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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의 길

나를 찾는 『도덕경』

작성자청풍명월|작성시간26.06.05|조회수65 목록 댓글 0

 

 
나를 찾는 도덕경

 

도덕경孔子와 비슷한 춘추시대를 살았던 老子의 말씀을 모은 것이다. 아주 오래된 고전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2세기 면포에 씌어진 것으로 한나라 때 무덤에서 발굴되었었다고 한다. 하지만 노자는 그것을 이라고 하지 않았고, 한참 지난 후에 후대인들이 도덕경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그 도덕경 으로 구분된다는 것은 이 책을 접하고서야 알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道德이라고 배우고, 입에 익은 입장에서 조금은 이상하다 싶다. 그냥 도덕인 줄 알았는데 이 구분된다니 말이다.

 

나를 찾는도덕경이라는 이 책은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청소년 시절부터 문학에 심취해 상을 타기도 했다는 편상범 선생이 대학원에서 철학과 심리학을 공부했으나, 거기서 인생의 해답을 찾지 못하다가 직장생활 초년 시절에 상사였던 위광훈차장으로부터 편선생이라면 좋아할 것 같다면서 건네준 도덕경을 읽고는 그에 심취했고, 이후에 논어』『불경등은 물론 성경까지 탐독하고, 동서양을 대표하는 경전들을 비교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경전 강좌를 열기도 하고, 이제는 독자들과 소통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한다.

 

한참 된 오래전에 도올 선생이 편역한 도덕경을 읽기는 했었어도, 어렵다는 기억 외에는 별로 생각나는 것이 없는데, 이제부터 다시 읽다 보면 도덕경이 내 인생에 어떤 도움을 줄지? 아니면 고민하게 할지? 생각되지만 결과를 제쳐두고라도 다시 책속으로 들어가 보려고 한다.

 

스피노자*라는 꾀 유명한 철학자가 있다.

 

*스피노자(16321677) : 참된 선, 최고의 행복, 예속을 벗어난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추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개체 생명을 소중히 여기면서 종교적 심성을 지닌 동시에 탈종교적 태도를 보여 주기도 한다. 사르트르, 들뢰즈, 베르그송 등 근현대철학자들이 가장 존경하는 철학자이고, 동양철학에도 이해가 깊었다.

 

그는 神即自然, 自然即神이라고 했는데, 노자가 말한 자연을 기독교의 신과 같은 의미로 해석했다. 스피노자가 말한 대로 신과 자연은 스스로 움직이고 스스로 생산하는 자를 말한다. 현대 천문학에서 우주는 스스로 끊임없이 확장하고 있다는 빅뱅 우주론과도 일맥상통한다. 스스로 자기를 조직하는 우주를 기독교에서는 신을 의미하며 그것은 노자가 말한 자연과 같다고 본 것이다. 자연과 도, 신을 본받는 것이 사람이 본 받아야 하는 순리이며, 그래야 평안함에 이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노자의 自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여기서 그 유명한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이라는 말이 나온다. 도덕경1장에 나오는 것으로, ‘도를 도라 하면 이미 도가 아니다. 이름을 붙이면 이미 이름이 아니다.’는 말이다. 이는 데카르트*가 말한 ‘Cogito, ergo sum’이 철학의 출발점이 되는 제1원리로 제시했던 것과 같다. 나는 회의 한다. 고로 존재한다.”이것은 주역에서 말한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것과 같으며, 또 태극 문양의 음양의 경계가 자르는()것이 아닌 물결 문양()인 것과도 통한다.

 

*데카르트(15961650) : 근대 서양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마음과 육체를 엄격히 나눈 심신이원론과 체계적 의심의 방법론 등을 제시했으며 수학적 방법과 기계적 철학에 근거하여, 우주의 거의 모두를 설명하려고 시도했던 과학자이다.

 

최초에 빅뱅으로 우주 만물이 시작되었고, 초신성 폭발로 태양계가 생겼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중에서 지구는 딱 적당한 거리와 23.5도 기울어 춘하추동이 생기고, 생물군이 번성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너와 내가 생겨나고, 서로 만날 수 있게 된 것인데 생각해 보면 그저 신비롭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논리철학자인 비트겐슈타인(18891951)’세상이 어떻게 존재하느냐를 아는 것보다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신비롭다고 했다. 하지만 노자는 그보다 25세기 전에 玄玄又玄 衆妙之門이라고 해, 연거푸 신비롭도다. 신비롭도다라고 하고는 야말로 온갖 신비로운 것들이 들고나는 문이다라고 했다.

 

부처님은 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하여, 천하는 오직 찰라에만 존재하는 세계라고 하였으며,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한 것과 다르지 않다. 라는 것은 하느님과 부처님이 말한 것 같이 모두 내 안에 있는 전일(全一)적 경지고 沒我一體의 세계인 것이다.

 

그 신비로운 도가 어떤 형상이며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해서는 제42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도는 하나를 낳고(道生一),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으며,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을 등지고, 양을 안아서 텅 비어 있는 기운으로 조화를 이룬다.(冲氣以爲和)”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음양의 조화란 나무가 그 뿌리를 음인 땅에 내리고, 잎으로 양인 태양의 기운을 받아서 살아가는 것과 같다. 양기의 대표인 하늘과 음의 대표인 땅이 조화를 이루어 세상 만물이 생겨났다고 한 것이다. 여기서 조화라는 것은 제각각 자신만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그래야 양은 음을 받아들이고 음은 양을 품을 수 있다.

 

그러면 도의 형상은 어떤 모습일까? 14장 첫 구절에 그것을 , , 라고 했는데, 이것은 도의 속성이 일체 모양도, 소리도, 형체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인간의 감각으로는 감지할 수 없다고 한 것인데, 현대 물리학의 양자론을 연상시키는 이 말은 너무 큰 우주와 같은 것은 우리 눈으로 볼 수가 없고, 양자나 중성자처럼 너무 작은 것도 보지 못하며, 지구의 자전과 공전으로 일어나는 너무 큰 소리도 듣지 못하고, 지렁이의 움직임 같은 너무 작은 소리도 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도덕경의 대주제인 執古之道 以御今之有라고 하여, 도의 始原(비롯됨)을 잡으면, 현상을 다스릴 수 있고 能知古始 是謂道紀라 하여, 우주 만물의 시원을 알면 이를 일컬어 도의 근본이라고 한다고 했다.

 

도처럼 아무런 작위를 가하지 않고 저절로 되는 것을 無爲라고 한다. 또 그런 상태를 自然이라 부르는데, 道家의 이른바 무위자연사상은 여기서 출발한 것이다. 37도는 언제나 일부러 하는 일이 없지만, 하지 않는 일이란 것도 없는 것(道常不爲 而無不爲)’이라고 한 것이다. 모름지기 무위하고 또 자연을 법도로 삼는다는 것이다.

 

논어에는 克己復禮’(자신을 이기고 예로 돌아감)가 공자의 중심사상이다. 도덕경에도 돌아간다는 말이 있다. ‘用其光하여 復歸其明이면 無遺身殃하고 是謂習常한다는 말이 그것인데 내면의 밝은 지혜를 써서 깨달음으로 돌아가면 자신에게 재앙을 남기지 아니하니 이를 일컬어 도에 든다고 한다.”는 말이다. 부드러움을 지키며, 현상계만이 아니라 그 근본을 볼 줄 아는 밝은 지혜로 깨달음을 얻으면, 평생 힘들거나 위태로울 일이 없다. 그것은 허물을 남겨 재앙을 초래할 일이 없다는 것으로 이것이 도의 실재라는 것이다.

 

이상은 도의 실체란 무엇인가?를 대략 살펴보았다. 그러면 도는 어떻게 작용하는가?

 

도덕경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 , . 되돌아갈 은 도의 움직임이고, 은 약한 것이 도의 기능이라는 것이고, 무는 세상의 모든 것은 에서 생겨났지만, 그 유는 무에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좀 더 깊은 생각과 탐구가 필요해 보인다. 이라 하여 텅비었다고 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불가의 과 그 의미가 같다. 이지만 아무것도 없다고 이해하면 안 되듯이 眞空妙有 - 진실로 공한 가운데 묘한 것이 있다는 뜻이다. 우주가 텅 비어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 안에 수많은 별들이 생멸하는 것을 떠올리는 것과 같다.

 

天地之間 其猶槖蘥乎(천지지간 기유탁약호)’라고 했다. ‘우주가 대장간에서 불을 가열할 때 사용하는 풀무의 바람통과 같다는 말이다. 도는 풀무처럼 속이 텅 비어 있어서 다함이 없고, 물무 막대기가 움직일 때마다 바람이 나오는 것처럼 운행할수록 많은 것을 생산해낸다는 뜻이다. 또 마지막에 多言數窮(다언수궁)’이라고 했는데, 말이 많으면 자주 막힌다는 뜻이다. 이것은 도덕경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경전에서 교훈으로 나온다. 말이 많아서 좋을 것은 없다. 작위적인 의도로 말을 하면 의도대로 계속 덧붙이고, 꾸미게 되니 자꾸 말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不知守中’, 비어 있음을 지키는 것만 못하다. 은 풀무통 가운데가 텅 비어 있음을 뜻한다. 와 같다.

 

세계 3대 종교(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가 사막의 모래밭에서 태어났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고, 남성적인 모습이다. 그만큼 척박한 환경에서 절대적이고, 강한 모습의 영향으로 전쟁과 생태 파괴 등 부작용이 많다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에 비하면 도덕경은 여성성인 음을 강조한다. ‘谷神不死 是謂玄牝골짜기의 신은 신비해서 죽지 않는다. 이를 현빈이라고 한다. 도덕경6장 구절로 여기서 곡신은 , 하느님을 계곡에 비유한 것이다. 계곡은 텅 비어 있어서 만물을 담을 수 있고, 봉우리를 드러내며 시작과 끝이 없이 죽지 않고 영원하다. 이를 현빈이라고 한다. 현빈은 신묘한 여성성을 말하고 도의 포용성, 적극성, 창조성, 자율성, 개방성을 의미한다.

 

여성성은 천지의 뿌리고, 우주 만물이 도에서 나왔다고 하는 것이며, 세상 만물이 어머니에게서 나왔으니 玄牝之門인 것이다. 곧 천지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계곡처럼 주위를 포용하고, 天命을 수용하면서 순리대로 행한다면 힘들 까닭이 없다. 끊어지지 않는 목화실이 사람의 몸을 감싸는 옷감이 되는 것처럼 오래도록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들을 할 수 있는 것이 곧 도다.

 

도덕경기능 중에서 대표적이고 가장 유명한 구절이 上善若水. 엥간한 대가집 거실에는 이 편액이 다 걸려있다. 흔히 인간은 낮고 궂은일은 누구에게도 확장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물은 대상을 차별하지 않는다. 물은 새싹이나 꽃만 피우는 게 아니라 더러운 걸레도 마다하지 않고 깨끗하게 해준다. 我相이 없으니 죄인의 몸도 씻겨준다. 누가 보든 안 보든 밤낮없이 흘러가고 순리를 따른다. 물은 다투지 않으니 허물이나 탈이 없다. 뒤탈도 없다. 남보다 앞서려고 하지 않고, 남의 일에 간섭하지도 않는다. 물처럼 살면 만사가 순조롭고 평화롭다. 그래서 가장 훌륭한 것은 물과 같다(上善若水)’고 한 것이다.

 

도의 작용에 無用이라고 있다. 쓸모없음으로 쓸모가 생긴다는 말이다. 무가 유의 어머니가 되고, 공이 색의 바탕이 된다고 본 것이다. 이 부분 잘 못 해석하면 , 을 부정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것은 誤讀이다. 있다는 것도 없다는 것도 긍정하지만, 세상이 있음만 강조하다 보니 없음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선후관계를 따지자면 라는 어머니 아래서 라는 자식이 생겼다고 보는 것이다. 초기 우주의 탄생인 빅뱅을 봐도 그렇다. 있음은 이로움의 바탕이 되고 없음은 쓸모의 어머니가 된다는, 참으로 절묘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수레, 바퀴, 그릇, 방 같은 물질세계는 사물의 다양성, 특수성을 지니고 이로움의 도구가 되는 반면에 그 모든 물질세계의 공통점인 빈 공간, 즉 무는 사물의 보편적 특성을 지니며, 모든 쓸모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그것들의 공통적인 본질이 , 하느님이요, 부처님인 것이다. 다시 말해 유무로 말미암아 생기고(有無相生), 空卽是色 色卽是空이니 이 둘은 而二不二, 서로 다르지만 둘이 아니다. 萬物一華. 세상 만물이 다 한 송이 꽃인 것이다.

 

도는 물처럼 순리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옛 성인이 말씀하기를 도에 밝은 이는 어두운 것처럼 보이고 도로 나아가는 이는 물러서는 것처럼 보인다. 도를 평평하게 보고 행하는 이는 울퉁불퉁해 보이고, 높은 덕은 계곡이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고, 아주 깨끗한 것은 더러운 것처럼 보이고, 아주 넓은 덕은 무언가 부족해 보이기도 한다. 굳건한 덕은 건성한 것처럼 보이고, 참된 덕은 변하는 것 같이 보이고, 큰 모서리는 모서리가 없으며, 큰 그릇은 더디게 이루어진다(大器晩成). 大音希聲이고, 大象無形이다. 큰 소리는 잘 들리지 않고, 큰 모양은 형체가 없다. 이처럼 도는 숨어 있어 이름이 없지만, 베풀어 주고 이루어지게 한다.’41장의 말이다. 여러 번 듣고 봤던 大器晩成이 여기에 나온다. 큰 그릇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더디게 이루어진다. 조급할 필요가 없다. 천천히 남겨 두어야 한다.

 

도에 밝은 이에게 그것은 어두운 것처럼 보이고, 도로 나아가는 이는 물러서는 것처럼 보이며, 높은 덕은 계곡같이 텅 빈 것처럼 보이고, 아주 깨끗한 것은 더러운 것처럼 보이며, 아주 넓고 깊은 덕은 부족해 보이고 참된 덕은 변하는 것같이 보이며, 큰 모서리는 모서리가 없는 것처럼 보이고, 큰 그릇은 더디게 이루어진다. 그렇지만 도는 숨어 있어서 이름이 없으며 베풀어 주고, 이루어지게 한다. 깨우친 자는 본인이 깨달았다는 사실을 자랑하거나 떠벌리지 않는다. 구태여 의식하지 않기에 마치 어두운 것처럼 보인다.’

 

지금을 풍요의 시대라고 하지만, 지금 지구촌에는 5초에 한 명씩 기아로 죽어간다. 1년에 약 630만 명, 하루에 17,000여 명이 굶주림으로 죽어간다. 반면에 우리나라에서 먹다 버린 음식쓰레기 처리 비용만 1년에 약 9,000억 원, 하루 26억 원이 든다. 26억 원을 기아 사망자에게 돌려줄 수 있다면 1인당 15만 원씩 지원할 수 있다. 우리나라 음식쓰레기 처리 비용만으로도 전 세계 기아 사망자 모두를 구할 수 있는 5배 금액이다. 그것은 모두가 欲心不知足, 不道에서 생겼다. 大道를 알고 일상에서 실천한다면 영원히 부족함 없이 모두 넉넉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도덕경은 제1장부터 제37장까지를 道經이라 하고, 38장부터 제81장까지를 德經으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전편을 통해 , , 이 혼재되어 있으므로 분류하는 데 큰 의미는 없다. 어쨌거나 도경 마지막 제37장은 도에 대해 설명한 실재를 정리한 장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은 도의 실재는 억지로 하는 일이 없다. 만물은 스스로 변화한다. 억지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생기면 안 된다. 그것은 이름 없는 통나무다. 그 통나무와 같이 아무런 욕심이 없다면 세상이 바르게 될 것이다.’는 것이다.

 

天網恢恢 疎而不失(천망회회 소이부실)’이란 말이 제70장에 나온다. ‘하늘의 그물은 넓어 듬성듬성 성긴 것 같아도 빠뜨리는 것이 하나 없다.’는 말이다. 인도 신화에 나오는 인드라는 인드라 그물망을 말하는 것으로 불법을 지키는 八部神衆 가운데 으뜸인 제석천이 사는 수미산 궁전 위에 걸린 거대한 그물코 하나에 달린 구슬이 서로의 모습을 비추고 있으며, 어떤 구슬 하나가 소리를 내면, 거기에 달린 다른 구슬 모두가 그 울림에 모두 연달아 소리를 낸다. 세상의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상징체다.

 

우주는 인드라 그물처럼 이라는 가로 실과 이라는 세로 실로 아주 촘촘하게 엮어져 거대한 그물과 같다. 세상에는 어느 것 하나 불필요한 것이 없고, 어느 것 하나 제 홀로 움직이는 것이 없다. 모두가 하늘의 그물망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상호작용을 한다. 잘 익은 밤알이 바람에 뚝 떨어지는 것도 우주 전체와 연관되어 우주 파동이라는 그물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가 자연의 섭리에 따라 인간이 나아가야 할 길이고 이정표라면 은 길을 바르게 가는 방법과 바르게 가는 자의 모습이다. ‘도경에서 도의 본체와 도의 작용 원리를, ‘덕경에는 조직과 단체,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역량을 맞추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면서 덕은 사람이나 사물을 통해 발휘되는 도의 작용이므로 도는 덕의 몸이라 할 수 있다고 했다. ‘덕은 도의 쓰임이라는 것이다.

 

공자는 덕을 지닌 자를 君子라고 칭하고 德不孤必有隣(덕불고필유린)이라고 했다. ‘덕 있는 자는 반드시 이웃이 있어서 뭇사람들이 따른다는 것이다. 유가의 근본이념을 가장 명확하게, 일관되게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 대학에서는 이 을 첫째 키워드로 삼는다.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至於至善이라.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있으며, 지극한 선에 머무르는 데 있다고 한 것이다. 대인이 가야 할 길은 공명정대한 덕을 자신의 마음에 밝히는 것이고, 세상에 나아가서는 백성들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며, 지극한 선에 머무르는 것은 사사로움에 머물지 않고 평안을 끼치는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큰 배움(대학)의 목표가 크고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다고 본 것이다.

 

공자가 말한 老莊의 덕과는 다소간 차이가 있다. 를 보는 시각이 서로 다르듯이 도 다르다. 유가에서의 덕은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덕인 仁義禮智信을 갖추는 것이라면 노장의 덕은 우주만물이 운행하는 근본원리를 순리대로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도덕경에서는 도와 덕의 관계를 도는 모든 것을 낳고, 덕이 그것을 길러주니 도를 숭상하고 덕을 귀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덕은 모든 것을 행하였으나, 기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도가 덕을 베풀어서 낳고 기르고 자라게 하고 또 덮어준다. 그것이 만물이 태어나고, 성장하고, 죽어 묻히고 다시 태어나고 이런 주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도와 덕이 만물의 생성, 소멸, 재생, 이 모든 과정을 돌봐주는 것인데도 그 위대한 일을 하면서도 아무런 대가나 의식 목적이 없이 무위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일컬어 是謂玄德(시위현덕)’이라고 했다. 그것은 실로 현묘한 덕가 아닐 수 없다는 말이다.

 

서경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은 피할 수 없다는 구절이 있다. 인디언 설화에도 비슷한 진리를 전하는 설화가 있다. 한 인디언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자신의 감정을 말했다. “애야, 마치 내 가슴 속에서 두 마리의 늑대가 싸우고 있는 것 같구나. 한 마리는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고 화가 나 있어서 폭력적인 놈이고, 다른 한 마리는 사랑과 동정의 마음을 갖고 있단다.”
그러자 손자가 물었다. “어느 늑대가 할아버지 가슴 속에서 이기게 될까요?”할아버지가 대답했다. “내가 먹이를 주는 놈이지.”

 

20세기 아시아의 위대한 지도자 중에 간디가 있다. 이때부터는 아시아, 아프리카의 수많은 나라들이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되는데, 유독 간디가 주도한 인도의 독립운동이 인류사적으로 큰 평가를 받는다. 지배국이던 영국에 대한 증오와 저항이라는 1차원적 투쟁을 넘어 비폭력 저항운동인 사티아그라하 투쟁’(진리의 把持란 뜻)이란 정신운동으로 승화시켰고, 또 반외세 투쟁에 머무르지 않고, 인도 내의 신분차별을 타파하기 위한 내부 투쟁을 병행했기 때문이다. 수천 년 내려온 카스트제도를 극복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간디는 최상위 계급인 브라만 혈통이지만, 자신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것을 포기하고 불가촉천민이 되려고도 했다. 결국 힌두교도에게 암살당했으나 그의 위대한 정신을 기려 마하트마위대한 정신의 지도자 라고 부른다.

 

도덕경81장 중에는 聖人이라는 단어가 31회나 등장할 만큼 노자는 성인을 핵심 인물로 삼은 것을 볼 수 있다. 성인은 도를 터득한 완전한 인격체로 본 것이다. 자의 어원은 귀()와 입() 아래에 가치발()을 한 모습인데, 하늘의 소리를 잘 듣기 위해 까치발을 하고 있는 사람이고 또 그것을 듣고 체득한 바를 세상에 잘 전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문밖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다 알고, 창을 내다보지 않고도 하늘의 도를 볼 수 있으니로 시작하는 제47장은 나가지 않고도 알게 되고 보지 않아도 밝게 식별하며 작위로 무엇을 하지 않아도 모든 걸 이루게 된다.’라고 했다.

 

天長地久라는 홍콩 르아르 영화가 있었다. 1990년대 유덕화, 오천련 주연의 이 영화 제목이 당시에는 도덕경에서 따왔다는 것도, 사람은 유한하지만, 천지가 영원한 것처럼 사랑도 영원하다는 주제를 담고 있는 줄을 몰랐다. 이 영화 주제인 天地가 영원히(長久)한 것처럼 사랑도 영원할 수 있는 까닭은 생에 집착하거나, 욕심으로 생을 도모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도덕경에서 도가 만물을 낳았으되 소유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도덕경에서는 건강을 위해 갓난아기처럼 부드럽게 숨 쉬고 편안하게 살라고 한다. 갓난아기 때는 단전으로 숨을 쉬나, 청소년 때는 배로, 중년때는 가슴으로, 장년은 어깨로, 노년은 목으로 숨을 쉬다가 점점 올라가 얕아지면서 죽을 때는 숨이 넘어간다는 것인데, 숨이 깊을 때는 부드럽고 유연하지만, 숨이 얕아지면 몸이 뻣뻣해진다. 결국 나무토막처럼 굳어져 죽음에 이른다. 나이가 들수록 숨이 깊어지기 어려운데, 그래서 의도적이라도 숨을 깊게 쉬는 양생법이 필요하다. 단전호흡으로 오래 수련한 사람들은 나이를 잊고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결국은 이 숨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나았으되 소유하지 않고, 성과를 내더라도 과시하지 않고, 기르되 기른 것을 내 마음대로 부리지 않으니, 그것을 是謂玄德이라고 한다. ‘현묘한 덕이라는 것으로, 덕을 실행하는 사람을 성인이라고 하고 성인은 최고의 양생법으로 건강까지를 지키는 사람이라고 했다. 더 이상 무엇을 채우려 하지 말라는 노자의 말을 들으면 그대로 두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저자는 제법 긴 노래 가사를 올리고 있는데, 어쩌면 1990년대 전 세계를 뒤흔든 노래가 아닌가 싶기도 한 이 노래는 폴 메트트니가 작사 작곡한 비틀즈의 히트곡 렛잇비(Let it be).

 

When I find myself in times of trouble
힘든 시간 속의 나 자신을 발견할 때면

 

Mother Mary comes to me
어머니 메리가 내게로 와서

 

Speaking words of wisdom
지혜로운 충고를 하죠

 

Let it be
그냥 내버려 두어라

 

And in my hour of darkness
그리고 내 어두운 시간들 속에서

 

the is standing right in front of me
그녀는 내 앞에 서서

 

Speaking words of wisdom
지혜로운 충고를 하죠

 

Let it be
그냥 내버려 두어라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내버려 두어라, 내버려 두어라, 내버려 두어라, 내버려 둬라

 

Whisper words of wisdom
지혜로운 충고를 속삭여요

 

Let it be
내버려 두라고요

 

And when the broken-hearted people
그리고 마음에 상처를 입은

 

Living in the world agree
세상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때

 

There will be an answer
해답이 있을 거예요

 

Let it be
내버려 두어요

 

For though they may be parted there is
만일 세계가 서로 갈라진다 하여도

 

Still a chance that they will see
그들은 서로를 볼 기회가 있어요

 

There will be an answer
대답이 있을 거예요

 

Let it be
내버려 두어요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내버려 두어요, 내버려 두어요, 내버려 두어요, 내버려 두어요

 

Yeah, there will be an answer
그래요, 대답이 있을 거예요

 

Let it be
내버려 두어요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내버려 두어요, 내버려 두어요, 내버려 두어요, 내버려 두어요

 

Whisper words of wisdom
지혜로운 충고를 속삭여요

 

Let it be
내버려 두라고요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내버려 두어요, 내버려 두어요, 내버려 두어요, 내버려 두어요

 

Whisper words of wisdom
지혜로운 충고를 속삭여요

 

Let it be
내버려 두라고요

 

And when the night is cloudy
그리고 구름 낀 밤이 찾아올 때에도

 

There is still a light that shines on me
아직 나를 비추는 빛이 있어요

 

Shine until tomorrow
내일까지 비추어 줘요

 

Let it be
그냥 내버려 두어요

 

I wake up to the sound of music
내가 음악 소리에 일어나면

 

Mother Mary comes to me
어머니 메리가 내게로 와서

 

Speaking words of wisdom
지혜로운 충고를 하죠

 

Let it be
그냥 내버려 두어라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yeah, let it be
내버려 두어라, 내버려 두어라, 내버려 두어라, 내버려 두어라

 

Oh, there will be an answer
대답이 있을 거예요

 

Let it be
내버려 두라고요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yeah, let it be
내버려 두어요, 내버려 두어요, 내버려 두어요, 내버려 두어요

 

Oh, there will be an answer
대답이 있을 거예요

 

Let it be
내버려 두라고요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yeah, let it be
내버려 두어요, 내버려 두어요, 내버려 두어요, 내버려 두어요

 

Whisper words of wisdom
지혜로운 충고를 속삭여요

 

Let it be
내버려 두라고요.

 

이미 충분히 공을 이루고, 이름을 얻었으면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다. 花無十日紅이고, 달도 차면 기운다. 인간의 공명도 다르지 않다. 이를 알면 자리에 연연하지 않을 것인데, 내일, 모레 6.3 있을 지방선거에서는 내가 꼭 당선되겠다고 욕심을 부린다. 욕심을 거두어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에 맞다. 그러면 하늘에 허물을 남기지 않고, 자기 몸도 마음도 상하지 않게 된다. 그것을 제9장에서 功遂身退 天之道라 한 것인데, ‘공을 거두었으면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라는 것이다.

 

공자는 논어》〈학이편에서 人不知而不慍 이면 不亦君子乎라고 했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화내지 않으면 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라는 말이다. 인성욕구에서 해방된 자를 군자라고 했으며, 또한 부처님은 법구경에서 譬如厚石 風不能移(비여후석 풍불능이) 智者意重 毁譽不傾(지자의중 훼예불경)’큰 바위가 바람에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지혜로운 사람은 뜻이 굳세고 무거워 남의 비방이나 칭찬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부정적인 생각을 조절하고 이기는 방법이 있을까? 있다! 첫째 부정적인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미리 알아차리는 것이고, 둘째 냉철한 마음으로 그것을 지켜보는 것이고, 셋째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는 것이다.

 

장자소요유(逍遙遊)에서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3무가 필요하다고 했다. 無己(아집이 없음), 無功(성과에 대한 욕심이 없음), 無名(명예에 대한 욕심이 없음)의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 세 가지를 모두 떨쳐버리고 무의 경지에 들어간다면 비로소 진정한 절대 자유를 만끽할 수 있고, 그것이 바로 도의 경지라는 것이다. 잘 만들어진 옷은 솔기를 남기지 않는 것처럼 말과 행동에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 최선의 것이다. 말을 독점하면 적이 많아지고, 말을 잘 들을수록 내 편이 많아진다. 못소리 톤이 높아질수록 뜻은 왜곡되고, 오히려 낮은 목소리에 힘이 있다. 칭찬에 발이 달려 있다면 험담에는 날개가 달려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공자는 중용에서 도가 행해지지 않는 이유를 지혜로운 자는 지나치고, 어리석은 자는 미치지 못한다. 또 어진 자는 지나치고, 어질지 못한 자는 미치지 못한다.’라고 했다. 도마복음에는 모든 것을 잘 알되, 자신에 대한 지혜가 부족한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자이다라고 했다. 또 불교에서는 무명은 무엇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모르는 것을 말함이다.’고 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한 것이아니겠는가? 부처님이 고행을 선택한 것은 나를 의심하면서부터다. 나를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성찰해 가다가 (ego, 我相)’라는 것이 참나(眞我)’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절대적 존재이며 영원불변의 참나를 깨닫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成佛, 부처가 된 것이다.

 

도덕경44장에는 그리하여 지족불욕 지지불태(知足不辱 知止不殆)’라고 했다.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한 것이다. 지족의 반대가 不知足인데, 이것은 명성을 좇고, 재물을 탐하고, 지나치게 애착하고,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는 것은 지족이 아니라는 것이다. ‘천명에 따라 자기 처지에 만족할 줄 알고, 적당한 때에 그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위태롭지 않게 된다.’이 두 구절을 명나라 감산스님(15461623)천고의 깊은 어둠을 깨치는 것이요, 명의 편작도 못 고쳤다는 고황병을 고치는 묘약이라고 극찬했다.

 

도덕경이라서 그런지 생의 길, 덕의 길을 이야기하면서도 성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 다만 에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으려면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을 여의고, 바로 지금을 사는 것이라고 했는데 생명 사상인 한살림운동을 주창했던 무위당 장일손 선생도 어제도 내일도 없이 영원한 오늘을 사는 것이 삶에 대한 집착과 허무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라 했다. 우리는 쉽게 내일을 위하여!’라고 건배사를 하기도 하는데, 그 말에는 사실은 엄청난 함정이 있다. 오늘을 희생하면서 적당히 살아도 된다는 것은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있는 건 지금뿐이고, 따로 내일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공자가 모아 편찬한 시경에는 모두 305편의 시가 실려 있다. 이들 시에는 사특함이 없다고 하여 思無邪라고 공자가 말했다. 같은 뜻은 아니지만 도덕경에도 어감이 비슷한 말이 있다. ‘爲無事 事無事가 그것이다. ‘하지 않음으로써 함으로 삼고, 일 없음으로 일 삼는다.’는 말이다. 無爲가 가장 큰 힘이고, 無事가 가장 큰 일이라는 것인데 그것은 백수건달처럼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놀라는 것이 아니다. 세상일이란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나를 괴롭게 하고 안 해도 되는 일을 만들고 내 꾀에 내가 넘어간다. 그런 것을 안다면 그것이 無爲이고, 無事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우리 몸에서 에너지를 가장 많이 쓰는 기관이 뇌다. 뇌가 23%, 근육이 22%, 간이 20%를 쓴다. 또 뇌의 산소 소모량이 전체의 1/4이 되고, 포도당도 70% 가량을 소모한다. 뇌는 불필요한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기 위해 반복되는 일에는 습관을 만들어 몸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둔다. 뉴런이라는 네트위크로 구성된 뇌는 성장하면서 학습하고, 경험하면서 상호 연결성을 갖는다. 연결된 뉴런은 경험을 인지하고는 저장해 두었다가 같은 일이 반복되면 동일한 반응과 행동을 나타낸다. 그것을 타성 혹은 관성이라고 하는데, 이런 습성 때문에 뇌는 변화를 싫어하고 도전에 두려움을 갖는다. 이런 뇌의 인지적 구두쇠 경향可塑性으로 극복할 수 있다. 뇌는 평생 굳지 않는다. 말랑말랑하다. 죽을 때까지 계속 변화한다. 어떤 자극을 반복적으로 주느냐 마느냐에 따라 그 작동방식이 달라진다. 인지능력과 문제해결 능력을 담당하는 전두엽이 강화되도록 반복해 자극을 주게 되면, 마음 근육도 강화된다. 선천적으로 신체가 약한 사람도 꾸준히 운동을 계속하면 건강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과 같다.

 

불교에서는 佛法僧이라는 3가 있고, 기독교에는 사랑·믿음·소망을 3보로 친다. 노자도 도덕경에서 3보를 말했다. ‘一曰慈, 二曰儉, 三曰不敢爲天下先이라고 한 것이다. 셋 다 눈에 보이거나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사람들은 이것은 가 아닌 것 같다고 한다. ‘덕은 착한 사람을 착하게 대하고 착하지 않은 사람도 착하게 대한다.’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 것과 그 맥이 같다. 성철스님이 말했던 용맹 가운데 가장 큰 용맹은 옳고도 지는 것이고, 공부 가운데 가장 큰 공부는 남의 허물을 뒤집어쓰는 것이다.”고 한 말씀과도 통한다.

 

자비, 즉 사랑하기 때문에 용감할 수 있고, 검소함으로써 부자가 되고, 마음이 넓어질 수 있다. 검소하면 지금의 처지에 만족하고, 사치하면 늘 부족하고 좁아진다. 不敢爲天下先(불감위천하선)은 세상에 앞서서 나가지 않기에 首長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발짝 뒤로 물러나 본질을 보게 되면 때가 되어 무르익고 혜안이 생기고 알려져서 자연스럽게 추앙받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오늘날의 세상과는 정반대다. 내가 아니면 안 되고 누가 부르지 않아도 자꾸 앞서 나가고자 하는 것이 요즘 사람들이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이 있다. 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먼저 마음을 정제하고 다짐한다. 9층 탑도 한 삽의 흙이 쌓여 올라가고(九層之臺 起於累土), 천리길도 한 걸음을 내딛는 데서 시작한다.(千里之行 始於足下). 이 말들은 도덕경에 나오는 사자성어다. 혼란스럽기 전에 미리 작은 것부터 준비하고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도덕경마지막 구절인 제81장은 도와 덕의 원리와 그것을 실천하는 성인의 모습을 종합해 정리하고 있다. ‘信言不美 美言不信은 믿음직한 말은 아름답지 못하고, 아름다운 말은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것이다. ‘聖人之道 爲而不爭은 성인의 도는 무엇을 하되 다투지 않는다는 말이다. 노자가 말하는 大道를 알고 덕을 몸소 실천하는 성인이 된다면 아마 싸움질하지는 않을 것이다. 큰 덕을 지닌 리더라면 가정과 단체는 물론 나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 마지막에 살펴볼 것은 지도자론이다.
 
노자는 지도자를 4단계로 구분했다.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아랫사람이 그 지도자의 존재 자체를 잘 모르도록 통치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다음은 친근감을 주어 백성들이 칭송하는 지도자라고 했다. 그다음은 두려워하는 리더라고 했는데, 이는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는 카리스마 있고 능력있는 지도자를 리더로 인식됐던 것이지만, 현대는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내적 동기를 유발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마지막 최하위 지도자는 백성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자라고 했다. 원칙없이 거짓말로 신뢰가 땅에 떨어진 지도자를 말하는 것이다. 정치의 다스릴 는 물결을 다스려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하는 데서 유래했다. 治水와 같이 가치와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정치인의 덕목이다.

 

노자는 공자가 그렇게 부르짖었던 를 버리면 백성이 저절로 효성과 자애를 되찾는다고 했다. 기교를 끊고, 이익을 보려는 마음을 버리면 도둑이 없어진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그것은 겉을 꾸미는 일에 지나지 않으므로 충분하지 않다고 하고 순수함과 순박함을 지키면서 를 적게 하고 욕심을 줄이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안락하게 할 수 있다고 했다. ‘少私寡欲는 적게, 욕심을 줄이라는 말인데, 이것은 모든 종교에서 강조하는 덕목이다. (ego, 我相)로 인해 우주 만물의 실재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사와 아상과 을 여의어야 실재를 그대로 볼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불교의 수행법 중에 돈오점수와 돈오돈수가 있다. 頓悟, 즉 깨달음은 점수로 즉, 점진적으로 깨달음을 얻거나 단박에 깨달음을 얻는 돈수라는 것인데, 이전의 나쁜 버릇은 일시에 제거되기 어려우므로 점차 닦아나가 온전한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 보조국사 지눌이 주창한 돈오점수의 핵심이다. 이는 도덕경의 흰 명주와 순박한 통나무 같음을 깨닫는 見素捕縛과 같다. 頓悟, 본바탕으로 돌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을 버려야 하는 少私寡欲漸修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회남자에는 塞翁之馬에 관한 고사가 나온다. 지금 잘 됐다고 좋아할 일도, 지금 나쁘다고 실망할 필요도 없다. 언제나 옳은 것은 없다. 올바른 것이 변해서 이상한 것이 되기도 하고, 선한 것이 변해 악한 것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도 吉凶禍福正邪善惡을 절대적인 상황으로 인식한다. 이런 미혹함은 그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다. 성경에도 아담이 미혹에 빠져 善惡果를 먹으면서 시작되었다. 진시황의 죽음으로써 진2(호해)와 부귀영화를 꿈꾸던 李斯라고 있다. 그는 逐客令을 반대하는 글로 천하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고. 결국 진시황의 측근이 되었다.

 

진나라는 이방인들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들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천하통일을 이룰 수 없다고 한 이사는 諫逐客書라는 상소를 올린다. 이 상서에서 이사는 山不讓土’, 태산은 흙 한 줌도 마다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높은 것이고, 海不讓水, 강과 바다는 도랑물과 개천물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였기에 그렇게 깊은 것입니다. 라는 명언을 남겼다. 훗날 이 말은 대망을 가진 사람이 인재를 포용하는 뜻으로 쓰였다.

 

柔弱함이 剛强을 이긴다는 것은 도덕경의 키워드이다. 68장 첫 구절에 人之生也柔弱 其死也堅强이라고 했다.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약하다가 죽으면 단단하고 강해진다는 뜻이다. 모든 생명은 태어났을 때는 부드럽고 약하다가도 죽을 때에는 마르고 단단해진다. 생명만 그런 게 아니다. 사상과 종교도 유연하고 약하면 다른 사상과 종교를 포용하는데 반해, 굳고 강하면 이단시하거나 배척당하기 십상이다. 아집이 강하면 굳고 강해진다. 군대 또한 그렇다. 강하면 이기지 못하고, 나무는 강하면 꺾인다. 강한 비바람이 여리고 약한 나무를 휘어졌다가도 되돌려놓지만, 강한 나무는 꺾이고 부러진다.

 

부지런히 그리고 열심히 달려왔다 싶다. 이제 노자가 꿈꾸었던 세상을 돌아보는 것으로 도덕경은 끝난다. 도덕경은 두 주제, 즉 도경과 덕경으로 나뉘고, 도는 본체와 그 작용, 덕은 본체와 성인, 리더의 역할로 나누어져 있다고 이 책의 편자는 보았다. 우주 만물이 어디서 비롯되고, 어떻게 존재하며, 어떤 방식으로 운용되는지는 도론이고, 그 도의 작용이 사람이나 사물을 통해 어떻게 발휘되는지는 덕론이다. 또한 도를 온전히 터득하고 덕을 실천해가는 사람의 모습은 성인이었으며, 도와 덕을 다스리는 모습인 리더의 역할은 지도자의 길이다.

 

큰 도(大道)와 참 덕(常德)을 실천하는 사람(聖人)이 많은 나라, 성인이 지도자가 되어 無爲로 다스리거나, 백성이 지도자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고 含哺鼓腹(배블러 등 두드리는)하며 살아가는 나라, 그런 유토피아 모습을 제80장에서 그렸다. ‘나라는 작고 백성은 적어서 열이나 백 사람 몫을 해낼 인재가 있어도 쓸데가 없고, 백성들에게 죽음을 중히 여기게 하여 멀리 돌아다니지 않게 하고 그 풍속을 즐기게 한다 . 백성들은 늙어서 죽을 때까지 서로 오고 가는 일이 없다.’고 하고, 도와 덕의 실천으로 백성들이 자족하며 산다고 하였다. 춘추시대 100개도 더 되는 나라 모든 군주가 세력을 키우기 위해, 영토를 확장하고 인구를 늘이는 시기에 노자는 상식에 어긋나는 작은 나라 적은 백성을 이상향으로 보았다. 이웃 나라가 서로 바라보고 닭과 개 울음소리가 서로 들리지만, 백성이 늙어서 죽을 때까지 서로 오고 가는 일이 없이 행복하다고 한 것인데, 이는 유가에서 생각한 대동세계와는 거리가 멀다.

 

유가의 이상향은 예기에 나오는데, ‘대도가 행해지는 세계에서는 천하가 공평무사하게 된다. 어진 자를 등용하고 재주 있는 자가 정치에 참여해 신의를 가르치고 화목함을 이루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부모만을 친하지 않고 자기 아들만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나이든 사람이 삶을 편안히 마치고, 젊은이들은 쓰이는 바가 있으며 어린이가 안전하게 자랄 수 있고, 홀아비 과부, 자식 없는 노인, 병든 자들이 모두 부양되며 남자는 직분이 있고, 여자는 모두 시집갈 곳이 있도록 한다. 땅바닥에 떨어진 남의 재물을 가져가려 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책임져야 할 일은 자기가 하려 하지만, 반드시 자기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에 간사한 모의가 사라지고 도둑과 폭력배들이 생기지 않는다. 문을 열어놓고 닫지 않으니 이를 대동이라한다.’고 한 것이다.

 

유가는 이렇게 백성들을 인의예지신으로 교화시켜야 한다고 여겼지만, 도가는 지도자가 인위적인 를 버리고 도와 덕으로써 다스리면서, 백성들이 원래 가지고 있는 순박한 마음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했다. 어쩌면 둘 다 궁극적 목표는 대동소이한지 모른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의 모습과도 비슷하고, 예수님과 부처님이 그렸던 현세에서의 천국과 극락의 모습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동서고금의 성현들이 한 목소리로 말한 사람의 미혹함이 참으로 오래되었구나’(人之迷 其曰固久)라고 한 노자의 탄식은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은나라 탕왕이 세숫대야에 새겨두고 매일 아침 세수할 때마다 다짐했다는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을 새김 해 본다. 진실로 새로워지려면 날로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 - 6.5 09:00

신평 영훈 아제 공장에 있던 것 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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