는 서기 6년 게르만족의 한 족속인 마르코마니족과의 전쟁을 위해 북쪽으로 진군하던 중 판노니아와 달마티아(오늘날의 헝가리와 발칸반도)에서 일어난 대규모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갑자기 게르마니아를 떠나게 되고 후임자로 바루스가 부임하게 되었다.
푸불리우스 퀸틸리우스 바루스는 게르마니아에 오기 전에는 시리아 총독을 부임했던 인물로서 행정관리로서는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으나 군사적 재능은 뛰어나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거듭되는 승전보에 이미 게르마니아가 평정된 것으로 오판하고 게르만족을 로마화시키기 위해 평화시대에 걸맞는 인물인 행정관료였던 바루스를 장군으로 임명하여 거칠은 땅 게르마니아로 보낸 것이다.
<바루스의 초상이 들어간 로마의 주화>
로마 역사가인 디오는 바루스는 ‘마치 게르만족을 로마의 노예로 취급하여 명령을 내리고, 점령지역 게르만 여러 부족들로부터 그가 예상한 돈을 요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로마 군인이자 역사가인 파테르클루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을 했었다.
"바루스가 게르만 지역 사령관으로 부임했을 때, 그는 게르만족을 말로 복종시킬 수 있는 종족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게르만족을 칼로 복종시킬 수는 없으나 법으로 진정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바루스가 행한 통치의 문제점은 세금 문제였다.
그는 시리아와 마찬가지로 게르만족에게도 금으로 세금을 낼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게르만족의 적은 생산량과 무역으로는 금으로 세금을 내는 것이 무척 어려웠다.
그 결과 게르만족이 보유했던 귀금속은 계속적으로 고갈되었고 불만이 고조되게 되었다.
또한 게르만족의 족장들은 로마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박탈하고 게르마니아를 직접 지배하려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게 되자 대동단결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로마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게 되고 그 지도자는 25세의 아르미니우스(헤르만)였다.
아르미니우스는 티베리우스 휘하에 있었던 인물로서 기원전 16년에 게르만의 한 부족인 체루스키족의 족장 시기메르의 아들로 태어난 지도자였다.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아를 침공하자 체루스키족은 로마에 항복하였고 그 댓가로 시기메르의 아들인 아르미니우스는 일찍이 로마군에 입대하여 기병대를 지휘하는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가 이미 20대에 들어설 때는 로마 시민권을 얻고 기사 계급으로 승격하였다. 티베리우스가 동유럽의 판노니아와 이탈리아 인근 달마티아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할 때, 아르미니우스는 티베리우스 밑에서 체루스키 부대의 한 파견대로 근무했었다.
그래서 이를 통해 로마군의 전술을 터득하고 로마군의 강점과 약점도 파악하게 되었다. 그런 그가 다시 바루스 본부에 배치되었을 때는 25세였다.
그의 성격은 성급하고 격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역사가 타키투스는 그를 평하기를 ‘굉장한 정신, 그리고 게르만족의 선동자’ 라고 칭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는 바루스에게 충성하는 그의 삼촌 세게스티스와 매우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르미니우스가 세게스티스의 딸 투스넬다와 서로 사랑하여 결혼하려 했으나 세게스티스가 결사반대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바루스가 게르만족을 아우를 수 있는 정말로 능력이 있는 아르미니우스를 장군으로 승격시키지 않고 도시 치안관 정도로만 생각하여 바루스에 대해서도 감정이 좋지 않았다.
결국 아르미니우스는 게르만족을 충동질하여 로마군에 대한 대규모 반란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위치를 찾을려고 했던 것이다.
반란을 준비하고 있던 아르미니우스는 게르마니아를 진군하는 총사령관 바루스에게 안내자로 자처하여 그를 거친 숲 속 깊숙한 곳으로 유인한 후 로마군을 섬멸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이 계획은 비밀리에 진행하도록 했으나 비밀이 누설되어, 세게스티스는 이를 바루스에게 알려주었다. 그러나 바루스는 아르미니우스와 그의 삼촌이 사이가 좋지 않아서 삼촌이 조카를 모함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서기 9년에 아르미니우스의 의도대로 게르마니아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게르마니아 지역 총사령관 바루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로마의 제 17군단과 18 군단 그리고 제 19군단을 이끌고 진격을 하였다. 뒤이어 뒤따르는 보급품을 실은 짐마차가 배후를 받치고 있었다.
이때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로마군이 게르마니아에서 낚시하러 간다는 식으로 사태를 아주 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르미니우스도 바루스를 따라 나섰는데, 그는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전인 저녁때까지 바루스 부대를 따라 행진하였다.
저녁때 다시 세게스테스가 바루스에게 아르미니우스의 반란 징후가 있음을 알렸으나, 바루스는 이를 무시했다.
로마군단은 아르미니우스의 안내로 토이토부르크 늪지대와 삼림지대를 통과하는 중에 길이 구부러져 길게 행군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로마군이 행군하는 길은 주위는 삼림으로 둘러싸여 있는 작은 오솔길이라 로마군의 대열은 자연히 길게 늘어지게 되었고, 주위의 숲에 매복해 있는 게르만족의 좋은 표적이 되었다.
이때 아르미니우스는 바루스에게 게르만 동맹군을 모집하러 간다는 구실을 대고 부하들과 함께 숲속으로 사라졌다. 총사령관인 바루스는 이때까지만 해도 아르미니우스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후 본대에서 떨어진 분견대가 몰살당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바루스는 결국 아르미니우스의 반란을 직감하고 로마군 진지가 있는 알리소로 향하는 도렌고개길로 빠르게 행군하였다.
그러나 비가 내려서 땅이 진창이 되었기 때문에 보급을 실은 짐마차가 느려져서 빨리 행군할 수 없었다.
토이토부르크 숲은 엠스강과 웨제르강 사이에 있는 숲으로 추정되고 있는 곳이었다. 이 지역은 저지대 삭소니 지역과 북 라인 베스트팔이아 지역에 걸쳐 있는 방대한 숲의 삼림이었다.
현재 독일의 서부에 해당이 되는 곳으로 가까이는 도르트문트와 뮌스터 그리고 하노버가 있는 곳이었다.
지도에서 보면 토이토부르크 숲은 하노버와 도르트문트 사이의 방대한 숲이라는 것을 알수가 있다.
당시 게르마니아는 각 지역의 게르만족들이 흩어져 사는 곳이었지만 아르미니우스의 연락을 받은 각지의 게르만족들이 대거 현재 독일의 서쪽에 몰려들어 그들의 원수나 다름이 없는 로마군과 대결을 펼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중심은 아르미니우스가 이끄는 체루스키족과 인근 차티족 그리고 독일의 남쪽지역인 마르코마니족등이었다.
개울과 호수 그리고 늪지대가 숲과 함께 어우러진 이 토이토부르크 지역에서 마침 비가 억수같이 내려서 길이 물러졌으므로 마차 뿐만 아니라 보병과 기병들도 발이 빠져 행군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하늘 높이 솟은 나뭇가지는 비바람에 꺽여서 땅에 떨어져 진로를 방해했다.
로마군은 정상적인 명령하에 나아갈 수 없었고, 마차를 움직이기 위해 무기도 버려두고 애를 썼다. 그러나 바로 이 때 아르미니우스가 이끄는 2만여명의 호전적이고도 황당한 그리고 상상을 초월한 그 거칠은 게르만족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게르만족과 로마군단이 좁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격전을 펼치고 있는 토이토부르크 숲>
게르만족들은 통로를 개척하고 있는 비무장 로마군에게 창을 던지면서 맹렬히 돌진했다. 이에 로마군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나무와 마차등으로 방어진지를 구축하려 하였으나 다음날 아침이 되자 로마군의 마차는 모두 불타버렸고 보급품은 고갈되고 말았다.
로마군은 개활지를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게르만 족들의 유인 전술에 의해 다시 빽빽한 숲과 늪지대로 들어가고 말았다. 여기서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의 좁은 숲속에서 게르만족의 각개 격파 전략에 휘말려 큰 손실을 입게 되었다.
그날 밤을 지나고 다음날 전진할 때도 폭우는 계속 퍼부어졌고, 로마군은 앞으로 전진할 수도 그 자리에서 굳건히 방어를 할 수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더구나 비에 활과 창 그리고 방패 등이 물에 푹 젖어서 제대로 다룰 수가 없었다. 게르만 족들은 혼란해진 로마군을 포위하고 무지막지한 각개전투로 로마군의 전열을 붕괴시켰다.
결국 치열한 각개전투속에 산악에 익숙한 게르만족들은 숲속을 헤매는 로마군을 저격하듯이 하나하나 섬멸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숲속에서 기병의 활약을 포기한 기병대 대장 누모니우스는 도망쳤고 보병뿐인 로마군은 숲과 늪지대에서 대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게르만족들에게 학살당하게 처지가 되었다.
로마군 3개 군단 2만명이 전멸을 당하고 처절한 사투를 벌이던 바루스는 자신의 3개군단이 거의 전멸을 당하는 것을 보고 그 충격으로 인해 거지꼴로 결국 자살을 하고 말았다.
<이런 모습의 바루스는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이 낫다고 생각하고 자살을 택하였다.>
일부 남아 포로가 된 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거나 생매장되고 아니면 신의 제물로 희생되었다.
이때 토이토부르크의 연못은 로마군의 뼈로 가득차서 하얗게 보였다고 한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패하였으나 루키우스 카에디키우스는 알리소 기지를 굳게 지켰다. 그는 철저한 방어진을 펴고 궁수들을 동원하여 주둔지를 공격해오는 게르만족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활을 쏘아 간신히 격퇴하였던 것이다.
칠흑같은 밤이 되어 그는 알리소를 탈출하여 잔류 병력과 다수의 부인과 아이들을 대동하여 페르테라에 도착했다. 거기서 마스프레나스와 2개 군단을 만났다.
로마군은 2만명이 넘게 전사하고 겨우 살아남은 루키우스 카에디키우스를 필두로 소수의 패잔병들이 살아돌아가자 마침내 승리를 확신한 아르미니우스는 그의 부대를 철수시켰다.
아르미니우스는 바루스의 목을 잘라 다른 게르만 부족인인 마르코마니족 족장에게 선물을 하였다. 그 부족의 환심을 사려고 했던 것이다.
한편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충격적이고도 결정적인 참패를 당한 로마군은 그 어마어마한 충격으로 라인강 서쪽과 다뉴브강 남쪽으로 성급하게 후퇴를 해야만 했다.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참패 소식을 듣고 망연자실했습니다.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의 상황을 잘 알수가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만족과 갈리아족이 로마에 대항하지 않을까 하고 공포감을 떨치지 못했다. 로마에는 군에 동원하기에 알맞은 나이의 청년들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35살 미만의 남자들 50명 중 한명, 그리고 35살 이상 되는 사람은 10명중의 한명을 임의로 선정하여 공민권을 박탈해서 군수물자를 징발하고, 급히 동원하였다.
여하튼 그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많은 군대를 동원하여 티베리우스 예하에 보내어 급히 게르만 지역으로 출동시켰다.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리고는 큰 슬픔에 빠졌다.
그는 수개월 동안 머리를 그대로 놔두고 수염을 깍지 않았다. 그리고 머리를 때대로 기둥에 부딪치면서
“바루스! 나의 군단을 돌려줘!”
라고 울부짖으면서 울었다>
그동안 로마군은 거의 패한 적이 없는 무적의 군대였다. 특히 게르마니아를 담당하는 로마군은 가장 강력한 군대였다. 개활지에서는 어느 군대도 당할 수 없는 천하무적의 군대였던 것이다.
전투기계로 불릴 정도로 숙련된 전사들도 게르만족의 야만적인 공격과 전략에 말려들어 최정예 2만명이 괴멸을 당했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로마군 총사령관격인 바루스가 치열한 격전속에 엄청난 참패를 당하고 나서 절망속에 자살을 했을까.
바루스도 진흙탕속에서 가히 거지꼴로 마지막까지 사투를 벌이다가 자살하였다고 한다.
그의 군단 전멸에 대한 보고는 로마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의 한 사람인 아우구스투스가 수치심과 절망을 느끼면서 "바루스, 바루스...짐의 군단을 돌려 달라"고 외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바루스가 패한 지역 사령관에는 티베리우스가 다시 임명되었다. 그는 서기 10년에서 12년까지 엘베강으로 지역을 확장하기 보다는 라인강 연안 방어 시설을 구축하고, 틈틈이 라인강을 넘어 진격했지만 라인강 방어를 굳건히 하는 정도의 게르만족 소탕작전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서기 13년에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에게 최고 통치권을 부여하고, 드루수스의 아들 게르마니쿠스가 티베리우스의 뒤를 이어 게르마니아 로마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이로부터 토이토부르크숲의 대참패이후 6년 뒤에 게르마니쿠스와 그 휘하의 로마군이 유골을 수습하기 위해 토이토부르크숲을 찾아간 상황을 타키투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거기에 선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 6년전의 비참한 기억을 되살리기에 충분했다. 맨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허둥지둥 만든 것이 분명한 울타리를 둘러친 진영이었다.
총사령관 바루스의 막사를 비롯하여 막사를 친 흔적도 있었지만, 3개 군단을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넓이였다. 그곳을 지나 잠시 가자 반쯤 파괴된 울타리와 얕게 판 참호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적의 기습으로 이미 숱한 사망자를 낸 뒤, 진영에서 수비할 수 없게 된 로마 군사들이 최후의 저항을 시도한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이 두 개의 진영 사이에는 이미 백골이 된 시체들이 흩어져 있거나 한 곳에 무더기로 쌓인 채 방치되어 있었다.
그것은 절망에 빠진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려 했거나 한데 뭉쳐서 싸운 상황을 말해주고 있었다. 백골은 부러진 창이나 말의 해골 옆에 흩어져 있었다. 수많은 나무줄기마다 박혀 있는 두개골은 산채로 처형된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숲속에는 수많은 제단이 남아 있고, 게르마니쿠스와 동행한 바루스 군대의 생존자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게르만족은 그 제단 위에서 대대장이나 백인대장들을 마치 산제물로 바치는 짐승처럼 죽였다고 한다.
백인대장 중에서도 제1대대 소속만 일부러 골라서 산제물로 바친 사실을 보면, 로마 군단의 편성을 잘 아는 자의 소행임이 분명하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저마다 군단장이 어디서 전사했는지, 어디서 군단의 은독수리 깃발을 적에게 빼앗겼는지, 어디서 가슴을 찔러 죽음을 택했는지를 이곳에 처음 온 동료 병사들에게 알려주었다.
또한 어디서 아르미니우스가 승리의 연설을 했는지, 포로가 된 로마병사들을 죽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처형대가 세워졌는지, 아르미니우스가 얼마나 오만방자하게 로마군대를 모욕했는지도 알려주었다.
패배한 지 6년뒤 비극의 당에 선 로마 병사들은 흩어진 유골을 매장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어느 것이 로마 병사의 유골이고, 어느 것이 속주 병사의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유골을 수습해서 안식처를 마련해주는 작업을 진행하는 로마 병사들의 마음속에는 더 이상 로마 병사와 속주 병사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느 유해도 자기와 같은 피가 흐르는 동포의 것이었고, 그 동포를 이토록 잔인하게 죽인 적에 대한 분노가 활활 타올랐다.
총사령관 게르마니쿠스는 구덩이에 산더미처럼 쌓인 유골 위에 최초로 흙을 덮었다. 병사들도 그 뒤를 따랐다. 이리하여 죽은 자의 슬픔과 살아있는 자의 고통은 하나로 이어졌다.‘
게르마니쿠스는 서기 16년 웨제르강 북쪽의 이다스타비소 전투에서 아르미니우스가 이끄는 게르만군에 대해 승리를 거두고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빼앗겼던 로마군단기 2개를 되찾아 오는데 성공하였다.
이다스타비소 전투는 토이토부르크에서와는 달리 숲속에서 벌어진 전투가 아니라 평원과 고지대에서 벌인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게르만군 우익만 숲속에 포진했고, 중앙은 고지대에, 좌익은 강 옆의 평원에 포진했다. 개활지에서 주로 벌어진 전투였기 때문에 게르만군의 패배로 끝이 났다.
한편 게르마니쿠스는 아르미니우스의 부인 투스넬다를 그의 아버지 세게스테스의 책략에 의해 붙잡았다. 그녀는 자기 아버지보다 자기 남편의 정신을 투철하게 따랐고 결국 라벤나로 보내졌다.
당시 그녀는 임신해 잇었는데 아들을 거기서 낳았고 아들이 4살 되는 해에 로마 거리를 따라 개선식에 포로로 참석했다.
게르만족의 영웅 아르미니우스는 서기 19년 같은 게르만족에 의해 암살되고 만다. 그러나 이후 로마의 국경선은 라인강으로 확정되고 로마는 라인강을 넘어 동쪽으로 진출하려는 정책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만큼 토이토부르크 전투는 기원전 53년 크라수스가 이끄는 로마군 7개 군단이 파르티아군에게 괴멸당한 카르헤 전투 이후 최대규모의 패전이었다.
당시 로마군은 28개 군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 전투에서 상실한 3개 군단을 회복하는 것은 200년 이후에나 가능했다.
로마군대로서는 정말 전대미문의 완벽한 패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